"그럼 약혼 안 하면 안돼?" 고은영이 물었다.어차피 서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굳이 약혼을 강행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러자 안지영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뭐라고? 약혼을 하지 말라고?""결혼이든 약혼이든 네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랑 해야지. 너 그 남자 관심도 없다며.”"은영아, 너 장씨 가문이 어떤 집안인지 알기나 해?"영문을 모르는 고은영은 고개를 저었다."모르지.""그 넷째 도련님은 배준우보다도 더 무서운 사람이야. 심지어 내가 주동적으로 찾아가서 인사를 한 사람이라고. 지금 강성 전체에 우리의 결혼 소식이 퍼졌는데 내가 이제 와서 후회하면 그 남자가 분명히 날 가만 두지 않을거야.” "뭐라고?"이 말을 들은 고은영은 크게 놀랐다.이게 대체 다 무슨 소리야?"그때 사실 배준우의 압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하기로 결심하긴 했지만, 이제 와서 보니까 장씨 가문이 더 무서운 집안이더라고."그리하여 지금은 감히 후회할 자신도 없었다.게다가 안지영은 그 누구보다도 장선명이 가장 두려웠다. 배준우라는 산을 이제야 겨우 넘었는데, 장선명이라는 더 높은 산이 그녀를 맞이하고 있었다. 잔뜩 불안해하는 안지영의 모습을 본 고은영은 더더욱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미안해. 이 모든게 다 내 탓인 것 같아.""바보야,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멍청했던거지!"사실 안진섭이 이 결혼을 반대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안지영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아버지 앞에서 자신이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면 괜히 걱정만 시킬 것 같아 그게 신경이 쓰였다.안지영이 정말로 약혼을 취소하기라도 한다면 안진섭은 무조건 그녀를 해외로 도피시킬 것이다. 그리고 혼자서 장씨 가문과 맞설게 뻔했다!여태 자신을 키우느라 온갖 고생을 하신 아버지한테 미안했던 그녀는 차마 더이상 애를 먹이고 싶지가 않았다.그리하여 결국 장씨 가문과의 결혼을 강행하려 한 것이다. 기껏해야 3년, 이를 악물고 버텨내고 싶었다."근데 이렇게 정 없이 시작
단지 받는 월급만큼만 일을 해줄 뿐, 자신의 몸을 팔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이렇게나 막무가내로 야근을 하게 되자 순간 괘씸한 기분이 들었다.......한편 위층에서 방금 회의실에서 걸어나오던 배준우가 량천옥이 그를 찾아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지금 어디 있어?"진청아가 대답했다."사무실에 계십니다.""..."곧이어 배준우는 사무실로 향했다.조용한 분위기를 보니 웬일로 량천옥이 여태 얌전히 기다리기만 한 듯 했다. 전에 일했던 비서들은 다들 하나같이 량천옥의 기세에 눌려 그녀를 통제하지를 못했다. 그런데 뜻밖의 모습에 배준우는 내심 새 비서가 만족스러웠다."나오라고 해." 배준우는 의자에 앉아 물을 한 모금 마셨다.진청아는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그러더니 갑자기 뭔가가 떠올랐는지 얘기를 꺼냈다."아, 전해드릴 소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무슨 일인데?""방금 사모님께서 직접 정유비를 해고하셨습니다."정유비? 정씨 가문의 그 딸 말이야?배준우는 정유비에 대해서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곁에서 그렇게 오래 일한직원이 없긴 했으니까.그런데 지난번에 이미 해고됐는데 왜 아직도 회사에 있었던거지?"어떻게 된 일이야?" 배진우가 물었다."정유비가 몰래 고은지 아가씨의 뒷조사를 지시하다가 사모님한테 들켜서 두 분이 갈등이 있었는데, 그때 마침 량천옥 사모님이 들어오셨거든요.” 진청아는 방금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그녀 또한 고은지의 정보에 대해서 정유비가 대체 어디에서 알아왔는지 가늠이 가지도 않았다.어떻게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일 같았다.만약 정말 사생활이 유출되기라도 한다면 고은지와 그 아이의 생활은 모두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그리하여 고은영도 조급한 나머지 아예 정유비를 해고시킨 것이다.이 말을 들은 배준우는 안색이 매우 어두워졌다. "그래, 해고시켜!"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나태웅과 연관되는 일이란걸 예상할 수가 있었다.제 맘대로 직원을 다른 부서로 옮긴다고? 정말 겁도 없네!
그렇게 정유비는 이번 일을 계기로 제대로 해고될 위기에 처했다.하필 회사 대표의 부인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그녀는 더 이상 회사에 계속 머물 수가 없었다.곧이어 인사팀 사무실에서 나온 그녀는 화를 참지 ㅁ나태웅에게 전화를 걸었다.“저 좀 도와주세요. 저 이렇게 쫓겨나가고 싶지 않아요!"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던 정유비는 나태웅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나태웅은 지금 회사에 없긴 했지만 배준우와 친분이 있기에 그가 도와줄 수 있을거라 믿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혀 도와줄 의향이 없어보였다."이번엔 널 도와줄 생각이 없어!"말을 마치자마자 나태웅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정유비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믿기지 않는 듯 했다.설마하는 마음에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나태웅은 받지 않았다.말 한마디만 해주면 되는 일인데 왜 안 도와주려는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은영!"분노한 정유비는 이를 갈며 고은영의 이름을 외쳤다.이때 재무팀 직원이 찾아왔다."월급은 다 정리됐으니 와서 서명하세요."지금 모든 사람들은 그녀가 빨리 떠나길 기다리고 있었다.정유비는 마음속으로 당장이라도 난동을 부리고 싶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단걸 잘 알기에 달갑지 않아도 서명을 해야만 했다.......한편 대표실에서는 량천옥이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난 이번 천의의 일이 얼른 원만히 끝났으면 해.”배준우는 그녀의 마음을 간파하기라도 한 듯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아무 말 없는 배준우가 답답했던 량천옥은 눈썹을 찌푸렸다."이게 그렇게까지 고민할 일이야?"배준우는 담배를 한 모금 피우고는 재떨이에 튕겨 넣으며 가볍게 웃었다."정말 복수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애초에 량천옥이 배항준한테 복수하기 위해서 그러는거라고 핑계를 대긴 했지만 배준우는 믿지 않았다.흘러가는 모든 전개가 심상치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여자가 곧 아기를 출산한대!""..."그 여자, 바로 배항준의 새로운 여자였다.량천옥은 계속하여 말했다."너
량천옥은 배준우가 그닥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배준우가 변함없이 고은영에게 잘해 주는 모습을 보고는 그녀 또한 아무 말도 않았다.......그렇게 이야기를 마친 량천옥은 어느새 자리를 떠나버렸고, 배준우는 고은영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그의 부담스러운 눈빛에 고은영은 약간 당황했다."왜… 그렇게 쳐다봐요?"그 순간, 고은영의 머릿속에는 안지영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배준우와 맺은 계약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지나가라고 하던 그녀의 충고가 떠올랐다.그래, 확실히 알아내야 돼. 더 이상 헷갈리고 싶지는 않아!"너무 예뻐서."그의 다정한 말에 고은영은 순간 멍해졌다.배준우의 말대로 고은영은 누가 봐도 정말 예쁘고 키도 크고 비율이 좋은 여자이긴 했다. 고은영은 쑥스러웠다."당신이 더 예뻐요.""하하. 내가 예쁘다고?"남자한테도 예쁘다는 표현을 할 수가 있었던가?고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정말 예뻐요!"서로 예쁘다고 주접을 떨어대는게, 누가 부부 아니랄까 봐 아주 똑같았다. 배준우는 기분이 좋은 듯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이리 와."고은영은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고, 배준우는 그녀를 와락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배를 어루만지고 있었다.고은영도 자연스레 그의 목을 끌어 안고나서야 비로소 안정감을 느꼈다."방금은 어디 갔었어?" 이때 배준우가 물었다."안지영이 찾아와서 만나러 갔어요.""그 여자가 여긴 무슨 일로?"안지영이 찾아왔다는 얘기에 배준우는 순간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왠지 모르게 고은영과 둘이 만나는 것에 대해 불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알 리 없던 고은영은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청첩장 주러 온거예요. 장씨 가문의 넷째 도련님이랑 약혼한대요.""청첩장?""네." 고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한편으론 이 약혼에 대해 달갑지 않아하던 안지영을 떠올리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배준우를 바라봤다.그녀의 눈빛을 읽은 배준우는 물었다."왜 그렇게 봐?"“저기
안지영의 혼사 말고도, 고은영은 꼭 확인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망설이는 그녀의 눈빛을 확인한 배준우는 눈살을 찌푸렸다."할 말이 더 있어?"고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있어요!""뭔데?"느닷없이 진지한 그녀의 모습에 배준우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 웃음에 고은영은 순간 마음이 흔들릴 뻔했지만 곧바로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는 입을 열었다."전에 저희가 했던 계약말이에요, 아직도 유효한가요?""..."계약? 이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고?그러자 배준우가 웃으며 말했다."무슨 계약?""네?""우리 사이에 계약이 있었어?""있었죠!""어디 있는데? 나한테 한 번 보여줘 봐!""..."뭐야, 이렇게 중요한걸 왜 잊어버린거야?배준우가 진지하게 따지는 모습에 고은영은 어이가 없었다."왜?""이러는게 어디 있어요? 아니, 이건..." 고은영은 점점 조급해지기 시작했다.분명히 둘이 합의하에 계약서를 써놓고 왜 기억을 못 하는건지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 우기면서 없다고 하면 없는 일이 되는 것인가?"뭐라고?""그럼 저희의 결혼증은 진짜가 맞긴 해요?"배준우의 뻔뻔한 모습에 고은영은 좀 더 직접적으로 물었다.애초에 안지영이 재촉하면서 이 일을 분명히 알아내라고 할 때, 사실 그녀는 그닥 크게 신경 쓰지를 않았다.그런데 배준우가 이제 와서 뜻밖의 모습을 보이자 그녀는 제대로 똑똑히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어찌 됐든 여태 두 사람은 웬만한 스킨십은 다 하면서 일반적인 부부로 지내왔기 때문이다. 근데 이제 와서 모른 척 한다니! 고은영은 여전히 초조한 모습을 보였고, 잠시 후 배준우가 웃음을 터뜨렸다."그건 우리가 직접 구청에 가서 만든거잖아. 그게 어떻게 가짜일 수가 있어? 내가 그전에 말했잖아. 량천옥 쪽의 일이 해결만 되면 그때 이혼하자고."그의 말대로라면 자신의 목적이 해결되서 나서야 이혼도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네가 궁금한건 대체 뭔데?""그 결혼증이 대체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리고
고은영한테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향해 배준우는 짧은 입맞춤을 하고는 말했다."나 진심이야."오늘마저도 자신의 진심을 밝히지 않으면 그녀가 계속하여 소란을 피울 것이라는 것을 그 또한 잘 알고 있었다.그리고 이쯤 되면 얘기를 해주는게 맞다고 생각하기도 했다.배준우는 고은영과의 진지한 만남이 나름 괜찮았지만 그의 대답을 들은 고은영은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그럼, 저희는 더이상 헤어질 일 없는거죠?""응, 절대 없어. 그러니까 얼른 자."그제서야 고은영은 더이상 따지지 않고 바로 잠들었다.......그리고 그 다음 날. 변호사를 데리고 나타난 량천옥은 직접 명의 변경 수속을 모두 마쳤다.전에 말한 바와 같이, 천의는 고은영의 명의로 두었고 60% 의 주식은 고은영에게, 10% 는 배윤에게, 나머지 일부 주식은 배준우가 알아서 처리하게끔 남겼다.말 그대로 고은영이 어마어마한 자산을 받게 된 것이다. 벌써 이 소식을 접한 배윤은 급히 달려와 냅다 량천옥의 앞 길을 막았다."왜 그러셨어요?"그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량천옥에게 물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이런 결정을 내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천의를 아예 포기하고 절반이 넘는 주식을 고은영에게 넘겨주다니… 누가 보면 고은영이 친딸인 줄 알겠을 것이다. 어떻게 친아들이 그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게 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던 량천옥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입을 열었다."엄마 나 R국에 갈건데, 같이 갈래?… 엄마..."배윤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천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고은영에게 명의를 넘겨놓고, 정작 본인은 강성을 떠난다고? "엄마 제 정신 아니죠?"배 씨 가문에서 아예 나오려고 그런걸까? "억울하게 쫓겨나는 것보다 낫지! 안 그래?""누가 쫓아낸다고 그래요?"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일은 들은 바가 있긴 했지만 설마 그가 진짜로 그렇게 손을 댈거라
량일은 진작에 정리를 마쳤고, 량천옥도 서서히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두 사람은 함께 이 곳을 떠날 계획이었다."배윤이 널 원망하지 말아야 할텐데.""원망하면 뭐 어때요? 제가 여태 걔를 위해서 해준게 얼마나 많은데."그동안 엄마로서 그녀는 최선을 다해왔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단 이번만큼은 그녀는 자신을 위해 살고 싶었다.한편 량일은 여전히 마음 한 켠이 불편했다. 어찌 됐든 그녀 또한 천의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애초에 배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키워온 것인데 갑작스레 고은영에게로 넘어가게 되니, 괜한 의심을 받을까 봐 걱정됐다.소식을 전해 들은 배항준은 곧바로 달려왔다.그동안 그림자 한 번도 비추지 않더니, 이제 와서는 량천옥을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량천옥, 너 미쳤어?"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파랗게 질렸고, 잔뜩 화가 나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고도 량천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그저 차갑게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예상 밖의 태도에 배항준은 더욱 미칠 지경이었다."너, 너...!""배항준, 이게 바로 네 와이프를 건드린 후과야. 밖에서 바람이나 피면서 이런 결과가 있을거라고는 생각도 안 해봤어?"량천옥은 차가운 말투로 또박또박 그를 저격했다. 바람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배항준의 눈빛은 순식간에 매섭게 변했다.심지어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보이기도 했다.여태 잘 숨겨왔는데 어떻게 알게 된거지? 그럼 지금 이런 짓을 벌이는 것도...?"지금 나한테 복수하려는 거야?"배항준은 그제서야 조금 눈치채기 시작했다. "맞아, 너한테 복수하려는 거야. 나는 유청처럼 네가 원하는 대로 통제 당하면서 살고싶지 않거든."“......”"너 사람 잘못 봤어. 나 그렇게 쉬운 여자 아니야."량천옥은 날카롭게 말했다.배항준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부터 그녀는 항상 그를 죽이고 싶었다.배항준은 놀랍게도 변해버린 눈 앞의 량천옥이 믿기지가 않았다."너, 너..."더이상 할 말을 잃은 배항준의 분
량천옥은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가 않았던 그녀는 다시 상자를 들고 걸어갔다."오늘 이 문 나서면 다시는 돌아올 생각은 하지도 마."가출? 맘대로 해.하지만 량천옥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근데 내가 가출하는거 너한테도 나쁘지 않은 일 아니야?”배씨 가문에서 지내는 동안, 그녀는 어떤 일에 부딪혀도 치욕을 참고는 혼자서 그 무거운 짐을 짊어졌었다.배항준이 자신을 어떻게 괴롭히든, 그녀는 항상 묵묵히 참아왔다.그러나 이번에는 제대로 끝장을 내고 싶었다.원래도 조용했던 배씨 가문은... 이젠 황량하기 그지 없었다.화가 난 배항준은 손에 든 물건을 냅다 땅에 내리쳤다."쾅!"수백만 원짜리 골동품 꽃병들이 산산조각 나버렸다.옆에서 지켜보던 집사와 하인들은 깜짝 놀라 소리를 내지도 못했다.그렇게 량천옥은 아예 집을 떠나버렸다.......이튿날이 돼서야, 배준우는 이 소식을 접했다.평소에는 항상 고은영을 데리고 배씨 가문으로 향했지만 이번에는 혼자서 집으로 찾아갔다.데리고 오지 말라고 할 때는 같이 오더니, 데리고 오라 하니까 이번엔 혼자 온거라니! 밤새 화가 채 가시지 않았던 배항준은 다시 머리가 아파졌다. 집에는 배윤도 있었고, 모처럼 집으로 돌아온 그는 오늘 배준우가 어떻게든 돌아왔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다.배준우는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꺼냈다."천의 때문에 나를 찾아온거야?"그는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떠보았다. 량천옥이 천의를 갑자기 고은영의 손에 넘긴 것 자체가 배씨 가문에게 있어서는 큰 사건이니까 말이다. 배준우의 무덤덤한 모습에, 배항준과 배윤은 어이가 없었다.이때 배항준이 입을 열었다."변호사한테 서류들을 준비하라고 하고 고은영한테 거기다 사인하라고 해."이것이 바로 그가 밤새 생각해낸 최후의 해결 방안이었다.천의는 량천옥이 일으켜세운 것은 맞지만, 배씨 가문의 돈을 쓴 것이기에 절대 빼앗기고 싶지가 않았다.심지어 천의는 현재 M국에서도 시가 2조를 자랑하고 있었
“내가 대신 가서 혼내줄게. 너는 여자니까 이미지 신경 써야지. 착하지?”“싫어요! 이미지 따위는 필요 없어요.”장선명이 바로 핸드폰의 카메라를 켜서 그녀 앞에 내밀었다.안지영은 핸드폰 속 자신의 헝클어진 머리와 마치 미친 여자처럼 보이는 모습을 보고는 순간 얼어붙었다.그녀가 조용해지자 현장의 분위기도 순식간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그 남자 때문에 이런 모습 하려고?”안지영은 말문이 막혔다.‘젠장, 언제 이런 모습이 된 거지?’특히나 더 참을 수 없는 건, 나태웅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사실이었다.‘그놈이 뭐라고 내가 이렇게까지 화내는 거지?’“집에 가자. 착하지?”장선명은 부드럽게 안지영을 달랬다.옆에 있던 구이준은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었다.장선명이 어떤 사람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유명했다.그가 소유한 유흥 장소는 셀 수 없이 많았고 그 안에는 온갖 종류의 미녀들이 넘쳐났다.여린 타입, 매혹적인 타입, 요염한 타입. 남자들이 환장하는 스타일은 차고 넘치도록 많았다.또한 유흥가에 들어오는 여자 중 장선명을 유혹하여 인생을 바꾸고 싶어 하는 여자들도 많았다.당시 구이준과 안열은 장선명 주위를 얼씬거리는 여자들을 수없이 많이 처리했지만 장선명이 여자들에게 시선을 두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그래서 구이준과 안열은 당시 장선명이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건지 의심하기도 했었다.예쁜 여자들이 들끓는 곳에서 어떠한 유혹에도 움직이지 않으니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장선명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타입을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이었다.구이준은 안지영을 유심히 보며 생각했다.‘다른 여자들이랑 비교해도 특별한 건 없어 보이는데... 도련님께서 왜 이 여자를 좋아하시는 거지? 화끈한 성격? 아니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호쾌한 모습?’머리를 정리하던 안지영은 헝클어진 머리로 인해 손가락이 끼여버렸고 그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웠다.그로 인해 나태웅에 대한 그녀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
고은영은 분노에 휩싸인 채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가게를 나왔다.배준우가 간 줄 알았던 그녀는 가게에서 나와 배준우의 차가 원래 자리에 있음을 확인하고는 화가 난 표정으로 차에 올라탔다.통화를 하고 있던 배준우는 그녀를 보자마자 통화를 마무리했다.“그래. 그렇게 처리하고 끊어.”그는 곧바로 고은영의 부풀어 오른 볼을 살짝 꼬집으며 물었다.“화났어?”고은영이 말하지 않아도 배준우는 알 수 있었다.진성택이 분명히 또 진유경과 관련된 이야기로 그녀를 화나게 한 것이다.“계속 곧 죽을 거라는 얘기만 반복하고 있어요.”“도덕적 협박이구나?”배준우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그의 안색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진성택이 진유경을 편애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양녀를 선택하고 친딸을 외면한다는 사실은 생각지도 못했다.평소 세심하지 않은 배준우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고은영에 대한 연민이 짙어졌다.고은영은 더 이상 진성택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매번 만나면 진유경 이야기뿐이었기 때문이다.배준우가 한숨을 내쉬며 위로했다.“화내지 마. 어차피 너한테 중요한 사람도 아니잖아.”“그래도 엄마가 너무 불쌍해요.”그녀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가슴 한구석이 쓰려왔다.‘네 명이 자식이나 낳았으면서 엄마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엄마가 나한테 남긴 마지막 사랑마저도 첫사랑의 딸에게 나누려고 하다니...’“저녁에 네 큰오빠네에 가서 밥 먹을까?”“오빠한테 전화 왔었어요?”말 돌리는 데 성공한 배준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응. 아까 너 봤다면서 저녁에 밥 먹자고 하더라고.”“좋아요!”고은영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정훈과 진윤과 가까워진 후, 고은영은 두 오빠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진성택은 정말 무정했다.아니, 애정은 있었지만 그 대상이 아내와 자식이 아닌 다른 사람일 뿐이었다.“언제 태현 오빠한테 물어볼 거예요?”“조금 있다 시간 내서 만나러 가려고.”“좋아요!”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고은지
“어머니가 나한테 남긴 건 그대로 넘겨주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고은영은 진성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말을 끊었다.싸늘한 고은영의 시선에 진성택의 안색은 순간 창백해졌다.진성택이 무언가를 덧붙이기 전에 고은영이 차갑게 말을 이어갔다.“그렇지 않으면 뭐요? 아시다시피 저는 지금 배준우의 아내예요. 진유경에게 손대는 건 쉬운 일이죠.”“유경이한테 손대지 마. 은영이, 너...”“됐어요! 더 이상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아요!”진유경을 그렇게까지 감싸는 진성택을 바라보며 고은영은 실망감을 넘어 차마 형용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이래?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이길래 이런 일까지 한단 말이야! 아내랑 아이를 도대체 뭐로 보는 거지? 어떻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나한테 이런 요구를 할 수 있어... 엄마가 남긴 소중한 유품을 진유경 같은 년에게 넘기겠다고? 하...’진유경이 단순히 진씨 가문의 양녀였다면 고은영은 아마 이렇게까지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진실을 아는 고은영은 지금 상황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다.설령 눈앞의 남자가 그녀의 혈육이고 아버지라 할지라도 고은영은 그를 혐오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진성택은 그녀의 분노에 애처롭게 그녀를 불렀다.“은영아...”고은영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진성택이 말을 이었다.“나한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게 아니었다면 나도 너한테 와서 이런 부탁 하지 않았을 거야.”“같잖은 호소는 그만 하세요. 저희 사이에 애정이라 칭할 만한 감정도 별로 없잖아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내였던 사람에게 너무하네요. 엄마가 불쌍해요.”그녀는 더욱 화가 났다.비록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머니와 특별한 애정이라 할 감정은 없었지만 진성택이 그녀를 대하는 모습을 보며 고은영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밀려왔다.고은영은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어머니의 깊은 사랑은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진성택은 어떠한가.고은영은 더 이상 그를 보고 싶지 않
고은영이 이렇게나 직설적으로 얘기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저는 이제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해요.” 진성택에게 돌려 말하지 말고 직설적으로 얘기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감정적으로 접근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생각했다.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거고 지금 와서 그것을 지울 수는 없었다. 진성택은 고은영의 말에 상처를 받은 듯 보였다. 그녀의 불만 섞인 태도에 그의 마음이 조금은 아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는 걸 알았다. “너희 둘째 오빠가 병원에 왔었어.” 고은영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쏘아보았고 그는 그녀의 생각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네가 받을 모든 주식들 있잖아. 할머니와 진호영, 그리고 유경이의 지분까지 너에게 줬다던데, 맞지?” 고은영은 차갑게 한 마디로 대답했다. “맞아요.” 드디어 그의 목적을 직접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더욱 차가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진성택은 고은영의 차가운 시선에 조금 떨린 듯 말을 이어갔다. “그 주식들은 사실 네 어머니가 너에게 남긴 거니까 너에게 돌아가야 맞아.” “그래서 저에게 돌려주기 위해서 이곳에 부른 거죠?” 고은영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그가 주고자 한다면 왜 이제서야 이리 말하고 있는지 다시 묻고 싶었다. 진성택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고 그의 눈빛에는 죄책감이 떠올랐다. “미안하지만 그 주식은 네게 돌려줄 수 없을 것 같아.” “돌려줄 수 없다고요? 왜요?” 그의 말은 너무도 간단했다. ‘할 수 없다'라는 말이 또다시 진유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거 같았다. 진유경, 정말 독특한 존재다. 역시나 양딸이 모든 것보다 우선이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짜로 진씨 가문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 두 사람의 양부모는 하나같이 그녀를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너희 둘째 오빠가 그 주식들을 되찾고 나서 진씨 가문의 모든 재정적 지원을 끊어버렸어. 지금 그들은 전부 저축해두었던 돈을 쓰고 있어.” 모든 지원을
하지만 진성택은 다르다. 결국 그녀와 혈연관계가 있기 때문에 배준우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 시간 후, 배준우는 고은영을 밀크티 가게에 데려다주었다. “내가 같이 들어갈까?” 배준우가 물었다. “준우 씨는 그냥 기다려요. 당신을 보면 아마 바로 저세상으로 갈지도 몰라요.” ‘이 녀석 입이 참!’ 하지만 고은영이 말이 맞았다. 예전에 진성택과 량천옥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면 진성택은 항상 배준우에게 진유경을 미래의 아내로 삼으라고 했었고 그때 배준우는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굳이 고은영과 결혼했다. 지금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진성택이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운명의 미묘함을 탄식할 것인가? 아니면 진유경 때문에 속상해할 것인가? 고은영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눈에 보였다. 작은 원탁 옆에 앉아 있는 진성택이. 그는 손에 밀크티를 들고 있었다. 고은영이 두 걸음 내딛자마자 진성택도 그녀를 보았다. “왔니?”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랜만에 본 그의 얼굴은 확실히 더 노화되어 보였고 얼굴색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특히나 얼굴이 누렇게 변했고 예전만큼 눈빛도 밝지 않았다. 고은영은 이제 막 기운이 다 빠진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진성택은 확실히 지금 당장이라도 세상을 떠날 듯한 느낌이었다. 그가 말한 대로 아마 이번이 마지막 만남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고은영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이거 마실 수 있어요?” 진성택은 손에 들고 있던 밀크티를 문득 깨닫고 곧바로 그녀에게 건넸다. “너를 위해 샀어. 여자애들은 다 밀크티 좋아하잖아. 너도 좋아하지?”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밀크티는 그녀의 가장 좋아하는 음료였다. 그런데 배준우와 결혼한 이후로 배준우는 그녀가 밀크티가 몸에 안 좋다며 못 마시게 했다. 진성택은 그녀가 음료를 마시지 않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생각해 보면 나는 사실 유경이에게 이런 걸 사준 적이 없었어. 진씨 가문의
전화 너머의 진성택은 고은영의 말을 듣고 당황해서 말문이 막힌 듯했다. “정말 미안해. 미안하다. 전에는 네 감정을 고려하지 못했어.” 그 순간, 진성택은 자신이 고은영에게 대했던 태도가 문제였음을 인정했다. 고은영이 말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은영아,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야. 큰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반응이 무뎌지는 법이잖아. 나는 그동안 계속 너를 찾고 있었어. 그런데 네 소식을 듣고 나서 어떻게 너를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네가 이런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거란 건 알지만 나도 그런 감정이 싫다.” 감정과 이해라. 처음에는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되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고 쳐도 그럼 그 후에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진짜 아이러니했다. 진성택은 고은영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오늘 내가 너를 찾은 건 정말 중요한 일이 있어.” “그게 진유경의 일 때문인가요?” 고은영은 본능적으로 날카롭게 반문했다. 무슨 일이든 그가 지금까지의 태도를 어떻게 설명하든 고은영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저 지금 그가 자신을 찾은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니, 네 어머니 때문이야.” 이 말은 그가 어쩔 수 없이 털어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전화상에서도 고은영은 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죄책감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될수록 그녀는 더 비웃었다. “내가 이 시간 동안 살 수 있는 건 모두 하늘이 준 기회야. 빼앗은 기회라고 해도 될 정도로. 내가 너를 만날 기회도 얼마 안 남았지.” 그는 매우 허약해 보였다. 고은영은 눈썹을 찌푸렸고 이 느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진성택이 마치 도덕적으로 자신을 억지로 끌어들여서 그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자신이 그를 만나지 않으면 너무 냉정한 사람처럼 보일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디예요?” “병원 맞은편의 밀크티 가게에 있어.” 그는 지금 병원에 입원 중이었고 의사들이
고은영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배준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태현 씨는 량천옥이 언니의 생모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당연히 알고 있지.” 이 일은 병원에서도 크게 떠들썩하게 된 사건이라 나태현 쪽에서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배준우는 고은영을 쳐다보며 이어서 말했다. “네가 말한 대로 나태현과 고은지의 거래가 량천옥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지?” “맞아요. 언니가 천락 그룹으로 돌아간다고 말할 때 량천옥이 아직도 밖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것에 불만을 토로했었는데 그 말투에 분노가 가득했어요.” 고은영은 고은지의 분노에 대해 말을 꺼내면서 마음속이 더욱더 쥐어짜이는 것 같았다. 나태현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지금 상황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고은영은 머릿속이 완전히 엉켜버렸다. 그녀가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것처럼 배준우도 지금은 완전히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준우 씨가 나태현 씨에게 언니와 한 거래가 무엇인지 물어봐 줄 수 있어요? 그리고 희주가 본인 딸인 걸 알고 지신혜 씨와 약혼도 할 건데 왜 언니를 천락 그룹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하는지도 물어봐 줘요.”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고은영은 공포감을 느꼈다. 그녀는 고은지에게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지금은 량천옥에 대해 강한 증오를 느끼고 있더라도 말이다. “내가 나태현 형에게 물어볼게. 너는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려.” “언니에게 말하고 싶어요.” “지금은 안 돼. 내가 먼저 나태현이랑 얘기하고 나서 말해.” 배준우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고은영이 말한 대로 지금은 최소한 나태현이 고은지를 천락 그룹으로 돌아가게 만든 계기가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그럼 빨리 물어봐요.” “응, 알았어.” 배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은영은 여전히 마음이 불안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으로서 지금 그녀는 거대한 음모가 고은지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진윤은 밖에서 시간을 확인했고 배준우가 10분 내로 나오지 않으면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담배를 반쯤 피웠을 때 문득 고은영이 대문 쪽에서 들어오는 모습을 봤다. 급하게 뛰어오는 모습에 거리가 꽤 있었음에도 진윤은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을 보고 그녀가 얼마나 급하게 뛰어왔는지 알 수 있었다. 고은영이 가까워졌고 그녀는 진윤을 발견하고 잠시 멈칫했다. “큰오빠.” ‘큰오빠’라는 단 한 마디에 진윤의 마음은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준우 찾으러 온 거야?” 고은영은 너무 오랫동안 뛰어왔는지 호흡이 가빠졌고 깊은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안에 있어요?” “응, 안에 있어. 지금은 들어가지 마.” “왜요?” 고은영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진윤은 조용히 말했다. “지금 나태웅이랑 얘기 중이야.” “네? 나태웅이요?” 그 이름이 나오자 고은영의 말투도 달라졌다. 그녀는 전에 나태웅과의 영상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그에게 상당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가 최근 동안 안지영을 괴롭힌 일이 떠올랐다. 고은영과 안지영의 관계를 고려할 때 당연히 말할 필요도 없이 안지영이 화가 나면 고은영도 같이 화를 내주었다. 진윤은 그녀가 나태웅을 언급할 때의 그 표정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나태웅을 싫어해?” “싫어해요!” 고은영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어떻게 좋아할 수 있겠어?’ 전에 그녀가 배준우와의 일에 그렇게 괴로워했던 건 대부분 나태웅 탓이었다. 정말 그땐 너무 힘들었다. 지금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고은영은 그 당시 어떻게 버텼는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사이 배준우는 이미 안에서 나왔다. 고은영을 보고 잠시 멈칫한 뒤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왜 바로 왔어?” “준우 씨 찾으려고요. 급한 일이 있는데 전화도 안 받았잖아요.” 고은영은 불만을 섞어 말했다. 배준우는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윤을 한번 쳐다보았다. 그것을 본
나태웅이 혼자 남았을 때 그의 세계는 조용해졌다. 하지만 지금의 그에게 고요함은 더 큰 괴로움이 되었다. 그는 전화를 꺼내어 안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상대로 전화는 바로 차단되었다. 그는 다시 안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시각, 사무실에서 안열은 겨우 안지영을 달래놓은 상태였다. 전화의 진동에 안열은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 그리고 안지영도 전화를 확인하고 또다시 통제불능이 되었다. 안열은 안지영이 또 움직일 것 같아 황급히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너무 흥분하지 마요. 바로 차단할게요.” “받아요. 이 미친놈이 뭐라는지 봐야겠어요.” 안지영은 이를 갈며 말했다. 안열은 입꼬리를 떨구며 말했다. “그냥 받지 말죠?” 안지영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받아요!” ‘이 사람은 진짜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을지 걱정하지 않는 건가?’ 하지만 안지영의 말에 그녀는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안열은 안지영을 한 번 쳐다보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지영 지금 옆에 있나요?” “없어요!” ‘없어요’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지영은 나태웅의 차가운 목소리를 듣고 전화를 뺏으려 했다. 그녀는 그를 욕하고 나씨 가문이 망하길 저주했다. 하지만 손을 뻗자마자 안열이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한 마디만 전해줘요.” “말하세요.” “안지영은 두 가지 선택이 있어요. 첫 번째는 오늘 밤 킹덤 타운을 떠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오늘 밤 하주원에게 사과를 하는 겁니다.” “이틀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안열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마음을 바뀌었어요.” 안열은 더 이상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안지영은 분노에 가득 찼고 자신의 입을 막고 있던 안열의 손을 떼며 전화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나태웅, 너 이 미친놈! 꿈도 꾸지 마!” “그래, 그럼 하늘 그룹이 네 손에서 얼마나 있을지 지켜보자고!” “너 이 자식, 내가 너의 조상을 건드렸나 보다! 그래서 나한테 복수하는 거네!” 안열은 안지영의 욕설을 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