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배준우는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고은영을 끌고 퇴근길에 올랐다.졸졸 따라오는 그녀는 아직 모든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듯 보였기에 그는 일부러 고은영의 손을 잡고 걸었다.차에 탄 고은영은 샤인머스캣을 한 송이 무릎에 얹어두고 먹었다. 배준우가 그녀 쪽을 슬쩍 돌아봐 물었다. “맛있어?”“네! 맛있어요!”진청아가 사다 준 샤인머스캣을 먹고 있었다. 예전에는 한 송이 사는 것도 아까워서 못 샀던 것이었다.마트에서 과일 코너를 지나다 보면 예쁘게 포장된 것이 먹음직스럽고 보기 좋아서 항상 먹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비싼 가격에 참기만 했었다.“오후에도 먹어 놓고. 또 배고픈 거야?”“그러게요, 진짜 계속 배가 고프네요.”아마 뱃속의 아기가 영양분을 잘 흡수하고 있는 탓인지, 요 며칠 그녀는 예전보다 꽤나 자주 배가 고프다고 느꼈다.란완리조트로 돌아온 그들은 노 집사가 준비해둔 저녁상을 받았다.“저녁은 사모님이 좋아하시는 만둣국으로 준비해 두었습니다.”노 집사의 말에 고은영의 눈이 반짝 빛났다.“진짜요?!”“그럼요, 오후 내내 주방에서 빚고 있었는걸요!”혜나가 옆에서 거들었다.고은영은 정말로 신이 났다.어릴 때 할머니와 자라면서 식습관이 굳어져서인지 그녀는 만두라면 사족을 못 썼다. 만두 소리에 어린애처럼 기쁜 게 얼굴로 다 티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는 배준우의 입꼬리도 슬쩍 올라갔다.식탁에서 그녀는 한 번에 만두를 20여 개나 해치웠다.“만두 맛있었어?”“네! 내일은 버섯 들어간 만두가 먹고 싶어요.”“먹고싶으면 먹어야지.”배준우를 따라서 식탁 한편에 서있던 노 집사도 고개를 끄덕였다.사모님이 드시고 싶은 건 바로바로 준비해야지!이제 고은영도 슬슬 그의 곁에 있는 게 싫지 않아졌다. 예전의 공포심이 없어지니 같이 있는 게 좋았고 이제는 아무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행복했다. 고은영이라는 사람 자체가 원래부터 그렇게 매사에 계산적이거나 머리 굴리는 사람이 아니기도 했다.그때, 배준우의 핸드폰이 울렸다.고
“진짜로 거래처 두 곳에서 나 대표님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고요?”이연이 참지 못하고 묻자 안지영이 고개를 끄덕댔다.“그렇다니까요!”“그럼… 차라리 가서 여쭤보는 건 어떤가요?”이연은 무슨 일이 생기든 앞뒤는 알아야 된다는 주의였다.오늘 오후에 안지영이 들었다던 그 전화의 이야기도 사실 구슬리고 또 구슬려서 간신히 들어낸 것이었다. 그것 말고는 도무지 더 이상 다른 얘기가 나올 기미가 없었다. 게다가 나 대표님조차 말을 안 하니, 그들도 입장이 난처해졌다. 가서 여쭤보는 게 어떠냐는 말에 안지영은 계속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녀도 궁금하긴 매한가지였다.“… 뭐, 물어보기는 해야 될 것 같아요.”이렇게 된 이상 가서 물어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그럼 얼른 대표님 사무실로 가 봐요!”어차피 이미 지하철도 끊긴 시간이었다.“네, 이 팀장님 먼저 퇴근하세요. 전 여쭤 보고 갈게요.”이렇게 일이 커진 데다가 팀장님한테까지 민폐를 끼쳤다는 생각을 하니 그녀는 계속 마음이 불편했다. 사건이 해결되면 커피라도 사서 드려야지하고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나태웅의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마침 그도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하필 낫빛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안지영과 딱 마주치자마자, 그 안색이 더 나빠지는 걸 그녀는 보고야 말았다.“대표님, 회의 끝나셨나요?”“응.”나태웅은 곧바로 안지영 곁을 지나쳤다. 싸한 민트 향과 섞인 담배 냄새가 뒤를 따랐지만 싫지는 않은 냄새였다.그녀는 약간 초조하게 컵을 집어 드는 나태웅을 바라봤다. “저… 오늘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먼저 사과부터 해야지!그러나 뒤따라오는 말은 사과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저도 오늘 이래저래 알아보았는데요…. 모두들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에 나 대표님의 전화를 받았다는 말만 하셔서… 혹시 대표님이 전화하신 걸까요?”만약에 정말로 그가 전화를 걸었다면, 대체 뭔 전화였길래 사인하고 날인만 하면 끝날 계약이 이렇게나 갑작스럽게 파투가
그렇지만 내일 오전까지 계약을 어떻게든 따 내라는 말은 오늘 밤에 기획안을 만들어 내라는 말과 같았다.지금 벌써 이 시간인데, 그럼 퇴근을 아예 못한단 말이잖아!안지영이 입술을 깨물다가, 간신히 한마디를 쥐어짰다.“정… 정말 급한 일인가요?”“업체에서 내일 오후에 다른 회사와 미팅을 잡았어.”그러니까 오늘 밤에는 꼭 나와야 된다는 말이였다. 이 두 개의 중요한 업체를 남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안지영도 헐레벌떡 자기 사무실로 갔다. 그리고 장선명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밤 퇴근하기는 글렀으니 기다리지 말라고 전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나태웅은 회사에 열두시 조금 넘어서까지 있다가, 판매부 사무실 쪽으로 슬쩍 넘어갔다.그런데 웬걸, 판매부 사무실 문 안에서 웬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가 같이 들리는 것이었다!자세히 들으니, 바로 안지영과 장선명이었다.“뭐라도 좀 먹어.”“감사합니다…”안지영은 정말로 배가 고팠다.큰일이 터졌기에 그녀는 저녁도 못 먹고 하루 종일 쫄쫄 굶은 상태였다.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선 나태웅의 눈에 장선명이 포장해온 김치찜이 들어왔다.“대표님!”태웅의 등장에 벌떡 일어선 안지영과는 달리, 장선명은 그녀 옆쪽의 사무실 의자에 기대앉아 있었는데, 아주 붙어 있던 건 아니지만 그 거리도 나태웅을 묘하게 기분 나쁘게 했다.“넷째 도련님은 정말 사람을 잘 챙기시네요. 근데 이 야밤에 매운 걸 먹어도 별로 좋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첫마디는 칭찬인데, 뒷말은 완전히 비꼬는 기색을 숨기지도 않은 말이었다.사람 챙길 줄을 모르니 아무렇게나 막 챙기지! 한편 안지영도 그 말에 가시가 박힌 게 느꼈기에 허겁지겁 장선명을 감싼답시고 끼어들었다.“제가! 제가 매운 게 먹고 싶다고 했어요!”그러자 나태웅이 또 한껏 그녀를 째려보는 통에 그녀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또 내가 뭔 말을 잘못한 거지?“같이 가실까요?”장선명은 바로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됐다. 다만 장선명이라는 인간 자체가 반골 기질에, 그와 안지영
”알겠어. 얼른 하기나 해.”안지영도 더 이상 다른 말없이 우선 눈앞의 업무를 처리하는데 집중했다. 이미 바빠서 돌아가실 지경이었다!그래도 조금 일찍 말해주지. 밤 9시가 다 넘은 시간에 당장 내일까지 계약을 따 내라니!나태웅에게 빚을 졌긴 하지만 원수진 일은 없는데, 안지영은 이제는 제가 뭔갈 크게 잘못해서 보복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되기까지 했다.나태웅은 주차장 안에서 장선명의 차 근처에 차를 대고 있었다.손목시계를 몇 번이나 봤는지 모를 정도로 새벽 3시가 다 되어서야 안지영과 장선명이 건물에서 내려왔다.장선명이 이 시간까지 누구랑 같이 있어주다니 놀랄 노자였다. 그는 먼저 안지영을 집에 데려다주고 그랜드 마운틴 별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그녀는 차에서 내리기 전, 약간의 감동을 숨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오늘 정말 감사해요!”야근이라는 게 정말 짜증스럽고 피곤하지만 웬일인지 옆에 누구 하나가 앉아서 시시콜콜한 한두 마디 건네주는 게 꽤나 힘이 된다고 새삼 느꼈다. “얼른 들어가서 조금이라도 자 둬.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올게.”“정말 괜찮아요! 제가 차 타고 갈 수 있어요!”회사까지 데려다주려면 장선명은 더 일찍 일어나서 준비를 해야 했기에 거절했다. “그럼… 알겠어.”그 말을 듣고서야 안지영은 조금 마음을 놓고 그를 배웅했다.어쨌든 오늘에서야 천락그룹이 얼마나 직원을 힘들게 하는지 제대로 맛 본 그녀였다.한편 고은영은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부엌에서 고아 온 오리 백숙을 아침상으로 받았다.그녀가 임신했다는 것을 안 이후로 배준우가 그녀의 식단에 한창 더 신경을 쓰고 있어서였다.“너… 너무 보양식 아니에요?”그녀가 약간은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배준우를 쳐다봤다.아침에 눈 뜨자마자 오리 백숙이라니!“오리 백숙이 몸에 얼마나 좋은데? 얼른 먹어.”그 말을 하는 배준우의 말투가 어찌나 다정한 아내를 위하는 예비 아빠 같았는지 고은영도 마음이 사르르 녹는 듯했다.나중에 배준우를 떠나게 된다면, 아쉽지 않을 수
”이 배 씨 집안 남자들.. 참 무정하기 짝이 없구나!”량천옥이 마구 빈정대자 량일도 차마 그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그럴 만도 한 게, 그 말은 정말이지 사실이었다!사진 속의 장소들은 하나같이 량천옥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량일마저 같이 방문했던 곳들이었다.게다가 한 두 군데 방문한 게 아니라 여러 장소들이 섞여 있는 것이, 정말로 이 남자가 불륜을 감출 의향이 털끝만큼도 없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 순간의 량천옥은 여러모로 절망적이었다.딸이, 배준우에게 시집을 갔다!게다가 배항준은 저를 버리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인다.“너, 지금은 냉정하게 생각하고 마음 단단히 먹어 둬야 해!”량일이 한참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그녀의 세상이 혼돈 그 자체인 것과 별개로,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 된다는 것을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눈앞의 량천옥은 해탈한 듯한 표정으로 그저 무미건조하게 입을 열고 대꾸할 뿐이었다.“냉정해지지 않는다면 또 다른 방법이 있나요?”머릿속에는 예전에 유청과 배항준이 이혼하던 장면이 떠오르고 있었다.그때의 유청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배준우와 배지영을 데리고 배 씨 집안을 떠났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있는가?“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니?”이미 벌어진 일, 해결부터 해야 했다!“내가 배 씨 집안에서 어떻게 지내왔는데! 그렇게 저한테 대해 놓고 그 사람도 좋은 꼴은 볼 수 없을 거예요!"이 강성에서 모두들 그녀를 배 씨 집안의 사모님으로 깍듯이 모셨다.오로지 그녀 본인만 알고 있었다. 제가 얼마나 살얼음판 속에서 행동 하나 걸음걸이 하나마저 조심하며 살아왔는지!배항준의 주변에 여자들은 끊이지 않았었지만, 그 어느 누구도 애까지 배어 오지는 않았다.그러나 이번의 이 여자가 임신을 했다면, 앞으로의 꼴이 어떻게 돌아갈지 안 봐도 감이 왔다.“장항 프로젝트를 배준우한테 넘기라 했다가 이제 천의까지 넘기라고 했던 거에 다 이유가 있었던 거야!”입술을 깨물며 앉아있던 량천옥의 머릿속으로 문득, 배
”전 잠시 들어가 있을게요!”손안의 털실뭉치를 아무렇게나 쥐어 든 고은영이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배준우는 진청아에게 눈짓했다.“안으로 들여보내.”“네.”진청아가 금세 량천옥을 데리고 들어왔다.오늘의 량천옥은 어쩐지 평소의 요염한 옷차림이 아닌 수수하고 단정한 옷차림에, 화장도 진하게 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잘 정돈된 그 겉모습 속에서도 그전에 비해 초췌해졌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정도였다.사실 초췌한 것이 당연했다. 요 며칠 배준우와 량천옥 사이의 분쟁은 방법이 조금 더 고상했을 뿐, 너 죽고 나 살자 하는 꼴과 다를 바 없었으니까.“마실 것 좀 가져다드릴까요?”공손하게 물었지만, 진청아의 말에서서는 빠진 단어가 하나 있었다.이제 배 씨 집안의 배 사모님은 배준우의 아내인 고은영이기 때문에, 배 사모님이라는 말이 빠진 것이었다.배준우의 계모라는 위치로는 이제 제대로 된 호칭 하나도 얻지 못한다는 의미였다.예전의 량천옥이었다면 진작에 화를 버럭버럭 내며 난리를 쳤을 법도 한데, 오늘은 달랐다.“그냥 물 한 잔이면 됐어요. 고마워요.”게다가 말투는 꽤나 부드러웠다. 솔직히 배준우로서도 꽤나 의외였다.요즘의 량천옥이 이렇게 차분한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진청아가 물을 가져다주고 둘만 남자, 배준우가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용건은요?”“천의 때문에!”역시나. 량천옥이 바로 천의 이야기를 꺼내자,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그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잘랐다.“천의 이야기라면 더 말씀하실 것도 없습니다.”뭐 당연히 어떻게 해서든, 무슨 수를 써서든 천의를 내어주지 않으려고 하겠지, 대충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보이는 표정이었다. 원래의 량천옥이라면 그럴 만도 했다.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런 것 따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천의라면 이제 됐어.”그러자 배준우가 눈썹을 찌푸렸다.이건 또 무슨 신종 헛소리지? 지나가던 개가 웃을 말이었다. 눈앞의 여자의 욕심이 어느 정도인지는 배준우가 제일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는 배준우의 눈빛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어쨌든 량천옥으로서는 겁날 게 더 이상 없었다. 천의는 아직은 그녀의 것이었고, 이 이상으로 일이 틀어질 수도 없었다.이 정도에서 멈추는 게 배씨 집안에 베풀 수 있는 그녀의 최대치의 선의였다.여전히 말없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하기만 하는 배준우를 두고, 량천옥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생각도 결정도 네가 할 몫이지만, 이 일은 네 아버지에겐 알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 남자는 지금 아주 미쳤으니까!”그가 만에 하나 량천옥이 천의를 고은영에게 줄 생각이라는 걸 알아채면 화가 나서 스스로 나서서 고은영을 어떻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그러나 이미 줘 버리고 난 후에 알아챈다면, 손을 써 봤자 이미 늦었겠지!그녀가 막 몸을 일으켰을 때, 휴게실에 가 있던 고은영이 총총 뛰어들어왔다.“저 잠시 나갔다 와야 할 것 같아요.”갑자기 뛰어드는 건 실례되는 일이긴 했기에 배준우는 슬쩍 눈을 찌푸리며 되물었다.“어디를 가게?”떠나려던 량천옥의 발걸음이 제자리에 뿌리내린 듯 멈춰 섰다.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고은영을 바라본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새하얬다.온 힘을 다해 눈물을 참아 낸 그녀의 얼굴은, 겉보기에는 어떠한 흔들림도 없었다.“언니한테 조금 일이 생겨서… 가 봐야 할 것 같아요.”안지영에게서 막 조보은이 고은지를 찾아냈다는 전화가 걸려 온 참이었다. 천락 그룹 쪽에서도 한바탕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조보은은 완전히 미친 여자였다!배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청아한테 차 불러달라고 해.”“네, 알겠습니다!”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서 조보은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싶었지만, 고은영도 자기가 홀몸이 아니란 것쯤은 알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은 엄마니까 제 아이를 먼저 생각해야 된다는 것도 알았다. “어서 가 봐.”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뛰쳐나갔다.이 모든 일이 5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벌어졌지만, 그 짧은 사이에 량천옥의 마음속은 거친 파도
“은영이는?”“사모님이 타고 가실 차는 준비해뒀고, 보디가드 두 명 더 붙여 놨습니다.”“그럼 위로 올라와.”“네!”전화를 끊고 그는 머리가 아파 이마를 짚었다.어떤 일들은 얼추 보기엔 굉장히 합리적 이어 보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기묘한 느낌을 줄 때가 있었다.량천옥은 배 씨 본가를 걸어 나오며, 2명의 보디가드에게 둘러싸여 차로 향하는 고은영을 보았다. 바람이 불어와 길게 늘어진 고은영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자 목덜미에 있는 바로 그 몽고반점이 드러났다. 두 눈으로 똑똑히 그녀가 제 딸이라는 증거나 마찬가지인 그 점을 보고 만 량천옥의 심장이 거의 귀에 들릴 정도로 거세게 뛰었다. 바로 자신의 딸이, 눈앞에 있다…!량천옥의 심장은 마치 갈기 갈기 찢겨 피가 흐르는 듯했다. 고은영이 차를 타고 멀어져 점이 될 때까지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서 있던 그녀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제 차로 돌아갔다.한편 고은영이 도착했을 때는 막 퇴근 시간이 되었을 즈음이었다.조보은과 서정우, 그리고 서준호 셋이 정문 앞에서 큰 소리로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다 해지고 남루한 옷을 입은 채로 문 앞에 서서 창피한 줄 모르고 큰 소리로 욕지거리를 해대는 모습이 전형적인 무뢰배였다.퇴근하던 직원들이 구경거리를 찾은 양 갈 길을 멈춰 서서 그들의 모습을 흘깃대고 있었다.“고은지, 너 당장 나와! 그렇게 잘났으면 숨어있지 말고 어디 당당하게 나와 보시지! 이 배은망덕한, 부모에게 감사할 줄도 모르는 년 같으니라고! 하늘도 무심하지, 어째 너 같은 년을 아직 살려두고 있는지!”조보은은 뱃속에 가득 찬 원망과 분노를 아주 큰 소리로 터트리고 있었다. 병원에서 일하며 병원비를 갚으려고 고생 중인 것과 관리인들에게 구박받던 그 화까지, 고은지의 직장을 찾아낸 김에 아주 제대로 화풀이해보겠다는 심산이 보였다.소식을 들은 고은지가 드디어 걸어 나왔다.그녀를 보자마자 조보은이 기세등등해져 다가갔다. “이 키워준 은혜도 모르
‘여자를 갖고 논다고? 도련님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닌데. 밤에 발생했던 일들도 도련님 모르게 벌어졌던 일인데... 일을 조사해 범인을 밝혀냈을 때 그 범인은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했지.’“구이준.”“네.”구이준이 앞으로 나섰다.“웨딩드레스는 킹덤 타운으로 보냈어?”“네. 다 수선해서 보냈습니다.”그 말을 듣고 장선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태웅을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지영이가 직접 입어보고 고른 웨딩드레스야.”이 말은 나태웅의 위협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나태웅은 온몸이 얼어붙은 듯 차갑게 굳었고 장선명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더욱 음울해졌다.“그럼 거절하겠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지?”“너도 예상하던 답 아니야?”장선명이 싸늘하게 웃으며 답했다.언제 장성명이 위협을 받아들였던가.나태웅은 이런 방식으로 두 사람을 헤어지게 만들 수는 없었다.이전에 안지영을 찾아가도 효과를 보지 못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장선명이 안지영을 위해 그녀와 헤어질 것으로 믿는다면 나태웅은 장씨 가문을 너무 만만히 본 것이다.장씨 가문 사람들은 이런 위협을 받아들일 사람들이 아니었다.“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어. 네가 지영이를 빼앗아 간다면 나도 인정하지.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우릴 헤어지게 하려는 거라면 나뿐만 아니라 강성 전체가 너희 나씨 가문을 경멸할 거야.”말을 마친 장선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더 이상 나태웅과 할 이야기가 없었다.태연하고 무서울 것 없는 장선명의 모습은 나태웅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장선명은 두 발짝 걸어 나가다 무언가 떠오른 듯 멈춰 섰다.“참, 하늘그룹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하늘그룹이 없어져도 나는 안지영이 아무렇지 않을 수 있도록 할 방법은 많아. 하지만 너는? 지영이는 널 지금보다 더 원망할 거야.”‘안지영이 자신을 미워하더라고 나도 같이 미워하게 만들겠다고? 도대체 무슨 논리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자기 판단이 흐린 것처럼 지영이도 반쯤 정신을 놓았다고 생각하는 건가?’장선명은 자
3분 후, 나태웅과 장선명이 마주 앉았다. 겉보기엔 평온해 보였지만 현장의 공기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두 사람은 각자 담배 두 개비씩 피울 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진이훈과 구이준은 몸이 굳으며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다.장선명이 세 번째 담배를 꺼내려는 순간 나태웅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그래서 조건이 뭔데?”나태웅과 시간을 소모하려던 장선명은 그 말을 듣고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조건?”또렷한 말투로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는 나태웅은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지금까지 병원에서 아픈 척한 것도 모두 안지영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바보같이 순진한 안지영만이 진지하게 나태웅이 정말 미친 건지 아닌 건지 고민하고 있었다.“그 여자가 널 미워하게 만들지 마.”나태웅은 이를 악물고 하나하나 힘줘 말했다.장선명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왜 나를 미워해야 하지?”장선명이 흥미롭게 물었다.안진섭과 얼마간 관계가 있을 뿐, 장선명은 다른 방면에서 안지영에게 잘못한 건 없었다.“하늘그룹이 너 때문에 없어진다면 널 미워할 거야. 날 미워하듯 널 미워하게 되는게 네가 진정 원하는 거야?”나태웅이 날카롭게 물었다.하지만 애매한 부분이 있어 장선명은 나태웅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하늘 그룹이 나 때문에 없어진다고? 나태웅 말고 그런 짓을 할 사람이 누가 있다고.’장선명은 담배를 담뱃갑에 도로 넣었다.“그렇다면 지영이는 널 미워하겠지?”“난 상관없어. 어차피 이미 미워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지영이와 계속 함께하려 한다면...”나태웅은 잠시 말을 멈췄다.고개를 들어 장선명을 바라본 순간 그의 시선에는 어느 때보다도 더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나태웅은 싸늘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지영이와 계속 함께하려 한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 하늘그룹을 부숴버릴 거야. 그렇게 돼도 지영이가 너랑 무사히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아?”진이훈과 구이준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나태웅이 말을 마친 순간 현장
“내가 대신 가서 혼내줄게. 너는 여자니까 이미지 신경 써야지. 착하지?”“싫어요! 이미지 따위는 필요 없어요.”장선명이 바로 핸드폰의 카메라를 켜서 그녀 앞에 내밀었다.안지영은 핸드폰 속 자신의 헝클어진 머리와 마치 미친 여자처럼 보이는 모습을 보고는 순간 얼어붙었다.그녀가 조용해지자 현장의 분위기도 순식간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그 남자 때문에 이런 모습 하려고?”안지영은 말문이 막혔다.‘젠장, 언제 이런 모습이 된 거지?’특히나 더 참을 수 없는 건, 나태웅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사실이었다.‘그놈이 뭐라고 내가 이렇게까지 화내는 거지?’“집에 가자. 착하지?”장선명은 부드럽게 안지영을 달랬다.옆에 있던 구이준은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었다.장선명이 어떤 사람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유명했다.그가 소유한 유흥 장소는 셀 수 없이 많았고 그 안에는 온갖 종류의 미녀들이 넘쳐났다.여린 타입, 매혹적인 타입, 요염한 타입. 남자들이 환장하는 스타일은 차고 넘치도록 많았다.또한 유흥가에 들어오는 여자 중 장선명을 유혹하여 인생을 바꾸고 싶어 하는 여자들도 많았다.당시 구이준과 안열은 장선명 주위를 얼씬거리는 여자들을 수없이 많이 처리했지만 장선명이 여자들에게 시선을 두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그래서 구이준과 안열은 당시 장선명이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건지 의심하기도 했었다.예쁜 여자들이 들끓는 곳에서 어떠한 유혹에도 움직이지 않으니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장선명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타입을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이었다.구이준은 안지영을 유심히 보며 생각했다.‘다른 여자들이랑 비교해도 특별한 건 없어 보이는데... 도련님께서 왜 이 여자를 좋아하시는 거지? 화끈한 성격? 아니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호쾌한 모습?’머리를 정리하던 안지영은 헝클어진 머리로 인해 손가락이 끼여버렸고 그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웠다.그로 인해 나태웅에 대한 그녀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
고은영은 분노에 휩싸인 채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가게를 나왔다.배준우가 간 줄 알았던 그녀는 가게에서 나와 배준우의 차가 원래 자리에 있음을 확인하고는 화가 난 표정으로 차에 올라탔다.통화를 하고 있던 배준우는 그녀를 보자마자 통화를 마무리했다.“그래. 그렇게 처리하고 끊어.”그는 곧바로 고은영의 부풀어 오른 볼을 살짝 꼬집으며 물었다.“화났어?”고은영이 말하지 않아도 배준우는 알 수 있었다.진성택이 분명히 또 진유경과 관련된 이야기로 그녀를 화나게 한 것이다.“계속 곧 죽을 거라는 얘기만 반복하고 있어요.”“도덕적 협박이구나?”배준우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그의 안색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진성택이 진유경을 편애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양녀를 선택하고 친딸을 외면한다는 사실은 생각지도 못했다.평소 세심하지 않은 배준우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고은영에 대한 연민이 짙어졌다.고은영은 더 이상 진성택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매번 만나면 진유경 이야기뿐이었기 때문이다.배준우가 한숨을 내쉬며 위로했다.“화내지 마. 어차피 너한테 중요한 사람도 아니잖아.”“그래도 엄마가 너무 불쌍해요.”그녀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가슴 한구석이 쓰려왔다.‘네 명이 자식이나 낳았으면서 엄마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엄마가 나한테 남긴 마지막 사랑마저도 첫사랑의 딸에게 나누려고 하다니...’“저녁에 네 큰오빠네에 가서 밥 먹을까?”“오빠한테 전화 왔었어요?”말 돌리는 데 성공한 배준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응. 아까 너 봤다면서 저녁에 밥 먹자고 하더라고.”“좋아요!”고은영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정훈과 진윤과 가까워진 후, 고은영은 두 오빠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진성택은 정말 무정했다.아니, 애정은 있었지만 그 대상이 아내와 자식이 아닌 다른 사람일 뿐이었다.“언제 태현 오빠한테 물어볼 거예요?”“조금 있다 시간 내서 만나러 가려고.”“좋아요!”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고은지
“어머니가 나한테 남긴 건 그대로 넘겨주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고은영은 진성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말을 끊었다.싸늘한 고은영의 시선에 진성택의 안색은 순간 창백해졌다.진성택이 무언가를 덧붙이기 전에 고은영이 차갑게 말을 이어갔다.“그렇지 않으면 뭐요? 아시다시피 저는 지금 배준우의 아내예요. 진유경에게 손대는 건 쉬운 일이죠.”“유경이한테 손대지 마. 은영이, 너...”“됐어요! 더 이상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아요!”진유경을 그렇게까지 감싸는 진성택을 바라보며 고은영은 실망감을 넘어 차마 형용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이래?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이길래 이런 일까지 한단 말이야! 아내랑 아이를 도대체 뭐로 보는 거지? 어떻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나한테 이런 요구를 할 수 있어... 엄마가 남긴 소중한 유품을 진유경 같은 년에게 넘기겠다고? 하...’진유경이 단순히 진씨 가문의 양녀였다면 고은영은 아마 이렇게까지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진실을 아는 고은영은 지금 상황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다.설령 눈앞의 남자가 그녀의 혈육이고 아버지라 할지라도 고은영은 그를 혐오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진성택은 그녀의 분노에 애처롭게 그녀를 불렀다.“은영아...”고은영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진성택이 말을 이었다.“나한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게 아니었다면 나도 너한테 와서 이런 부탁 하지 않았을 거야.”“같잖은 호소는 그만 하세요. 저희 사이에 애정이라 칭할 만한 감정도 별로 없잖아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내였던 사람에게 너무하네요. 엄마가 불쌍해요.”그녀는 더욱 화가 났다.비록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머니와 특별한 애정이라 할 감정은 없었지만 진성택이 그녀를 대하는 모습을 보며 고은영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밀려왔다.고은영은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어머니의 깊은 사랑은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진성택은 어떠한가.고은영은 더 이상 그를 보고 싶지 않
고은영이 이렇게나 직설적으로 얘기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저는 이제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해요.” 진성택에게 돌려 말하지 말고 직설적으로 얘기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감정적으로 접근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생각했다.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거고 지금 와서 그것을 지울 수는 없었다. 진성택은 고은영의 말에 상처를 받은 듯 보였다. 그녀의 불만 섞인 태도에 그의 마음이 조금은 아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는 걸 알았다. “너희 둘째 오빠가 병원에 왔었어.” 고은영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쏘아보았고 그는 그녀의 생각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네가 받을 모든 주식들 있잖아. 할머니와 진호영, 그리고 유경이의 지분까지 너에게 줬다던데, 맞지?” 고은영은 차갑게 한 마디로 대답했다. “맞아요.” 드디어 그의 목적을 직접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더욱 차가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진성택은 고은영의 차가운 시선에 조금 떨린 듯 말을 이어갔다. “그 주식들은 사실 네 어머니가 너에게 남긴 거니까 너에게 돌아가야 맞아.” “그래서 저에게 돌려주기 위해서 이곳에 부른 거죠?” 고은영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그가 주고자 한다면 왜 이제서야 이리 말하고 있는지 다시 묻고 싶었다. 진성택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고 그의 눈빛에는 죄책감이 떠올랐다. “미안하지만 그 주식은 네게 돌려줄 수 없을 것 같아.” “돌려줄 수 없다고요? 왜요?” 그의 말은 너무도 간단했다. ‘할 수 없다'라는 말이 또다시 진유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거 같았다. 진유경, 정말 독특한 존재다. 역시나 양딸이 모든 것보다 우선이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짜로 진씨 가문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 두 사람의 양부모는 하나같이 그녀를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너희 둘째 오빠가 그 주식들을 되찾고 나서 진씨 가문의 모든 재정적 지원을 끊어버렸어. 지금 그들은 전부 저축해두었던 돈을 쓰고 있어.” 모든 지원을
하지만 진성택은 다르다. 결국 그녀와 혈연관계가 있기 때문에 배준우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 시간 후, 배준우는 고은영을 밀크티 가게에 데려다주었다. “내가 같이 들어갈까?” 배준우가 물었다. “준우 씨는 그냥 기다려요. 당신을 보면 아마 바로 저세상으로 갈지도 몰라요.” ‘이 녀석 입이 참!’ 하지만 고은영이 말이 맞았다. 예전에 진성택과 량천옥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면 진성택은 항상 배준우에게 진유경을 미래의 아내로 삼으라고 했었고 그때 배준우는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굳이 고은영과 결혼했다. 지금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진성택이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운명의 미묘함을 탄식할 것인가? 아니면 진유경 때문에 속상해할 것인가? 고은영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눈에 보였다. 작은 원탁 옆에 앉아 있는 진성택이. 그는 손에 밀크티를 들고 있었다. 고은영이 두 걸음 내딛자마자 진성택도 그녀를 보았다. “왔니?”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랜만에 본 그의 얼굴은 확실히 더 노화되어 보였고 얼굴색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특히나 얼굴이 누렇게 변했고 예전만큼 눈빛도 밝지 않았다. 고은영은 이제 막 기운이 다 빠진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진성택은 확실히 지금 당장이라도 세상을 떠날 듯한 느낌이었다. 그가 말한 대로 아마 이번이 마지막 만남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고은영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이거 마실 수 있어요?” 진성택은 손에 들고 있던 밀크티를 문득 깨닫고 곧바로 그녀에게 건넸다. “너를 위해 샀어. 여자애들은 다 밀크티 좋아하잖아. 너도 좋아하지?”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밀크티는 그녀의 가장 좋아하는 음료였다. 그런데 배준우와 결혼한 이후로 배준우는 그녀가 밀크티가 몸에 안 좋다며 못 마시게 했다. 진성택은 그녀가 음료를 마시지 않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생각해 보면 나는 사실 유경이에게 이런 걸 사준 적이 없었어. 진씨 가문의
전화 너머의 진성택은 고은영의 말을 듣고 당황해서 말문이 막힌 듯했다. “정말 미안해. 미안하다. 전에는 네 감정을 고려하지 못했어.” 그 순간, 진성택은 자신이 고은영에게 대했던 태도가 문제였음을 인정했다. 고은영이 말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은영아,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야. 큰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반응이 무뎌지는 법이잖아. 나는 그동안 계속 너를 찾고 있었어. 그런데 네 소식을 듣고 나서 어떻게 너를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네가 이런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거란 건 알지만 나도 그런 감정이 싫다.” 감정과 이해라. 처음에는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되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고 쳐도 그럼 그 후에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진짜 아이러니했다. 진성택은 고은영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오늘 내가 너를 찾은 건 정말 중요한 일이 있어.” “그게 진유경의 일 때문인가요?” 고은영은 본능적으로 날카롭게 반문했다. 무슨 일이든 그가 지금까지의 태도를 어떻게 설명하든 고은영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저 지금 그가 자신을 찾은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니, 네 어머니 때문이야.” 이 말은 그가 어쩔 수 없이 털어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전화상에서도 고은영은 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죄책감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될수록 그녀는 더 비웃었다. “내가 이 시간 동안 살 수 있는 건 모두 하늘이 준 기회야. 빼앗은 기회라고 해도 될 정도로. 내가 너를 만날 기회도 얼마 안 남았지.” 그는 매우 허약해 보였다. 고은영은 눈썹을 찌푸렸고 이 느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진성택이 마치 도덕적으로 자신을 억지로 끌어들여서 그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자신이 그를 만나지 않으면 너무 냉정한 사람처럼 보일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디예요?” “병원 맞은편의 밀크티 가게에 있어.” 그는 지금 병원에 입원 중이었고 의사들이
고은영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배준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태현 씨는 량천옥이 언니의 생모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당연히 알고 있지.” 이 일은 병원에서도 크게 떠들썩하게 된 사건이라 나태현 쪽에서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배준우는 고은영을 쳐다보며 이어서 말했다. “네가 말한 대로 나태현과 고은지의 거래가 량천옥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지?” “맞아요. 언니가 천락 그룹으로 돌아간다고 말할 때 량천옥이 아직도 밖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것에 불만을 토로했었는데 그 말투에 분노가 가득했어요.” 고은영은 고은지의 분노에 대해 말을 꺼내면서 마음속이 더욱더 쥐어짜이는 것 같았다. 나태현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지금 상황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고은영은 머릿속이 완전히 엉켜버렸다. 그녀가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것처럼 배준우도 지금은 완전히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준우 씨가 나태현 씨에게 언니와 한 거래가 무엇인지 물어봐 줄 수 있어요? 그리고 희주가 본인 딸인 걸 알고 지신혜 씨와 약혼도 할 건데 왜 언니를 천락 그룹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하는지도 물어봐 줘요.”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고은영은 공포감을 느꼈다. 그녀는 고은지에게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지금은 량천옥에 대해 강한 증오를 느끼고 있더라도 말이다. “내가 나태현 형에게 물어볼게. 너는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려.” “언니에게 말하고 싶어요.” “지금은 안 돼. 내가 먼저 나태현이랑 얘기하고 나서 말해.” 배준우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고은영이 말한 대로 지금은 최소한 나태현이 고은지를 천락 그룹으로 돌아가게 만든 계기가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그럼 빨리 물어봐요.” “응, 알았어.” 배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은영은 여전히 마음이 불안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으로서 지금 그녀는 거대한 음모가 고은지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