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동안, 어색함 속에 고요함이 흘렀다.고은영은 작은 얼굴을 배준우의 품에 묻고 감히 그를 바라보지 못했다.배준우는 그녀의 턱을 쥐고 머리를 들어 올렸고, 고은영은 눈을 꼭 감았다.그녀의 작은 얼굴은 이미 빨갛게 물들었다.“간덩이가 부었군, 감히 나를 놀려?” 배준우는 살며시 웃었다.하지만 그의 심오한 웃음에 고은영은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눈 떠!”배준우가 말했다.“전 졸려서 이만 잘래요.”“어떻게 잘 건데?” 배준우의 야유하는 말속에 분명 다른 뜻이 담겨 있었다.“바, 바로 잘 건데요?”“바로 자? 어떻게?” 배준우 웃음 속의 야유는 더욱 깊어졌고, 곧 바로 그녀에게 거칠게 키스했다.순간 숨 막히는 것을 느낀 고은영은 의식적으로 발버둥 쳤다.하지만 그녀가 몸부림칠수록 배준우는 그녀를 더 꽉 품에 안았다.그의 몸은 몹시나 뜨거웠고, 밤새도록 그녀와 뜨겁게 사랑을 나눴다.……란완리조트.고은영은 시종일관 배준우의 극진한 사랑과 보호를 받고 있었지만, 고은지는 천붕지열의 인생을 맛보게 되었다.오늘 많이 놀라서 그런지, 조희주는 고은지 품에서 이미 깊이 잠들었다.자신과 꼭 닮은 작은 얼굴을 보며, 고은지는 조희주가 자신의 아이가 틀림없음을 직감했다. 병원에서 아이가 바뀌었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이 아이는 조영수의 아이가 아닌데, 이건 또 어떻게 된 일이지?고은지는 머리를 쥐어짜도 도무지 그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아이는 이미 5세가 되었고, 5년 전의 일을 그녀가 어찌 다 기억하겠는가?하지만, 그녀에게 다른 남자는 절대로 없었다!천붕지열을 맛본 고은지는 온밤 잠을 이루지 못했고, 다음 날 아침 이른 시간에 고은영이 찾아왔다.그녀는 고은지를 데리고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아침에 그녀가 병원에 가야 한다고 배준우에게 얘기했었고, 배준우는 그녀에게 영문을 물었다.그녀가 유전자 검사를 해야 한다고 하자, 배준우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게 사람을 시켜
”……”그렇지 않아도 숨이 막혔던 그녀가 이 결과를 듣자 더욱 숨을 쉴 수가 없었다.그녀의 친딸이다, 친딸이 맞다고 했다!눈물이 그녀 자신도 모르게 왈칵 흘러내렸다. 고은영은 그녀를 안았고, 뭐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이 순간 검사 결과와 관련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아이가 고은지의 딸은 맞지만, 조영수의 아이는 아니다. 지금 고은지의 반응을 보니, 그녀 역시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는 눈치이다.고은영은 사람을 잘 위로하지 못하는 성격이고, 지금 이런 상황에서 어떤 말로 그녀를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이건 무슨 상황이지, 왜 이렇게 되었지? 내가 죄인이네!” 고은지는 고통스러워하면서 얘기했다.그녀는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전에 조씨 가문에 있을 때, 조보은 때문에 그녀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많은 억압을 받았다.조씨 가문 역시 조보은 때문에 그녀를 따뜻하게 대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그녀는 늘 원한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결국엔 그녀가 조씨 가문에 큰 잘못을 저지른 죄인이 되지 않았는가! “울지마, 그만 울어!”“은영야, 난 진짜로 그 사람에게 미안한 일을 한 적이 없어, 진짜야!”지금 고은지는 미칠 것만 같았다.비록 지금은 조영수와 이혼했지만, 딸에겐 입이 열 개라도 뭐라 할 말이 없게 되었다.그녀 자신도 이것이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고 있으니.고은영: “다시 잘 생각해 보면 뭐가 떠오르지 않을까?”조희주의 친부가 조영수가 아닌 것이 작은 일은 아니니.고은지는 지금 멘탈이 붕괴되었다: “난 몰라, 진짜로 모른다고… 나도 지금 열심히 회상하고 있어.”아무리 애써 회상해도,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건 정말 큰 일이다!지금 고은영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에 그저 가만히 고은지 옆을 지켜주었고, 오후 5시가 되어서야 그녀의 정서가 조금 안정되었다.조희주는 잠에서 깼고, 멍하니 방문 앞에 서 있었다.진여옥에게 겁을 먹어서인지, 아이는 정서
고은영은 핸드폰으로 조희주에게 햄버거를 배달 시켜주었다.어린아이는 줄곧 고은지의 품에 몸을 숨겼다.짧은 시간에 그녀는 부모의 이혼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친부가 아니라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했다.어린아이에게 이보다 더 잔혹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배달 음식이 도착한 후, 조희주는 먼저 닭다리 하나를 고은지에게 건네주었다. “엄마, 드세요.”고은지가 자신을 버릴까 봐 아이는 불안해하고 있었기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너 많이먹어.”딸의 불안해하는 모습에 고은지는 자신이 죄인처럼 느껴졌다.조영수와 이혼했어도, 만약 조희주가 그의 친딸이었으면, 아이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으로 생활했을 것이다.하지만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이모, 드세요.”고은지 먹지 않자, 아이는 닭다리를 고은영에게 건네주었다.고은영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얘기했다: “이모 안 먹어도 돼, 희주가 많이 먹어.”다들 먹지 않는 것을 본 조희주는 더욱 소심해졌다.고은지는 아이를 품에 안고 앉으면서 닭고기를 건네주었다.“먹어도 돼, 괜찮아.”고은지의 위로 하에 조희주는 그제서야 먹기 시작했고, 작은 입으로 오물오물 조용하게 먹었다.아이의 변화는 아주 컸다. 전에 병으로 아팠을 때도 아이의 활력을 느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이를 보는 사람의 마음을 짠하게 했다.저녁 8시가 되어서 고은영은 그린빌에서 나왔다.고은영이 떠나기 전에 고은지가 그녀에게 얘기했다. “제부에게 5년 전의 일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 좀 해도 될까?”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기에, 그녀는 도무지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어찌 되었든 그녀의 기억에는 그런 일은 없었다.지금 조영수가 조희주의 친부가 아니니, 어떻게든 그때의 일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언니는 희주의 친부를 찾고 싶어?”“적어도 어떤 놈이 그런 짓을 했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이 얘기를 하고 고은지는 잠시 하던 얘기를 멈추고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고 있는 조희주를 돌
배준우는 고은영과 함께 식탁으로 가면서 물었다.도우미는 따뜻한 수건을 건네주었고, 배준우는 손을 닦은 후 수거 쟁반에 놓았다.고은지 얘기에 고은영은 눈가에 슬픔이 가득 서린 채 고개를 저었다.“상황이 좋지 않아요…”하루 사이에 두 건의 친자 확인서를 받았으니, 이것은 정말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왜?”“주희가 언니 전남편 딸이 아니래요. 언니도 지금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고. 당신 5년 전에 있던 일을 한번 알아봐 주는 건 어때요? 아니다, 6년 전이네요!”주희가 이젠 다섯 살이 되었으니, 임신은 6년 전에 했을 것이다.배준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처형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른다고?”“네, 그래서 지금 언니 컨디션이 많이 안 좋아요.” 고은영은 답답해했다.고은지도 모르는 일을 얘기하자니 그녀도 뭐라고 더 얘기하는 것은 난감했다.그날 밤에 배준우가 그녀를 가진 후, 그 역시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모르지 않았던가?그래서 이런 일은, 가끔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를 수도 있다.배준우 역시 같은 생각을 했고, 머리를 끄덕였다.“내가 알아봐 줄게.”“그럼 조용히 알아봐 줘요. 다른 사람은 모르게.” 고은영은 한마디 덧붙였다.배준우는 웃었다. “하하. 내가 그 정도 눈치도 없을까 봐 그래?”“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요!”그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지만 그저 일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혹시 소식이 새어 나갈까 봐 걱정될 뿐이었다.고은지 현재 상황은 아주 엉망이다. 조희주는 학교도 가야 하고, 이런 일을 많은 사람이 알게 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바보야!” 배준우는 그녀에게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몰랐다.가끔은 영리하다가 또 이럴 땐 그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고은영은 불안한 눈빛으로 배준우를 보았다!고은지 얘기를 끝내고, 이젠 자신과 관련된 얘기를 하려고 했지만, 배준우의 야유하는 눈빛을 보니 그녀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몰랐다.지금 진짜로 골치 아픈 일이 많아졌다고 생각이 들
배준우는 또 4통의 전화를 받았다!하나같이 안지영이 맞선을 보려고 한 일을 얘기했고, 하늘그룹을 건드리지 않으면 바로 시집가겠다고 했다는 얘기도 했다. 바로 시집을 간다고? 이렇게나 호탕하단 말인가!안지영이 안씨 가문을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 알 수 있었다.배준우는 이 얘기를 그대로 나태웅에게 전달했다. 그 시각 나태웅과 나태현은 회사에서 미팅 중이었다.….회의실.배준우의 전화를 받은 후 나태웅의 안색은 급격하게 어두워졌고, 미팅이 끝날 때까지 회의실은 감히 숨도 내쉴 수 없을 만큼 긴장한 기류가 감돌았다.미팅이 끝난 후에 나태현이 나태웅에게 물었다. “동영그룹에서 나왔는데도 배준우가 아직도 너한테 수시로 연락해?” 나태현은 책상 위에 있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다른 일 때문이야!”“몇 년동안 넌 충분히 그를 많이 도와줬어.” 가끔 나태현은 동생에게 뭐라고 하면 좋을지 난감했다.또한 그 일 때문에 형제는 몇 년간 서로 서먹서먹하게 지냈고, 태도 역시 냉랭했다.나태웅은 그를 신경 쓰지 않고 핸드폰을 들고 일어서서 회의실을 나갔다.그의 뒷모습을 보는 나태현의 눈빛에는 냉랭함이 스쳐 지났다.사무실에 돌아온 나태웅은 바로 안지영에게 전화 걸었다.그녀는 아마 계속해서 다른 사람과 맞선을 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그녀는 한참 뒤에야 전화를 받았다: “나 대표님.”“어디야?”“지금 맞선보고 있어요.” 안지영은 난감한 듯 얘기했다.그녀의 말투에는 의기소침함이 묻어났다.하루 동안이나 맞선을 보았지만, 그녀는 자신과 결혼하겠다는 상대를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들은 분명 배준우와 친분이 있고 도움 요청할 수 있는 상대이다. 그들 목숨을 내어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녀가 배준우를 두려워하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그들은 배준우와 사이가 좋았다. 혹 자신이 그 정도로 예쁘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생각할수록 안지영은 멘붕이 왔다.안지영이 맞선을 본다는 얘기에, 나태웅은 화를 겨우 참으면서 손목시계를 보았다.그 순간 화가 분출했고,
”엉엉…!” 안지영은 바로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한참 울고 나서 눈물을 닦으니 또 다시 의욕이 살아났다!나태웅이 내일은 무조건 회사에 출근해야 한다고 하니, 오늘밤엔 꼭 적합한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는가?그렇다면 지금의 맞선 상대를 어떻게든 꼭 잘 설득해야 한다.안지영은 속으로 파이팅을 외쳤다!다시 기운을 찾고 레스토랑에 들어와 보니, 자리에는 사람이 가고 없었고, 웨이터가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었다.안지영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뒤로 하고 웨이터에게 물었다. “여기 있던 분은 어디 가셨나요?”안지영을 본 웨이터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아, 조금 전 여기 계시던 분이 계산하시고 먼저 가셨습니다.” “……”설마, 이렇게 그냥 갔다고?다들 배준우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인데, 그가 그렇게 두려운 것인가?배준우의 이름만 듣고 바로 핑계 찾아 떠났고, 이 사람은 아예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그녀가 물, 불 가리지 않고 덥석 매달릴 정도로 귀찮은 여자로만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비록 현재 상황에서 그렇게 하고 싶지만, 결국 안지영은 레스토랑에서 나왔다!핸드백에서 리스트를 꺼냈고, 모두 배준우와 사이가 가까운 사람들이었다.펜으로 체크한 사람은 이미 맞선을 본 상대이고, 배준우와 사이가 제일 좋은 사람들이기에 지금 다른 사람을 찾으려고 해도 시간이 부족하다.안지영은 또 한 번 리스트를 훑어보았고, 육범수와 장선명의 이름을 보게 되었다.육범수는 여자 친구가 있으니 장선명이 그 중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였다.또다시 안지영의 전화를 받은 장선명은 조금 놀란 말투로 물었다. “한번 만나자고?”“네, 꼭 한번 만나 뵙고 싶습니다. 절대로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요!” 안지영은 전화로 얘기했다.한편 장선명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손목시계를 보고 웃으면서 얘기했다. “배준우가 혹시 당신을 이 지경으로 몰아넣었나요?”“그는 나쁜 놈입니다!”안지영은 더 이상 자신의 기분을 감추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사람인가? 자기 마누라가 임신했는데 그녀에게 그 책임을
”이것이 당신이 말한 본론 입니까?” 장선명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안지영을 바라보았다.사실 안지영은 손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지만 애써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참으려고 노력했다.그녀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얘기했다. “장 대표님은 외부를 충분히 놀라게 할만할 물건을 소유하고 계시지요. 만약 당신의 아내가 조금만 행동을 조심하지 않는다면, 장 대표님 역시 목숨이 위태로워지실 수 있습니다.”그 말인즉, 장선명은 여자를 선택함에 있어 신중해야 한다는 뜻이였다. 이 얘기를 들은 장선명은 눈살을 찌푸리며 안지영을 보았고, 감추고 있었던 흉악한 눈빛이 스쳐지나갔지만 돌아서니 그 눈빛은 사라졌고, 건방지게 웃으면서 얘기했다. “그래요?”“장씨 어르신께서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늘 장 대표님 혼사에 대하여 걱정하셨죠. 지금은 적합한 상대도 없으신 것 같고.”“그럼, 당신이 그 적합한 상대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장선명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참 재미있는 여자이다. 분명 속으로는 두려움에 떨고 있으면서 겉으론 엄숙한 표정으로 자신과 거래를 하고 있다.그녀는 준비하고 왔지만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이는 결코 아무 여자나 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어르신에게 예쁨을 받도록 노력할 것이고, 당신이 하는 일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것입니다.”안지영이 말했다.“……”“저와 결혼하시면, 당신을 성가시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성가시게 하지 않는다는 말에 장선명의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그가 몇 년 동안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은, 여자는 귀찮은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 어르신이 그의 결혼을 재촉하는 것 역시 사실이였다.그는 처음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나날이 건강이 나빠진다는 소식에 그도 더 이상 적합한 사람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안지영의 말이 맞았다. 아직은 적합한 사람이 없었다.이 여자 오늘 단단히 준비하고 온 것이로군!“그럼, 당신 조건은 무엇인가요?” 잠시 생각하던 장선명은 웃으면서 안지영을
배준우는 정말이지 도덕성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인간이었기에 장선명이 고개를 끄덕였다.“뭐 이미 그렇게 되기는 했지만, 너네가 걔를 그렇게 속인 건 솔직히 과했다고 생각해.”이렇게 큰일을 그렇게나 오랫동안 속여온데다가 앞으로도 그냥 쭉 그렇게 속일 생각이었다니 말이다. “우리가 잘못한 건 맞지만, 지금은…”거기까지 말한 안지영도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뭘 말하든 이미 늦었다는 걸 느껴버린 탓이었다.어쨌든 배준우 본인도 이제 아내도 아이도 있는 몸인데 남에게만 화풀이하는 모양새가 좋지는 않은 게 분명하니까!“어찌 됐든, 배준우가 더 이상 안 씨 집안을 곤란하게 할 일을 없게 만들어준다고 약속만 해준다면 전 당신에게 시집 갈게요.”장선명이 손에 든 와인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게나 쉽게?”“네. 그렇게 쉽게요.”안지영이 곧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막상 그녀가 이렇게 위축된 모습으로 나오니, 장선명도 이 여자가 꽤 재밌다고 느껴지는 것이었다.그리고 솔직히, 그녀가 꽤 걸맞은 상대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그럼 1년은 어때?”“네?”“맥시멈 3년으로!”장선명이 안지영을 돌아봤다.아주 적절한 기간이었다.평생은 너무 기니, 딱 적당한 시간 말이다. 이 결혼은 어쨌든 기간이 정해진 계약 관계니까.안지영이 채 무슨 뜻인지 모르고 머뭇대는 사이, 장선명이 뒤이어 말을 이었다.“이혼녀가 되는 건 상관없는 거지?”결혼도 아직 안 했는데 이혼 이야기를 해야 된다니!물론 이 결혼이 확실한 목적을 띄고 있는 이상, 안지영도 전혀 그런 것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상관없어요.”“그러면 됐어.”“그러면 선명 씨도 안 씨 집안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하는 거죠?”“당연하지.”마치 약속을 지킬 거라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듯, 장선명은 그 자리에서 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어 배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창 자고 있을 시간이기는 해서, 전화는 한참이 지나서 연결되었다.졸음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여보세요…
‘여자를 갖고 논다고? 도련님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닌데. 밤에 발생했던 일들도 도련님 모르게 벌어졌던 일인데... 일을 조사해 범인을 밝혀냈을 때 그 범인은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했지.’“구이준.”“네.”구이준이 앞으로 나섰다.“웨딩드레스는 킹덤 타운으로 보냈어?”“네. 다 수선해서 보냈습니다.”그 말을 듣고 장선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태웅을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지영이가 직접 입어보고 고른 웨딩드레스야.”이 말은 나태웅의 위협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나태웅은 온몸이 얼어붙은 듯 차갑게 굳었고 장선명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더욱 음울해졌다.“그럼 거절하겠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지?”“너도 예상하던 답 아니야?”장선명이 싸늘하게 웃으며 답했다.언제 장성명이 위협을 받아들였던가.나태웅은 이런 방식으로 두 사람을 헤어지게 만들 수는 없었다.이전에 안지영을 찾아가도 효과를 보지 못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장선명이 안지영을 위해 그녀와 헤어질 것으로 믿는다면 나태웅은 장씨 가문을 너무 만만히 본 것이다.장씨 가문 사람들은 이런 위협을 받아들일 사람들이 아니었다.“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어. 네가 지영이를 빼앗아 간다면 나도 인정하지.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우릴 헤어지게 하려는 거라면 나뿐만 아니라 강성 전체가 너희 나씨 가문을 경멸할 거야.”말을 마친 장선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더 이상 나태웅과 할 이야기가 없었다.태연하고 무서울 것 없는 장선명의 모습은 나태웅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장선명은 두 발짝 걸어 나가다 무언가 떠오른 듯 멈춰 섰다.“참, 하늘그룹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하늘그룹이 없어져도 나는 안지영이 아무렇지 않을 수 있도록 할 방법은 많아. 하지만 너는? 지영이는 널 지금보다 더 원망할 거야.”‘안지영이 자신을 미워하더라고 나도 같이 미워하게 만들겠다고? 도대체 무슨 논리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자기 판단이 흐린 것처럼 지영이도 반쯤 정신을 놓았다고 생각하는 건가?’장선명은 자
3분 후, 나태웅과 장선명이 마주 앉았다. 겉보기엔 평온해 보였지만 현장의 공기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두 사람은 각자 담배 두 개비씩 피울 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진이훈과 구이준은 몸이 굳으며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다.장선명이 세 번째 담배를 꺼내려는 순간 나태웅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그래서 조건이 뭔데?”나태웅과 시간을 소모하려던 장선명은 그 말을 듣고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조건?”또렷한 말투로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는 나태웅은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지금까지 병원에서 아픈 척한 것도 모두 안지영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바보같이 순진한 안지영만이 진지하게 나태웅이 정말 미친 건지 아닌 건지 고민하고 있었다.“그 여자가 널 미워하게 만들지 마.”나태웅은 이를 악물고 하나하나 힘줘 말했다.장선명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왜 나를 미워해야 하지?”장선명이 흥미롭게 물었다.안진섭과 얼마간 관계가 있을 뿐, 장선명은 다른 방면에서 안지영에게 잘못한 건 없었다.“하늘그룹이 너 때문에 없어진다면 널 미워할 거야. 날 미워하듯 널 미워하게 되는게 네가 진정 원하는 거야?”나태웅이 날카롭게 물었다.하지만 애매한 부분이 있어 장선명은 나태웅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하늘 그룹이 나 때문에 없어진다고? 나태웅 말고 그런 짓을 할 사람이 누가 있다고.’장선명은 담배를 담뱃갑에 도로 넣었다.“그렇다면 지영이는 널 미워하겠지?”“난 상관없어. 어차피 이미 미워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지영이와 계속 함께하려 한다면...”나태웅은 잠시 말을 멈췄다.고개를 들어 장선명을 바라본 순간 그의 시선에는 어느 때보다도 더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나태웅은 싸늘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지영이와 계속 함께하려 한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 하늘그룹을 부숴버릴 거야. 그렇게 돼도 지영이가 너랑 무사히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아?”진이훈과 구이준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나태웅이 말을 마친 순간 현장
“내가 대신 가서 혼내줄게. 너는 여자니까 이미지 신경 써야지. 착하지?”“싫어요! 이미지 따위는 필요 없어요.”장선명이 바로 핸드폰의 카메라를 켜서 그녀 앞에 내밀었다.안지영은 핸드폰 속 자신의 헝클어진 머리와 마치 미친 여자처럼 보이는 모습을 보고는 순간 얼어붙었다.그녀가 조용해지자 현장의 분위기도 순식간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그 남자 때문에 이런 모습 하려고?”안지영은 말문이 막혔다.‘젠장, 언제 이런 모습이 된 거지?’특히나 더 참을 수 없는 건, 나태웅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사실이었다.‘그놈이 뭐라고 내가 이렇게까지 화내는 거지?’“집에 가자. 착하지?”장선명은 부드럽게 안지영을 달랬다.옆에 있던 구이준은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었다.장선명이 어떤 사람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유명했다.그가 소유한 유흥 장소는 셀 수 없이 많았고 그 안에는 온갖 종류의 미녀들이 넘쳐났다.여린 타입, 매혹적인 타입, 요염한 타입. 남자들이 환장하는 스타일은 차고 넘치도록 많았다.또한 유흥가에 들어오는 여자 중 장선명을 유혹하여 인생을 바꾸고 싶어 하는 여자들도 많았다.당시 구이준과 안열은 장선명 주위를 얼씬거리는 여자들을 수없이 많이 처리했지만 장선명이 여자들에게 시선을 두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그래서 구이준과 안열은 당시 장선명이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건지 의심하기도 했었다.예쁜 여자들이 들끓는 곳에서 어떠한 유혹에도 움직이지 않으니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장선명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타입을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이었다.구이준은 안지영을 유심히 보며 생각했다.‘다른 여자들이랑 비교해도 특별한 건 없어 보이는데... 도련님께서 왜 이 여자를 좋아하시는 거지? 화끈한 성격? 아니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호쾌한 모습?’머리를 정리하던 안지영은 헝클어진 머리로 인해 손가락이 끼여버렸고 그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웠다.그로 인해 나태웅에 대한 그녀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
고은영은 분노에 휩싸인 채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가게를 나왔다.배준우가 간 줄 알았던 그녀는 가게에서 나와 배준우의 차가 원래 자리에 있음을 확인하고는 화가 난 표정으로 차에 올라탔다.통화를 하고 있던 배준우는 그녀를 보자마자 통화를 마무리했다.“그래. 그렇게 처리하고 끊어.”그는 곧바로 고은영의 부풀어 오른 볼을 살짝 꼬집으며 물었다.“화났어?”고은영이 말하지 않아도 배준우는 알 수 있었다.진성택이 분명히 또 진유경과 관련된 이야기로 그녀를 화나게 한 것이다.“계속 곧 죽을 거라는 얘기만 반복하고 있어요.”“도덕적 협박이구나?”배준우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그의 안색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진성택이 진유경을 편애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양녀를 선택하고 친딸을 외면한다는 사실은 생각지도 못했다.평소 세심하지 않은 배준우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고은영에 대한 연민이 짙어졌다.고은영은 더 이상 진성택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매번 만나면 진유경 이야기뿐이었기 때문이다.배준우가 한숨을 내쉬며 위로했다.“화내지 마. 어차피 너한테 중요한 사람도 아니잖아.”“그래도 엄마가 너무 불쌍해요.”그녀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가슴 한구석이 쓰려왔다.‘네 명이 자식이나 낳았으면서 엄마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엄마가 나한테 남긴 마지막 사랑마저도 첫사랑의 딸에게 나누려고 하다니...’“저녁에 네 큰오빠네에 가서 밥 먹을까?”“오빠한테 전화 왔었어요?”말 돌리는 데 성공한 배준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응. 아까 너 봤다면서 저녁에 밥 먹자고 하더라고.”“좋아요!”고은영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정훈과 진윤과 가까워진 후, 고은영은 두 오빠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진성택은 정말 무정했다.아니, 애정은 있었지만 그 대상이 아내와 자식이 아닌 다른 사람일 뿐이었다.“언제 태현 오빠한테 물어볼 거예요?”“조금 있다 시간 내서 만나러 가려고.”“좋아요!”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고은지
“어머니가 나한테 남긴 건 그대로 넘겨주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고은영은 진성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말을 끊었다.싸늘한 고은영의 시선에 진성택의 안색은 순간 창백해졌다.진성택이 무언가를 덧붙이기 전에 고은영이 차갑게 말을 이어갔다.“그렇지 않으면 뭐요? 아시다시피 저는 지금 배준우의 아내예요. 진유경에게 손대는 건 쉬운 일이죠.”“유경이한테 손대지 마. 은영이, 너...”“됐어요! 더 이상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아요!”진유경을 그렇게까지 감싸는 진성택을 바라보며 고은영은 실망감을 넘어 차마 형용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이래?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이길래 이런 일까지 한단 말이야! 아내랑 아이를 도대체 뭐로 보는 거지? 어떻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나한테 이런 요구를 할 수 있어... 엄마가 남긴 소중한 유품을 진유경 같은 년에게 넘기겠다고? 하...’진유경이 단순히 진씨 가문의 양녀였다면 고은영은 아마 이렇게까지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진실을 아는 고은영은 지금 상황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다.설령 눈앞의 남자가 그녀의 혈육이고 아버지라 할지라도 고은영은 그를 혐오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진성택은 그녀의 분노에 애처롭게 그녀를 불렀다.“은영아...”고은영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진성택이 말을 이었다.“나한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게 아니었다면 나도 너한테 와서 이런 부탁 하지 않았을 거야.”“같잖은 호소는 그만 하세요. 저희 사이에 애정이라 칭할 만한 감정도 별로 없잖아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내였던 사람에게 너무하네요. 엄마가 불쌍해요.”그녀는 더욱 화가 났다.비록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머니와 특별한 애정이라 할 감정은 없었지만 진성택이 그녀를 대하는 모습을 보며 고은영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밀려왔다.고은영은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어머니의 깊은 사랑은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진성택은 어떠한가.고은영은 더 이상 그를 보고 싶지 않
고은영이 이렇게나 직설적으로 얘기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저는 이제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해요.” 진성택에게 돌려 말하지 말고 직설적으로 얘기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감정적으로 접근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생각했다.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거고 지금 와서 그것을 지울 수는 없었다. 진성택은 고은영의 말에 상처를 받은 듯 보였다. 그녀의 불만 섞인 태도에 그의 마음이 조금은 아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는 걸 알았다. “너희 둘째 오빠가 병원에 왔었어.” 고은영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쏘아보았고 그는 그녀의 생각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네가 받을 모든 주식들 있잖아. 할머니와 진호영, 그리고 유경이의 지분까지 너에게 줬다던데, 맞지?” 고은영은 차갑게 한 마디로 대답했다. “맞아요.” 드디어 그의 목적을 직접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더욱 차가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진성택은 고은영의 차가운 시선에 조금 떨린 듯 말을 이어갔다. “그 주식들은 사실 네 어머니가 너에게 남긴 거니까 너에게 돌아가야 맞아.” “그래서 저에게 돌려주기 위해서 이곳에 부른 거죠?” 고은영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그가 주고자 한다면 왜 이제서야 이리 말하고 있는지 다시 묻고 싶었다. 진성택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고 그의 눈빛에는 죄책감이 떠올랐다. “미안하지만 그 주식은 네게 돌려줄 수 없을 것 같아.” “돌려줄 수 없다고요? 왜요?” 그의 말은 너무도 간단했다. ‘할 수 없다'라는 말이 또다시 진유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거 같았다. 진유경, 정말 독특한 존재다. 역시나 양딸이 모든 것보다 우선이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짜로 진씨 가문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 두 사람의 양부모는 하나같이 그녀를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너희 둘째 오빠가 그 주식들을 되찾고 나서 진씨 가문의 모든 재정적 지원을 끊어버렸어. 지금 그들은 전부 저축해두었던 돈을 쓰고 있어.” 모든 지원을
하지만 진성택은 다르다. 결국 그녀와 혈연관계가 있기 때문에 배준우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 시간 후, 배준우는 고은영을 밀크티 가게에 데려다주었다. “내가 같이 들어갈까?” 배준우가 물었다. “준우 씨는 그냥 기다려요. 당신을 보면 아마 바로 저세상으로 갈지도 몰라요.” ‘이 녀석 입이 참!’ 하지만 고은영이 말이 맞았다. 예전에 진성택과 량천옥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면 진성택은 항상 배준우에게 진유경을 미래의 아내로 삼으라고 했었고 그때 배준우는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굳이 고은영과 결혼했다. 지금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진성택이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운명의 미묘함을 탄식할 것인가? 아니면 진유경 때문에 속상해할 것인가? 고은영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눈에 보였다. 작은 원탁 옆에 앉아 있는 진성택이. 그는 손에 밀크티를 들고 있었다. 고은영이 두 걸음 내딛자마자 진성택도 그녀를 보았다. “왔니?”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랜만에 본 그의 얼굴은 확실히 더 노화되어 보였고 얼굴색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특히나 얼굴이 누렇게 변했고 예전만큼 눈빛도 밝지 않았다. 고은영은 이제 막 기운이 다 빠진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진성택은 확실히 지금 당장이라도 세상을 떠날 듯한 느낌이었다. 그가 말한 대로 아마 이번이 마지막 만남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고은영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이거 마실 수 있어요?” 진성택은 손에 들고 있던 밀크티를 문득 깨닫고 곧바로 그녀에게 건넸다. “너를 위해 샀어. 여자애들은 다 밀크티 좋아하잖아. 너도 좋아하지?”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밀크티는 그녀의 가장 좋아하는 음료였다. 그런데 배준우와 결혼한 이후로 배준우는 그녀가 밀크티가 몸에 안 좋다며 못 마시게 했다. 진성택은 그녀가 음료를 마시지 않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생각해 보면 나는 사실 유경이에게 이런 걸 사준 적이 없었어. 진씨 가문의
전화 너머의 진성택은 고은영의 말을 듣고 당황해서 말문이 막힌 듯했다. “정말 미안해. 미안하다. 전에는 네 감정을 고려하지 못했어.” 그 순간, 진성택은 자신이 고은영에게 대했던 태도가 문제였음을 인정했다. 고은영이 말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은영아,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야. 큰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반응이 무뎌지는 법이잖아. 나는 그동안 계속 너를 찾고 있었어. 그런데 네 소식을 듣고 나서 어떻게 너를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네가 이런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거란 건 알지만 나도 그런 감정이 싫다.” 감정과 이해라. 처음에는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되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고 쳐도 그럼 그 후에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진짜 아이러니했다. 진성택은 고은영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오늘 내가 너를 찾은 건 정말 중요한 일이 있어.” “그게 진유경의 일 때문인가요?” 고은영은 본능적으로 날카롭게 반문했다. 무슨 일이든 그가 지금까지의 태도를 어떻게 설명하든 고은영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저 지금 그가 자신을 찾은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니, 네 어머니 때문이야.” 이 말은 그가 어쩔 수 없이 털어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전화상에서도 고은영은 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죄책감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될수록 그녀는 더 비웃었다. “내가 이 시간 동안 살 수 있는 건 모두 하늘이 준 기회야. 빼앗은 기회라고 해도 될 정도로. 내가 너를 만날 기회도 얼마 안 남았지.” 그는 매우 허약해 보였다. 고은영은 눈썹을 찌푸렸고 이 느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진성택이 마치 도덕적으로 자신을 억지로 끌어들여서 그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자신이 그를 만나지 않으면 너무 냉정한 사람처럼 보일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디예요?” “병원 맞은편의 밀크티 가게에 있어.” 그는 지금 병원에 입원 중이었고 의사들이
고은영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배준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태현 씨는 량천옥이 언니의 생모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당연히 알고 있지.” 이 일은 병원에서도 크게 떠들썩하게 된 사건이라 나태현 쪽에서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배준우는 고은영을 쳐다보며 이어서 말했다. “네가 말한 대로 나태현과 고은지의 거래가 량천옥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지?” “맞아요. 언니가 천락 그룹으로 돌아간다고 말할 때 량천옥이 아직도 밖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것에 불만을 토로했었는데 그 말투에 분노가 가득했어요.” 고은영은 고은지의 분노에 대해 말을 꺼내면서 마음속이 더욱더 쥐어짜이는 것 같았다. 나태현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지금 상황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고은영은 머릿속이 완전히 엉켜버렸다. 그녀가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것처럼 배준우도 지금은 완전히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준우 씨가 나태현 씨에게 언니와 한 거래가 무엇인지 물어봐 줄 수 있어요? 그리고 희주가 본인 딸인 걸 알고 지신혜 씨와 약혼도 할 건데 왜 언니를 천락 그룹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하는지도 물어봐 줘요.”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고은영은 공포감을 느꼈다. 그녀는 고은지에게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지금은 량천옥에 대해 강한 증오를 느끼고 있더라도 말이다. “내가 나태현 형에게 물어볼게. 너는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려.” “언니에게 말하고 싶어요.” “지금은 안 돼. 내가 먼저 나태현이랑 얘기하고 나서 말해.” 배준우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고은영이 말한 대로 지금은 최소한 나태현이 고은지를 천락 그룹으로 돌아가게 만든 계기가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그럼 빨리 물어봐요.” “응, 알았어.” 배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은영은 여전히 마음이 불안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으로서 지금 그녀는 거대한 음모가 고은지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