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가 필요한 방법도 있어.”나태웅은 대가라는 두 글자를 강조했고 그의 말에 안지영도 깜짝 놀랐다.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안진섭이 하늘그룹을 위해 한 노력들이 스쳐 지나갔고 순간 코끝이 찡했다!“무슨 대가요?”“그건 네가 하늘그룹을 위해 뭘 할 수 있는지 먼저 봐야겠지?”나태웅의 목소리는 더욱 그윽해졌고 너무 깊어 그의 기분을 알아챌 수 없었지만, 깊은 곳의 밑바닥을 느낄 수 있었기에 언제라도 그 속에 빠질 것만 같았다.안지영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결국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말했다.“뭘 해야 하죠?”“뭐든지 할 수 있겠어?”“근데 그게 뭔지는 들어봐야겠어요!”“그렇다면 너에게 하늘그룹은 별로 소중하지 않은 것 같네!”나태웅은 살짝 소리내어 웃었고, 안지영은 그 웃음이 자기를 비웃는 것 같았다.왜 소중하지 않단 말인가?그녀는 안진섭이 무엇 때문에 그녀더러 밖에서 경험을 쌓으라고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녀가 앞으로 이 회사를 잘 인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하늘그룹은 그가 평생 심혈을 기울여 키운 회사이기에 반드시 관리를 잘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맡겨야 했다.그녀는 안진섭의 외동딸이기에 안진섭은 당연히 그녀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그게 아니었다면 몇 년 동안 용돈도 스스로 벌어서 쓰라며 모질게 굴지 않았을 것이다.그 이유는 다 그녀가 밖에서 충분히 경험을 쌓기를 바라서였다.그가 이렇게 마음을 쓰는데 그녀가 어떻게 하늘그룹이 그녀 때문에 배준우에게 보복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단 말인가!그리고 이미 당한 진영그룹의 처참한 모습이 그녀의 눈에 선했다!결국 안지영은 눈을 뜨고 큰 결심이라도 한 듯 나태웅을 바라보며 말했다.“가르쳐 주세요!”그러자 나태웅이 말했다.“배준우와 중재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서 결혼하면 하늘그룹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저를 팔라고요?”안지영은 깜짝 놀라서 나태웅을 바라봤다.자기가 굽신거리며 얻어낸 것이 이런 좋지 않은 방법이라는 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자기를 팔
안지영은 어떻게 천락그룹에서 나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그녀는 길을 걸으며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고 그녀는 그저 온몸이 차갑게 느껴졌다.머릿속에는 방금 나태웅이 했던 말들이 계속해서 떠올랐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나태웅의 말대로 정말 그 길밖에 없는 것 같았다.어쨌든 이번에 건드린 사람이 배준우이기 때문이다!배준우를 건드려서 화나게 만든다면 어떻게 되는지는 진영그룹이 가장 좋은 예시일 것이다. 진영그룹은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에 파산까지 내몰렸다.비록 배준우가 3일이라고 했지만, 이미 조용히 준비하고 있을지도 몰랐다.그때 전화기 진동음이 그녀의 생각을 끊어버렸다.휴대폰을 꺼내 확인해 보니 안진섭에게서 온 전화였다.전화를 받는 순간 그녀는 눈가가 빨개지더니 왈칵 눈물을 쏟기 시작했고 억지로 흐느낌을 참으며 말했다.“아버지.”“지금 어디야?”“회사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자마자 안지영은 집으로 향했고 1시간 가까이 운전한 후 집에 도착했다.시간은 이미 새벽 2시였지만 아직도 집 안의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것을 보니 안진섭의 초조한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안으로 들어가자 안진섭이 찻잔을 들어 차를 마시며 한숨을 내쉬고 있는 게 보였다.안지영은 신발을 갈아신고 그에게 다가가 가볍게 불렀다.“아버지.”그녀의 부름에 안진섭은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늘 당찬 딸의 눈가가 빨간 것을 보고 멍해졌다.모든 화가 순식간에 사라졌다!그는 그녀에게 팔을 벌리며 말했다.“이리 와.”그의 말에 안지영의 눈물은 다시 한번 쏟아졌다.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이미 안진섭이 그녀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만반의 준비를 했었고 심지어는 벨트로 그녀를 때릴지도 모를 거라는 생각까지 했었다.그런데 이렇게 화를 내지 않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안진섭의 품에 안기자, 안지영의 감정도 순간 무너지고 말았다.“아버지, 정말 죄송해요. 후과가 이렇게 엄중할 줄은 몰랐어요.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요... 흑흑..”안지영은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그녀
안지영은 깜짝 놀라 안진섭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해외로 나가라고? 그녀더러 해외로 나가라고?!안지영은 순간 가슴이 아팠고 아버지가 이 상황에서도 그녀를 지켜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하지만 지금 배준우 쪽은 화가 단단히 났을 것이고 이 일의 장본인인 그녀가 해외로 나간다면 하늘그룹은 정말 끝장날지도 모른다.“안 돼요, 이 상황에 제가 어떻게 가요?”“안 가면 뭐 하려고? 배준우가 널 진승연 꼴로 만드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진승연은 전에 배준우와 약간의 친분이 있었지만, 결국은 그 모양이 되었다.만약 안지영이라면 분명 좋은 결과가 없을 것이다!이것이 바로 안진섭이 돌아온 후 3시간 동안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이었다.진승연이라는 말에 안지영은 참지 못하고 몸을 살짝 떨었다.진승연의 결말은 정말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 그렇게 당할 만했다.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녀도 약간 당해도 할말이 없는 것이 있기는 했다.“아주머니가 네 짐 싸고 있어. 내일 아침 6시 비행기니까 준비 끝나면 바로 공항으로 가!”아침 6시? 그러면 집에도 있지 말라는 건가?안지영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싫어요, 저 해외 안 갈 거예요!”“말 들어, 착하지?”안진섭은 인내심 있게 그녀를 달랬다.하지만 그가 달래주자, 안지영의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고 그 순간 마음이 너무나도 괴로워졌다.“제가 가면 배준우가 분명 더 화를 낼 거예요. 그럼 그때 아버지는 어떻게 하시려고요?”“이 늙은이를 그자가 뭘 어떻게 할 수나 있겠어?”그녀의 말에 안진섭은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솔직하게 말해서 일이 이렇게 변하게 될 걸 알았다면 진즉에 말하러 가지 않았을 것이다.젊은이들의 냉정하고 잔인함에 안진섭은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랐다.이미 그를 건드렸으니, 언젠가는 감당할 수 없는 날이 분명 올 것이다.그래서 오늘의 자백에 대해 그는 후회한다거나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저 결과를 빨리 마주했을 뿐이다.“안 돼요. 하늘
지영은 결국 강성을 떠나지 않은 것이었다!진섭 역시 그녀에겐 별 수가 통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준우 쪽에 가서 어떻게든 상황을 호전시켜 보는 방법을 생각하는 듯해 보였다. 동시에 지영도 가만히 손 놓고만 있지는 않아서, 내내 결혼은커녕 연애조차 하지 않다가, 갑자기 그다음 날부터 선 자리에 나가기 시작했다!한 방에 3번의 선 자리라니, 이렇게 적극적이라면, 누구든 한눈에 보자마자 그녀의 목적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아무나 잡아서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급한 와중에 그녀는 무조건 안 씨 집안을 도와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그리고 마침, 이 선 상대방 중에는 장 씨 가문의 넷째 장신명과 진 씨 가문 첫째 진윤도 있었다!오전 10시가 되자마자, 준우의 핸드폰으로 선명과 윤에게서 연달아 전화가 걸려왔다. 대체 안 씨 집안 딸내미가 뭔 바람이 불었길래 당일에 도장을 찍자고 난리인지 묻는 전화였다.준우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너한테 시집간다고?”“아니, 내가 아니라… 지금 그쪽은 그냥 자기랑 결혼할 자신이 있고, 안 씨네를 좀 도와줄 수 있으면 바로 시집을 간다는 뜻이야!”“엥?”준우는 눈썹을 모으며 생각했다. ‘안지영 얘는 아무리 급해도 앞뒤는 가릴 줄 알아야지, 장선명, 진윤 얘네랑 내 관계를 모른다는 거야?나 실장이 아무래도 뭘 좀 잘못 짚은 것 같은데.’그때, 선명이 빈정댔다. “나 걔한테 그냥 장가나 확 갈까?”"네가 그러면 아마 누군가 널 죽이려고 들걸?”“아니 이러면 너를 건드리는 거 아냐? 왜 또 갑자기 여기서 누군가가 나와?”고작 한 달여 못 봤을 뿐인데, 설마 또 무슨 대단한 일이 벌어졌을까 싶다가도, 준우의 의미심장한 말에 선명의 입꼬리에 걸린 웃음이 슬쩍 삐딱해졌다.요즘 변한 게 어디 배 준우 한 사람일까. 세상 전체가 엉망진창인데.한편, 은영은 휴게실에 있다.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준우는 별다른 말이 없었고, 그 침묵은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전화를 하는 준우의 목소리에서 얼핏 지
그리고 그런 준우의 날카로운 말투에 은영도 잔뜩 겁을 먹어 버렸다.설마, 아니겠지?“그러면 저 아무 말도 안 할게요…!”아무래도 그렇게 위협적으로 말하면, 더 말하고 싶다가도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기 마련이다.더 말했다가 진짜로 안 가에 뭔 일이라도 생긴다면, 정말로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겠으니까.일이 이렇게까지 되니, 수습도 도무지 쉽지가 않았다.“그…그러시면, 저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은영이 불쌍하게 물었다.지영의 이야기가 안 된다면, 뭐 차라리 내 이야기라도 해 보자 싶었다.어젯밤부터 지금까지, 그가 그렇게까지 격렬하게 반응하지는 않았기에 은영은 준우가 이 일에 대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고, 그저 대충 어젯밤에나 안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준우의 나긋나긋한 태도에 그녀가 겁을 먹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겁을 잔뜩 먹어서 그야말로 벌벌 떠는 은영을 가만히 바라보던 준우의 입가에 보기 좋은 호선이 그려졌다.그 미소야말로 가장 은영을 겁먹게 만드는 것이긴 했지만.“그건 아직 생각 안 해봤어.”“……”아직, 생각을 안 해봤다고?!그러니까 아직까지도 안 가든, 본인이든,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도 안 했다는 건가?“그, 그러면 차라리 절 처리해 버리세요! 전 어떻게든 할 테니까요!”안 씨 집안에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방금 전의 서슬 퍼런 경고를 생각하니 차마 ‘안 가’ 두 글자는 입에서 떨어지지가 않았다.꽤나 당돌하고 용기 있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준우는 비웃듯 픽 웃었다.“걱정하지 마. 넌 어차피 나한테서 도망 못 가니까!”이 말은 정말이지 은영에게 어떤 선고와도 같았기에 그녀는 더 겁을 먹고 말았다.이 염라대왕이 뭐가 됐든 아직 시작조차 안 했다는 건 자명하고, 뭘 정말 하기 시작하면 끝장을 보리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조용히 기다리는 수밖에!잔뜩 질린 은영의 모습에 준우의 눈가에 장난기가 어렸다.“목도리는 다 떠
준우와의 전화가 끝나자마자 태웅은 재빨리 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마도 한창 선 자리가 진행 중이었던 것인지, 한참이 지나서야 신호음이 끝나고 그녀가 드디어 전화를 받았다.“나 대표님!”“지영 씨, 지금 어디야?”“저 밖이요. 오늘 연차 썼어요.”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지영의 목소리는 다소 힘이 없었다.안 그래도 짜증이 가득 차 있었는데, 지영이 그런 말을 하니 태웅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왜? 연차 쓰고 선보러 다니게?” “네 맞아요! 어떻게 알았어요?!”그녀의 당당한 태도에 태웅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이 계집애는 대체 뭔 생각이지? 네 맞아요? 뭐 얼마나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이라고?“연애 한 번 해본 적 없는 게 아주 스스로 팔려가듯이 시집가려고 작정했구나?!”“저는 그냥 대표님이 하신 말씀을 들은 거잖아요! 저도 스스로 방법을 찾아보는 거라고요."대꾸하는 지영의 말투에도 억울함이 가득했다.배준우 성깔머리를 조금 죽일 만한 상대방을 찾으라는 게 조언 아니었던가? 열심히 자기 조언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한테 응원은 못 해줄망정!당연히 냅다 시집으로 방법을 강구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는 모습을 보면 지영도 딸 된 도리로서 마음이 아파서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던 것이었다. 이곳에 남았으니 결국 책임도 스스로 져야지, 하며 어떻게든 안 씨 가문을 지켜보려는 그녀 딴의 노력이기도 했다.“그래서 방법은 생각한 거야? 걔네들이 너한테 장가 가겠대?”“아니요!”하지만 이 부분을 굳이 말로 꺼내자니 지영도 속된 말로 멘탈 붕괴가 오는 것이었다.스스로 생각하기에 제 외적인 부분이 어디 가서 뒤떨어지는 수준도 아니고, 선 봤던 이들도 전부 배 준우 그 주변의 인물들이니, 아무래도 준우 앞에서도 할 말은 다 할 수준의 한가락 하는 사람들이었다.그런데 벌써 셋이나 만났는데도 아무도, 그 어느 누구도 결혼하자는 놈이 없으니 말이다. 특히 장선명 이 인간은, 강성에서 무서울 것 없는 것 뻔히
보은이 밀린 병원비가 한두 푼이 아니다 보니, 준호 역시 여기서 일을 하고 있었다.돈을 다 갚고 나서야 그들은 떠날 수 있다. 요 며칠 내내 보은은 안 그래도 빚을 갚으려고 열심히 일하고 있었는데 심지어 벌금까지 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이런 식이면 대체 언제나 병원비를 다 갚을 수 있을지 미지수일 정도였다.입 하나 간수 못하긴! 준호는 보은과 함께 여기서 고생하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맨날 그놈의 벌금, 벌금! 아주 사람 피를 쫙쫙 말리다 못해 마시라고 하면 되겠네! 지겨워서 원!”보은이 씹듯이 내뱉었다. 꽤나 악에 받힌 모양새였다.“그만 주절대고 일이나 해!”“주절댄다고? 내가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된 게 다 누구 때문인데?”이제 보은은 제대로 화가 올라온 모양이었다.예전의 자신이었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고향 사람들은 전부 도시로 옮겨 와서 날이 갈수록 떵떵거리면서 잘 살고 있는데, 정작 우리는 갈수록 가난해지고 있다니! “얼른 은지 그 계집애한테 다시 전화나 걸어 봐요!”보은이 준호를 닦달했다. 서준호는 계부일지언정, 적어도 은지를 학대하지는 않았었다.보은도 몇 번이고 은지에게 전화를 걸기는 했었지만, 단 한 번도 받지 않는 것을 보자니 꽤 마음을 독하게 먹었구나 싶기는 했다.은영 쪽은 이미 기대하기도 뭣한 상황이었기에 은근 슬쩍 은지 쪽에 희망을 실어보려는 모양새였다.“받지도 않는 애한테 뭣하러 전화를 계속해?”그녀가 전화를 만에 하나 받았다 하더라도, 요즘의 은지라면 절대 코빼기도 비치지 않을 것이 뻔했다.요 며칠의 은지는 꼭 사람이 변한 것처럼 달라졌으니까.준호는 사실 은지든, 은영이든, 자신들이 기댈 수 있는 구석은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어쨌든 걸어요!”물론 보은은 그런 걸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희망이 있든 없든, 또 혹시 알아? 계속 걸면 조은지 고것도 마음이 약해지겠지!준호는 또 앞뒤 없이 성을 내는 보은을 보며 투덜댔다.“이 여편네야, 예전에 걔한테 그렇게 하지만 않았어도
서정우 그리고 조보은과 자라면서, 은영이 가장 많이 배운 것은 바로 냉정함이었다.그 냉정함에 상처받았지만, 이제는 그 것으로 그들을 떨쳐 낼 수 있게 되었다.지금 보은은 병원에서 익숙지도 않은 궂은일을 하느라 정신줄을 놓을 지경이었다.이미 일을 한지도 꽤 되었는데 한 마디도 없는 은영 때문에 열이 받아서 머리통이 열리기 일보 직전이지만, 보은은 그 화를 숨기며 은근하게 물었다.“엄마가 그렇게 밉니?”“저는 엄마 때문에 하마터면 죽을뻔 했다고요!”보은이 화를 숨기며 물은 말투보다도 훨씬 더 덤덤하게 은영이 대꾸했다.물론 겉으로만 포장한 덤덤함이었지만, 그 순간에도 은영은 스스로에게 그녀가 한 짓을 되뇌고 있었다.“그때는 화가 많이 나서 그랬지. 너는 무슨 그런 일을 아직까지도 마음에 담고 있어? 그때는 그랬어, 그때 자식한테 안 그러는 부모가 어디 있었겠어? 당 씨 아주머니네 생각 안 나니? 그 집 애는 매 맞다가 이까지 빠졌었잖아!”“아주머니는 바로 애를 데리고 병원에 갔어요. 애가 다치거나 어디 잘못될까 봐! 엄마는 그러지 않았잖아요!” “나는 네가 그렇게 심하게 다친 줄은 몰랐어.”“됐어요, 지금 와서 이렇다 저렇다 따져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저한테 심하게 한 게 한두 번도 아닌데!”그건 그냥 첫 번째 시작일 뿐이었다.할머니와 함께 있어도 보은은 은영만 보면 못 잡아먹어 안달이였기에 보은의 그림자도 무서워서 피해 다니던 은영이었다. 어쩌다 같이 있게 되면 온 힘을 다해 보은의 눈치를 보고, 안색을 살피며 행동하며 지냈다.어느 날에는 아무 이유 없이 옷걸이가 부러지도록 맞기도 했다.그런 나날들이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한데!왜 나에게 그렇게 못되게 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풀리지 않던 의문이었다.그러다 지영과 이야기하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설마 진짜 친딸이 아니라서 그러나, 하는 것이었다.“너는 애가 왜 그렇게 속이 좁고 독하니? 네가 그 모양이니까 은지도 네 덕에 지금 이 모양 이 꼴인 거 아니니?”결국 자연
‘여자를 갖고 논다고? 도련님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닌데. 밤에 발생했던 일들도 도련님 모르게 벌어졌던 일인데... 일을 조사해 범인을 밝혀냈을 때 그 범인은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했지.’“구이준.”“네.”구이준이 앞으로 나섰다.“웨딩드레스는 킹덤 타운으로 보냈어?”“네. 다 수선해서 보냈습니다.”그 말을 듣고 장선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태웅을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지영이가 직접 입어보고 고른 웨딩드레스야.”이 말은 나태웅의 위협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나태웅은 온몸이 얼어붙은 듯 차갑게 굳었고 장선명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더욱 음울해졌다.“그럼 거절하겠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지?”“너도 예상하던 답 아니야?”장선명이 싸늘하게 웃으며 답했다.언제 장성명이 위협을 받아들였던가.나태웅은 이런 방식으로 두 사람을 헤어지게 만들 수는 없었다.이전에 안지영을 찾아가도 효과를 보지 못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장선명이 안지영을 위해 그녀와 헤어질 것으로 믿는다면 나태웅은 장씨 가문을 너무 만만히 본 것이다.장씨 가문 사람들은 이런 위협을 받아들일 사람들이 아니었다.“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어. 네가 지영이를 빼앗아 간다면 나도 인정하지.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우릴 헤어지게 하려는 거라면 나뿐만 아니라 강성 전체가 너희 나씨 가문을 경멸할 거야.”말을 마친 장선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더 이상 나태웅과 할 이야기가 없었다.태연하고 무서울 것 없는 장선명의 모습은 나태웅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장선명은 두 발짝 걸어 나가다 무언가 떠오른 듯 멈춰 섰다.“참, 하늘그룹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하늘그룹이 없어져도 나는 안지영이 아무렇지 않을 수 있도록 할 방법은 많아. 하지만 너는? 지영이는 널 지금보다 더 원망할 거야.”‘안지영이 자신을 미워하더라고 나도 같이 미워하게 만들겠다고? 도대체 무슨 논리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자기 판단이 흐린 것처럼 지영이도 반쯤 정신을 놓았다고 생각하는 건가?’장선명은 자
3분 후, 나태웅과 장선명이 마주 앉았다. 겉보기엔 평온해 보였지만 현장의 공기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두 사람은 각자 담배 두 개비씩 피울 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진이훈과 구이준은 몸이 굳으며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다.장선명이 세 번째 담배를 꺼내려는 순간 나태웅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그래서 조건이 뭔데?”나태웅과 시간을 소모하려던 장선명은 그 말을 듣고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조건?”또렷한 말투로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는 나태웅은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지금까지 병원에서 아픈 척한 것도 모두 안지영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바보같이 순진한 안지영만이 진지하게 나태웅이 정말 미친 건지 아닌 건지 고민하고 있었다.“그 여자가 널 미워하게 만들지 마.”나태웅은 이를 악물고 하나하나 힘줘 말했다.장선명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왜 나를 미워해야 하지?”장선명이 흥미롭게 물었다.안진섭과 얼마간 관계가 있을 뿐, 장선명은 다른 방면에서 안지영에게 잘못한 건 없었다.“하늘그룹이 너 때문에 없어진다면 널 미워할 거야. 날 미워하듯 널 미워하게 되는게 네가 진정 원하는 거야?”나태웅이 날카롭게 물었다.하지만 애매한 부분이 있어 장선명은 나태웅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하늘 그룹이 나 때문에 없어진다고? 나태웅 말고 그런 짓을 할 사람이 누가 있다고.’장선명은 담배를 담뱃갑에 도로 넣었다.“그렇다면 지영이는 널 미워하겠지?”“난 상관없어. 어차피 이미 미워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지영이와 계속 함께하려 한다면...”나태웅은 잠시 말을 멈췄다.고개를 들어 장선명을 바라본 순간 그의 시선에는 어느 때보다도 더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나태웅은 싸늘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지영이와 계속 함께하려 한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 하늘그룹을 부숴버릴 거야. 그렇게 돼도 지영이가 너랑 무사히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아?”진이훈과 구이준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나태웅이 말을 마친 순간 현장
“내가 대신 가서 혼내줄게. 너는 여자니까 이미지 신경 써야지. 착하지?”“싫어요! 이미지 따위는 필요 없어요.”장선명이 바로 핸드폰의 카메라를 켜서 그녀 앞에 내밀었다.안지영은 핸드폰 속 자신의 헝클어진 머리와 마치 미친 여자처럼 보이는 모습을 보고는 순간 얼어붙었다.그녀가 조용해지자 현장의 분위기도 순식간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그 남자 때문에 이런 모습 하려고?”안지영은 말문이 막혔다.‘젠장, 언제 이런 모습이 된 거지?’특히나 더 참을 수 없는 건, 나태웅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사실이었다.‘그놈이 뭐라고 내가 이렇게까지 화내는 거지?’“집에 가자. 착하지?”장선명은 부드럽게 안지영을 달랬다.옆에 있던 구이준은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었다.장선명이 어떤 사람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유명했다.그가 소유한 유흥 장소는 셀 수 없이 많았고 그 안에는 온갖 종류의 미녀들이 넘쳐났다.여린 타입, 매혹적인 타입, 요염한 타입. 남자들이 환장하는 스타일은 차고 넘치도록 많았다.또한 유흥가에 들어오는 여자 중 장선명을 유혹하여 인생을 바꾸고 싶어 하는 여자들도 많았다.당시 구이준과 안열은 장선명 주위를 얼씬거리는 여자들을 수없이 많이 처리했지만 장선명이 여자들에게 시선을 두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그래서 구이준과 안열은 당시 장선명이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건지 의심하기도 했었다.예쁜 여자들이 들끓는 곳에서 어떠한 유혹에도 움직이지 않으니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장선명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타입을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이었다.구이준은 안지영을 유심히 보며 생각했다.‘다른 여자들이랑 비교해도 특별한 건 없어 보이는데... 도련님께서 왜 이 여자를 좋아하시는 거지? 화끈한 성격? 아니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호쾌한 모습?’머리를 정리하던 안지영은 헝클어진 머리로 인해 손가락이 끼여버렸고 그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웠다.그로 인해 나태웅에 대한 그녀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
고은영은 분노에 휩싸인 채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가게를 나왔다.배준우가 간 줄 알았던 그녀는 가게에서 나와 배준우의 차가 원래 자리에 있음을 확인하고는 화가 난 표정으로 차에 올라탔다.통화를 하고 있던 배준우는 그녀를 보자마자 통화를 마무리했다.“그래. 그렇게 처리하고 끊어.”그는 곧바로 고은영의 부풀어 오른 볼을 살짝 꼬집으며 물었다.“화났어?”고은영이 말하지 않아도 배준우는 알 수 있었다.진성택이 분명히 또 진유경과 관련된 이야기로 그녀를 화나게 한 것이다.“계속 곧 죽을 거라는 얘기만 반복하고 있어요.”“도덕적 협박이구나?”배준우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그의 안색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진성택이 진유경을 편애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양녀를 선택하고 친딸을 외면한다는 사실은 생각지도 못했다.평소 세심하지 않은 배준우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고은영에 대한 연민이 짙어졌다.고은영은 더 이상 진성택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매번 만나면 진유경 이야기뿐이었기 때문이다.배준우가 한숨을 내쉬며 위로했다.“화내지 마. 어차피 너한테 중요한 사람도 아니잖아.”“그래도 엄마가 너무 불쌍해요.”그녀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가슴 한구석이 쓰려왔다.‘네 명이 자식이나 낳았으면서 엄마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엄마가 나한테 남긴 마지막 사랑마저도 첫사랑의 딸에게 나누려고 하다니...’“저녁에 네 큰오빠네에 가서 밥 먹을까?”“오빠한테 전화 왔었어요?”말 돌리는 데 성공한 배준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응. 아까 너 봤다면서 저녁에 밥 먹자고 하더라고.”“좋아요!”고은영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정훈과 진윤과 가까워진 후, 고은영은 두 오빠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진성택은 정말 무정했다.아니, 애정은 있었지만 그 대상이 아내와 자식이 아닌 다른 사람일 뿐이었다.“언제 태현 오빠한테 물어볼 거예요?”“조금 있다 시간 내서 만나러 가려고.”“좋아요!”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고은지
“어머니가 나한테 남긴 건 그대로 넘겨주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고은영은 진성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말을 끊었다.싸늘한 고은영의 시선에 진성택의 안색은 순간 창백해졌다.진성택이 무언가를 덧붙이기 전에 고은영이 차갑게 말을 이어갔다.“그렇지 않으면 뭐요? 아시다시피 저는 지금 배준우의 아내예요. 진유경에게 손대는 건 쉬운 일이죠.”“유경이한테 손대지 마. 은영이, 너...”“됐어요! 더 이상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아요!”진유경을 그렇게까지 감싸는 진성택을 바라보며 고은영은 실망감을 넘어 차마 형용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이래?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이길래 이런 일까지 한단 말이야! 아내랑 아이를 도대체 뭐로 보는 거지? 어떻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나한테 이런 요구를 할 수 있어... 엄마가 남긴 소중한 유품을 진유경 같은 년에게 넘기겠다고? 하...’진유경이 단순히 진씨 가문의 양녀였다면 고은영은 아마 이렇게까지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진실을 아는 고은영은 지금 상황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다.설령 눈앞의 남자가 그녀의 혈육이고 아버지라 할지라도 고은영은 그를 혐오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진성택은 그녀의 분노에 애처롭게 그녀를 불렀다.“은영아...”고은영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진성택이 말을 이었다.“나한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게 아니었다면 나도 너한테 와서 이런 부탁 하지 않았을 거야.”“같잖은 호소는 그만 하세요. 저희 사이에 애정이라 칭할 만한 감정도 별로 없잖아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내였던 사람에게 너무하네요. 엄마가 불쌍해요.”그녀는 더욱 화가 났다.비록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머니와 특별한 애정이라 할 감정은 없었지만 진성택이 그녀를 대하는 모습을 보며 고은영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밀려왔다.고은영은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어머니의 깊은 사랑은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진성택은 어떠한가.고은영은 더 이상 그를 보고 싶지 않
고은영이 이렇게나 직설적으로 얘기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저는 이제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해요.” 진성택에게 돌려 말하지 말고 직설적으로 얘기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감정적으로 접근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생각했다.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거고 지금 와서 그것을 지울 수는 없었다. 진성택은 고은영의 말에 상처를 받은 듯 보였다. 그녀의 불만 섞인 태도에 그의 마음이 조금은 아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는 걸 알았다. “너희 둘째 오빠가 병원에 왔었어.” 고은영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쏘아보았고 그는 그녀의 생각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네가 받을 모든 주식들 있잖아. 할머니와 진호영, 그리고 유경이의 지분까지 너에게 줬다던데, 맞지?” 고은영은 차갑게 한 마디로 대답했다. “맞아요.” 드디어 그의 목적을 직접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더욱 차가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진성택은 고은영의 차가운 시선에 조금 떨린 듯 말을 이어갔다. “그 주식들은 사실 네 어머니가 너에게 남긴 거니까 너에게 돌아가야 맞아.” “그래서 저에게 돌려주기 위해서 이곳에 부른 거죠?” 고은영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그가 주고자 한다면 왜 이제서야 이리 말하고 있는지 다시 묻고 싶었다. 진성택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고 그의 눈빛에는 죄책감이 떠올랐다. “미안하지만 그 주식은 네게 돌려줄 수 없을 것 같아.” “돌려줄 수 없다고요? 왜요?” 그의 말은 너무도 간단했다. ‘할 수 없다'라는 말이 또다시 진유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거 같았다. 진유경, 정말 독특한 존재다. 역시나 양딸이 모든 것보다 우선이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짜로 진씨 가문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 두 사람의 양부모는 하나같이 그녀를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너희 둘째 오빠가 그 주식들을 되찾고 나서 진씨 가문의 모든 재정적 지원을 끊어버렸어. 지금 그들은 전부 저축해두었던 돈을 쓰고 있어.” 모든 지원을
하지만 진성택은 다르다. 결국 그녀와 혈연관계가 있기 때문에 배준우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 시간 후, 배준우는 고은영을 밀크티 가게에 데려다주었다. “내가 같이 들어갈까?” 배준우가 물었다. “준우 씨는 그냥 기다려요. 당신을 보면 아마 바로 저세상으로 갈지도 몰라요.” ‘이 녀석 입이 참!’ 하지만 고은영이 말이 맞았다. 예전에 진성택과 량천옥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면 진성택은 항상 배준우에게 진유경을 미래의 아내로 삼으라고 했었고 그때 배준우는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굳이 고은영과 결혼했다. 지금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진성택이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운명의 미묘함을 탄식할 것인가? 아니면 진유경 때문에 속상해할 것인가? 고은영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눈에 보였다. 작은 원탁 옆에 앉아 있는 진성택이. 그는 손에 밀크티를 들고 있었다. 고은영이 두 걸음 내딛자마자 진성택도 그녀를 보았다. “왔니?”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랜만에 본 그의 얼굴은 확실히 더 노화되어 보였고 얼굴색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특히나 얼굴이 누렇게 변했고 예전만큼 눈빛도 밝지 않았다. 고은영은 이제 막 기운이 다 빠진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진성택은 확실히 지금 당장이라도 세상을 떠날 듯한 느낌이었다. 그가 말한 대로 아마 이번이 마지막 만남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고은영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이거 마실 수 있어요?” 진성택은 손에 들고 있던 밀크티를 문득 깨닫고 곧바로 그녀에게 건넸다. “너를 위해 샀어. 여자애들은 다 밀크티 좋아하잖아. 너도 좋아하지?”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밀크티는 그녀의 가장 좋아하는 음료였다. 그런데 배준우와 결혼한 이후로 배준우는 그녀가 밀크티가 몸에 안 좋다며 못 마시게 했다. 진성택은 그녀가 음료를 마시지 않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생각해 보면 나는 사실 유경이에게 이런 걸 사준 적이 없었어. 진씨 가문의
전화 너머의 진성택은 고은영의 말을 듣고 당황해서 말문이 막힌 듯했다. “정말 미안해. 미안하다. 전에는 네 감정을 고려하지 못했어.” 그 순간, 진성택은 자신이 고은영에게 대했던 태도가 문제였음을 인정했다. 고은영이 말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은영아,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야. 큰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반응이 무뎌지는 법이잖아. 나는 그동안 계속 너를 찾고 있었어. 그런데 네 소식을 듣고 나서 어떻게 너를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네가 이런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거란 건 알지만 나도 그런 감정이 싫다.” 감정과 이해라. 처음에는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되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고 쳐도 그럼 그 후에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진짜 아이러니했다. 진성택은 고은영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오늘 내가 너를 찾은 건 정말 중요한 일이 있어.” “그게 진유경의 일 때문인가요?” 고은영은 본능적으로 날카롭게 반문했다. 무슨 일이든 그가 지금까지의 태도를 어떻게 설명하든 고은영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저 지금 그가 자신을 찾은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니, 네 어머니 때문이야.” 이 말은 그가 어쩔 수 없이 털어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전화상에서도 고은영은 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죄책감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될수록 그녀는 더 비웃었다. “내가 이 시간 동안 살 수 있는 건 모두 하늘이 준 기회야. 빼앗은 기회라고 해도 될 정도로. 내가 너를 만날 기회도 얼마 안 남았지.” 그는 매우 허약해 보였다. 고은영은 눈썹을 찌푸렸고 이 느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진성택이 마치 도덕적으로 자신을 억지로 끌어들여서 그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자신이 그를 만나지 않으면 너무 냉정한 사람처럼 보일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디예요?” “병원 맞은편의 밀크티 가게에 있어.” 그는 지금 병원에 입원 중이었고 의사들이
고은영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배준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태현 씨는 량천옥이 언니의 생모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당연히 알고 있지.” 이 일은 병원에서도 크게 떠들썩하게 된 사건이라 나태현 쪽에서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배준우는 고은영을 쳐다보며 이어서 말했다. “네가 말한 대로 나태현과 고은지의 거래가 량천옥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지?” “맞아요. 언니가 천락 그룹으로 돌아간다고 말할 때 량천옥이 아직도 밖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것에 불만을 토로했었는데 그 말투에 분노가 가득했어요.” 고은영은 고은지의 분노에 대해 말을 꺼내면서 마음속이 더욱더 쥐어짜이는 것 같았다. 나태현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지금 상황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고은영은 머릿속이 완전히 엉켜버렸다. 그녀가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것처럼 배준우도 지금은 완전히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준우 씨가 나태현 씨에게 언니와 한 거래가 무엇인지 물어봐 줄 수 있어요? 그리고 희주가 본인 딸인 걸 알고 지신혜 씨와 약혼도 할 건데 왜 언니를 천락 그룹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하는지도 물어봐 줘요.”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고은영은 공포감을 느꼈다. 그녀는 고은지에게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지금은 량천옥에 대해 강한 증오를 느끼고 있더라도 말이다. “내가 나태현 형에게 물어볼게. 너는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려.” “언니에게 말하고 싶어요.” “지금은 안 돼. 내가 먼저 나태현이랑 얘기하고 나서 말해.” 배준우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고은영이 말한 대로 지금은 최소한 나태현이 고은지를 천락 그룹으로 돌아가게 만든 계기가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그럼 빨리 물어봐요.” “응, 알았어.” 배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은영은 여전히 마음이 불안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으로서 지금 그녀는 거대한 음모가 고은지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