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영은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이미 안지영과의 통화를 통해, 그녀가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안지영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안지영이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분명히 혼자가 아니었을 텐데.서준호와 서정우가 떡하니 있는데, 조보은을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때릴 수 있었다니.그러나 그녀가 모르는 건, 당시 서정우와 서준호가 안지영의 기세에 완전히 압도되어, 감히 나서서 말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나중에, 식당의 매니저와 경비가 함께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지금 당장 병원으로 와! 당장!”고은영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조보은은 계속해서 소리 지르며 말했다.그녀는 지금 당장 고은영을 만나지 못해서 안달이었다.안지영에게 맞고 오후부터 지금까지, 분통이 터져 죽을 것 같았다.“안 가요!”“뭐라고? 네가 안 오면 누가 이 병원 비용을 결제해?”고은영의 태도에 조보은은 화가 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기세였다.정말...!고은영은 눈을 감으며 말했다.“오늘 나 만나려고 한 것도 그 여자가 지시한 짓이죠? 또 얼마 받았어요?”고은영은 그 지시를 한 사람이 량일인지 량천옥인지 긴가민가했다.장항 프로젝트를 건드렸으니, 량일과 량천옥, 두 사람 다 불만을 가지고 있으니, 둘 중 누구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오늘 그녀를 해치려 한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너...”“...”“고은영,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지금 네가 무슨 불만이 있든, 당장 병원으로 와!’조보은은 이제 막무가내로 나갔다.고은영에게 자기 목적을 들켰지만, 우선 돈이 먼저였다.오늘 고은영을 데리고 못 했으니, 그쪽에서도 돈을 받지 못했다.게다가 오늘 병원에서 조금 남은 돈마저 다 써버렸다.그래서 고은영이 와서 나머지 병원비를 결제해 주어야 한다.“천천히 기다리세요!”고은영은 말하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사실, 고은영은 그녀가 목적을 가지고 자신을 만나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만나러 나겠다고 했다.고은영도 만나야 할 목적이
결제하라는 조보은의 말에 서정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나도 전에 엄마가 경찰서에 잡혀갔을 때, 고은영이랑 사이가 틀어졌어.”이건 서정우가 낮은 소리로 공손히 말해도 돈을 뜯어내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서정우가 겉으론 인정하지 않아도 마음속으론 고은영과 사이가 틀어진 걸 매우 후회하고 있었다.그녀야말로 부자다.큰누나보다 훨씬 돈이 많다.매번 큰 누나가 돈을 내놓지 못할 때, 고은영에겐 분명히 돈이 있었다.“전에 돈 달라고 했었어?”서정우의 말에 조보은은 충격받았다.그녀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만약 고은영에 관한 보도를 보지 못했으면, 그녀를 잊고 살 뻔했다.그리고 그동안 서정우에게 돈을 대준 사람도 고은지뿐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이럴 줄이야...!서정우는 머리를 만지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큰누나한테 그런 능력이 어디 있어, 전에 큰누나한테 돈이 없을 땐 다 고은영한테서 받았다!”“모두 얼마 받았어?”“아마 1000만 원 정도 될 거야!”서정우는 생각하며 말했다.조보은은 그 숫자를 듣자마자 속으로 욱했다.곧바로 베개를 움켜쥐고 서정우에게 던지며 말했다.“그런데, 왜 집에 와서도 돈을 그렇게 많이 가져가?”고은영이 돈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다. 동영 그룹에 들어가기 전에도 그렇게 많은 돈이 있을 줄이야.순간, 조보은은 온갖 후회가 몰려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자기 곁에서 키울 걸...조보은의 화가 자신을 향하자, 서정우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그러자 조보은은 더욱 화가 나서 말했다.“너 때문에 용산 집도 다 팔았는데. 이제 돌아가면 어디 가서 살래? 다시 촌으로 돌아갈래?”이건 그녀가 계속 고은영에게 강성의 집을 달라고 한 이유이기도 하다.당시 촌에서 이사 나오면서, 앞으로 더 잘 살 거라고, 절대 고향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큰소리쳤다.하지만 이 신세가 될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그때 큰소리쳤던 걸 생각하면 지금 더욱 마음이 졸여졌다.“지금 고은영 얘기하고 있잖아요? 왜 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가 쓸모없는 인간처럼 느껴졌다.그녀는 참지 못하고 서준호에게 소리 질렀다.“휴대폰 가져와!”“내 번호도 이미 차단 당했어!”“가져와!”조보은은 이미 완전히 인내심을 잃은 상태다.서정우와 서준호가 뭐라고 하든, 전화를 걸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서준호는 그녀의 막무가내에 못 이겨 핸드폰을 그녀에게 던져 주었다.조보은은 서준호의 핸드폰을 서정우에게 건네며 말했다.“계속 걸어!”“아빠 말이 맞아요. 이 번호도 차단 당했어요.”“빨리 걸라니까!”조보은은 화가 나 어쩔 줄 몰라 했다.다들 왜 이렇게 쓸데없는 소리만 많이 지껄이는 거야?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서정우는 조보은의 호통에 어쩔 수 없이 다시 고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결과는 예상한 대로였다.“진짜 차단 당했어요.”서정우는 조보은에게 전화를 건넸다.조보은은 정말 차단당한 걸 확인하니 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지금 세 사람 다고은영과 통화 불가한 상태다.“은지한테 전화해.”조보은은 한참 생각하다 고은지에게 전화하라고 했다. 그리고 서정우가 반응도 하기 전에 덧붙여 말했다.“은지더러 은영이한테 전화하라고 해.”서정우는 깜짝 놀랐다.“큰 누나더러 둘째 누나한테 전화하라고 하라고?”“그래, 아니면 은지가 우리한테 10억 가져다주겠어?”고은영이라는 돈줄이 생겼으니, 더 이상 고은지를 괴롭히지 않았다.지금은 오로지 고은영에게서 돈을 뜯어낼 생각뿐이었다.서정우도 그녀의 뜻을 알아들었다.“네, 알겠어요.”그리고 서둘러 고은지에게 전화 걸었다.고은지는 지금 직장에 다니고 있다. 지금쯤 이미 퇴근했을 시간이다.고은지는 퇴근 후 금방 집에 돌아와, 음식을 해 먹으려는데 전화기가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발신 번호를 보니 서정우였다. 그녀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조영수와 이혼 후, 그녀도 많은 생각이 풀렸다. 전에 자신이 도와준다고 생각했던 일이 사실은 이 집을 점점 파괴하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그래서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라면을 냄비에 넣자마자 또다시 전화가 울렸다.이번엔 고은영의 전화였다.“응, 은영아.”“조보은이 언니한테 전화 갔어?”고은영이 직접적으로 물었다.“아니, 서정우가.”고은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병원으로 오라고 했어?”“난 안 갈 거야!”고은지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말했다.두 사람의 대화는 척하면 척이었다. 고은지는 고은영의 말이 무슨 뜻인지 다 파악하고 있었다.고은지의 대답에 고은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너도 오래?”“별 큰일도 아닌 걸로 입원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마!”안지영이 그리 심하게 때리진 않았을 것이다. 지금 그쪽에서 이렇게 오버하는 건 그녀를 병원에 오게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중요한 건, 조보은이 지금 어떤 상태이든, 지금 절대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나도 알아!”고은지가 대답했다.잘 알기 때문에, 그쪽에서 아무리 전화를 해도 꿈쩍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혹은, 이미 포기해 버렸을 수도.다 포기해버려서, 조보은이 아무리 뭐라 해도 꿈쩍하지 않는 것 일수도.“알겠어, 일단 끊어. 나 금방 퇴근해서 지금 좀 뭐 먹으려고.”“응!”고은지의 말에 고은영도 더 묻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고은지는 전화를 끊고 재빨리 라면을 냄비에서 건져 냈다.빨리 움직였는데도, 라면이 퍼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그래도 다시 끓이기 귀찮아 그냥 대충 먹었다.란완 리조트 시점.하루 종일 피곤했던 고은영은 고은지와 통화를 끝낸 후, 그대로 침대 머리에 기대어 잠들어 버렸다.배준우가 방으로 들어왔을 때, 그녀가 이불도 덮지 않고 침대 머리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았다.배준우는 고개를 돌려 문 앞에 서 있는 도우미를 쳐다보았다.도우미도 배준우가 문을 여는 순간, 고은영이 침대 머리에 기대어 자는 모습을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게다가 지금 배준우가 이런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해고당할까 봐 두려웠다.그런데 다행히도 배준우가 아무 말도 없이 시선을 거뒀다.그는 고은영을 안고 침대에 제대로 눕
이 밤!조보은 일가는 불안 속에서 온밤을 지샜고, 고은영은 푹 잘 잤다.배준우는 생각할수록 밤새 자지 못했다.고은영이 일어났을 때, 배준우는 이미 창문 앞 의자에 앉아있었다.비록 멀리 떨어져 앉아있었지만, 고은영은 그의 감정을 바로 알아챘다.그녀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 배준우도 그녀의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깼어? 잘 잤어?”약간 의미심장한 태도로 말했다.고은영도 이미 완전히 잠에서 깬 상태라, 그의 말투에 숨은 뜻을 바로 알아챘다.다만, 그녀는 왜 아침부터 그가 화가 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네, 잘 잤어요. 대표님은요?” 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별로!”“...” 아니, 왜...!어젯밤엔 어색해서 잘 못 자겠다더니, 푹 자고 일어난 고은영의 모습에 배준우는 어이가 없었다.그렇게 푹 자 놓고, 나중에 코까지 골아 놓고!백 어르신도 전에 말한 적이 있었다. 코를 고는 것도 임신 중의 여자들이 겪게 되는 변화 중 하나이다.그녀가 하도 코를 고니 배준우는 다른 방에서 자고 싶었지만, 그녀가 자기를 꼭 안고 자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있어야 했다.고은영은 침대에서 일어나, 눈을 비비며 배준우에게 다가갔다.“무슨 고민거리 있어요?”“아니!”“네? 그럼, 왜 못 주무셨어요?”고은영은 배준우가 무슨 고민거리가 있어서 못 잤다고 생각했다.고민거리가 없으면, 왜 못 잔 거지?“네가 너무 시끄러워서!”“제가 시끄럽다고요? 저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고은영은 억울했다.그리고 바로 겁에 질린 얼굴로 배준우를 쳐다봤다. “설마 제가 또 몽유병이...?”고은영은 전에 인터넷으로 몽유병에 대해 찾아본 적이 있었다.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몽유병 때문에, 잠결에 밤에 나가서 돌아다니거나 하는 일들이 많았다.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침대에 눕는다!모든 과정이 무의식중에 벌어져,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면 너무 피곤하게 느껴진다.하지만 오늘 그녀는 별로 피곤하게 느
고은영은 컵을 받아 들고, 물 절반을 마신 뒤에야 마음속의 공포가 조금 가라앉았다.“또 감기 걸렸어?”“그런 것 같아요!”고은영은 서둘러 대답했다.그녀는 지금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다. 배준우가 아무 말도 하지 않기를. 그가 말만 하면...!그의 대화 리듬에 따라가기 어려워진다.고은영은 이 마지막 순간에 그동안 공들였던 탑이 무너질까 너무 두려웠다.배준우는 그녀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대며 말했다.“음, 열은 없는데.”“가끔 열이 안 날 때도 있어요.”배준우는 그렇게 그녀가 거짓말하는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지켜보고 있었다. 고은영은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우스운지 전혀 알지 못하고 계속해서 거짓말하려고 애쓰고 있다. 배준우와의 관계가 끝날 때, 이 거짓말도 끝낼 생각이었다.아침 식사 때.나태웅이 왔다.그러자 배준우가 고은영을 쳐다보며 말했다.“오늘 넌 출근하지 말고 여기 있어!”“네.”그녀는 평소 같으면 여기 있지 않겠다고 했을 텐데, 오늘 아침 배준우의 그 말들 때문에 지금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지금 그녀는 그저 서둘러 배준우와 떨어져 있고 싶었다.만약 오늘 아침 같은 그런 대화가 더 오고 간다면, 고은영은 더욱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이다.그녀가 쉽게 알겠다고 하자, 배준우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무슨 일 있으면 나 집사 찾아.”“네, 알겠어요!”나 집사는 어제 한 무리의 도우미를 데리고 밖에서 그들을 맞이했던 집사다.얼추 50대쯤 되어 보이는데, 정신력은 아주 대단했다.배준우를 마주할 땐 세상 공손하고, 도우미들을 마주할 땐 얼굴에 위엄이 넘친다.고은영은 배준우를 쳐다보며 물었다.“저, 량천옥, 그리고 그 집 사람들 란완 리조트가 대표님 것이라는 거 알고 있어요?”“아니, 몰라.”“네!” 어쩐지!만약 량천옥이 란완 리조트가 배준우의 것이라는 걸 알았다면, 감히 배준우와 싸울 엄두도 못 냈겠지!란완 리조트는 10년 전에 완공됐다. 모두가 란완 리조트 주인의 권세에 대해 의논하고 있
아침 식사 후, 배준우는 나태웅과 함께 떠났고, 나 집사는 고은영 전용 도우미들을 안배했다.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모두 배준우가 고은영을 어떻게 대하는지 아주 잘 보았다. 그러니 감히 그녀 앞에서 조금의 공손하지 않는 태도도 드러내지 않았다.하지만 여전히 눈치 없이, 그녀 뒤에서 그녀를 욕하는 사람도 있긴 했다.“촌에서 올라온 아가씨라고 들었어. 그냥 도련님의 비서 일을 했었다고 하던데!”“그 기사 나도 봤어.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니까. 어떤 수단으로 그랬는지, 참!”“그니까, 미월 아가씨가 돌아왔는데도 자리를 내주지 않잖아, 뻔뻔하게!”“뻔뻔하다고 욕할 수도 없어. 촌에서 기어 나와서 이런 재벌이 걸려드니까, 기회라 생각하고 어떻게든 마음을 사로잡으려 하겠지!”“근데 잘난 구석은 있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잖아, 전에 내가 미월 아가씨를 돌볼 땐, 미월 아가씨가 도련님을 위해 국도 끓여주고, 그랬는데.”고은영은 햇볕을 쬐러 나가려고 방에서 나왔는데, 복도 모퉁이에서 수군거리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그녀를 돌보는 도우미는 햇볕을 쬐러 나가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서둘러 가서 그녀의 겉옷을 챙겼다.옷을 가지고 고은영 곁에 오니, 그들이 고은영 뒷담화 하는 소리를 들었다.도우미는 순식간에 굳어진 얼굴로 조심스럽게 고은영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제가 가볼게요!”말하고는 바로 그들에게 다가갔다.모퉁이에 있는 두 도우미가 아직도 막 신나게 말하고 있었다.그러다 고은영 전용 도우미가 눈앞에 나타나자, 두 사람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혜나야, 네가 어떻게...?”짝!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따귀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자리에 서있던 고은영도 깜짝 놀랐다.혜나의 갑작스러운 따귀에, 맞은 도우미도 뒤늦게 반응하며 충격 받은 얼굴로 혜나를 노려보며 말했다.“너, 날 때려? 나 집사님한테 말할 거야!’“그래, 가서 집사님한테 네가 사모님을 뒤에서 어떻게 씹었는지 샅샅이 다 얘기해!”“우, 우린...!”짝!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또 한 번 따
이미월을 돌봤던 도우미는 고은영이 이미월보다 착하지 않다고, 마음속으로 더더욱 욕하고 있었다.이렇게 심성이 착하지 못한 여주인을, 도련님이 틀림없이 곧 실증 나 할 거라고 생각했다.촌에서 온 사람은 절대 뼛속까지 도시 사람이 될 수 없다! 이렇게 작은 일도 다 따지는 그녀가 정말 혐오스럽다고 생각했다.혜나는 누군가 처리해줄 거라는 고은영의 말을 듣고 나서야, 화가 수그러들었다.혜나는 다시 그녀들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말했다.“얼른 가서 짐들 싸. 여기에 머물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말하고는 차갑게 코웃음 치며 고은영에게 다가갔다.“사모님, 제가 햇빛 방으로 모실게요.”“네.”고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혜나는 고은영이 전혀 화를 내지 않을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도련님이 직접 고르신 사모님 답게, 자기감정 관리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다른 일을 하고 있던 도우미가 이 상황을 지켜보고는 즉시 나 집사에게 알렸다.나 집사는 얘기를 듣자마자 서둘러 위층으로 올라와, 두 도우미가 얼굴을 붉히고 있는 것을 보았다.얼굴에 손바닥 자국이 선명했다.집사는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어떻게 된 일이냐?”그러자 둘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서 울며 말했다.“나 집사님, 저희 얘기 들어보세요. 혜나는 사모님을 모신 이후로 기세가 등등해져서, 저희를 사람 취급도 안 해요!”그녀의 말에 나 집사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고은영에 대한 인상이 조금 빗나갔다.그러자 나머지 한 명도 재빨리 맞장구를 쳤다.“저와 세나가 청소를 하고 있는데, 혜나가 올라와서 아무 말도 없이 저를 밀쳐냈어요. 세나는 제 편을 들어준 것뿐이고요.”“혜나가 왜 갑자기 너를 밀쳐?”“저도 몰라요. 아무 말도 없이 밀쳤어요!”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말했다.방금 혜나가 자신의 따귀를 때린 걸 생각하자, 화가 치밀었다.지금 당장이라도 혜나를 쫓아내고 싶은 심정이었다.나 집사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지만, 더 묻지 않았다.“일하러 가!”“저, 집사 님, 혜나 일은..
‘여자를 갖고 논다고? 도련님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닌데. 밤에 발생했던 일들도 도련님 모르게 벌어졌던 일인데... 일을 조사해 범인을 밝혀냈을 때 그 범인은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했지.’“구이준.”“네.”구이준이 앞으로 나섰다.“웨딩드레스는 킹덤 타운으로 보냈어?”“네. 다 수선해서 보냈습니다.”그 말을 듣고 장선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태웅을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지영이가 직접 입어보고 고른 웨딩드레스야.”이 말은 나태웅의 위협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나태웅은 온몸이 얼어붙은 듯 차갑게 굳었고 장선명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더욱 음울해졌다.“그럼 거절하겠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지?”“너도 예상하던 답 아니야?”장선명이 싸늘하게 웃으며 답했다.언제 장성명이 위협을 받아들였던가.나태웅은 이런 방식으로 두 사람을 헤어지게 만들 수는 없었다.이전에 안지영을 찾아가도 효과를 보지 못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장선명이 안지영을 위해 그녀와 헤어질 것으로 믿는다면 나태웅은 장씨 가문을 너무 만만히 본 것이다.장씨 가문 사람들은 이런 위협을 받아들일 사람들이 아니었다.“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어. 네가 지영이를 빼앗아 간다면 나도 인정하지.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우릴 헤어지게 하려는 거라면 나뿐만 아니라 강성 전체가 너희 나씨 가문을 경멸할 거야.”말을 마친 장선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더 이상 나태웅과 할 이야기가 없었다.태연하고 무서울 것 없는 장선명의 모습은 나태웅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장선명은 두 발짝 걸어 나가다 무언가 떠오른 듯 멈춰 섰다.“참, 하늘그룹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하늘그룹이 없어져도 나는 안지영이 아무렇지 않을 수 있도록 할 방법은 많아. 하지만 너는? 지영이는 널 지금보다 더 원망할 거야.”‘안지영이 자신을 미워하더라고 나도 같이 미워하게 만들겠다고? 도대체 무슨 논리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자기 판단이 흐린 것처럼 지영이도 반쯤 정신을 놓았다고 생각하는 건가?’장선명은 자
3분 후, 나태웅과 장선명이 마주 앉았다. 겉보기엔 평온해 보였지만 현장의 공기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두 사람은 각자 담배 두 개비씩 피울 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진이훈과 구이준은 몸이 굳으며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다.장선명이 세 번째 담배를 꺼내려는 순간 나태웅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그래서 조건이 뭔데?”나태웅과 시간을 소모하려던 장선명은 그 말을 듣고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조건?”또렷한 말투로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는 나태웅은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지금까지 병원에서 아픈 척한 것도 모두 안지영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바보같이 순진한 안지영만이 진지하게 나태웅이 정말 미친 건지 아닌 건지 고민하고 있었다.“그 여자가 널 미워하게 만들지 마.”나태웅은 이를 악물고 하나하나 힘줘 말했다.장선명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왜 나를 미워해야 하지?”장선명이 흥미롭게 물었다.안진섭과 얼마간 관계가 있을 뿐, 장선명은 다른 방면에서 안지영에게 잘못한 건 없었다.“하늘그룹이 너 때문에 없어진다면 널 미워할 거야. 날 미워하듯 널 미워하게 되는게 네가 진정 원하는 거야?”나태웅이 날카롭게 물었다.하지만 애매한 부분이 있어 장선명은 나태웅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하늘 그룹이 나 때문에 없어진다고? 나태웅 말고 그런 짓을 할 사람이 누가 있다고.’장선명은 담배를 담뱃갑에 도로 넣었다.“그렇다면 지영이는 널 미워하겠지?”“난 상관없어. 어차피 이미 미워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지영이와 계속 함께하려 한다면...”나태웅은 잠시 말을 멈췄다.고개를 들어 장선명을 바라본 순간 그의 시선에는 어느 때보다도 더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나태웅은 싸늘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지영이와 계속 함께하려 한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 하늘그룹을 부숴버릴 거야. 그렇게 돼도 지영이가 너랑 무사히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아?”진이훈과 구이준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나태웅이 말을 마친 순간 현장
“내가 대신 가서 혼내줄게. 너는 여자니까 이미지 신경 써야지. 착하지?”“싫어요! 이미지 따위는 필요 없어요.”장선명이 바로 핸드폰의 카메라를 켜서 그녀 앞에 내밀었다.안지영은 핸드폰 속 자신의 헝클어진 머리와 마치 미친 여자처럼 보이는 모습을 보고는 순간 얼어붙었다.그녀가 조용해지자 현장의 분위기도 순식간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그 남자 때문에 이런 모습 하려고?”안지영은 말문이 막혔다.‘젠장, 언제 이런 모습이 된 거지?’특히나 더 참을 수 없는 건, 나태웅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사실이었다.‘그놈이 뭐라고 내가 이렇게까지 화내는 거지?’“집에 가자. 착하지?”장선명은 부드럽게 안지영을 달랬다.옆에 있던 구이준은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었다.장선명이 어떤 사람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유명했다.그가 소유한 유흥 장소는 셀 수 없이 많았고 그 안에는 온갖 종류의 미녀들이 넘쳐났다.여린 타입, 매혹적인 타입, 요염한 타입. 남자들이 환장하는 스타일은 차고 넘치도록 많았다.또한 유흥가에 들어오는 여자 중 장선명을 유혹하여 인생을 바꾸고 싶어 하는 여자들도 많았다.당시 구이준과 안열은 장선명 주위를 얼씬거리는 여자들을 수없이 많이 처리했지만 장선명이 여자들에게 시선을 두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그래서 구이준과 안열은 당시 장선명이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건지 의심하기도 했었다.예쁜 여자들이 들끓는 곳에서 어떠한 유혹에도 움직이지 않으니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장선명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타입을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이었다.구이준은 안지영을 유심히 보며 생각했다.‘다른 여자들이랑 비교해도 특별한 건 없어 보이는데... 도련님께서 왜 이 여자를 좋아하시는 거지? 화끈한 성격? 아니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호쾌한 모습?’머리를 정리하던 안지영은 헝클어진 머리로 인해 손가락이 끼여버렸고 그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웠다.그로 인해 나태웅에 대한 그녀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
고은영은 분노에 휩싸인 채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가게를 나왔다.배준우가 간 줄 알았던 그녀는 가게에서 나와 배준우의 차가 원래 자리에 있음을 확인하고는 화가 난 표정으로 차에 올라탔다.통화를 하고 있던 배준우는 그녀를 보자마자 통화를 마무리했다.“그래. 그렇게 처리하고 끊어.”그는 곧바로 고은영의 부풀어 오른 볼을 살짝 꼬집으며 물었다.“화났어?”고은영이 말하지 않아도 배준우는 알 수 있었다.진성택이 분명히 또 진유경과 관련된 이야기로 그녀를 화나게 한 것이다.“계속 곧 죽을 거라는 얘기만 반복하고 있어요.”“도덕적 협박이구나?”배준우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그의 안색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진성택이 진유경을 편애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양녀를 선택하고 친딸을 외면한다는 사실은 생각지도 못했다.평소 세심하지 않은 배준우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고은영에 대한 연민이 짙어졌다.고은영은 더 이상 진성택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매번 만나면 진유경 이야기뿐이었기 때문이다.배준우가 한숨을 내쉬며 위로했다.“화내지 마. 어차피 너한테 중요한 사람도 아니잖아.”“그래도 엄마가 너무 불쌍해요.”그녀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가슴 한구석이 쓰려왔다.‘네 명이 자식이나 낳았으면서 엄마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엄마가 나한테 남긴 마지막 사랑마저도 첫사랑의 딸에게 나누려고 하다니...’“저녁에 네 큰오빠네에 가서 밥 먹을까?”“오빠한테 전화 왔었어요?”말 돌리는 데 성공한 배준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응. 아까 너 봤다면서 저녁에 밥 먹자고 하더라고.”“좋아요!”고은영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정훈과 진윤과 가까워진 후, 고은영은 두 오빠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진성택은 정말 무정했다.아니, 애정은 있었지만 그 대상이 아내와 자식이 아닌 다른 사람일 뿐이었다.“언제 태현 오빠한테 물어볼 거예요?”“조금 있다 시간 내서 만나러 가려고.”“좋아요!”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고은지
“어머니가 나한테 남긴 건 그대로 넘겨주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고은영은 진성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말을 끊었다.싸늘한 고은영의 시선에 진성택의 안색은 순간 창백해졌다.진성택이 무언가를 덧붙이기 전에 고은영이 차갑게 말을 이어갔다.“그렇지 않으면 뭐요? 아시다시피 저는 지금 배준우의 아내예요. 진유경에게 손대는 건 쉬운 일이죠.”“유경이한테 손대지 마. 은영이, 너...”“됐어요! 더 이상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아요!”진유경을 그렇게까지 감싸는 진성택을 바라보며 고은영은 실망감을 넘어 차마 형용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이래?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이길래 이런 일까지 한단 말이야! 아내랑 아이를 도대체 뭐로 보는 거지? 어떻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나한테 이런 요구를 할 수 있어... 엄마가 남긴 소중한 유품을 진유경 같은 년에게 넘기겠다고? 하...’진유경이 단순히 진씨 가문의 양녀였다면 고은영은 아마 이렇게까지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진실을 아는 고은영은 지금 상황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다.설령 눈앞의 남자가 그녀의 혈육이고 아버지라 할지라도 고은영은 그를 혐오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진성택은 그녀의 분노에 애처롭게 그녀를 불렀다.“은영아...”고은영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진성택이 말을 이었다.“나한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게 아니었다면 나도 너한테 와서 이런 부탁 하지 않았을 거야.”“같잖은 호소는 그만 하세요. 저희 사이에 애정이라 칭할 만한 감정도 별로 없잖아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내였던 사람에게 너무하네요. 엄마가 불쌍해요.”그녀는 더욱 화가 났다.비록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머니와 특별한 애정이라 할 감정은 없었지만 진성택이 그녀를 대하는 모습을 보며 고은영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밀려왔다.고은영은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어머니의 깊은 사랑은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진성택은 어떠한가.고은영은 더 이상 그를 보고 싶지 않
고은영이 이렇게나 직설적으로 얘기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저는 이제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해요.” 진성택에게 돌려 말하지 말고 직설적으로 얘기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감정적으로 접근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생각했다.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거고 지금 와서 그것을 지울 수는 없었다. 진성택은 고은영의 말에 상처를 받은 듯 보였다. 그녀의 불만 섞인 태도에 그의 마음이 조금은 아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는 걸 알았다. “너희 둘째 오빠가 병원에 왔었어.” 고은영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쏘아보았고 그는 그녀의 생각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네가 받을 모든 주식들 있잖아. 할머니와 진호영, 그리고 유경이의 지분까지 너에게 줬다던데, 맞지?” 고은영은 차갑게 한 마디로 대답했다. “맞아요.” 드디어 그의 목적을 직접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더욱 차가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진성택은 고은영의 차가운 시선에 조금 떨린 듯 말을 이어갔다. “그 주식들은 사실 네 어머니가 너에게 남긴 거니까 너에게 돌아가야 맞아.” “그래서 저에게 돌려주기 위해서 이곳에 부른 거죠?” 고은영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그가 주고자 한다면 왜 이제서야 이리 말하고 있는지 다시 묻고 싶었다. 진성택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고 그의 눈빛에는 죄책감이 떠올랐다. “미안하지만 그 주식은 네게 돌려줄 수 없을 것 같아.” “돌려줄 수 없다고요? 왜요?” 그의 말은 너무도 간단했다. ‘할 수 없다'라는 말이 또다시 진유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거 같았다. 진유경, 정말 독특한 존재다. 역시나 양딸이 모든 것보다 우선이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짜로 진씨 가문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 두 사람의 양부모는 하나같이 그녀를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너희 둘째 오빠가 그 주식들을 되찾고 나서 진씨 가문의 모든 재정적 지원을 끊어버렸어. 지금 그들은 전부 저축해두었던 돈을 쓰고 있어.” 모든 지원을
하지만 진성택은 다르다. 결국 그녀와 혈연관계가 있기 때문에 배준우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 시간 후, 배준우는 고은영을 밀크티 가게에 데려다주었다. “내가 같이 들어갈까?” 배준우가 물었다. “준우 씨는 그냥 기다려요. 당신을 보면 아마 바로 저세상으로 갈지도 몰라요.” ‘이 녀석 입이 참!’ 하지만 고은영이 말이 맞았다. 예전에 진성택과 량천옥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면 진성택은 항상 배준우에게 진유경을 미래의 아내로 삼으라고 했었고 그때 배준우는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굳이 고은영과 결혼했다. 지금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진성택이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운명의 미묘함을 탄식할 것인가? 아니면 진유경 때문에 속상해할 것인가? 고은영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눈에 보였다. 작은 원탁 옆에 앉아 있는 진성택이. 그는 손에 밀크티를 들고 있었다. 고은영이 두 걸음 내딛자마자 진성택도 그녀를 보았다. “왔니?”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랜만에 본 그의 얼굴은 확실히 더 노화되어 보였고 얼굴색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특히나 얼굴이 누렇게 변했고 예전만큼 눈빛도 밝지 않았다. 고은영은 이제 막 기운이 다 빠진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진성택은 확실히 지금 당장이라도 세상을 떠날 듯한 느낌이었다. 그가 말한 대로 아마 이번이 마지막 만남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고은영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이거 마실 수 있어요?” 진성택은 손에 들고 있던 밀크티를 문득 깨닫고 곧바로 그녀에게 건넸다. “너를 위해 샀어. 여자애들은 다 밀크티 좋아하잖아. 너도 좋아하지?”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밀크티는 그녀의 가장 좋아하는 음료였다. 그런데 배준우와 결혼한 이후로 배준우는 그녀가 밀크티가 몸에 안 좋다며 못 마시게 했다. 진성택은 그녀가 음료를 마시지 않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생각해 보면 나는 사실 유경이에게 이런 걸 사준 적이 없었어. 진씨 가문의
전화 너머의 진성택은 고은영의 말을 듣고 당황해서 말문이 막힌 듯했다. “정말 미안해. 미안하다. 전에는 네 감정을 고려하지 못했어.” 그 순간, 진성택은 자신이 고은영에게 대했던 태도가 문제였음을 인정했다. 고은영이 말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은영아,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야. 큰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반응이 무뎌지는 법이잖아. 나는 그동안 계속 너를 찾고 있었어. 그런데 네 소식을 듣고 나서 어떻게 너를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네가 이런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거란 건 알지만 나도 그런 감정이 싫다.” 감정과 이해라. 처음에는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되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고 쳐도 그럼 그 후에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진짜 아이러니했다. 진성택은 고은영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오늘 내가 너를 찾은 건 정말 중요한 일이 있어.” “그게 진유경의 일 때문인가요?” 고은영은 본능적으로 날카롭게 반문했다. 무슨 일이든 그가 지금까지의 태도를 어떻게 설명하든 고은영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저 지금 그가 자신을 찾은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니, 네 어머니 때문이야.” 이 말은 그가 어쩔 수 없이 털어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전화상에서도 고은영은 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죄책감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될수록 그녀는 더 비웃었다. “내가 이 시간 동안 살 수 있는 건 모두 하늘이 준 기회야. 빼앗은 기회라고 해도 될 정도로. 내가 너를 만날 기회도 얼마 안 남았지.” 그는 매우 허약해 보였다. 고은영은 눈썹을 찌푸렸고 이 느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진성택이 마치 도덕적으로 자신을 억지로 끌어들여서 그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자신이 그를 만나지 않으면 너무 냉정한 사람처럼 보일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디예요?” “병원 맞은편의 밀크티 가게에 있어.” 그는 지금 병원에 입원 중이었고 의사들이
고은영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배준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태현 씨는 량천옥이 언니의 생모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당연히 알고 있지.” 이 일은 병원에서도 크게 떠들썩하게 된 사건이라 나태현 쪽에서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배준우는 고은영을 쳐다보며 이어서 말했다. “네가 말한 대로 나태현과 고은지의 거래가 량천옥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지?” “맞아요. 언니가 천락 그룹으로 돌아간다고 말할 때 량천옥이 아직도 밖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것에 불만을 토로했었는데 그 말투에 분노가 가득했어요.” 고은영은 고은지의 분노에 대해 말을 꺼내면서 마음속이 더욱더 쥐어짜이는 것 같았다. 나태현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지금 상황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고은영은 머릿속이 완전히 엉켜버렸다. 그녀가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것처럼 배준우도 지금은 완전히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준우 씨가 나태현 씨에게 언니와 한 거래가 무엇인지 물어봐 줄 수 있어요? 그리고 희주가 본인 딸인 걸 알고 지신혜 씨와 약혼도 할 건데 왜 언니를 천락 그룹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하는지도 물어봐 줘요.”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고은영은 공포감을 느꼈다. 그녀는 고은지에게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지금은 량천옥에 대해 강한 증오를 느끼고 있더라도 말이다. “내가 나태현 형에게 물어볼게. 너는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려.” “언니에게 말하고 싶어요.” “지금은 안 돼. 내가 먼저 나태현이랑 얘기하고 나서 말해.” 배준우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고은영이 말한 대로 지금은 최소한 나태현이 고은지를 천락 그룹으로 돌아가게 만든 계기가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그럼 빨리 물어봐요.” “응, 알았어.” 배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은영은 여전히 마음이 불안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으로서 지금 그녀는 거대한 음모가 고은지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