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다급하게 부인하는 모습에 그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진짜 없어?”고은영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네! 정말 없어요.”됐다, 이런 꼬임에 넘어가지 말자!어차피 장항 프로젝트 일도 요 며칠이면 끝나니, 그때 당당히 떠나면 그만이다.그러니 당분간은 …! 배준우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의 알 수 없는 표정에 고은영은 불안했다.“저 진짜 믿으셔야 해요!”그녀의 당당함에 그러자 배준우가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숨기는것도 없다면서 왜 이렇게 긴장하는 거야?”“대표님이 저 오해하셔서, 집이랑 모아둔 돈 다 회수해 갈까 봐요.”배준우는 그런 그녀가 귀엽기도 했고 웃기기도 했다.“그 집이 그렇게 중요해?”“당연하죠. 제가 열심히 노력해서 산 거니까요!” 고은영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녀가 그 집을 위해 얼마나 많은 야근을 했고, 얼마나 많은 부조를 만들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얼마 정도 모았는데?”“왜요?”배준우의 질문에 고은영은 더욱 긴장이 됐다.그동안 그녀는 꽤 많은 돈을 모아뒀고, 그건 다 배준우에게서 번 돈이였다.설마 다시 회수해 가려고 그러나?“1억 조금 넘게요!”배준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고은영은 고개를 숙였다.그녀는 1억이 있는 것만으로도 돈 많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그녀는 1억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다.1억은 작은 도시에서 집을 사고도 남을 돈이다. 아마 소형차 하나를 더 뽑을 수 있다.지금 조보은이 그녀가 강성에 집이 있다는 것만 알아도 이렇게 난리인데만약 1억이 있다는 것까지 알면, 그 돈을 갖기 위해 더 난리 쳤을 것이다.“그래, 적진 않네.”배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왜, 왜 그러시는 거예요?”“말 안 들으면 집이고 돈이고 다 뺏어올 거야!”그의 말에 고은영은 마음속으로 엄청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이렇게 자기 멋대로 한다고? 너무 하네 진짜!나태웅이 병실로 들어왔을 때 고은영은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배준우는 웃고 있었다.나태웅은 배준
어쨌든 며칠 안 남았으니까, 요 며칠만 버티면 고은영은 자유로워 질 수 있다.나태웅은 그녀의 퇴원 수속을 밟았고, 두 사람을 집까지 직접 데려다 주었다.하지만 오늘은 하원이 아니라 강성에서 유명한 란원 리조트로 데려갔다. 고은영도 이곳을 잘 알고 있었다.란원 리조트는 이곳의 주인이 직접 몇천억을 들여 이 땅을 사서 개인 리조트를 건설한, 강성에서 아주 전설적인 곳이다. 당시 이 땅은 개발업자가 이미 따낸 땅이었다. 원래 별장 단지를 건설해서, 부자 지역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니 땅 값이 보통 비싼 게 아니다.아무도 이 땅의 주인이 누군지 모른다. 그런데 오늘, 배준우가 고은영을 여기에 데려왔다!그들이 도착했을 때, 집사와 도우미들이 이미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배준우가 차에서 내리자, 집사가 다가와 공손히 말했다.“도련님, 돌아오셨습니까!”돌아왔다고?그럼 여기 주인이 정말 배준우인거가?고은영은 충격 어린 표정으로 멍하니 그의 뒷모습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신비로운 인물이 이 남자라니.배준우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뒤로 돌아 고은영을 쳐다보며 말했다.“혼자 걸을 수 있겠어?”“네, 걸을 수 있어요!”고은영은 정신을 차리고 손을 내밀자, 배준우가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가 차에서 내리도록 조심히 부축해 주었다.“사모님!”집사가 고은영에게 공손히 인사했다.고은영은 이 상황이 무척 어색하게 느껴졌다.처음 하원에 갔을 때랑 너무 달랐다. 그때는 이렇게나 많은 도우미들이 없었다.지금도 진 씨 아주머니 한 분 뿐이다. 하지만 여기는 분위기가 완전 달랐다. “들어가자.”고은영이 어색해 하자 배준우가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고은영은 안으로 들어가면서 집사와 도우미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이 곳의 외관을 보면 마치 성에 온 것 같다.안으로 들어가 보면 더욱 화려하다.배준우는 항상 심플한 것만 선호하는 줄 알았기에 이렇게 화려한 것도 좋아하는 줄은 몰랐다.두 사람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고, 나태웅도
고은영이 방으로 들어간 후, 배준우는 일어나 서재 쪽으로 걸어갔다.나태웅은 이미 서재에서 배준우를 기다리고 있었다.배준우가 서재로 들어오자, 나태웅은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눌러 넣었다. 배준우가 물었다.“아이는 진짜로 괜찮대?”“안심해, 괜찮대. 오늘 은영 씨 운이 진짜 좋았던 거지!”배준우는 고민에 잠긴 듯한 얼굴이었다.오늘 운전기사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의 심정이 어땠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다만, 나태웅은 그가 이토록 그녀를 챙기는 걸 의아하게 생각했다.“너, 은영 씨한테 진짜 진심이야?”“아니야.”배준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러자 나태웅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너 지금 엄청 신경 쓰고 있어.”“어렵게 곁에 붙잡아 두고 있는데, 당연히 신경이 쓰이지.”“...”나태웅은 할 말을 잃었다.그의 닭살 돋는 말에 더 할 말이 없었다.“네 생각엔, 누구 짓인 거 같아?”고은영이 어쩌다 혼자 외출할 때 이런 일이 생겼으니, 그는 당연히 이건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의 말에 나태웅도 생각에 잠긴 심각한 얼굴로 한숨 쉬며 말했다.“그 여자 말고,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있을까?”그 여자란, 량천옥을 말한다.요즘 배준우가 장항 프로젝트를 빼앗아가려고 하고 있으니, 량천옥이 그에게 앙심을 품고 이런 짓을 벌였을 거라 생각했다.그 여자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우리가 행동을 너무 끌고 있었네. 그 인간들에게 여유시간 따위 주지 말았어야 했는데.”배준우는 살기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어쩔 생각이야?”나태웅이 물었다.“결혼식을 앞당긴다고 언론에 알려.”“네 말은...”“어떻게든 진씨 집안이랑 어떻게 해보려는 수작인 거 같은데. 그건 헛된 망상이라는 걸 똑똑히 알려줘야지 그 여자한테.”나태웅은 바로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 진씨 집안과 량천옥이 서로 이용하는 관계라는 걸, 그리고 지금 두 사람의 결혼 때문에 량천옥이 난처한 상황에 놓였다는 걸.진씨 가문의 아가씨 진유경
고은영은 강성의 제1 재벌이 배씨 가문이 아니라, 그냥 배준우라고 생각했다.그녀는 누워서 핸드폰을 꺼냈다.안지영과 조보은에게서 걸려온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가 보였다.그녀는 오늘 계획은 잠시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안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자 바로 안지영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영, 너 오늘 어떻게 된 거야? 너 지금 어디 있어?”“...”“너, 그거 알아? 나 오늘 그 여자 때려서 병원에 입원시켰어.”순간, 고은영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어떻게 된 일이야?”“어떻게 된 일이냐니? 아무리 기다려도 네가 나타나지 않으니까, 조보은이 널 어떻게 한 줄 알았지. 근데 아무리 물어봐도 모른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너무 급해서... “안지영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시 상황에...!조보은이 말을 험하게 하며 온갖 심한 욕을 퍼부었을 게 뻔하니 안지영도 참지 못했을 것이다.게다가 고은영이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으니, 조보은의 짓이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미안해, 나 오늘 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서...”“뭐? 교통사고? 많이 다쳤어? 너 지금 어딨어?”고은영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말에 안지영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걱정하지 마. 별로 안 다쳤어. 그냥 무릎이 까진 정도야!”말하는 순간, 운전기사의 모습이 떠올랐다.교통사고가 나는 순간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해준 기사 아저씨.그 덕분에 그녀가 멀쩡할 수 있었다...!“괜찮아? 그래, 괜찮으면 됐어. 뭐야, 깜짝 놀랐잖아! 아, 그리고 내가 조보은 머리카락 얻었어.”“진짜?”“그럼, 내가 간 목적이 그건데. 네가 없어도, 임무를 수행해야지!”안지영은 조보은이 고은영 친 엄마가 아니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듯했다.“고마워, 지영아!”“고마운 건 둘째 치고, 너 지금 어디야? 내가 찾아갈게.”“나 란완 리조트에 있어!”“뭐? 어디라고?” 안지영은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지를 뻔했다.란완 리조트?그곳은 강성 시내의 전설이다. 지금껏 그곳의
“알아, 그 여자가 먼저 시작했겠지!”고은영은 조보은이 자기 엄마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편을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게다가 지금 친 엄마인지 아닌지 의심이 드는 상황이니 말이다!“그래, 넌 내 편일 줄 알았어.”“일단 알겠어, 그리고 친자 검사하는 곳도 알아봐 줘.”“응. 이미 연락해 뒀어!”“지영아, 너무 고마워.”모든 걸 알아서 다 처리해 주는 안지영이 있으니, 고은영은 너무 든든했다.인생에 이런 친구가 있으니, 더 바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 나 대신 란완 리조트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기억해 둬, 우리 아빠가 단념할 수 있게!”“아저씨가?”“그래, 우리 아빠가 계속 란원 리조트 주인이 누구인지 조사해서, 날 그 사람한테 시집보낸다고 노래 불렀거든!”고은영은 피식 웃었다. 안 아저씨의 ‘딸을 팔아먹으려는’ 야무진 욕망이 귀엽게 느껴졌다.예전에도 장난으로 항상 안지영을 좋은 가격에 팔아야 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그럼, 아저씨한테 말해, 너 못 팔려 간다고.”“그래, 나도 이제 당당하게 말해야겠어. 나 이제 못 팔려 간다고.” 이렇게 자기 가지고 농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안지영뿐일 것이다.안지영과 고은영은 한참 더 수다 떨다가 전화를 끊었다.그러자 바로 조보은의 전화가 걸려 왔다.그녀가 전화한 이유는 안 들어봐도 뻔하다.고은영은 일 초의 고민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혀 받을 생각이 없었다....배씨 가문 본가 시점.오늘 밤 배항준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량천옥도 그가 어디에 갔는지 몰랐다.요즘 그는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량천옥에게 알려주지 않는다.그녀는 지금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고, 수화기 너머에서 ‘확실하지 않다’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얼굴색이 확 어두워졌다.“내가 이런 말을 들으려고, 너희한테 그 많은 돈을 준 줄 알아?”“지금 확실한 건 그 운전기사가 죽었다는 거예요!”“운전기사가 죽은 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래서 지금 그 계집애 어디 있어?”
점심때부터 이상하게 굴더니, 이젠 대놓고 건드리지 말라고 말하다니?조금 전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는데 이런 량일의 말까지 들으니 분노가 치밀다 못해 곧 폭발할 것 같았다.량일도 마찬가지로, 솟구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어쨌든, 내 말 들어. 그 아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한다고 했잖니.”오늘 조보은이 어떻게든 고은영을 데리고 떠나기로 했는데 량천옥이 끼어드는 바람에, 그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다.량천옥은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었다.“엄마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조보은더러 그 계집애를 데리고 떠나라 했다는 거 알아요. 근데 그렇게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요!”량천옥은 그녀가 떠난다 해도 배준우가 그녀를 다시 찾아 데려올 것이라 생각했다.간단히 말해, 배준우와의 결혼을 확실히 막으려면 그녀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게다가 결혼식 날도 점점 다가오는데.“어쨌든, 넌 더 이상 이 일에 끼어들지 마!”“엄마 오늘따라 이상하게 왜 이래요? 지금 그 계집애를 감싸는 거예요?”량천옥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자기가 사람을 시켜 고은영을 처리하려 한다고 말한 뒤부터 완전히 달라진 량일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원래는 안 이랬는데! 전에는 량천옥이 하는 일이라면 그게 뭐든 다 지지해 주었다.하지만 지금은 왜 이토록 반대하는지!량일은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천옥아, 가끔은 양심도 지켜야 해!”“양심? 이번 일만 다 끝나면, 그때는 엄마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요.”량천옥은 귀찮다는 듯 대충 대답했다.고은영은 지금 그녀가 가장 혐오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다.이건 량천옥이 대놓고 배준우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거나 다름없다.사실, 그녀는 배항준에게 시집가는 날부터 이날이 올 것이라는 걸 예상했다. 그날 배준우의 눈빛이 말해줬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녀는 임신하자마자 배항준을 꼬드겨 배준우를 그의 엄마에게 보냈다.그런데 그 아이가 이토록 강한 상대가 되어 돌아올 거라고는
량일이 계속해서 고은영의 일은 자기가 처리한다고 말하는 걸 보면, 고은영이 무사하다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어쩌면 지금 고은영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을까?“병원에서 퇴원할 때 걸어서 나갔으니까 괜찮을 거야.”순간, 량천옥의 눈에 차가운 기운이 스쳤다.괜찮다고?걸어서 나갔다고...?그래서, 다친 데 없이 괜찮다는 뜻이네. 정말 명도 길지, 운전기사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는데.심지어 스스로 걸을 정도로 멀쩡하다고?량일은 량천옥의 살기를 느끼고,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내가 분명히 말했어. 그 아이 가만히 내버려두라고!”“진짜 그 계집애를 감싸는 거예요?”“그게 아니라...!”“지금 엄마가 어떤 모습인지는 알아요?”량천옥이 비꼬는 듯이 말했다.“난 네가 계속해서 틀린 선택을 할까 봐 그래, 네가 준우를 완전히 건드릴까 봐 두렵기도 하고!”“...”“지금이 너한테 가장 중요한 때야. 그리고 배준우가 지금 고은영을 끔찍이 아끼고 있고. 네가 이럴 때 그 아이를 건드리면 준우를 철저히 화나게 하는 거야.”“...”그렇다. 고은영을 제대로 제거하지 못했으니, 배준우의 심기를 더 건드린 셈이다.하지만...!량천옥은 고은영이 스스로 걸어서 퇴원했다는 량일의 말에 심장이 떨렸다.요즘 매일 근심 가득한 얼굴을 하는 량일을 보니 조금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그동안 엄마가 자기를 위해 살아왔단 걸 잘 알기 때문이다.그 당시 아이가 생겼을 때도, 그녀가 가장 먼저 생각한 건 량천옥의 미래였다.량천옥이 량일을 걱정하며 말했다.“그런데 엄마가 그 계집애를 처리하면, 준우가...”“난 이미 살 만큼 살아서 두려울 게 없어.”량일이 그녀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아무튼 넌 고은영 일에 더 이상 참견하지 마. 내가 처리해.”그녀는 다시 한번 강조하며 말했다.량천옥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량천옥도 량일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배씨 집안의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이번 고은영 일도...!“그럼 장
비록 병원에서 이미 다 검사했지만, 다시 의사를 불러 한 번 더 검사했다.다시 검사해서 뼈는 다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그냥 찰과상입니다. 약은 없습니다.”아마 병원에서도 그래서 약을 처방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임신 시기에는 그 어떤 약을 써도 몸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그래서 약을 최대한 쓰지 않는 게 좋다.배준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너무 아파하는데 진통제도 안 됩니까?”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진통제도 어느 정도 몸에 해로워요. 될수록 쓰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의사의 말에 고은영은 더욱 억울했다.그녀는 지금 어떤 약도 복용할 수 없다.이렇게 아픈데 말이다...!“그럼 다른 방법은요?”“얼음찜질하세요. 얼음찜질이 통증에 많이 도움될 거예요.”의사의 말에 배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집사는 의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둘러 도우미에게 주방에 가서 아이스 팩을 가져오라 시켜 그녀의 다리에 대주었다.배준우는 우는 소리하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앞으로 혼자 외출 금지야!”오늘 사고 소식 전화를 받은 걸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떨린다.그녀가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네.”고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오늘따라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모습이다. 아마 많이 놀랐나 보다.오늘 그 차가 전력 질주로 다가오는데, 그대로 충돌했으면 그녀는 아마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을 것이다.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정말 그대로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또다시 기사 아저씨 얼굴이 떠올랐다!“기사 아저씨는 정말 돌아가셨어요?”“응.”배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그분의 가족분들 찾을 수 있을까요?”“왜?”배준우는 고은영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고은영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사실은 그 아저씨가 절 구해주신 거예요.”고은영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그녀도 운전할 줄 아니, 위험이 닥쳤을 때 사람의 본능적인 반응이 어떤 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 아저씨는 오히려 자신이 타고 있
‘여자를 갖고 논다고? 도련님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닌데. 밤에 발생했던 일들도 도련님 모르게 벌어졌던 일인데... 일을 조사해 범인을 밝혀냈을 때 그 범인은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했지.’“구이준.”“네.”구이준이 앞으로 나섰다.“웨딩드레스는 킹덤 타운으로 보냈어?”“네. 다 수선해서 보냈습니다.”그 말을 듣고 장선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태웅을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지영이가 직접 입어보고 고른 웨딩드레스야.”이 말은 나태웅의 위협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나태웅은 온몸이 얼어붙은 듯 차갑게 굳었고 장선명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더욱 음울해졌다.“그럼 거절하겠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지?”“너도 예상하던 답 아니야?”장선명이 싸늘하게 웃으며 답했다.언제 장성명이 위협을 받아들였던가.나태웅은 이런 방식으로 두 사람을 헤어지게 만들 수는 없었다.이전에 안지영을 찾아가도 효과를 보지 못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장선명이 안지영을 위해 그녀와 헤어질 것으로 믿는다면 나태웅은 장씨 가문을 너무 만만히 본 것이다.장씨 가문 사람들은 이런 위협을 받아들일 사람들이 아니었다.“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어. 네가 지영이를 빼앗아 간다면 나도 인정하지.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우릴 헤어지게 하려는 거라면 나뿐만 아니라 강성 전체가 너희 나씨 가문을 경멸할 거야.”말을 마친 장선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더 이상 나태웅과 할 이야기가 없었다.태연하고 무서울 것 없는 장선명의 모습은 나태웅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장선명은 두 발짝 걸어 나가다 무언가 떠오른 듯 멈춰 섰다.“참, 하늘그룹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하늘그룹이 없어져도 나는 안지영이 아무렇지 않을 수 있도록 할 방법은 많아. 하지만 너는? 지영이는 널 지금보다 더 원망할 거야.”‘안지영이 자신을 미워하더라고 나도 같이 미워하게 만들겠다고? 도대체 무슨 논리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자기 판단이 흐린 것처럼 지영이도 반쯤 정신을 놓았다고 생각하는 건가?’장선명은 자
3분 후, 나태웅과 장선명이 마주 앉았다. 겉보기엔 평온해 보였지만 현장의 공기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두 사람은 각자 담배 두 개비씩 피울 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진이훈과 구이준은 몸이 굳으며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다.장선명이 세 번째 담배를 꺼내려는 순간 나태웅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그래서 조건이 뭔데?”나태웅과 시간을 소모하려던 장선명은 그 말을 듣고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조건?”또렷한 말투로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는 나태웅은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지금까지 병원에서 아픈 척한 것도 모두 안지영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바보같이 순진한 안지영만이 진지하게 나태웅이 정말 미친 건지 아닌 건지 고민하고 있었다.“그 여자가 널 미워하게 만들지 마.”나태웅은 이를 악물고 하나하나 힘줘 말했다.장선명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왜 나를 미워해야 하지?”장선명이 흥미롭게 물었다.안진섭과 얼마간 관계가 있을 뿐, 장선명은 다른 방면에서 안지영에게 잘못한 건 없었다.“하늘그룹이 너 때문에 없어진다면 널 미워할 거야. 날 미워하듯 널 미워하게 되는게 네가 진정 원하는 거야?”나태웅이 날카롭게 물었다.하지만 애매한 부분이 있어 장선명은 나태웅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하늘 그룹이 나 때문에 없어진다고? 나태웅 말고 그런 짓을 할 사람이 누가 있다고.’장선명은 담배를 담뱃갑에 도로 넣었다.“그렇다면 지영이는 널 미워하겠지?”“난 상관없어. 어차피 이미 미워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지영이와 계속 함께하려 한다면...”나태웅은 잠시 말을 멈췄다.고개를 들어 장선명을 바라본 순간 그의 시선에는 어느 때보다도 더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나태웅은 싸늘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지영이와 계속 함께하려 한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 하늘그룹을 부숴버릴 거야. 그렇게 돼도 지영이가 너랑 무사히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아?”진이훈과 구이준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나태웅이 말을 마친 순간 현장
“내가 대신 가서 혼내줄게. 너는 여자니까 이미지 신경 써야지. 착하지?”“싫어요! 이미지 따위는 필요 없어요.”장선명이 바로 핸드폰의 카메라를 켜서 그녀 앞에 내밀었다.안지영은 핸드폰 속 자신의 헝클어진 머리와 마치 미친 여자처럼 보이는 모습을 보고는 순간 얼어붙었다.그녀가 조용해지자 현장의 분위기도 순식간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그 남자 때문에 이런 모습 하려고?”안지영은 말문이 막혔다.‘젠장, 언제 이런 모습이 된 거지?’특히나 더 참을 수 없는 건, 나태웅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사실이었다.‘그놈이 뭐라고 내가 이렇게까지 화내는 거지?’“집에 가자. 착하지?”장선명은 부드럽게 안지영을 달랬다.옆에 있던 구이준은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었다.장선명이 어떤 사람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유명했다.그가 소유한 유흥 장소는 셀 수 없이 많았고 그 안에는 온갖 종류의 미녀들이 넘쳐났다.여린 타입, 매혹적인 타입, 요염한 타입. 남자들이 환장하는 스타일은 차고 넘치도록 많았다.또한 유흥가에 들어오는 여자 중 장선명을 유혹하여 인생을 바꾸고 싶어 하는 여자들도 많았다.당시 구이준과 안열은 장선명 주위를 얼씬거리는 여자들을 수없이 많이 처리했지만 장선명이 여자들에게 시선을 두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그래서 구이준과 안열은 당시 장선명이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건지 의심하기도 했었다.예쁜 여자들이 들끓는 곳에서 어떠한 유혹에도 움직이지 않으니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장선명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타입을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이었다.구이준은 안지영을 유심히 보며 생각했다.‘다른 여자들이랑 비교해도 특별한 건 없어 보이는데... 도련님께서 왜 이 여자를 좋아하시는 거지? 화끈한 성격? 아니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호쾌한 모습?’머리를 정리하던 안지영은 헝클어진 머리로 인해 손가락이 끼여버렸고 그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웠다.그로 인해 나태웅에 대한 그녀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
고은영은 분노에 휩싸인 채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가게를 나왔다.배준우가 간 줄 알았던 그녀는 가게에서 나와 배준우의 차가 원래 자리에 있음을 확인하고는 화가 난 표정으로 차에 올라탔다.통화를 하고 있던 배준우는 그녀를 보자마자 통화를 마무리했다.“그래. 그렇게 처리하고 끊어.”그는 곧바로 고은영의 부풀어 오른 볼을 살짝 꼬집으며 물었다.“화났어?”고은영이 말하지 않아도 배준우는 알 수 있었다.진성택이 분명히 또 진유경과 관련된 이야기로 그녀를 화나게 한 것이다.“계속 곧 죽을 거라는 얘기만 반복하고 있어요.”“도덕적 협박이구나?”배준우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그의 안색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진성택이 진유경을 편애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양녀를 선택하고 친딸을 외면한다는 사실은 생각지도 못했다.평소 세심하지 않은 배준우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고은영에 대한 연민이 짙어졌다.고은영은 더 이상 진성택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매번 만나면 진유경 이야기뿐이었기 때문이다.배준우가 한숨을 내쉬며 위로했다.“화내지 마. 어차피 너한테 중요한 사람도 아니잖아.”“그래도 엄마가 너무 불쌍해요.”그녀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가슴 한구석이 쓰려왔다.‘네 명이 자식이나 낳았으면서 엄마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엄마가 나한테 남긴 마지막 사랑마저도 첫사랑의 딸에게 나누려고 하다니...’“저녁에 네 큰오빠네에 가서 밥 먹을까?”“오빠한테 전화 왔었어요?”말 돌리는 데 성공한 배준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응. 아까 너 봤다면서 저녁에 밥 먹자고 하더라고.”“좋아요!”고은영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정훈과 진윤과 가까워진 후, 고은영은 두 오빠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진성택은 정말 무정했다.아니, 애정은 있었지만 그 대상이 아내와 자식이 아닌 다른 사람일 뿐이었다.“언제 태현 오빠한테 물어볼 거예요?”“조금 있다 시간 내서 만나러 가려고.”“좋아요!”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고은지
“어머니가 나한테 남긴 건 그대로 넘겨주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고은영은 진성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말을 끊었다.싸늘한 고은영의 시선에 진성택의 안색은 순간 창백해졌다.진성택이 무언가를 덧붙이기 전에 고은영이 차갑게 말을 이어갔다.“그렇지 않으면 뭐요? 아시다시피 저는 지금 배준우의 아내예요. 진유경에게 손대는 건 쉬운 일이죠.”“유경이한테 손대지 마. 은영이, 너...”“됐어요! 더 이상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아요!”진유경을 그렇게까지 감싸는 진성택을 바라보며 고은영은 실망감을 넘어 차마 형용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이래?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이길래 이런 일까지 한단 말이야! 아내랑 아이를 도대체 뭐로 보는 거지? 어떻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나한테 이런 요구를 할 수 있어... 엄마가 남긴 소중한 유품을 진유경 같은 년에게 넘기겠다고? 하...’진유경이 단순히 진씨 가문의 양녀였다면 고은영은 아마 이렇게까지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진실을 아는 고은영은 지금 상황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다.설령 눈앞의 남자가 그녀의 혈육이고 아버지라 할지라도 고은영은 그를 혐오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진성택은 그녀의 분노에 애처롭게 그녀를 불렀다.“은영아...”고은영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진성택이 말을 이었다.“나한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게 아니었다면 나도 너한테 와서 이런 부탁 하지 않았을 거야.”“같잖은 호소는 그만 하세요. 저희 사이에 애정이라 칭할 만한 감정도 별로 없잖아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내였던 사람에게 너무하네요. 엄마가 불쌍해요.”그녀는 더욱 화가 났다.비록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머니와 특별한 애정이라 할 감정은 없었지만 진성택이 그녀를 대하는 모습을 보며 고은영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밀려왔다.고은영은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어머니의 깊은 사랑은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진성택은 어떠한가.고은영은 더 이상 그를 보고 싶지 않
고은영이 이렇게나 직설적으로 얘기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저는 이제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해요.” 진성택에게 돌려 말하지 말고 직설적으로 얘기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감정적으로 접근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생각했다.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거고 지금 와서 그것을 지울 수는 없었다. 진성택은 고은영의 말에 상처를 받은 듯 보였다. 그녀의 불만 섞인 태도에 그의 마음이 조금은 아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는 걸 알았다. “너희 둘째 오빠가 병원에 왔었어.” 고은영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쏘아보았고 그는 그녀의 생각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네가 받을 모든 주식들 있잖아. 할머니와 진호영, 그리고 유경이의 지분까지 너에게 줬다던데, 맞지?” 고은영은 차갑게 한 마디로 대답했다. “맞아요.” 드디어 그의 목적을 직접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더욱 차가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진성택은 고은영의 차가운 시선에 조금 떨린 듯 말을 이어갔다. “그 주식들은 사실 네 어머니가 너에게 남긴 거니까 너에게 돌아가야 맞아.” “그래서 저에게 돌려주기 위해서 이곳에 부른 거죠?” 고은영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그가 주고자 한다면 왜 이제서야 이리 말하고 있는지 다시 묻고 싶었다. 진성택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고 그의 눈빛에는 죄책감이 떠올랐다. “미안하지만 그 주식은 네게 돌려줄 수 없을 것 같아.” “돌려줄 수 없다고요? 왜요?” 그의 말은 너무도 간단했다. ‘할 수 없다'라는 말이 또다시 진유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거 같았다. 진유경, 정말 독특한 존재다. 역시나 양딸이 모든 것보다 우선이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짜로 진씨 가문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 두 사람의 양부모는 하나같이 그녀를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너희 둘째 오빠가 그 주식들을 되찾고 나서 진씨 가문의 모든 재정적 지원을 끊어버렸어. 지금 그들은 전부 저축해두었던 돈을 쓰고 있어.” 모든 지원을
하지만 진성택은 다르다. 결국 그녀와 혈연관계가 있기 때문에 배준우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 시간 후, 배준우는 고은영을 밀크티 가게에 데려다주었다. “내가 같이 들어갈까?” 배준우가 물었다. “준우 씨는 그냥 기다려요. 당신을 보면 아마 바로 저세상으로 갈지도 몰라요.” ‘이 녀석 입이 참!’ 하지만 고은영이 말이 맞았다. 예전에 진성택과 량천옥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면 진성택은 항상 배준우에게 진유경을 미래의 아내로 삼으라고 했었고 그때 배준우는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굳이 고은영과 결혼했다. 지금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진성택이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운명의 미묘함을 탄식할 것인가? 아니면 진유경 때문에 속상해할 것인가? 고은영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눈에 보였다. 작은 원탁 옆에 앉아 있는 진성택이. 그는 손에 밀크티를 들고 있었다. 고은영이 두 걸음 내딛자마자 진성택도 그녀를 보았다. “왔니?”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랜만에 본 그의 얼굴은 확실히 더 노화되어 보였고 얼굴색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특히나 얼굴이 누렇게 변했고 예전만큼 눈빛도 밝지 않았다. 고은영은 이제 막 기운이 다 빠진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진성택은 확실히 지금 당장이라도 세상을 떠날 듯한 느낌이었다. 그가 말한 대로 아마 이번이 마지막 만남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고은영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이거 마실 수 있어요?” 진성택은 손에 들고 있던 밀크티를 문득 깨닫고 곧바로 그녀에게 건넸다. “너를 위해 샀어. 여자애들은 다 밀크티 좋아하잖아. 너도 좋아하지?”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밀크티는 그녀의 가장 좋아하는 음료였다. 그런데 배준우와 결혼한 이후로 배준우는 그녀가 밀크티가 몸에 안 좋다며 못 마시게 했다. 진성택은 그녀가 음료를 마시지 않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생각해 보면 나는 사실 유경이에게 이런 걸 사준 적이 없었어. 진씨 가문의
전화 너머의 진성택은 고은영의 말을 듣고 당황해서 말문이 막힌 듯했다. “정말 미안해. 미안하다. 전에는 네 감정을 고려하지 못했어.” 그 순간, 진성택은 자신이 고은영에게 대했던 태도가 문제였음을 인정했다. 고은영이 말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은영아,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야. 큰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반응이 무뎌지는 법이잖아. 나는 그동안 계속 너를 찾고 있었어. 그런데 네 소식을 듣고 나서 어떻게 너를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네가 이런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거란 건 알지만 나도 그런 감정이 싫다.” 감정과 이해라. 처음에는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되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고 쳐도 그럼 그 후에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진짜 아이러니했다. 진성택은 고은영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오늘 내가 너를 찾은 건 정말 중요한 일이 있어.” “그게 진유경의 일 때문인가요?” 고은영은 본능적으로 날카롭게 반문했다. 무슨 일이든 그가 지금까지의 태도를 어떻게 설명하든 고은영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저 지금 그가 자신을 찾은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니, 네 어머니 때문이야.” 이 말은 그가 어쩔 수 없이 털어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전화상에서도 고은영은 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죄책감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될수록 그녀는 더 비웃었다. “내가 이 시간 동안 살 수 있는 건 모두 하늘이 준 기회야. 빼앗은 기회라고 해도 될 정도로. 내가 너를 만날 기회도 얼마 안 남았지.” 그는 매우 허약해 보였다. 고은영은 눈썹을 찌푸렸고 이 느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진성택이 마치 도덕적으로 자신을 억지로 끌어들여서 그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자신이 그를 만나지 않으면 너무 냉정한 사람처럼 보일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디예요?” “병원 맞은편의 밀크티 가게에 있어.” 그는 지금 병원에 입원 중이었고 의사들이
고은영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배준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태현 씨는 량천옥이 언니의 생모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당연히 알고 있지.” 이 일은 병원에서도 크게 떠들썩하게 된 사건이라 나태현 쪽에서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배준우는 고은영을 쳐다보며 이어서 말했다. “네가 말한 대로 나태현과 고은지의 거래가 량천옥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지?” “맞아요. 언니가 천락 그룹으로 돌아간다고 말할 때 량천옥이 아직도 밖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것에 불만을 토로했었는데 그 말투에 분노가 가득했어요.” 고은영은 고은지의 분노에 대해 말을 꺼내면서 마음속이 더욱더 쥐어짜이는 것 같았다. 나태현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지금 상황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고은영은 머릿속이 완전히 엉켜버렸다. 그녀가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것처럼 배준우도 지금은 완전히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준우 씨가 나태현 씨에게 언니와 한 거래가 무엇인지 물어봐 줄 수 있어요? 그리고 희주가 본인 딸인 걸 알고 지신혜 씨와 약혼도 할 건데 왜 언니를 천락 그룹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하는지도 물어봐 줘요.”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고은영은 공포감을 느꼈다. 그녀는 고은지에게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지금은 량천옥에 대해 강한 증오를 느끼고 있더라도 말이다. “내가 나태현 형에게 물어볼게. 너는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려.” “언니에게 말하고 싶어요.” “지금은 안 돼. 내가 먼저 나태현이랑 얘기하고 나서 말해.” 배준우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고은영이 말한 대로 지금은 최소한 나태현이 고은지를 천락 그룹으로 돌아가게 만든 계기가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그럼 빨리 물어봐요.” “응, 알았어.” 배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은영은 여전히 마음이 불안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으로서 지금 그녀는 거대한 음모가 고은지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