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지영의 자신만만한 모습에도 고은영은 여전히 걱정됐다.“농사일을 하는 사람이랑 네가 괜찮을까?”농사일 한 사람이라면 힘을 더 말할것도 없다.안지영은 비록 성격이 불 같아서 말로는 이길테지만, 체력적으로는 조보은에게 밀릴것이다.“너 잊었어? 나 태권도 검은띠 7급이야!”맞다!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그렇다면, 조보은 한 명이 아니라, 심지어는 열 명이 와도 안지영한테는 상대가 안 될것이다.이 중요한 사실을 잊다니!그제서야 고은영은 안심이 됐다.“그래, 그럼 내일 그렇게 하는 걸로 하자.”“너 대표님한테는 말씀 드렸어?”고은영은 고개를 저었다.“아니.”“그럼, 대표님한테는 말하지 마.”안지영이 말했다.별로 영광스러운 일은 아니니 말이다. 게다가 현재 배준우와 고은영의 사이가 좀 어색하니 말하지 않는것이 좋다고 생각했다.부부긴 하지만, 가짜 부부기 때문이다.그러나 또 아이가 있는 애매한 상황이다.고은영이 아이를 지키겠다고 결정한 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앞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적당히 거리를 두는것이 좋다고 생각했다.고은영은 안지영의 뜻을 바로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배준우가 회사에서 기다리고 있어, 고은영과 안지영은 서둘러 식사를 마쳤다. 고은영은 7시가 조금 넘어 회사로 돌아갔다.겸사겸사 배준우에게 줄 간식도 사갖고 돌아왔다.마침 배준우도 온라인 회의를 마쳤다.“끝났어요?”배준우는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의 표정에 고은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안 배고파요? 요기거리 라도 드실래요?”“뭐가 있는데?” 배준우가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제가 좀 사갖고 왔어요.”고은영은 말하며 포장해온 음식을 가져왔다.배준우가 몇시까지 회의 할지 몰라서 조금 포장해왔다.집에서는 보통 2시간 정도 회의하니, 오늘 회의 때문에 그의 저녁식사 시간이 너무 늦어질까 봐 걱정됐다.배준우는 그녀가 자신을 위해 음식을 포장해온 걸 보자, 그제야 조금 풀렸다.고은영의 기대에 찬 눈빛에 배준우
그녀가 당황한 모습에 배준우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자기 품에 안았다.“바보야!”배준우가 놀리듯 말했다.고은영은 감정이 정말 둔감한 편이다.방금 먹여달라는 아무 의미 없이 한 질문하나에도 이렇게나 당황하다니. 자기가 그렇게 두려운가 생각이 들었다. 배준우의 신경을 건드리면 다 뺏길까 봐?배준우의 말에 고은영은 더욱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그러자 배준우가 이어서 말했다.“아까 나가면서 날 뭐라고 불렀지?”“......”고은영은 심지어 진청아와 이미월이 다 있는 앞에서 배준우를 ‘여보’라고 불렀다!그 상황을 떠올리기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렸다.“말해!”고은영이 아무말도 못하자 배준우가 더욱 다그치며 말했다.“여보, 여보요!”“대표님이 싫으시다면, 다신 그렇게 안 부를게요.”고은영은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거의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호칭을 고치랬다가, 또 싫다 하면 대체 뭐 어쩌라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그때, 그가 그녀의 뒷통수를 끌어당겼다.그리고, 차가운 그녀의 입술에 차갑고 부드러운 그의 입술이 닿았다. 가까이 있는 그의 얼굴을 보니 고은영은 눈이 휘둥그레졌다.지금 배준우는 정신이 아주 멀쩡한 상태인데, 어떻게 이런 행동을 하는지.. 그는 자기가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지 아는 걸까?긴장한 그녀의 모습에, 배준우가 그녀의 눈을 가리고는 진하게 키스했다.고은영은 온몸이 떨렸다.무의식적으로 두 손으로 그의 목덜미를 감쌌다. 하지만 두려움에 무의식적으로 나온 그녀의 행동에 배준우는 그녀의 응답인 줄 알고 더욱 진하게 키스했다.그리고 그의 손이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그 순간, 고은영은 배준우의 의도가 확 느껴졌다. 그의 신체적 변화가 느껴졌으니 말이다.깜짝 놀란 그녀는 순간 정신을 차리고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거긴 안 돼요!”이 소리에 배준우도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렸다.입술을 떼고 환하게 웃으며 얼굴이 새빨개진 고은영을 바라보았다.“왜?”고은영은 뱃속의 아이가 있으니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임신
그러고 나서 고은영은 어떻게 배준우와 함께 하원에 돌아왔는지 몰랐다. 회사에서 나오기 전에 배준우는 그녀가 포장해 온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그들이 집으로 돌아왔을때 진 씨 아주머니는 이미 퇴근한 상태였다.전에는 집에 단둘이 있어도 괜찮았지만, 오늘은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그래서 그녀는 배준우와 한 공간에 있을 때 항상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멍청하게 서서 뭐 하는 거야? 샤워 안 해?”“저, 오늘은 혼자 자고 싶어요..”“너 몽유병인데 혼자 잔다고 뭐가 달라지나?”“.....”하긴!전에 혼자 잠들었다가 아침에 배준우의 침대에서 일어난 적이 있었다.그래서 지금 배준우의 말에 그녀의 탓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남자를 꼬시는 여우 같은 존재가 된 것인가?생각할수록, 고은영의 얼굴은 더욱 빨갛게 달아올랐다!조심스레 배준우를 쳐다보며 뭔가 말하려다가 멈췄다...!그녀가 움직이지 않자 배준우가 물었다.“왜?”고은영의 얼굴은 온통 고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제가 일부러 대표님 꼬시려고 그런 게 아니라해도 믿으시겠어요?”“너라면 그걸 믿겠어?”“......”하긴, 이건 그 누구도 믿기 어려울 것이다.배준우의 날카로운 반문에 고은영은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었다.“근데... 정말 꼬시려고 그런 게 아니에요.”“하하. 알겠어, 믿으면 되잖아.”배준우는 다소 장난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별로 믿는 태도는 아니었다.그녀도 배준우가 말로만 그렇게 대답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녀는 정말 자신을 묶어놓고 자고 싶은 심정이었다.요즘 고은영은 입덧은 별로 없지만, 잠이 많아졌다.그녀가 입덧을 할 때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입덧이 지나가니, 졸음이 시작됐다. 요즘 그녀의 가장 큰 고민이다.아침!비몽사몽 상태로 눈을 뜨자, 배준우는 이미 양복에 넥타이까지 다 매고 있었다. 그녀는 피곤한 듯 몸을 뒤척이며 중얼거렸다.“지금 몇 시예요?”“거의 8시 다 되가.”8시라고? 그런데 왜 이렇게나 피
“그럼 진 씨 아주머니도 데려가.”“아니요. 지영이랑 같이 갈 거예요.”안지영과 같이 간다는 말에 배준우의 표정이 굳었다.그녀와 안지영 사이가 너무 가까운 걸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했다.“어제 같이 저녁 먹은 이유가 이거야?”“네, 맞아요.”고은영은 배준우의 기분을 느끼지 못하고 그렇다고 대답했고, 침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차가워졌다.그제야 고은영은 조심스레 그의 표정을 살폈다.그는 화가 나 보였고, 고은영은 아무것도 잘못한게 없는데 왜 또 화난건지 이해가 안 갔다.지금 배준우가 도대체 왜 화를 내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다행히 배준우도 더 묻지 않았다.“피곤하면 더 자. 아주머니가 밥 데워줄 거야.”“네, 알겠어요.”고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배준우가 나가자, 침실 안의 냉기도 많이 사라졌다.고은영은 너무 피곤해서 몸이 나른해졌다.그리고 알아보니 이럴 때는 배가 점점 불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특히 어젯밤 샤워할 때 그녀는 자신의 아랫배가 점점 불러오고 있다는 걸 느꼈다.그래서 요즘 그녀는 온통 장항 프로젝트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하지만 량천옥은 지금까지도 질질 끌고 있다!두 사람의 결혼식 날짜가 점점 다가온다. 하지만, 배항준이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량천옥은 여전히 손을 놓지 않았다.고은영도 량천옥이 이렇게까지 하는 게 조금은 이해가 갔다. 지나 3년간 배준우는 그동안 빼앗겼던 모든 걸 다시 뺏어왔다.만약 해외 프로젝트까지 그의 손에 들어온다면, 배윤은 정말 아무 것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그래서 량천옥은 아주 조급했다.하지만 웃긴건 그 모든 건 원래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모두 배항준과 배준우의 친어머니가 쌓아온 것들이다.남의 가정을 망가뜨리고, 그 자리를 차지해서 얻은 것인데, 다 뺏긴대도 억울해 할 자격은 없다.그때, 고은영의 핸드폰이 울렸다.그녀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조보은이었다.“여보세요.”“은영아, 언제 와? 지금 기다리고 있어.”갑자기
백 어르신을 그건 임신 시기 정상 반응이고, 임신 초기의 임산부들은 대부분 속이 울렁거리는 반응도 있다고 했다.개인에 체질에 따라 다른 증상이 나타난다고 말했다.그러니 고은영의 지금 증상도 다 정상적인 것이다.백 어르신의 말에 배준우는 그제야 시름이 놓였다.점심때, 고은영은 또 한 번 조보은의 전화 소리에 깼고, 그제야 느릿느릿 일어났다.그리고 안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나 가는데 30분 정도 걸릴것 같아. 너도 출발해.”“응, 주소 보내줘, 바로 갈게.”“응.”고은영은 전화를 끊고 안지영에게 주소를 보낸 뒤 일어나서 옷을 입었다.고은영이 거실로 나오자 진 씨 아주머니가 말했다.“사모님, 드디어 일어나셨네요! 도련님이 얼마나 걱정하셨는데요.”진 씨 아주머니는 흐뭇한 듯 웃으며 말했다.아주머니는 배준우가 이렇게 누군가를 걱정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고은영을 만나고 그가 많이 따뜻해졌다.“저 점심은 나가서 먹을거니 밥 따로 안 챙겨주셔도 괜찮아요.”“네, 알겠어요.”진 씨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고는 바로 밖으로 나갔다.진 씨 아주머니는 조금 마음이 놓이지 않아, 배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배준우는 이미 그녀가 조보은을 만나러 간다는 걸 알고 있었고, 안지영이 함께 간다고 하니 크게 걱정되진 않았다."네, 알겠어요.”배준우는 알겠다고만 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배씨 가문 본가.배항준은 량천옥이 계속 집에 있으면서, 통화 한 번 안 하는 모습에 낮은 소리로 물었다.“장항 프로젝트 어디까지 정리됐어? 오늘 내로 넘겨줄 수 있어?”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량천옥의 모습에 배항준의 태도는 더욱 차가워졌다.심지어 계속 해서 시간을 끄는 그녀의 모습에 배항준의 인내심도 바닥을 치고 있었다.지금, 량천옥은 차를 마시려고 했다가, 배항준의 말에 행동을 멈추고는 대답했다.“네!”여전히 내키지 않은 듯 한 글자만 간략하게 내뱉었다. 그러자 굳었던 배항준의 얼굴이 한껏 펴졌다.그동안 량천옥은 장항 프로젝트를 넘겨주기 싫은 이
량천옥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량천옥은 자신이 살아 있는 한 배준우가 해외 프로젝트를 채가는 모습을 절대 못 본다고 생각했다.량천옥의 말에 량일의 얼굴이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뭘 어떻게 처리한다는 거야?”그녀도 이미 손을 쓴 상태였다.조보은이 오늘 고은영을 데리고 떠날 것이다.고은영이 떠나기만 하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간다.하지만, 오늘 고은영이 조보은에게 끌려간다는 걸 생각하니 량일은 마음이 아팠다.그러나 어쩔 수 없다.일단 이 고비부터 빨리 넘겨야 한다.....량일의 물음에 량천옥은 냉담하게 코웃음 치며 말했다.“당연히 싹부터 바로 끊어 내야죠!”“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량일은 깜짝 놀랐다.량천옥의 살기 가득한 눈빛에 량일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이 고은영을 처리해 버린다고 해도 다른 고은영이 또 생길 거라고요?”“......”“하지만 결혼을 막으려면 이 고은영부터 제거해야 해요! 고은영이 없으면 협박할 핑계도 없어요!”말할수록 량천옥의 눈빛은 더욱 날카로워졌다.그녀는 일찍이 고은영을 처리해 버리고 싶었다.전에 남성에서의 일도 고은영 때문에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그녀를 지금껏 내버려둔 것도 이미 큰 인내심을 베푼 거다.그동안 그녀가 망친 일만 몇 갠가! 이번엔 절대 봐줄 수 없다!“뭐, 뭐라고 했어?”량일은 깜짝 놀란 눈으로 량천옥을 쳐다봤다.“누구를 제거한다고?”“고은영이요!”량천옥은 오늘 아침 배준우 혼자 출근했다는 전화를 받았다.그리고 고은영도 방금 혼자 외출했다고 전해 들었다!요즘 두 사람은 거의 붙어 다니다시피 했으니, 고은영만 있는 이런 기회가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량일의 얼굴이 창백해진 채로, 뒷걸음치며 말했다.“너가 어떻게 그런 짓을!”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량천옥을 쳐다보았다.예전엔 무슨 일이든 다 상의하더니, 이번에 이렇게 큰일을 한마디 상의없이 혼자 결정하다니!그런 량일의 모습에 량천옥이 물었다.“엄마, 왜 그래요?”“당장, 당장 멈춰!”“아니,
량천옥은 인내심을 잃고 물었다.“엄마,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일단 빨리 전화나 해!”량일은 긴 말을 할 시간이 없었다.서둘러 이 모든 걸 제지해야 했다.량천옥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가 ‘처리’한다는 말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고은영의 목숨이 달려있다. 아니면, 고은영은 완전히 망가뜨려질 것이다.량일의 호통에 량천옥은 다시 전화기를 다시 집어 들었다.연달아 세 통을 걸었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전화 안 받아요... 아마....”“어디로 갔어?”저쪽에서 계속 전화를 받지 않자, 량일은 심장이 떨렸다.“그건 모르겠어요. 30분 전에 고은영 뒤를 밟고 있다고 했는데, 아마 지금쯤 이미 다 처리하지 않았을까요?”“....”량천옥의 말에 량일은 다리에 힘이 풀려결국 바닥에 주저앉았다.그런 량일의 모습에 량천옥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치가 떨릴 정도로 꼴 보기 싫은 고은영인데, 하는 일마다 방해를 하는 고은영인데!진씨 집안에서도 빨리 합리적인 대답을 달라고 재촉해기에 배항준은 배준우와 고은영의 결혼을 파기시키겠다고 답을 해줬다.그렇지 않으면, 배씨 가문과 진씨 가문의 협력이 즉시 종료되기 때문이다.두 집안은 주로 해외 프로젝트에서 협력하고 있다. 만약 이 협력 관계가이 파기되면 가장 손해볼 사람이 누군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이건 량천옥이 진씨 가문과 왕래가 잦은 이유이기도 하다.“아니, 왜 그러시는 거예요?”량천옥은 량일이 왜 이러는지 도무지 이해 가지 않았다.량일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량천옥을 쳐다봤다.“도대체 어디있어?”“정말 몰라요. 방금 하원에서부터 그 계집애를 따라간다고 했어요.”사실이었다!그 사람들이 고은영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정말 몰랐다.량일은 심장이 떨려 눈을 질끈 감았다.“죄를 짓는구나! 죄를 지어!”“엄마, 뭐 하는 거예요?”량일의 감정이 점점 격해지는 걸 보고 량천옥은 더 어리둥절했다.시장에 채소 사러 갔던 도우미가 돌아오자 량천옥
“여기서 왜 갑자기 그 애가 나와요?”“천옥아, 그건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야. 알아? 우리......!”량일은 이어서 말하지 않았다. 정말 되돌릴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세상에는 정말로 인과잉보가 존재한다!그 애가 복수하러 왔다고!량천옥은 여전히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오늘은 예외예요. 난 장항 프로젝트를 지키기 위해서 그러는 거라고요!”고은영이 배준우 곁에서 쉽게 떨어졌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그녀 자신과 배윤의 미래가 걸린 일이니, 양심에 좀 어긋나는 일을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벌을 받는 대도, 자기 혼자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배윤의 미래는 보장이 되니까 말이다. “너, 당장 나가!”량일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엄마....”“나 혼자 조용히 있고 싶어.”“.......”량천옥은 량일이 자기가 고은영을 상대하는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이러는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예전에 량일이 배항준의 내연녀들을 상대할 때의 수단도 그리 인간적이진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왜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그럼 좀 주무세요. 저 먼저 나갈게요.”량일이 눈을 감아버리니, 량천옥도 더 말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방엔 량일 혼자 남았고, 그녀는 다급하게 전화기를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량일아”“나 지금 급하게 찾아야 할 사람이 있어. 지금 당장 어디 있는지 알아야 돼!”“누구?”“고은영, 지금 당장 어디 있는지 알아봐 줘!”그리고, 지금 어떤지...량일은 심장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방금 량천옥이 그 사람들이 하원에서부터 고은영을 따라갔다고 했다.하지만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 량일도 량천옥이 진짜 모른다고 믿었다.어쨌든 지금, 그 아이를 빨리 찾아야 한다.“그래, 알았어!”“빨리 알아봐야 해! 그 아이가 지금 위험에 처했어. 도와줘!”량일은 울먹이며 말했다.“알겠어...”수화기 너머에서 차분한 대답이
‘여자를 갖고 논다고? 도련님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닌데. 밤에 발생했던 일들도 도련님 모르게 벌어졌던 일인데... 일을 조사해 범인을 밝혀냈을 때 그 범인은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했지.’“구이준.”“네.”구이준이 앞으로 나섰다.“웨딩드레스는 킹덤 타운으로 보냈어?”“네. 다 수선해서 보냈습니다.”그 말을 듣고 장선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태웅을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지영이가 직접 입어보고 고른 웨딩드레스야.”이 말은 나태웅의 위협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나태웅은 온몸이 얼어붙은 듯 차갑게 굳었고 장선명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더욱 음울해졌다.“그럼 거절하겠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지?”“너도 예상하던 답 아니야?”장선명이 싸늘하게 웃으며 답했다.언제 장성명이 위협을 받아들였던가.나태웅은 이런 방식으로 두 사람을 헤어지게 만들 수는 없었다.이전에 안지영을 찾아가도 효과를 보지 못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장선명이 안지영을 위해 그녀와 헤어질 것으로 믿는다면 나태웅은 장씨 가문을 너무 만만히 본 것이다.장씨 가문 사람들은 이런 위협을 받아들일 사람들이 아니었다.“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어. 네가 지영이를 빼앗아 간다면 나도 인정하지.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우릴 헤어지게 하려는 거라면 나뿐만 아니라 강성 전체가 너희 나씨 가문을 경멸할 거야.”말을 마친 장선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더 이상 나태웅과 할 이야기가 없었다.태연하고 무서울 것 없는 장선명의 모습은 나태웅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장선명은 두 발짝 걸어 나가다 무언가 떠오른 듯 멈춰 섰다.“참, 하늘그룹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하늘그룹이 없어져도 나는 안지영이 아무렇지 않을 수 있도록 할 방법은 많아. 하지만 너는? 지영이는 널 지금보다 더 원망할 거야.”‘안지영이 자신을 미워하더라고 나도 같이 미워하게 만들겠다고? 도대체 무슨 논리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자기 판단이 흐린 것처럼 지영이도 반쯤 정신을 놓았다고 생각하는 건가?’장선명은 자
3분 후, 나태웅과 장선명이 마주 앉았다. 겉보기엔 평온해 보였지만 현장의 공기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두 사람은 각자 담배 두 개비씩 피울 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진이훈과 구이준은 몸이 굳으며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다.장선명이 세 번째 담배를 꺼내려는 순간 나태웅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그래서 조건이 뭔데?”나태웅과 시간을 소모하려던 장선명은 그 말을 듣고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조건?”또렷한 말투로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는 나태웅은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지금까지 병원에서 아픈 척한 것도 모두 안지영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바보같이 순진한 안지영만이 진지하게 나태웅이 정말 미친 건지 아닌 건지 고민하고 있었다.“그 여자가 널 미워하게 만들지 마.”나태웅은 이를 악물고 하나하나 힘줘 말했다.장선명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왜 나를 미워해야 하지?”장선명이 흥미롭게 물었다.안진섭과 얼마간 관계가 있을 뿐, 장선명은 다른 방면에서 안지영에게 잘못한 건 없었다.“하늘그룹이 너 때문에 없어진다면 널 미워할 거야. 날 미워하듯 널 미워하게 되는게 네가 진정 원하는 거야?”나태웅이 날카롭게 물었다.하지만 애매한 부분이 있어 장선명은 나태웅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하늘 그룹이 나 때문에 없어진다고? 나태웅 말고 그런 짓을 할 사람이 누가 있다고.’장선명은 담배를 담뱃갑에 도로 넣었다.“그렇다면 지영이는 널 미워하겠지?”“난 상관없어. 어차피 이미 미워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지영이와 계속 함께하려 한다면...”나태웅은 잠시 말을 멈췄다.고개를 들어 장선명을 바라본 순간 그의 시선에는 어느 때보다도 더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나태웅은 싸늘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지영이와 계속 함께하려 한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 하늘그룹을 부숴버릴 거야. 그렇게 돼도 지영이가 너랑 무사히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아?”진이훈과 구이준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나태웅이 말을 마친 순간 현장
“내가 대신 가서 혼내줄게. 너는 여자니까 이미지 신경 써야지. 착하지?”“싫어요! 이미지 따위는 필요 없어요.”장선명이 바로 핸드폰의 카메라를 켜서 그녀 앞에 내밀었다.안지영은 핸드폰 속 자신의 헝클어진 머리와 마치 미친 여자처럼 보이는 모습을 보고는 순간 얼어붙었다.그녀가 조용해지자 현장의 분위기도 순식간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그 남자 때문에 이런 모습 하려고?”안지영은 말문이 막혔다.‘젠장, 언제 이런 모습이 된 거지?’특히나 더 참을 수 없는 건, 나태웅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사실이었다.‘그놈이 뭐라고 내가 이렇게까지 화내는 거지?’“집에 가자. 착하지?”장선명은 부드럽게 안지영을 달랬다.옆에 있던 구이준은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었다.장선명이 어떤 사람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유명했다.그가 소유한 유흥 장소는 셀 수 없이 많았고 그 안에는 온갖 종류의 미녀들이 넘쳐났다.여린 타입, 매혹적인 타입, 요염한 타입. 남자들이 환장하는 스타일은 차고 넘치도록 많았다.또한 유흥가에 들어오는 여자 중 장선명을 유혹하여 인생을 바꾸고 싶어 하는 여자들도 많았다.당시 구이준과 안열은 장선명 주위를 얼씬거리는 여자들을 수없이 많이 처리했지만 장선명이 여자들에게 시선을 두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그래서 구이준과 안열은 당시 장선명이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건지 의심하기도 했었다.예쁜 여자들이 들끓는 곳에서 어떠한 유혹에도 움직이지 않으니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장선명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타입을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이었다.구이준은 안지영을 유심히 보며 생각했다.‘다른 여자들이랑 비교해도 특별한 건 없어 보이는데... 도련님께서 왜 이 여자를 좋아하시는 거지? 화끈한 성격? 아니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호쾌한 모습?’머리를 정리하던 안지영은 헝클어진 머리로 인해 손가락이 끼여버렸고 그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웠다.그로 인해 나태웅에 대한 그녀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
고은영은 분노에 휩싸인 채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가게를 나왔다.배준우가 간 줄 알았던 그녀는 가게에서 나와 배준우의 차가 원래 자리에 있음을 확인하고는 화가 난 표정으로 차에 올라탔다.통화를 하고 있던 배준우는 그녀를 보자마자 통화를 마무리했다.“그래. 그렇게 처리하고 끊어.”그는 곧바로 고은영의 부풀어 오른 볼을 살짝 꼬집으며 물었다.“화났어?”고은영이 말하지 않아도 배준우는 알 수 있었다.진성택이 분명히 또 진유경과 관련된 이야기로 그녀를 화나게 한 것이다.“계속 곧 죽을 거라는 얘기만 반복하고 있어요.”“도덕적 협박이구나?”배준우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그의 안색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진성택이 진유경을 편애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양녀를 선택하고 친딸을 외면한다는 사실은 생각지도 못했다.평소 세심하지 않은 배준우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고은영에 대한 연민이 짙어졌다.고은영은 더 이상 진성택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매번 만나면 진유경 이야기뿐이었기 때문이다.배준우가 한숨을 내쉬며 위로했다.“화내지 마. 어차피 너한테 중요한 사람도 아니잖아.”“그래도 엄마가 너무 불쌍해요.”그녀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가슴 한구석이 쓰려왔다.‘네 명이 자식이나 낳았으면서 엄마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엄마가 나한테 남긴 마지막 사랑마저도 첫사랑의 딸에게 나누려고 하다니...’“저녁에 네 큰오빠네에 가서 밥 먹을까?”“오빠한테 전화 왔었어요?”말 돌리는 데 성공한 배준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응. 아까 너 봤다면서 저녁에 밥 먹자고 하더라고.”“좋아요!”고은영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정훈과 진윤과 가까워진 후, 고은영은 두 오빠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진성택은 정말 무정했다.아니, 애정은 있었지만 그 대상이 아내와 자식이 아닌 다른 사람일 뿐이었다.“언제 태현 오빠한테 물어볼 거예요?”“조금 있다 시간 내서 만나러 가려고.”“좋아요!”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고은지
“어머니가 나한테 남긴 건 그대로 넘겨주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고은영은 진성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말을 끊었다.싸늘한 고은영의 시선에 진성택의 안색은 순간 창백해졌다.진성택이 무언가를 덧붙이기 전에 고은영이 차갑게 말을 이어갔다.“그렇지 않으면 뭐요? 아시다시피 저는 지금 배준우의 아내예요. 진유경에게 손대는 건 쉬운 일이죠.”“유경이한테 손대지 마. 은영이, 너...”“됐어요! 더 이상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아요!”진유경을 그렇게까지 감싸는 진성택을 바라보며 고은영은 실망감을 넘어 차마 형용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이래?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이길래 이런 일까지 한단 말이야! 아내랑 아이를 도대체 뭐로 보는 거지? 어떻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나한테 이런 요구를 할 수 있어... 엄마가 남긴 소중한 유품을 진유경 같은 년에게 넘기겠다고? 하...’진유경이 단순히 진씨 가문의 양녀였다면 고은영은 아마 이렇게까지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진실을 아는 고은영은 지금 상황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다.설령 눈앞의 남자가 그녀의 혈육이고 아버지라 할지라도 고은영은 그를 혐오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진성택은 그녀의 분노에 애처롭게 그녀를 불렀다.“은영아...”고은영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진성택이 말을 이었다.“나한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게 아니었다면 나도 너한테 와서 이런 부탁 하지 않았을 거야.”“같잖은 호소는 그만 하세요. 저희 사이에 애정이라 칭할 만한 감정도 별로 없잖아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내였던 사람에게 너무하네요. 엄마가 불쌍해요.”그녀는 더욱 화가 났다.비록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머니와 특별한 애정이라 할 감정은 없었지만 진성택이 그녀를 대하는 모습을 보며 고은영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밀려왔다.고은영은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어머니의 깊은 사랑은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진성택은 어떠한가.고은영은 더 이상 그를 보고 싶지 않
고은영이 이렇게나 직설적으로 얘기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저는 이제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해요.” 진성택에게 돌려 말하지 말고 직설적으로 얘기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감정적으로 접근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생각했다.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거고 지금 와서 그것을 지울 수는 없었다. 진성택은 고은영의 말에 상처를 받은 듯 보였다. 그녀의 불만 섞인 태도에 그의 마음이 조금은 아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는 걸 알았다. “너희 둘째 오빠가 병원에 왔었어.” 고은영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쏘아보았고 그는 그녀의 생각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네가 받을 모든 주식들 있잖아. 할머니와 진호영, 그리고 유경이의 지분까지 너에게 줬다던데, 맞지?” 고은영은 차갑게 한 마디로 대답했다. “맞아요.” 드디어 그의 목적을 직접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더욱 차가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진성택은 고은영의 차가운 시선에 조금 떨린 듯 말을 이어갔다. “그 주식들은 사실 네 어머니가 너에게 남긴 거니까 너에게 돌아가야 맞아.” “그래서 저에게 돌려주기 위해서 이곳에 부른 거죠?” 고은영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그가 주고자 한다면 왜 이제서야 이리 말하고 있는지 다시 묻고 싶었다. 진성택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고 그의 눈빛에는 죄책감이 떠올랐다. “미안하지만 그 주식은 네게 돌려줄 수 없을 것 같아.” “돌려줄 수 없다고요? 왜요?” 그의 말은 너무도 간단했다. ‘할 수 없다'라는 말이 또다시 진유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거 같았다. 진유경, 정말 독특한 존재다. 역시나 양딸이 모든 것보다 우선이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짜로 진씨 가문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 두 사람의 양부모는 하나같이 그녀를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너희 둘째 오빠가 그 주식들을 되찾고 나서 진씨 가문의 모든 재정적 지원을 끊어버렸어. 지금 그들은 전부 저축해두었던 돈을 쓰고 있어.” 모든 지원을
하지만 진성택은 다르다. 결국 그녀와 혈연관계가 있기 때문에 배준우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 시간 후, 배준우는 고은영을 밀크티 가게에 데려다주었다. “내가 같이 들어갈까?” 배준우가 물었다. “준우 씨는 그냥 기다려요. 당신을 보면 아마 바로 저세상으로 갈지도 몰라요.” ‘이 녀석 입이 참!’ 하지만 고은영이 말이 맞았다. 예전에 진성택과 량천옥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면 진성택은 항상 배준우에게 진유경을 미래의 아내로 삼으라고 했었고 그때 배준우는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굳이 고은영과 결혼했다. 지금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진성택이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운명의 미묘함을 탄식할 것인가? 아니면 진유경 때문에 속상해할 것인가? 고은영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눈에 보였다. 작은 원탁 옆에 앉아 있는 진성택이. 그는 손에 밀크티를 들고 있었다. 고은영이 두 걸음 내딛자마자 진성택도 그녀를 보았다. “왔니?”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랜만에 본 그의 얼굴은 확실히 더 노화되어 보였고 얼굴색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특히나 얼굴이 누렇게 변했고 예전만큼 눈빛도 밝지 않았다. 고은영은 이제 막 기운이 다 빠진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진성택은 확실히 지금 당장이라도 세상을 떠날 듯한 느낌이었다. 그가 말한 대로 아마 이번이 마지막 만남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고은영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이거 마실 수 있어요?” 진성택은 손에 들고 있던 밀크티를 문득 깨닫고 곧바로 그녀에게 건넸다. “너를 위해 샀어. 여자애들은 다 밀크티 좋아하잖아. 너도 좋아하지?”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밀크티는 그녀의 가장 좋아하는 음료였다. 그런데 배준우와 결혼한 이후로 배준우는 그녀가 밀크티가 몸에 안 좋다며 못 마시게 했다. 진성택은 그녀가 음료를 마시지 않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생각해 보면 나는 사실 유경이에게 이런 걸 사준 적이 없었어. 진씨 가문의
전화 너머의 진성택은 고은영의 말을 듣고 당황해서 말문이 막힌 듯했다. “정말 미안해. 미안하다. 전에는 네 감정을 고려하지 못했어.” 그 순간, 진성택은 자신이 고은영에게 대했던 태도가 문제였음을 인정했다. 고은영이 말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은영아,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야. 큰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반응이 무뎌지는 법이잖아. 나는 그동안 계속 너를 찾고 있었어. 그런데 네 소식을 듣고 나서 어떻게 너를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네가 이런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거란 건 알지만 나도 그런 감정이 싫다.” 감정과 이해라. 처음에는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되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고 쳐도 그럼 그 후에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진짜 아이러니했다. 진성택은 고은영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오늘 내가 너를 찾은 건 정말 중요한 일이 있어.” “그게 진유경의 일 때문인가요?” 고은영은 본능적으로 날카롭게 반문했다. 무슨 일이든 그가 지금까지의 태도를 어떻게 설명하든 고은영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저 지금 그가 자신을 찾은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니, 네 어머니 때문이야.” 이 말은 그가 어쩔 수 없이 털어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전화상에서도 고은영은 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죄책감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될수록 그녀는 더 비웃었다. “내가 이 시간 동안 살 수 있는 건 모두 하늘이 준 기회야. 빼앗은 기회라고 해도 될 정도로. 내가 너를 만날 기회도 얼마 안 남았지.” 그는 매우 허약해 보였다. 고은영은 눈썹을 찌푸렸고 이 느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진성택이 마치 도덕적으로 자신을 억지로 끌어들여서 그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자신이 그를 만나지 않으면 너무 냉정한 사람처럼 보일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디예요?” “병원 맞은편의 밀크티 가게에 있어.” 그는 지금 병원에 입원 중이었고 의사들이
고은영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배준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태현 씨는 량천옥이 언니의 생모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당연히 알고 있지.” 이 일은 병원에서도 크게 떠들썩하게 된 사건이라 나태현 쪽에서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배준우는 고은영을 쳐다보며 이어서 말했다. “네가 말한 대로 나태현과 고은지의 거래가 량천옥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지?” “맞아요. 언니가 천락 그룹으로 돌아간다고 말할 때 량천옥이 아직도 밖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것에 불만을 토로했었는데 그 말투에 분노가 가득했어요.” 고은영은 고은지의 분노에 대해 말을 꺼내면서 마음속이 더욱더 쥐어짜이는 것 같았다. 나태현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지금 상황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고은영은 머릿속이 완전히 엉켜버렸다. 그녀가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것처럼 배준우도 지금은 완전히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준우 씨가 나태현 씨에게 언니와 한 거래가 무엇인지 물어봐 줄 수 있어요? 그리고 희주가 본인 딸인 걸 알고 지신혜 씨와 약혼도 할 건데 왜 언니를 천락 그룹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하는지도 물어봐 줘요.”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고은영은 공포감을 느꼈다. 그녀는 고은지에게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지금은 량천옥에 대해 강한 증오를 느끼고 있더라도 말이다. “내가 나태현 형에게 물어볼게. 너는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려.” “언니에게 말하고 싶어요.” “지금은 안 돼. 내가 먼저 나태현이랑 얘기하고 나서 말해.” 배준우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고은영이 말한 대로 지금은 최소한 나태현이 고은지를 천락 그룹으로 돌아가게 만든 계기가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그럼 빨리 물어봐요.” “응, 알았어.” 배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은영은 여전히 마음이 불안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으로서 지금 그녀는 거대한 음모가 고은지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