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우은 블랙아웃된 핸드폰을 보고 화가나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다시 켜봐도30초 만에 바로 꺼졌다.다시 억지로 키면 아예 켜지지 않을 수도 있을 정도였다."왜 그래?”서정우가 전화를 들고 멍하니 서 있자 서준호가 물었다.“배터리가 다 됐어요. 아버지 핸드폰은 배터리 있어요?”“있어!”서준호는 서둘러 자신의 전화를 꺼내 서정우에게 건넸다.그러나 휴대폰을 든 서정우는 다시 멈칫했다.그가 또 멈칫하자 서준호는 답답했다.“또 왜 그래?”“번호가 기억나지 않아요!”“그럼, 네 휴대폰 다시 켜서 봐.”다시 키라고? 아까 30초 만에 바로 꺼지는 걸 보지 못했나?서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핸드폰을 켜보려 했지만 이번에는 아예 켜지기 않았다.“젠장....!”이 순간의 서정우는 화가 나서 핸드폰을 던져버리고 싶었다.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마지막 희망도 완전히 사라졌다!“그럼 어떡해? 어디 충전할 데 없어?”서준호가 서정우에게 물었다.정말 하늘도 그들의 편이 아니다!뭘 해도 안 되는 날이다!“보조배터리를 빌려도 돈 내야 빌리죠, 지금 돈도 없는데.....!”정말 절망적인 상황이었다.“돈은 다 네 엄마한테 있어. 나도 돈이 없어.”서정우도 돈이 없다!강성에 온 뒤로, 모든 돈은 조보은이 관리하고 있었다.지금 조보은도 끌려갔고, 그들에겐 한 푼도 없다.“고은영이랑 고은지 번호는 기억하지?”서준호가 또 다시 물었다.“기억해요!”“전화해서 돈 좀 빌려.”서준호는 뻔뻔스럽게 말했다.지금 한 푼도 없으니. 그들이 지내는 곳뿐만 아니라, 저녁 식사까지 문제였다.설마 정말 자기들을 굶겨 죽일까 생각했다!서준호는 이 두 계집애가 이렇게까진 독하지 않을거라 생각했다.........회사 시점.배준우가 회의를 마치고 나오니 6시 반이었다. 사무실 건물 밖에는 이미 네온사인들이 켜져 있었다.배준우가 사무실로 돌아오니, 소파에 누워 잠든 고은영의 모습이 보였다.그녀의 모습을 보니 날카로웠던 배준우의 눈빛이 조금 부드러
배준우가 나가지 않으니, 그녀도 나갈 수가 없었다.특히 지금 안지영도 회사를 떠났으니 더 나갈 기회가 없었다.차에 타자마자고은영은 고은지의 전화를 받았다.“언니.”“서정우가 다시 전화하면 다시 상대도 하지 마.”“그렇게까지 말했는데 또 전화한다고?”고은영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서정우에게 심한 말이란 심한 말은 다 했는데.하지만 그 가족의 파렴치함을 생각하면 전화를 다시 걸어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분명히 다시 전화할 거야!”“언니한테도 전화 갔어?”고은영이 물었다.“응, 돈 달라더라!”“......”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돈을 요구할 체면이 있다니!하긴, 양심이라곤 조금도 없으니, 뭐, 별로 놀랄 일도 아니었다.서정우 같은 사람은 그 어떤 말로도 떼어내기 힘든 사람이다고은영이 걱정할까 봐 고은지가 이어서 말했다.“나 돈 안 줬어. 다시 전화도 안 받았고. 그러니까 아마 또 너한테 연락할 거야.”“난 더 안 주지.”고은영은 단호하게 말했다.고은영은 예전에 고은지가 그들에게 돈을 줄 때도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히려 고은지가 바보라고 생각했다.지금 고은지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는데, 자기는 더더욱 그런 바보짓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나 고은지의 말을 들으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그래, 그럼 됐어!”이번에는 고은지의 결심이 대단해 보였다.그녀도 고은영처럼 그들을 떼어내려고 애를 쓰고 있다.지금 그들이 고은영에게 이러는 건 다 그 집 때문이다.고은영이 지금과 같은 태도로 일관한다면 그들도 그 집을 손에 넣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두 사람이 지금 해야 할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되는 것이다.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 한다.고은지와 통화를 마치자마자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고은영은 이게 서준호의 번호인 줄 모르고 있었다.“여보세요.”“누나.”서정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고은영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리려 했다.그러자 수화기 너머 서정우가 뭔가
고은영의 말에 배준우가 웃으며 물었다.“일말의 감정도 없어?”그녀에게 이렇게 단호한 면도 있는지 몰랐다.누구도 설득할 수 없는 그런 단호함 말이다.이전에 그녀에 대해 잘 몰랐을 때는 그냥 겁쟁이인 줄만 알았지,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다.하지만 좀 과도하게 단호했고, 과도하게 자기주장이 강했다.배준우도 그걸 금방 알아챘다. 그녀는 극단적인 반전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걸. 특히 특정된 일에서 말이다.가끔 너무 단호한 그녀의 모습에 놀랄 때도 있었다."걔한테는 감정을 생각할 가치도 없어요!”돈밖에 모르는 그들에게 감정을 논할 가치가 없었다.만약 그녀가 돈이 없었다면 서정우가 그녀를 누나라고 불렀을까? 조보은도 그녀를 찾아올까? 절대 아니다.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고은영의 눈에 조금의 슬픔이 보였다.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했다.“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난 할머니 곁에 없었어요. 그때 전 중학생이었어요. 그래서 돌아가신 지 사흘이 지나도록 발견한 사람이 없었어요.”“......”“예전에 이웃분한테 들었는데, 그 여자가 할머니가 아프신 동안 한 번도 가보지 않았대요.”할머니는 그녀에게 영원한 아픔이었다.예전에 할머니랑 둘이 살 때, 아무리 가난해도 조보은을 원망한 적이 없었다.그러나 할머니의 일은 그녀 마음속에 가시처럼 박혀있었다. 어려서부터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는데, 조보은은 그런 할머니를 조금도 돌봐주지 않고 그렇게 쓸쓸하게 보냈다.배준우는 그녀의 울먹이는 듯한 말투에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해 줬다.“이제 그만 말해도 돼.”“내가 인정머리가 없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은 그런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할머니한테 따뜻한 밥 한 끼만 차려줬어도 내가 그 여자한테 감사하게 생각했을 거예요.”고은영의 눈시울이 붉어졌고, 그러다 이내 눈물이 떨어졌다.할머니가 아픈 동안 그녀의 공부에 방해가 갈까 봐 걱정되어 그녀에게는 본인이 아프단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그러다 그녀가 명절 연휴 때 집에 왔는데, 그때 할머니는
무슨 이유여도 그의 앞에서 울기만 하면 바로 해고기 때문이다. 전에 울자마자 바로 해고당한 사람이 있다는 건 결코 전설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네, 알 울었어요.”그녀의 당황한 모습에 배준우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그녀의 말투만 들어도 거짓말이라는 게 티가 났다. 고은영은 그가 진짜 자기 말을 믿는다고 믿고 있었다.그러다 뒤늦게야 요즘 배준우의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설마......!뭘 알게 된걸까...?........고은영 걱정이 가득한 채로 배준우와 함께 강성의 옛 거리로 향했다. 그녀는 거리에 가득한 주황색 초롱을 보니 왠지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오렌지색 초롱불 아래에는 기다란 길이 있었는데, 모두 음식점이었다.고은영은 전에 안지영과 함께 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낮에 왔었다.그런데 밤의 분위기가 더 좋은 듯했다.“오늘 여기서 드실 거예요?”고은영은 놀란 듯 배준우를 쳐다보며 물었다. 배준우가 이런 곳에서 식사를 할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여기도 나쁘진 않긴 하지만, 배준우는...배준우는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왜? 싫어?”“좋아요, 좋아요!” 고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전에 안지영이 여기가 강성에서 가장 깨끗한 푸드코너라고 말했다. 맛도 있고 깨끗하기도 하고.암튼 돈 많은 사람들도 여기에 즐겨온다는 말이다.배준우는 고은영에게 손을 내밀었다.“가자.”고은영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을 잡고는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대표님도 이런 음식들 좋아해요?”그러자 배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여기 음식 맛있어.”그의 말에 고은영은 더욱 흥분하며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잠깐!”“왜요?”고은영이 발걸음을 멈췄다.배준우는 휴지를 꺼내 그녀의 눈가의 묻은 눈물 자국을 닦아 주었다.“정말 어린 아이처럼 잘 울고, 잘 웃네!”눈가에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기분이 좋아졌다.이 감정 기복, 정말......!배준우의 말에 고은영은 쑥스러운 듯 배준우의 손을 잡으며 애교부렸다
이미월은 배준우와 고은영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다정해 보이네.”지금 배준우가 고은영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들이 위장 결혼이라는 걸 누가 믿을까?계약된 관계가 저토록 다정할 수 있을까?“오빠 예전에 언니랑 이런데 온 적 있어?”진승연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이미월을 쳐다보았다.오늘 정원희를 겨우 설득해 이미월을 데리고 나와 기분 전환 시켜 주려고 했는데!이런 장면을 목격하니, 기분이 더 나빠졌다.이미월은 눈을 감아 버렸다. 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난 이제는.. 도대체 뭐가 준우의 실제 모습인지 모르겠어. “아마 지금 그의 모습이 실제 모습이 아닐까?그럼, 그녀는 한 번도 그의 실제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건가?이미월의 말에 진승연은 더욱 화가 났다.지금 당장 가서 고은영의 뺨을 후려 갈기고 싶었다.“언니, 설마 이대로 포기하는 거 아니지?”진승연은 화가 나서 말했다.정말 이대로 포기할거라고?전에 어쩔 수 없이 떠난 이후로 이미월은 어떻게 다시 배준우를 만나야 할지 몰랐다.그래서 배준우를 찾아가지 않았다.하지만 지금......!“포기하지 않다고 해도 내가 뭘 더 할 수나 있겠어? 지금 나 때문에 너희 집안도 이렇게 됐는데, 더 이상 뭘 어떻게 할 용기가 없어.”배준우의 피도 눈물도 없는 대처 방식이 이미월은 너무 두려웠다.정말 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그런 사람 말이다. 그런 그에게 진승연도 이젠 두손 두발 다 들었다.진승연은 여전히 고은영이라면 치가 떨렸다.“이게 다 저 계집애 때문이야.”이 모든 것은 고은영이 나타나는 바람에 벌어진 일들이라고 생각했다.그녀 때문에 자신이 노빈과 결혼해야 할걸 생각하니당장 가서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하지만 요즘 정원희가 그녀를 철저히 감시하고 있는 탓에 손을 쓸 기회가 없었다.고은영을 욕하는 진승연의 말에 이미월은 속이 시원했지만겉으로는 아닌 척했다.“승연아, 지금 상황에 함부로 하면 안 돼. 지금
그동안 진 회장은 집에 들어오지 않고 거의 밖에서 지내다시피 했다.지금 진영그룹의 상황은 나날이 나빠지고 있다. 만약 노씨 가문에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미 파산했을 것이다.그러나 지금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과 기회는 한정적이다.이미월을 이성을 잃고 분노하는 진승연의 모습에 겉으론 타이르는 척 했지만 속으론 아주 통쾌했다.........배준우는 고은영에게 간단히 걸으면서 먹을 수 있는 먹을거리를 사주었다.고은영은 이런 길거리 음식을 매우 좋아한다. 여기 음식은 길거리 음식이지만 가격이 꽤 나갔다.그래서 고은영은 저번에 왔을 때 제대로 맛보지 못했다.하지만 오늘은 배준우가 사는 것이니 마음껏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잠깐!”고은영이 돌아서자 배준우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그러고는 휴지를 꺼내 그녀의 입가에 묻은 기름을 닦아주었다.고은영은 더러워진 휴지를 보고는 멋쩍은 듯 혀를 내둘렀다.“너무 맛있어요!”“좋아?”“네, 좋아요!”고은영은 신이나서 고개를 끄덕였다.“근데 이런 건 너무 많이 먹으면 안되니까, 오늘 먹으면 한참 동안 못 먹겠네.”고은영은 지금 기분이 좋아서 배준우가 뭐라 하든 다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가끔 한 번씩 먹어도 충분해요.”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배준우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졌다.배준우는 요즘 그녀가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것 같아서 걱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이런 기름진 음식을 너무 많이 먹으려 할까 봐서 걱정이다. 그래서 미리 말해두는 것이다.천하의 배준우에게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니.두 사람은 밤 10시가 되어서야 하원으로 돌아왔다.진 씨 아주머니는 이미 퇴근했다. 배준우가 미리 전화해서 저녁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주방엔 먹을게 없었다.고은영은 배준우와 함께 있으면 행복감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낀다. 그녀가 숨기고 있는 비밀 때문이다.하지만 그녀는 자기가 그토록 숨기는 일을 배준우가 이미 알고 있다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그녀의 뭔가 고민하는 듯한 눈빛에 배준우가 물었
평소엔 우유부단하던 그녀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정의를 내렸다.그리고 지금 배준우의 말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배준우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하든 두 사람이 위장 결혼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됐어, 피곤하지 않아?”고은영이 아무 말도 없자 배준우는 그녀가 놀란 줄 알고 더 놀리지 않았다.“저, 먼저 샤워하러 갈게요.”고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배준우의 무릎에서 일어났다.그리고 몸을 돌려 샤워하러 가려 하는데 배준우의 목소리가 들렸다.“어떤 일에는 그렇게 깊게 고민할 필요 없어.”모든 일은 순리를 따라야 한다!고은영은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주제넘게 굴지 말라는 말로 들었다.그가 뭘 하려 하든 그녀는 그냥 순종하면 된다는, 그런 뜻으로 말이다.그의 뜻을 거역하면 집과 카드를 모두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이런 생각을 하니, 조금 전 까지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뭔가 억울하다는 느낌도 들었다.하지만 모든 운명은 그의 손에 달렸으니, 순종하는 방법밖에 없었다.조금 전까지 혼자 자겠다고 하더니, 샤워를 마치고 고민하다가 결국 얌전히 배준우의 침대에 누웠다.배준우가 방에 들어오자, 고은영은 억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배준우는 그녀가 왜 그런 표정인지 알지 못했다.저녁 먹을 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그러지? “왜 그래?”배준우가 걱정되어 낮은 소리로 물었다!평소에 말투가 워낙 차가워서 지금 아무리 부드러운 태도로 말한다고 해도 고은영에겐 별로 따뜻하게 들리지 않았다.고은영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졸려서요.”“졸려서 기분이 안 좋아?”고은영이 입을 삐죽거렸다.“네.”“그럼 자.”배준우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그녀를 먼저 재웠다.그리고 그는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가 다 씻고 나오자 고은영은 이미 깊은 잠에 빠졌다.키가 큰데다 잠버릇까지 얌전하니 못하니 그녀 혼자 온 침대를 다 차지했다.배준우는 처음 그녀와 잘때 이런 그녀의
즉 그녀가 만약 풀려나지 못했다면, 그들이 굶어 죽든 말든 상관할 사람이 없단 뜻인 건가?고은영, 고은지, 독한 년들!“엄마 찾느라 돈 다 썼어요. 진짜 한 푼도 없다고요.”“은지한테 전화 안 했어?”가장 먼저 고은지에게 도움을 청했는지에 대해 물었다.고은영보다 고은지가 더 만만하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지금 강성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고은지라 생각했다.그녀는 지금 고은지도 고은영과 똑같은 태도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서정우는 힘 빠진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여러 번 전화했는데도 다 안 받아요. 그런데 돈 얘기를 어떻게 꺼내요!”“은지까지도 전화를 안 받겠다고?”조보은은 믿기지 않았다.그동안 고은지는 그녀의 말을 거역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 서정우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서정우도 그렇게 생각했다.서정우는 어제 고은지의 냉담한 태도를 생각하며 뭔가 고민하듯 말했다.“엄마, 전에 진짜 누나한테...?”그 뒷말은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실망스러운 대답을 듣게 될까 두려웠다.“내가 뭘 어쨌다고! 난 걔한테 떳떳해!”그녀는 조금의 여지도 없이 부인했다“근데 누나가 왜 이렇게 갑자기 차갑게 변해?”서정우는 어쩌면 조보은이 자신도 모르게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의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고의적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조보은의 이유가 아니면 고은지가 지금 이렇게 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고은영, 그 계집애가 뭐라고 했겠지!”조보은은 확신하듯 말했다.그녀는 자기 때문에 고은지가 이혼까지 당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는 듯했다.지금 고은지가 이러는 걸 다 고은영 탓으로 돌렸다.“........”고은영, 이건 모두 고은영의 짓이다!서정우도 고은영 때문이라는 조본은의 말을 믿었다. 고은영 말고는 그럴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고은지가 완전히 변한 건 고은영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그럼,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요? 지금 돈 얼마나 남았나요?”“10만 원
“네? 그게 무슨 뜻이에요?”안지영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안열을 바라봤다. 안열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어휴, 됐어요. 더 얘기해 봤자 짜증만 나요.”더 말했다간 정말 참지 못하고 화를 낼 것 같았다.나태웅에 대해 할 욕은 이틀 밤을 새워도 모자랄 정도였다.“...”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말을 하다가 마는 것이고...안지영은 뾰로통해진 채로 안열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안열은 휙 돌아서 사무실을 나갔다.지금 안열의 머릿속에는 나태웅에 대한 욕뿐이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감히 또 안지영을 찾아오다니.도대체 무슨 낯짝으로 온 건지......사무실에 홀로 남겨진 안지영은 아까 안열이 한 말을 떠올렸다.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지?평소에는 똑 부러지고 영리한 안지영이지만, 이번만큼은 안열의 말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뻔뻔하다는 뜻이라면... 나태웅은 원래부터 그렇게 뻔뻔했다.하지만 이번은...안열은 복잡한 생각에 머리를 휙 털었다.그리고 사무실을 나오자마자 장선명에게 전화를 걸었다.원래는 장선면은 점심쯤에 안지영을 데리러 올 예정이었지만, 안지영의 전화를 받고 바로 달려왔다.안지영의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 장선명은 안열이 자리에 앉아 아이스팩을 발 위에 올려놓은 것을 발견했다.“다리는 왜 그래?”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안열은 깜짝 놀라 손에 쥔 아이스팩을 떨어뜨릴 뻔했다.장선명을 보자, 안열은 얼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읏...!”하지만 고통을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어떻게 된 거야?” 그렇게 묻는 장선명의 목소리는 차가웠다.안열을 이렇게 만든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믿기 힘들었다.안열은 고개를 숙였다. 차마 나태웅 때문이라는 말은 꺼내지 못해 그저 둘러댔다.“그냥... 실수로 넘어진 거예요.” “어떻게 넘어졌길래 거기만 그렇게 다치는 거야?” 장선명의 시선은 예리했다.보통 넘어진다면 무릎이 먼저 다치기 마련인데 안열은 무릎은 멀쩡하
나태웅은 믿을 구석 하나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나태웅이 가져온 정보 때문에 안지영은 더욱 속이 복잡해졌다.안열은 결국 고통을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약 좀 바르고 올게요.”그 말에 안지영은 생각이 끊겨버렸다.정신을 차린 안지영은 안열의 발등이 부어올랐다는 것을 발견했다. 장선명이 사랑하는 사람...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안열은 본 안지영은 결국 또 나태웅에게 화가 났다.“왜 이렇게 된 거예요. 정말 나태웅을 못 이기는 거예요?”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일방적으로 맞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밖에서 싸우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안열은 아파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제가 만약 나태웅과 싸워서 이길 수 있었다면 진작 죽여버렸을 겁니다.”“...”진작 죽여버린다니.그 ‘진작’은 과연 언제일까?다시 생각해도 나태웅은 정말 독설만 퍼붓는 사람이었다. 안열을 볼 때마다 개라고 욕하니까 말이다.그래도 전에 동영 그룹에서 출근할 때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안지영은 우물쭈물하면서 안열에게 물었다.“두 사람, 전에도 안 좋은 사이였어요?”안열과 나태웅이 만날 때마다 안열은 대수롭지 않아 했고 나태웅은 화를 냈었다.그러니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그렇게 물으면서 안지영이 구급상자를 가져와 상처를 처리해 주었다.안열이 거의 소리를 지르면서 얘기했다.“앗... 아파요... 아파...”“...”안열은 평소에 고통에도 끄떡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아파하는 것을 보니 나태웅이 얼마나 아프게 때린 것인지 알 수 있었다.“제가 무슨 원한이 있겠어요! 한 것도 없는데...”“...”“굳이 꼽자면... 안 대표님 일로 원한이 있는 거죠.”“나요?”“네. 저는 안 대표님이 선명 도련님과 결혼하기를 바랐으니까요. 아마도 그것 때문에 저를 싫어하는 게 아닐까요?”안열을 말을 들은 안지영은 약간 마음이 복잡했지만 또 본인의 선택이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안열은 장선명의 부하로
“난 대체 누구의 대용품이었어요?”안지영이 바로 물었다.안열은 장선명과 오랜 시간 함께 했으니 사진 속의 사람이 누구인지 다 알 것이다. 그러니 장선명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 것이다.안열은 안지영의 말을 듣고 표정이 그대로 굳어버렸다.“그건...”“두 사람은 왜 헤어진 거예요?”안지영이 또 물었다.“...”안열을 그 어느 질문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안열은 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안지영이 얼마나 칼 같은 사람인지, 안열은 잘 알았다.물론 안지영과 장성명의 사이가 안지영 때문에 시작한 것이라고 하지만 장선명에게 설레지 않았다면 안지영은 장선명과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안열은 결국 또 속으로 나태웅을 욕했다.“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선명 도련님이 안 대표님과 결혼하려는 건 안 대표님을 사랑해서지, 다른 사람의 대용품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니까요.”“사진 속의 여자들과 아직도 연락해요?”“절대 아닙니다. 제가 맹세할게요!”안열이 진지하게 얘기했다. 안지영이 괜히 장선명을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다.안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열을 쳐다보았다. 안열은 그런 눈빛을 마주하고 약간 긴장했다.“진짜예요. 사진 속의 여자들과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선명 도련님이 얼마나 칼 같은 분인지 잘 알잖아요.”“하긴, 안열 씨는 선명 씨 사람이니까 그편을 들겠죠.”“아니요, 전 안 대표님 편입니다. 같은 여자로서요.”“나도 그 어떤 여자의 대용품이었겠죠.”“그건 다른 거죠! 그 사람은 이미 죽었으니까요. 나태웅이 왜 갑자기 이 일을 들춘 건지는 모르겠지만... 죽은 사람까지 들먹일 줄은 몰랐어요!”안열은 정말 나태웅을 죽여버리고 싶었다.요즘 나씨 가문에 생긴 일을 보면 나씨 가문 사람들은 다 하나같이 쓰레기였다.“죽었다고요?”안지영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안열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다들 모르는 일이잖아요!”안지영이 놀라서 얘기했다.장씨 가문 남자들은 하나같이 차갑고 냉정하다는 소문을
안지영은 약간 생각하더니 얘기했다.“그런데 그렇게 욕한 게 오늘이 처음인 건 아니지 않아요?”“...”안지영이 그렇게 얘기하자 안열은 더욱 화가 났다.“저를 볼 때마다 저한테 개라고 욕해요. 개자식... 개같은 건 본인이면서! 나씨 가문 전체가 그냥 다 개예요!”안지영은 이마를 짚으면서 그 말을 들었다.“안열 씨를 그렇게 욕하고서도 잘 살아있다니... 신기할 정도네요.”안열이 얼마나 성격이 더러운지, 이제는 안지영도 잘 알았다.하지만 나태웅은 번마다 안열을 욕하면서 멀쩡히 살아있으니, 안지영은 약간 놀라웠다.“못 이긴다니까요!”“...”도대체 나태웅의 실력이 얼마나 좋기에 안열도 상대할 수 없는 걸까.“됐어요. 나태웅 얘기하면 기분이 잡치니까 그만 해요.”나태웅은 그런 존재다.언급만으로도 눈살이 찌푸려지게 하는 사람이다.“그건 맞아요. 짜증 나는 사람이죠.”안지영은 나태웅이 정말 너무 싫었다.“그러니까 무조건 승소해요!”너무 화가 나니 아무리 나태웅 얘기를 꺼내지 말자고 해도 결국 나태웅 얘기를 꺼내게 된다.안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요. 분명 승소할 겁니다!”안지영이 두 주먹을 꼭 쥐었다.안열뿐만이 아니라 안지영도 화가 난 상태다.안지영은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너무 화가 나서 이 화를 전부 나태웅에게 쏟아버리고 싶었다.안열은 안지영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요. 꼭 이기게 해줄게요!”나태웅을 고소하려던 건 안지영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든든한 아군이 생겼다.그 뜻인즉슨 나태웅은 여태껏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건드렸다는 것이다.안열은 안지영 앞에 있는 사진을 슬쩍 보았다. 안에는 장선명도 있는 것 같았다.“뭘 보는 거예요?”그렇게 물으면서 사진을 확인하려던 때, 안지영이 빠르게 사진을 가져가려고 했다.하지만 안열이 그 중 한 장을 손에 넣었다.사진을 본 안열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안지영의 표정도 그대로 굳어버렸다.안 그래도 아까 일 때문에 화가 났는데, 나태웅이 이
안열은 본능적으로 나태웅의 얼굴을 발로 차버리려고 했다.하지만 발을 드는 순간 갑자기 느껴지는 고통에 안열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그리고 다리를 껴안을 수밖에 없었다.“너 이 새끼...”나태웅에게 욕을 퍼부어주려는데 나태웅은 이미 엘리베이터에 타 있었다.나태웅은 아까 안열의 발을 부숴버리려고 했다.화가 치밀어오른 안열이 나태웅을 잡으려고 했지만 결국 발에서 느껴지는 고통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발등은 지방이 적어서 아주 취약한 부분이다. 나태웅은 바로 그 부분을 노린 것이다.확인해보니 발등에는 이미 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안열은 표정이 어두워져서 안지영의 사무실로 들어가 얘기했다.“나태웅은 정말 악질이에요. 반드시 고소해서 승소하고 감옥에 처넣으세요!”안열이 씩씩대면서 얘기했지만 안지영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이상함을 눈치챈 안열이 안지영을 쳐다보았다. 안지영은 테이블 위에 놓인 무언가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왜 그래요?”안열이 다가가서 물었다.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미간을 찌푸린 채 안열을 바라보았다.그러다가 안열의 발등이 퍼렇게 멍든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이게 무슨 일이에요? 누가 때렸어요?”“나태웅이요! 그 개같은 자식...”안열이 울분에 받쳐서 얘기했다.안지영은 약간 놀랐다.“나태웅이 때렸다고요? 안열 씨, 나태웅이랑 싸우면 못 이겨요?”“못 이겨요.”안지영은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저번에도 비슷한 대답을 들었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반드시 나태범을 감옥에 넣어주세요.”안열이 이를 꽉 깨물었다.안지영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이런 모습의 안열을 보니 조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나태웅을 감옥에 넣으라고요?”“네! 살인미수잖아요. 꼭 승소하고 콩밥을 먹게 해야 해요!”안열은 여전히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 마치 지금 당장 나태웅을 끌고 교도소에 갈 사람 같았다.“...”나태웅을 감옥에 보낸다니.그것보다 더 좋은 결말은 없을
마주한 시선 속에서 안지영은 나태웅에게서 위험을 느꼈다.숨을 깊게 들이쉰 안지영이 시선을 돌리고 얘기했다.“난 너랑 죽도록 싸우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너도 그렇고, 너희 가문도 그렇고, 정말 선을 넘었어.”그 말에 분위기가 점점 차가워졌다.나태범이 한 짓들은 자꾸만 안지영을 화나게 했다.나태웅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내가 알려줬던 거 같은데. 장선명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장선명이 왜 너랑 결혼하려고 하는 것 같아?”“이유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곧 결혼한다는 사실이야.”안지영은 나태웅 같은 사람 앞에서 더욱 굳건해졌다.안지영은 애매모호한 사람이 아니었다. 완벽하게 한쪽에 올인하는 쪽이다.그러니 지금 본인이 누구를 원하고 누구를 좋아하는지 아주 잘 알았다. 장선명을 두고 다른 남자를 만나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다.그리고 성격상으로도 동시에 두 남자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그래서 처음부터 장선명과 비즈니스 관계로 시작했고 선을 넘지 않고 거리를 잘 유지했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안지영은 장선명과 정말 한 쌍의 부부가 될 것이다.차가운 안지영의 태도에 나태웅이 차갑게 웃었다.“하, 정말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도대체 뭐라는 거야.”안지영은 본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태웅이 너무 싫었다. 분명 중요하지 않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는데 또 물으니 말이다.나태웅은 가방에서 사진을 꺼내 사무실 위에 올려놓더니 안지영을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안지영은 눈썹을 찌푸리고 물었다.“이게 뭔데...”“직접 확인해봐.”“...”“잘 확인해. 네가 사랑하는 그 남자가 정말 너만의 것인지.”“...”안지영은 호흡마저 거칠어졌다.“지금 이간질하려는 거야? 하지만 이제 쓸모없어!”“두려워?”나태웅이 눈썹을 까딱이면서 물었다.안지영은 나태웅을 당장이라 씹어먹을 듯한 눈빛으로 나태웅을 노려보았다.나태웅은 미간을 찌푸리고 사진을 향해 눈짓했다. 안지영은 이를 꽉 깨물고 사진을 들어 확인했다.그 사진은 모두
하늘 그룹 앞에서 나태웅이 일을 벌인다면 그건 하늘 그룹의 이미지에 좋지 않았다.안열은 고개를 끄덕인 후 밖으로 나갔다.안지영은 짜증이 나서 머리를 확 쥐어뜯었다.응접실에 온 안열은 문을 열자마자 거대한 남자의 그림자를 발견했다.그 일주일 동안 나태웅은 1년의 시간을 보낸 듯했다.그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그래서 나태웅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안열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안열은 빠르게 표정을 숨기고 담담하게 얘기했다.“들어가세요.”나태웅은 차가운 눈빛으로 안열을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안열의 곁을 지날 때 시선을 내려 안열을 쳐다보았다.결국 나태웅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지영의 사무실로 들어갔다.하지만 안열은 나태웅의 주변에서 흐르는 무거운 분위기에 놀라서 숨도 쉬지 못했다.나태웅이 사라진 후에야 안열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나태웅이 들어올 때 안지영은 마침 장선명과 통화하고 있었다.통화 내용은 결혼식에 관한 내용이었다.“네, 하얀 장미만 아니면 돼요. 그리고...”거기까지 말한 안지영은 들어온 나태웅을 보면서 의도적인 눈빛으로 얘기했다.“하얀 국화는 절대 안 돼요.”“국화에 트라우마 남은 거야?”전화기 너머의 장선명이 가볍게 웃었다.나태웅도 흘러나온 그 소리를 듣고 장선명이 얼마나 안지영을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표정이 굳은 나태웅은 더욱 차가워진 눈빛으로 안지영을 쳐다보았다.“결혼식이니까 당연히 국화는 안 되죠. 시력이 안 좋은 사람이 또 나한테 국화를 보낼까 봐 겁나네요.”“그래, 알았어. 감히 우리의 결혼식을 망치려는 사람이 생기면 난 그 사람을 바로 죽여버릴 거야.”“...”안지영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아니, 그저 조심하라는 말이었는데 죽인다는 건... 좀 과하지 않아요?”“그래? 네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을게.”“그래요.”안지영은 들어온 나태웅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대화를 나누었다.나태웅의 표정이 점점 구겨지는 것을 보면서 안지영은 전화기에 대고 얘기했다.“점심때 먹고 싶은 게 있는
나씨 가문은 지금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다.나태현에게 돌아오라고 연락했지만 나태현은 거절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나태범은 량천옥이 무슨 심정으로 나태현을 죽이려고 드는 것인지 잘 알기에 나태현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았다.순조롭게 귀국하는 것은 이제 어려울 것이다.“하...”나태범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나태범의 속에서는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집사가 다가가 얘기했다.“어르신, 일단 진정하세요. 이미 사람을 보냈으니까요.”나태범은 또 한숨을 쉬었다.“하...”아무리 사람을 보냈다고 해도 나태현을 안전하게 데려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그해의 일을 떠올린 나태범의 눈에는 근심과 걱정이 가득 담겼다.이건 끝나지 않은 복수다.“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지?”나태범이 한숨을 쉬면서 물었다.그들은 고희주가 죽었다는 것을 믿지 않고 있었다.그들이 아는 바에 따르면 나태현은 많은 의료진을 고용해서 고희주를 보살폈다.그런데 고희주가 죽다니.“량천옥 씨의 행동을 보면 아마도 정말 죽은 것 같습니다.”그 말에 나태범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아팠다.고희주를 법적인 손녀로는 인정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피를 나눈 아이이니...그래서 나태범은 더더욱 고희주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배준우가 나태현을 지켜준다면 좋겠는데...”나태범이 한숨을 쉬고 얘기했다.량천옥이 얼마나 독한지 잘 아는 나태범은 나태현이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그해의 일도 겨우 잠재운 것이다.량천옥이 아무리 요즘 잠잠해졌다고 하지만 량천옥은 그 원한을 잊지 않을 것이다.“...”집사는 량천옥의 말을 듣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배준우 님한테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집사가 얘기했다.나태범이 배준우에게 전화한다고 했을 때부터 집사는 나태범을 말렸다.아무리 배준우가 나씨 가문 형제들과 친한 사이라고 해도 지금은 고은영의 남편이니까 말이다.그러니 사랑 앞에서 우정을 선택할 것 같지 않았다.“난 그래도 그 아이가 아직 살아있다
“계약 파기 때문에요?”고은영이 눈썹을 까딱거리면서 물었다.고은영은 나씨 가문에 대한 호감이 하나도 없었다.아무리 나씨 가문이 강성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고 하지만 수많은 계약 파기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배준우와 진윤까지 계약을 파기했으니, 배씨 가문이나 진씨 가문과 연관 있는 가문들도 연달아 나씨 가문과의 계약을 파기할 것이다.사람은 이성을 잃으면 판단을 급하게 내리려고 하니까 말이다.아마 천락 그룹은 지금 수많은 압박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하지만 만약 배준우가 지금 계약 파기를 취소한다면, 천락 그룹에게 희망이 주어질 것이다.고은영은 그래서 나씨 가문이 배준우에게 연락한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배준우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그러면 왜...”“나태범 어르신은 나태현이 무사히 귀국하기를 원하고 있어.”“나태현 씨가 귀국하는 것이 우리랑 무슨 상관이 있어요? 우리가 방해한 것도 아니고...”배준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고은영을 쳐다보았다.그제야 고은영은 배준우의 뜻을 알아차렸다.나태범은 정말 교활한 사람이었다. 배준우에게 전화를 걸어 힘을 얻으려는 것이었다.배준우와 량천옥의 사이는 아주 어색했다. 하지만 고은영은 고은지와 사이가 좋고 고은지는 량천옥의 친딸이다.배준우가 고은영을 설득한다면 고은영이 고은지를 설득하고 이어서 고은지가 량천옥을 설득해 나태현을 살릴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미친 거 아니에요?”고은영이 화를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아마 나태범은 고은지를 며느리로 들일 생각이 추호도 없을 것이다.그러면서 고은지를 이용해 자기 아들을 살리려고 하다니. 차라리 고은지를 직접 찾아가는 성의라도 보였으면 모른다.배준우는 고은영의 모습을 보면서 물었다.“어떻게 생각해?”고은영은 바로 대답했다.“절대 안 돼요. 우리 언니는 나태현을 용서해줄 리가 없어요.”배준우에게까지 도움을 청할 정도라면 해외의 상황은 확실히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량천옥이 얼마나 미쳐있는지를 생각하면 나태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