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딴 걸 신경 쓴다고 생각해?”“고은영, 너 그게 무슨 말이야?”서정우는 다급했다.아까전엔 다 자기 탓이라 해놓고!지금 이 말은 또 무슨 의미야?그래서 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아무 뜻 아니야. 그러니까 앞으로 나한테 다시는 전화하지마.”“내가 너한테 전화하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네 꼴을 보면 나도 역겨워!”“......”“다 우리 엄마 때문이야!”서정우는 분노하자 고은영이 차갑게 비웃으며 말했다.“내 꼴? 그럼, 예전엔 왜 나한테 전화했는데?”지금 그가 이런 말을 내뱉는건 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고은영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서정우는 자기가 예전에 고은영에게 전화하던 태도를 생각하니, 수치심에 얼굴이 파래졌다.“다 필요 없고, 당장 엄마나 풀어줘!”“내가 잡은 것도 아닌데 내가 어떻게 풀어줘?”“야 고은영......”“그 사람이 만약 지은 죄가 없다면 알아서 잘 풀려나겠지.”고은영은 냉정하게 말하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서정우는 전화가 끊기자, 화가 난 나머지 전화를 부숴버리고 싶었다.하지만 새로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은 자신의 휴대폰을 보니, 진짜로 부술 용기는 없었다.“그 계집애가 뭐래?”전화를 끊는 모습에 서준호가 물었다.“뭐라고 하겠어요? 그러게, 예전에 좀 잘해주시지, 그러니까 지금 가족이고 뭐고 이렇게 대하는 거 아니에요. 이제 만족하세요?”“무슨 말을 그렇게 해! 지 친엄마도 못 해주는걸 나한테 바래?”서준호는 불만이 섞인 말투로 말했고, 서정우의 얼굴에도 짜증이 가득했다!방금 고은영이 한 말들을 생각하니, 당장이라고 가서 그녀를 반쯤 죽여놓고 싶었다.고은영과 소통이 안 되자, 서준우는 바로 고은지에게 전화를 걸었다.내일 출근 준비를 하고 있던 고은지가 전화를 받았다. 그러고는 한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무슨 일 있어?”이혼 전, 고은지는 항상 조보은을 걱정하고 생각했다.하지만 자기의 가정까지 파탄 낸 그녀에게 더 이상의 인내심은 없었다.“큰 누나, 엄마가 고은
서정우는 이토록 고은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마음속의 고은지는 유하고 부드러운 사람이긴 했지만, 가장 만만한 사람이기도 했다!그래서 그동안 무슨 일만 생기면 고은지를 찾아갔다......!하지만 이번에 고은지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다들 그녀에게 너무 지나치게 했기 때문이다.하지만 꽤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화가 풀릴 법도 하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말투를 들으니 그렇지 않아 보였다.서정우는 고은지가 이런 말을 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누나, 우리 엄마야!”“네 엄마겠지!”고은지는 여전히 냉담하게 말했다.엄마? 고은지는 조씨 집안에 시집을 가서도, 조보은을 챙기고 생각했다.조영수가 준 생활비를 아껴 조보은에게 주었다.그런데 조보은이 그녀에게 어떻게 했나.....!그렇게 고생해서 그녀가 얻은 게 있나? 조보은이 그녀를 어떻게 대했는지. 또 손녀에게는 어떻게 했는지.고은지는 그제서야 모든 걸 정확하게 파악했다. 조보은에겐 아들 서정우밖에 없다는 걸 말이다.조보은은 자신의 이 아들을 위해서라면, 다른 형제들이 어떤 상황이든 무조건 지지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 그러면 불효라고 생각한다.“누나, 왜 고은영이랑 똑같이 이러는 거야?”서정우는 더 다급해졌다.고은지의 태도도 고은영과 별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고은영의 말이 나오자 고은지는 씁쓸했다.“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예전으로 돌아갔다면 나도 은영이랑 똑같은 마음가짐이었 을거야.”할수 있다면, 대학교 졸업할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때 조보은은 여자는 일찍 시집가야 한다며 고은지를 들들 볶았다.그래서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점점 더 못한 사람들뿐이었다.게다가 그때 집안이 너무 가난했다. 그래서 조씨 집안에서 1000만 원을 내놓으니 바로 그 집으로 시집갔다.지금 돌이켜보니 정말 바보같았다......“누나!”서정우는 드디어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너무한 거 아니야?”“너무하다고? 집구석이 이 지경이 된 건 다 너 때문이야, 지금 와서 내가
서정우는 찬바람 속에 서서 전화가 끊긴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졌다.고은영과 고은지, 두 사람 다 이렇까지 냉담한 태도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서준호가 다급히 물었다. “어때? 은지가 도와준대?” 우리 지금 돈도 없어!”“......”돈이 없다는 말에 서정우의 짜증은 극에 달했고, 살기 어린 눈으로 서준호를 노려보았다.“맨날 돈 없다, 돈 없다. 나이도 있으신데 언제 철드실 거예요. 지금 집안 꼴이 이게 뭐예요?”서정우는 분노하며 소리쳤다.고은영과 고은지에게 받았던 스트레스를 서준호에게 풀었다.그런 서정우의 태도에 서준호는 순간 멍해졌다.그러고는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나한테 화풀이야? 나라고 돈 못 벌고 싶은 줄 알아?”“정말 제가 돈을 벌길 원하세요? 정말 그러셨다면, 일 년 내내 도박장에서만 보내시진 않으셨겠죠!”서준호와 같이 살고 있어도, 대부분의 시간에 그의 모습을 보긴 어려웠다.매일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집에 들어온다.예전에 잠깐 작은 슈퍼마켓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 마저 모두 서준호 때문에 말아 먹었다.이런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서정우는 눈앞의 아버지가 더욱 미워졌다.서정우의 말에 서준호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돌렸다.“지금, 날 나무랄 때야?”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조보운을 어떻게든 그 안에서 빼내야 한다는 거다.그녀가 안에서 나오지 못하면 두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그들은 지금 며칠 동안 거의 노숙하다시피 했다.서정우는 이미 화가 나서 뭐라고 말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빨리 엄마를 꺼낼 방법이나 생각해 봐!”그는 더 이상 여기서 이렇게 고통 받고 싶지 않았다. 올 때는 고은영의 큰 집에서 지낼 수 있을 줄 알았다.지금 보니 아예 그럴 가망이 없어 보였다!서준호가 보채는 모습에 서정우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무슨 방법이 있겠어요?”만약 방법이 있다면 지금 이러고 있진 않겠지?“그러니까 생각해 보라고! 이대로 여기에 계속 있을 순 없잖아. 빨리
서정우은 블랙아웃된 핸드폰을 보고 화가나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다시 켜봐도30초 만에 바로 꺼졌다.다시 억지로 키면 아예 켜지지 않을 수도 있을 정도였다."왜 그래?”서정우가 전화를 들고 멍하니 서 있자 서준호가 물었다.“배터리가 다 됐어요. 아버지 핸드폰은 배터리 있어요?”“있어!”서준호는 서둘러 자신의 전화를 꺼내 서정우에게 건넸다.그러나 휴대폰을 든 서정우는 다시 멈칫했다.그가 또 멈칫하자 서준호는 답답했다.“또 왜 그래?”“번호가 기억나지 않아요!”“그럼, 네 휴대폰 다시 켜서 봐.”다시 키라고? 아까 30초 만에 바로 꺼지는 걸 보지 못했나?서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핸드폰을 켜보려 했지만 이번에는 아예 켜지기 않았다.“젠장....!”이 순간의 서정우는 화가 나서 핸드폰을 던져버리고 싶었다.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마지막 희망도 완전히 사라졌다!“그럼 어떡해? 어디 충전할 데 없어?”서준호가 서정우에게 물었다.정말 하늘도 그들의 편이 아니다!뭘 해도 안 되는 날이다!“보조배터리를 빌려도 돈 내야 빌리죠, 지금 돈도 없는데.....!”정말 절망적인 상황이었다.“돈은 다 네 엄마한테 있어. 나도 돈이 없어.”서정우도 돈이 없다!강성에 온 뒤로, 모든 돈은 조보은이 관리하고 있었다.지금 조보은도 끌려갔고, 그들에겐 한 푼도 없다.“고은영이랑 고은지 번호는 기억하지?”서준호가 또 다시 물었다.“기억해요!”“전화해서 돈 좀 빌려.”서준호는 뻔뻔스럽게 말했다.지금 한 푼도 없으니. 그들이 지내는 곳뿐만 아니라, 저녁 식사까지 문제였다.설마 정말 자기들을 굶겨 죽일까 생각했다!서준호는 이 두 계집애가 이렇게까진 독하지 않을거라 생각했다.........회사 시점.배준우가 회의를 마치고 나오니 6시 반이었다. 사무실 건물 밖에는 이미 네온사인들이 켜져 있었다.배준우가 사무실로 돌아오니, 소파에 누워 잠든 고은영의 모습이 보였다.그녀의 모습을 보니 날카로웠던 배준우의 눈빛이 조금 부드러
배준우가 나가지 않으니, 그녀도 나갈 수가 없었다.특히 지금 안지영도 회사를 떠났으니 더 나갈 기회가 없었다.차에 타자마자고은영은 고은지의 전화를 받았다.“언니.”“서정우가 다시 전화하면 다시 상대도 하지 마.”“그렇게까지 말했는데 또 전화한다고?”고은영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서정우에게 심한 말이란 심한 말은 다 했는데.하지만 그 가족의 파렴치함을 생각하면 전화를 다시 걸어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분명히 다시 전화할 거야!”“언니한테도 전화 갔어?”고은영이 물었다.“응, 돈 달라더라!”“......”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돈을 요구할 체면이 있다니!하긴, 양심이라곤 조금도 없으니, 뭐, 별로 놀랄 일도 아니었다.서정우 같은 사람은 그 어떤 말로도 떼어내기 힘든 사람이다고은영이 걱정할까 봐 고은지가 이어서 말했다.“나 돈 안 줬어. 다시 전화도 안 받았고. 그러니까 아마 또 너한테 연락할 거야.”“난 더 안 주지.”고은영은 단호하게 말했다.고은영은 예전에 고은지가 그들에게 돈을 줄 때도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히려 고은지가 바보라고 생각했다.지금 고은지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는데, 자기는 더더욱 그런 바보짓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나 고은지의 말을 들으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그래, 그럼 됐어!”이번에는 고은지의 결심이 대단해 보였다.그녀도 고은영처럼 그들을 떼어내려고 애를 쓰고 있다.지금 그들이 고은영에게 이러는 건 다 그 집 때문이다.고은영이 지금과 같은 태도로 일관한다면 그들도 그 집을 손에 넣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두 사람이 지금 해야 할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되는 것이다.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 한다.고은지와 통화를 마치자마자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고은영은 이게 서준호의 번호인 줄 모르고 있었다.“여보세요.”“누나.”서정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고은영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리려 했다.그러자 수화기 너머 서정우가 뭔가
고은영의 말에 배준우가 웃으며 물었다.“일말의 감정도 없어?”그녀에게 이렇게 단호한 면도 있는지 몰랐다.누구도 설득할 수 없는 그런 단호함 말이다.이전에 그녀에 대해 잘 몰랐을 때는 그냥 겁쟁이인 줄만 알았지,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다.하지만 좀 과도하게 단호했고, 과도하게 자기주장이 강했다.배준우도 그걸 금방 알아챘다. 그녀는 극단적인 반전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걸. 특히 특정된 일에서 말이다.가끔 너무 단호한 그녀의 모습에 놀랄 때도 있었다."걔한테는 감정을 생각할 가치도 없어요!”돈밖에 모르는 그들에게 감정을 논할 가치가 없었다.만약 그녀가 돈이 없었다면 서정우가 그녀를 누나라고 불렀을까? 조보은도 그녀를 찾아올까? 절대 아니다.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고은영의 눈에 조금의 슬픔이 보였다.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했다.“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난 할머니 곁에 없었어요. 그때 전 중학생이었어요. 그래서 돌아가신 지 사흘이 지나도록 발견한 사람이 없었어요.”“......”“예전에 이웃분한테 들었는데, 그 여자가 할머니가 아프신 동안 한 번도 가보지 않았대요.”할머니는 그녀에게 영원한 아픔이었다.예전에 할머니랑 둘이 살 때, 아무리 가난해도 조보은을 원망한 적이 없었다.그러나 할머니의 일은 그녀 마음속에 가시처럼 박혀있었다. 어려서부터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는데, 조보은은 그런 할머니를 조금도 돌봐주지 않고 그렇게 쓸쓸하게 보냈다.배준우는 그녀의 울먹이는 듯한 말투에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해 줬다.“이제 그만 말해도 돼.”“내가 인정머리가 없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은 그런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할머니한테 따뜻한 밥 한 끼만 차려줬어도 내가 그 여자한테 감사하게 생각했을 거예요.”고은영의 눈시울이 붉어졌고, 그러다 이내 눈물이 떨어졌다.할머니가 아픈 동안 그녀의 공부에 방해가 갈까 봐 걱정되어 그녀에게는 본인이 아프단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그러다 그녀가 명절 연휴 때 집에 왔는데, 그때 할머니는
무슨 이유여도 그의 앞에서 울기만 하면 바로 해고기 때문이다. 전에 울자마자 바로 해고당한 사람이 있다는 건 결코 전설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네, 알 울었어요.”그녀의 당황한 모습에 배준우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그녀의 말투만 들어도 거짓말이라는 게 티가 났다. 고은영은 그가 진짜 자기 말을 믿는다고 믿고 있었다.그러다 뒤늦게야 요즘 배준우의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설마......!뭘 알게 된걸까...?........고은영 걱정이 가득한 채로 배준우와 함께 강성의 옛 거리로 향했다. 그녀는 거리에 가득한 주황색 초롱을 보니 왠지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오렌지색 초롱불 아래에는 기다란 길이 있었는데, 모두 음식점이었다.고은영은 전에 안지영과 함께 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낮에 왔었다.그런데 밤의 분위기가 더 좋은 듯했다.“오늘 여기서 드실 거예요?”고은영은 놀란 듯 배준우를 쳐다보며 물었다. 배준우가 이런 곳에서 식사를 할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여기도 나쁘진 않긴 하지만, 배준우는...배준우는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왜? 싫어?”“좋아요, 좋아요!” 고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전에 안지영이 여기가 강성에서 가장 깨끗한 푸드코너라고 말했다. 맛도 있고 깨끗하기도 하고.암튼 돈 많은 사람들도 여기에 즐겨온다는 말이다.배준우는 고은영에게 손을 내밀었다.“가자.”고은영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을 잡고는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대표님도 이런 음식들 좋아해요?”그러자 배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여기 음식 맛있어.”그의 말에 고은영은 더욱 흥분하며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잠깐!”“왜요?”고은영이 발걸음을 멈췄다.배준우는 휴지를 꺼내 그녀의 눈가의 묻은 눈물 자국을 닦아 주었다.“정말 어린 아이처럼 잘 울고, 잘 웃네!”눈가에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기분이 좋아졌다.이 감정 기복, 정말......!배준우의 말에 고은영은 쑥스러운 듯 배준우의 손을 잡으며 애교부렸다
이미월은 배준우와 고은영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다정해 보이네.”지금 배준우가 고은영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들이 위장 결혼이라는 걸 누가 믿을까?계약된 관계가 저토록 다정할 수 있을까?“오빠 예전에 언니랑 이런데 온 적 있어?”진승연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이미월을 쳐다보았다.오늘 정원희를 겨우 설득해 이미월을 데리고 나와 기분 전환 시켜 주려고 했는데!이런 장면을 목격하니, 기분이 더 나빠졌다.이미월은 눈을 감아 버렸다. 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난 이제는.. 도대체 뭐가 준우의 실제 모습인지 모르겠어. “아마 지금 그의 모습이 실제 모습이 아닐까?그럼, 그녀는 한 번도 그의 실제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건가?이미월의 말에 진승연은 더욱 화가 났다.지금 당장 가서 고은영의 뺨을 후려 갈기고 싶었다.“언니, 설마 이대로 포기하는 거 아니지?”진승연은 화가 나서 말했다.정말 이대로 포기할거라고?전에 어쩔 수 없이 떠난 이후로 이미월은 어떻게 다시 배준우를 만나야 할지 몰랐다.그래서 배준우를 찾아가지 않았다.하지만 지금......!“포기하지 않다고 해도 내가 뭘 더 할 수나 있겠어? 지금 나 때문에 너희 집안도 이렇게 됐는데, 더 이상 뭘 어떻게 할 용기가 없어.”배준우의 피도 눈물도 없는 대처 방식이 이미월은 너무 두려웠다.정말 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그런 사람 말이다. 그런 그에게 진승연도 이젠 두손 두발 다 들었다.진승연은 여전히 고은영이라면 치가 떨렸다.“이게 다 저 계집애 때문이야.”이 모든 것은 고은영이 나타나는 바람에 벌어진 일들이라고 생각했다.그녀 때문에 자신이 노빈과 결혼해야 할걸 생각하니당장 가서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하지만 요즘 정원희가 그녀를 철저히 감시하고 있는 탓에 손을 쓸 기회가 없었다.고은영을 욕하는 진승연의 말에 이미월은 속이 시원했지만겉으로는 아닌 척했다.“승연아, 지금 상황에 함부로 하면 안 돼. 지금
“난 대체 누구의 대용품이었어요?”안지영이 바로 물었다.안열은 장선명과 오랜 시간 함께 했으니 사진 속의 사람이 누구인지 다 알 것이다. 그러니 장선명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 것이다.안열은 안지영의 말을 듣고 표정이 그대로 굳어버렸다.“그건...”“두 사람은 왜 헤어진 거예요?”안지영이 또 물었다.“...”안열을 그 어느 질문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안열은 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안지영이 얼마나 칼 같은 사람인지, 안열은 잘 알았다.물론 안지영과 장성명의 사이가 안지영 때문에 시작한 것이라고 하지만 장선명에게 설레지 않았다면 안지영은 장선명과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안열은 결국 또 속으로 나태웅을 욕했다.“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선명 도련님이 안 대표님과 결혼하려는 건 안 대표님을 사랑해서지, 다른 사람의 대용품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니까요.”“사진 속의 여자들과 아직도 연락해요?”“절대 아닙니다. 제가 맹세할게요!”안열이 진지하게 얘기했다. 안지영이 괜히 장선명을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다.안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열을 쳐다보았다. 안열은 그런 눈빛을 마주하고 약간 긴장했다.“진짜예요. 사진 속의 여자들과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선명 도련님이 얼마나 칼 같은 분인지 잘 알잖아요.”“하긴, 안열 씨는 선명 씨 사람이니까 그편을 들겠죠.”“아니요, 전 안 대표님 편입니다. 같은 여자로서요.”“나도 그 어떤 여자의 대용품이었겠죠.”“그건 다른 거죠! 그 사람은 이미 죽었으니까요. 나태웅이 왜 갑자기 이 일을 들춘 건지는 모르겠지만... 죽은 사람까지 들먹일 줄은 몰랐어요!”안열은 정말 나태웅을 죽여버리고 싶었다.요즘 나씨 가문에 생긴 일을 보면 나씨 가문 사람들은 다 하나같이 쓰레기였다.“죽었다고요?”안지영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안열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다들 모르는 일이잖아요!”안지영이 놀라서 얘기했다.장씨 가문 남자들은 하나같이 차갑고 냉정하다는 소문을
안지영은 약간 생각하더니 얘기했다.“그런데 그렇게 욕한 게 오늘이 처음인 건 아니지 않아요?”“...”안지영이 그렇게 얘기하자 안열은 더욱 화가 났다.“저를 볼 때마다 저한테 개라고 욕해요. 개자식... 개같은 건 본인이면서! 나씨 가문 전체가 그냥 다 개예요!”안지영은 이마를 짚으면서 그 말을 들었다.“안열 씨를 그렇게 욕하고서도 잘 살아있다니... 신기할 정도네요.”안열이 얼마나 성격이 더러운지, 이제는 안지영도 잘 알았다.하지만 나태웅은 번마다 안열을 욕하면서 멀쩡히 살아있으니, 안지영은 약간 놀라웠다.“못 이긴다니까요!”“...”도대체 나태웅의 실력이 얼마나 좋기에 안열도 상대할 수 없는 걸까.“됐어요. 나태웅 얘기하면 기분이 잡치니까 그만 해요.”나태웅은 그런 존재다.언급만으로도 눈살이 찌푸려지게 하는 사람이다.“그건 맞아요. 짜증 나는 사람이죠.”안지영은 나태웅이 정말 너무 싫었다.“그러니까 무조건 승소해요!”너무 화가 나니 아무리 나태웅 얘기를 꺼내지 말자고 해도 결국 나태웅 얘기를 꺼내게 된다.안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요. 분명 승소할 겁니다!”안지영이 두 주먹을 꼭 쥐었다.안열뿐만이 아니라 안지영도 화가 난 상태다.안지영은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너무 화가 나서 이 화를 전부 나태웅에게 쏟아버리고 싶었다.안열은 안지영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요. 꼭 이기게 해줄게요!”나태웅을 고소하려던 건 안지영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든든한 아군이 생겼다.그 뜻인즉슨 나태웅은 여태껏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건드렸다는 것이다.안열은 안지영 앞에 있는 사진을 슬쩍 보았다. 안에는 장선명도 있는 것 같았다.“뭘 보는 거예요?”그렇게 물으면서 사진을 확인하려던 때, 안지영이 빠르게 사진을 가져가려고 했다.하지만 안열이 그 중 한 장을 손에 넣었다.사진을 본 안열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안지영의 표정도 그대로 굳어버렸다.안 그래도 아까 일 때문에 화가 났는데, 나태웅이 이
안열은 본능적으로 나태웅의 얼굴을 발로 차버리려고 했다.하지만 발을 드는 순간 갑자기 느껴지는 고통에 안열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그리고 다리를 껴안을 수밖에 없었다.“너 이 새끼...”나태웅에게 욕을 퍼부어주려는데 나태웅은 이미 엘리베이터에 타 있었다.나태웅은 아까 안열의 발을 부숴버리려고 했다.화가 치밀어오른 안열이 나태웅을 잡으려고 했지만 결국 발에서 느껴지는 고통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발등은 지방이 적어서 아주 취약한 부분이다. 나태웅은 바로 그 부분을 노린 것이다.확인해보니 발등에는 이미 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안열은 표정이 어두워져서 안지영의 사무실로 들어가 얘기했다.“나태웅은 정말 악질이에요. 반드시 고소해서 승소하고 감옥에 처넣으세요!”안열이 씩씩대면서 얘기했지만 안지영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이상함을 눈치챈 안열이 안지영을 쳐다보았다. 안지영은 테이블 위에 놓인 무언가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왜 그래요?”안열이 다가가서 물었다.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미간을 찌푸린 채 안열을 바라보았다.그러다가 안열의 발등이 퍼렇게 멍든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이게 무슨 일이에요? 누가 때렸어요?”“나태웅이요! 그 개같은 자식...”안열이 울분에 받쳐서 얘기했다.안지영은 약간 놀랐다.“나태웅이 때렸다고요? 안열 씨, 나태웅이랑 싸우면 못 이겨요?”“못 이겨요.”안지영은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저번에도 비슷한 대답을 들었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반드시 나태범을 감옥에 넣어주세요.”안열이 이를 꽉 깨물었다.안지영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이런 모습의 안열을 보니 조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나태웅을 감옥에 넣으라고요?”“네! 살인미수잖아요. 꼭 승소하고 콩밥을 먹게 해야 해요!”안열은 여전히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 마치 지금 당장 나태웅을 끌고 교도소에 갈 사람 같았다.“...”나태웅을 감옥에 보낸다니.그것보다 더 좋은 결말은 없을
마주한 시선 속에서 안지영은 나태웅에게서 위험을 느꼈다.숨을 깊게 들이쉰 안지영이 시선을 돌리고 얘기했다.“난 너랑 죽도록 싸우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너도 그렇고, 너희 가문도 그렇고, 정말 선을 넘었어.”그 말에 분위기가 점점 차가워졌다.나태범이 한 짓들은 자꾸만 안지영을 화나게 했다.나태웅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내가 알려줬던 거 같은데. 장선명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장선명이 왜 너랑 결혼하려고 하는 것 같아?”“이유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곧 결혼한다는 사실이야.”안지영은 나태웅 같은 사람 앞에서 더욱 굳건해졌다.안지영은 애매모호한 사람이 아니었다. 완벽하게 한쪽에 올인하는 쪽이다.그러니 지금 본인이 누구를 원하고 누구를 좋아하는지 아주 잘 알았다. 장선명을 두고 다른 남자를 만나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다.그리고 성격상으로도 동시에 두 남자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그래서 처음부터 장선명과 비즈니스 관계로 시작했고 선을 넘지 않고 거리를 잘 유지했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안지영은 장선명과 정말 한 쌍의 부부가 될 것이다.차가운 안지영의 태도에 나태웅이 차갑게 웃었다.“하, 정말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도대체 뭐라는 거야.”안지영은 본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태웅이 너무 싫었다. 분명 중요하지 않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는데 또 물으니 말이다.나태웅은 가방에서 사진을 꺼내 사무실 위에 올려놓더니 안지영을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안지영은 눈썹을 찌푸리고 물었다.“이게 뭔데...”“직접 확인해봐.”“...”“잘 확인해. 네가 사랑하는 그 남자가 정말 너만의 것인지.”“...”안지영은 호흡마저 거칠어졌다.“지금 이간질하려는 거야? 하지만 이제 쓸모없어!”“두려워?”나태웅이 눈썹을 까딱이면서 물었다.안지영은 나태웅을 당장이라 씹어먹을 듯한 눈빛으로 나태웅을 노려보았다.나태웅은 미간을 찌푸리고 사진을 향해 눈짓했다. 안지영은 이를 꽉 깨물고 사진을 들어 확인했다.그 사진은 모두
하늘 그룹 앞에서 나태웅이 일을 벌인다면 그건 하늘 그룹의 이미지에 좋지 않았다.안열은 고개를 끄덕인 후 밖으로 나갔다.안지영은 짜증이 나서 머리를 확 쥐어뜯었다.응접실에 온 안열은 문을 열자마자 거대한 남자의 그림자를 발견했다.그 일주일 동안 나태웅은 1년의 시간을 보낸 듯했다.그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그래서 나태웅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안열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안열은 빠르게 표정을 숨기고 담담하게 얘기했다.“들어가세요.”나태웅은 차가운 눈빛으로 안열을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안열의 곁을 지날 때 시선을 내려 안열을 쳐다보았다.결국 나태웅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지영의 사무실로 들어갔다.하지만 안열은 나태웅의 주변에서 흐르는 무거운 분위기에 놀라서 숨도 쉬지 못했다.나태웅이 사라진 후에야 안열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나태웅이 들어올 때 안지영은 마침 장선명과 통화하고 있었다.통화 내용은 결혼식에 관한 내용이었다.“네, 하얀 장미만 아니면 돼요. 그리고...”거기까지 말한 안지영은 들어온 나태웅을 보면서 의도적인 눈빛으로 얘기했다.“하얀 국화는 절대 안 돼요.”“국화에 트라우마 남은 거야?”전화기 너머의 장선명이 가볍게 웃었다.나태웅도 흘러나온 그 소리를 듣고 장선명이 얼마나 안지영을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표정이 굳은 나태웅은 더욱 차가워진 눈빛으로 안지영을 쳐다보았다.“결혼식이니까 당연히 국화는 안 되죠. 시력이 안 좋은 사람이 또 나한테 국화를 보낼까 봐 겁나네요.”“그래, 알았어. 감히 우리의 결혼식을 망치려는 사람이 생기면 난 그 사람을 바로 죽여버릴 거야.”“...”안지영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아니, 그저 조심하라는 말이었는데 죽인다는 건... 좀 과하지 않아요?”“그래? 네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을게.”“그래요.”안지영은 들어온 나태웅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대화를 나누었다.나태웅의 표정이 점점 구겨지는 것을 보면서 안지영은 전화기에 대고 얘기했다.“점심때 먹고 싶은 게 있는
나씨 가문은 지금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다.나태현에게 돌아오라고 연락했지만 나태현은 거절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나태범은 량천옥이 무슨 심정으로 나태현을 죽이려고 드는 것인지 잘 알기에 나태현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았다.순조롭게 귀국하는 것은 이제 어려울 것이다.“하...”나태범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나태범의 속에서는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집사가 다가가 얘기했다.“어르신, 일단 진정하세요. 이미 사람을 보냈으니까요.”나태범은 또 한숨을 쉬었다.“하...”아무리 사람을 보냈다고 해도 나태현을 안전하게 데려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그해의 일을 떠올린 나태범의 눈에는 근심과 걱정이 가득 담겼다.이건 끝나지 않은 복수다.“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지?”나태범이 한숨을 쉬면서 물었다.그들은 고희주가 죽었다는 것을 믿지 않고 있었다.그들이 아는 바에 따르면 나태현은 많은 의료진을 고용해서 고희주를 보살폈다.그런데 고희주가 죽다니.“량천옥 씨의 행동을 보면 아마도 정말 죽은 것 같습니다.”그 말에 나태범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아팠다.고희주를 법적인 손녀로는 인정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피를 나눈 아이이니...그래서 나태범은 더더욱 고희주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배준우가 나태현을 지켜준다면 좋겠는데...”나태범이 한숨을 쉬고 얘기했다.량천옥이 얼마나 독한지 잘 아는 나태범은 나태현이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그해의 일도 겨우 잠재운 것이다.량천옥이 아무리 요즘 잠잠해졌다고 하지만 량천옥은 그 원한을 잊지 않을 것이다.“...”집사는 량천옥의 말을 듣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배준우 님한테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집사가 얘기했다.나태범이 배준우에게 전화한다고 했을 때부터 집사는 나태범을 말렸다.아무리 배준우가 나씨 가문 형제들과 친한 사이라고 해도 지금은 고은영의 남편이니까 말이다.그러니 사랑 앞에서 우정을 선택할 것 같지 않았다.“난 그래도 그 아이가 아직 살아있다
“계약 파기 때문에요?”고은영이 눈썹을 까딱거리면서 물었다.고은영은 나씨 가문에 대한 호감이 하나도 없었다.아무리 나씨 가문이 강성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고 하지만 수많은 계약 파기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배준우와 진윤까지 계약을 파기했으니, 배씨 가문이나 진씨 가문과 연관 있는 가문들도 연달아 나씨 가문과의 계약을 파기할 것이다.사람은 이성을 잃으면 판단을 급하게 내리려고 하니까 말이다.아마 천락 그룹은 지금 수많은 압박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하지만 만약 배준우가 지금 계약 파기를 취소한다면, 천락 그룹에게 희망이 주어질 것이다.고은영은 그래서 나씨 가문이 배준우에게 연락한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배준우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그러면 왜...”“나태범 어르신은 나태현이 무사히 귀국하기를 원하고 있어.”“나태현 씨가 귀국하는 것이 우리랑 무슨 상관이 있어요? 우리가 방해한 것도 아니고...”배준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고은영을 쳐다보았다.그제야 고은영은 배준우의 뜻을 알아차렸다.나태범은 정말 교활한 사람이었다. 배준우에게 전화를 걸어 힘을 얻으려는 것이었다.배준우와 량천옥의 사이는 아주 어색했다. 하지만 고은영은 고은지와 사이가 좋고 고은지는 량천옥의 친딸이다.배준우가 고은영을 설득한다면 고은영이 고은지를 설득하고 이어서 고은지가 량천옥을 설득해 나태현을 살릴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미친 거 아니에요?”고은영이 화를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아마 나태범은 고은지를 며느리로 들일 생각이 추호도 없을 것이다.그러면서 고은지를 이용해 자기 아들을 살리려고 하다니. 차라리 고은지를 직접 찾아가는 성의라도 보였으면 모른다.배준우는 고은영의 모습을 보면서 물었다.“어떻게 생각해?”고은영은 바로 대답했다.“절대 안 돼요. 우리 언니는 나태현을 용서해줄 리가 없어요.”배준우에게까지 도움을 청할 정도라면 해외의 상황은 확실히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량천옥이 얼마나 미쳐있는지를 생각하면 나태범
고은영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버렸다.량천옥이 나태현을 죽이려고 아득바득 달려드는 것을 보면, 고은영은 진윤의 말대로 진정할 수 없었다.만약 고희주가 살아있다면 량천옥도 이렇게 죽을힘을 다해 싸우지 않을 것이니까 말이다.바로 눈앞에서 배준우가 기성훈과 전화하고 있었지만 고은영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배준우가 전화를 끊고 고은영을 몇 번이나 부르고 나서야 고은영은 정신을 차렸다.“은영아, 은영아?”“아? 어... 듣고 있어요.”고은영은 멍한 시선으로 배준우를 쳐다보았고 배준우는 따뜻한 손으로 고은영의 손을 감싸 쥐었다.고은영을 바라보는 배준우의 표정은 아주 진중했다.아무래도 량천옥의 반응을 보면 고희주가 죽었다는 것이 사실인 모양이었다.그렇지 않으면 량천옥이 이렇게 불같이 달려들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코를 훌쩍인 고은영은 붉어진 눈가를 매만졌다.배준우는 고은영을 품에 안고 조심스레 고은영의 등을 토닥여주었다.“다 괜찮아질 거야.”무기력한 위로였다.모든 건 그저 시간이 해결해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고은영도 이토록 슬퍼하는데, 고은지는 얼마나 더 슬플까.“언니한테 알려줬어야 했는데... 진작 알려줬어야 했는데...”고은영이 울먹이면서 얘기했다.고은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오직 나태현이 고희주의 아빠라는 것만 믿고 고희주를 나태현에게 보냈다. 나태현이 고희주를 해칠 줄도 모르고 말이다.만약 고은지가 량천옥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면... 나씨 가문과 량천옥 사이에 어떤 원한이 있는지 알았다면...고은영이 울먹이면서 어깨를 들썩이자 배준우가 고은영을 꼭 안았다.“네 탓이 아니야. 넌 그저 네 언니를 걱정해서 그런 거잖아.”맞는 말이었다.고은영은 고은지가 걱정되었다.고희주를 식물인간으로 만든 량천옥이, 고은지가 죽도록 증오하는 량천옥이, 결국 고은지의 친모였다는 걸 어떻게 알리겠는가.하지만 그 충격보다도 고희주의 죽음이 더욱 아플 것이다.“나태현 씨가 희주를 데려가지 못하게 해야 했는데... 그러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준우 씨는 나한테도 잘해주고 우리 아이한테도 잘해주니까 좋은 사람이에요.”“더 자세하게 얘기해줄 수는 없어?”“그리고 매일 나를 데리고 출근해요.”배준우는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진윤은 고은영을 데리고 쇼핑을 하는데 배준우는 고은영을 데리고 출근은 하다니...배준우는 바로 고은영을 품에 안고 키스를 퍼주었다.“읍... 갑자기...”그때 핸드폰 진동 소리가 들렸다.“전화, 전화 와요.”고은영이 배준우를 밀면서 얘기했다.배준우는 진동 소리를 듣고 약간 미간을 구긴 채 고은영을 놓아주었다.고은영은 이때다 싶어서 도망갔다.배준우가 전화를 받자 전화기 너머에서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여보세요.”“나다.”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배항준이였다.배준우는 배항준의 전화에 약간 의외라고 생각했다. 표정을 굳힌 배준우가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무슨 일이죠?”“너, 여자 하나 때문에 점점 선 넘는 짓을 하는구나.”그 말을 들은 배준우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바로 이해했다. 아마도 나태범이 배항준에게 전화한 것 같았다.나태현과 나태웅이 다 사라졌으니 나태범이 어쩔 수 없이 나서야 했다.하지만 배준우는 나태범이 바로 배항준에게 연락할 줄은 몰랐다.이제는 그들만의 싸움이 아니었다. 나태범, 배항준 세대까지 이 싸움에 엮이고 말았으니 말이다.배준우는 속으로 나씨 가문 사람을 욕했다.“제가 하는 일에 신경 쓸 사이가 있으세요? 아이가 벌써 다 컸나 봐요?”그렇게 말하면서 배준우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배준우의 아들과 배항준의 아이가 나이가 비슷하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사람들은 배씨 가문을 헐뜯고 비웃을 것이다.선을 넘는다니.배준우가 봤을 때 배항준이야말로 먼저 선을 넘은 사람이었다.이제야 알 것 같았다.량천옥은 원래부터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량천옥을 그렇게 만든 건 여자에 눈이 먼 남자들이다.전화기 너머의 배항준은 배준우의 말을 듣고 바로 화가 났다.“너 이 자식, 뭐라는 거야!”“이 나이에 아이를 돌보는 게 재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