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호영은 현재 정말로 막다른 길에 몰린 것 같았다.그렇지 않으면 진윤에게 이렇게 무모하게 굴지 않았을 것이다.진윤은 진호영을 바로 내쫓으면서 다시는 완도에 오지 말라고 했다.만약 또 오면 올 때마다 때리겠다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진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윤설은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진윤은 온몸을 감싸고 있던 차가운 기운을 걷어내며 윤설에게로 다가가 바람에 흩날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놀랐어?”윤설이 말했다.“저 사람은 네 친동생이야.”“멍청한 녀석, 반항기라서 좀 때려줘야 해.”진윤의 무심한 말에 윤설은 말문이 막혔다.‘이미 어른이 다 되었는데 반항기라니. 그리고 좀 때려줘야 한다고? 이대로 괜찮은 걸까?’사실 윤설은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방금 진윤이 진호영을 혼내는 모습을 보니 그녀는 자신들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가 떠올랐다.만약 아이가 말을 안 들으면 진윤의 성격에 때려서라도 말을 들을 때까지 혼내지 않을까 걱정되었다.“무슨 생각해?”윤설이 아무 말도 없자 진윤은 더욱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그제야 윤설은 정신을 차리고서는 약간 망설이며 진윤을 바라보았다.그녀의 눈빛에 진윤이 물었다.“왜?”“우리 아이는 때리면 안 돼.”“뭐?”“아무리 말을 안 들어도 때리면 안 돼.”윤설의 단호한 말에 진윤은 잠시 멍해졌다.‘아이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 보호하는 건가? 태어나면 윤설 마음이 완전히 아이 쪽으로 기울겠지?’여기까지 생각한 진윤은 한숨을 내쉬며 아이에 대한 기대감이 반 이상 사라졌다.진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윤설은 흥하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듣고 있는 거지?”‘지금 나한테 대드는 거야? 이제 보니 이미 아이에게 마음이 기울었구나?’진윤은 윤설의 작은 얼굴을 꼬집으며 말했다.“나는 네가 자기를 때리지 말라고 할 줄 알았어.”진윤의 말에 윤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가정 폭력?’방금 진윤의 모습은 정말 가정폭력을 일으킬 수 있는 남자처럼 보였다.이 말을 듣고 윤
진성택은 오늘 병원에서 아예 돌아오지 못했다.원래는 병원에 투석을 받으러 갔다가 오늘 병원에서 돌아와야 하지만 돌아오지 못한 걸 보면 진성택의 몸 상태가 얼마나 안 좋은지 짐작할 수 있었다.진성택의 얘기가 나오자 진호영은 더욱 슬펐다.“아빠의 건강이 그렇게 안 좋으신 거예요?”“병원에서 계속 이식할 수 있는 신장을 찾고 있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어. 네 아버지는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을지도 몰라.”이 말을 할 때 김영희의 목소리에는 고통이 가득했다.진호영은 이 말을 듣고 온몸에 힘이 빠졌다.그는 진성택의 병이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은 몰랐다.“호영아, 지금 너희 아버지가 가장 걱정하는 건 유경이야. 네가 어떻게든 좀 방법을 찾아보면 안 되겠니? 너에게는 친구들이 많잖아.”평소에는 진호영이 밖에서 어울리는 친구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김영희는 이제 그 친구들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랐다.진호영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이미 다 해봤다고 말하려 했지만 김영희의 고통스러운 눈빛을 마주하자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다시 방법을 생각해 볼게요.”“지금 나와 네 아버지 옆에는 너밖에 없어.”김영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말속에는 더 깊은 고통이 담겨 있었다.이 말을 들은 진호영은 진윤과 진정훈에 대한 원망이 더 커졌다.‘왜 하필 형들은 집안에 갈등을 일으키는 거지? 고은영도 마찬가지야. 아빠가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데 왜 굳이 유경이와 싸우는 거야?’이런 생각이 들자 진호영은 자연스레 고은영에 대한 반감이 생겼다.한편 고은영은 배준우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 잠에 들었다.다음 날 아침 배준우는 일어나서 고은영을 깨우지 말라고 지시했다.고은영이 너무 피곤해해서 배준우도 오랜만에 얌전하게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잠만 잤다.배준우는 고은영이 푹 자길 바랐지만 결국 실망하고 말았다.아침 9시에 병원에서 결려온 전화에 고은영은 바로 잠에서 깼기 때문이다.고은영은 비몽사몽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사모님, 안녕하세
고은영은 의사 사무실 안에 있었다.고은영은 서민혁의 말을 듣는 순간 완전히 얼어붙은 채 의자에 앉아 믿을 수 없다는 듯 서민혁을 바라보았다.서민혁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정말 죄송합니다. 저희도 이런 사고가 생길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저쪽 병원에서 남은 약값을 환불해 드릴 겁니다.”서민혁의 말에 고은영은 심호흡하며 다소 멍한 상태로 말했다.“죽었다고요? 어떻게 죽을 수 있어요?”고은영은 지금 머릿속이 윙하고 울려 자기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방금 서민혁이 말하길 그 기증자가 길을 건너다 차에 치였다고 한다.병원에 실려 갔지만 끝내 살아나지 못했다고 했다.그리고 그의 어머니도 병원에서 그 소식을 듣고 충격을 견디지 못해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다.기증자와 그의 어머니가 모두 사망한 것이다.“언제 이런 일이 생긴 거죠?”고은영이 숨을 헐떡이며 묻자 서민혁이 대답했다.“오늘 아침 6시에 기증자분이 어머니의 아침을 사러 가던 중 일어난 사고입니다.”고은영은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오는 느낌에 아무 말 없이 숨을 헐떡였고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모두 끝났어. 기증자가 죽었어. 그것도 3시간 전에.’고은영은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지켜봤지만 기증자만은 지켜내지 못했다.고은영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더니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호흡은 더욱 고통스러워졌다.‘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하늘은 정말 언니에게 살아갈 길을 주지 않으려는 건가? 분명 이제 곧 수술할 수 있다고 했는데.’10분 뒤 고은영은 어떻게 의사 사무실에서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딛는 것조차 힘들었다. 배준우가 이런 그녀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그녀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배준우는 고은영을 안아 올렸지만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나니 지금 어떤 상황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고은영은 눈을 뜨며 말했다.“준우 씨.”“응.”“이 일은 절대 사고가 아닐 거예요.”고은영은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 말문이
배준우는 한숨을 내쉬며 고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지금부터는 이 일에 신경 쓰지 마.”“뭐라고요?”“이 일은 우리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배준우가 말했다.그는 량천옥같은 여자는 만만한 상대만 골라 괴롭힌다는 것을 눈치챘다.그녀가 반응할수록 량천옥은 더 끈질기게 달라붙을 것이고 이번 일도 고은영이 그런 함정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었다.고은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코를 훌쩍이며 멍하니 있었다.분명히 최근 며칠 동안 너무 큰 충격을 받은 게 틀림없었다.배준우는 그녀의 작은 얼굴을 손으로 가볍게 꼬집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네 언니는 무사할 거야, 응?”“진짜로요?”“그럼, 당연하지. 날 믿지 않니?”“고마워요!”고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이 순간, 그녀는 배준우 외에 기댈 곳이 없었다.배준우는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래, 날 믿으면 돼.”고은영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그 모습을 본 배준우는 마음이 아파왔다.비록 고은영에게 이제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그녀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시간이 날 때마다 병원을 오가며 고은지와 고희주를 찾았지만 고은지 앞에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은지가 고희주의 상태에 대해 물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고은지가 찾지 않는다고 해서 고은영은 찾지 않을 리 없었다. 그리고 결국 셋째 날 아침, 고은영은 고희주의 병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의사가 그녀에게 고희주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소식을 전했다.이 말을 듣고 고은영의 마음은 칼에 베이듯 아파왔다. 옆에 있던 안지영은 분노에 차 말했다.“량천옥, 그 악질 같은 여자가 정말 너무하는군! 이번엔 꼭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하지만 고은영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아이가 깨어나지 못한다는 건 그 아이가 식물인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앞으로 깨어날 수 있을지는 기적에 달려 있었다.기적이라는 단어를 듣자 고은영은 안지영의 품에 쓰러지고 말았다.안지영은 량천옥
량천옥은 한때 배씨 가문에 있을 때 이 강성에서 꽤나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었다.게다가 그녀는 제법 능력도 있었다.이번 사건에서는 아직까지 그녀가 고희주를 떨어뜨리는 걸 본 사람이 없었고 아이는 현재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량천옥은 길에서 아이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며 증거 불충분으로 인해 상황이 복잡해졌다.배준우는 담배를 비벼 끄며 물었다.“기성훈 쪽에서는 뭐래?”“영상 복구가 불가능하답니다. 진재한도 같은 말을 했어요.”“영상 하나도 못 고친다고? 내가 그놈들을 먹여 살려보봤자 무슨 소용이야?”배준우는 이를 악물었다.원래 그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이전에도 고은지의 일로 고은영의 속을 태우고 있을 때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고희주의 일은 달랐다. 고은영이 그 아이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는 덩달아 아이도 귀엽게 여겼다.하지만 방금, 고은지와 아이가 고은영에게 끼친 충격을 직접 목격한 후 그는 정말로 량천옥을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진청아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전문적인 건 잘 모르지만 기성훈 씨 말로는 복구가 어려워 보인다고 합니다. 거의 희망이 없는 것 같아요.”배준우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그는 량천옥을 이렇게 그냥 둘 수는 없었지만 진청아의 말이 맞았다.그 여자를 단순히 법으로 가두는 것은 효과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다.량천옥은 벼랑 끝에 몰리지 않는 한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녀는 어떤 수단도 쓸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은지 쪽을 철저히 감시해. 량천옥의 사람들이 접근조차 하지 못하도록 막고 아이의 상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새어나가지 않게 해.”배준우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진청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습니다!”고은지가 그녀의 딸이 식물인간이 된 사실을 알아서는 안 됐다. 만약 그녀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번에는 정말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아이를 란완리조트로 옮기자.”배준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과거 고은영이 아이를 낳았을
그녀는 누군가와 통화 중인 듯 보였고 상대방이 뭐라고 물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갑자기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병상에서 기척이 느껴지자 안지영은 고개를 돌려 고은영이 깨어난 걸 확인했다.“벌써 깬 거야?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안지영은 전화를 서둘러 마무리하며 물었다.“이따 이야기하자. 끊을게.”그녀는 상대방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고 가방에 넣었다.고은영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안지영을 바라보았다.안지영은 깊게 한숨을 쉬며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다.이렇게 큰 타격은 누구라도 감당하기 어려울 텐데 성격이 여린 은영이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안지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며 말했다.“그 여자 내가 혼내줄게.그러자 고은영은 울음을 터뜨렸다.“으앙...”안지영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 여자가 정신을 못 차렸네. 배윤을 내가 얼마나 혼내줬는데 벌써 또 너한테 이러는 거야?” 안지영은 정말이지 분통이 터졌다. 배윤 그 일은 사실 그녀가 장선명에게 시켜 처리한 일이었다. 2억 원을 날려놓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걸 보니 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고은영은 훌쩍이며 물었다.“어떻게 혼내준 거야?”“네 언니를 괴롭혔으니 난 량천옥의 아들을 건드렸지!” 안지영은 분노에 차 대답했다.소중한 것을 건드리는 것만큼 치명적인 응징은 없으니까. 그런데도 그녀가 더 난폭하게 나오는 것을 생각하니 의 안지영은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어떻게 건드렸는데?” 은영이 멍하니 물었다.“량천옥이 20억 원을 날리게 만들었어!”고은영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그게 무슨 손해지? 어차피 그 돈도 배준우가 낸 건데...'하지만 안지영의 행동은 량천옥에게 어느 정도 타격이 됐다고 할 수 있었다.문제는 그로 인해 량천옥이 더욱 미쳐 날뛰게 되었다는 것이다.고은영이 잠자코 있자 안지영은 결심을 굳히며 말했다.“이번에 더 제대로 혼내줘야겠어.”안지영은 은영이 기절할 정도로 당한 것을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
배준우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내 아내를 아끼다니?’그녀가 안지영의 보살핌이 필요하긴 했지만 그것이 그가 들어야 할 말은 아니었다.장선명이 계속해서 말했다.“안지영이 무슨 짓을 벌인 거예요?”배준우가 냉정하게 대답했다.“안지영이 량천옥의 다리를 부러뜨리러 가겠다고 해.”배준우는 안지영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녀가 정말로 그 일을 벌일 거라 믿었다.그리고 무엇보다 량천옥이 그에게서 빼앗아 간 20억 원을 모두 안지영이 챙겨갔다고 하니 과연 그게 은영을 위한 것이었는지 의문이 들었다.장선명이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잘됐네요. 그 여자는 그런 직설적이고 강력한 방법이 딱 맞는 인간이잖아요.”배준우의 목소리는 점점 더 차가워졌다.“안지영을 방치하겠다고?”“나도 어쩔 수 없어요.”배준우가 단호히 말했다.“그럼 내가 처리할까?”장선명은 급히 태도를 바꿨다.“아니요, 내가 알아서 막을게요.”장선명은 안지영이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까 염려되어 즉시 전화를 끊었다.배준우는 전화를 끊고 고은영을 바라보았다.안지영의 위로 덕분에 은영의 상태는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힘들어했다.이렇게 큰 충격은 금방 회복될 수 없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고은영은 입술을 깨물며 속삭였다. “왜 안지영이 량천옥을 혼내주지 못하게 하는 거야?” 배준우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차분히 대답했다.“지금 그 여자는 고은지에게 맞는 유일한 골수 제공자야.”고은영은 그 말을 듣고 숨이 가빠졌다.그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량천옥이 그런 일을 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그 여자가 우리 언니한테 골수를 줄 리가 없어.”량천옥은 자신을 미워하는 마음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언제라도 다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인물이었다.그런 상황에서 고은지에게 도움을 줄 거라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배준우는 차분하게 말했다.“그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넌 신경 쓰지 마.”그의 목소리에는 묘한 신뢰와 힘이 담겨 있었다.고은
고은영은 아이의 상황을 보니 도저히 고은지를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하지만 고은영이 사흘째 병원에 오지 않자 고은지는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말았다.다음 날 아침, 물건을 가지러 돌아온 혜나는 그녀에게 말했다.“고은지 씨가 계속 당신을 보지 못하니까 온갖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그 말을 들은 고은영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배준우가 며칠 전 그녀에게 이 일에 신경 쓰지 말라고 했을 때, 고은영은 마치 감정이 사라진 사람처럼 그의 말을 따르기만 했다.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자 그녀는 깊은 자책감에 휩싸였다.그녀는 일부러 연락조차 피하며 거의 모든 일을 배준우의 사람들에게 맡겼다.그러나 고은지가 불안해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고은영의 가슴이 조여오듯 답답해졌다.“언니가 또 뭐라고 했어?”혜나는 조심스레 말했다.“희주를 물어보셨어요.”그 말을 들은 순간, 고은영은 마치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처럼 공허함을 느꼈다.사람들은 종종 아이가 위험에 처했을 때 엄마가 직감한다고 하지 않는가.고은지도 뭔가를 느낀 걸까...그녀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지금 당장 같이 가자.”고은영은 자신도 알고 있었다.언니가 병원에 입원한 이후 매일 찾아갔던 그녀가 며칠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혜나의 말처럼 고은지가 더 심한 불안을 느낄 게 뻔했다.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병원에 도착한 고은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태현과 마주쳤다.그녀는 머리가 복잡해서 별다른 생각 없이 간단히 인사만 건넨 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곧바로 고은지의 병실로 향했다.그런데 막 병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안에는 수많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사라가 그녀를 보자마자 급히 다가와 말했다.“사모님!”“무슨 일이에요?”이 광경을 본 고은영의 심장이 본능적으로 덜컥 내려앉았다.사라가 답했다.“고은지 씨가 또 피를 토하셨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고은영의 눈꺼풀이 떨렸다.그녀는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눈앞
두 여자가 마치 맹수처럼 서로 얽혀 싸우고 있었다. 안지영은 화가 나서 말했다. “내가 네 얼굴을 찢어버려야지! 도대체 누가 너더러 감히 나한테 와서 이러라고 했어!” 그녀가 나태웅에게 정신적인 피해를 요구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데 그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귀찮게 다가온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하주원은 기가 막힌 듯 대답했다. “너 같은 년, 너는 양심도 없잖아! 나는 경고하는 거야, 내 사촌한테 가까이 가지 마! 그 사람는 네가 손댈 사람이 아니야!” “그럼 네가 사람을 멀리 데려가던지! 그 병을 나한테 옮기지 말고!” “너 같은 년은 정말로!” “너야말로, 너희 가족 전부가 다 미쳤어!” 안지영은 거침없이 맞받아쳤다. 하주원은 하늘 그룹의 계승자가 이렇게 무례하고 난폭한 여자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원래 안지영에게 경고만 하려 했고 안지영이 어떻게든 체면을 차리고 자신에게 이제부터는 나태웅과 연락하지 않겠다며 사라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안지영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회사에서 이렇게 자신과 얼굴을 붉히며 싸우는 모습에 그녀는 당황했다. “아, 너 그만 놔!” 하주원은 머리가 당겨져서 아팠다. 안지영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너 방금 나 때리겠다고 하지 않았어? 때려 봐! 나 때려봐!” 하주원은 말없이 그녀를 노려보았고 비서도 말없이 이 광경을 보고는 급히 사람들을 데려와서 둘을 떼어놓으려고 했다. 한편, 그녀는 급히 안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 안열은 여전히 병원에 있었다. 병실 안의 분위기는 너무나도 이상하고 긴장감이 감돌았다. 진이훈은 나태웅을 한번 보고 다시 안열을 바라보았다. 그는 안열이 이곳에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으며 더 놀라운 건 그녀가 보스에게 손을 대었다는 점이었다. ‘도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행동을 한 것일까?’ 나태웅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안열을 마치 찢어버릴 듯이 차갑고 위험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막 손을 댄 안열은 점차 차
한편, 하늘 그룹에서는 안지영이 진이훈을 차단한 후 더 이상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안지영의 세계는 조금 조용해졌다. 그런데 회의실에서 나오자 비서부의 작은 비서가 다가왔다. “안 대표님, 접대실에 하주원 씨라는 분이 오셨습니다.” “하주원?” “네.”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지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게 누구지?” 머릿속에서 그녀와 관련된 사람을 검색했지만 그 이름은 낯설었다. 그녀는 그 사람을 전혀 알지 못했다. 비서가 말했다. “나 회장님의 여동생의 딸입니다.” “나태웅의 사촌?” “네, 맞습니다.” ‘이런!’ 그제야 그녀는 고은영이 왜 배준우와 함께 있을 때 그렇게 힘들었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문제는 언제나 따라왔다. 안지영은 머리가 아팠지만 어쩔 수 없이 접대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금발의 긴 파마머리로 화려하게 꾸민 여자를 보았다. 그녀는 지나치게 짙은 화장과 화려한 옷차림으로 본래의 단아함을 가리고 풍만한 매력을 풍기며 섹시한 기운을 뽐냈다. 특히 짧은 청바지와 상의가 안지영의 머릿속에 두 글자를 떠오르게 했다. ‘불량소녀!’ 안지영은 쉽게 다른 사람의 외모나 스타일을 평가하지 않지만 그 순간 하주원의 화려한 화장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특히 그린 아이섀도와 은색이 박힌 네일이 그녀에게서 여유보다는 떠도는 느낌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하주원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안지영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자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는 불꽃이 튀었다. “당신이 안지영 씨?” 하주원은 적대적인 어조로 물었다. 안지영은 그녀가 왜 왔는지 감을 잡았다.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저를 찾으러 오셨으면서 제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나요?” 하주원은 여전히 적대적이었고 대화는 금세 불쾌한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몇 마디를 주고받는 사이에 이미 공기 속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하주원은 커피를 내려놓고 일어나서 안지영에게 다가갔다.
“안지영 씨가 오면 분명히 대표님을 때릴 거예요!” ‘때린다’는 말을 진이훈은 아주 세게 강조했다. 나태웅은 다시 침묵했다. 진이훈은 그의 이런 모습을 보고 더욱 마음이 아팠다. 보스가 정말 아픈 거였다. 병이 심각해 보였고 이런 상태로 가면 안지영까지 미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자신이 아파서 안지영 씨까지 미치게 만들려고 하는 걸까?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을 한다고?’ 진이훈은 그런 생각을 하며 나태웅이 정말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아리 박사님이 이미 왔어요. 큰 도련님께서 의사와 협력해서 치료를 받으라고 하셨어요.” 나태웅은 그 말을 듣고 차가운 눈빛으로 진이훈을 노려보았다. 진이훈은 그 눈빛에 조금 겁을 먹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맞을 위험을 감수하며 말했다. “몸이 중요하잖아요. 그렇죠?” 진이훈도 답답했다. 나태웅 옆에서 열심히 일만 했을 뿐인데 결국 나태웅과 함께 병원에서 그의 병수발을 들고 있다니. 나태웅은 차갑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꺼져!” 그는 마음속으로 더 괴로워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태웅이 얼굴이 더 안 좋아 보이는 걸 보며 진이훈은 다시 물었다. “그럼 안지영 씨가 여전히 안 오면 어떻게 하죠?” “그럼 유골함을 열어 그녀에게 보여주면 돼.” ‘유골함을 열다니! 안지영 씨에게 유골함을 보여준다고?’ 나태웅이 그런 말을 하자 진이훈은 급히 인터넷에서 유골함을 열어본 사진을 찾았다. 그가 캠퍼스를 떠나 처음 일했을 때는 열정이 넘쳤지만 지금은 이런 유치한 일을 해야 하다니. 안지영을 빨리 오게 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는 서둘러 그 사진을 안지영에게 보냈다. 하지만 메시지를 보낼 수 없다고 떴을 때 그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 안지영 씨가 저를 차단했어요. 이제 귀찮아서 오지 않을 거예요.” 진이훈은 힘없이 말했다. 나태웅은 책을 넘기던 손이 잠시 멈췄고 그의 눈빛에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
안열은 처음엔 초조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지영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며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안지영은 계속해서 말했다. “나태웅이 말하길 제가 아침에 음식을 가져가지 않으면 화장 증명서를 받게 될 거라던데 지금 아침 시간이 겨우 한 시간 정도 지났잖아요?” ‘한 시간 만에 죽었다고? 화장 증명서까지 나왔다고?’ 안지영은 결국 상황을 완전히 이해했다. ‘이 나태웅, 진짜 못돼 먹었네. 이런 상황에서도 날 도덕적으로 옭아매려고 하다니.’ 안지영은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안열은 뒤늦게 납득하며 말했다. “맞아요! 그럼 결국 장난친 거잖아요?” “화장 증명서가 그렇게 빨리 나올 리가 없어요.” “설령 진짜 죽었다고 해도 병원에서 절차를 다 마쳐야 화장터로 갈 수 있잖아요.” 안지영은 얼굴이 굳었다. 조금 전까지 충격에 휩싸여 허둥대던 그녀는 이제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지금 바로 나태웅을 정말 죽여버려도 돼요?” 안열도 머리를 쥐어뜯으며 말했다. “나태웅 이 자식, 미친 거 아니에요?” 안지영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네, 이미 정신과 의사도 예약했어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나태웅이 진심으로 죽으려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안지영은 안열의 손목을 잡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근데 아까 왜 그렇게 초조해했죠?” “아니에요, 잘못 보셨어요.” ‘그걸 내가 잘못 볼 리가 있냐고?’ 아까 안열이 보였던 반응은 분명 초조함이었다. 안열은 더 이상 안지영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나태웅을 찾아가 따질 생각뿐이었다. 안열은 안지영의 손목을 뿌리치며 말했다. “회의하러 가세요.” “그럼 안열 씨는요?” “저는 마음을 좀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해요!” 안지영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마음을 진정시킨다니, 그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아?’ 그러나 지금 나태웅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이미 너무 지쳤다. 회의실로 올라간 안지영은 이제 겨우
‘진짜 너무 악랄해.’ 진이훈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우리 보스가 안지영 씨에게 얼마나 진심인데 그 마음을 완전히 짓밟아버렸어.’ 그는 나태웅의 손을 꼭 붙잡으며 혹시라도 그가 창문에서 뛰어내릴까 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이훈의 끝없는 잔소리에 나태웅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결국 그는 손을 확 뿌리쳤다. 그러나 진이훈은 더 꽉 붙들며 간절하게 말했다. “우린 안지영 씨 생각하지 말자고요, 네?” 심지어 말 끝에 ‘말 잘 들어요’같은 말을 덧붙이고 싶을 정도였다. 나태웅의 눈빛이 점점 더 위험해지더니 낮게 물었다. “우리?” ‘뭐지?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했지?’ 잠시 멍해 있다가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 아니요! 우리가 아니라 대표님이 안지영 씨를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진이훈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자에게 받은 상처가 얼마나 깊으면 말조차도 안지영 씨와 관련되면 불편한 거야?’ “손 놔.” 진이훈은 여전히 손을 놓지 않으며 강하게 말했다. “안지영 씨는 별로예요. 게다가 지금은 장선명 씨와 이미 사귄다는 소문도 있잖아요. 그런 여자를 정말 원하시겠어요?” “내가 손 놓으라고 했지.” 나태웅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힘을 주어 손을 뿌리쳤다. 그의 눈빛은 마치 진이훈을 잡아먹을 듯이 날카로웠다. 진이훈은 나태웅의 그 눈빛에 움찔하며 한발 물러섰다. 나태웅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시 한번 안지영을 헐뜯어봐.” ‘이제 안지영 씨에 대해 나쁜 말도 못 하게 해?’ 그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정말 이 여자한테 얼마나 깊이 빠진 거야... 병이 이렇게 심한데도 안지영 씨를 지키려 하다니.’ 한편, 안지영은 진이훈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한 뒤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곧바로 메시지 창에서 영상 통화를 걸었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계속 시도했지만 나태웅 쪽에서 받지 않았다. 그녀는 점점 숨이 가빠지며 제대로 숨도 못 쉴 지경이 되었다. 옆에서 지켜
안지영이 여전히 나태웅을 미친놈, 변태라고 욕하는 걸 보며 장선명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고 물었다. “그럼 돈을 나태웅에게 주면 이 일은 끝나는 거예요?” 안지영은 병아리가 모이를 쪼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아마도요?” 만약 이걸로도 끝나지 않는다면 정말 나태웅의 머리를 깨서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하고 싶을 정도였다. 장선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요, 그럼 이건 제가 처리할게요.” “뭘 하려고요?” 안지영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흥분한 상태였지만 장선명이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말하자 즉시 조용해졌다. ‘선명 씨가 처리한다고? 항상 유흥가를 드나들던 사람이 무슨 방법으로 처리하려는 거지?’ 그녀는 이 순간 깨달았다. 장선명과 나태웅은 원래 완전히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이 둘이 얽히게 되었고 나태웅은 정신적으로 예민하고 집요한 수법을 쓰는 반면 장선명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왠지 모르게 건달 같은 느낌이 있었다. ‘건달 대 신경질적인 사람? 이 조합은 대체 어떤 장면을 만들어낼까?’ 그녀가 걱정하는 것도 모른 채 장선명은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뭘 어떻게 하겠어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그게 가장 좋은 거죠.” ‘아니, 뭐야 이 사람...’ 다음 날 아침. 나태웅은 병원에서 안지영이 만두와 인절미를 들고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고 대신 그의 은행 계좌에는 무려 600억이 입금되었다. 하지만 돈을 보낸 계좌는 안지영이 아니라 장선명의 것이었다. 이 돈을 확인한 나태웅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까맣게 변했다. 그 순간, 아침 식사를 들고 들어오던 진이훈이 그의 표정을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나 대표님, 진정하세요!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만 하시면 돼요!” 원래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는데 진이훈의 그 말에 더 화가 치밀었다. 이를 악물고 물었다. “안지영은 안 왔나?” “네, 안 왔어요. 왜요? 안지영 씨가 오늘 온다고 했나
‘손자가 한심하다고 할아버지가 나서서 사람까지 뺏으려 한다고? 이게 과연 체면이 서는 행동인가?’ 이 생각에 장선명은 점점 더 화가 치밀었다. 안지영이 들어왔을 때 그는 마침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장선명은 전화기 너머로 말했다. “네, 나태범 쪽에서 지영이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어요. 그때가 되면 할아버지가 나서 주셔야 해요!” 평소에 절대 어른들을 끌어들이지 않던 장선명은 배준우의 말을 듣고는 즉각 할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장선명의 할아버지는 안지영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으므로 이 말을 듣고는 의아한 듯 물었다. “나씨 가문 둘째 녀석이 정말로 지영이 때문에 자살 소동을 벌였단 말이냐?” “그럼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건 제 잘못이 아니에요. 제가 먼저 지영이와 연애를 시작했거든요.” “야, 이놈아. 네가 언제 이렇게 도덕 따지는 놈이었냐?” 심지어 먼저 사귀었다고 설명까지 덧붙이다니. 그의 할아버지조차 손자의 변명이 웃길 따름이었다. “아무튼요. 상황을 미리 알려드렸으니 종대 아저씨에게 나씨 가문 쪽 상황을 살펴보라고 해 주세요.” “알겠다!” 한편, 옆에서 이 전화를 듣고 있던 안지영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대충 상황을 이해한 그녀는 황당함을 느꼈다. 결국 나태범이 나태웅 때문에 자신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얘기 아닌가? ‘이 가족 제정신인가? 나태웅이 나를 협박했던 것도 모자라 이제 할아버지까지 협박에 나선다고? 힘으로 어린 사람을 억누르겠다는 건가? 내가 보호받을 아버지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녀는 잠시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만약 안진섭이 아직 살아 있었다면 이 상황에서도 안지영을 지켜줄 수 있었을까?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안열이 말했듯 그녀의 아버지는 너무 착하고 온화했으니까. 장선명이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리자 안지영이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가가 물었다. “언제 왔어요? 다 들은 거예요?” 안지영은 화난 얼굴로 말했다.
배준우는 조용히 장선명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 그가 한 말은 생생하게 상황을 묘사했지만 어딘가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나태범이 화가 나서 이 일에 개입한다면 장선명은 진짜 골치 아픈 문제를 떠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장선명이 더 기막힌 소리를 했다. “진짜 그렇게 된다면 나도 우리 집 어른을 불러야지!” 마치 누구네 집에만 어른이 있는 건 아니라는 태도였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그의 얼굴이 단번에 어두워졌다. 장선명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진지하게 말하는 거예요. 저도 할아버지를 부르죠.” 나태웅이 할아버지를 부르면 자기는 할아버지를 불러 대결 구도를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었다. 배준우는 고개를 감싸 쥐며 말했다. “너 아직도 이 상황이 충분히 복잡하지 않다고 생각하니?” 장선명의 할아버지가 어떤 인물인지 배준우는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도 이 문제에 개입하게 된다면 이 일은 완전히 우스갯소리가 되고 말 것이다. 게다가 그런 소동은 나태웅이 자살 소동을 벌였던 것보다도 훨씬 더 큰 파장을 일으킬 게 뻔했다. “그쪽이 먼저 일을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 나랑 지영이는 곧 결혼할 사이인데요.”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 배준우는 다시금 이 일이 얼마나 촉박한 상황인지 깨달았다. 장선명과 안지영의 결혼식 날짜는 얼마 남지 않았었다. 하지만 나태웅 쪽 상황을 보면 그 결혼식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이미 그는 이 일로 정신적 문제가 생겼고 만약 결혼식을 본다면 그의 상태는 더 나빠질 게 뻔했다. 배준우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참 고민하던 그는 결국 조심스럽게 말했다. “결혼식 날짜를 조금만 미룰 수는 없겠니?” 장선명은 바로 반발하며 말했다. “왜 미뤄야 하죠? 형님, 설마...” “나태웅은 지금 심리 치료를 받고 있어. 네가 결혼하는 걸 보면 어떤 일이 생길 것 같니?” 장선명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형님, 성인군자라도 되려는 거예요?” “뭐라고?” 배준우의 얼굴이 단번에 검게 변했다. “아니
스스로 병이 있다는 걸 깨달아야 의사를 대면할 때 거부 반응이 덜하다. 배준우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 너도 참...” 원래는 나태웅에게 몇 마디 더 하려 했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건 고은영의 얼굴이었다. 결국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후로도 한동안 나태웅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라고는 했지만 실상은 나태웅을 안심시키려는 배준우의 독백에 가까웠다. 나태웅은 무기력해 보였다. 그가 이렇게까지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건 정말 모든 걸 체념한 것인지 아니면 병이 심각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배준우는 병원을 떠났다. 병원에서 나온 배준우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먼저 장선명을 찾아갔다. 장선명은 배준우가 근무 시간에 자신을 찾아온 걸 보고 놀라며 말했다. “형, 웬일이에요? 근무를 빼먹다니!” 배준우가 얼마나 일에 철저한지 강성은 물론이고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근무 시간 중에는 그 누구도 그를 밖으로 불러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근무 중임에도 장선명을 찾아온 것이다. 배준우는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말이 많네. 중요한 일이 있어서 왔어.” 장선명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사업 관련된 일이에요?” 중요한 일이라면 사업 관련 일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배준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나태웅 때문이야. 너 알고 있어? 걔 죽을 뻔했어.” 이 말에 장선명은 얼굴을 찌푸렸다. “형도 소문을 믿는 거예요?” 사실 나태웅의 손목 부상은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나태웅도 자신의 부상이 안지영 때문이라고 직접 언급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강성에서는 이 일이 마치 사랑에 상처받아 생긴 일이라는 소문으로 부풀려졌다. 그리고 그 소문은 이제 배준우의 입에서 더 과장된 형태로 나왔다. 죽을 뻔했다는 말은 거의 나태웅이 안지영과 장선명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의미로 들렸다. 장선명은 입꼬리를 실룩이며 말했다. “형이 이런 일까지 신경 쓰다니 정말 뜻밖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