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누군가와 통화 중인 듯 보였고 상대방이 뭐라고 물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갑자기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병상에서 기척이 느껴지자 안지영은 고개를 돌려 고은영이 깨어난 걸 확인했다.“벌써 깬 거야?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안지영은 전화를 서둘러 마무리하며 물었다.“이따 이야기하자. 끊을게.”그녀는 상대방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고 가방에 넣었다.고은영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안지영을 바라보았다.안지영은 깊게 한숨을 쉬며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다.이렇게 큰 타격은 누구라도 감당하기 어려울 텐데 성격이 여린 은영이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안지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며 말했다.“그 여자 내가 혼내줄게.그러자 고은영은 울음을 터뜨렸다.“으앙...”안지영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 여자가 정신을 못 차렸네. 배윤을 내가 얼마나 혼내줬는데 벌써 또 너한테 이러는 거야?” 안지영은 정말이지 분통이 터졌다. 배윤 그 일은 사실 그녀가 장선명에게 시켜 처리한 일이었다. 2억 원을 날려놓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걸 보니 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고은영은 훌쩍이며 물었다.“어떻게 혼내준 거야?”“네 언니를 괴롭혔으니 난 량천옥의 아들을 건드렸지!” 안지영은 분노에 차 대답했다.소중한 것을 건드리는 것만큼 치명적인 응징은 없으니까. 그런데도 그녀가 더 난폭하게 나오는 것을 생각하니 의 안지영은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어떻게 건드렸는데?” 은영이 멍하니 물었다.“량천옥이 20억 원을 날리게 만들었어!”고은영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그게 무슨 손해지? 어차피 그 돈도 배준우가 낸 건데...'하지만 안지영의 행동은 량천옥에게 어느 정도 타격이 됐다고 할 수 있었다.문제는 그로 인해 량천옥이 더욱 미쳐 날뛰게 되었다는 것이다.고은영이 잠자코 있자 안지영은 결심을 굳히며 말했다.“이번에 더 제대로 혼내줘야겠어.”안지영은 은영이 기절할 정도로 당한 것을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
배준우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내 아내를 아끼다니?’그녀가 안지영의 보살핌이 필요하긴 했지만 그것이 그가 들어야 할 말은 아니었다.장선명이 계속해서 말했다.“안지영이 무슨 짓을 벌인 거예요?”배준우가 냉정하게 대답했다.“안지영이 량천옥의 다리를 부러뜨리러 가겠다고 해.”배준우는 안지영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녀가 정말로 그 일을 벌일 거라 믿었다.그리고 무엇보다 량천옥이 그에게서 빼앗아 간 20억 원을 모두 안지영이 챙겨갔다고 하니 과연 그게 은영을 위한 것이었는지 의문이 들었다.장선명이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잘됐네요. 그 여자는 그런 직설적이고 강력한 방법이 딱 맞는 인간이잖아요.”배준우의 목소리는 점점 더 차가워졌다.“안지영을 방치하겠다고?”“나도 어쩔 수 없어요.”배준우가 단호히 말했다.“그럼 내가 처리할까?”장선명은 급히 태도를 바꿨다.“아니요, 내가 알아서 막을게요.”장선명은 안지영이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까 염려되어 즉시 전화를 끊었다.배준우는 전화를 끊고 고은영을 바라보았다.안지영의 위로 덕분에 은영의 상태는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힘들어했다.이렇게 큰 충격은 금방 회복될 수 없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고은영은 입술을 깨물며 속삭였다. “왜 안지영이 량천옥을 혼내주지 못하게 하는 거야?” 배준우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차분히 대답했다.“지금 그 여자는 고은지에게 맞는 유일한 골수 제공자야.”고은영은 그 말을 듣고 숨이 가빠졌다.그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량천옥이 그런 일을 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그 여자가 우리 언니한테 골수를 줄 리가 없어.”량천옥은 자신을 미워하는 마음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언제라도 다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인물이었다.그런 상황에서 고은지에게 도움을 줄 거라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배준우는 차분하게 말했다.“그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넌 신경 쓰지 마.”그의 목소리에는 묘한 신뢰와 힘이 담겨 있었다.고은
고은영은 아이의 상황을 보니 도저히 고은지를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하지만 고은영이 사흘째 병원에 오지 않자 고은지는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말았다.다음 날 아침, 물건을 가지러 돌아온 혜나는 그녀에게 말했다.“고은지 씨가 계속 당신을 보지 못하니까 온갖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그 말을 들은 고은영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배준우가 며칠 전 그녀에게 이 일에 신경 쓰지 말라고 했을 때, 고은영은 마치 감정이 사라진 사람처럼 그의 말을 따르기만 했다.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자 그녀는 깊은 자책감에 휩싸였다.그녀는 일부러 연락조차 피하며 거의 모든 일을 배준우의 사람들에게 맡겼다.그러나 고은지가 불안해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고은영의 가슴이 조여오듯 답답해졌다.“언니가 또 뭐라고 했어?”혜나는 조심스레 말했다.“희주를 물어보셨어요.”그 말을 들은 순간, 고은영은 마치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처럼 공허함을 느꼈다.사람들은 종종 아이가 위험에 처했을 때 엄마가 직감한다고 하지 않는가.고은지도 뭔가를 느낀 걸까...그녀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지금 당장 같이 가자.”고은영은 자신도 알고 있었다.언니가 병원에 입원한 이후 매일 찾아갔던 그녀가 며칠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혜나의 말처럼 고은지가 더 심한 불안을 느낄 게 뻔했다.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병원에 도착한 고은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태현과 마주쳤다.그녀는 머리가 복잡해서 별다른 생각 없이 간단히 인사만 건넨 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곧바로 고은지의 병실로 향했다.그런데 막 병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안에는 수많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사라가 그녀를 보자마자 급히 다가와 말했다.“사모님!”“무슨 일이에요?”이 광경을 본 고은영의 심장이 본능적으로 덜컥 내려앉았다.사라가 답했다.“고은지 씨가 또 피를 토하셨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고은영의 눈꺼풀이 떨렸다.그녀는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눈앞
고은영이 고희주에게 선생님을 붙여줬다는 말을 듣고 고은지의 안색이 조금은 나아진 듯 보였다.“그 선생님은 잘 적응하고 있어?”고은지가 다시 물었다.“응. 잘 적응하고 있어, 학교라는 큰 환경이 아니라서 더 잘 맞는 것 같아. 걱정하지 마.”고은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다행이야. 고희주를 잘 부탁할게.”아이는 결국 학교에 다녀야 하는 법이다.지난번 학교를 그만둔 이후로 고희주의 학업 문제는 줄곧 고은지의 큰 걱정거리였다.사실 그녀는 아이가 학령기에 접어들면 학업에 소홀할 여유가 없다고 생각해왔다.하지만 학교에서 고희주가 겪었던 상처들을 떠올리면...아이의 학업보다도 무사히 평온하게 자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너한테 너무 많은 걸 부탁했네.”고은지가 미안한 듯 말했다.사실 그녀는 마음 깊이 고은영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비록 둘 사이에는 혈연이 없었지만 그녀가 아프기 시작한 이후로 고은영이 모든 일을 도맡아 해주었기 때문이다.이제는 고희주까지 돌봐주고 있었으니 더욱 고마운 마음뿐이었다.고은영은 부드럽게 대답했다.“언니, 그런 말 하지 마.”“진심이야, 이 기간 동안 네가 곁에 없었다면 정말 어떻게 버텼을지 모르겠어.”그녀는 가족도, 의지할 곳도 없었다.지금까지도 그녀는 자신의 친부모가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했다.심지어 고희주의 아버지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고은지는 자신의 인생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고 느꼈다.하지만 이 모든 것이 그녀가 원해서 일어난 일도 아니었다.대체 그녀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세상이 이렇게 가혹하게 굴어야 했을까?이런 생각에 사로잡힐 때면 고은지의 마음은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답답해졌다.고은영이 조용히 말했다.“언니, 걱정하지 마. 내가 늘 곁에 있을 거야. 언니도 꼭 나아져야 해.”“하지만 몸이란 게... 내가 나아지고 싶다고 해서 나아지는 게 아니잖아.”고은지는 무력한 미소를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그동안 병으로 인한 고통은 그녀를
고은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리며 숨조차 고르지 못했다.조보은이나 량천옥과 같은 사람일 수도 있다고?최근에 량천옥이 어떤 사람인지 고은지는 똑똑히 목격했다. 그리고 조보은을 떠올리면 어린 시절의 끔찍한 기억들이 스쳐 갔다.그때 그녀는 정말로 조보은에게 학대당해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만약 희주의 친부가 그녀들처럼 그런 사람이라면 그건 희주에게 희망이 아니라 절망일 뿐이야.”고은영은 어떻게든 고은지가 다시 살고자 하는 희망을 품길 바라고 있었다.배준우는 현재 고은지와 량천옥의 수술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지만 그게 정말 가능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어떻게든 고은지가 무사히 수술을 받길 바랄 뿐이었다.두 사람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눴다.고은영이 자리를 뜨기 전, 고은지에게 말했다.“요즘은 병원에 희주를 데리고 오지 않았어. 지난번에 감기에 걸렸거든.”“뭐라고? 희주가 감기에 걸렸다고?”희주가 감기에 걸렸다는 말을 듣자 고은지는 즉시 긴장했다.그녀의 병도 처음에는 단순한 감기라고 생각했었다.하지만 결국 이렇게 심각한 상태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래서 지금 고은지는 감기라는 단어만 들어도 마음이 불안해졌다.고은영은 고은지가 민감하게 반응할 줄 몰랐기에 급히 말했다.“걱정하지 마, 그냥 가벼운 감기였고 이제 다 나았어. 다만 병원의 바이러스가 아이의 면역력에 해가 될까 봐 조심하는 거야.”“맞아, 희주가 병원에 오면 안 돼. 내가 전화해서 병원에 오지 말라고 해야겠어.”고은지가 고희주에게 전화를 걸겠다고 하자 고은영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언니. 굳이 전화하지 않아도 돼. 희주는 지금 아마 수업 중일 거야.”“아, 맞다. 수업 중이구나. 그럼 수업 끝나면 희주가 나한테 전화하게 할게. 내가 이야기 좀 해야겠어.”고은영은 말문이 막혔다.“사실 언니가 굳이 전화 안 해도 돼. 희주는 내가 말하면 잘 따라와.”“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네. 희주가 나 보고 싶으면 나한테 전화하게 하고 아무튼 병원에는 오지 않도록 해야 해
고은영은 멀어져 가는 나태현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결국 아무런 답도 찾지 못한 채 차에 올라탔다.이제 바로 동영그룹으로 가볼 생각이었다.현재 고은지와 고희주의 상황은 이미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고 그녀가 아무리 애를 써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이제 배준우가 대체 어떤 방법으로 량천옥을 설득해 고은지에게 골수를 기증하게 할지 직접 묻고 싶었다.막 차에 오른 순간,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고은영이 고개를 돌리자 차 밖에 서 있는 량천옥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차갑게 얼어붙은 그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해졌다.고은영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이제 량천옥 앞에서 두려워할 것도 없었다.량천옥은 그녀를 보며 입가에 조롱 섞인 미소를 지었다.“뭐야? 또 네 병든 언니 보러 가는 거야?”고은영은 눈앞에 있는 이 납치범을 바라보았다.지금 그녀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이 여자를 감옥에 집어넣는 것이었다. 하지만 량천옥이 고은지의 유일한 골수 제공자라는 현실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고란 언니 생각해서라도 조금이라도 선을 베푸는 게 좋을 거예요.”고은영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량천옥은 그 말을 듣고 비웃으며 말했다.“그 사생아도 곧 죽게 되겠지?”고은영은 말문이 막혔다.‘이년...!’량천옥이 예전에는 인과응보라는 것을 믿고 자신도 그런 대가를 치른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런 것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아까 나태현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고은영은 이미 병원으로 가는 길이었다.“정말 이해가 안 돼. 어떻게 병약한 여자 하나가 나씨 가문 도련님을 무릎 꿇리게 할 수 있지?”‘뭐라고? 이게 무슨 말이지?’고은영은 순간적으로 혼란스러워졌다. 량천옥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량천옥은 계속해서 비웃으며 말했다.“너희 자매 둘 다 정말이지 남자 홀리는 요물 같아. 하지만 넌 네 언니보다 운이 더 좋지. 지금 나태현이
고은영은 그녀의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춰 량천옥을 돌아보며 물었다.“무슨 뜻이에요!?”량천옥은 날카롭게 말했다.“배윤은 그래도 배준우의 동생이야. 그런데 네 언니 때문에 그 애가 지금 인질로 잡혀 있는 거면 그게 배준우를 난처한 상황에 빠뜨리는 게 아니면 뭐겠어?”그녀의 한마디는 마치 이 모든 사태가 고은영 때문인 것처럼 몰아붙이며 고은영을 깊은 수렁으로 끌어들이려 했다.솔직히 말해 량천옥의 약점을 잡고 역으로 이용하는 수단은 대단했다.하지만 아쉽게도 고은영이 가끔 어리숙할 때가 있다 해도 결코 바보는 아니었다.“나와 배준우가 그렇게 비난받아야 한다고요?”고은영이 차갑게 되물었다.량천옥은 더 몰아붙였다.“넌 그래도 배윤의 형수가 아니야? 만약 배윤이 인질로 잡혔다는 소식이 퍼지면 사람들이 너와 배준우를 어떻게 생각하겠어?”량천옥은 교묘하게도 자신이 고은영과 배준우에게 은혜를 베푸는 듯한 태도를 취하며 한편으로는 고은영의 자존심을 짓밟고 있었다.이 상황에서 고은영은 언니인 고은지와 조카 고희주를 구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지금 량천옥과 정면으로 맞설 때가 아니라는 것도 이해했다.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여자는 절대로 쉽게 타협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고은영이 아무리 몸을 낮춰도 량천옥은 그저 상대방의 자존심을 짓밟으며 자신의 쾌감을 채우려 할 뿐이었다.량천옥의 마음이 약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헛된 희망일 뿐이었다.고은영이 침묵하자 량천옥은 손목을 더 강하게 움켜쥐며 쐐기를 박듯 말했다.“천의와 배윤을 나에게 돌려줘. 그러면 네 언니에게 골수를 기증해 줄게, 어때?”이전에 천의만 요구하더니 이제는 조건 하나를 더 추가했다.량천옥의 강한 의지를 담은 눈빛과 마주한 고은영은 가볍게 비웃음을 지었다.이게 바로 이 여자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분명히 아들인 배윤이 납치된 상황에 마음이 무너졌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렇게 침착하게 조건을 제시하며 협상하는 심리적 강인함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이다.고
도대체 언제부터 나태현과 배준우가 이렇게 수상하게 엮였던 걸까? 그리고 언제부터 병원에서 나태현을 이렇게 자주 마주치게 되었을까? 배준우는 진청아에게 고희주의 아버지를 찾아보라고 했지만 그동안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태현이 갑자기 배윤을 잡아갔다니! 나씨 가문과 량천옥 사이에 불화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윤을 데려갈 정도는 아니지 않나? 그녀는 진씨 가문과 량천옥 문제로 마음이 복잡했던 탓에 그동안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방금 전 량천옥이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퍼즐이 맞춰졌다. 나태현이 배윤을 잡아가고 량천옥을 협박해 고은지의 수술을 받게 하려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바로, 나태현이 고희주의 아버지라는 사실이다!이 질문을 던지면서 고은영은 배준우의 얼굴을 주의 깊게 살폈다.그의 얼굴에 나타나는 사소한 변화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배준우는 그 말에 미묘하게 멈칫하더니 이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눈치챘네?”“진짜예요?”배준우가 부정하지 않자 고은영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조여 들었다.배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그래, 맞아.”“근데 왜 저한테 말하지 않았어요?”고은지 쪽에서는 계속 고희주의 친아버지를 찾았는지 물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쪽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고 고은영은 고희주의 아버지가 량천옥이나 서준호 같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걱정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그런 사람이라면 고희주의 미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절망을 안겨줄 수도 있었다.배준우는 차분히 말했다.“네가 그동안 량천옥과 진씨 가문 문제로 심란해서 말하지 않았어.”이미 머릿속이 충분히 복잡한 상황에서 더 말하면 그녀가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그래도 나한테는 말했어야죠.”고은영의 목소리에는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그녀는 최근에 마음이 복잡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신경은 고은지에게 쏟고 있었다.그리고 아직도 진씨 가문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정리가
“안지영 씨가 오면 분명히 대표님을 때릴 거예요!” ‘때린다’는 말을 진이훈은 아주 세게 강조했다. 나태웅은 다시 침묵했다. 진이훈은 그의 이런 모습을 보고 더욱 마음이 아팠다. 보스가 정말 아픈 거였다. 병이 심각해 보였고 이런 상태로 가면 안지영까지 미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자신이 아파서 안지영 씨까지 미치게 만들려고 하는 걸까?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을 한다고?’ 진이훈은 그런 생각을 하며 나태웅이 정말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아리 박사님이 이미 왔어요. 큰 도련님께서 의사와 협력해서 치료를 받으라고 하셨어요.” 나태웅은 그 말을 듣고 차가운 눈빛으로 진이훈을 노려보았다. 진이훈은 그 눈빛에 조금 겁을 먹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맞을 위험을 감수하며 말했다. “몸이 중요하잖아요. 그렇죠?” 진이훈도 답답했다. 나태웅 옆에서 열심히 일만 했을 뿐인데 결국 나태웅과 함께 병원에서 그의 병수발을 들고 있다니. 나태웅은 차갑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꺼져!” 그는 마음속으로 더 괴로워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태웅이 얼굴이 더 안 좋아 보이는 걸 보며 진이훈은 다시 물었다. “그럼 안지영 씨가 여전히 안 오면 어떻게 하죠?” “그럼 유골함을 열어 그녀에게 보여주면 돼.” ‘유골함을 열다니! 안지영 씨에게 유골함을 보여준다고?’ 나태웅이 그런 말을 하자 진이훈은 급히 인터넷에서 유골함을 열어본 사진을 찾았다. 그가 캠퍼스를 떠나 처음 일했을 때는 열정이 넘쳤지만 지금은 이런 유치한 일을 해야 하다니. 안지영을 빨리 오게 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는 서둘러 그 사진을 안지영에게 보냈다. 하지만 메시지를 보낼 수 없다고 떴을 때 그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 안지영 씨가 저를 차단했어요. 이제 귀찮아서 오지 않을 거예요.” 진이훈은 힘없이 말했다. 나태웅은 책을 넘기던 손이 잠시 멈췄고 그의 눈빛에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
안열은 처음엔 초조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지영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며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안지영은 계속해서 말했다. “나태웅이 말하길 제가 아침에 음식을 가져가지 않으면 화장 증명서를 받게 될 거라던데 지금 아침 시간이 겨우 한 시간 정도 지났잖아요?” ‘한 시간 만에 죽었다고? 화장 증명서까지 나왔다고?’ 안지영은 결국 상황을 완전히 이해했다. ‘이 나태웅, 진짜 못돼 먹었네. 이런 상황에서도 날 도덕적으로 옭아매려고 하다니.’ 안지영은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안열은 뒤늦게 납득하며 말했다. “맞아요! 그럼 결국 장난친 거잖아요?” “화장 증명서가 그렇게 빨리 나올 리가 없어요.” “설령 진짜 죽었다고 해도 병원에서 절차를 다 마쳐야 화장터로 갈 수 있잖아요.” 안지영은 얼굴이 굳었다. 조금 전까지 충격에 휩싸여 허둥대던 그녀는 이제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지금 바로 나태웅을 정말 죽여버려도 돼요?” 안열도 머리를 쥐어뜯으며 말했다. “나태웅 이 자식, 미친 거 아니에요?” 안지영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네, 이미 정신과 의사도 예약했어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나태웅이 진심으로 죽으려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안지영은 안열의 손목을 잡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근데 아까 왜 그렇게 초조해했죠?” “아니에요, 잘못 보셨어요.” ‘그걸 내가 잘못 볼 리가 있냐고?’ 아까 안열이 보였던 반응은 분명 초조함이었다. 안열은 더 이상 안지영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나태웅을 찾아가 따질 생각뿐이었다. 안열은 안지영의 손목을 뿌리치며 말했다. “회의하러 가세요.” “그럼 안열 씨는요?” “저는 마음을 좀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해요!” 안지영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마음을 진정시킨다니, 그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아?’ 그러나 지금 나태웅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이미 너무 지쳤다. 회의실로 올라간 안지영은 이제 겨우
‘진짜 너무 악랄해.’ 진이훈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우리 보스가 안지영 씨에게 얼마나 진심인데 그 마음을 완전히 짓밟아버렸어.’ 그는 나태웅의 손을 꼭 붙잡으며 혹시라도 그가 창문에서 뛰어내릴까 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이훈의 끝없는 잔소리에 나태웅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결국 그는 손을 확 뿌리쳤다. 그러나 진이훈은 더 꽉 붙들며 간절하게 말했다. “우린 안지영 씨 생각하지 말자고요, 네?” 심지어 말 끝에 ‘말 잘 들어요’같은 말을 덧붙이고 싶을 정도였다. 나태웅의 눈빛이 점점 더 위험해지더니 낮게 물었다. “우리?” ‘뭐지?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했지?’ 잠시 멍해 있다가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 아니요! 우리가 아니라 대표님이 안지영 씨를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진이훈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자에게 받은 상처가 얼마나 깊으면 말조차도 안지영 씨와 관련되면 불편한 거야?’ “손 놔.” 진이훈은 여전히 손을 놓지 않으며 강하게 말했다. “안지영 씨는 별로예요. 게다가 지금은 장선명 씨와 이미 사귄다는 소문도 있잖아요. 그런 여자를 정말 원하시겠어요?” “내가 손 놓으라고 했지.” 나태웅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힘을 주어 손을 뿌리쳤다. 그의 눈빛은 마치 진이훈을 잡아먹을 듯이 날카로웠다. 진이훈은 나태웅의 그 눈빛에 움찔하며 한발 물러섰다. 나태웅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시 한번 안지영을 헐뜯어봐.” ‘이제 안지영 씨에 대해 나쁜 말도 못 하게 해?’ 그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정말 이 여자한테 얼마나 깊이 빠진 거야... 병이 이렇게 심한데도 안지영 씨를 지키려 하다니.’ 한편, 안지영은 진이훈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한 뒤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곧바로 메시지 창에서 영상 통화를 걸었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계속 시도했지만 나태웅 쪽에서 받지 않았다. 그녀는 점점 숨이 가빠지며 제대로 숨도 못 쉴 지경이 되었다. 옆에서 지켜
안지영이 여전히 나태웅을 미친놈, 변태라고 욕하는 걸 보며 장선명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고 물었다. “그럼 돈을 나태웅에게 주면 이 일은 끝나는 거예요?” 안지영은 병아리가 모이를 쪼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아마도요?” 만약 이걸로도 끝나지 않는다면 정말 나태웅의 머리를 깨서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하고 싶을 정도였다. 장선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요, 그럼 이건 제가 처리할게요.” “뭘 하려고요?” 안지영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흥분한 상태였지만 장선명이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말하자 즉시 조용해졌다. ‘선명 씨가 처리한다고? 항상 유흥가를 드나들던 사람이 무슨 방법으로 처리하려는 거지?’ 그녀는 이 순간 깨달았다. 장선명과 나태웅은 원래 완전히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이 둘이 얽히게 되었고 나태웅은 정신적으로 예민하고 집요한 수법을 쓰는 반면 장선명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왠지 모르게 건달 같은 느낌이 있었다. ‘건달 대 신경질적인 사람? 이 조합은 대체 어떤 장면을 만들어낼까?’ 그녀가 걱정하는 것도 모른 채 장선명은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뭘 어떻게 하겠어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그게 가장 좋은 거죠.” ‘아니, 뭐야 이 사람...’ 다음 날 아침. 나태웅은 병원에서 안지영이 만두와 인절미를 들고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고 대신 그의 은행 계좌에는 무려 600억이 입금되었다. 하지만 돈을 보낸 계좌는 안지영이 아니라 장선명의 것이었다. 이 돈을 확인한 나태웅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까맣게 변했다. 그 순간, 아침 식사를 들고 들어오던 진이훈이 그의 표정을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나 대표님, 진정하세요!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만 하시면 돼요!” 원래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는데 진이훈의 그 말에 더 화가 치밀었다. 이를 악물고 물었다. “안지영은 안 왔나?” “네, 안 왔어요. 왜요? 안지영 씨가 오늘 온다고 했나
‘손자가 한심하다고 할아버지가 나서서 사람까지 뺏으려 한다고? 이게 과연 체면이 서는 행동인가?’ 이 생각에 장선명은 점점 더 화가 치밀었다. 안지영이 들어왔을 때 그는 마침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장선명은 전화기 너머로 말했다. “네, 나태범 쪽에서 지영이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어요. 그때가 되면 할아버지가 나서 주셔야 해요!” 평소에 절대 어른들을 끌어들이지 않던 장선명은 배준우의 말을 듣고는 즉각 할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장선명의 할아버지는 안지영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으므로 이 말을 듣고는 의아한 듯 물었다. “나씨 가문 둘째 녀석이 정말로 지영이 때문에 자살 소동을 벌였단 말이냐?” “그럼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건 제 잘못이 아니에요. 제가 먼저 지영이와 연애를 시작했거든요.” “야, 이놈아. 네가 언제 이렇게 도덕 따지는 놈이었냐?” 심지어 먼저 사귀었다고 설명까지 덧붙이다니. 그의 할아버지조차 손자의 변명이 웃길 따름이었다. “아무튼요. 상황을 미리 알려드렸으니 종대 아저씨에게 나씨 가문 쪽 상황을 살펴보라고 해 주세요.” “알겠다!” 한편, 옆에서 이 전화를 듣고 있던 안지영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대충 상황을 이해한 그녀는 황당함을 느꼈다. 결국 나태범이 나태웅 때문에 자신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얘기 아닌가? ‘이 가족 제정신인가? 나태웅이 나를 협박했던 것도 모자라 이제 할아버지까지 협박에 나선다고? 힘으로 어린 사람을 억누르겠다는 건가? 내가 보호받을 아버지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녀는 잠시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만약 안진섭이 아직 살아 있었다면 이 상황에서도 안지영을 지켜줄 수 있었을까?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안열이 말했듯 그녀의 아버지는 너무 착하고 온화했으니까. 장선명이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리자 안지영이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가가 물었다. “언제 왔어요? 다 들은 거예요?” 안지영은 화난 얼굴로 말했다.
배준우는 조용히 장선명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 그가 한 말은 생생하게 상황을 묘사했지만 어딘가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나태범이 화가 나서 이 일에 개입한다면 장선명은 진짜 골치 아픈 문제를 떠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장선명이 더 기막힌 소리를 했다. “진짜 그렇게 된다면 나도 우리 집 어른을 불러야지!” 마치 누구네 집에만 어른이 있는 건 아니라는 태도였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그의 얼굴이 단번에 어두워졌다. 장선명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진지하게 말하는 거예요. 저도 할아버지를 부르죠.” 나태웅이 할아버지를 부르면 자기는 할아버지를 불러 대결 구도를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었다. 배준우는 고개를 감싸 쥐며 말했다. “너 아직도 이 상황이 충분히 복잡하지 않다고 생각하니?” 장선명의 할아버지가 어떤 인물인지 배준우는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도 이 문제에 개입하게 된다면 이 일은 완전히 우스갯소리가 되고 말 것이다. 게다가 그런 소동은 나태웅이 자살 소동을 벌였던 것보다도 훨씬 더 큰 파장을 일으킬 게 뻔했다. “그쪽이 먼저 일을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 나랑 지영이는 곧 결혼할 사이인데요.”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 배준우는 다시금 이 일이 얼마나 촉박한 상황인지 깨달았다. 장선명과 안지영의 결혼식 날짜는 얼마 남지 않았었다. 하지만 나태웅 쪽 상황을 보면 그 결혼식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이미 그는 이 일로 정신적 문제가 생겼고 만약 결혼식을 본다면 그의 상태는 더 나빠질 게 뻔했다. 배준우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참 고민하던 그는 결국 조심스럽게 말했다. “결혼식 날짜를 조금만 미룰 수는 없겠니?” 장선명은 바로 반발하며 말했다. “왜 미뤄야 하죠? 형님, 설마...” “나태웅은 지금 심리 치료를 받고 있어. 네가 결혼하는 걸 보면 어떤 일이 생길 것 같니?” 장선명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형님, 성인군자라도 되려는 거예요?” “뭐라고?” 배준우의 얼굴이 단번에 검게 변했다. “아니
스스로 병이 있다는 걸 깨달아야 의사를 대면할 때 거부 반응이 덜하다. 배준우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 너도 참...” 원래는 나태웅에게 몇 마디 더 하려 했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건 고은영의 얼굴이었다. 결국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후로도 한동안 나태웅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라고는 했지만 실상은 나태웅을 안심시키려는 배준우의 독백에 가까웠다. 나태웅은 무기력해 보였다. 그가 이렇게까지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건 정말 모든 걸 체념한 것인지 아니면 병이 심각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배준우는 병원을 떠났다. 병원에서 나온 배준우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먼저 장선명을 찾아갔다. 장선명은 배준우가 근무 시간에 자신을 찾아온 걸 보고 놀라며 말했다. “형, 웬일이에요? 근무를 빼먹다니!” 배준우가 얼마나 일에 철저한지 강성은 물론이고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근무 시간 중에는 그 누구도 그를 밖으로 불러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근무 중임에도 장선명을 찾아온 것이다. 배준우는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말이 많네. 중요한 일이 있어서 왔어.” 장선명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사업 관련된 일이에요?” 중요한 일이라면 사업 관련 일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배준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나태웅 때문이야. 너 알고 있어? 걔 죽을 뻔했어.” 이 말에 장선명은 얼굴을 찌푸렸다. “형도 소문을 믿는 거예요?” 사실 나태웅의 손목 부상은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나태웅도 자신의 부상이 안지영 때문이라고 직접 언급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강성에서는 이 일이 마치 사랑에 상처받아 생긴 일이라는 소문으로 부풀려졌다. 그리고 그 소문은 이제 배준우의 입에서 더 과장된 형태로 나왔다. 죽을 뻔했다는 말은 거의 나태웅이 안지영과 장선명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의미로 들렸다. 장선명은 입꼬리를 실룩이며 말했다. “형이 이런 일까지 신경 쓰다니 정말 뜻밖이네요
진정훈이 말했듯이 고희주의 일에서 가장 맞서기 어려운 사람은 량천옥이였다. 점심 무렵, 그녀는 직접 고은지를 위해 음식을 준비했다. 사라는 여전히 그녀에게 차가운 태도를 보였지만 량천옥은 고개를 숙이며 억지로라도 사라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고은지가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량천옥은 여전히 고은지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뒤에서 묵묵히 도울 뿐이었다. 딸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량일에게 쌓였던 불만과 분노를 모두 발산한 후로는 병실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사라를 마주하고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라는 말없이 보온병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말 한마디 없이 량천옥을 아예 무시하듯 행동했다. 사라의 그런 차가운 태도에 량천옥의 마음은 쓰라렸지만 그녀는 뻔뻔하게 카드 한 장을 건넸다. “부탁이에요, 제 딸을 돌봐줄 때 조금 더 신경 써주세요.” 사라는 그 카드를 다시 량천옥에게 돌려주며 단호하게 말했다. “량 여사님, 이런 행동은 당신을 더욱 비참해 보이게 합니다.” 사라의 말은 직설적이었고 량천옥은 처음으로 자신이 사용한 방식이 얼마나 천박하게 여겨질 수 있는지를 깨달았다. 예전에는 그녀가 배씨 부인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기에 누구도 그녀의 방식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라의 날카로운 말에 량천옥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굴욕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화를 내지 않았다. 고은지를 세심하게 돌봐주는 이들에게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량천옥이 말하기도 전에 사라는 이미 보온병을 들고 병실로 들어갔다. 고은지는 잠들어 있다가 인기척에 살짝 눈을 떴다. 사라는 다가가 그녀를 부축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일어나셨어요? 우리 뭐라도 좀 먹을까요?” 고은지는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은영이가 가져다준 거예요? 은영이는 어디 있나요?” 수술 후의 회복은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누가 알았겠는가. 강성의 살아있는 염라대왕이라 불리던 배준우가 사적인 자리에서, 특히 아내 앞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굴 줄이야. 고은영은 황급히 그의 허리를 살짝 꼬집었다. 그제야 고통을 느낀 배준우가 마지못해 그녀를 놓아주며 화난 눈빛으로 진정훈을 노려보았다. “대체 몇 그릇째 먹는 거예요?” 배준우의 말투에는 분명한 불만이 담겨 있었다. 진정훈은 그런 배준우를 보고도 태연하게 말했다. “걱정 마요. 생활비 냈으니까 밥 공짜로 먹는 거 아니에요.” 말투는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이 말을 들은 배준우는 진정으로 청하는 건 쉬워도 돌려보내는 건 어렵다는 게 어떤 건지 깨달았다. 진정훈이 이 집에 들어온 이후 지금까지 떠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간접적으로 신호를 주어도 그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척했다. 배준우는 고은영을 보며 말했다. “나 병원에 좀 다녀올 건데 너도 같이 갈래?” 그러자 진정훈이 끼어들었다. “아침에 동생이 병원에 갔다며. 우리 은영이 고생시키려는 거야?” ‘이 눈치 없는 놈 같으니라고!’ 그는 진정훈이 있는 게 너무 불편했다. 고은영과 단둘이 식사라도 하려고 데리고 나가고 싶었지만 진정훈은 그런 눈치를 전혀 못 챘다. 오히려 진정훈은 자신이 민폐라는 사실을 모른 채 고은영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은영아, 걱정하지 마. 량천옥은 이제 누나를 어떻게 하지도 못할 거야. 오히려 애지중지할걸?” ‘누나라니, 이 사람 언니보다 어리지 않잖아?’ 사실 지금까지 고은영은 진씨 가문 사람들에 대해 거의 모르는 상태였다. 특히 나이나 다른 배경에 대해서는 아예 몰랐다. 하지만 진정훈은 고은영을 진심으로 아끼고 있었다. 최근에 고은영이 언니인 고은지를 위해 동분서주하며 정말 고생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의 일은 배준우가 처리했지만 마음의 짐만큼은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었다. 고은지가 그녀에게는 매우 소중한 존재였다. 병상에 누워있는 고은지를 보며 힘들어했던 시간은 고은영에게 너무나도 고통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