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영은 멀어져 가는 나태현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결국 아무런 답도 찾지 못한 채 차에 올라탔다.이제 바로 동영그룹으로 가볼 생각이었다.현재 고은지와 고희주의 상황은 이미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고 그녀가 아무리 애를 써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이제 배준우가 대체 어떤 방법으로 량천옥을 설득해 고은지에게 골수를 기증하게 할지 직접 묻고 싶었다.막 차에 오른 순간,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고은영이 고개를 돌리자 차 밖에 서 있는 량천옥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차갑게 얼어붙은 그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해졌다.고은영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이제 량천옥 앞에서 두려워할 것도 없었다.량천옥은 그녀를 보며 입가에 조롱 섞인 미소를 지었다.“뭐야? 또 네 병든 언니 보러 가는 거야?”고은영은 눈앞에 있는 이 납치범을 바라보았다.지금 그녀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이 여자를 감옥에 집어넣는 것이었다. 하지만 량천옥이 고은지의 유일한 골수 제공자라는 현실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고란 언니 생각해서라도 조금이라도 선을 베푸는 게 좋을 거예요.”고은영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량천옥은 그 말을 듣고 비웃으며 말했다.“그 사생아도 곧 죽게 되겠지?”고은영은 말문이 막혔다.‘이년...!’량천옥이 예전에는 인과응보라는 것을 믿고 자신도 그런 대가를 치른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런 것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아까 나태현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고은영은 이미 병원으로 가는 길이었다.“정말 이해가 안 돼. 어떻게 병약한 여자 하나가 나씨 가문 도련님을 무릎 꿇리게 할 수 있지?”‘뭐라고? 이게 무슨 말이지?’고은영은 순간적으로 혼란스러워졌다. 량천옥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량천옥은 계속해서 비웃으며 말했다.“너희 자매 둘 다 정말이지 남자 홀리는 요물 같아. 하지만 넌 네 언니보다 운이 더 좋지. 지금 나태현이
고은영은 그녀의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춰 량천옥을 돌아보며 물었다.“무슨 뜻이에요!?”량천옥은 날카롭게 말했다.“배윤은 그래도 배준우의 동생이야. 그런데 네 언니 때문에 그 애가 지금 인질로 잡혀 있는 거면 그게 배준우를 난처한 상황에 빠뜨리는 게 아니면 뭐겠어?”그녀의 한마디는 마치 이 모든 사태가 고은영 때문인 것처럼 몰아붙이며 고은영을 깊은 수렁으로 끌어들이려 했다.솔직히 말해 량천옥의 약점을 잡고 역으로 이용하는 수단은 대단했다.하지만 아쉽게도 고은영이 가끔 어리숙할 때가 있다 해도 결코 바보는 아니었다.“나와 배준우가 그렇게 비난받아야 한다고요?”고은영이 차갑게 되물었다.량천옥은 더 몰아붙였다.“넌 그래도 배윤의 형수가 아니야? 만약 배윤이 인질로 잡혔다는 소식이 퍼지면 사람들이 너와 배준우를 어떻게 생각하겠어?”량천옥은 교묘하게도 자신이 고은영과 배준우에게 은혜를 베푸는 듯한 태도를 취하며 한편으로는 고은영의 자존심을 짓밟고 있었다.이 상황에서 고은영은 언니인 고은지와 조카 고희주를 구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지금 량천옥과 정면으로 맞설 때가 아니라는 것도 이해했다.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여자는 절대로 쉽게 타협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고은영이 아무리 몸을 낮춰도 량천옥은 그저 상대방의 자존심을 짓밟으며 자신의 쾌감을 채우려 할 뿐이었다.량천옥의 마음이 약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헛된 희망일 뿐이었다.고은영이 침묵하자 량천옥은 손목을 더 강하게 움켜쥐며 쐐기를 박듯 말했다.“천의와 배윤을 나에게 돌려줘. 그러면 네 언니에게 골수를 기증해 줄게, 어때?”이전에 천의만 요구하더니 이제는 조건 하나를 더 추가했다.량천옥의 강한 의지를 담은 눈빛과 마주한 고은영은 가볍게 비웃음을 지었다.이게 바로 이 여자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분명히 아들인 배윤이 납치된 상황에 마음이 무너졌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렇게 침착하게 조건을 제시하며 협상하는 심리적 강인함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이다.고
도대체 언제부터 나태현과 배준우가 이렇게 수상하게 엮였던 걸까? 그리고 언제부터 병원에서 나태현을 이렇게 자주 마주치게 되었을까? 배준우는 진청아에게 고희주의 아버지를 찾아보라고 했지만 그동안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태현이 갑자기 배윤을 잡아갔다니! 나씨 가문과 량천옥 사이에 불화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윤을 데려갈 정도는 아니지 않나? 그녀는 진씨 가문과 량천옥 문제로 마음이 복잡했던 탓에 그동안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방금 전 량천옥이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퍼즐이 맞춰졌다. 나태현이 배윤을 잡아가고 량천옥을 협박해 고은지의 수술을 받게 하려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바로, 나태현이 고희주의 아버지라는 사실이다!이 질문을 던지면서 고은영은 배준우의 얼굴을 주의 깊게 살폈다.그의 얼굴에 나타나는 사소한 변화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배준우는 그 말에 미묘하게 멈칫하더니 이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눈치챘네?”“진짜예요?”배준우가 부정하지 않자 고은영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조여 들었다.배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그래, 맞아.”“근데 왜 저한테 말하지 않았어요?”고은지 쪽에서는 계속 고희주의 친아버지를 찾았는지 물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쪽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고 고은영은 고희주의 아버지가 량천옥이나 서준호 같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걱정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그런 사람이라면 고희주의 미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절망을 안겨줄 수도 있었다.배준우는 차분히 말했다.“네가 그동안 량천옥과 진씨 가문 문제로 심란해서 말하지 않았어.”이미 머릿속이 충분히 복잡한 상황에서 더 말하면 그녀가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그래도 나한테는 말했어야죠.”고은영의 목소리에는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그녀는 최근에 마음이 복잡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신경은 고은지에게 쏟고 있었다.그리고 아직도 진씨 가문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정리가
고은영의 세계가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어떤 일이 드러난다는 것은 곧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편 병원 옥상에서 량천옥과 나태현이 마주 보고 서 있다. 나태현은 한 손을 양복바지 주머니에 넣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냉정하게 입을 뗐다. “당신에게 생각할 시간을 많이 주지 않겠어요. 내일부터 저에게 확실한 답이 없으면 배윤의 신체 일부를 받을 줄 알아요.” “무슨 일부?” 그 말을 들은 량천옥의 얼굴은 더 차갑게 식어갔다. 나태현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 “뭐 받고 싶어요? 제가 배윤의 옷을 벗겨서 보내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죠?” 무엇일까? 그것은 그녀의 마음에 불안을 안겨줄 무언가일 것이다. 이미 숨이 턱 막혀 있던 량천옥은 나태현의 비꼬는 어투를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의 얼굴빛은 점점 창백해졌다. “너 병약한 고아 하나 때문에 배 씨 가문을 전부 적으로 돌릴 작정이야?” “지금 배 씨 가문을 적으로 돌리고 있는 건 당신이에요!” “나는 단지 골수 기증을 거부한 것뿐인데 왜 내가 배 씨 가문과 적대하는 거지?” 량천옥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이미 나태현이 자신을 협박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배윤을 데려간 순간부터 그는 그녀에게 협박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도 순진하지 않았다. 나태현이 배윤의 옷이나 손목시계를 보내줄 거라 믿을 리 없었다. 지금의 나태현은 완전히 미쳐 있었고 미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왜 그 여자는 고은지의 유일한 기증자를 처리했던 걸까?’ 그것은 아이가 더 이상 그녀 손에 없었고 골수는 그녀가 천의를 되찾기 위한 비장의 카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나태현이 배윤을 이용해 그녀를 협박할 줄이야. 정말 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려다 참새에게 덮쳐지는 격이군!젊은 시절, 그녀가 배항준과 결혼했을 때 이들은 한낱 풋내기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도저히 맞설 수 없는 강력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쓸데없는 말은 하
이런 천륜 앞에서 그에게는 다른 일이나 사람이 자리할 공간이 없었다. “김 여사는 참 복도 많으시네요.” 량천옥이 비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웃음이 가득했던 장면이 한순간에 멈췄다. 집사는 량천옥의 뒤에서 서서 그의 얼굴을 보며 후회의 표정을 지었다. 아까 그녀가 이곳의 여주인이었던 것을 잊고 막지 못했던 자신을 자책하고 있었다. 바로 어제 배항준이 량천옥이 다시는 이곳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말했었기 때문이다. 배항준은 량천옥이 나타나자 얼굴이 바로 차갑게 굳었고 김다정의 얼굴에도 당황한 기색이 스며들어 있었다. 량천옥은 둘의 변한 표정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제가 배윤을 낳았을 때 당신은 바쁘다고 집에 얼굴도 비추지 않았잖아요. 이제 와서야 가족의 기쁨을 느낄 줄 안다니. 참 다행이네요.” 그녀가 배윤을 낳았을 때 배항준은 최고의 영양사와 육아 전문가를 불러 모아 그녀와 아이를 돌보게 했다. 그때 그녀는 배항준이 자신에게 정말 잘해준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보니 그가 직접 돌봐주는 것이 진정으로 특별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란 집에 머무르지 않는 게 아니라 집에 있는 여자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었다. 한때 그녀는 유청이 자신이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장면을 보니 예전에 자기가 빼앗은 것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량천옥은 문득 서글퍼졌다. 배 씨 가문에서 모든 계략을 다 써봤지만 결국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냥 평범한 한 사람도 놓쳤다는 생각에 자신이 참 초라하게 느껴졌다. 반면 김다정은 쉽게 모든 것을 얻은 셈이었다. 배항준은 아이를 김다정에게 안기며 말했다. “아이가 있으니 위층으로 올라가게.” “아, 네!” 김다정은 다소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에 그녀는 배항준 곁에서 공개되지 않은 존재였고 지금은 정식으로 이름을 얻었지만 오랜 세월 이곳의 여주인으로 지냈던 량천옥 앞에서는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김다정은 아이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이제
그런 차가운 시선이 량천옥을 더욱 숨 막히게 했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윤이가 나태현에게 잡혀갔어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이 순간 배항준이 모르고 있었다고만 해준다면 조금은 위로가 될 것 같았다. 모르고 있었으니까 그랬겠지...! 하지만 그의 모든 마음이 김다정의 아이에게만 쏠려 있는 모습을 보니 량천옥의 마음은 미칠 듯이 아파졌다. 자신에게 아무리 무정하다 해도 어떻게 윤이를 마음에 두지 않을 수 있을까? 윤이 역시 그의 아들 아닌가! 배항준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멍하더니 곧바로 물었다. “도대체 왜 그런 거지?” 나 씨 가문과 배 씨 가문은 몇 년간 다소 마찰이 있었지만 큰 갈등은 없었다. 특히 나태웅과 배준우가 좋은 관계를 유지해온 덕에 많은 오해가 해소된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그래서 이걸 몰랐단 말이에요?” 량천옥은 비꼬듯 말했다. “당신 눈엔 이제 김다정의 아이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군요.” 배항준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량천옥은 그의 어두운 눈빛을 느끼며 상황의 전말을 모두 털어놓았다. 윤이 또한 그의 아들이기에 자신 혼자만 애쓰고 싶지 않았다. 배항준이 나 씨 가문에 가서 윤이를 돌려달라고 하면 나 씨 가문도 거부할 수 없을 터였다. 그렇지 않다면 두 가문은 진정으로 적대 관계에 돌입할 것이다! 배항준은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더욱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네 말은 나태현이 고은영의 언니 고은지를 마음에 품고 있고 네 골수와 고은지의 골수가 일치한다는 거지?” “맞아요!” 량천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항준은 다시 물었다. “그리고 나태현이 윤이를 납치한 이유는 네가 고은지에게 골수를 기증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거고?” “그래요!” 배항준의 날카로운 사고가 상황을 빠르게 이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량천옥의 몇 마디 말만으로 배항준은 사건의 내막을 완벽하게 정리했다. 배항준은 말했다. “골수를 기증하면 해결될 일인데 왜 거절한 거지?” 량천옥은 말없이 그를
이 여자는 그동안 자신이 모든 걸 완벽하게 해냈다고 생각하며 자만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매번 그녀가 문제를 일으켜 감당하지 못하게 되면 결국 그가 나서서 수습하는 일이 반복되었을 뿐이었다. ‘이 여자는 정말로 자기 힘만으로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지금 배 씨 가문도 자신도 없는 그 여자가 과연 무슨 수단이 남았단 말인가?’ “제가 이번에 무슨 문제를 일으켰든 간에 배윤은 당신의 아들이고 그가 나태현에게 끌려간 것도 사실이에요. 당신이 상관할 거예요 아니면 그냥 모른 척할 거예요?” “배윤의 일은 당연히 내가 상관해야겠지. 하지만 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어.” 배항준의 차가운 대답에 량천옥은 이전에 없던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그래도 수년간 부부로 지내온 사이인데 이렇게 무심하게 관여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다니, 너무도 차갑게 느껴졌다. “이건 너와 그들 사이의 문제일 뿐이야. 윤이도 네 탓으로 끌려간 거니까 네가 이 일을 잘 해결하길 바란다. 알겠지?” 량천옥은 말없이 배항준을 바라보았다. 배항준이 자신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이마저도 모른 척할 정도로 냉정했다. 이 집을 떠날 때의 여유와 자신감이 지금의 무력감과 절망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배항준 씨, 정말 대단하네요. 아주 대단해요.” ‘아이가 생기고 나서 다른 건 다 잊은 거예요? 아니면 저과 유청이 당신의 진정한 마음을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리 아이를 낳아도 관심이 없었던 거예요?’ 량천옥은 문득 자신이 너무도 비참하게 느껴졌다. 유청이 배항준의 장남을 낳았지만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아들 배준우는 배 씨 가문 전체의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김다정, 그 여자를 배항준이 자신의 노력으로 철저히 감췄던 것은 바로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그녀가 배항준의 마음속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어 낳은 아들은 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하지만 자신과 그녀가 낳은 배윤
김다정은 말을 잇지 못했고 량천옥은 비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네가 뭘 안다고!” 말을 마친 그녀는 발걸음을 돌려 떠났다. 여전히 예전처럼 꿋꿋하게 더할 나위 없이 날카롭고 강렬한 뒷모습이었다. 오늘 이곳에서 받은 냉정함을 그녀는 마음에 새겼다. ‘배항준, 네가 나에게 무정하다면 나도 너에게 의리를 지킬 이유가 없겠지...' 량천옥은 배 씨 가문을 떠나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연이어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모두 배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나태현과 얽혀 있어서 많은 이들이 괜히 엮이기를 꺼려 했다. 실망만 남긴 몇 통의 전화 후 그녀는 차분히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량일이 그녀를 보며 물었다. “어디 가는 거야?” 량천옥은 담담히 대답했다. “나 씨 가문에 다녀올 거예요.” 이번에는 배 씨 가문에서의 분노와 절규 대신 차갑게 식어버린 어조였다. 오늘 그녀가 받은 냉담함과 절망감이 얼마나 컸는지 엿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배항준이 자신의 아들마저 돌보지 않다니, 그는 정말 너무도 무정했다. 량일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굳어졌다. “배항준이 자신의 아들도 안 돌본다고?” “아들?” 량천옥은 차갑게 웃었다. “배항준 씨에게는 아들이 넘쳐나잖아요.” 그 웃음에는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 량일은 한동안 말이 없었지만 가슴속에는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이런 게 바로 예전부터 내가 권했던 결혼 상대인가? 이렇게나 냉혹함이 극에 달한 재벌가란 말인가?’ 량일이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나 씨 가문에 가서 누구를 만날 생각이야?” “지금 윤이가 나태현의 손에 있어요...” 말을 잇지 못한 채 그녀는 분노로 이를 악물었다. 나태현은 정말 미친 게 틀림없다. 겨우 그 병약한 고은지를 위해 자신의 아들까지 인질로 삼다니! 나태현의 이런 행동을 나 씨 가문의 나태범은 알고 있는 걸까? 상황이 이렇게 되자 주변 사람들은 나태현과 관련된 일이라면 무조건 발을 빼려 했고 그녀가
“안지영 씨가 오면 분명히 대표님을 때릴 거예요!” ‘때린다’는 말을 진이훈은 아주 세게 강조했다. 나태웅은 다시 침묵했다. 진이훈은 그의 이런 모습을 보고 더욱 마음이 아팠다. 보스가 정말 아픈 거였다. 병이 심각해 보였고 이런 상태로 가면 안지영까지 미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자신이 아파서 안지영 씨까지 미치게 만들려고 하는 걸까?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을 한다고?’ 진이훈은 그런 생각을 하며 나태웅이 정말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아리 박사님이 이미 왔어요. 큰 도련님께서 의사와 협력해서 치료를 받으라고 하셨어요.” 나태웅은 그 말을 듣고 차가운 눈빛으로 진이훈을 노려보았다. 진이훈은 그 눈빛에 조금 겁을 먹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맞을 위험을 감수하며 말했다. “몸이 중요하잖아요. 그렇죠?” 진이훈도 답답했다. 나태웅 옆에서 열심히 일만 했을 뿐인데 결국 나태웅과 함께 병원에서 그의 병수발을 들고 있다니. 나태웅은 차갑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꺼져!” 그는 마음속으로 더 괴로워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태웅이 얼굴이 더 안 좋아 보이는 걸 보며 진이훈은 다시 물었다. “그럼 안지영 씨가 여전히 안 오면 어떻게 하죠?” “그럼 유골함을 열어 그녀에게 보여주면 돼.” ‘유골함을 열다니! 안지영 씨에게 유골함을 보여준다고?’ 나태웅이 그런 말을 하자 진이훈은 급히 인터넷에서 유골함을 열어본 사진을 찾았다. 그가 캠퍼스를 떠나 처음 일했을 때는 열정이 넘쳤지만 지금은 이런 유치한 일을 해야 하다니. 안지영을 빨리 오게 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는 서둘러 그 사진을 안지영에게 보냈다. 하지만 메시지를 보낼 수 없다고 떴을 때 그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 안지영 씨가 저를 차단했어요. 이제 귀찮아서 오지 않을 거예요.” 진이훈은 힘없이 말했다. 나태웅은 책을 넘기던 손이 잠시 멈췄고 그의 눈빛에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
안열은 처음엔 초조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지영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며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안지영은 계속해서 말했다. “나태웅이 말하길 제가 아침에 음식을 가져가지 않으면 화장 증명서를 받게 될 거라던데 지금 아침 시간이 겨우 한 시간 정도 지났잖아요?” ‘한 시간 만에 죽었다고? 화장 증명서까지 나왔다고?’ 안지영은 결국 상황을 완전히 이해했다. ‘이 나태웅, 진짜 못돼 먹었네. 이런 상황에서도 날 도덕적으로 옭아매려고 하다니.’ 안지영은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안열은 뒤늦게 납득하며 말했다. “맞아요! 그럼 결국 장난친 거잖아요?” “화장 증명서가 그렇게 빨리 나올 리가 없어요.” “설령 진짜 죽었다고 해도 병원에서 절차를 다 마쳐야 화장터로 갈 수 있잖아요.” 안지영은 얼굴이 굳었다. 조금 전까지 충격에 휩싸여 허둥대던 그녀는 이제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지금 바로 나태웅을 정말 죽여버려도 돼요?” 안열도 머리를 쥐어뜯으며 말했다. “나태웅 이 자식, 미친 거 아니에요?” 안지영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네, 이미 정신과 의사도 예약했어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나태웅이 진심으로 죽으려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안지영은 안열의 손목을 잡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근데 아까 왜 그렇게 초조해했죠?” “아니에요, 잘못 보셨어요.” ‘그걸 내가 잘못 볼 리가 있냐고?’ 아까 안열이 보였던 반응은 분명 초조함이었다. 안열은 더 이상 안지영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나태웅을 찾아가 따질 생각뿐이었다. 안열은 안지영의 손목을 뿌리치며 말했다. “회의하러 가세요.” “그럼 안열 씨는요?” “저는 마음을 좀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해요!” 안지영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마음을 진정시킨다니, 그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아?’ 그러나 지금 나태웅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이미 너무 지쳤다. 회의실로 올라간 안지영은 이제 겨우
‘진짜 너무 악랄해.’ 진이훈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우리 보스가 안지영 씨에게 얼마나 진심인데 그 마음을 완전히 짓밟아버렸어.’ 그는 나태웅의 손을 꼭 붙잡으며 혹시라도 그가 창문에서 뛰어내릴까 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이훈의 끝없는 잔소리에 나태웅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결국 그는 손을 확 뿌리쳤다. 그러나 진이훈은 더 꽉 붙들며 간절하게 말했다. “우린 안지영 씨 생각하지 말자고요, 네?” 심지어 말 끝에 ‘말 잘 들어요’같은 말을 덧붙이고 싶을 정도였다. 나태웅의 눈빛이 점점 더 위험해지더니 낮게 물었다. “우리?” ‘뭐지?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했지?’ 잠시 멍해 있다가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 아니요! 우리가 아니라 대표님이 안지영 씨를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진이훈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자에게 받은 상처가 얼마나 깊으면 말조차도 안지영 씨와 관련되면 불편한 거야?’ “손 놔.” 진이훈은 여전히 손을 놓지 않으며 강하게 말했다. “안지영 씨는 별로예요. 게다가 지금은 장선명 씨와 이미 사귄다는 소문도 있잖아요. 그런 여자를 정말 원하시겠어요?” “내가 손 놓으라고 했지.” 나태웅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힘을 주어 손을 뿌리쳤다. 그의 눈빛은 마치 진이훈을 잡아먹을 듯이 날카로웠다. 진이훈은 나태웅의 그 눈빛에 움찔하며 한발 물러섰다. 나태웅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시 한번 안지영을 헐뜯어봐.” ‘이제 안지영 씨에 대해 나쁜 말도 못 하게 해?’ 그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정말 이 여자한테 얼마나 깊이 빠진 거야... 병이 이렇게 심한데도 안지영 씨를 지키려 하다니.’ 한편, 안지영은 진이훈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한 뒤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곧바로 메시지 창에서 영상 통화를 걸었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계속 시도했지만 나태웅 쪽에서 받지 않았다. 그녀는 점점 숨이 가빠지며 제대로 숨도 못 쉴 지경이 되었다. 옆에서 지켜
안지영이 여전히 나태웅을 미친놈, 변태라고 욕하는 걸 보며 장선명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고 물었다. “그럼 돈을 나태웅에게 주면 이 일은 끝나는 거예요?” 안지영은 병아리가 모이를 쪼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아마도요?” 만약 이걸로도 끝나지 않는다면 정말 나태웅의 머리를 깨서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하고 싶을 정도였다. 장선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요, 그럼 이건 제가 처리할게요.” “뭘 하려고요?” 안지영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흥분한 상태였지만 장선명이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말하자 즉시 조용해졌다. ‘선명 씨가 처리한다고? 항상 유흥가를 드나들던 사람이 무슨 방법으로 처리하려는 거지?’ 그녀는 이 순간 깨달았다. 장선명과 나태웅은 원래 완전히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이 둘이 얽히게 되었고 나태웅은 정신적으로 예민하고 집요한 수법을 쓰는 반면 장선명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왠지 모르게 건달 같은 느낌이 있었다. ‘건달 대 신경질적인 사람? 이 조합은 대체 어떤 장면을 만들어낼까?’ 그녀가 걱정하는 것도 모른 채 장선명은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뭘 어떻게 하겠어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그게 가장 좋은 거죠.” ‘아니, 뭐야 이 사람...’ 다음 날 아침. 나태웅은 병원에서 안지영이 만두와 인절미를 들고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고 대신 그의 은행 계좌에는 무려 600억이 입금되었다. 하지만 돈을 보낸 계좌는 안지영이 아니라 장선명의 것이었다. 이 돈을 확인한 나태웅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까맣게 변했다. 그 순간, 아침 식사를 들고 들어오던 진이훈이 그의 표정을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나 대표님, 진정하세요!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만 하시면 돼요!” 원래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는데 진이훈의 그 말에 더 화가 치밀었다. 이를 악물고 물었다. “안지영은 안 왔나?” “네, 안 왔어요. 왜요? 안지영 씨가 오늘 온다고 했나
‘손자가 한심하다고 할아버지가 나서서 사람까지 뺏으려 한다고? 이게 과연 체면이 서는 행동인가?’ 이 생각에 장선명은 점점 더 화가 치밀었다. 안지영이 들어왔을 때 그는 마침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장선명은 전화기 너머로 말했다. “네, 나태범 쪽에서 지영이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어요. 그때가 되면 할아버지가 나서 주셔야 해요!” 평소에 절대 어른들을 끌어들이지 않던 장선명은 배준우의 말을 듣고는 즉각 할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장선명의 할아버지는 안지영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으므로 이 말을 듣고는 의아한 듯 물었다. “나씨 가문 둘째 녀석이 정말로 지영이 때문에 자살 소동을 벌였단 말이냐?” “그럼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건 제 잘못이 아니에요. 제가 먼저 지영이와 연애를 시작했거든요.” “야, 이놈아. 네가 언제 이렇게 도덕 따지는 놈이었냐?” 심지어 먼저 사귀었다고 설명까지 덧붙이다니. 그의 할아버지조차 손자의 변명이 웃길 따름이었다. “아무튼요. 상황을 미리 알려드렸으니 종대 아저씨에게 나씨 가문 쪽 상황을 살펴보라고 해 주세요.” “알겠다!” 한편, 옆에서 이 전화를 듣고 있던 안지영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대충 상황을 이해한 그녀는 황당함을 느꼈다. 결국 나태범이 나태웅 때문에 자신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얘기 아닌가? ‘이 가족 제정신인가? 나태웅이 나를 협박했던 것도 모자라 이제 할아버지까지 협박에 나선다고? 힘으로 어린 사람을 억누르겠다는 건가? 내가 보호받을 아버지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녀는 잠시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만약 안진섭이 아직 살아 있었다면 이 상황에서도 안지영을 지켜줄 수 있었을까?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안열이 말했듯 그녀의 아버지는 너무 착하고 온화했으니까. 장선명이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리자 안지영이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가가 물었다. “언제 왔어요? 다 들은 거예요?” 안지영은 화난 얼굴로 말했다.
배준우는 조용히 장선명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 그가 한 말은 생생하게 상황을 묘사했지만 어딘가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나태범이 화가 나서 이 일에 개입한다면 장선명은 진짜 골치 아픈 문제를 떠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장선명이 더 기막힌 소리를 했다. “진짜 그렇게 된다면 나도 우리 집 어른을 불러야지!” 마치 누구네 집에만 어른이 있는 건 아니라는 태도였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그의 얼굴이 단번에 어두워졌다. 장선명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진지하게 말하는 거예요. 저도 할아버지를 부르죠.” 나태웅이 할아버지를 부르면 자기는 할아버지를 불러 대결 구도를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었다. 배준우는 고개를 감싸 쥐며 말했다. “너 아직도 이 상황이 충분히 복잡하지 않다고 생각하니?” 장선명의 할아버지가 어떤 인물인지 배준우는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도 이 문제에 개입하게 된다면 이 일은 완전히 우스갯소리가 되고 말 것이다. 게다가 그런 소동은 나태웅이 자살 소동을 벌였던 것보다도 훨씬 더 큰 파장을 일으킬 게 뻔했다. “그쪽이 먼저 일을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 나랑 지영이는 곧 결혼할 사이인데요.”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 배준우는 다시금 이 일이 얼마나 촉박한 상황인지 깨달았다. 장선명과 안지영의 결혼식 날짜는 얼마 남지 않았었다. 하지만 나태웅 쪽 상황을 보면 그 결혼식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이미 그는 이 일로 정신적 문제가 생겼고 만약 결혼식을 본다면 그의 상태는 더 나빠질 게 뻔했다. 배준우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참 고민하던 그는 결국 조심스럽게 말했다. “결혼식 날짜를 조금만 미룰 수는 없겠니?” 장선명은 바로 반발하며 말했다. “왜 미뤄야 하죠? 형님, 설마...” “나태웅은 지금 심리 치료를 받고 있어. 네가 결혼하는 걸 보면 어떤 일이 생길 것 같니?” 장선명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형님, 성인군자라도 되려는 거예요?” “뭐라고?” 배준우의 얼굴이 단번에 검게 변했다. “아니
스스로 병이 있다는 걸 깨달아야 의사를 대면할 때 거부 반응이 덜하다. 배준우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 너도 참...” 원래는 나태웅에게 몇 마디 더 하려 했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건 고은영의 얼굴이었다. 결국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후로도 한동안 나태웅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라고는 했지만 실상은 나태웅을 안심시키려는 배준우의 독백에 가까웠다. 나태웅은 무기력해 보였다. 그가 이렇게까지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건 정말 모든 걸 체념한 것인지 아니면 병이 심각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배준우는 병원을 떠났다. 병원에서 나온 배준우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먼저 장선명을 찾아갔다. 장선명은 배준우가 근무 시간에 자신을 찾아온 걸 보고 놀라며 말했다. “형, 웬일이에요? 근무를 빼먹다니!” 배준우가 얼마나 일에 철저한지 강성은 물론이고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근무 시간 중에는 그 누구도 그를 밖으로 불러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근무 중임에도 장선명을 찾아온 것이다. 배준우는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말이 많네. 중요한 일이 있어서 왔어.” 장선명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사업 관련된 일이에요?” 중요한 일이라면 사업 관련 일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배준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나태웅 때문이야. 너 알고 있어? 걔 죽을 뻔했어.” 이 말에 장선명은 얼굴을 찌푸렸다. “형도 소문을 믿는 거예요?” 사실 나태웅의 손목 부상은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나태웅도 자신의 부상이 안지영 때문이라고 직접 언급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강성에서는 이 일이 마치 사랑에 상처받아 생긴 일이라는 소문으로 부풀려졌다. 그리고 그 소문은 이제 배준우의 입에서 더 과장된 형태로 나왔다. 죽을 뻔했다는 말은 거의 나태웅이 안지영과 장선명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의미로 들렸다. 장선명은 입꼬리를 실룩이며 말했다. “형이 이런 일까지 신경 쓰다니 정말 뜻밖이네요
진정훈이 말했듯이 고희주의 일에서 가장 맞서기 어려운 사람은 량천옥이였다. 점심 무렵, 그녀는 직접 고은지를 위해 음식을 준비했다. 사라는 여전히 그녀에게 차가운 태도를 보였지만 량천옥은 고개를 숙이며 억지로라도 사라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고은지가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량천옥은 여전히 고은지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뒤에서 묵묵히 도울 뿐이었다. 딸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량일에게 쌓였던 불만과 분노를 모두 발산한 후로는 병실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사라를 마주하고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라는 말없이 보온병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말 한마디 없이 량천옥을 아예 무시하듯 행동했다. 사라의 그런 차가운 태도에 량천옥의 마음은 쓰라렸지만 그녀는 뻔뻔하게 카드 한 장을 건넸다. “부탁이에요, 제 딸을 돌봐줄 때 조금 더 신경 써주세요.” 사라는 그 카드를 다시 량천옥에게 돌려주며 단호하게 말했다. “량 여사님, 이런 행동은 당신을 더욱 비참해 보이게 합니다.” 사라의 말은 직설적이었고 량천옥은 처음으로 자신이 사용한 방식이 얼마나 천박하게 여겨질 수 있는지를 깨달았다. 예전에는 그녀가 배씨 부인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기에 누구도 그녀의 방식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라의 날카로운 말에 량천옥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굴욕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화를 내지 않았다. 고은지를 세심하게 돌봐주는 이들에게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량천옥이 말하기도 전에 사라는 이미 보온병을 들고 병실로 들어갔다. 고은지는 잠들어 있다가 인기척에 살짝 눈을 떴다. 사라는 다가가 그녀를 부축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일어나셨어요? 우리 뭐라도 좀 먹을까요?” 고은지는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은영이가 가져다준 거예요? 은영이는 어디 있나요?” 수술 후의 회복은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누가 알았겠는가. 강성의 살아있는 염라대왕이라 불리던 배준우가 사적인 자리에서, 특히 아내 앞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굴 줄이야. 고은영은 황급히 그의 허리를 살짝 꼬집었다. 그제야 고통을 느낀 배준우가 마지못해 그녀를 놓아주며 화난 눈빛으로 진정훈을 노려보았다. “대체 몇 그릇째 먹는 거예요?” 배준우의 말투에는 분명한 불만이 담겨 있었다. 진정훈은 그런 배준우를 보고도 태연하게 말했다. “걱정 마요. 생활비 냈으니까 밥 공짜로 먹는 거 아니에요.” 말투는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이 말을 들은 배준우는 진정으로 청하는 건 쉬워도 돌려보내는 건 어렵다는 게 어떤 건지 깨달았다. 진정훈이 이 집에 들어온 이후 지금까지 떠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간접적으로 신호를 주어도 그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척했다. 배준우는 고은영을 보며 말했다. “나 병원에 좀 다녀올 건데 너도 같이 갈래?” 그러자 진정훈이 끼어들었다. “아침에 동생이 병원에 갔다며. 우리 은영이 고생시키려는 거야?” ‘이 눈치 없는 놈 같으니라고!’ 그는 진정훈이 있는 게 너무 불편했다. 고은영과 단둘이 식사라도 하려고 데리고 나가고 싶었지만 진정훈은 그런 눈치를 전혀 못 챘다. 오히려 진정훈은 자신이 민폐라는 사실을 모른 채 고은영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은영아, 걱정하지 마. 량천옥은 이제 누나를 어떻게 하지도 못할 거야. 오히려 애지중지할걸?” ‘누나라니, 이 사람 언니보다 어리지 않잖아?’ 사실 지금까지 고은영은 진씨 가문 사람들에 대해 거의 모르는 상태였다. 특히 나이나 다른 배경에 대해서는 아예 몰랐다. 하지만 진정훈은 고은영을 진심으로 아끼고 있었다. 최근에 고은영이 언니인 고은지를 위해 동분서주하며 정말 고생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의 일은 배준우가 처리했지만 마음의 짐만큼은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었다. 고은지가 그녀에게는 매우 소중한 존재였다. 병상에 누워있는 고은지를 보며 힘들어했던 시간은 고은영에게 너무나도 고통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