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준우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내 아내를 아끼다니?’그녀가 안지영의 보살핌이 필요하긴 했지만 그것이 그가 들어야 할 말은 아니었다.장선명이 계속해서 말했다.“안지영이 무슨 짓을 벌인 거예요?”배준우가 냉정하게 대답했다.“안지영이 량천옥의 다리를 부러뜨리러 가겠다고 해.”배준우는 안지영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녀가 정말로 그 일을 벌일 거라 믿었다.그리고 무엇보다 량천옥이 그에게서 빼앗아 간 20억 원을 모두 안지영이 챙겨갔다고 하니 과연 그게 은영을 위한 것이었는지 의문이 들었다.장선명이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잘됐네요. 그 여자는 그런 직설적이고 강력한 방법이 딱 맞는 인간이잖아요.”배준우의 목소리는 점점 더 차가워졌다.“안지영을 방치하겠다고?”“나도 어쩔 수 없어요.”배준우가 단호히 말했다.“그럼 내가 처리할까?”장선명은 급히 태도를 바꿨다.“아니요, 내가 알아서 막을게요.”장선명은 안지영이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까 염려되어 즉시 전화를 끊었다.배준우는 전화를 끊고 고은영을 바라보았다.안지영의 위로 덕분에 은영의 상태는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힘들어했다.이렇게 큰 충격은 금방 회복될 수 없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고은영은 입술을 깨물며 속삭였다. “왜 안지영이 량천옥을 혼내주지 못하게 하는 거야?” 배준우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차분히 대답했다.“지금 그 여자는 고은지에게 맞는 유일한 골수 제공자야.”고은영은 그 말을 듣고 숨이 가빠졌다.그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량천옥이 그런 일을 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그 여자가 우리 언니한테 골수를 줄 리가 없어.”량천옥은 자신을 미워하는 마음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언제라도 다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인물이었다.그런 상황에서 고은지에게 도움을 줄 거라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배준우는 차분하게 말했다.“그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넌 신경 쓰지 마.”그의 목소리에는 묘한 신뢰와 힘이 담겨 있었다.고은
고은영은 아이의 상황을 보니 도저히 고은지를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하지만 고은영이 사흘째 병원에 오지 않자 고은지는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말았다.다음 날 아침, 물건을 가지러 돌아온 혜나는 그녀에게 말했다.“고은지 씨가 계속 당신을 보지 못하니까 온갖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그 말을 들은 고은영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배준우가 며칠 전 그녀에게 이 일에 신경 쓰지 말라고 했을 때, 고은영은 마치 감정이 사라진 사람처럼 그의 말을 따르기만 했다.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자 그녀는 깊은 자책감에 휩싸였다.그녀는 일부러 연락조차 피하며 거의 모든 일을 배준우의 사람들에게 맡겼다.그러나 고은지가 불안해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고은영의 가슴이 조여오듯 답답해졌다.“언니가 또 뭐라고 했어?”혜나는 조심스레 말했다.“희주를 물어보셨어요.”그 말을 들은 순간, 고은영은 마치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처럼 공허함을 느꼈다.사람들은 종종 아이가 위험에 처했을 때 엄마가 직감한다고 하지 않는가.고은지도 뭔가를 느낀 걸까...그녀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지금 당장 같이 가자.”고은영은 자신도 알고 있었다.언니가 병원에 입원한 이후 매일 찾아갔던 그녀가 며칠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혜나의 말처럼 고은지가 더 심한 불안을 느낄 게 뻔했다.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병원에 도착한 고은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태현과 마주쳤다.그녀는 머리가 복잡해서 별다른 생각 없이 간단히 인사만 건넨 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곧바로 고은지의 병실로 향했다.그런데 막 병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안에는 수많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사라가 그녀를 보자마자 급히 다가와 말했다.“사모님!”“무슨 일이에요?”이 광경을 본 고은영의 심장이 본능적으로 덜컥 내려앉았다.사라가 답했다.“고은지 씨가 또 피를 토하셨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고은영의 눈꺼풀이 떨렸다.그녀는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눈앞
입사 2년 차 고은영은 동영그룹 비서실 직원으로서 매사에 신중하고 성실하게 일해왔다.그런데 어젯밤, 그녀는 거대한 사고를 치고 말았다.고은영은 떨리는 손으로 이불을 잡고 살짝 뒤집었다. 알몸 상태를 확인한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남자의 넥타이를 잡고 방탕한 여자처럼 유혹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아직 자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헉!”얕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그 장면이 꿈이 아니라니! 어떻게 직속 상사를 상대로 그런 미친 짓을 벌인 거지?배준우, 동영그룹 대표이자 그녀의 직속 상사였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너무도 큰 충격에 고은영은 자신도 순결을 잃었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 재빨리 일어나서 옷부터 입었다.그리고 배준우가 깨기 전에 이 끔찍한 범죄현장에서 도망쳤다.떨리는 다리로 겨우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애써 어젯밤 기억을 지우려고 노력했다.그런데 화장 중이던 안지영이 그녀를 보고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어제 대표님 방까지 모셔다드리고 온다고 하지 않았어? 전화해도 안 받던데 어떻게 된 거야?”고은영은 가슴이 철렁해서 말까지 더듬었다.“나? 바람 좀 쐬고 좀 늦게 돌아왔는데 너 자고 있길래 조용히 들어왔어. 아침에 대표님 호출이 있어서 나갔다 이제 들어온 거야!”조금 긴장했지만 군더더기가 없는 대답이었다.대표실 직속 비서로서 수시로 호출을 받는 일도 잦았고 지금은 출장 중이라 밤에 바람 좀 쐰다고 나갔다 와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안지영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화장에 집중했다.무사히 넘어갔다는 생각에 고은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화장실로 가서 씻고 출근준비를 했다.두 사람은 식당으로 가서 대충 아침을 먹고 회의실로 바로 직행했다.검은색 정장을 차려 입은 고은영은 평소의 진지하고 성실한 직원으로 돌아왔다.가방에서 핸드폰 진동음이 들리고 발신자에 찍힌 “대표님”이라는 글자를 확인했을 때, 그녀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지금 당
고은영은 어떤 마음으로 휴게실을 빠져 나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전시회장으로 돌아왔다.그녀를 본 안지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안색이 왜 그래? 어디 아파?”고은영은 중학교 때부터 자신과 함께한 친구를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그 모습을 본 안지영은 급히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다급히 그녀를 끌고 화장실로 가서 작은 소리로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 대표님한테 혼났어?”안에서 문을 잠그자 고은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안지영은 다급히 다가가서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 대표님 너 이런 모습 보면 또 한바탕 난리가 날 텐데!”동영그룹 배준우 대표는 매사에 철저하고 냉철한 사람이었다.아무리 예쁜 여직원이라도 일하는 시간에 울거나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절대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과거에 어떤 여직원이 실연 당하고 회사에 와서 몰래 눈물을 흘린 적 있었는데 배 대표는 대차게 그 부서 전체에 징계를 내렸다.여자라서 절대 봐주는 법이 없는 배준우였다.고은영은 숨 넘어갈 듯이 흐느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아, 나 이대로 퇴사할지도 몰라! 하지만 난 강성을 떠나기 싫어!”“아니, 도대체 무슨 사고를 쳤길래?”안지영은 앞뒤 잘라먹은 그녀의 말에 조바심이 났다.“내가… 어젯밤에 대표님을… 추행했어!”안지영은 순간 온몸이 굳었다.공기마저 무거워지고 화장실 안에는 고은영의 흐느끼는 소리만 들렸다.한참이 지난 뒤에야 안지영은 충격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다.“지금… 뭐라고 한 거야?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아?”도저히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어제 대표님 방에 밤새 있었다고!”고은영이 말했다.다시 정적이 찾아왔다.안지영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그러니까 네가, 대표님이랑 억지로 잠자리를 가졌다는 거야?”이게 사실이라면 커다란 재앙이었다.과거 배준우 한번 꼬셔보겠다고 그의 방에 숨어들었던 여자들은 그 결과가 전부 좋지 못했다.애를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크게 들릴만큼 고요했다. 고은영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있었지만 속은 어지러웠다.배준우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의 작은 얼굴을 힐끗 훑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런 것 같다라는 식의 대답 내가 싫어하는 거 알 텐데?”고은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확실하지 않은 대답을 가장 싫어하는 배준우였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어제 제가 대표님을 방까지 모신 뒤로 아무도 그 방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그녀는 아까보다 더 단호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고은영에게는 1분이 1년과 같은 고역의 시간이었다.하지만 이걸 이겨내야 했다.만약 배준우에게 거짓말을 들킨다면 그녀만 인생을 망치는 게 아니라 안지영에게까지 피해가 갈 수 있다.겨우 강성에서 자리를 잡고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나락으로 떨어질 수는 없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은영의 등 뒤가 축축해질 때쯤 배준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어.”고은영은 스르륵 눈을 감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끝난 건가?“가서 해상그룹 입찰 방안 계획안 좀 가져와 봐.”배준우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고은영은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대표님!”그 뒤로 한달 간 긴 출장이 이어지는 동안 고은영은 최대한 배준우와 단독으로 접촉하는 상황을 피했다.한달 뒤, 긴 출장을 끝낸 그들은 강성으로 돌아왔다.관례대로 고은영에게는 이틀의 휴가가 주어졌다. 이날, 배준우는 긴급회의가 있어 회사로 향했다.회의를 마치고 나오자 문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태웅이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대표님.”나태웅을 본 배준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고 비서는?”“한달 간 출장을 다녀왔으니 당연히 휴가를 줬죠. 고 비서도 연애해야죠.”배준우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지만 이내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나태웅은 갑자기 싸늘해진 분위기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한편, 동영그룹 직원 기숙사.
수화기 너머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고은영은 멈칫하며 다시 발신자를 확인했다.대표님이라는 글자를 확인한 순간, 그녀는 벽에 머리를 박고 자살하고 싶었다!그녀는 바로 태도를 바꾸어 공손한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죄송합니다, 대표님. 다른 사람인 줄 착각했습니다.”“당장 회사로 와.”남자는 차가운 한마디를 끝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고은영은 꺼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입을 삐죽였다. 또 꿀 같은 휴식일에 불러내다니!그녀는 다급히 마트에 들러서 안지영에게 줄 라면 하나 사고 기숙사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바로 돌아온 그녀를 보자 안지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근처에 은행 새로 섰어?”고은영은 뛰어오느라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다.“대표님이 지금 바로 회사로 오래. 일단 라면이나 먹고 있어.”말을 마친 그녀는 바로 방으로 돌아가서 오피스룩으로 갈아입었다.배준우는 정말 깐깐한 상사였는데 직원들이 일하는 시간에 편한 복장으로 오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그녀가 다급히 현관으로 다시 나가는데 뒤에서 불만 섞인 안지영의 목소리가 들렸다.“대표님도 참, 한달이나 출장을 다녀왔는데 쉬는 날에 또 불러내? 그럴 줄 알았으면 너 마케팅부서에 추천할걸 그랬어.”“나 말을 잘 못해서 마케팅 부서는 어울리지 않아.”말을 마친 고은영은 바로 문을 열고 나갔다.기숙사에서 회사까지는 10분 거리였다.이런 지리적 우세 때문에 그녀는 자기 집을 두고 기숙사에서 출퇴근했다. 아침에 잠을 더 자고 교통비도 아낄 수 있다는 점이 큰 메리트로 작용했다.회사에 도착한 그녀는 바로 대표 사무실로 직행했다.안에 들어서자 창가에 서 있는 배준우의 뒷모습이 보였다. 햇살을 받으며 서 있는 그는 뒷모습만 봐도 귀티 나고 멋져 보였다.고은영은 공손히 다가가서 고개를 숙여 그에게 인사했다.“대표님, 저 왔어요.”배준우는 고개를 돌리고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고은영은 찔리는 게 있어서 그런지 대표가 저런 눈으로 볼 때면 괜히 긴장했다.다행히 배준우는 바로
나태웅이 업무적인 일로 사무실에 방문하면서 고은영은 그제야 그 숨막히는 사무실을 벗어날 수 있었다.배준우는 유리창을 통해 자신의 앞에서는 조신하게 행동하던 그녀가 밖에 나가서는 호들갑을 떠는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나태웅도 그의 시선을 따라 바깥을 내다보니 고은영이 무언가를 바쁘게 찾고 있었다.‘고 비서는 여전히 덜렁거리는군.’고개를 돌린 그는 봉투 하나를 배준우에게 건넸다.“대표님, 조사해 본 결과, 역시 그날 사모님이 술에 약을 탄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핸드폰 진동음이 울렸다.나태웅이 확인해 보니 캐릭터 모양의 핸드폰 케이스가 보였다. 당연히 배준우의 것은 아니었다.아까 사무실에 들어왔던 고은영이 부주의로 핸드폰을 두고 나간 것이다.한참 핸드폰을 찾아 헤매던 고은영은 다시 사무실로 발길을 돌렸다.문앞에 도착하자 배준우의 차가운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그 여자는 찾았어?”방 문을 노크하려던 고은영은 순간 그 자리에 얼어버렸다.아직도 그 여자를 찾고 있었나?곧이어 나태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마 사모님께서 대표님 결혼을 추진하려고 보낸 여자일 테니 사모님 측근임이 틀림없겠네요.”“측근이라! 웃기지도 않는군!”잔뜩 날이 선 배준우의 목소리도 들려왔다.“한달 안에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 찾아서 해결해.”“네, 대표님.”나태웅의 목소리마저 차가워졌다.고은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골칫거리가 생겼을 때 그들이 어떻게 처리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다.만약 그날의 진실이 탄로난다면 자신이 어떤 처참한 처지가 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밖으로 나온 나태웅이 고은영을 보고 아는체했다.“고 비서?”“나 실장님, 오랜만이네요.”고은영은 곧장 정신을 가다듬고 공손히 인사했다.하지만 속은 타들어가고 있었다.나태웅은 그녀의 안색을 잠깐 살피더니 걱정스럽게 물었다.“고 비서 어디 아파? 안색이 왜 이래?”“감기기운이 좀 있어서요.”고은영은 황급히 변명했다.나태웅은 고개를 끄
또다시 정적이 찾아왔다.배준우는 차갑게 식은 눈동자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마치 그 말의 진위 여부를 가늠하는 것 같았다.고은영은 불안한 눈빛으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 손에서 땀이 났다.그녀는 미쳐버릴 것 같은 심정으로 안지영에게 더 이상의 문자를 보내지 말라고 속으로 기도했다.그녀가 온몸에 힘이 다 풀려서 거의 쓰러지기 직전에 배준우가 입을 열었다.“무슨 알바지?”“일러스트레이터요.”“그림?”배준우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네. 벽화 그리는 일이에요.”회사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일이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배준우의 눈치를 살폈다. 이대로 넘어가 주는 걸까?배준우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더니 차갑게 물었다.“월급이 마음에 안 들어?”“아… 아닙니다. 그냥 제가 좋아서 하는 거예요!”그녀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다.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에 행복했다.남자에게서 풍기는 냉기를 느낀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하지 말라고 하시면 그만둘게요.”입사할 때, 회사 인사부에서 명확히 안 된다고 했던 사항이었다.아마 산업 스파이나 경쟁 업체에서 의도적으로 직원들에게 접근하는 것을 우려해서였을 것이다.한바탕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았던 배준우는 의외로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알았어, 나가 봐.”고은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남자는 이미 노트북에 시선을 돌리고 열심히 무언가를 타이핑하고 있었다.고은영은 도망치듯이 사무실을 빠져 나와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녀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정말이지, 큰일 날 뻔했다.배준우가 그날 밤 그녀의 알리바이를 꼬치꼬치 캐물었더라면 아마 그녀는 오늘 무사히 사무실을 빠져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고은영은 창백한 얼굴로 안지영을 찾아갔다.안지영은 그녀를 이끌고 길가에서 택시를 잡았다.“30분이면 끝난다며? 왜 문자했는데 답장을 안 해?”문자 이야기가 나오자 고은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