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는 올해 서른 두 살로, 여자로서 가장 성숙하고 분위기 있는 나이였다. 금발에 푸른 눈, 높게 솟은 코를 가진 그녀는 온몸에서 우아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다.강현석은 계약서를 손에 들고 외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도설혜의 어떤 일에도 관심이 없었고 만약 그녀가 낮에 피아노를 연습한다면 낮에는 집에 들어오지 않을 생각이었다.그가 걸음을 옮겨 나가려고 할 때, 앨리스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눈썹을 치켜 뜨며 의아해했다.강세훈이 도설혜에게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천재 피아노 소녀를 선생님으로 구해 주다니…….그도 전에 앨리스의 연주회에 가서 매우 놀랐던 경험이 있었기에, 내딛던 발걸음을 거두고 앨리스에게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앨리스 선생님.”앨리스도 우아하게 웃었다.“강 대표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오늘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이 장면을 본 도설혜는 약간 의아했다. 4년 동안 강현석을 따라다니면서 그의 고객들을 만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고객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강현석은 시종일관 싱거운 태도로 대했고,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과 악수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렇다면 강현석이 그만큼 앨리스를 존경한다는 걸까? 그럼 만약 자신이 순조롭게 앨리스의 수제자가 된다면, 강현석도 자신을 좀 다르게 대하지 않을까?여기까지 생각한 도설혜는 발걸음을 내디디며 걸어갔다.“앨리스 선생님, 저는 도설혜입니다. 오늘부터 배울 학생이예요.”고개를 돌린 앨리스의 눈빛이 먼저 도설혜의 손가락에 떨어진 다음 거실의 피아노로 향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일단 어떤 수준인지 들어봅시다.”도설혜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피아노 앞에 앉아 능숙하게 ‘앨리스에게’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앨리스는 한쪽에 서서 그녀를 관찰하며 모든 음표를 자세히 들었다.곡이 끝나자 앨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강세훈 도련님이 그러더군요, 도설혜 씨가 피아노 9급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고. 확실히 잘 치네요. 기술을 아주 능숙하게 사용해요. 하지만…….”앞의 말을 들은 도설
도설혜는 갑자기 포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렸을 때, 소파에 앉아 있는 강현석을 보았다. 서류를 보고 있던 그 남자는 고개를 들어 앨리스가 말하는 것을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강현석이 피아노에 관심이 많은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 도설혜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앨리스 선생님, 다시 한 번 쳐 봐도 될까요?”“그럼요.”앨리스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일단 긴장을 풀고 마음을 홀가분하게 한 다음 곡의 장면 속으로 들어가세요. 마음 속에 감정이 형성되면 그 감정이 자신의 손끝으로 물처럼 흘러들어 건반 위에 쏟아지도록…….”고개를 끄덕인 도설혜가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10대 시절 피아노를 배울 때 그녀와 도예나 사이의 관계는 아직 괜찮았다. 도예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자신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곤 했다. 하지만 도예나를 싫어하는 그녀가 어떻게 그런 가르침을 들을 수 있겠는가? 이제서야 도예나가 했던 말들이 지금 앨리스가 하는 말과 매우 비슷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눈을 감자, 머릿속에 10대의 도예나가 피아노 옆에 앉아 있는 모습이 서서히 떠올랐다.도설혜는 어떻게 자신의 감정을 피아노 곡에 녹여내야 할 지 모르지만, 도예나의 곡조를 그대로 옮길 수는 있었다.그녀와 도예나는 18살 전에는 좋은 자매였고, 매일 도예나가 피아노를 연습하는 걸 들을 수 있었다. 그 중 어떤 곡은 마음 속 깊은 곳에 들어와, 심지어 피아노를 치는 도예나의 자세조차도 모방할 수 있을 정도였다.이번에 도설혜가 친 곡은 ‘앨리스에게’가 아니었다.10대의 도예나가 자주 연습했던 피아노 입문곡, ‘밤의 피아노곡 5’였다.피아노곡이 도설혜의 손끝에서 기울어져 나왔을 때, 강현석은 갑자기 멍해졌다.그도 전에 이 곡을 들은 적이 있다. 18세가 되던 해 자신이 모교인 성남시 1고등학교로 가서 강연했을 때, 피아노실을 지나갈 때 이 놀라운 곡을 들은 적이 있다.이 곡은 흔히 들을 수 있고 연주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이렇게 슬픔과 행복을 교묘하게 융합해서 연주하는 건
도설혜의 마음 속에 다시 한바탕 기쁨이 스쳐 지나갔다.강현석과 알고 지낸 지 4년 동안, 이 남자는 자신에게 이렇게 사적인 질문을 하지 않았다.이제서야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걸까?숨을 크게 들이마신 그녀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맞아요, 그 때 성남시 1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어요…….”그때, 그녀와 도예나가 공동 1위를 차지했었다.답을 들은 강현석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전에 피아노를 배운 적 있어?”“유치원 선생님이 제가 피아노를 잘 치는 건 발견하시고 부모님께 배워 보라고 권유하셨어요.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서 지금까지는 계속 바빠서 몇 년 동안 피아노를 친 적이 없어요. 4년 동안이나 피아노를 친 적이 없는데, 앨리스 선생님이 이렇게 칭찬하실 줄은…….”도설혜의 얼버무리는 말투에는, 감출 수 없는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강현석이 가볍게 손가락을 비비며 다시 물었다.“성남시 1고등학교에서 피아노를 친 적은 있어?”도설혜는 이 남자가 왜 이런 걸 묻는지 몰랐지만, 그냥 사실대로 대답했다.“가끔 피아노 학원에 갈 시간도 없을 때는 학교 피아노실에서 연습했어요, 아주 가끔이요.”강현석은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그 후에 그가 다시 피아노 연주를 들으러 갔을 때 다시는 그 놀라운 연주를 듣지 못했다.그리고 8년이 지나고 그 연주를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도설혜의 연주에 그는 비로소 그 곡이 뜻밖에도 자신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새겨져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다는 걸 느꼈다.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눈을 들어 담담하게 말했다.“아까 그 곡, 다시 한 번 연주할 수 있겠어?”“그럼요!”도설혜의 가슴이 설렜다.역시, 잘 알아맞혔어! 강현석이 정말 피아노에 관심이 있었다니!진작 이럴 줄 알았으면, 이때까지 4년 넘게 헛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됐을텐데.강세훈이 있어서, 강세훈이 자신을 도와줘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도설혜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하지만 그녀가 너무 흥분한 탓인지, 마음이 다른 곳으로 가버
처음 도설혜가 피아노를 연주할 때부터, 방해하고 싶어서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 여자의 연주를 마음에 들어 하다니. 그리고 이런 눈빛으로 나쁜 여자를 바라보다니!만약 아버지가 나쁜 여자를 좋아해서 장가를 가 버리면, 자신은 이 여자에게 엄마라고 불러야 할 게 뻔하다.하지만 그는 예나 아줌마가 엄마가 되기를 바랐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강세윤은 더욱 화가 나서 큰소리로 외쳤다.“여기서 일부러 피아노를 치면서 우리 아빠를 꼬시지 마요! 나는 당신이 제일 싫어!”이 말이 나오자, 강현석의 눈빛이 갑자기 차가워졌다.‘꼬신다’라는 표현이 네 살 난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건 비상식적이라는 생각에, 그는 차갑게 일어나 2층의 강세윤을 바라보았다.“아래층으로 내려와서 어머니께 사과해.”“됐어요, 현석 씨. 세윤이는 겨우 4살이예요.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버릇이 나빠서…….”도설혜가 강현석을 말리며 울먹이면서 입을 열었다.“세윤이가 나를 이렇게 싫어하는 건 틀림없이 내가 엄마로서 잘 못했기 때문에…….”옆에 있던 강세훈이 그 말을 듣고 손가락을 쥐었다.어머니가 하는 이 말은 겉으로는 세윤이 편을 드는 척하면서, 실제로 불 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일을 크게 만들고 있다.하지만 세윤이가 ‘꼬신다’라는 말을 어머니에게 쓴 건 잘못한 거니까, 아버지가 이렇게 화난 것도 당연하다.몇 초 동안 침묵하던 강세훈이 입을 열었다.“이 일은 제가 처음부터 잘못 생각했어요. 엄마가 여기서 피아노 연습을 하면 확실히 세윤이 공부에 영향을 줄 것 같아요. 차라리 이렇게 하죠. 앞으로 어머니는 강씨 집안 별장으로 가서 피아노 연습을 하는 걸로…….”이 말을 들은 도설혜는 당황했다.별장에 가면 강현석을 만나기가 어려울 텐데, 피아노 실력을 어떻게 보여줘야 하지…….그녀가 입을 막 열려고 할 때, 2층의 강세윤이 다시 소리쳤다.“왜 이렇게 듣기 싫은 걸 계속 쳐!”말을 마친 그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고, 강현석이 눈살을 찌푸리며 차가운 목소리
금태양 유치원.늦가을의 햇살이 흩어지고 따뜻해지자 어린이들이 운동장을 마음껏 달리고 있고, 도제훈과 수아는 10여명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다.“제훈아, 내가 수아를 데리고 있게 해줘! 같이 놀고 싶어!”“오늘 수아 머리 너무 예쁘네, 나는 수아를 정말 좋아해! 제훈아, 수아를 우리랑 같이 놀게 해 줘.”“제발, 응? 우리 다 수아를 너무 좋아해, 잘 데리고 놀게!”어린 소년과 소녀들은 모두 수아의 인형 같은 외모에 매료되어 둘러싸고 떠나려 하지 않았다.여동생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걸 보는 도제훈도 기뻐서 고개를 돌려 말했다.“수아야, 친구들이랑 같이 놀고 싶어?”어린 수아는 큰 눈을 깜빡이며 주위의 앳된 얼굴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어린이들의 웃음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다. 좋아하면 좋아하는 대로, 싫어하면 싫어하는 대로 마음 속에 있는 걸 조금도 숨김 없이 얼굴에 드러낸다.그들의 얼굴을 몇 분 동안이나 본 수아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자, 도제훈이 그녀의 손을 놓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선 뒤 무리 밖에 서서 눈빛으로 수아를 바짝 쫓았다.수아는 말이 없었지만, 예쁜 눈동자에 점점 초점이 잡혔다. 누군가 수아에게 이야기할 때, 수아의 눈빛이 말하는 그 아이에게 떨어지곤 했다.다른 쪽에서 바라보는 우세정 선생님도 매우 뿌듯했다. 수아가 유치원에 온 지 보름 밖에 안 됐는데 이렇게 빨리 발전하다니, 이대로라면 수아의 자폐증 회복도 머지않아…….“선생님, 수아 좀 봐주실래요?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요.”그때, 도제훈이 다가와 고개를 들어 말했고 우세정은 그의 머리를 만지며 웃으며 말했다.“그래, 안심하고 화장실에 가. 선생님이 수아 잘 보고 있을게.”만약 다시 수아를 잃어버린다면, 정말 살 수 없을 것이다.몸을 돌려 화장실 방향으로 걸어가던 도제훈은 모퉁이에서 유치원의 울타리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누군가 풀숲에 숨어 있는 모습을 주시하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다 보여, 나와.”그러자 1미터 높이의 풀숲에서 아치형 모양을
엄마와 여동생을 그렇게 좋아해주는 사람한테, 왜 저렇게 적대적인 걸까?그런 생각을 하며 강세윤은 단숨에 큰길로 뛰어갔다.그리고 한눈에 익숙한 차를 알아보았다.“아이고, 도련님, 도망가지 마세요…….”차에서 내린 양집사의 늙은 얼굴에 주름살이 더욱 깊게 패어 있었다. 매주 도련님이 한 번씩 도망갈 때마다 고생을 많이 한 탓이었다.양집사는 오늘 강현석이 돌아오면, 경호원 몇 명을 더 붙여 달라고 해서 저택 문을 지켜야겠다고 다짐했다.“도련님, 거기 서세요, 앞에 차가 있어요!”차 한 대가 강세윤을 향해 지나가는 걸 본 양집사는 곧 심장병에 걸릴 듯 놀랐다. 다행히도 그 차는 강세윤의 앞에서 잘 멈춰 참극이 일어나지 않았다.하지만 곧바로 그 차의 문을 열고 앉은 강세윤은 쏜살같이 도망가버렸다.“아이고, 잠깐! 세상에, 도망가지 마세요!”양집사가 힘들어서 숨을 헐떡이며 즉시 고개를 돌려 차에 앉아 분부했다.“빨리 앞차를 따라가요, 더 이상 도련님을 도망가게 할 수 없어요!”백미러를 통해 양집사가 탄 차가 따라오는 걸 본 강세윤은 바로 기사에게 말했다.“아저씨, 빨리 운전해서 뒤에 있는 차를 따돌려주세요.”운전대를 잡은 운전기사가 수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꼬맹이 너 돈은 가지고 왔니?”택시 기사는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수고비도 건지지 못할 게 걱정됐다.“당연하죠!”강세윤이 옷 주머니에서 닥치는 대로 돈을 몇 만원 꺼냈다. 처음 집에서 몰래 빠져나올 때는 돈을 안 가져와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지만, 이번에 나올 때는 몇 만원 찔러 넣고 나왔던 것이다.돈을 보고 안심한 기사는 순간 악셀을 밟았고 재빨리 앞에 있던 차 여러 대를 추월했다.그 뒤를 따르던 양집사는 정말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예전에는 도련님이 뛸 줄만 알았는데, 이제 차를 타는 것도 배우다니. 큰 도로에 여기저기 널려 있는 차들은 너무 위험했고, 도련님께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강현석이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게 뻔했다.차의 속도를 늦춘 양집사는 경호원들에게 너무
도예나는 도씨 그룹에서 태성 그룹과의 프로젝트 세부사항을 얘기하고 나서 차를 몰고 떠나려 했다.그러나 이때 귀를 찌르는 브레이크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고개를 돌려 큰 길을 바라보니 은색 스포츠카 한 대가 달리고 있었고, 네 살 난 아이가 스포츠카 앞에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그 아이가 경적 소리를 듣고 발걸음을 멈췄지만, 은색 스포츠카는 브레이크를 밟을 겨를도 없이 그대로 들이받았다.“세윤아!”도예나는 심장이 목구멍으로 빠져나올 것 같은 기분으로 자신의 차문을 발로 걷어차서 열고 무의식적으로 큰길로 달려갔다. 그러나 길에 차가 너무 많았고, 그녀가 달려가고 있을 때 강세윤은 차에 부딪혀 아스팔트 도로에 심하게 부딪혔다.주변 차들의 경적 소리가 순식간에 허무한 배경음이 되어 귓가에서 윙윙거렸다.도예나는 마치 구름 위를 밟는 듯 비틀거리며 걸어가서 강세윤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세윤아, 너, 너 괜찮아?”그리고 강세윤의 머리 뒤쪽에서 큰 피가 퍼지는 것을 보았다.핏빛이 안개처럼 도예나의 눈을 자욱하게 하며, 눈앞에 갑자기 4년 전 도씨 가문 창고에서의 그 장면이 떠올랐다.그날 밤, 그녀가 힘들게 네 명의 아이를 낳을 때 창고의 땅에도 핏물이 번졌다…….그녀의 마음은 갑자기 누군가에게 총을 맞은 것처럼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되었다.“예나 아줌마, 저, 저는 아줌마를 만나러 왔는데… 보고 싶었어요…….바닥에 누워 입꼬리를 살짝 치켜 뜬 강세윤이 어렵게 말을 하자 도예나는 비 오듯 눈물을 쏟아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 있던 은색 스포츠카는 갑자기 엔진을 작동시켜 사람들이 멍하게 있는 틈을 타 순식간에 큰 길로 사라졌다. 급하게 운전하는 바람에 연속으로 차 두 대를 들이받았고, 도로의 사람들이 욕설을 퍼부었다.“도련님, 왜 그러세요, 도련님!”양집사가 느릿느릿 다가와서 강세윤의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는 심장을 잡으며 두 눈을 뒤집고 갑자기 땅에 쓰러졌다.도예나는 정신없이 눈물을 닦고 양집사를 따라 함께 달
교통사고는 반드시 제때 치료해야 하니, 가장 가까운 이곳에서 일단 일차적인 치료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부들부들 떨며 차문을 열고 두 발을 내디딘 양집사는 차마 들어가지 못했다.피투성이가 된 도련님을 생각하면 두 다리가 풀릴 것처럼 걸을 수가 없어 병원 입구에 선 채 휴대폰을 꺼냈다.“나는 일단 혈액은행에 연락할 테니 자네가 병원에 들어가서 병원비를 내게.”경호원은 양집사가 나이도 많고 심신이 미약하다는 걸 알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병원으로 들어갔다.양집사는 성남시 제1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강세윤은 희귀한 마이너스 혈액이기에, 이런 작은 병원에서는 혈액 재고가 없을 게 분명하다. 일단 사람을 시켜 피를 보내와야 했다.“어젯밤 마이너스 혈액 산모가 와서 2천밀리미터를 다 써 버렸어요. 오늘 다른 곳에서 혈액을 가져오려고 했는데…….”성남시 제1병원 혈액은행 책임자의 목소리를 듣고, 양집사는 두 눈이 어두워져 하마터면 또 기절할 뻔했다.하지만 정신을 부여잡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그럼 마이너스 혈액은 언제 도착합니까?”“내일 오전 8시요.”양집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내일 오전 8시라니, 도련님은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다.병원과의 전화를 끊은 그는 손가락을 떨며 강현석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그때, 강씨 그룹.회의 중이던 강현석은 갑자기 테이블 위에서 휴대폰이 진동하는 걸 느꼈다.한 번 힐끗 휴대폰을 보니, 양집사였다. 강씨 집안에서 40여년간 일한 양집사는 낮에는 그에게 전화를 거의 하지 않았지만 요즘 강세윤이 늘 집에서 몰래 빠져나가면서 전화를 좀 빈번하게 하던 참이었다. 보아하니, 오늘 강세윤이 또 말을 듣지 않는 것 같다.강현석이 손짓하자 회의실이 갑자기 조용해졌고, 그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담담하게 물었다.“무슨 일이시죠?”“대표님, 제가 도련님을 잘 돌보지 못한 탓에 몰래 집을 나가셨어요, 그래서 사고가 났습니다!”양집사의 목소리가 울먹였다.“교통사고가 나서 도련님이 피를 많이 흘렸어요. 수혈이 필요한데,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