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오전, 청해 비치 호텔.꼭대기 층의 호화로운 연회장에 사람들이 북적북적 축하 인사를 나누며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청해 송씨 가문에서 백옥 불상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연회장의 정문에서 손씨 가문의 관리자가 웃는 얼굴로 손님들을 맞이하며 기쁘게 말했다. “어르신 감축 드리옵니다! 만수무강 하십시오!”“심씨 가문의 노부인께서 어르신의 송학장수를 기원하며, 당대 화가의 대작인 를 선물하셨습니다!”“장씨 가문의 가주께서 어르신의 하시는 일이 다 잘되길 바라는 뜻으로 금옥 불상을 선물하셨습니다……”손씨 어르신이 말했다. “손중천”, 온 얼굴에 웃음을 머금은 채로 연회의 메인 테이블에 앉아있는 손씨 어르신의 주름이 가득한 얼굴은 나팔꽃처럼 활짝 폈다.“콜록, 콜록!”손님들이 모두 올 때까지, 손중천은 여러 번 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두 손을 힘주어 내리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바쁘신 와중에도 이 노인네의 칠순 잔치에 참석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저희 손씨 가문이 청해의 이류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축하를 받으니 정말 영광입니다!”“정말 감사합니다!”와아아!연회장 안은 손님들의 박수 갈채와 환호성이 뒤섞여 쏟아졌다. 축하 인사를 건네는 사람도 있었다. “청해 손씨 가문이 이류 가문이라지만 저희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손씨 어르신께서 덕을 베푸시니, 모두가 손씨 가문을 찬양합니다. 정말 용제국의 초호화 가문답습니다!”“맞습니다! 손씨 어르신 아래로는 혜린 아가씨와 같은 특출난 손녀 따님이 계시니, 손씨 가문이 일류 가문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듣자하니 혜린 아가씨와 염구준 그 쓰레기는 이미 이혼하셨다고요? 서씨 어르신은 혜린 아가씨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시니, 좋은 일이겠죠?”“서씨 가문과 손씨 가문이라면 강력한 연합이네요. 저는 좋은 소식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축하 드립니다……”너나할 것없이 한 마디 씩 오가고, 손중천의 마음에 들만한 말을 저마다 한 마디 씩 하고 나니, 어르신의 얼
주작전존은 화려한 전투 갑옷을 입고 앞서 나아가자, 사대원 철위들 네 명은 관을 어깨에 메고, 연회장 대문을 직접 부숴, 주작전존을 따라 연회장 중앙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관을 무겁게 땅에 내리치며 일제히 외쳤다."생신 선물을 바칩니다. 손씨 어르신, 기쁘게 받아주시길 바랍니다."“과… 관짝 아니야?”남목관을 본 사람들은 아연실색했다.칠순 잔치에 관짝을 들고 오다니. 이건 뭘 의미할까?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뜻으로 볼 수 없었다.일부러 손중천의 기를 채우려는 의도 외엔 보이지 않았다. 손중천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염구준, 이게 무슨 짓이야!”손중천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참을 수 없는 화가 속에서 활활 타올랐다.칠순 잔치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염구준 때문에 분위기가 엉망이 되어 버렸다.더 이상 못 참아!“제 선물이 꽤 마음에 드셨나 보네요.”염구준은 당당하게 손중천을 바라보며 말했다.“제 아내와 딸은 5년 동안 모욕과 괄시를 받으며 살았습니다.”“북부를 지키려고 5년이나 전장에서 수많은 전쟁을 치렀지요. 정말 힘들게 고향에 돌아왔는데 처자식이 이런 대우를 받고 살았으니 제 마음이 어떨까요?”“어르신, 말씀해 보시죠!”손중천은 온몸에 피가 거꾸로 솟고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무엄하다!”그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염구준을 쏘아보며 고함을 질렀다.“염구준, 내가 널 못 죽일 것 같아?”손가의 친척들과 친한 지인들도 분분히 염구준을 비난했다.“염구준, 이건 너무 몰상식하잖아!”“어디 어린 것이 어른 존경할 줄 모르고 설쳐? 죽고 싶어?”“서 대표님도 한말씀 하시죠. 저놈을 어떻게 처리할까요? 살려서 돌려보내면 안 됩니다!”서재원이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염구준, 너….”“아직 네 차례 아니니까 입 닥치고 있어!”고개를 돌린 염구준은 그를 향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너와 손혜린도 죽어 마땅할 짓을 저질렀잖아!”“일주일 뒤에 희주 생일이야. 우리 딸 생일날에 너 손혜린이랑 손잡고 대문 앞에 찾아
그런데 이때!브레이크 밟는 소리와 함께 기다란 검은색 롤스로이스 밴이 병원으로 서서히 들어오더니 진중기 일행 앞에서 멈춰섰다.전신전 전주 전용 밴이었다!“가을아, 희주야, 이제 내려.”먼저 차에서 내린 염구준이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진중기는 의료진과 함께 다가가서 그들을 공손히 맞았다.“염 선생님, 이분이 손가을 씨겠군요? 저는 진중기라고 합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전구 국내 최고의 이비인후과 전문가들이에요. 최선을 다해 치료해 보겠습니다.”염구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부탁 드릴게요.”그런데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어딘가로 향했다.멀리서 이쪽을 바라보던 중년 남자가 경멸에 찬 미소를 지으며 시비를 걸어왔다.“누군가 했더니 너희들이구나! 염구준, 손가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내가 누군지 잘 봐!”염구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그의 장인 손태석의 형, 손태진이자 손씨 가문의 장남!“멍청한 녀석들!”손태진은 앞길을 가로막은 두 전사를 밀치고 경호원들과 함께 염구준에게 다가와서 삿대질했다.“군에 인맥이 좀 있나 봐? 뭐가 그렇게 잘나서 잘난 척이야?”“내 아들 입천장에 물집이 잡혀서 치료 받아야 한다고! 수족구병 알아, 몰라? 나 급해!”“어쩐지 한 선생이 오늘 결근이라더니 네 녀석이 잡아두고 있었구나! 시간 지체해서 내 아들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너부터 죽을 줄 알아!”염구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노려보았다.조금 전 손중천의 생신 잔치에서 보이지 않더니 아들이 아파서 병원에 방문했던 것 같았다. 누가 손중천 아들 아니랄까 봐 입만 열면 욕설이라니! 정말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부자였다.손가을은 희주를 안은 채, 염구준과 손태진을 번갈아 보았다.일이 왜 이렇게 꼬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기대를 안고 용기 내서 병원에 왔더니 큰아버지를 만날 줄이야! 과거에도 큰아버지와 그녀의 아버지는 승계권을 위해 피 터지게 싸웠다.그 모습에 분노한 손중천은 승계권을 다음 대에 물려주겠다고 선포했고 그래서 데
"눈은 뒀다 뭐해!" 곽승환은 분노의 주먹과 발차기로 손태진을 때려눕혔다. 생사 불명할 정도로.또 한 발의 날려 차기로 옆에 멍하니 있던 세 명의 경호원을 때려눕히고, 그들의 발목을 잡고, 손태진과 함께 모두 차에 끌어올렸다. 그리고 염구준에게 예의 바른 경례를 하고 시동을 걸어 떠났다.다시 한번 놀랐다!곽승환이 왔다 간 시간은 총 30초도 채 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딱 한마디만 하고 깔끔하게 상황정리 하고 축 늘어진 네 구의 몸통을 끌고 사람들의 시선에서 사라졌다.이것이 바로 청해 군사 작전부 수장의 작풍이란 말인가?뜻밖이었다."꿀꺽!"손가을은 멍하니 차가 떠나는 모습을 보다가 침을 삼켰다. 천천히 두 손을 들었다. 손을 들고 수화로 뭔가를 말하려 했으나 어떻게 마음속의 의문을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정교하고 예쁜 눈썹을 가볍게 찡그려졌다. 말할 수 없이 귀엽고 이뻤다.염구준은 손가을의 귀여운 표정을 보고, 마음속이 부드러워졌다.만약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그녀는 지금 이 순간 무슨 말을 했을까?틀림없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 가장 듣기 좋은 웃음소리였을 것이다!"진 원장님." 고개를 돌려 진중기를 바라보며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제 아내의 수술을 선생님이 직접 집도해 주세요!”“수술 과정에 가시화 최소침습술로 인후의 화상 흉터 표면을 제거하고 혈락신경을 모두 정리해 주세요.”"마지막으로…”말을 하다가 손가을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가을아, 선생님한테 드려.”손가을은 고개를 끄덕이고 주머니에서 작고 귀여운 분홍색 천어화를 조심스럽게 진중기에게 건넸다."이건…." 진중기는 꽃을 받아 자세히 살펴보더니 동공이 점점 커졌다.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뛰며 이마에 땀이 나고 손발이 심하게 떨렸다.이, 이, 이……전국에 한 송이밖에 없는 천조국 국주의 궁궐에서 정성껏 키워낸 진기한 품종, 천조국의 국화, 천어화였다.“이… 이 꽃은….”진중기는 두 손으로 천어화를 받들고 조심스럽게 염구준을 바라보았다.그는 긴장
“손혜린?”손혜린 세 글자를 보자 손태석은 좋았던 기분이 다 사라지고 순식간에 표정이 굳었다.5년 전, 그들이 손중천에 의해 가문에서 내쫓기는 상황을 만든 범인이 바로 손혜린이었다.거만하고 이기적이며 악랄하기까지 한 조카.목적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칼춤을 추더니 끝끝내는 손영그룹 부사장 자리까지 꿰찼다. 평소에 그와 진숙영에게 모욕적인 말을 서슴지 않았고 툭하면 월급을 삭감하거나 주기로 한 보너스를 주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손 사장.”하지만 전화를 안 받으면 또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을 알기에 그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로….”탁!수화기 너머로 무언가 던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혜린은 인사자료를 바닥에 내팽개치더니 냉랭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손태석 씨, 진숙영 씨, 오늘 부로 해고예요.”“난 그래도 옛정을 생각해서 가문에서 쫓겨난 당신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어요. 그래서 당신들이 여태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죠.”“그런데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당신들 그 잘난 사위 염구준이 할아버지 생신 잔치에서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알아요? 그 인간이 할아버지한테 선물이랍시고 관짝을 보냈어요!”쾅! 두드러지게 낡고 초라한 거실에서, 손태석이 벼락에 맞은 듯 순간적으로 정신이 혼미해졌다. 염, 염구준... '어르신님 칠순 잔치에 관을 선물로 보내다니?! 장수용 황금 불상을 준비했는데, 어떻게 된 거지?!불상은 어디로 갔을까? 그게 어떻게 관으로 바뀌었지?!'"황금, 황금 불상 여기에 있어요."옆에서 진숙영의 목소리가 무의식적으로 떨렸고, 손을 뻗어 거실 구석진 곳을 가리켰다. 그녀는 마치 냉기 가득한 지하에 떨어진 것처럼 온몸이 떨렸다.망했다!그들이 힘들게 모은 돈과 딸이 목욕탕에서 일하면서 모은 돈을 모두 이 작은 황금 불상을 사는 데 사용했다. 그건 다 어르신의 칠순 잔치 자리에서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염구준이 생일잔치 자리에서 소란을 피우고 이런 어리석은 짓까지 해버리게 된 것
'발신- 주작'메시지를 전송하고 나서야 염구준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엔 아직도 살기가 느껴졌다.'용운 그룹이 뭐길래?전 신전 전주의 수단이 무엇이지?’3일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오늘은 손영 그룹과 용운 그룹이 계약을 체결하는 날이었다."용운 그룹이라니!"용운 그룹의 거대한 사옥 앞에서 손혜린은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120여 층이나 되는 건물은 높이만 해도 400미터가 넘었는데 청해의 랜드마크나 다름없었다. 이 건물의 주인은 최근 몇 년 사이 급부상한 용씨 집안으로, 명성이 자자한 재벌가였다. 용운 그룹은 전국에 이미 수많은 지사를 두고 있었다. 손씨 집안은 그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였다. 두 가문 사이의 격차는 실로 어마어마했다."안녕하세요."손에 가죽 서류 가방을 든 손혜린이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차분하게 로비를 걸었다. 그녀의 가느다랗고 요염한 허리가 유독 눈길을 끌었다. 안내 데스크 여직원을 향해 미소 지은 손혜린이 용건을 말했다."용 대표님께 전해줄래요? 손영 그룹 부사장 손혜린이에요. 협력 프로젝트 건으로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열두 명의 안내 데스크 여직원들은 모두 눈처럼 희고 아름다웠다. 손혜린을 쓱 훑어본 한 여직원이 그림 같은 미소를 지으며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초대장을 보여주시겠습니까?"초대장이라니, 손혜린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미 합의를 마친 프로젝트였다. 오늘 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끝날 일이란 말이다.용운 그룹 대표를 만나려면 초대장이 필요하다는 말을 전혀 들어본 적 없었다. 손태석, 이 노망난 늙은이가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방금 말했잖아요, 나 손영 그룹 부사장 손혜린이라고요."손혜린이 정색하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거의 성사된 거나 다름없는 프로젝트예요. 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되는 건데, 초대장이라니요? 이게 어떤 계약인지 몰라서 그러나 본데, 1조가 넘는 큰 프로젝트라고요. 계약에 차질이 생기면 당신이 책임질 거예요? 당장 대표님께 연락해요.
가문에서 쫓겨나 이곳 청해에 정착하여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올라왔다. 가까스로 이류 가문으로 거듭난 그의 총자산은 1조를 조금 넘어섰다. 이번 계약이 무사히 체결된다면 손씨 집안의 지위가 상승하는 건 물론 당당히 청해의 일류 가문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계약... 얼른 계약을... 잠깐!"떨리는 입술로 연신 계약을 중얼거리던 손중천이 불쑥 고개를 돌리며 양진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이렇게 중요한 소식을 내가 몰랐다는 게 말이 되나! 책임자가 누구야? 혜린이 아니었나? 어찌 내게 일언반구도 없어!"양진이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혜린 아가씨께서 직접 어르신을 뵙고 말씀드리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제가 연락해 볼까요?""됐어."손중천이 고개를 저었다. 손씨 집안의 미래가 걸린 일인데 고작 통화로 끝낼 수는 없었다."혜린이 호출해."다시 소파에 앉은 손중천이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반 시간 내로 당장 달려오라고 해."양진이 서둘러 손혜린에게 연락했다. 어르신은 어쩐지 잔뜩 화가 난 것 같았다.......반 시간 뒤, 시퍼렇게 질린 손혜린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별장에 들어섰다.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죄송합니다. 제가... 망친 것 같아요."진작 알아챘던 손중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눈빛만으로도 손혜린을 찢어 죽일 기세였다.쓸모없는 것!손혜린의 본명은 진혜린이었는데 사실 손씨 집안의 먼 친척이었다. 손씨 집안은 자손이 부족했다. 수없이 많은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자식을 볼 수 없었던 맏아들 손태진은 하는 수 없이 방계의 사내아이를 양자로 입양했다. 둘째 아들 손태산은 주색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작년에 겨우 결혼했다. 그리고 그의 셋째 아들 손태석은 다리를 절었으며 슬하에 딸 하나밖에 없었다.5년 전, 그는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진혜린을 손씨 집안의 아가씨로 들였다. 그녀의 부추김으로 손태석 일가는 가문에서 쫓겨났으며, 어처구니없는 가짜 결혼 사건도 그해 벌어진 일이었다. 손중천은 자기 친
염구준의 넓은 어깨를 뒤에서 바라보던 손태석과 진숙영은 말문이 턱 막혔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위 녀석이 지금 그들의 편을 들어주고 있는 건가?"구준 씨."입술을 깨문 손가을이 염구준 곁으로 다가가며 그의 옷소매를 슬며시 끌어당겼다. 눈빛이 어쩐지 퍽 간절해 보였다.부모님에겐 이 일자리가 꼭 필요했다. 용운 그룹과의 중요한 거래인만큼 손씨 어르신도 안달 내고 있을 게 뻔했다."괜찮아."염구준은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으며 손가을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이윽고 출입문을 향해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손혜린, 같은 말 두 번 하게 하지 말고 썩 꺼져. 아니라면 거기서 경호원 노릇이라도 할 셈이야? 어쩌지, 너 같은 건 필요 없는데."손혜린이 이를 빠드득 갈았다. 살면서 이딴 취급은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그녀였다. 그러나 손태석 부부를 데려가지 못한다면 손중천이 그녀를 죽이려 들 것이다."염구준!"화를 억누른 그녀가 짓씹듯 말했다."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야? 우린 부부의 인연도 맺었던 사이잖아. 아무리 형식적인 부부였다지만 난 당신 전처라고! 당장 두 사람 내보내. 그럼 우리 사이의 빚도 없던 셈 칠게."전처라고? 어찌 이런 뻔뻔한 말을 내뱉을 수 있단 말인가?이혼 서류가 청해의 길거리 어딘가에 날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애초에 잘못된 이 결혼은 이혼 도장을 찍은 날 완전히 깨진 거나 다름없었다.그의 아내는 오직 손가을 한 사람뿐이었다."간단해."아이를 품에 안은 염구준이 출입문을 향해 무심한 시선을 던졌다."부탁할 땐 성의를 보여줘야지. 다시 싹싹 빌어. 이건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라는 걸 명심해. 설마 내가 비는 방법까지 가르쳐 줘야 하나?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네가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손혜린이 악에 받친 눈빛으로 이를 꽉 악물었다. 피처럼 붉은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이 당장이라도 손바닥을 파고 들어갈 것 같았다.감히 염구준 따위가, 자신에게 부탁을 운운하는 건가? '찢어 죽여도 시원찮은 자식.'"염 서방..
염구준이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여동생을 데려가도 되지만 두 가지 조건이 있어.”갑자기 데려가도 된다는 말에 두 자매는 깜짝 놀라며 서로 눈을 마주쳤다.생각보다 일이 쉽게 해결해서 의아했던 모양이다.배아현이 기회를 놓칠 세라 다급히 물었다.“무엇을 원하는지 얼마든지 말씀하세요.”염구준이 시원시원하게 나오니 그녀도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이번 일만큼은 피를 보지 않고 일을 해결하는 것을 바랐다.“첫째, 내게 기운을 숨기는 방법을 알려주고 둘째, 나 대신 소식을 퍼트려줘.”그는 간략하게 조건을 제시하고 상대방이 대답하길 기다렸다.만약 받아들이면 여기서 끝내고 아니면 바로 싸우면 그만이었다.염구준의 사전에 흥정하는 것은 절대 존재하지 않았다.“어림도 없는 소리, 기운을 숨기는 방법은 우리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이에요.”배추현이 어림도 없다는 듯 눈을 희번득거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하지만 그녀의 말에 누구도 대꾸하지 않았다.솔직히 염구준의 눈에 드는 물건들은 모두 범상치 않았다.일단 이 비법을 배우면 기운을 폭발시켜도 상대방이 실력을 알아차릴 수 없게 된다.“알았어요. 그렇게 하죠.”배아현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바로 대답하더니 두루마기를 꺼내 건넸다.“대신 부탁이 있습니다. 염 선생님과 대결하고 싶은데 받아줄 수 있나요?”“가벼운 대결이라면 가능해.”염구준은 말하면서 두루마기를 힐끗 쳐다보았다.‘익기법.’그는 꽤 마음에 들었는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소식을 퍼트리는 것은 그렇게 급하지 않으니 이 물건이 먼저 손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안심할 수 있었다.배아현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 질문했다.“여기 오래 머물 수가 없어서 언제면 가능할까요?”그녀는 이번 행차의 목적인 배주현을 구했으니 하루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가문에서 반보천인 고수 2명이 갑자기 자리를 비우면 적들에게 약점이 되기 십상이었다.“소봉산에서 기다려. 먼저 볼일 처리하고 갈게.”어쨌든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을 테니 염구
“환각제를 섭심백이라고도 불러요. 애벌레의 체액을 추출하여 만든 거라 본체가 바로 해독약이에요.”간단하게 설명을 끝낸 배아현은 서슴없이 벌레를 자기 입에 넣고 삼켜버렸다.이것으로 벌레를 먹어도 문제없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었다.상대방이 이 정도로 나오니 염구준은 고민하지 않고 동의했다.“좋아. 일단 믿어보지. 하지만 수작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일단 그가 나서서 결정하면 가족들도 믿고 따를 것이다.“안심하세요.”배아현은 고개를 끄떡이며 앞으로 다가가더니 벌레를 손태석의 입에 넣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손태석은 거짓말처럼 안색이 좋아지고 호흡도 안정되었다.염구준이 손을 뻗어 그의 맥을 짚어보았다.별다른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배씨네 자매를 쳐다보았다.“얼마면 깨어날 수 있어?”“길어서 한 시간 내로 깨어날 수 있어요. 이제 넷째를 만나러 가도 됩니까?”“배주현이라면 무사해. 먼저 다른 사람들도 해독해.”“그러죠.”쌍방은 아주 짧은 대화로 조건을 주고받았지만 속으로 여전히 서로를 경계했다.겉보기에 평온해도 암암리에 싸늘한 바람이 부는 것이 언제든 싸울 것 같았다.이어서 배씨네 두 자매는 다른 사람들도 해독해주고 염구준을 따라 배주현을 만나러 병실에 들어왔다.병실에 들어온 순간, 미이라처럼 붕대를 감은 여동생을 보고 배추현이 충격을 먹었다.갑자기 기운을 폭발시켜 일장을 펼치더니 염구준에게 돌진했다.“나쁜 새끼! 내 동생한테 무슨 짓을 했어?”보통 평범한 반보천인 수준에 이르러야 이렇게 강력한 기운을 발사할 수 있었다.쿵!하지만 미리 대비한 염구준은 똑같이 장법을 취하며 상대방의 일장을 가볍게 막아냈다.아직 상대방의 실력을 잘 알지 못해 전력을 사용했다.두 손바닥이 부딪치는 순간, 기운이 사나운 파도처럼 사방으로 퍼져 복도까지 흘러 나갔다.“윽!”순수한 염구준의 기운을 감당하지 못한 배추현이 입가에 피를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단 한 초식에 가벼운 내상을 입고 말았다.“염 선생님, 잠깐만요. 저희는 싸우러 온
의사는 바쁘게 움직이면서 각종 검사를 진행했지만 결국 병을 일으킨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염구준이 예상했던 결과와 비슷하게 이 병은 일반적인 의술로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강호에서 만들어진 환각제는 강호의 특제 약으로만 해독할 수 있었다.고통스러워하는 장인어른의 모습을 보니 더는 참지 못하고 병실에서 나갔다.그때 손가을의 휴대폰이 불이라도 난 듯 직원 가족들에게서 연락이 왔다.그들도 똑같이 두통과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구급차를 불러 병원에 이송 중이라고 했다.이 사람들도 배주현의 ‘추구자’임이 틀림없었다.탕!한 병실의 문이 누군가의 발에 차여 종이 짝처럼 부서졌다.부서진 문 뒤에 선 사람은 저승사자처럼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었다.“염 선생님!”마침 보초를 서던 호찬이 그를 보고 공손하게 인사했다.그 옆에 미이라처럼 온몸에 붕대를 감은 배주현이 꽁꽁 묶여서 병상에 누워 있었다.저승사자의 정체를 알아본 그녀는 깜짝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본인이 무슨 짓을 했는지 찔리는 모양이었다.염구준은 폭발할 것 같은 분노를 반복하여 억눌렀다.“환각제를 흡수한 사람들이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다는데 대체 무슨 상황이야?”지금 해독약도 받지 못했고 이제마도 청해에 도착하지 않아서 당장 죽일 수도 없었다.“금단현상이라 생명에 위험은 없어요. 우리 언니들이 갖고 온 해독약을 먹으면 바로 나아요.”배주현은 자신이 살아남을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빠르고 정확하게 설명했다.“당장 전화해서 오라고 해!”염구준은 이를 악물며 으르렁거렸다.‘해독약도 없으면서 뭐 하러 환각제를 사용해?’당장이라도 배주현을 죽일 기세였다.“구준 씨, 아빠 병실에 여자 두 명이 왔어. 벌레를 아빠한테 먹여서 치료하겠다는데 빨리 가서 봐.”그때 손가을이 허둥지둥 달려서 병실로 들어왔다.“치료? 가 보자.”그는 아내를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배주현의 언니가 왔다는 것을 눈치채고 왠지 걱정이 되었다.지금 손태석의 병실에 키가 훤칠하고 면사포를 쓴 두 여자가 침
“이제 앉자!”밥을 먹는 동안은 온 가족이 웃음꽃을 피우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즐겼으나 식사가 끝난 후에는, 손태석이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지더니 고통스러운 기색을 보였다.“왜 그러세요?”염구준은 예리한 감각으로 손태석의 이상을 가장 먼저 감지하고 다급히 물었다.“끄아아악...”그러자 손태석이 갑자기 가슴이 찢어지게 비명을 지르며 양손을 허공에 마구 휘둘렀다.눈앞에는 팔팔 끓는 샤브샤브 국물이 있었기에, 상황은 매우 위험했다.“다들 조심해!”염구준은 가족들에게 경고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기운을 내보내 손태석을 제압했다.그 덕분에 손태석은 움직임을 멈췄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며 얼굴은 땀범벅이 되었고 표정은 일그러졌다.이 광경을 본 주변 손님들은 깜짝 놀라며 하나둘씩 멀찍이 물러서서 지켜보았다.“여보, 당신 왜 그래요?”진숙영은 제압 당한 손태석을 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사태에 모두가 당황했다.손가을 역시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다급히 외쳤다.“구준 씨, 아빠 왜 이러는 거야?”청해시 비지니스계의 여왕으로 불리는 손가을도, 아버지가 위급한 상황에는 완전히 동요하고 말았다.“급성 위장염인 것 같아. 병원 가자.”염구준은 가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일단 선의의 거짓말을 하고는 빠르게 손태석의 몇몇 혈자리를 눌러 막아놨다.지금으로서는 근본적인 치료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 그저 손태석의 고통을 덜어줄 수밖에 없었다. ‘급성 위장염이라고?’손가을은 염구준의 말이 의심스러웠지만, 논쟁할 시간이 없어 손태석을 우선 병원으로 옮기려고 했다.염구준은 곧장 손태석을 안아 들고 빠르게 식당을 빠져나갔다.이 모습을 구경하던 손님들은 웅성거리며 작은 소리로 말들을 주고받았다.“비명을 저렇게 지르는 거 보니 위암 말기인가 보네.”“딸이 저렇게 대단한 사업가인데 벌써부터 아프다니. 돈도 못 쓰고 가게 생겼어.”“좋은 사람이었는데, 안타깝네...”그들의 말은 지나치게 비관적이었지만 그만큼 손태석의 끔찍한 비명소리에 놀
“너무 잘 됐다!”염희주는 이 광경을 보자마자 소파 위에서 두 팔을 휘저으며 기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걸려있었다.그녀는 많이 알지 못하지만 가족이 싸우고 사이가 틀어지는 건 원하지 않았다.손가을은 남편을 바라보며 엄지를 치켜세우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그만 있으면, 어떤 어려운 일도 해결될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그룹 내에서 몇몇 직원이 염구준과 배주현이 보안실에서 단둘이 있었다는 보고를 해왔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염구준은 가족도 전부 모였고, 일도 전부 해결되었으니 훈훈하게 마무리 할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시간도 늦었으니, 다 같이 외식이나 하러 갈까요?”이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그들은 차를 타지 않고, 가까운 곳에 있는 한 샤브샤브 가게까지 걸어갔다.불편한 일이 사라지자, 길을 걷는 동안 모두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손 대표님, 지금 자리가 없어서 다음 자리가 나오는 대로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카운터 앞에서, 홀 매니저가 긴 대기 줄을 바라보며 공손하게 말했다.눈앞의 여자는 청해시 비지니스계의 여왕이라 그가 감히 건들지 못하는 대상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특혜를 이용해 그녀가 새치기 하도록 도와주려고 했다.예정에 없던 일정인지라 염구준도 사전 예약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하지만 주변에 줄을 서 있는 손님들은 그 말을 듣고도 감히 대놓고 불평할 수 없어 못 들은 척 했다.청해시에서 손가을을 모르는 사람은 두 부류뿐이었는데, 하나는 관광객이고, 다른 하나는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있던 사람들이었다.그러나 손가을은 새치기를 하지 않고, 정중하게 답했다.“괜찮아요. 번호표 주세요. 저희도 줄 서서 기다릴게요.”이런 작은 특혜는 그녀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네, 대표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홀 매니저는 속으로 안도했다. 그렇게 되면 자신도 미운털이 박힐 일을 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그 후 손가을은 번호표를 받아 가족들과 함께 입구의
염구준은 그녀의 대답에 만족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가 분부했다.“호찬, 저 여자 가둬두고 네가 직접 감시해. 죽지 않도록 신경 쓰고.”“예!”호찬은 공손히 답한 뒤, 그녀를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의아했지만, 감히 물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남녀 단둘이서 한 방에 있으면 대부분이 가슴 떨리는 일을 하지 않나?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그들은 피 튀기는 싸움을 했다.염구준은 로비로 걸어가 기운을 내뿜어 공간에 남아 있던 환각제의 향기를 걷어냈고, 그가 향기를 없애자 사람들의 정신이 점차 맑아지기 시작했다.상대방의 수법을 알기만 하면 해결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직원들은 제정신이 돌아오면서 전에 했던 행동들을 떠올리고 경악했다.“망했다. 어제 그 여자 때문에 와이프랑 싸웠어. 휴, 오늘 집 가면 무릎 꿇어야겠네.”“젠장, 아침에 플래티넘 목걸이 선물했는데, 당장 가서 돌려받아야겠어.”“내가 미쳤었나? 왜 그 여자를 감싸고 돌았지?”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방금 전까지의 행동이 마치 꿈속 일처럼 느껴졌다.염구준은 직원들이 제정신을 차린 것을 확인하고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다들 뭐하는 거예요? 일 안 하면 이번 달 개근상 없습니다.”“네! 바로 일하러 가겠습니다, 염 선생님!”직원들은 서둘러 자리로 돌아가 업무를 시작했다. 다만, 이 며칠간의 혼란스러운 시간을 차츰 회복하며 이해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그 후, 휴게실에 들어간 염구준은 강제로 의자에 묶여 있는 손태석을 발견했다. “네가 감히 나한테 이럴 수가...”그러나 염구준은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기운을 뿜어 손태석을 강제로 정신 차리게 했다.“이제 괜찮으세요?”손태석은 정신이 돌아오면서 지난 며칠간의 일이 기억나 두 눈을 크게 뜨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에휴.”“내가 이 나이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체면이 말이 아니네.”표정에도, 말에도 깊은 죄책감이 어려있었다. 집 앞.염구준과 손태석은 문 앞에
“하, 또 만능 전당포네.”염구준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나지막히 중얼거렸다.이 세력은 철저히 중립적이었다. 돈만 있다면 누구든 의뢰를 올릴 수 있으니까 말이다.그냥 돈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는 전형적인 시스템이었다.그리고 의뢰인의 정보는 철저히 비밀로 유지되며, 돈만 지불하면 다른 이가 알아서 문제를 해결해주니 아무런 위험도 없었다.과거 염구준도 이들을 조사하고, 용하국에 있는 지부를 박살낸 적이 있었으나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이제, 가도 될까요?”배주현은 염구준이 반응하지 않자 조심스럽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미 일이 탄로 난 이상, 더 이상 현상금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살아서 돌아갈 수만 있어도 다행이었다.“해독제 내놔.”염구준은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진지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 해독제를 요구했다.배주현의 몸에서 풍겨 나오던 향기는 강력한 환각제를 포함하고 있어 장시간 흡입하면 뇌에 손상을 입힐 수 있었다.즉, 그녀가 남자들을 유혹할 수 있었던 것은 약물과 매혹술이 결합된 결과라는 것이다.“무슨 해독제요?”배주현은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자신을 오해했다는 듯 억울함을 토로했으나 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그녀가 사용한 환각제는 일반적인 향수와 같은 냄새를 풍겼고, 자연스럽게 들이마시게끔 설계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간파할 줄이야.’쾅!염구준은 다시 한번 기운을 내뿜어 그녀를 강하게 밀어붙였고, 이에 배주현은 뒤로 튕겨 나가 벽에 세게 부딪쳤다.바로 이 한 방에 그녀는 치명상을 입었다.“커헉!”강한 충격에 그녀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로 피를 토했으나 계속 해명했다. “그건 독이 아니에요,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고요! 정말로 해독제 같은 건 없어요!”저벅, 저벅, 저벅.염구준은 말없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배주현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그녀의 심장은 염구준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빠르게 뛰었고,
“넌 왜 여기 온 거지?”염구준은 말장난을 받아주지 않았고 몸을 돌려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차갑게 물었다.‘겨우 이정도밖에 안 되는 놈을 내가 못 이길 리가.’하지만 배주현은 포기하지 않고 더 짙은 향기를 풍겼다. 그녀는 그녀의 능력에 자신이 있었다.이윽고 배주현은 가느다란 허리를 흔들며 염구준 앞으로 걸어가 손을 뻗어 그의 넓은 가슴을 어루만지려 했다.“염 선생님, 참 건장하시네요. 제가 또 건장한 사람 좋아하는데.”“흡!”그러나 염구준은 갑자기 힘을 내어 기운으로 향기를 옅게 만들고 배주현을 밀어냈다.그녀에게서 풍기는 향기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려서였다.펑!갑작스러운 공격에 배주현은 양팔을 교차해 얼굴을 보호하면서 전신의 힘을 끌어모아 막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벽 끝까지 밀려나고서야 겨우 제대로 서 있을 수 있었다.‘단경 무성이네?’“계속 연약한 척 해보지 그래?”염구준은 기운의 흐름을 감지하고는 조롱하듯 말했다.그는 처음부터 그녀가 수상하다고 생각했었으나 상대방이 무인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반보천인의 경지에 있는 염구준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그녀가 기운을 감추는 방법이 매우 특이했기 때문이었다. “아프잖아요!”배주현은 계속 유혹하기 위해 애교를 부렸으나 인내심을 잃은 염구준은 순식간에 돌진해 그녀의 새하얀 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휙.“죽고 싶으면 내가 도와줄게.”상대방이 계속해서 꼼수를 부리니 더 이상 살려둘 이유도 없었다.말을 마친 뒤, 그의 손에 힘이 더해졌다.“크흑... 뭐든지... 묻고 싶은 거... 다 물어보세요.”배주현은 목숨이 위협 당하자 그제서야 얌전해졌다. 그녀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네가 아는 모든 걸 말해.”퍽!염구준은 그녀를 바닥에 내던지며 서늘하게 말했다. 말을 하는 그의 몸에서는 어마무시한 기운과 함께 살기가 가득 뿜어졌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하면 즉시 베어버릴 것처럼 말이다.“컥, 컥!”바닥에 떨어진 배주현은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
사람들 사이에서는 낯익은 얼굴도 보였는데, 바로 손태석이었다.“구준아, 대체 뭐 하는 짓이야?”장인어른의 질책에 염구준은 평범한 외모의 여자가 이렇게까지 매력이 크다는 것에 놀랐다.그렇다고 유혹을 당한 사람들을 전부 해고 시킬 수도 없는 일이었다.그들은 단순히 배주현에게 홀렸을 뿐, 엄밀히 말하면 큰 잘못을 한 건 아니었다.배주현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눈물을 살짝 머금으며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여러분이 절 이렇게 아껴주시다니, 정말 감동이에요. 많이 보고 싶을 거예요.”그녀의 가녀린 모습에, 남자 직원들은 본능적으로 그녀를 보호하고 싶다는 감정이 들었다.배주현은 떠날 생각이 없어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은 직원들은 더욱 다급해하며 그녀를 말렸다.‘대단한 수법이네.’염구준은 속으로 놀라며 생각했다. 방금 전에 십몇초 눈을 마주친 것으로 그 또한 그녀에게 빠져들 뻔 해서였다.단순한 매혹술도 아니고, 환술도 아니라서 상대방에게 빠져드는 걸 쉽게 막을 수가 없었다.손태석은 더욱 다급해하며 말했다. “구준아, 어서 주현 양더러 남으라고 해!”자신의 장인어른이 완전히 매혹되었다는 걸 깨달은 염구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집중 타겟이었겠지.’“다들 조용히 하세요!”그의 우렁찬 목소리가 로비 전체에 울리자 시끄럽던 공간이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이 일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으나, 더욱 중요한 건 아직 배주현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그녀의 목표가 무엇인지,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그리고 그녀의 뒤에 있는 세력이 누구인지에 대해 그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따라와.”그는 배주현을 가리킨 뒤, 사람들을 무시하고 보안실 쪽으로 걸어갔다.“후훗.”이에 배주현은 자신이 성공한 줄 알고 입꼬리를 올리고는 재빨리 염구준의 뒤를 따라갔다.그 순간, 적지 않은 남자 직원들이 염구준이 혼자 배주현을 독차지하려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머지 여성 직원들은 염구준도 유혹에 넘어갔다고 생각해 손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