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지금은 퇴역한 사위가 돌아와 그들의 복수를 대신해 주고 있지 않은가! 비록 전우의 인맥일지라도,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런 기회가 없을지라도 괜찮았다.여전히 아이를 안은 채 두 사람의 뒤에 서 있던 염구준이 무심하게 내뱉었다."손혜린, 잊지 마. 3일 뒤면 희주 생일이야. 생일 연회에 너랑 서재원, 두 사람 모두 희주에게 무릎 꿇고 사과해야 할 거야. 같잖은 자존심 지키려다 망하고 싶으면 어디 마음대로 해봐."손혜린은 당장이라도 욕설을 퍼붓고 싶었지만 간신히 부들거리며 화를 억눌렀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계약이었다. 용운 그룹과 계약을 체결한 뒤 복수해도 늦지 않았다. 그녀는 반드시 염구준과 손가을 집안을 모조리 박살 내겠다고 다짐했다."정말 죄송해요. 두 분께 사과드립니다."손혜린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꾹꾹 참아내며 간신히 미소를 쥐어짰다."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네요. 용운 그룹에 연락해서 계약 준비를 하라고 할게요. 바로 집 앞에 제 차를 세워두었으니 두 분을 회사까지 모실겠습니다."떠나는 순간 그들의 뒤에 있는 염구준을 표독스럽게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이를 악문 채 절뚝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5시간이나 허리를 숙이고 있었더니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온몸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댔다."장인어른, 장모님,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염구준과 손가을이 나란히 서서 미소 지으며 두 사람을 배웅했다. 손혜린을 흘깃 쳐다본 염구준이 보란 듯이 말을 보탰다."용운 그룹과의 계약 건은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두 분께 차려진 몫은 꼭 받게 되실 겁니다."두 사람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들에게 차려진 몫이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그동안 무수한 거래를 성사했음에도 배당금이나 상여금은 전부 손혜린 차지였다. 이번 계약을 마지막으로 쫓겨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상여금 따위는 꿈도 꾸지 않았다."다녀오지."씁쓸한 표정으로 인사하던 손태석은 이내 기운을 차리고 진숙영을 이끌고 밖으로 나섰다.장인, 장모를 눈으로 배웅하던 염구준의 입가에 희미한
그러나 용성우는 두 사람을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 쌩하니 스쳐 지나갔다. 손태석의 손을 맞잡더니 이번에는 진숙영과도 악수하며 반갑게 말을 걸었다."손 선생님, 사모님, 두 분을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두 분께서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이번 협상을 위해 열과 성의를 다하셨다는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제가 직접 두 분을 모셔야 하는 것을... 혹 우리 직원들이 두 분을 홀대한 건 아니겠지요? 부족한 점이 있었다면 부디 두 분께서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참, 제가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어서 가져오게나!"재빨리 다가간 경호원이 정교한 순금 카드를 용성우 앞에 공손하게 내밀었다."이건 저희가 특별 출시한 VVIP 카드입니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물건이지요."용성우는 손태석과 진숙영 앞에 조심스럽게 순금 카드를 내밀었다."이 카드를 소지한다면 우리 용씨 가문 휘하의 모든 장소를 전액 무료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제 체면을 봐서라도 받아주시지요!"현장에 있는 모든 이들은 할 말을 잃은 채 눈만 도륵도륵 굴렸다.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용씨 집안 가주 용성우가 손태석과 진숙영 부부에게 이다지도 공손한 태도를 보이다니? 심지어 이건 공손함을 넘어서 마치 비위를 맞추는 것 같지 않은가? 대체 왜?두 사람은 손씨 가문에서 쫓겨난 몸이었다. 기업 내에서도 가장 보잘것없는 직책을 맡고 있기도 했다. 복지나 상여금은 차치하고 툭하면 기본급도 깎이는 처지였다. 딱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의 생활비를 제공받는 셈이었다.그런데 오늘, 그 대단하신 용성우가 두 사람을 예우하며 세상에 단 하나뿐이라는 VVIP 순금 카드를 내민 것이다. 게다가 손씨 어르신과 손 부사장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으셨다.사람들은 혹시 카드의 주인이 뒤바뀐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손태석은 차마 용성우가 내민 귀한 선물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감히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주님, 어찌 저희에게 이런 귀한 걸 내어주시는 겁니까. 이것 참... 그저 황송
'왜냐하면 아우와 제수씨는 그분의 장인 장모거든.'용성우는 어안이 벙벙한 두 사람을 쳐다보며 드디어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오늘 그는 실로 돈 보따리를 건네러 온 것이다. 손태석과 진숙영의 비위를 잘 맞출 수만 있다면 그분을 위해 큰 공을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주군 앞에서 돈이 대수란 말인가?줄만 잘 탄다면, 그분 말 한마디에 하루아침에 10조, 20조도 벌 수 있었다."다들 이의 있나?"용성우의 지시에 따라 계약서가 회의실 대형 스크린에 공개되었다. 손중천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을 둘러본 그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없으면 이대로 계약하지."사람들이 스크린 속 조항들을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손태석과 진숙영이 전적으로 책임지고 감독한다는 글자를 읽은 이들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이건 치명적인 유혹인 동시에 날카로운 못이 되어 모든 이들의 심장을 아프게 찔러댔다.손영 그룹의 오너와 고위급 임원들은 모두 이 계약서가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계약서에 사인하는 즉시 모두들 손태석과 진숙영의 눈치를 보며 몸을 숙여야 했다.계약이 성사되는 대로 두 사람을 쫓아내려던 계획은 실행하기도 전에 물거품이 되었다. 그렇다고 거절하자니 5조라는 거액과 차후의 추가금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당연히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혹 불만이 있는 건가?"사람들의 표정을 확인한 용성우가 코웃음 쳤다."그렇다면 계약은 없던 일로 하면 되겠군. 하면 아우와 제수씨는 우리 용운 그룹으로 모셔가도록 하겠네. 물론 5조짜리 프로젝트는 여전히 두 사람이 책임지고 말이야. 돈 좀 만져보겠다고 혈안이 된 다른 회사는 많으니까. 널린 게 협력 파트너 아니겠나?"예리한 말들이 비수가 되어 사람들에게 푹푹 내리꽂혔다. 용성우의 태도는 손중천과 손혜린의 모든 환상을 단숨에 깨뜨리는 것이었다. 이젠 결정을 내릴 시간이었다. 거절하면 몇조의 이윤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걸 지켜봐야만 한다. 이류에서 일류로 거듭나려던 손씨 집안의 희망도 함께 사라질 테지. 그러나 계약서에 사인한
손중천이 그들을 쫓아내기 전, 빨간 포르쉐의 주인은 그녀였다. 그때의 교통사고로 인해 그녀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잃었고 손씨 집안 아가씨라는 지위도 잃었으며 그 포르쉐마저 손혜린에게 빼앗겼다. 하루아침에 모든 게 그녀의 손을 떠나갔다. 그러나 지금은..."퇴역 정착금이라니 그게 얼마나 된다고."애틋한 눈빛으로 포르쉐 전시장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서서히 시선을 거두며 손가을이 담담하게 말했다."이런 곳에 낭비할 필요 없어. 난, 필요 없어. 게다가 포르쉐는 너무 비싸잖아."비싸다고? 염구준이 웃음을 터뜨렸다.전신전 전주에게 그만한 자금조차 없을까.전쟁터에서의 5년 동안 모든 지출은 그의 몫이었다. 최신형 전투기, 탱크, 전신전 전속 위성... 모두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었다. 막말로 수중의 재산으로 나라 하나를 살 수도 있었다."이제부터 돈을 아끼겠다는 생각은 버려."염구준은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손가을을 쳐다보았다. 귀엽고 똑똑한 딸아이를 품에 안은 그가 아내의 가느다란 손목을 이끌고 포르쉐 전시장으로 걸음을 옮겼다.손가을은 여전히 만류하고 싶었지만 전시장에 들어선 순간, 로비 중심에 떡하니 전시된 최신형 붉은색 포르쉐, HBLY—GT가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았다.막 출시된 한정 차량이었다. 매끄러운 차체도 매력적이었지만 무려 4인승이었다. 스포츠카의 멋스러움과 동시에 편안한 세단 역할도 톡톡히 해낼 수 있었다. 모델의 정식 명칭은 Honourable-Lady-GT이다. 즉, 가장 고귀하고 우아한 여성을 위한 차량이라는 뜻이었다. 전체 도시에 단 2대만 한정 출시된 것이다.옆에 놓인 스크린에 판매 정보와 매입가격이 적혀있었다. 무려 26억이었다."세, 세상에!"가격표를 확인한 손가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가 예전에 몰았던 포르쉐는 기껏해야 2억 정도였다. 눈앞의 모델은 그것의 10배를 넘어섰다. 26억짜리 스포츠카를 무슨 수로 산단 말인가? 감히 시승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객님 안녕하세요, 혹시 찾으시는 모델 있을까요?"생기발랄
전시장 로비 중심에 보름이나 떡하니 전시되어 있는 해당 포르쉐 HBLY—GT를 구매할 능력이 되는 고객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수습 기간도 채 지나지 않은 초짜가 아니고야 농담이라도, 군복을 입은 남성과 평범한 원피스 차림의 여성에게 26억이나 되는 포르쉐를 소개할 위인은 없었다."업무 능력은 다소 부족하나 열정적인 태도는 보기 좋군."데스크 쪽을 담담하게 바라본 염구준이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아내가 뭘 좋아하는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금테로 장식된 블랙 카드 한 장을 내민 염구준이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전액 일시불로. 따로 비밀번호는 입력할 필요 없어. 이곳의 전속 서비스를 받고 싶네만, 필요한 모든 비용은 이 카드로 계산하도록. 십 분 사이에 전부 해결해 주었으면 좋겠군."26억을 비밀번호 입력도 없이 일시불로 계산한다고? 블랙 카드에는 흔한 은행명도 적혀 있지 않았다. 정면에 "G.J"이라는 심플한 이니셜이 적혀있을 뿐. 이게 대체 무슨 카드지?"선생님, 저..."여직원은 십초 동안 아무말도 못 하고 멍하니 염구준을 쳐다보기만 했다. 더없이 진지한 그의 표정으로 보아 농담하는 것 같지 않았다.그제야 조심스레 카드를 받은 여직원이 결제를 진행할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구준 씨, 농담이 지나치잖아."뒤늦게 정신을 차린 손가을이 펄쩍 뛰었다. 26억이라는 가격표가 안 보이는 건가? 대체 그놈의 정착금이 얼마길래. 행여 결제 실패 화면이 뜬다면 얼마나 창피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진정해."핏기 없는 아내의 얼굴을 보면서도 그는 여전히 담담했다. "아마 곧 소식이 올 거야."30초도 안 되는 사이, 블랙 카드를 소중하게 받아 든 직원이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비틀거리며 사무실에서 달려 나와 그들을 불렀다."고객님, 결... 결제가 완료되었습니다. 여기 구매 영수증 받아주시고요, 어... 그리고 고객님들을 위한 자그마한 사은품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주유 카드, 무료 세차 카드랑... 어... 아
26억짜리 포르쉐라니, 예전에 몰았던 포르쉐보다 10배는 더 나갔다. 그리고 현재 그 차주는 다름 아닌 그녀였다. "정말... 저 사람이 돈을 냈단 말이야?"데스크 쪽에 몰려있던 소위 '경험 많은' 직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제야 때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군복을 입은 남자에게 돈이 그렇게 많을 줄 알았더라면 당장 달려갔을 텐데. 보는 눈이 형편없었다. 그러니 신입이라고 무시하던 사람이 얼떨결에 주워갔지."게다가 따로 비밀번호를 입력할 필요도 없었다며?"짙게 화장한 중년 여직원이 동료를 둘러보며 찝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대체 저 안에 얼마가 들어있길래? 예전에 용하은행에서 발행한 VIP 카드를 본 적 있는데, 비밀번호 없이 결제할 수 있는 한도는 개인 자산의 0.0001% 더라고. 방금 저분... 26억을 무비번으로 결제했잖아. 그럼 대체 총자산이 얼마인 거야?""......"동료 직원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얼마나 좋은 기회던가. 이런 사람들과 안면을 터놓으면 팔 수 있는 차가 배로 늘어났다. 놓친 상여금이 대체 얼마란 말인가! 눈앞의 기회를 보기 좋게 날린 그녀들이었다.포르쉐 옆에 서 있던 손가을이 염구준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구준 씨... 혹시 엄청난 비밀 같은 걸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 어마어마한 공을 세웠다거나, 그런 거 말이야. 그래서 이렇게 많은 정착금을 받은 거고?""그렇게 많은 액수는 아니야."아이를 안아 든 염구준이 조수석에 앉으며 피식 웃었다."이젠 당신 차야. 그러니 운전해 봐야지 않겠어?"잠시 머뭇거리던 손가을이 운전석에 앉았다. 행여 먼지가 묻을까 조심스러운 눈치였다. 부드러운 가죽 시트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질감 좋은 핸들을 만지작거렸다. 고급스러운 금속 버튼을 하나하나 눌러보며 정교한 오토매틱 기어를 쓰다듬었다.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기쁨으로 반짝거렸다. 어여쁜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차올랐다."고객님."젊은 여직원도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진숙영이 두 사람 곁에 자리했고 손중천과 고위급 임원들이 애써 웃음 지으며 뒤따랐다. 용성우와 손태석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안색들이 하나같이 좋지 않았다. 계약을 무사히 마쳤으니 이젠 10조라는 거액의 투자금을 받을 일만 남았다. 그러나 손영 그룹에 차려질 최종 이익은 손태석 부부의 결정에 달렸다."에휴..."손중천은 웃지도 울지도 못할 애매한 표정으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어르신!"이때, 비명 같은 진혜린의 목소리가 계단 아래에서 들려왔다. 성씨도 빼앗기고 집안에서 쫓겨나기까지 한 진혜린은 여태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계단 아래에 엎드려 펑펑 울음을 쏟으며 처절하게 발악했다."어르신,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저 좀 한 번만 살려주세요. 계약도 성사되었잖아요. 저 반성 많이 했습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제발요! 제가 왜 진혜린인데요, 전 손혜린이에요. 전 영원히 손씨 집안 사람이라고요! 흑흑...."손중천이 막 입을 열려던 찰나, 묵직한 엔진음이 울려 퍼졌다.제대로 된 번호판조차 걸지 않은 빨간 포르쉐가 건물 앞쪽 광장에 서서히 멈춰 섰다. 희주를 품에 안은 염구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의 얼굴에는 보기 좋게 미소가 걸려 있었다."장모님, 장인어른. 계약은 무사히 마치셨습니까? 모시러 왔어요. 같이 저녁 식사해요."저녁 식사라고? 손태석과 진숙영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어찌 이리도 눈치가 없단 말인가. 용씨 집안과 막 계약을 마쳤으니 함께 저녁 만찬이라도 즐겨야 할 것 아닌가. 게다가 용씨 집안 사람들과 인사조차 나누지 않는 예의 없는 행동이 퍽 불만스러웠다. 그러다 이내 염구준이 용씨 집안 가주를 알아볼 리 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염구준의 등장에도 손태석과 진숙영은 매우 자연스럽게 행동했으나 용성우는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저 사람이다. 눈앞에 아이를 안아 든 남성이 바로 소문으로만 들었던 고귀한 분이었다. 나라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사람, 전
손씨 집안에서 쫓겨난 뒤 그녀의 커리어와 꿈은 모두 산산이 부서졌다. 그러나 오늘로써 다시 일어설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이젠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꿈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손가을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계단 위에 서 있는 용성우를 향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정말 감사....""아이고, 이 늙은이를 부축해 주어서 참으로 고맙네, 아우님. 이젠 나이가 들어 계단도 혼자 못 내려갈 정도라니까."용성우는 손태석의 팔뚝을 꽉 쥐며 연신 고마움을 전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었다. 손가을이 인사하는 걸 당장 막아야 했다. 이들은 염구준의 정체를 모르겠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주군의 부인께서 제게 허리를 숙인다? 첫인사는 넘어갈 수 있지만 두 번째는 아니었다. 목숨이 아홉 개 달린 것도 아닌데!아버지가 딸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훈훈한 장면임이 틀림없으나 손중천에게는 아니었다.용성우와 손태석 뒤를 따라가고 있던 손중천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그의 눈동자에 불꽃이 일렁거렸다. 빌어먹을 불효막심한 자식 같으니라고.진혜린이 꼬드겨서 손태석 일가를 쫓아내고 손가을을 해고한 건 사실이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손중천이 내린 최종 결정이었다. 손씨 집안 가주로서 내린 명령은 감히 반박하거나 거역할 수 없는 임금의 교지와도 같았다. 그러나 그의 셋째 아들인 손태석이 명을 거역하고 사사로이 손가을을 회사에 불러들였다. 용성우와 손영 그룹 임원들 앞에서 개망신당한 꼴이었다. 그의 위엄과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게다가 그들의 데릴사위는 어떠한가, 쓰레기 같은 염구준. 사실 따지고 보면 전부 저놈 탓이었다. 칠순 잔치에 보란듯이 관을 들이밀며 하마터면 자신을 고혈압으로 쓰러지게 만들지 않았던가. "흐흑, 손가을이 회사로 복귀한다고?"한편, 계단 아래에 쓰러져있던 진혜린이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허우적대고 있었다. 전혀 제정신이 아닌 몰골이었다.회사로 복귀한 것도
“후... 네게 방법은 하나뿐이니 알아서 해 봐.”염구준은 길게 숨을 내쉬며 백호의 요청을 허락했다.이런 일은 억지로 막을 수 없었다. 지금은 백호를 믿을 수밖에 없다는 거다.“감사합니다!”백호는 머리를 숙여 인사한 뒤 일어서며 주작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주작아, 앞으로는 명령 제대로 따르고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말아야 해, 알겠지?”4대 전존 중 백호가 가장 마음에 걸리는 존재는 주작이었다. 즉흥적인 성격으로 일을 처리하다가는 언젠가 사고가 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주작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흥, 잔소리하고 싶으면 살아남고 나서 해!”그녀의 말을 들은 백호는 합금으로 된 전투도를 뽑아 들고 광마에게 다가갔다.현재 그에게서는 전신 위 경지의 극치에 다다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이 싸움은 이 두 사람의 전장이 될 운명이었다. “웃기지 마! 겨우 전신 위의 경지로 나를 죽이겠다고?”광마는 화를 내며 땅을 한 번 세게 내리쳤고, 그 반동을 이용해 몸을 일으켰다.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영광스럽게 전사하는 편이 낫다고 그는 생각했다.“죽어라!”두 사람은 동시에 외치며 전력을 다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이렇게 목숨을 건 싸움은 승패가 금방 갈리기 마련이었다.쾅!무기끼리 부딪히는 순간, 백호는 피를 토하며 신속하게 뒤로 밀려났다.압도적인 힘 차이 때문이었다.옆에서 지켜보던 주작은 애가 탔지만, 이는 백호가 먼저 요구한 공정한 대결이었기 때문에 그녀도, 그리고 염구준도 끼어들 수 없었다.만약 누군가 개입한다면 백호의 고집스러운 성격으로는 정말 자결을 택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끝났네.”백호의 기운이 변한 것을 느낀 염구준은 미소를 띠며 중얼거렸다.쿵!그와 동시에 밀려온 진기에 반등한 백호가 몸을 떨더니 갑자기 전대미문의 강력한 기운을 내뿜으면서 광마를 뒤로 밀었다.그러면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빠르게 다가가 도를 휘둘렀고, 광마의 머리는 그렇게 바닥에 떨어졌다.한계를 돌파해 반보천인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주상! 해냈
“그저 훼이크일 뿐이었는데, 그리 겁을 먹어서야.”그는 주작을 내려놓으며 비웃었다.광마와 한 번 싸울 생각이 있는 건 맞지만 그전에 주작이 싸움에 휘말려 다치지 않도록 그녀를 구해내야만 했다.파팍!염구준이 그녀의 혈자리를 누르자 단숨에 단전의 봉인이 풀렸다.“으아아! 네 목숨을 가져가겠다!”자신이 조롱 당했음을 깨달은 광마는 크게 화를 내며 커다란 곤봉을 휘두르면서 염구준을 향해 달려들었다.무거운 몸무게 때문에 그가 한걸음 뗄 때마다 바닥이 울리며 깊은 균열이 생겼다.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광마의 움직임에 열광하며 환호를 보냈는데, 누군가는 아첨하며 떠들었고, 누군가는 진심으로 그를 응원했다.“광마 님! 저 비열한 놈을 찢어버리세요!”“광마 님, 위엄 넘치십니다! 천하무적이세요!”“어디서 굴러온 놈인진 몰라도, 감히 광마 님께 덤비다니, 제 명을 재촉하는구나!”하지만 그들은 단순히 구경하는 것일 뿐, 조금 전 염구준이 보여준 강렬한 검술의 위력을 전혀 알지 못했다.오직 광마만이 굳은 얼굴로 긴장감을 드러냈다.곧이어 두 사람은 격렬하게 충돌하며 싸움을 벌였다.광마는 50킬로가 넘는 방망이를 휘두르며 거칠게 공격했지만, 실제로는 빈틈이 너무 많아 염구준의 옷자락조차 건드리지 못했다.두 사람의 실력 차이는 확연히 드러났다.“헉, 헉...”10분이 지나자 전력을 다해 공격한 광마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고, 그의 손놀림도 점점 느려졌다.우웅.이때, 검명이 울렸다. 염구준이 더 이상 봐주지 않고, 본격적으로 반격을 시작한 것이다.몇 번의 검격만으로 염구준은 이미 주도권을 장악했다.사실 그는 초반부터 전력을 다하지 않았었다. 상대방의 기술을 관찰하며 배울 점이 있는지 살피기 위해서였다.그러나 광마의 기술은 그저 무질서한 동작의 반복일 뿐, 배울만한 것이 없었다.푸욱.상대방의 허점을 간파한 염구준은 연속으로 검을 휘둘렀고, 그에 의해 광마는 방망이와 함께 뒤로 날아갔다. 이렇게 한 차례의 공격만으로도 광마는 이미 중상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든 광장에는 천 여명의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지역 특산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광장 중앙의 정자 안에는 산같이 거대한 체구의 뚱뚱한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그 옆에는 붉은 혼례복을 입은 주작이 앉아 있었다.“함께 이 잔을 마시지.”광마는 술잔을 들어올리며 웃으면서 말했다. “퉷, 역겨워!”그러자 그녀는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눈을 감았다.광마에게 잡힌 주작은 자폭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상대가 기묘한 기술로 단전을 봉인한 터라 할 수 없었다.“헤헤, 그 도망친 녀석이 너를 구하러 올 거라 생각하나?”광마는 술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그가 말하는 사람은 바로 백호였다.“아니, 도망친 게 아니라, 내가 보낸 거야.”주작은 말하며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그날, 두 사람은 힘을 합쳐 광마와 맞섰지만 패배했고, 그 뒤에 철수할 때 부상이 심각했기에 그녀가 목숨으로 협박하면서 백호더러 먼저 가서 지원군을 데리고 오라고 한 거였다.지금 주작의 유일한 바람은 백호가 무사히 살아가는 것이었다.4대 전존들의 우정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었다. 때때로 의견 충돌이 있긴 하지만, 그건 그저 서로의 견해 차이일 뿐이었다.그들은 서로를 위해서라면 주저없이 생명을 바칠 수 있었다.“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아무도 너를 구하지 못한다는 거야.”광마는 주작의 매혹적인 자태를 바라보며 군침을 삼켰다.‘아름다워, 너무 아름다워.’쾅!그러나 이때 갑자기 거대한 폭발음이 울리며 누군가가 광장에 나타났고, 동시에 그가 서 있는 자리의 바닥도 산산조각 나버렸다.염구준이 온 것이다.“주상, 오셨군요.”주작은 그를 알아보고 얼굴에 빛을 띠며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다.눈앞의 이가 해결하지 못할 일은 없으니까 말이다.“커헉, 주작, 미안하다.”백호가 격렬하게 기침하며 말했다.그날의 상황은 복잡했다. 백호는 떠난 후 내내 죄책감에 시달렸지만, 두 사람이 모두 살아남으려면 염구준을 찾는데에 희망을
상대방의 공격을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남자는 바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염구준의 검이 더 빨랐다.그는 몸을 돌리자마자 날아온 검기에 몸이 관통이 되어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다.이 장면을 본 주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몰려들었다.죽은 이는 외곽에서 악명이 자자한 강자였으니까 말이다. 실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부분이 못 건드렸던 사람이 이렇게 쉽게 죽은 걸 보고 그들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너희도 한 번 붙어보고 싶어?”주변의 적대적인 시선을 느낀 염구준이 싸늘하게 물었다.골칫거리는 한꺼번에 처리해버리는 게 나았다. 이따금씩 한두 명씩 나타나 귀찮게 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주변의 구경꾼들은 몸을 움츠리며,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눈앞의 이 무서운 존재와 차마 눈을 마주칠 용기가 없어서였다.전신 위에 있는 강자도 순식간에 베어버렸는데, 그들같이 약한 사람들은 오죽하겠나?더 이상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는 것을 본 염구준 일행은 다시 제 갈길을 갔고, 곧바로 중앙 구역의 입구에 도착했다. “주인님께서 붉은 장미 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드시죠.”그들의 모습을 본 입구에 있던 경비가 공손하게 말했다. “안내해. 너희 주인님과 상의할 일이 좀 있으니까.”붉은 장미가 대답했다.“그런데, 이 두 사람은 누구입니까? 저 사람은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요?”경비는 염구준과 백호를 훑어보더니, 시선을 백호에게 고정하며 물었다.분명 백호를 알아본 것 같았지만, 붉은 장미의 체면 때문에 입 밖에 내지 않은 듯했다.“이 사람들은 내 친구야. 불필요한 질문은 하지 마.”이에 붉은 장미는 싸늘하게 말하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제가 실례했습니다. 따라오시죠!”그녀의 반응에 경비는 서둘러 문을 열고 앞장섰다.그는 단순한 문지기일 뿐이기 때문에 그녀를 뭐라고 할 자격이 없었다. 이럴 땐 윗사람에게 문제를 떠넘기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안에 들어선 염구준은 주위의 환경을 보며 감탄했다.안쪽엔 고풍스러운 정자와 누각들
광마 마을은, 우두머리의 이름이 광마라 불리는 자였기에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이었다. 그는 토착민으로, 잔인하고 폭력적이며 살인을 즐기는 자였지만 실력이 강한 탓에 권세 있는 사람에게 기대어 덕을 보는 게 낫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기를 원했다.마을은 산을 따라 지어졌으며,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오직 한쪽만 정글로 통하는 구조라 방어하기 쉬운 곳이었는데, 규모로 보아도 적어도 2만 명은 되는 듯했다.“홍분 마을의 붉은 장미가 광마 님을 뵙고싶습니다.”세 사람은 광마 마을 입구에 도착했지만, 바로 정면으로 공격하지는 않았다. 주작의 구체적인 상황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무모하게 나설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간 괜히 상황만 악화시킬 것이 뻔했다.잠시 후, 광마 마을 안에서 대답이 들려왔고,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렸다.“붉은 장미 님,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대답을 들은 붉은 장미는 앞장서서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공기에 피냄새가 진하게 섞여있군.’마을 안으로 들어선 뒤 주위를 둘러보던 염구준은 이곳이 마치 아수라 지옥과 같다고 생각했다.곳곳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고, 파리떼가 윙윙거리며 날아다녔으며,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잔혹하게 싸움을 벌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곳은 ‘혼돈’ 그 자체였다.“아무도 이걸 통제하지 않는 건가요?”염구준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이토록 무질서한 곳은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발전할 가망이 없기 때문이었다.이곳의 통치자가 이런 상태를 방치하고 있다는 것이 그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물론 있죠. 다만 광마 마을은 외부 구역과 내부 구역으로 나뉘어 있답니다. 외부 구역에서는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지만, 내부 구역에서는 오직 광마만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어요.”붉은 장미는 차분히 설명하며 염구준의 의문을 풀어주었다.세 사람이 걸음을 옮긴지 얼마 안 됐을 무렵, 그들은 또다시 길이 막혔다.“오, 신참들인가? 여기 들어오려면 한 사람마다
백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미 할 만큼 했어. 이제부터는 하나라도 더 죽이면 남는 장사야.’ 라고 말이다.펑! 펑!양측은 몇 번 더 격렬하게 부딪혔고, 백호는 밀리는 상황에서도 두 명을 더 쓰러뜨린 후 덩굴 숲 속으로 나가떨어졌다.피를 흡수한 덩굴은 활기를 띠더니, 백호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꺼져!”백호는 남은 힘을 다해 덩굴을 잡아 찢었으나 하나를 찢으면 새로운 덩굴이 달려들어 지쳐만 갔다.멀리서 이를 지켜보는 황지열의 부하들은 비웃음을 터뜨리며 잔혹한 표정을 지었다.상대방이 곧 어떻게 될지 너무나도 뻔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얼른 그가 덩굴에게 피를 전부 빨려 말라죽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스윽, 스윽.하지만 상황은 그들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덩굴이 갑자기 겁을 먹은 듯 땅 속으로 빠르게 도망치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마치 무언가에 겁을 먹기라도 한 것 같았다.“백호, 젠장!”이때, 동굴 입구에서 염구준의 모습이 보였는데, 눈 앞의 상황을 보자마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는 지금 매우 화가 나 있었다.“주상... 다시는 뵙지 못하는 줄 알았습니다.”백호는 쓰러질 듯한 몸을 겨우 일으키며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말하지 마. 원래는 너희들이 모두 수련을 마친 후에 만나러 가려고 했었는데, 이 꼴이 될 줄은 몰랐어.”염구준은 백호 곁으로 다가가 주머니에서 약물을 꺼내 백호의 가슴에 꽂았다.그 약물은 전신전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특수 약물로, 효과가 매우 좋았기에 주입과 동시에 백호는 상태가 조금 안정되었다.“거기 서. 누가 너희들더러 그냥 가라고 했지?”염구준은 차갑게 외치며 황지열의 부하들을 노려보았다.자신의 부하를 이렇게 만든 주제에 그냥 떠나겠다니, 세상에 그렇게 좋은 일이 어디 있겠나?“염... 염구준! 우리가 너 무서워하는 것 같아? 조심해, 이러다 같이 죽는 수가 있으니까!”상대방의 우두머리는 억지로 침착한 척하면서 자폭을 하려고 미친듯이 진기를 모았다.자신들의 실력으로는 반
비록 동양 문자이긴 했지만 염구준은 알아볼 수 있었다.[난세 속에서, 나는 아내와 자식, 가족들을 데리고 재난을 피하고자 이곳에 은거했다.][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이곳에 이미 고수가 머물고 있었던 거다. 한바탕 격전을 벌인 끝에 그를 죽이는 것에 성공했지만 나 또한 목숨이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한 가지 세상에 경고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혼란의 뿌리는 옥패에 있으며, 흥망성쇠 또한 옥패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여덟 개의 옥패를 전부 모으면...]마지막 문장은 중간에서 끊겨 있었는데, 아마 글을 새기던 이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은 것 같았다. ‘말하다 말고 끝내다니, 사람 속 한 번 참 잘 태우네.’문제는 이 철학적이고도 애매모호한 문장을 보고서 여덟 개의 옥패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다만, 옥패를 모으는 것이 재앙과 축복이 얽힌 운명을 가져올 거라는 점은 알 수 있었다.펑.그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에 불을 붙여 깔끔하게 태워버렸다.“여기 적힌 일은...”염구준이 말을 채 맺기도 전에 붉은 장미가 얼른 입을 열고 맹세했다. “오늘 이 일을 절대 입 밖에 내지 않을 겁니다. 하늘을 걸고 맹세할게요. 만약 제가 맹세를 어긴다면, 벼락 맞고 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늦게 입을 열기라도 했다가는 염구준이 자신을 죽일까 봐 두려워서였다.그녀는 문장의 뜻은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글에서 전해지는 심오한 분위기만으로도 이 일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그 맹세 지키는 게 좋을 겁니다. 아니면 지구끝까지 도망치더라도 제가 쫓아갈 테니까요.”염구준은 일상처럼 그녀를 위협했다.“알겠습니다!”붉은 장미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이미 그녀의 등 뒤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염구준과 함께한 지 이틀도 되지 않았지만, 협박을 수차례 받은 탓에 그녀는 심장이 조금 많이 아파왔다.그 후, 둘은 동굴 안을 계속 수색했지만, 특이한 돌 몇 개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돌이 특이한
염구준은 고개를 돌려 한 번 보고는, 다시 동굴로 걸어갔다.전에 바로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최대한의 자비를 베푼 것이었기에 그가 그들을 구할 이유는 없었다.무엇보다 어떤 길을 가느냐는 각자의 선택이 아니겠나?“형님, 살려만 주시면 시키시는 것 뭐든 다 하겠습니다!”“싫어, 난 죽기 싫다고!”제일 앞에서 달려가던 사람이 잔뜩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지만 불과 몇 분 만에 피를 다 빼앗겨 미라가 되어버렸다.이 모습을 본 뒤따라오던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동굴의 유혹이 아무리 크다 해도, 목숨이 붙어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실력이 부족하면 케빈처럼 헛된 환상을 품지 않고 마을에 그저 얌전히 있는 게 정확한 행동이었다.한편, 이미 동굴 안으로 들어간 염구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계속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전주님, 지금 도대체 얼마나 강하신 거예요?” 붉은 장미가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말하기는 어렵지만, 이 몇 년간 저를 이긴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염구준은 앞장서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말투엔 그 어떤 자만도 섞여 있지 않았다.그에게 있어서 이런 전적은 그저 평범하고 대단할 것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꿀꺽.이 말을 듣고 놀란 붉은 장미는 등골이 오싹해져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그녀는 이미 염구준의 전투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실력이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압도적일 줄이야.’“여기에 뭐가 있는지는 이 방에 달려있는 것 같네요.”염구준이 몇 가닥의 불꽃을 튕겨내어 공간을 밝힌 덕분에 두 사람은 주위를 볼 수 있었는데, 내부는 30평 정도 밖에 안 되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곳이었다.“꺄아악, 누가 있어요!”이때, 붉은 장미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쳤다. 그녀의 다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이런 위험한 금지구역에 나타난 사람이 평범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이미 죽었습니다.”염구준은 깔보는 말투로 대답하고는 앞으로 걸어갔다.그 사
스스슥!생물이 접근하자 덩굴은 반응하며 염구준과 붉은 장미에게 마찰소리를 내며 다가갔다.윙!염구준은 이내 주변에 기운을 발사하며 두 사람을 보호하자 덩굴이 튕겨 나갔다.덩굴의 힘으로 그의 방어를 뚫을 수 없었다.“전주님, 이제 시작이에요.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공격이 세질 거예요.”붉은 장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전부 말했다.지금 그들은 한 배를 타고 있어서 아무리 미워도 죽일 수 없었다.“고작 덩굴 때문에 두려워할 거 없어요.”염구준은 이미 어떤 식물인지 알아챘다.전에 이런 식물과 열대우림에서 싸워본 적이 있었다.다른 점을 말하자면 여기 있는 덩굴처럼 굵지 않았다.덩굴은 이름처럼 피를 먹고 살고 또 토양에서 영양분을 흡수할 수 있어서 참 특이한 식물이다.피를 먹는 식물이라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펑! 펑!앞으로 다가가자 덩굴이 미친듯이 방어 기운을 공격했다.지금 덩굴은 식물이 아니라 굶주린 늑대처럼 공격을 퍼부었다.붉은 장미는 방패가 버티지 못하여 잡혀 먹힐까 봐 두려워 덜덜 떨었다.이 구역의 덩굴은 그녀 힘으로 제어하지 못했다.안으로 들어갈수록 덩굴은 더 많아지고 이내 염구준이 만든 기운 방패를 전부 감쌌다.이곳의 덩굴은 오랫동안 존재한 덕에 이 구역의 지배자나 마찬가지여서 어떤 생물도 감히 맞서지 못했다.뒤를 따라온 사람들은 멀리서 보기만 할 뿐, 계속 한숨만 쉬었다.“에휴, 이렇게 강한 사람도 건너가지 못하나?”“저렇게 실력이 강해도 여기서 죽음을 맞이해야 하네.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들어가지 못하겠어.”“가자. 이제 다 끝났어.”무엇이 금지 구역인가?바로 들어갈 수 있어도 살아나오지 못하는 곳을 가리킨다.일행이 떠나려고 할 때 변고가 발생했다.다들 무술인이니 주변에 일어나는 기운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어딘가 전해지는 강력한 기운에 그들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쿵!그때 방패가 폭발하자 덩굴들이 잘려서 사방에 떨어졌다.순간 검기가 기승을 부리며 계속 뻗어오는 덩굴을 잘라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