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 로비 중심에 보름이나 떡하니 전시되어 있는 해당 포르쉐 HBLY—GT를 구매할 능력이 되는 고객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수습 기간도 채 지나지 않은 초짜가 아니고야 농담이라도, 군복을 입은 남성과 평범한 원피스 차림의 여성에게 26억이나 되는 포르쉐를 소개할 위인은 없었다."업무 능력은 다소 부족하나 열정적인 태도는 보기 좋군."데스크 쪽을 담담하게 바라본 염구준이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아내가 뭘 좋아하는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금테로 장식된 블랙 카드 한 장을 내민 염구준이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전액 일시불로. 따로 비밀번호는 입력할 필요 없어. 이곳의 전속 서비스를 받고 싶네만, 필요한 모든 비용은 이 카드로 계산하도록. 십 분 사이에 전부 해결해 주었으면 좋겠군."26억을 비밀번호 입력도 없이 일시불로 계산한다고? 블랙 카드에는 흔한 은행명도 적혀 있지 않았다. 정면에 "G.J"이라는 심플한 이니셜이 적혀있을 뿐. 이게 대체 무슨 카드지?"선생님, 저..."여직원은 십초 동안 아무말도 못 하고 멍하니 염구준을 쳐다보기만 했다. 더없이 진지한 그의 표정으로 보아 농담하는 것 같지 않았다.그제야 조심스레 카드를 받은 여직원이 결제를 진행할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구준 씨, 농담이 지나치잖아."뒤늦게 정신을 차린 손가을이 펄쩍 뛰었다. 26억이라는 가격표가 안 보이는 건가? 대체 그놈의 정착금이 얼마길래. 행여 결제 실패 화면이 뜬다면 얼마나 창피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진정해."핏기 없는 아내의 얼굴을 보면서도 그는 여전히 담담했다. "아마 곧 소식이 올 거야."30초도 안 되는 사이, 블랙 카드를 소중하게 받아 든 직원이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비틀거리며 사무실에서 달려 나와 그들을 불렀다."고객님, 결... 결제가 완료되었습니다. 여기 구매 영수증 받아주시고요, 어... 그리고 고객님들을 위한 자그마한 사은품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주유 카드, 무료 세차 카드랑... 어... 아
26억짜리 포르쉐라니, 예전에 몰았던 포르쉐보다 10배는 더 나갔다. 그리고 현재 그 차주는 다름 아닌 그녀였다. "정말... 저 사람이 돈을 냈단 말이야?"데스크 쪽에 몰려있던 소위 '경험 많은' 직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제야 때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군복을 입은 남자에게 돈이 그렇게 많을 줄 알았더라면 당장 달려갔을 텐데. 보는 눈이 형편없었다. 그러니 신입이라고 무시하던 사람이 얼떨결에 주워갔지."게다가 따로 비밀번호를 입력할 필요도 없었다며?"짙게 화장한 중년 여직원이 동료를 둘러보며 찝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대체 저 안에 얼마가 들어있길래? 예전에 용하은행에서 발행한 VIP 카드를 본 적 있는데, 비밀번호 없이 결제할 수 있는 한도는 개인 자산의 0.0001% 더라고. 방금 저분... 26억을 무비번으로 결제했잖아. 그럼 대체 총자산이 얼마인 거야?""......"동료 직원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얼마나 좋은 기회던가. 이런 사람들과 안면을 터놓으면 팔 수 있는 차가 배로 늘어났다. 놓친 상여금이 대체 얼마란 말인가! 눈앞의 기회를 보기 좋게 날린 그녀들이었다.포르쉐 옆에 서 있던 손가을이 염구준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구준 씨... 혹시 엄청난 비밀 같은 걸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 어마어마한 공을 세웠다거나, 그런 거 말이야. 그래서 이렇게 많은 정착금을 받은 거고?""그렇게 많은 액수는 아니야."아이를 안아 든 염구준이 조수석에 앉으며 피식 웃었다."이젠 당신 차야. 그러니 운전해 봐야지 않겠어?"잠시 머뭇거리던 손가을이 운전석에 앉았다. 행여 먼지가 묻을까 조심스러운 눈치였다. 부드러운 가죽 시트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질감 좋은 핸들을 만지작거렸다. 고급스러운 금속 버튼을 하나하나 눌러보며 정교한 오토매틱 기어를 쓰다듬었다.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기쁨으로 반짝거렸다. 어여쁜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차올랐다."고객님."젊은 여직원도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진숙영이 두 사람 곁에 자리했고 손중천과 고위급 임원들이 애써 웃음 지으며 뒤따랐다. 용성우와 손태석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안색들이 하나같이 좋지 않았다. 계약을 무사히 마쳤으니 이젠 10조라는 거액의 투자금을 받을 일만 남았다. 그러나 손영 그룹에 차려질 최종 이익은 손태석 부부의 결정에 달렸다."에휴..."손중천은 웃지도 울지도 못할 애매한 표정으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어르신!"이때, 비명 같은 진혜린의 목소리가 계단 아래에서 들려왔다. 성씨도 빼앗기고 집안에서 쫓겨나기까지 한 진혜린은 여태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계단 아래에 엎드려 펑펑 울음을 쏟으며 처절하게 발악했다."어르신,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저 좀 한 번만 살려주세요. 계약도 성사되었잖아요. 저 반성 많이 했습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제발요! 제가 왜 진혜린인데요, 전 손혜린이에요. 전 영원히 손씨 집안 사람이라고요! 흑흑...."손중천이 막 입을 열려던 찰나, 묵직한 엔진음이 울려 퍼졌다.제대로 된 번호판조차 걸지 않은 빨간 포르쉐가 건물 앞쪽 광장에 서서히 멈춰 섰다. 희주를 품에 안은 염구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의 얼굴에는 보기 좋게 미소가 걸려 있었다."장모님, 장인어른. 계약은 무사히 마치셨습니까? 모시러 왔어요. 같이 저녁 식사해요."저녁 식사라고? 손태석과 진숙영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어찌 이리도 눈치가 없단 말인가. 용씨 집안과 막 계약을 마쳤으니 함께 저녁 만찬이라도 즐겨야 할 것 아닌가. 게다가 용씨 집안 사람들과 인사조차 나누지 않는 예의 없는 행동이 퍽 불만스러웠다. 그러다 이내 염구준이 용씨 집안 가주를 알아볼 리 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염구준의 등장에도 손태석과 진숙영은 매우 자연스럽게 행동했으나 용성우는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저 사람이다. 눈앞에 아이를 안아 든 남성이 바로 소문으로만 들었던 고귀한 분이었다. 나라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사람, 전
손씨 집안에서 쫓겨난 뒤 그녀의 커리어와 꿈은 모두 산산이 부서졌다. 그러나 오늘로써 다시 일어설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이젠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꿈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손가을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계단 위에 서 있는 용성우를 향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정말 감사....""아이고, 이 늙은이를 부축해 주어서 참으로 고맙네, 아우님. 이젠 나이가 들어 계단도 혼자 못 내려갈 정도라니까."용성우는 손태석의 팔뚝을 꽉 쥐며 연신 고마움을 전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었다. 손가을이 인사하는 걸 당장 막아야 했다. 이들은 염구준의 정체를 모르겠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주군의 부인께서 제게 허리를 숙인다? 첫인사는 넘어갈 수 있지만 두 번째는 아니었다. 목숨이 아홉 개 달린 것도 아닌데!아버지가 딸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훈훈한 장면임이 틀림없으나 손중천에게는 아니었다.용성우와 손태석 뒤를 따라가고 있던 손중천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그의 눈동자에 불꽃이 일렁거렸다. 빌어먹을 불효막심한 자식 같으니라고.진혜린이 꼬드겨서 손태석 일가를 쫓아내고 손가을을 해고한 건 사실이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손중천이 내린 최종 결정이었다. 손씨 집안 가주로서 내린 명령은 감히 반박하거나 거역할 수 없는 임금의 교지와도 같았다. 그러나 그의 셋째 아들인 손태석이 명을 거역하고 사사로이 손가을을 회사에 불러들였다. 용성우와 손영 그룹 임원들 앞에서 개망신당한 꼴이었다. 그의 위엄과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게다가 그들의 데릴사위는 어떠한가, 쓰레기 같은 염구준. 사실 따지고 보면 전부 저놈 탓이었다. 칠순 잔치에 보란듯이 관을 들이밀며 하마터면 자신을 고혈압으로 쓰러지게 만들지 않았던가. "흐흑, 손가을이 회사로 복귀한다고?"한편, 계단 아래에 쓰러져있던 진혜린이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허우적대고 있었다. 전혀 제정신이 아닌 몰골이었다.회사로 복귀한 것도
"염구준!"분노로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한 진혜린이 사납게 자리를 박차며 달려갔다.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던 한때는 손가을 소유였던 빨간 포르쉐에 올라탄 그녀가 염구준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시동을 걸었다."재원 오빠가 절대 널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어디 두고봐! 3일 뒤면 저 계집애 생일이라지. 그날 어디 한번 결판을 내보자고. 넌 뒈졌어."실컷 소리 지른 그녀가 가속페달을 미친 듯이 밟아댔다. 광택이 사라진 붉은 포르쉐가 경악이 섞인 주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아이를 품에 안고 아내의 손을 맞잡은 염구준이 장인 장모를 맞이했다."일이 잘 해결되었으니 저희도 식사하러 가야죠. 타십시오."손태석과 진숙영은 퍽 불만에 차 있었다. 미처 용성우를 알아보지 못해서 인사를 나누지 않은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뻔히 그의 정체를 알고 있음에도 끝까지 모른 척이다. 정말이지 창피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단전에서부터 화가 치밀어오른 손태석은 염구준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호통치려 했다."태석 아우!"손태석이 입을 열기도 전에 겁에 잔뜩 질린 용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칭찬을 늘어놓았다."오, 이분이 바로 자네의 사위인가! 듣던 대로 아주 젊고 전도가 유망해 보이는군! 가족끼리 보내는 단란한 시간이 무엇보다 중요한 법이지, 그러니 내가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어야 하지 않겠나. 우리 자리는 다음에 만들면 되지! 살펴 가시게, 나도 이만 돌아가야겠네. 다음에 보세!"말을 마친 그가 얼른 부하들을 데리고 자신의 롤스로이스 뒷좌석에 자리 잡았다. 문을 걸어 잠근 용성우는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는 듯 식은땀을 닦아냈다.하늘이시여!주군의 정체를 혼자만 알고 있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이야! 마치 거대한 산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자연스레 뿜어져 나오는 숨 막히는 기백은 이 도시 최고 갑부인 그조차도 덜덜 떨게 만들었다.염구준은 진정한 상위 포식자였다.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는 범인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했다. 용씨
호텔 앞에 파티 초대 문구가 쓰인 금색 간판이 우뚝 솟았다. '생일 파티에 어울리는 드레스 코드를 장착하고 어린 주인공에게 생일 축하 인사를 보내시는 모든 분께 본 호텔 VIP 전용 패키지 무료 제공''1인당 1회 한정, 순금 생일 배지 증정''생일 파티 주인공-- 염희주'이 소식은 마치 들판에 번진 불길처럼 전체 도시에 가득 퍼졌다.거리의 옷 가게, 백화점 명품 숍, 웨딩드레스 숍에서 판매하는 화려한 색감의 연회복은 전부 매진되었다. 화려한 연회복을 입은 수많은 인파가 그랜트 센트럴 호텔에 한가득 몰려들었다. 전체 도시가 VIP 전용 패키지와 순금 생일 배지에 홀린 것만 같았다......."재원 오빠-"교외의 화려한 별장에서 간드러진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진혜린이 서재원의 가슴에 살며시 기댔다. "오늘이 바로 그 계집애의 생일이잖아. 우리도 출발해야 하지 않겠어?"진혜린의 부드러운 등을 쓰다듬던 서재원이 차갑게 코웃음 쳤다.도도한 진혜린은 오랫동안 그에게 몸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3일 전 적극적으로 그의 품 안에 뛰어들며 제 몸을 활짝 열어준 것이다. 그는 그 이유를 똑똑히 알고 있었다."손중천 그 양반도 참 어리석어. 너를 손씨 집안에서 쫓아내다니 말이야."옷을 대충 걸쳐 입은 서재원이 싸늘하게 말했다."당연히 내가 나서야지, 넌 내 여자니까. 게다가 뭐, 우리더러 무릎 꿇고 사죄하라고? 염구준 그 자식이 아주 죽고 싶어 환장했지."끊임없이 욕설을 퍼부으며 창가로 다가간 그가 커튼을 확 열어젖혔다.별장 앞마당에는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120여 명의 경호원들이 앞마당에 빼곡히 버티고 서 있었다. 검정 양복을 입은 그들의 허리춤은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전부 무기를 소지한 이들이었다. 그들의 옆에는 서른 대의 아우디 차량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다. 살벌한 기색으로 보아 언제든 출발할 준비가 되어 있는 듯싶었다."우리 오빠는 너무 대단한 것 같아!"마찬가지로 옷을 갖춰 입은 진혜린이
"염 서방..."호텔 1층 파티홀, 태연자약한 염구준을 바라보며 손태석과 진숙영이 복잡한 심경을 토로하듯 한숨을 내쉬었다.그들의 사위는 딸아이에게 매우 비싼 차를 사주었다. 그가 딸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분명했다. 게다가 손녀에게 성대한 생일 파티를 열어줄 거라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다.그러나 오늘 같은 장면일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들은 눈앞이 아득해졌다. 온 도시의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든 것만 같았다. 환호성이 하늘을 뒤흔들었다.호텔 밖은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였다."희주 아가씨, 생일 축하해요!""희주 양의 4살 생일을 축하합니다!""우리 똑똑하고 귀여운 희주 아가씨, 이대로 건강하게만 자라주세요!"사실 그들은 염희주를 본 적도 없었다."엄마, 아빠..."제 부모님 곁에서 마찬가지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손가을이었다. 그녀는 염구준의 잘생긴 옆모습을 흘깃 쳐다보았다. 심연을 담은 눈동자는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최근 들어 늘 느끼는 감정이지만, 자기 남편은 정말이지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었다. 염구준은 대체 무슨 수로 이 도시의 유일한 6성급 호텔 전체를 대여했단 말인가. 여기에 지불한 비용은 차마 상상이 가지 않았다. 호텔의 VIP 전용 패키지와 순금 생일 배지는 또 어떻고? 심지어 그녀는 호텔 셰프가 언제부터 요리를 준비했는조차 알지 못했다.다만 아이의 생일 파티를 위해 염구준이 온갖 정성을 쏟았다고 예측할 뿐이었다. 분명 전우들에게 수없이 도움을 청했을 것이다. 이토록 화려한 파티를 위해 그들에게 수많은 신세를 졌을 테지."이렇게 굉장한 건 처음 보네만... 지나치게 사치스럽지 않아?"염구준에게 눈길을 돌리며 가까스로 입을 연 손태석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알게 뭔가.오늘 새하얀 공주님 드레스를 입은 하나밖에 없는 외손녀 염희주는 파티홀에 특별히 준비된 놀이터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있었다. 유치원 친구들, 오늘 초대받은 학부모와 선생님들이 아이를 둘러싸고 있었다.아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토록
살벌한 무기를 꺼내든 경호원들이 파티홀을 질주했다. 의자를 들거나 칼을 휘두르며 몸싸움을 벌일 준비를 마쳤다."꺄악!"홀 안에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희주와 어울리던 유치원 친구들, 학부모와 선생님들도 혼비백산하며 온몸으로 아이들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창백한 얼굴들이 염구준을 간절하게 쳐다보고 있었다.염구준의 초대를 받고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의 머릿속에 무료 VIP 패키지와 순금 배지가 둥둥 떠다녔다.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했을 뿐인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아이들을 꽉 안은 그들은 소름 끼치는 연장을 휘두르며 파티홀을 누비는 경호원들을 바라보며 공포에 떨어야 했다. 손가을 일가족의 낯빛도 창백해졌다. 그들도 조건반사처럼 염구준에게 눈길을 돌렸다."두려워할 것 없습니다."덤덤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안심시킨 염구준이 서재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미친 듯이 발악하는 버러지를 바라보듯 무심한 표정이었다. '겨우 120여 명을 대동하다니. 서씨 집안도 별 볼 일 없군.'"개 같은 눈빛 집어치워. 어디서 허세야?"무심한 눈빛이 서재원의 심기를 단단히 거스른 듯했다. 울컥 화가 치민 서재원이 헛웃음을 터뜨렸다."그깟 군바리 질 몇 년 했다고 네가 뭐라도 된 줄 알아? 꼴에 열 명은 무리 없이 상대할 수 있을 거 같지? 과연 백 명은 어떨까?" "일전에 감히 이 몸을 걷어찼겠다? 손중천 그 양반 칠순 잔치 때 내게 지껄인 막말은 어떻고! 오늘 어디 한번 제대로 결판을 내보자고. 네놈이 언제까지 날뛸 수 있는지 두고 보겠어."염구준이 비웃음을 담아 그를 쳐다보았다.원래 벌레들은 자기가 얼마나 멍청한지 모르는 법이었다.서재원은 제가 맞닥뜨린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몰랐다. 전신전 전주라는 칭호가 담고 있는 의미가 얼마나 대단한지, 이는 그의 상상을 훨씬 웃도는 것이었다."아직도 웃음이 나와?"여전히 태연한 염구준을 바라보는 서재원에게 은은한 불길함이 엄습했다. 든든한 아군으로 둘러싸인 주위를 쓱 훑어본 그는 그제야
김대석이란 인물은 알고 있었다.손씨 그룹 산하 파트너인데 손가을의 눈치를 살피면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었다.“저기요. 여기 관장 있어요?”김영영이 큰소리로 물었다.“나다. 무슨 일이 있으면 말해.”원종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말했다.그들이 신위무관에 들어오자마자 언성을 높여서 기분이 매우 언짢았다.“왕자 경지 무술인과 연습하고 싶어요. 가격을 부르세요.”김영영은 바로 가격으로 해결하려 들었다.“하, 돈거래는 자발적으로 나서야지 난 절대 강요하지 않아.”나이 있는 원종은 말을 재치 있게 받아 치면서 뜻을 확실히 전달했다.“알았어요. 그럼 훈련장을 내주세요. 그래줄 수 있죠?”김영영은 억지를 부리지 않고 순순히 따랐다.“한 시간에 5만 원이야. 편한대로 해.”원종은 말을 끝내고 더는 상대하지 않았다.그런데 김영영도 조급하지 않았다.그녀는 일행과 무관 내부를 관람하듯 천천히 둘러보았다.한참 둘러보더니 발걸음을 멈추고 손가을이 있는 훈련장을 가리켰다.“저기 마음에 드네. 저분한테 자리 비켜달라고 해.”저분이라고 말했지만 강도 짓이나 다름없었다.둘러보면 빈 훈련장이 많았는데 굳이 다른 사람 것을 빼앗으려고 했다.심보가 나쁘거나 시비를 거는 것이 틀림없었다.“알겠습니다. 성녀님.”김영영 곁에 서 있던 중년 남자가 대답하더니 번쩍 뛰어서 손가을에게 돌진했다.전신 경지 고수였다.쿵!남자가 허공에 떴을 때 예상치 못한 한 줄기 검기에 휩쓸려 피를 토하며 뒤로 날아갔다.바닥에 떨어진 후 아예 일어나지 못했다.“감히 내 아내를 건드려? 죽고 싶어?”반보천인의 기운이 사방으로 퍼지자 곁에 사람들은 숨을 쉬기 힘들었다.염구준은 엄청 화가 났다.“선배님, 일부러 그런 게 아닙니다. 부디 용서해 주세요.”당황한 남자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이런 고수에게 함부로 대항할 수 없었다.하지만 김영영은 주제를 모르고 반보천인 고수 앞에서 당당하게 굴었다.“선배님, 저희 해치지도 않았는데 왜 이러는 겁니까? 게다가 저희 가문
눈만 마주쳤을 뿐인데 염구준은 아내가 무엇을 어려워하는지 알고 피식 웃었다.“당신은 운기만 해. 내가 인도할게.”염구준은 한 손을 손가을의 머리 위에 올리고 기운을 조금씩 주입하면서 운기하는 규칙을 가르쳤다.운기하는 회수가 늘어날수록 손가을은 자신의 운기에 점점 익숙해졌다.반보천인 고수가 직접 가르치니 옆에서 지켜보는 무술인들은 정말 부럽기 그지없었다.한 시간 뒤 손가을이 눈을 떴다.그녀는 피곤해 보였지만 그래도 환한 미소를 지었다.“구준 씨, 이제 혼자 할 수 있어.”염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욕심내면 안 돼.”기운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며칠을 배워야 할 것이다.염구준은 옆에 있는 원종과 정경림에게 다가갔다.“혹시 강호에서 이런 문자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그는 본인의 휴대폰에서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어제 민씨 가문에서 가져온 서책을 사진으로 찍은 것이었다.그중에서 한 글자만 염구준이 직접 쓴 것이다.“못 봤어. 아마도 용하의 문자와 같은 맥락일 거야.”두 사람은 고개를 흔들었다.서책에 관한 옥패의 정보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봤지만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이 일은 조급해 말고 천천히 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어차피 지금 한가하니 염구준은 두 사람과 무술에 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얼마나 습득할지는 본인에게 달려 있다.무관 내에서 모두 화기애애한 분이기에 각자 무술을 연습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바로 그때 한 여자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렸다.“실력이 좋은 무술인을 찾아서 연습해야 돼. 평범한 무술인은 일방적으로 맞는다니까.”“그럼요. 신위무관은 청해에서 가장 큰 무관이라서 다양한 무술인들이 있어요. 분명 적합한 상대를 찾을 겁니다.”한 남자가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열 명 정도 되는 일행이 위풍당당하게 신위무관에 들어섰다.“당신들 관장은 어디 있어? 나와보라고 해.”남자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건방지게 말했다.그 말에 무관에서 연습하던 무술인들이 동작을 멈추고 입구 쪽을 쳐
“그럼 됐어. 전부 가르쳐줘.”손가을은 기뻤지만 아직 어떤 것들을 마주해야 할지 몰랐다.“그게… 가장 효율적인 것은 실전이야. 근데 쉽게 다칠 수 있어.”염구준은 약간 말을 더듬었지만 솔직하게 말했다.아내를 아껴줘도 부족한데 정말 손을 대기가 어려웠다.“괜찮아. 나 약하지 않아.”손가을은 남편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오히려 설득했다.잠깐 생각에 잠긴 염구준이 아내의 눈빛을 보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일단 시험해 보자.”그는 경계를 낮춰 똑같은 정진왕자 초기 단계로 맞추었다.이런 상황에서 봐줄 수도 없고 너무 경지를 낮춘다면 아내가 자존심이 상할 것이다.“알았어.”손가을은 공격 자세를 취했다.전에 염구준이 권법을 가르쳤지만 한번도 실전으로 사용한 적이 없었다.“가을아, 준비됐으면 자유롭게 공격해.”염구준이 말했다.“조심해.”손가을은 주의를 주면서 작은 주먹을 앞으로 무찔렀다.염구준은 두통이 지끈 아팠다.아내의 동작에 허점이 가득하고 보조와 자세가 너무나 엉성했다.하지만 같은 경지에서 기운은 약하지 않아 거칠게 사용했다.탁!염구준은 아내가 날린 주먹을 피해 옆으로 비키고 한쪽 발을 휘두른 것만으로 쉽게 넘어트릴 수 있었다.두 사람은 같은 경지지만 실전 경험이나 기술 차이가 천차만별이었다.염구준은 쏜살같이 달려가 두 손으로 아내의 허리를 감쌌다.“와우, 우리 실력 차이가 너무 나. 당신 기운을 전혀 느끼지 못 했어.”손가을은 충격을 먹었다.“아니면 실전 말고 노하우 몇 개를 알려 줄게.”염구준은 감히 손을 대지 못했다.눈앞에 있는 사람은 부하가 아니라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아내이기 때문이었다.“알았어. 당신 말 들을게.”손가을은 남편이 난감해하자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앉아.”염구준은 작은 칠판을 가져와 현장에서 가르치려 했다.반보천인 고수의 수업은 흔히 들을 수 없으니 이미 전신 경지를 돌파한 원종과 정경림도 작은 공책을 들고 다가왔다.두 사람은 나이가 많아서 기회가 없다면 아마도 계속
“여보, 고마워. 내일 업무까지 끝내서 내일 시간 있어.”“무슨 말인지 알았어.”두 사람은 말을 마치고 이불속에서 밤 늦게까지 사랑을 속삭였다.이른 아침, 손가을은 잠옷을 입고 남편의 가슴에 엎드렸다.“구준 씨, 어제 사무실에서 갑자기 정진왕자 경지에 도달했어. 근데 아직도 기운을 사용하는데 서툴러. 당신이 가르쳐줄 수 있어?”용의 기운은 정말 대단했다.경지가 낮은 무술인에게 주입했더니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알아서 실력이 강해졌다.하지만 기운만 있고 싸울 줄 모른다면 같은 경지라도 최하 실력에 속했다.지금 손가을의 상황이 그랬다.만약 부부가 한 사람은 같은 경지에서 무적이고 다른 사람은 가장 실력이 약하다면 즐거운 일들이 수두룩할 것이다.“알았어. 이따가 무관에 가서 가르쳐줄게.”염구준은 거절하지 않았다.오늘 하늘이 무너져도 아내와 함께 있을 것이다.“당신이 최고야!”손가을은 남편에게 달콤한 키스를 하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아침을 먹고 집안일을 마친 후, 부부는 제이든을 데리고 신위무관으로 향했다.탐문하러 간 초상비는 연락이 두절된 상태라 더는 소식이 없었다.염구준은 며칠 더 기다렸다가 정 안 되면 직접 오스타국에 찾아갈 생각이었다.“귀한 손님이 오셨네. 염 선생, 손 대표님. 어떻게 왔어?”입구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던 원종과 정경림이 일어서서 반갑게 맞이했다.이 무관도 염구준이 세운 거지만 바지사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그러나 지금 무관의 수익은 따지지 않고 두 사람에게 맡긴 것 같았다.“그냥 보러 왔어요. 조용한 훈련장 있으면 빌려주세요. 아내랑 연습하고 싶어요.”염구준은 별생각 없이 두 사람에게 부탁했다.‘연습? 애정행각하는 건 아니고?’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마주치고 각자 다른 생각을 했지만 염구준에게 대놓고 말하지 못했다.“안으로 들어가. 연습할 공간은 얼마든지 있어.”두 사람 안내를 따라 염구준 부부는 무관으로 들어갔다.먼저 도착해서 무술을 연습하는 사람들이 많았다.신위무관은 청해에서 가장 큰
“사양하지 말고 가져가세요. 중요한 문서들은 복사본이 있습니다.”민현은 딴 소리하지 않고 흔쾌히 허락했다.“감사합니다. 그럼 갈게요. 시간이 되시면 청해에 놀러오세요”염구준은 나온 지 하루 만에 모든 일을 해결했으니 집에 돌아갈 때가 되었다.그의 태도가 단호하여 민현은 억지로 남기지 않았다.이번에 민씨 가문에 오면서 거록 존주의 행적을 찾지 못했지만 사술을 수련한 민씨 가문의 대장로를 처단하고 옥패에 관한 서책도 얻었으니 꽤 수확이 큰 편이었다.염구준은 민현과 작별 인사를 하고 가파른 길을 스쳐지나 주차한 곳에 도착했다.그리고 빠른 속도로 청해를 향해 달렸다.이 속도로 질주한다면 저녁에 도착할 것 같았다.바로 그때 붉은 장미에게서 연락이 왔다.“염 선생님, 좋은 소식입니다.”휴대폰 너머로 붉은 장미가 마치 경품에 당첨된 것처럼 격동하며 말했다.“무슨 일이예요? 거록 존주가 죽었습니까?”염구준은 추측한 것을 말했다.그러자 붉은 장미가 침묵하며 더는 흥분하지 않았다.“그놈이 쉽게 죽을 리가 없죠. 하지만 전국이 연합하여 거록 존주에게 현상금을 내렸어요. 그때면 어디도 도망칠 수 없어요.”“어쩌면 효과가 있겠죠.”염구준은 이런 방식은 별로 찬성하지 않았다.왜냐면 어떤 일은 돈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말투를 들으니까 별로 찬성하지 않네요.”붉은 장미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꼭 그렇지는 않아요. 다만 그럴 가치가 있나 싶네요. 거록 존주를 찾으려면 상대방이 흘리고 다녔는지 따져봐야 하거든요.”염구준은 공동 현상금이라는 것이 우스웠다.“그렇군요. 제가 오늘 한 가지 발견한 것이 있는데 현상금 차트 1위가 누군지 아세요?”붉은 장미는 재미있는 일이 생각났는지 웃으면서 물었다.“내가 아닌가요? 내가 전신전의 주상이 될 때 현상금이 탑이었어요.”염구준은 어떤 감정 기복도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1위를 차지한 지 오래되어서 이미 습관이 되었다.“알면서 왜 철회하지 않아요?”붉은 장미는 의아했다.염구준이 세상에
두 사람이 마지막에 폭발한 기운은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큰 소동을 일으켰다.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기운을 겨루다 갑작스럽게 거둔다면 오히려 반격하게 되니 힘을 발사해야 했다.한편 민현은 난감했다.염구준이 관문을 통과하러 들어간 것을 알고 있지만 다른 족인들은 모르고 있으니 가서 해명해야 했다.지하에서 두 사람은 기운을 거둔 후, 다시 공격하지 않았다.“어르신 기운은 나보다 순수하네요. 혹시 어르신의 기운이 이미 극치에 도달했습니까?”염구준이 공수하며 물었다.극한 반보천인에 도달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신체와 기운 그리고 의경 세 가지에서 한 가지라도 극치에 도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하하하, 극한은 그렇게 쉽게 도달할 수 없어. 아직 갈 길이 멀어. 그보다 자네 기운이 참 독특하구먼.”민철은 손을 흔들며 방금 염구준이 보여준 옅은 황금색 기운을 회상하며 칭찬을 늘어놓았다.“용의 기운을 융합하여 독특할 뿐입니다. 하지만 순도는 조금 떨어지죠.”염구준이 설명했다.두 사람의 기운은 막상막하라 같은 수준에 놓여 있었다.그러나 염구준의 수단은 워낙 많아서 전력으로 임한다면 민철을 쉽게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역시 대단해. 그럼 편한대로 둘러보고 난 계속 폐관하러 가겠네. 참, 나를 만난 일을 누구한테도 말하지 마.”민철은 말을 마치고 휠체어에 앉아 나왔던 곳으로 돌아갔다.만약 그의 측근이 염구준의 실력이 강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면 나와서 겨루지도 않았을 것이다.“어르신, 옥패 8개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염구준이 기회를 잡고 바로 물었다.“내가 아는 것은 전부 서책에 있어. 자네가 모르는 것은 나도 모르네.”제꺼덕, 제꺼덕.민철이 동굴안으로 들어가자 벽이 천천히 닫히며 마치 나타나지 않은 것처럼 사라졌다.그제야 깨달았다.방금 체스를 통과한 다음 기관은 민철이 제거한 것이었다.염구준의 실력으로 그 기관들은 장식물에 불과하니 파괴하면 다시 고치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지하 공간이 다시 조용해지고 염구준 혼자 남아
염구준은 추측하면서 앞으로 걸어갔다.그러다 민씨 가문에서 서적을 보관한 곳에 도착했다.한눈에 봐도 만 권, 적어도 팔천 권은 되는 것 같았다.그러나 모두 가지런히 진열되어서 별로 눈에 띄는 책은 없었다.오기 전에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고 민현도 특별히 주의할 점을 설명하지 않았다.“찾아보지 뭐.”그는 방향 없이 마구잡이로 찾기 시작했다.민씨 가문에서 보관한 책들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의학, 별자리, 지리에 관련된 책들도 있어서 아무 책이나 들고 나가서 팔아도 큰 돈을 받을 수 있었다.하지만 염구준은 돈이 부족하지 않아 그런 비열한 짓은 하지 않았다.“뭐야?”그때 책을 펼쳐보던 염구준은 이상한 낌새를 발견하고 돌아서서 벽을 바라보았다.끼익!벽 너머로 기척이 들리더니 천천히 열렸다.거기서 백발의 노인이 휠체어에 앉아 나타난 것이다.기운을 감지하니 절대 고수 틀림없었다.노인을 보는 염구준의 안색이 굳어졌다.여기에 사람이 숨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하지만 이렇게 큰일을 민현은 언급하지도 않았다.어쩌면 그도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노인은 가까이 오더니 해맑게 웃으면서 먼저 입을 열었다.“하하하, 자네 염구준 맞지? 난 민천이야. 악의는 없어. 이미 민씨 가문의 일에 손을 뗀 지 오래되었어.”염구준은 지하에 내려오기 전에 위패에 적혔던 ‘민철’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민철은 죽은 척하고 여기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어르신, 왜 지금 나타나는 겁니까?”염구준이 직설적으로 물었다.“민씨 가문의 위협을 제거해줘서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자네가 원하는 물건을 가져왔어.”민철의 말에서, 비록 민씨 가문의 일에 간섭하지 않지만 항상 주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민씨 가문이 멸망할 위기에 처했다면 당연히 나서서 도와줄 것이다.“당연한 일입니다. 게다가 대장로를 살해한 것은 민씨 가문을 위해서가 아니라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기 때문이지요.”염구준은 태연하게 대답했다.원래 사실이니 굳이 노인에게 거짓말할 필요가 없
“그럼 앞장서세요.”민현은 설득하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길을 안내했다.두 사람은 어느덧 민씨 가문의 종묘 사당에 도착했다.민현이 기관을 돌리자 위패가 놓인 선반이 서서히 움직이면서 지하 통로가 나타났다.“가주님은 부상을 입었으니까 여기서 기다려요.”염구준은 한마디하고 혼자 지하로 내려갔다.아래에서 어떤 위험이 닥친다 해도 맞서야 했다.“네. 염 선생님, 조심하세요.”민현은 따라가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 여기서 기다리려 했다.가는 길에 염구준은 작은 기관들을 가볍게 해결하고 곧바로 지하에 도착했다.펑!그는 전방을 보다 손바닥에 작은 불꽃을 피워 주변을 비추었다.지하공간은 민가진의 절반만큼 크고 금속으로 만든 체스들이 바닥에 놓여 있었다.이것들 중 하나가 기관일 것이다.“민현도 참 어이가 없네. 어떻게 해야 통관하는지 알려주지도 않고.”염구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그때 붉은 체스 장군 위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가볍게 그 자리에 발을 딛었다.그러자 기관을 건드렸는지 모든 체스판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폭탄.”그가 다음 수를 놓으려고 할 때 양쪽으로 사병이 이상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공격해 왔다.쿵!염구준은 두 손바닥을 벌여 다가오는 체스를 움직이지 못하게 억눌렀다.그 힘을 통해 그들의 충격력을 판단했다.제꺼덕, 제꺼덕.지하의 톱니바퀴가 계속 움직이자 쌍사의 힘도 따라서 증가하며 가운데 있는 염구준을 제압했다.“아직 힘이 남아 있네.”그는 어느 정도 힘을 모아 버텼지만 아무런 압력도 가하지 못했다.이러고 보니 민씨 가문의 기관은 참 엉터리였다.자기 주인을 치는 사병이 어디 있는가, 체스를 둘 줄 아는지 의심될 정도였다.바로 그때 중병마저 움직이더니 발바닥에 불꽃을 튕기며 염구준을 향해 돌진했다.세 체스가 공격해도 염구준은 힘만 더 사용했을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제꺼덕, 제꺼덕.장애물이 나타나자 체스는 미친듯이 톱니바퀴를 돌리며 염구준을 고기 전병으로 만들 기세로 돌진했다.“이제 한계에 도달했을
“미친, 철기둥 미궁이 이지경이 됐다고?”민씨 가문의 사람들은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철기둥들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철기둥 미궁은 대장로의 비장의 카드로, 가문의 최강자인 민현조차도 이 미궁 안에서는 한 번도 승리한 적이 없었다.다만 단점이 있다면 너무 무거워서 어디든 들고 다닐 수 없다는 것이었다.“염 선생님, 혹시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민현은 서둘러 염구준에게 다가갔다.“별일 없습니다. 다만 민씨 가문의 이런 별난 수법들이 꽤 성가시더군요.”염구준은 진기를 풀며 담담하게 대답했다.만약 마술과 기문술이 아니었다면 대장로의 실력으로는 그와 이렇게 오랫동안 싸울 수 없었을 것이다.“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민가진 내의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습니다. 모두 염 선생님 덕분입니다.”“염 선생님께서 민가진에 방문해 주신다면, 감사의 뜻을 제대로 전하고 싶습니다.”민현은 염구준의 실력을 완전히 인정했기 때문에 진심 어린 태도로 말했다.“그러죠. 마침 저도 물어볼 일이 좀 있습니다.”염구준은 말하며 앞으로 걸어갔다.옥패에 관한 일을 그는 계속 신경 쓰고 있었다.‘물어볼 일이 있다고?’이 말을 들은 민현은 순간 어리둥절했다. 일이 다 해결됐는데, 물어볼게 남았다고 하니까 말이다.그러나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일족에게 대장로의 시신을 수습하라고 지시한 뒤 염구준을 따라갔다.대장로라는 악성 종양이 제거되어 민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지만, 대장로파에 있던 사람들은 풀이 죽어 있었다.물론 대장로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잘못된 편에 섰다는 사실이 후회되었기 때문이었다.악마 같은 대장로를 맹목적으로 따르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걸 떠올리면 그들은 등골이 오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대장로가 사라지자, 가문의 유일한 반보천인인 민현이 자연스럽게 새로운 가주가 되었다.염구준과 민현은 저녁 연회 후 밀실에서 중요한 대화를 나누었다.“이 물건, 본 적 있으시죠?”염구준은 손을 들어 네 개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