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마친 윤구주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이만 가볼게요. 쉬세요.”그는 뒤돌아서 은설아의 방을 나갔다.은설아는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저 뒷모습, 어디서 많이 봤는데... 그래 사진!”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린 오래된 사진을 바라보았다.윤구주의 뒷모습과 사진 속 남자의 뒷모습은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될 만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비슷해... 왜 비슷하지...?”은설아는 두 남자를 겹쳐보며 심장이 아까보다 더 거세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설마 구주 씨가...”그녀는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이내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분은 이미 죽었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은설아!”은설아는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켜며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려고 애썼다.“하지만 구주 씨도 나에게는 히어로잖아...”그녀는 윤구주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누군가의 개인 별장.큰 부지를 차지하고 있는 해당 별장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무척이나 화려한 외관을 가졌다.별장 마당에는 개인 전용기가 세워져 있고 별장 주위에는 검은색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질서정연하게 서 있다.그리고 별장 안 메인 거실에서는 누군가의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다.온몸이 피범벅이 된 남자 한 명이 바닥에 무릎 꿇은 채 누군가에게 빌고 있다.“회장님, 살려주세요!! 도련님의 죽음은 정말 저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은설아는 그저 저희 회사 소속 연예인일 뿐이고 그 여자가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남자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몸을 덜덜 떨며 맞은 편에 있는 남자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맞은 편에 앉은, 마치 호랑이 같은 아우라를 내뿜고 있는 남자는 바로 천음 엔터의 회장이자 탁시현의 아버지인 탁천수였다.그는 연예계를 자기 손안에 쥐고 입맛대로 휘두르는 그런 남자였다.그리고 그런 남자의 유일한 아들이 서남에게 죽임을 당했다.아들 바보라 불리는 그가 이에 분노하지
명재경의 가슴팍에는 아직 그때의 상처가 남아있었다.그는 탁천수에게 예의를 갖춰 허리를 숙였다.“내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말해봐.”“도련님은 서남의 한 놈이 쓴 술법에 당한 겁니다.”“서남?”“네, 회장님.”명재경은 그날 미향각에서 있었던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보고했다.윤구주가 탁시현의 무릎을 꿇리게 한 것도 모자라 화염을 일으키는 술법으로 온몸을 불타오르게 해 탁시현이 재 한 줌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들은 탁천수는 바로 앞에 있는 테이블 위에 주먹을 내리꽂았다.그러자 견고해 보였던 테이블이 단번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그놈 정체가 뭐야?”명재경은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그놈은 상당한 실력자이고 무예와 법술을 모두 익힌 대가의 경지에까지 오른 놈입니다. 저도 그놈의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처까지 얻은 거고요.”탁천수는 명재경이 향문에서 온 법사라는 것과 탁시현이 거금을 들여 데려온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그런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니 심기가 뒤틀려버렸다.“그래서 내 아들이 죽은 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뜻인가?”“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제 말은 그놈을 처리하려면 저보다 더 강한 제 사부님 정도의 고수가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제가 지금 당장 향문으로 떠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제가 바로 저희 사부님을 모셔오겠습니다. 사부님이라면 그놈 따위 한 방에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명재경의 다급한 말에 탁천수는 분노를 조금 가라앉히고 말했다.“그래. 향문에 다녀오는 것을 허락하지. 그리고 나는 나대로 그놈을 처리하겠다. 이 탁천수가 처리하지 못하는 놈은 없어.”탁천수는 뒤에 있는 경호원을 향해 말했다.“지금 당장 다크 사이트에 수배령을 내려. 내 아들을 죽인 그놈과 은설아라는 계집을 잡아 오면 현상금으로 2천억 달러를 주겠다고 해.”2천억 달러!난생처음 들어보는 듯한 숫자에 자리에 있는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명재경조차
2m가 족히 넘는 듯한 거대한 몸뚱어리를 지닌 이 남자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자 신비롭고도 영롱한 파란색 눈동자가 드러났다.몇 분 후, 시끄럽게 울리던 헬기가 착륙을 마치고 전신무장한 4명의 외국인 용병들이 밖으로 나왔다.그들은 영어로 인사를 건넸다.“쿠카, 오랜만이야.”쿠카는 그들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오스틴,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정보국 사람들을 매수했어. 몇 초도 안 돼서 바로 네 위치를 술술 불던데?”이에 쿠카는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그렇게까지 해서 나를 찾은 목적은?”“너한테 딱 맞는 일이 있는데, 들어볼래?”오스틴이 고개를 까딱하며 그를 향해 물었다.“뭔데?”“직접 봐.”오스틴은 옆에 있는 용병이 들고 있는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내 쿠카에게 던졌다.쿠카는 그걸 가볍게 받아 들고는 이미 켜진 상태의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건 다크 사이트 수배 페이지였고 제일 위에 있는 의뢰의 현상금 액수 항에는 2천억 달러가 적혀 있었다.액수를 확인한 쿠카는 두 눈을 반짝이며 잔뜩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2천억 달러라고?! 오스틴, 이 의뢰 어디서 온 거야?”한껏 흥분한 그를 보며 오스틴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화진.”“쉣, 왜 하필 화진인 건데?”화진이라는 말에 쿠카가 단번에 미간을 찌푸렸다.“왜, 파멸자라고 불리는 너라도 화진으로 가는 건 겁이 나나 보지?”“당연한 거 아니야? 화진은 용병들의 무덤이라고도 불리는 곳이라고. 그런데 어떻게 안 무서울 수 있겠어?”쿠카는 잠깐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갑자기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사악하게 웃었다.“하지만 이런 액수라면 리스크를 감당할 만하겠어.”“그 말은 의뢰를 받겠다는 소리야?”“그래.”쿠카의 확답에 용병들은 미소를 지었다.“좋아. 그러면 우리 다섯이서 한번 잘 해보자고. 일이 끝나면 한 사람당 4백억 달러씩 가져가는 거로, 오케이?”쿠카는 웃으며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응, 그래.”하지만 말을 마치자마자 그의 눈빛이 갑자
유라비아, 라티본.이곳은 매년 수많은 남성 여행객들이 모여드는 일명 ‘남자들의 천국’이라고 불리는 곳이다.많은 여행 스팟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여행객들의 발걸음이 가장 많이 향하는 곳은 단연 스트립 클럽이었다.후미진 골목을 지나 보이는 어느 한 스트립 클럽, 별 볼 일 없는 외관과는 달리 안으로 들어가면 네온사인이 화려하게 반짝거리는 무대 위에 섹시한 몸매의 여성들이 폴을 집은 채 스트립쇼를 선보이고 있다.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여행객들은 무대 바로 앞 테이블에 모여들어 위스키를 마시며 쇼를 즐기고 있고 그중에서는 여성들의 손에 현금다발을 쥐여주는 사람들도 있다.클럽 제일 중앙, 사람들의 이목을 가장 많이 받는 곳에 한 갈색 머리의 여성이 있는데 이 여성이 움직이는 순간 클럽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들려왔다.그녀의 아름다운 몸매와 외모도 물론 한몫했지만 그보다 더 열광하는 건 그녀의 손에 감겨있는 검은색의 독사였다.이 독사는 그 유명한 살모사였다.살모사는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부드럽게 피부를 미끄러지며 독을 뿜어냈다.사람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서 여성은 육감적인 몸매와 야릇한 춤을 과감하게 선보이고 있다.그때, 띠띠띠 하는 소리가 그녀가 차고 있던 시계에서 흘러나왔다.그 소리를 들은 여자는 움직임을 멈추고 팔을 치켜든 채 시계를 보았다. 그녀가 차고 있는 건 단순 시계가 아니라 마이크로컴퓨터였다.다크 사이트의 메인 화면을 클릭하자 거기에는 2천억 달러라는 상금이 달린 의뢰가 있었다.그걸 본 여자는 빨갛게 칠한 입술을 위로 말아 올리더니 미련 없이 무대에서 내려와 클럽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손님들은 갑자기 자리를 떠버리는 그녀를 향해 야유와 욕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좋다는 듯 여자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갔다.“2천억 달러라, 좋네, 좋아.”여자는 다시 한번 금액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와버렸다.그녀가 밖으로 나가자 뱃살이 출렁거리는 3명의 취객이 앞을 막아섰다.“이봐 세실, 이대로 가면 어떡해?”
말을 마친 뒤 그녀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고 초록색 독이 두 남자의 목에 각기 흩뿌려졌다.“으아악!!”달빛 아래, 남자 두 명의 머리는 서서히 사라져갔고 이윽고 세 명 모두 백골 사체가 된 채로 바닥에 굴러다녔다.살모사 아리나, 그녀는 다크 사이트 세계 랭킹 3위 킬러다.남자들을 처리한 여자는 기다란 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러자 분명히 갈색이었던 머리가 단숨에 금색으로 변해버렸다.마치 탈피라도 한 듯 눈부신 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아리나는 가방을 들고 다시 걸어가려다 뭔가 생각난 듯 다시 자리에 멈춰 섰다.“나 좀 봐, 가격에 눈이 멀어서 어디서 온 의뢰인지 체크를 안 했네?”그녀는 손목에 있는 마이크로컴퓨터를 켜고 다크 사이크를 열었다.스크롤을 내려 의뢰가 화진이라는 것을 본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왜 하필 화진이야?”그녀는 쿠카처럼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곧바로 예쁘게 웃었다.“오랜만에 스릴 좀 즐겨볼까? 화진은 남자들이 너무 매력적이란 말이야.”아리나는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골목의 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부성국의 어느 한 울창한 숲속에 자리 잡은 신사.이 신사의 이름은 ‘기타가와 신사’로 이곳에 지어진 지 어언 수천 년이 되어간다. 소문으로는 이곳이 바로 부성국에 지어진 첫 번째 신사라고 한다.기타가와 신사가 유명해진 데는 그들만의 독창적인 [기타가와 참격] 이라는 도법이 있었기 때문이다.고요한 신사 내부.사람을 찢어 바를 듯한 날카로운 이빨이 돋보이는 오니 가면을 쓴 남자가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그의 허리춤에는 3자루의 카타나가 있는데 매자루마다 피를 잔뜩 머금은 듯한 시퍼런 기운을 내뿜고 있다.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신사 제일 안쪽의 문이 열리고 세 명의 노인이 걸어 나왔다. 그들 모두 부성국 특유의 옷을 입고 있었고 가슴팍에는 그들이 이곳에서 제일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문양이 박혀있었다.세 노인 중 한 명이 오니 가면의 사무라이를 보며 말했다.“돌아
“그렇군요.”무사시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2천억 달러라는 거금도 물론 큰 유혹이지만 기타가와 님은 네가 화진으로 가 활약하고 오기를 바라신다. 무사시 너도 알다시피 10개국의 전쟁 이후 우리 부성국은 줄곧 화진의 눈치를 봐왔다. 연해 분계선 쪽의 순찰함도 이제는 화진의 허락을 받는 것이 당연하게 되어버렸지. 그러니 이번 의뢰로 상금을 가져오는 것은 물론이고 동시에 화진 것들에게 우리 부성국을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는 인상을 단단히 심어주고 와라.”노인의 진지한 말에 무사시는 근엄하게 고개를 숙였다.“뜻을 받들어 이번 의뢰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겠습니다.”말을 마친 무사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 명의 노인에게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뒤 조용하고 은밀하게 사라져버렸다.그가 떠난 걸 확인한 후 오른쪽 노인이 말했다.“이번 의뢰 말일세. 듣기로는 세계적인 킬러들이 다 노린다고 하던데.”“그래, 그 금액을 보고 가만히 있을 놈들이 아니니까.”“자네들은 어떻게 보는가. 다른 나라 놈들이 무사시를 방해하지는 않겠지?”오른쪽에 있던 노인이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방해한다고 한들 또 어떤가. 무사시를 믿게나. 그 애는 기타가와 님이 인정한 유일한 제자로 기타가와 참격을 완벽히 전수 받았어.”“그래. 그리고 무사시는 다크 사이트 랭킹 1위 킬러이지 않나. 걱정은 넣어두시게.”왼쪽 노인의 말에 세 노인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허허 웃었다....화진, 서남, 백화궁.윤구주는 지난번 은설아와의 대화로 그녀가 자신을 존경하고 숭배한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되었다. 게다가 그녀는 단순 존경심에서 그치지 않았고 자신을 열렬히 애정하고 있었다.은설아는 아마 꿈에도 생각 못 할 것이다. 줄곧 그리워하고 좋아하던 구주왕이 바로 그녀 근처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물론 윤구주는 이 사실을 그녀에게 털어놓을 생각이 없다.평화로운 오전.윤구주이 소채은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때, 정태웅이 갑자기 쳐들어왔다.“저하, 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윤구주는 이에
정태웅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저하, 그놈은 저하를 모욕했습니다! 저는 그걸 참을 수 없고요!”윤구주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참을 수 없어도 참아. 혹시라도 나 몰래 암부원들을 끌어들였다가는 가만두지 않을 거다, 알았어?”“저하, 저는...!”정태웅이 뭐라 대꾸하려고 하자 윤구주는 미소를 지우고 그를 차갑게 노려보았다.“내 말이 우스운가 보지?”진심으로 화를 내는 모습에 정태웅은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아닙니다! 저하 명에 따르겠습니다!”윤구주는 그제야 얼굴을 풀고 다시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왔다.“탁천수가 수배령을 내렸으니 지금쯤 세계적인 킬러들이 나 하나 죽이겠다고 이쪽으로 오고 있겠네?”“네, 맞습니다. 탁천수 그놈이 의뢰를 내린 순간부터 지금까지 저희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총 48명의 킬러가 화진 땅을 밟았다고 합니다. 다크 사이트 하이 랭킹 킬러들 중에서도 4, 5명이 의뢰를 받았고요. 그리고 랭킹 1위의 부성국 오니 사무라이도 왔다고 합니다.”그 말에 윤구주는 소리 내어 웃었다.“좋아, 아주 좋아.”“지금부터 명령을 내리겠다. 국경 쪽을 지키는 암부원들의 경비를 해제하고 모두 이만 들어오라고 해.”정태웅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가 싶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네? 그러면 그 빌어먹을 킬러들이 대거로 들어올 거 아닙니까. 저희가 해야 할 일은 킬러들을 하나하나 찾아서 더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제거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윤구주는 태연한 얼굴로 답했다.“귀찮게 뭐하러. 그냥 다 들어오라고 해. 내가 한꺼번에 처리할 테니까.”“아... 그러면 저하의 말씀은 혼자서 그 많은 킬러들을 다 처리하시겠다는 겁니까?”“정확히 알아들었네.”정태웅은 그제야 그의 뜻을 깨닫고 하하 웃었다.“역시 저하십니다. 그놈들이 이곳으로 와 표적이 저하라는 걸 알고 난 뒤 어떤 표정을 지을지 벌써 기대가 되네요. 하하하.”정태웅은 신나는 얼굴로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지금 당장 저하의 명령을 전달하겠습니다.”윤구주는
백경재는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화를 가라앉히고 방법을 바꿔 동산을 도발하기 시작했다.시괴 동산은 본디 감정이 없어 이러한 도발에 넘어가는 일 따위 없어야겠지만 오늘은 어쩐 일인지 계속되는 백경재의 도발에 눈빛이 변하더니 갑자기 큰소리로 괴성을 질러댔다.그러고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그러자 그를 포박하고 있던 쇠사슬들이 하나둘 끊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하나 남은 사슬마저 끊기고 동산은 자유로운 한 마리의 호랑이처럼 백경재에게 달려들었다.백경재는 그 모습에 두려움이 엄습해 뒤로 물러서며 서둘러 음귀술법을 시전했다. 그러자 수많은 그림자가 몰려와 동산의 몸에 달라붙었다. 하지만 시괴인 그에게 백경재의 술법은 통하지 않았다.시괴 동산이 손을 확 뻗어 날카로운 손톱을 그대로 찔러넣으려는 듯 백경재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에 백경재는 완전히 얼어버렸고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가 달려드는 것을 그대로 바라만 보았다.일촉즉발의 순간, 갑자기 흰색 옷을 입은 소년이 다가와 오른손을 공중에서 휘저었다. 그러자 검기들이 일제히 동산을 향해 날아갔다.펑!시괴 동산은 검기의 위력에 수십 미터 밖으로 나가떨어져 버렸다.동산은 승부욕이 단단히 자극당한 듯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흰색 옷의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다시 괴성을 질렀다.그리고 이번에는 백경재가 아닌 흰색 옷의 소년에게로 달려들었다.그때, 그를 제지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동산, 멈춰!”그 소리에 동산은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자리에 멈춰 섰다.목소리의 주인은 윤구주였다.“너는 꼬맹이 못 이겨. 얘가 정말 널 죽이기로 마음먹었다면 아까의 일격으로 너는 이미 죽어있었을 거야.”윤구주의 말에 시괴 동산은 알아들은 것인지 살기를 거두어들이고 묵묵히 뒤로 물러섰다.“저하,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윤구주를 발견한 백경재가 헐레벌떡 달려왔다.윤구주는 뒷마당을 쭉 훑어보며 답했다.“대련한다 해서 구경하러 왔어.”백경재는 그 말에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제가
말을 마친 천희수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소채은에게 전화했지만, 소채은의 휴대폰은 꺼져있었다.“얘가 왜 휴대폰은 끈 거야?”몇 번 전화를 더 해봐도 휴대폰은 여전히 꺼져있었다.천희수가 답답해하자, 그녀 옆에 있던 소청하가 상황 수습에 나섰다.“구주야, 걱정하지 마. 채은이 네가 너무 그리워서 산책하러 나갔나 보다. 아마 곧 돌아올 거야.”소채은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본 윤구주는 조금 서운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강성의 스카이가든, 이곳은 소채은이 소씨 가문에서 쫓겨 난 후 소채은과 윤구주가 함께 살았던 곳이었다.소채은과 그녀의 곁에 고분고분하게 누워있는 까망이가 지금 이곳에 있었다.윤구주가 혼자서 설국을 상대로 싸워 설국 전체를 화진의 속국으로 만들었다는 소식을 박창용한테서 들은 후부터 그녀는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약간 쓸쓸하기도 했다.기뻤던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가 이 세상의 위대한 영웅이라는 사실이었고, 쓸쓸했던 것은 자신이 윤구주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우두커니 소파에 앉아 있던 그녀는 하얀 다리를 껴안은 채 옆에 있던 까망이에게 물었다.“까망아, 그가 이제는 돌아오지 않겠지? 하긴 나같이 평범한 사람이 천하를 뒤흔든 구주왕의 배필로 전혀 어울리지 않긴 해. 사실, 나도 그가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평생 그와 함께 할 수 있을 텐데…”말하다 말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소채은은 다른 여자들과 달리 부귀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다.순수한 마음을 가진 그녀의 바람은 단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오손도손 함께 살아가는 것이었다.그러나 윤구주가 평범한 사람이 아닌지라 당연히 그녀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그녀가 혼자서 흐느끼며 울고 있을 때 갑자기 ‘똑똑’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소채은은 어리둥절했다.그녀의 옆에 있던 까망이도 극도로 흥분하여 문을 향해 멍멍 짖었다.“누구세요?”소채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 스카이가든은 그녀만의 사적인 공간이어서 부모를 제외하고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그런
고함과 함께 살기 가득한 눈빛을 한 백경재는 즉시 공격 태세를 갖췄다.“백 선생, 날 죽이려고?”익숙한 목소리가 백경재의 귓가에 들려옴과 동시에 윤구주의 모습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이 늙은이가 꿈꾸고 있는 건가? 저하?”갑자기 나타난 예구주를 보더니 백경재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윤구주가 미소를 지으며 백경재에게 다가갔다.“뭐야? 고작 반년 못 봤는데 날 잊은 거야?”“제가 어찌 저하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백경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저하가 정말로 강성으로 돌아왔다고요?”백경재는 여전히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당연하지. 나 윤구주 맞아.”윤구주가 싱긋 웃자, 백경재는 자기 얼굴을 꼬집었다.통증이 느껴지고서야 그는 비로소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맙소사! 저하가 돌아오다니! 저하가 정말로 돌아왔네요!”용인 빌리지의 내부를 향해 백경재는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주 회장님, 채은 씨, 규비 여신님, 어서 나와들 보세요. 저하가 돌아왔어요!”백경재의 말에 서둘러 뛰쳐나온 주세호, 연규비, 소청하 부부, 그리고 박창용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했다.“저하!”“내 사위가 정말로 돌아왔다고?”“저하가 돌아왔어!”익숙한 사람들을 바라보던 윤구주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그래. 나야. 이 윤구주가 왔어.”윤구주가 이렇게 갑자기 올 줄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우리 사위가 드디어 돌아왔네.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어.”윤구주를 보자마자 소청하는 감격의 눈물을 쏟아냈다.“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천희수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물론 다른 사람들도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잠깐, 천후 맞지? 수천도 있네. 너희들이 왜 저하 옆에 있어?”윤구주 뒤에 박천후와 염수천이 있는 것을 박창용은 발견했다.“하하하! 당연히 저하와 함께 창용 씨를 뵈러 왔죠. 그나저나 너무 한 거 아니에요? 저하의 소식을 가장 먼저 알았으면서도 왜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어요?”박
박창용이 말했다.“저도 잘 몰라요. 북방군과 황성 금위군이 흑여산맥에서 철수했다는 사실 외에 저하에 대해서 저도 아는 것이 없어요. 지금까지 감가 무소식이에요.”대청마루에 있던 모든 사람의 얼굴에 실망이 가득했다.모두 윤구주를 만나고 싶었지만, 박창용처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조차도 윤구주의 행방을 모르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어휴. 언제면 저하를 만날 수 있을는지.”백경재가 탄식했다.다른 사람들도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허탈한 표정만큼은 감추지 못했다.…이때, 강성의 숨겨진 공항에 군용 헬기가 천천히 착륙하더니 군인들이 공항 외곽을 철저히 봉쇄하기 시작했다.그리고 공항 활주로에는 수십 명의 중무장한 군인들로 채워졌다.헬기의 문이 열리자, 3명의 영웅인 박천후, 염수천, 그리고 윤구주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박 총사령관님! 염 통령님!”소령으로 보이는 한 장교가 박천후와 염수천이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보더니 즉시 차려 자세를 취했다.하지만, 이 장교는 윤구주를 알아보지 못했다.박천후가 이 장교를 힐끗 쳐다보며 손을 흔들었다.“너희들은 이만 가봐.”“네!”그러자 두 줄의 군인들이 물러났다.“저하, 강성에 도착했어요.”윤구주를 향해 고개를 돌린 박천후가 공손하게 말했다.윤구주는 자리에 멈춰선 후, 강성의 하늘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한 번 했다.“드디어 그녀를 만나게 되는가? 용인 빌리지로 갈 테니 차 준비해.”“네!”차를 준비하라고 박천후가 서둘러 부하들에게 명령했다.박천후와 염수천을 데리고 용인 빌리지로 향하는 도중에 윤구주는 소채은과의 기이한 만남에 대한 에피소드와 강성에서 보냈던 날들을 두 사람에게 말했다.그러자 박천후가 감격에 찬 어조로 말했다.“저하의 얘기를 들어보니 채은 씨는 엄청 착하신 분이네. 그녀를 만난다면 감사 인사를 제대로 드려야겠어.”“그래.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염수천도 찬성했다.윤구주는 창밖의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며 소채은을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알 리 없는 사람들은 박창용의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설국의 선대 국주가 갑자기 붕어한 탓에 다른 새 국주를 임명했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새 국주가 여성이라던데.”주세호가 말했다.“주 회장의 말이 맞아. 그렇다면 설국의 젊은 국주가 왜 갑자기 붕어했는지는 알고 있나?”박창용이 또 묻자, 주세호가 이번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주세호는 사업가인지라 국정에 대해 알 리 없었다.“참수당했어!”박창용은 큰 소리로 말했다.“네? 설국의 선대 국주가 참수당했다고요?”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네. 10국의 성원이었던 설국의 야심은 하늘을 찔렀어요. 특히 요 몇 년 동안에 우리 화진의 국경을 밥 먹듯이 침범한 탓에 그 대가를 치른 셈이죠. 이뿐만이 아니에요. 설국은 군신, 광명 신전 등 거물급 인사들까지 잃었어요. 당연히 이 모든 것은 한 화진 사람의 소행이고요.”이 말을 내뱉는 박창용의 목소리는 격앙된 상태였다.“그것이 정녕 사실이란 말인가요? 그렇다면 대체 누구의 소행이에요?”소청하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화진 사람 한 명이 설국을 상대로 싸워 설국의 국주를 참수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소청하의 질문에 박창용은 오히려 껄껄 웃으며 사람들에게 되물었다.“하하! 누가 이렇게 대단한 능력을 갖췄는지 여러분은 짐작이 가시나요?”“박 사령관님, 혹시 구주를 말씀하시는 건가요?”총명한 연규비가 물었다.“네? 저하라고요?”백경재가 외치자, 소채은은 물론 그 자리에 있던 주세호와 다른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박창용을 바라보았다.“저하를 잘 아는 사람은 역시 규비 여신님밖에 없네요. 맞아요. 설국의 국주를 참수하고 설국을 백 년 동안 우리 화진에게 굴복시키게 한 인물이 바로 저하에요.”박창용이 진실을 말하자,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홀로 한 나라와 맞선 데다 설국 국주의 목까지 베었다니!”“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설국을 백 년 동안 우리 화진의
박창용이 용인 빌리지에 온다는 소식이 퍼지자, 그가 윤구주의 소식을 가지고 왔을 것으로 생각한 백경재, 주세호, 그리고 소청하 부부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모두가 앉아 있는 대청마루에 연규비가 들어왔다.“규비 여신님, 박 사령관이 무슨 소식을 가지고 온대요? 저하에 관한 소식인가요?”백경재가 흥분에 가득 찬 목소리로 연규비에게 묻자, 연규비가 답했다.“자세한 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박 사령관의 말투로 보아 그런 것 같아요.”“하하! 이런 경사가 또 어디 있을까. 우리 저하의 소식이라니요.”감격에 겨운 듯 백경재의 눈가는 촉촉이 젖었다.물론 다른 사람들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서울로 떠난 반년이란 시간 동안에 윤구주는 문벌과 세가와 싸우느라 강성에 있는 식구들을 신경 쓰지 못했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이들을 버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저하가 저희를 버리지 않았다고 제가 말했잖아요.”주세호가 득의양양하게 말했다.모두가 대청마루에서 창용 부대의 총사령관인 박창용을 기다리고 있었다.한 시간이 흐른 뒤, 용인 빌리지의 아래에 3대의 지프 군용차가 나타났다.차 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차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군복을 입고 실탄 장착한 총을 지니고 있던 경비병들이었다.그러고 나서 우람한 체구를 갖춘 박창용이 차에서 내렸다.“사령관님, 도착했습니다.”경비병의 말에 박창용이 고개 들어 용인 빌리지를 올려다보았다.“저하가 떠난 이후로 한 번도 오지 않았으니 꽤 오랜만이네. 다들 저하를 그리워하고 있겠지?”말을 마친 후, 박창용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이제 올라가 보자꾸나.”그는 경비병 몇 명과 함께 용인 빌리지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박창용과 경비병들이 용인 빌리지의 입구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입구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백경재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박 사령관님, 이제야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말하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백경재를 바라보던 박창용은 하하거리며 웃었다.“백 대사님, 오랜만입니다.”“제가 얼마나 눈이 빠지게
“얘야, 이 어미도 네 아빠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그가 너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서울이 우리 화진의 수도란 사실을 너도 잘 알잖아. 그런 대도시에는 아름다운 여성들이 길가에 즐비했어. 다른 여자들이 구주를 채가지 않게 신경 좀 써야 할 거야.”천희수도 입을 열었다.이들의 재촉에도 소채은은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아빠, 엄마, 너무 멀리 갔어요. 저와 인연이라면 어떻게 해보겠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너무 연연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구주와 저 사이의 문제를 두 분이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부모로서 어떻게 자식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있겠니? 그를 바다에서 구해준 사람은 너야. 어찌 이리도 배은망덕할 수 있단 말이냐.”소청하가 말했다.“네 아빠 말이 맞아.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버리면 안 되지.”부모의 말에 소채은은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회사 갈 거니까 저와 구주의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마세요.”소채은은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떴다.“채은아!”“채은아!”소청하와 천희수가 큰 소리로 외쳤지만, 소채은은 뒤돌아보지 않았다.방에서 빠져나온 후에도 머리는 여전히 윙윙거렸다.사실 그녀도 윤구주를 원했지만, 명성이 자자한 윤구주가 강성과 같은 소도시에 자리를 잡을 리 만무하다고 소채은은 생각했다.“내가 그의 배필로 자격이 없을지도 몰라.”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소채은의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이때, 갑자기 그녀의 뒤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채은 씨, 오늘에 일찍 퇴근하셨네요.”그녀가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우아한 각선미와 옥 같은 얼굴을 한 연규비가 보였다.길고 몸에 착 감긴 듯한 치마는 그녀의 S라인 몸매를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연규비의 목소리에 소채은은 재빨리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고 고개를 돌렸다.“일이 바쁘지 않아 일찍 돌아왔어요.”“아. 정말요?”연규비는 소채은의 눈이 퉁퉁 부은 것을 발견했다.소채은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채은 씨, 또 구주를 생각한 거예요?”연규비는 소채은에게 다가가
따르릉!이때, 소채은의 가방 안쪽에서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그녀가 휴대폰을 꺼내 수신 버튼을 누르자, 휴대폰 너머에서는 천희수의 불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채은아, 너 어디야?”“밖에 있는데 무슨 일이세요?”소채은이 물었다.“네 아빠가 조금 전 쓰러져서 빨리 집으로 와야겠다.”“뭐라고요? 아빠가 쓰러지셨다고? 알았어요. 지금 당장 갈게요.”전화를 끊은 후, 소채은은 까망이와 함께 서둘러 자리를 떴다.“까망아, 어서 집에 가자.”…용인 빌리지, 회사에서 돌아온 소채은이 잰걸음으로 정원에 있던 천희수에게 다가가 물었다.“아빠가 쓰러졌다면서요? 지금 어디 있나요?”소청하가 쓰러졌다고 말했던 것은 소채은을 집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이들 부부가 꾸민 자작극이었다.딸의 물음에 천희수가 답했다.“점심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글쎄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어.”“심각한가요? 아빠는 지금 어디 있는데요?”소채은은 다급히 물었다.“지금 침대에 누워있으니까 얼른 가보자꾸나.”그녀들이 소청하를 보러 안방에 갔더니 소청하는 꾀병을 부리며 침대에 누워있었다.“아빠! 괜찮으세요?”누워 있는 소청하를 본 소채은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채은이 왔구나. 난 괜찮으니 걱정 안 해도 돼.”소청하가 말했다.“쓰러졌는데 괜찮다니요. 제가 부축할 테니 지금 당장 병원 가요.”소채은은 소청하를 병원에 데려가려 했다.“그럴 필요 없어. 나 정말로 괜찮아.”아프지 않으니 당연히 병원 갈 이유가 없었다.“하지만 쓰러지셨다면서요?”소채은이 말했다.“얘도 참, 내가 쓰러진 이유는 구주와 네 일 때문이야.”소청하는 한숨을 내쉬었다.“저랑 구주요?”소채은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래. 이 바보야. 생각 좀 해 봐. 구주가 서울에 간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네 아비인 내가 어찌 걱정 안 할 수가 있냐?”소청하의 말에 소채은은 그제야 그가 꾀병 부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채은아, 네 생각을 아빠한테 말해줄 수 있어?”소청하가 소채은
“뭐가 아니라는 거야? 잘 생각해 봐. 구주는 화진의 왕이지만 우리는 무명 가문이야. 뭐가 부족하다고 우리랑 엮이려 들겠어. 게다가 구주 주변의 사람들도 다 돈과 권력을 가지고 있어. 연씨 성을 가진 여자도 TV에 나오는 톱스타보다 예쁘잖아. 구주가 구주왕이라는 신분을 등에 업고 있으니, 여자들이 줄을 선거지.”소청하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천희수는 걱정이 앞섰다.‘천하무적 화진의 구주왕과 강성의 무명 가문이라… 천지 차이네.’이런 생각 하며 천희수가 입을 열었다.“그러면 이제 어떡하면 될까요?”소청하가 잠시 생각한 뒤 말을 꺼냈다.“이 일은 그와 인연을 맺은 사람이 풀어야 해. 우리 딸이 나서야 한다는 말이야.”“채은이가요?”천희수는 어리둥절했다.“그래. 구주를 구한 건 우리 딸이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딸을 버리면 안 되지. 그나저나 지금 당장 채은에게 전화해서 오라 해!”“하지만 채은이 회사 일 때문에 바쁘잖아요?”“당신 바보야? 회사 일보다 구주의 일이 더 중요해. 그가 우리 화진의 구주왕이자 나라를 구한 영웅이라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구주가 우리 소씨 가문의 사위가 된다면 우리 가문을 빛내는 일인데 뭔 얼어 죽을 회사야!”천희수는 소청하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알았어요. 그러면 지금 채은에게 전화해서 오라고 할게요.”천희수는 말하면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전화해서 당장 오라 해. 만약 오지 못하겠다면 서울로 가서 구주를 찾으라고 하고. 하늘이 두 쪽 나도 구주가 우리 딸을 버리면 안 돼.”소청하가 말했다.…강성의 해변, 한 여자가 해변에 홀로 앉아 있었다.바닷바람이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스치자, 휘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그 여자는 바로 이른 아침에 회의를 마치고 홀로 해변에 온 소채은이었다.이 해변은 그녀와 윤구주가 처음 만난 곳이기도 했다.그 당시 그녀가 이 자리에 앉아 있다가 해변에 떠 있는 윤구주를 발견했던 것이었다.그때의 생각에 눈시울이 약간 붉어
주세호가 경호원들과 함께 들어오는 것을 보자, 소청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주 회장님이 오셨네요. 어서 안으로 드세요.”주세호가 웃으며 말했다.“아니야. 마침 이 앞을 지나다가 들른 거야.”주세호가 말하면서 손을 휘젓자, 그의 뒤에 있던 경호원들이 선물 박스와 고급 영양제들을 꺼냈다.“뭘 또 이런 걸. 지난번에 보내주신 것들도 아직 남았는데.”말은 그렇게 해도 소청하는 주세호가 준 비싼 물품들을 챙기기에 급급했다.“제 사위가 서울로 떠난 이후로 우리 가족을 돌봐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주 회장님.”소청하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그는 윤구주를 외부인 취급하지 않고 사위라 불렀다.“별말을 다 하고 그래. 난 그저 내 할 일을 했을 뿐이야.”주세호가 말했다.“어쨌든 감사합니다. 아! 맞다. 주 회장님, 최근에 제 사위에 대한 소식은 없나요?”소청하가 물었다.윤구주가 서울로 간 후부터 소청하는 윤구주의 소식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윤구주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자신의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되기 때문이었다.‘윤구주는 화진의 구주왕이야. 이렇게 좋은 신분을 가진 그를 소씨 가문의 사위로 삼는다면 우리 가문에 날개를 단 셈이지. 게다가 몇 대에 걸쳐 부귀영화도 누릴 수 있을 거야.’소청하는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윤구주의 소식을 묻는 그의 질문에 주세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미안해. 나도 통 연락이 안 되네.”“그럴 리가요. 주 회장님, 구주가 서울에 간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왜 여태 안 돌아오는 걸까요? 주 회장님은 친구도 많고 인맥도 넓으니까 제 사위가 서울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사업하는 친구들에게 물어봐 줄 수 있나요?”“조급해하지 마. 난 저하를 믿어. 그가 일을 마치고 나면 반드시 너희들을 보러 올 거야.”소청하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주세호는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았다.“회사 쪽에 일이 있으니 먼저 갈게.”주세호가 핑계를 대고 떠난 후,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