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우 삼촌이라는 한 마디에 윤신우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는 고개를 돌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걸어 나오는 이홍연을 바라보았다.“혹시 공주... 전하십니까???”이홍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신우 삼촌, 아직도 절 알아보시네요?”이 말은 윤신우를 당황하게 했다.“윤신우,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이홍연의 신분을 알아본 순간, 윤신우는 바로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뒤에 있던 윤창현과 윤정석 역시 놀라서 그 자리에 얼어버렸다.그들은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황급히 윤신우를 따라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공주 전하를 뵙습니다!”그들이 전부 무릎을 꿇는 걸 보자, 이홍연은 급히 다가가 윤신우를 일으키며 말했다.“신우 삼촌, 저는 막 변새에서 돌아왔어요. 이렇게까지 예를 차릴 필요 없어요. 얼른 일어나세요.”이홍연은 말하면서 서둘러 윤신우를 부축해 일으켰다.일어난 윤신우는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이홍연을 바라봤다.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기에 그는 하마터면 이 왕실의 여섯째 공주를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방금 ‘신우 삼촌’그 한마디가 아니었다면, 길거리에서 만나도 십여 년 전 윤씨 일가에 머물렀던 왕실의 여섯째 공주님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신우 삼촌, 십수 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젊으시네요!”이홍연은 미소를 지으며 윤신우를 바라봤다.“아닙니다...전 이미 나이가 들었어요. 오히려 공주 전하께서, 방금 저를 부르지 않았다면 정말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윤신우가 감회에 젖어 말했다.“그렇죠, 눈 깜짝할 사이에 십수 년이 흘렀네요!”이홍연도 말했다.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윤창현과 윤정석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이 사람이 바로 어렸을 때부터 계속 윤씨 일가에 있던 왕실의 여섯 번째 공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공주 전하께서는 지난 몇 년 동안 계속 밖에서 두루 돌아다니신다고 들었는데, 언제 돌아오신 건가요?”윤신우가 물었다.“방금 막 돌아왔어요.”이홍연이 대답했다.“그렇군요! 공주 전하께서 갑자기 왕
윤씨 일가의 대문을 나서자, 이홍연은 번화한 거리 한복판에 서서 고층 빌딩들을 바라보며 감탄했다.“오랜만에 돌아왔더니, 서울은 정말 더 번화해졌네!”곁에 서 있던 육도 주도는 그녀가 지난 과거를 떠올리고 있다는 걸 알고 별다른 말 없이 묵묵히 서 있었다.“갑시다! 그를 찾아가서 제대로 따져봐야죠.”이홍연이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디로요?”주도가 잠시 당황하며 물었다.“어디긴 어디예요? 당연히 그 배신자, 나를 몇 년 동안이나 애태우게 한 그 자식에게 가야죠!”이홍연은 투덜거리며 여섯 마리 용과 봉황이 그려진 마차에 올라탔다.그녀의 말에 주도는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날려 마차에 올라탔다.“이랴!”그는 채찍을 휘두르며 마차를 먼 곳으로 질주해 갔다....윤구주는 서울로 돌아온 이후, 줄곧 형제들과 함께 16년 전 어머니와 의지하며 살던 작은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이 집은 윤구주의 어린 시절 추억과 어머니와의 깊은 정을 간직한 곳이었다.정태웅과 천현수 두 사람은 이른 아침부터 청룡과 유명전에 대한 정보를 비밀리에 조사하러 나갔고 다른 이들은 집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재이야, 또 무슨 생각 하고 있어? 도련님을 모신 뒤로 너 많이 변한 것 같아.”마당에서 건장한 체격의 철영이 붉은 옷을 입은 아름다운 재이를 보며 물었다.재이는 철영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매혹적인 눈으로 윤구주의 방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보아하니, 재이는 상사병에 걸린 모양인데!”용민이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뭐라고요? 상사병?”“재이가 설마 정말로 우리 도련님께 반한 건 아니겠죠?”철영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안 반할 수 있겠냐? 우리 도련님은 당대의 인왕으로 실력도 수단도 천하제일이거니와 용모 또한 출중하시잖아! 그러니 누가 우리 도련님을 좋아하지 않겠어?”“맞아요, 맞아요.”용민과 철영이 재이를 놀리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매섭게 째려보았다.“둘 다 입 좀 다물어요! 전 한낱 여종인데, 어찌
그는 황금빛 눈동자로 집 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육도의 기운이 느껴지는군...”집 뜰안에서...용민과 철영, 재이 외에 꼬맹이 남궁서준은 마치 돌처럼 조용히 한쪽에 앉아 있었다.가부좌를 하고 있는 그의 무릎 위에는 한 자루 검이 놓여 있었다.윤구주를 따르기 시작한 이후로, 이 남궁세가의 검도 귀재는 줄곧 이런 모습이었다.그는 말수가 적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검도에 몰두하며, 검심을 갈고닦는 데 쏟고 있었다.민규현 또한 그러하였다.절정 이중천에 들어선 지금, 그의 내공은 이미 세가의 조상이라 불릴 만큼 뛰어났다.모두가 뜰 안에서 머물고 있을 때, 달그닥, 달그닥 마차 소리가 작은 뜰 앞에 멈춰 섰다.이홍연의 마차가 도착한 것이었다!“무슨 소리냐?”뜰 안에 있던 용민과 재이 그리고 철영은 마차 소리를 듣고 의아하게 밖으로 나왔다.“어머? 이게 웬 마차야? 요즘 같은 때에 마차라니, 혹시 촬영 중인가?”재이가 마차를 보고 신기해하며 말했다.“와, 이 마차 진짜 호화롭네! 저기 위에 있는 가마를 봐, 용과 봉황 무늬가 수놓아져 있잖아!”용민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마차를 바라보았다.“저기, 어르신. 무슨 일로 이 마차를 몰고 우리 뜰 앞에 멈추셨어요?”재이는 마차 위에 앉아 있는 너절한 주도에게 물었다.그 물음에 주도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이곳을 찾으러 온 거니까!”“엥? 누구를 찾으신단 말씀이세요?”재이가 계속 물었다.“윤구주라 불리는 소년을 찾으러 왔어.”마차에 앉은 주도가 입을 열었다.“뭐라고요? 우리 도련님을 찾으신다고요?”세 사람은 그 말을 듣고 즉시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그래!”“어르신, 어찌하여 우리 도련님을 찾으시는 겁니까?”용민이 차가운 눈으로 물었다.“그 녀석이 우리 아가씨에게 큰 빚을 졌거든! 그래서 오늘 내가 아가씨를 모시고 그 빚을 받으러 온 거다!”주도는 허리춤에 매달린 커다란 호리병을 들어 벌컥벌컥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그 말을 듣고 재이의 얼굴이 점차 어두워졌다.세 사
이것이 바로 진정한 육도 절정이었다.그의 몸에서 발산된 웅장한 기운이 순간적으로 퍼져나가자, 용민, 재이, 철영 이 세 명의 신급 강자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주도는 세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 후에야 웃으며 말했다.“걱정 마라, 애송이들아. 난 너희 같은 후배를 해칠 생각이 전혀 없단다. 내가 말했듯이, 오늘은 오로지 우리 아가씨의 빚을 갚으러 왔을 뿐이다!”말을 마친 그는 발걸음을 옮겨 집 마당으로 향했다.그가 발을 막 작은 뜰에 들이려는 찰나, 천지를 울리는 검명이 천공을 찢으며 울려 퍼졌다.곧이어 한 줄기 번개 같은 검광이 주도를 향해 날아들었다.이 검의 위력은 압도적이었다.검기가 넘실대는 가운데, 주위에 살기 어린 검의 기운이 감돌았다.“어?”검이 날아오는 것을 보자, 주도의 눈이 번뜩이더니 두 손가락을 뻗어 허공을 집었다.짤랑!놀랍게도 그 무시무시한 검날은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고스란히 멈춰 섰다.이 검을 휘두른 이는 바로 남궁 세가의 천 년에 한 번 나올 법한 최고의 검도 귀재 남궁서준이었다.자신의 필살 검이 이 남루한 노인에게 잡히자, 남궁서준의 차가운 얼굴도 파르르 떨렸다.그 역시 이 노인이 자신의 검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꼬맹아! 조심해! 저 늙은 자는 초절정 고수야!”곁에서 외치는 목소리가 울렸다.민규현이었다!아까 주도가 마차에서 내리던 순간, 마당에 있던 민규현과 남궁서준은 그 강력한 절정의 기운을 감지했다.그래서 두 사람은 지체 없이 바로 공격을 개시했던 것이다.지금, 남궁서준의 검날이 주도의 두 손가락에 잡힌 것을 본 민규현은 말없이 온 기운을 끌어올렸다.이미 절정 이중천의 경지에 오른 민규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장 강력한 호마공을 펼쳐냈다.온몸에서 뿜어져 나온 현청색 기운은 하늘을 뚫을 듯 솟구치더니 그의 등 뒤에 삼 장 크기의 호랑이 형상이 갑자기 나타났다. 호랑이의 강렬한 포효와 함께 민규현은 하늘을 찢을 기세로 주먹을 내리쳤다.거대한
하늘 위에서 일곱 줄기의 별빛 같은 광채가 번쩍이더니 일곱 개의 칼날로 변해 주도를 향해 내리쳤다.“허? 칠성 금술인가?”하늘에서 떨어지는 일곱 개의 검 그림자를 바라보며 주도는 미소 지었다.“이 어린 나이에 칠성 금술을 펼치다니, 참으로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검도 귀재로구나! 하지만 아쉽게도, 넌 아직 북두칠성의 참된 오의를 깨닫지 못했어! 만약 그랬다면, 이 공격으로 사상 절정에도 오를 수 있었을 텐데.”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도는 다시금 오른손을 들어 하늘을 향해 가볍게 두 번 찔렀다.그러자 어둠이 가득한 밤하늘은 순간 떨리기 시작했고 떨어지던 일곱 자루의 검 그림자는 주도의 머리 위에 닿기 직전에 차례대로 펑, 펑, 펑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그렇게 칠성 금술은 주도의 손끝에서 허망하게 깨져버렸다.하지만 꼬맹이는 이 장면에 전혀 당황하지 않고, 검의 기운을 끌어올리며 다시금 공격을 시도하려 했다.그러나 바로 이때, 집 안에서 윤구주의 차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꼬맹아! 그만두거라. 너는 그의 상대가 아니다!”윤구주의 말이 떨어지자, 남궁서준은 그제야 콧방귀를 뀌며 검의 기운을 거두었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주도를 매섭게 쏘아봤다.결코 굴복할 기세는 아니었다.집안에서 윤구주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육도 주도도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마당을 바라보았다.마당 안에서 무언의 경계가 감지되자 주도의 얼굴에는 서서히 긴장감이 스며들었다.그러나 순간 그의 눈은 번쩍이더니 다시금 맹렬한 광채를 뿜어냈다.“쯧쯧! 사십 년 만에 서울로 돌아왔더니 이 천하에 다시금 이 술귀신를 두려움에 떨게 할 기운이 존재할 줄이야! 과연 어떤 녀석의 솜씨인지 보고 싶구나!”그의 말이 끝나자, 방 안에서 다시 윤구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보고 싶다면, 이 마당 안으로 들어와라!”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마치 천둥과도 같았다.“어허? 이리도 오만한가? 좋아, 좋아! 오늘은 내가 이 술 귀신의 손맛을 보여주마!”그 말과 함께 육도 주도는 한
생각만으로 상대를 멸하는 의념의 힘!이것은 오직 오악 절정에 도달한 자만이 펼칠 수 있는 신통한 능력이었다.지금, 이 순간, 윤구주와 주도는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으나, 그들의 의념 전투는 열 명, 아니 백 명의 절정 고수를 상대하는 것보다도 더 공포적이었다.주도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희미한 백색 현기인 반면 마당을 덮고 있는 윤구주의 기운은 황금빛 광채였다.두 강력한 의념의 힘이 공중에서 격렬히 충돌하며 얽히는 순간, 쩍, 쩍하는 소리와 함께, 대지와 모든 사물은 이 강력한 신법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마치 조각난 유리처럼 산산조각 나며 부서졌다.“세 번째 걸음!”주도가 세 번째 걸음을 내딛는 순간, 그의 얼굴은 점점 더 긴장감이 감돌았다! 두 발이 마치 천근의 쇳덩이로 눌린 듯 무겁고 떨려왔던 것이다.쿵!세 번째 걸음이 땅에 닿자, 작은 마당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했다!이 막강한 힘에 주도의 온몸이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오호, 정말 대단한 젊은이로다! 이 술 귀신이 사십 년간 오늘과 같은 상황은 처음 겪어보는구나! 하하하, 정말 통쾌하다!”그렇게 크게 웃음 지은 후, 주도는 갑자기 허리춤의 호리병을 꺼내어 크게 몇 모금 들이켰다,술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주도의 머리카락은 날리기 시작했고 기운은 순식간에 폭발적으로 상승했다.그 기운은 이전의 백색 현기와는 전혀 다르게, 차디찬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암흑의 기운으로 변해버렸다.이것은 ... 살기였다!!!전설에 따르면, 육도 절정을 넘어선 자만이 칠 살의 경지에 다다른다고 하지 않았는가.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십 년 전, 천하를 뒤흔들었던 육도주도가 이미 칠 살 절정에 도달하였음을!그의 진정한 실력이 드러나자, 지면에 벌어진 균열 속에서 암흑의 살기가 솟구치며 그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살기가 온몸에 스며들자, 주변의 기운은 순식간에 음침하고 뼈를 에는 듯한 냉기로 가득 찼다.심지어 달궈졌던 땅마저 검은 서리에 덮여가며 섬뜩한 기운을
이 장면을 보고 민규현, 꼬맹이 등은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천상의 여신 같은 화진의 여섯째 공주가 눈물을 흘리며 윤구주를 때리고 있다니.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얼마나 때렸을까. 손이 아팠는지, 혹은 울다가 지쳤는지, 이홍연은 마침내 멈추었다.그녀가 멈추자, 윤구주는 그제야 부드럽게 고개를 숙여 그녀의 눈물 어린 얼굴을 바라보았다.“홍연아, 너 정말 많이 성장했구나!”이홍연은 붉어진 눈으로 말했다.“당연하지!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못 봤는지 알아?”윤구주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말 많은 시간이 흘렀구나...”“오라버니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걸 아냐?”말하면서 이홍연은 서러움을 못 이겨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윤구주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닦아주었다.그 모습은 오빠가 여동생을 애틋하게 걱정하는 듯한 모습이었다.하긴 십여 년 전, 두 사람은 소꿉친구였으니까.그 시절, 이홍연은 언제나 윤구주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달콤한 목소리로 구주 오라버니라고 불렀다.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십수 년이 흘러가 버렸다.윤구주가 곤륜에서 왕으로 봉해진 후, 그는 몰래 이홍연을 만나러 간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때 그는 이미 문 씨 세가와의 혼인을 강요받아, 더 이상 그녀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참으로 세월이란 알 수 없는 것이었다.그가 어찌 상상이나 했을까. 세월이 돌고 돌아 어릴 적 소꿉친구를 이렇게 다시 마주할 줄을.“가자. 들어가서 이야기 좀 나누자꾸나!”윤구주는 말을 마치고 이홍연의 가녀린 손을 살며시 잡았다.존귀한 공주였지만 그녀 역시 발그레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윤구주의 손에 이끌려 마당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주도는 윤구주에게 끌려가는 이홍연을 보며 말했다.“쯧쯧, 좋겠다. 에효! 지금까지 이렇게 기뻐하는 공주는 처음 보네!”...조용한 마당으로 누구도 감히 들어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민규현도 꼬맹이도 심지어는 주도도 그저 발치에서 머뭇거릴 뿐
그때, 그녀는 흑목국 국경에 있었다. 윤구주가 죽음의 바다에서 전사했다는 비보를 처음 들은 순간, 그녀는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나중에 그녀는 주도의 덕에 깨어날 수 있었지만,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녀는 무려 사흘 밤낮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슬픔 속에 빠져 있었다.그러다가 주도의 따스한 위로와 설득 덕분에 그녀는 비로소 슬픔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그리고 바로 얼마 전, 서울에는 내란이 일어났고 수많은 문파의 절정 고수들이 참살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이홍연은 그 소식을 듣고 서울로 돌아갈 결심을 굳혔고, 그 무렵 황성에서 또 하나의 소식이 전해졌다.바로 윤구주가 죽지 않았다는 소식이었다.그 소식이 전해지자, 사랑 때문에 오랜 세월 서울을 떠났던 이홍연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서울로 돌아왔다.그러다 드디어 윤구주를 만나게 된 것이다.과거 그의 죽음 소식에 관해 묻자, 윤구주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말했다.“말하자면 길어. 나중에 말해줄게!”“왜 지금은 말할 수 없는 건데?”이홍연이 다시 물었다.“지금은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어.”윤구주의 단호한 태도에 이홍연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그럼, 나중에 꼭 말해줘!”윤구주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를 마친 뒤, 이홍연은 갑자기 윤구주의 커다란 오른손을 움켜잡고 정다운 눈빛으로 물었다.“이 나쁜 놈아,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나를 한 번이라도 그리워한 적은 있어?”“했어... 당연히 그리워했지...”윤구주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런데 왜 나를 그리워하면서 한 번도 날 찾아오지 않았어?”“16년 전의 그 일이 아바마마의 잘못이라는 걸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나를 외면할 수 있어? 평생토록 나를 지키고 돌봐주겠다고 했던 그 말을 잊은 거야?”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홍연의 눈가가 서서히 붉어졌다.하지만 윤구주는 가볍게 그녀의 손을 떼어내며, 진지한 눈빛으로 이홍연을 바라보았다.“홍연아, 어린 시절의 일들은 잊어.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
네 사람은 비석을 지나자마자 환각의 전법에 부딪혔다. 이 전법은 우연히 들어오거나 경고를 무시한 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결국 서요산 밖으로 나가게 만드는 것이었다.의지력으로 환각의 전법을 통과하면 다음 전법이 기다리고 있었다.당연히 네 사람에게 환각의 전법은 통하지 않았다. 윤구주와 임정설은 물론, 백호와 청해도 곤륜에서 강자로 존경받는 존재들이었다.다음은 섭혼 전법이었다.전법에 들어가기 전부터 하늘을 찌를듯한 원한의 기운이 밀려왔다.그 기운을 느낀 임정설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수년간 왕궁에서 비술을 연구해서 알아본 건데. 이곳은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진 거야. 반경 수천 리 이내의 원한의 기운이 모두 이곳에 모여있어. 내 치하에서도 억울하게 죽은 자들이 이렇게나 많았구나. 그걸 내가 몰랐다니.”그는 깊은 자책에 빠졌다.“국주님, 인간이 있는 곳에는 분쟁은 끝나지 않습니다. 근대에 들어 큰 전쟁은 사라졌지만 소규모 충돌은 끊이지 않았죠.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게다가 이곳에 모여진 원한의 기운은 억울한 죽음뿐만 아니라 극형을 받은 흉악범들의 원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은 죽어도 사라지지 않죠. 사랑 때문에 미워하고, 미움 때문에 미쳐버리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윤구주의 말을 듣고 임정설이 한마디 물었다.“구주야, 너는 문아름을 미워하지 않느냐?”문아름의 이름을 들은 윤구주의 눈에서 짙은 살기가 번뜩였다.“당연히 미워하죠. 저 윤구주는 순수하게 사랑하고 미워하는 인간입니다. 사랑은 사랑, 증오는 증오에요. 그녀를 위해 변명 같은 건 하지 않겠습니다. 문아름이 저를 배신했으니 저에게 당연히 미워할 권리가 있죠. 하지만 문아름을 사랑한 걸 후회하지는 않아요. 문아름이 제게 사랑이 무엇인지, 인심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으니깐요. 가려는 길이 다르면 미래를 함께할 수 없죠. 저희는 처음부터 다른 길을 걸었어요. 저희의 만남 자체가 잘못이었지만 문아름이 저를 구주왕으로 만든 것도 사실이죠. 그리고 제가 문아름을
“저하와 생사를 함께할 수 있다니. 그건 제 영광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만약 전하와 제가 정말로 서요산에서 죽게 되면 청룡이 돌아온다 해도 성수가 한자리 비게 되는 건데 그분을 어떻게 소환하시렵니까?”백호가 의혹이 담긴 표정으로 물었다.윤구주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그걸 설명하려면 너를 실험체로 삶고 실험을 진행할 때부터 얘기해야 해. 정확히 말하면 청룡, 현모, 주작의 몸속에는 네 피가 흐르고 있어. 네가 성수의 피를 융합한 첫 번째 수련자야. 예로부터 지금까지 오직 너만이 진정한 융합에 성공했지. 네 피를 빌려 그들에게 성수의 정수를 주입했던 거야.”“백호,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다. 네가 이런 괴물 같은 모습이 된 건 전부 내 탓이야. 그러니 나를 원망해도 좋아.”백호는 웃으며 대답했다.“제가 어떻게 저하를 원망하겠습니까? 게다가 당시 저하께서는 제 목숨을 구하려고 그러신 거였잖아요. 제가 고마워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첫 번째로 융합에 성공한 수련자는 제가 아닐건데요? 저하께서도 성수의 피를 다루시지 않았습니까?”그 말을 들은 윤구주가 고개를 저었다.“아니. 달라. 그건 그냥 성수의 피를 통제하는 것 뿐이야. 진짜 융합했으면 나도 네 꼴이 됐을 거야.”백호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됐다. 옛날얘기는 그만하고 얼른 서요산으로 떠날 준비나 해.”며칠 후, 윤구주는 임정설 국주, 청해, 백호와 함께 서요산으로 향했다.비 오는 밤, 연기를 뿜는 수송기가 짙은 구름을 뚫고 산을 향해 돌진했다.비행기가 산에 충돌하기 직전, 수많은 바람의 부적이 나타나 비행기를 강제로 선회시켜 간신히 산기슭에 착륙했다.비행기가 막 착륙하자 비행기 문이 누군가의 주먹 한 방에 박살 났다. 멀미로 비틀거리던 청해가 나오더니 몸을 움츠린 채 구토를 멈추지 못했다. 뒤이어 내린 임정설도 배를 움켜쥐며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억지로 참는 모습이었다.그들과 달리 윤구주는 멀쩡한 상태로 내려와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백호의 질문에 윤구주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네가 진짜라 믿는다면 그것은 진짜야. 초심을 잃지 않아야 길이 열리는 법이지.”이 말은 백호에게만이 아닌 자신에게도 하는 것이었다.서울의 위기는 해결되었지만 윤구주는 이 모든 것이 문씨 가문의 그 여자의 계획 중 하나임을 알고 있었다.“국주님, 이제 서요산으로 갈 때입니다.”그가 임정설을 바라보며 말했다.“서요산을 지키려는 거니? 마인이 나타날 거란 말이야?”임정설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요탑 아래에는 천년 동안 갇힌 수많은 마인들이 있었다.“맞아요. 서요산의 지맥 영기가 거의 고갈되었습니다. 만약 진요탑이 무너지면 큰 재앙이 찾아올 것입니다.”윤구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요탑이 붕괴하여 마인들이 쏟아져 나오면 윤구주라도 그들을 처리하기 힘들 것이다.“좋아. 내가 같이 가주마. 이 늦은 재앙은 언젠가 닥칠 운명이니 우리가 짊어져야 해. 지금의 희생은 후손들을 위한 것이야.”임정설의 눈빛이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화진을 위해, 백성들을 위해 그는 언제든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윤구주는 현모에게 연락을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뭐라고요? 저하께서 서요산으로 가신다고요? 그렇다면 저희도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현모와 주작의 목소리에서 초조함이 느껴졌다. 특히 주작은 서요산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천년 동안 축적된 재앙을 겨우 수십 년 수련한 윤구주 혼자서 떠맡기엔 버거웠다.“괜찮아. 너희에게는 따로 시킬 일이 있어. 내가 서요산에 있는 동안 너희는 국경을 지켜줘. 청룡의 행방은 잠시 접어두고 내가 시킨 일에 몰두해. 난 문아름을 그 여자를 잘 알고 있어. 문아름은 일이 내 뜻대로 되게 놔두지 않을 거야.”“추가로 부탁이 있는데 만약 내가 전사한다면 그때쯤 청룡이 모습을 드러낼 거야. 청룡을 불러내는 게 복인지 화인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그 상황이 오면 너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거야. 문아름이 결정을 내리겠지. 그러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둬.”유언을 남기는 듯한
‘헐, 대박.’진동왕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윤구주를 신처럼 떠받들었다.‘이게 진짜 신이지. 곤륜에 있는 그 자식들은 모두 가짜 신들이었어. 허위적이기 그지없지.’오늘 밤 그는 여러 강자의 싸움을 직접 목격하고 강자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문경우도 아주 강했지만 윤구주가 나타나자 문경우는 도망조차 제대로 치지 못하고 영혼마저 산산조각이 났다. 윤구주의 술법에 의해 영혼도 남기지 못하고 진정한 죽음을 맞이했다.승리는 결국 화진에게 돌아갔다. 화진을 무너뜨리려는 역적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윤구주는 자신의 힘으로 화진의 막강한 실력을 전 세계에 알렸다.문경우를 처단한 윤구주는 즉시 임정설의 치료에 돌입했다.“짐은 별일 없으니 먼저 왕숙과 네 친구를 치료해줘라.”임정설이 임성진과 청해를 가리키며 말했다.청해는 이미 정신을 차렸다. 비록 상처가 심해 반쯤 죽은 상태였지만 화진 국주에게 인정받은 첫 순간이었다. 묘한 영예감이 그의 마음을 꽉 채우며 날아갈 듯 기뻤다.“이 두 사람 모두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은 아닙니다. 오히려 국주님이 더 위험하십니다. 경지를 무리하게 넘어서셨고 섭혼번 아래서 정기를 너무 많이 잃으셨습니다. 지금 국주님의 기운이 안정하지 않으니 제 도움이 없다면 폭주 할수도 있어요. 그때가 되면 저도 방법이 없습니다.”윤구주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임정설은 결국 윤구주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도 자신의 몸 상태를 알고 있었다. 윤구주의 치료를 거부한 이유는 목숨을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황자급 경지에 오르긴 했지만 예전보다 죽음에 대한 집착이 강해져 있었다. 윤구주는 임정설에게 풀지 못한 원한이 있음을 눈치채고 치료를 해주며 화진으로 압박했다.“국주님께서 직접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는 걸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화진에게는 국주님이 필요합니다. 국주님은 30년 동안 화진을 지켜오셨잖아요. 지금 승부가 달린 이 중요한 시점에서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시면 안 됩니다.”임정설
서울 삼천만 명의 목숨을 제물로 바치고 섭혼번이 작동되면 화진의 국운은 영원히 봉인될 것이다.“우리 문씨 가문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쇠퇴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화진의 주인이다. 감히 누가 복종하지 않겠느냐?”문경우는 하늘을 향해 큰소리로 웃어댔다.이때 하늘에서 천둥이 울리며 공간이 갈라지더니 한 남자가 시체 한 구를 밟고 서울에 강림했다.“웃기고 있네. 문씨 가문이 화진의 주인이 되겠다고? 문씨 가문 따위가 어디 감히 그런 꿈을 꾸는 것이냐? 나 윤구주가 용납하지 않겠다.”우르릉.우렁찬 목소리가 사방으로 퍼지자 문경우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졌다. 윤구주의 기운이 섭혼번 아래에 나타나며 음의 기운을 찢어버렸다.거대한 섭혼번이 관통당하자 전법이 무너지고 문경우는 피를 토해냈다.고개를 돌리니 윤구주가 허공에 우뚝 서 있었고 그의 발아래에는 아사 신전의 신주 오딘의 시체가 보라색 번개에 휩싸여 있었다.“이게 무슨? 네가 신왕 오딘을 죽였다고?”문경우는 오딘의 시체를 바라보며 벌벌 떨었다.“이 개 같은 자들이 여러 번 화진을 범했으니 죽이는 게 당연하지. 나는 오딘뿐만 아니라 아사 신족 전체를 멸했다. 이제 곤륜에 아사 신족은 존재하지 않는다.”윤구주가 공중에 우뚝 서서 음양의 기를 손아귀에 감아쥐었다. 그의 머리 위 갈라진 공간 너머로 아사 신전의 폐허가 보였다. 수만 신령이 죽어 아사 신족이 멸족한다는 종말이 예언이 현실이 된 것이다.문경우의 눈에 비친 윤구주는 무적의 화신이었다. 그는 윤구주와 싸울 용기도 내지 못하고 뒤돌아 도망치려 했다.“너희들이 내가 없을 틈을 타 화진의 기운을 봉인하려 했다고? 문씨 가문은 정말 개수작만 부리는군. 예전에는 나를 죽이려 온갖 더러운 수작을 다 부렸잖아. 내가 없는 틈만 노리는 걸 보니 이젠 내가 무서웠나 보지?”“팔기지, 술자결.”윤구주가 손짓하자 삼천만 생령이 국운 속으로 모여들었다. 백성들은 새 국운에 각자의 고마운 마음을 담아 보냈고 모두의 영혼이 육체로 돌아가며 위기가 해소되었다.“팔기지, 어
태양으로 변한 그 부적은 사악하기 그지없었다. 독한 태양 빛이 대지를 지지며 수많은 건물을 녹여버렸고 그 안에 있던 평민들도 산 채로 타죽고 말았다.“그만해. 화진의 백성들을 건드리지 마라!”임정설이 분노에 차 외쳤다.“너와 나는 모두 화진의 절정 수련자인데 어찌 무고한 자들을 끌어들이느냐?”“하하! 무고하다니? 임정설, 현실을 직시하지. 이 하등한 것들은 개미나 다름없어. 한 무리를 죽여도 금방 다시 번식할 테니. 게다가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은 삼천만 백성의 목숨으로 화진의 새 국운을 봉인하는 거라네. 우리 문씨 가문이 얻지 못하는 것은 부숴버려도 남에게 주지 않을 거야.”문경우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그는 윤구주가 문씨 가문의 뜻을 거역하는 것에 화가 났다.만약 윤구주가 그들에게 순종했다면 지금쯤 화진의 주인이 되었을 텐데 말이다. 천추만대가 지나도 윤구주는 여전히 화진 최고의 명군으로 남았을 것이다.“저 빌어먹을 윤구주. 역사는 승자가 쓴다는 걸 모르나? 역사를 조작한 왕조가 그렇게나 많은데 유독 그놈만 고집을 부리잖아. 화진의 재난은 모두 윤구주 때문이야. 명군이 되길 거부한다면 영원한 역적으로 만들 거야. 윤구주는 역사의 수치주에 못 박혀 천년만년을 욕먹을 것이다.”“닥치거라! 구주는 우리 화진의 영웅이다. 너 같은 쓰레기가 어찌 감히 구주를 함부로 논하는 것이냐?”그의 말에 단단히 열 받은 임정설은 양혼을 불살라 목숨을 걸려 했다. 그러나 문경우가 이미 임정설의 기를 봉쇄하고 제삼의 전법으로 그의 영혼까지 잠가버렸다.“임정설, 내 앞에서 자살조차 못 하는 주제에 어디서 목숨을 걸겠다고 떠드는 건가?”문경우는 기고만장했다. 임정설이 황자가 되면 뭐하나? 어차피 문씨 가문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는데.“오늘이 바로 화진 황제의 멸망일이라네. 섭섭해하지 말게. 윤구주도 곧 자네 뒤를 따를 거니까. 하하!”그가 양손을 내리자 백 미터 크기의 사악한 검은 기발이 구름을 뚫고 서울 상공에 나타났다.“이, 이것은 섭혼번이군!”그 거대
말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 이상 쓸모없는 대화는 필요 없었다.임정설은 황제의 의지를 칼로 삼았다. 황자의 기세가 모여 금빛 칼날을 형성하더니 국운을 상징하는 그 칼로 문경우를 향해 내리쳤다.우르르.음과 양이 맞부딪치며 터져 나온 충격파가 반경 수 킬로미터를 휩쓸었다. 사령부 빌딩과 인근 건물들의 유리가 모조리 산산조각이 났다.두 사람은 빌딩 꼭대기에서 결투를 시작했다. 칼 빛이 번뜩이며 천지의 영기를 뒤흔들었고 광풍과 폭우가 몰아쳤다. 산해가 울부짖으며 서울은 보라색 번개와 금빛 불길에 휩싸였다.그들은 각각 화진 최강의 무도를 대표하고 있었다. 이는 단순히 정의와 사악의 대결이 아니라 임씨 가문과 문씨 가문의 결전이었다.서울 상공에서는 용의 형상이 구름 사이를 휘저으며 흉수와 피 묻은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이게 바로 황자의 힘인가. 정말 굉장하군.”진동왕마저 넋을 잃은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이때 다른 도시의 지원병들이 서울에 도착해 진동왕과 연락을 취했고 이 소식을 해외에 있는 현모와 주작에게 즉시 전했다.“국주께서 문경우와 결전을 벌이고 계신다고?”“국주께서 황자급 경지에 오르셨다니.”이는 분명히 좋은 소식이었다. 비록 한 산에 두 호랑이가 살 수 없다는 말이 있었지만 윤구주와 임정설의 관계는 남달랐다. 임정설은 윤구주의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너무 기뻐하지 마라. 저 문경우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곤륜에서 오랫동안 잠적하며 수많은 신전의 공법을 익혔어. 저놈이 서울로 온 목적은 바로 임정설을 죽이기 위함일 것이야.”옆에 있던 황보웅이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주작과 현모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직 화진이 무사하고 임정설이 문경우를 물리치길 기원할 수밖에 없었다.한창 싸우고 있던 두 강자는 공중에서 다시 한번 맞붙었다. 두 사람의 손짓 하나에 산이 뒤집히고 천지가 진동했으며 그들의 기세는 수백 리 밖까지 영향을 미쳤다.임정설은 기세를 최고조로 끌어올려 거침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임정설은 문경우가 극 신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전법이 발동되면 서울 수천만 사람들이 참혹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야. 비록 이길 자신은 없지만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화진의 백성을 위해 싸우겠다. 구주군과 금위군의 여러 장수들은 듣거라. 짐이 전사하면 너희들이 나라를 지킬 책임을 지고 계속해서 적들을 섬멸하라.”임정설은 장군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나서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홀로 서울 사령부로 날아갔다.서울 사령부는 진동왕과 수비영이 도착하기 훨씬 전에 함락된 상태였다. 주둔지는 죽음의 적막에 휩싸여 있었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말라붙은 백골들이 널브러진 참혹한 장면뿐이었다.당시 강적의 침입을 받은 주둔지의 병사들은 한 명도 물러서지 않고 전원이 전사할 때까지 적들과 맞서 싸웠을 것이다.이 생각에 임정설의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이곳에 있는 자들은 모두 우리 화진의 자랑이다. 저 요망한 것들이 화진을 어지럽힌 지 얼마나 되었느냐? 이 빚을 짐이 갚아 내지 못하더라도 화진 자손들이 반드시 값나낼 것이다.”그는 절대 화진의 혼란에 맞선 마지막 황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선인이 걸어온 길을 밟으며 그의 발걸음은 더욱 확고해졌다.이 순간 황운이 임정설의 몸에 서리더니 새로운 국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순간부터 그는 특정된 누군가의 왕이 아닌 천하 만민이 우러러보는 황제가 되어 있었다.황도가 더해지자 임정설의 기세는 한층 더 강해졌다. 그는 사령부 빌딩 최상층에서 서울을 어지럽힌 장본인을 마주했다.검은 도포를 걸친 그 자는 사악한 부적으로 몸을 감싼 채 요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바로 그가 전법으로 서울을 뒤덮고 있었다.“참으로 예상치 못했어. 화진에 또 한 명의 황자가 나타나다니. 윤구주는 정말 신기하다니까. 자신의 기운으로 국운을 바꾸고 자네의 운명까지 바꿔놓았군. 하지만 내가 충고 하나 해주지. 임정설 자네가 황자가 된 이상 사흘을 넘기지 못할 것이야. 넌 사흘 안에 목숨을 거둘 것이란 말이지.”검은 도포를 입은 사람은 임정설이 죽음을 각오하고 온 것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