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이와 육성아 두 사람이 사귀기 시작한 후부터 그녀는 육우성이 눈치채지 못하게 육성재한테 두 사람을 감싸달라고 부탁했다.택이가 창문을 드나들 때 육우성이 소리를 듣고 나오려고 하면 그녀는 육성재에게 빨리 가서 처리해달라고 했다. 또 두 사람이 데이트를 하거나 밥을 먹거나 영화를 볼 때면 모두 육성재와 함께하였고 그를 방패막이로 삼았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육성재는 늦은 밤 전용기를 타고 귀국했고 바로 블루리도 맞은 편에 별장을 샀다. 그는 여전히 이승하가 S 조직의 팀원이라고 의심하고 있었고 이 근처에 살면 이승하의 일거수일투족을 수시로 관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육성재는 유라시아연맹 상업 연합회의 부회장이다. S 조직에서는 명문 가문을 등에 업고 툭 하면 상업 연합회를 공격해 왔고 막대한 피해를 보게 하였기 때문에 재계에서는 큰 골칫거리였다. S 조직에서 제거한 기업들은 모두 재계에서 암적인 존재이지만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옳지 못한 것 같다. 부회장으로 S 조직의 배후를 반드시 밝혀내야 한다. 김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일로 서유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그렇다고 이 일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공과 사는 확실히 해야 하니까. 다만 그는 서유의 체면을 봐서 이승하가 S 조직의 팀원이라는 걸 밝혀낸다고 하더라도 세상에 알리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의 최종 목표는 단지 S 조직의 배후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이승하가 S 조직의 리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만약 이승하가 리더라면 분명 S 조직의 세력을 빌려 각 업계의 회사들을 인수하여 JS 그룹을 세계 최고로 만들었을 것이다. 한편, 육성재가 블루리도의 부근에 집을 산 사실을 서유는 우연히 알게 되었다. 망원경으로 별을 봐야 하는 연이의 숙제 때문에 그녀는 연이에게 망원경을 내어주었고 자신도 옆에 있는 작은 망원경을 들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마침 맞은편 산 중턱에 오랫동안 비어 있던 그 별장에 갑자기 불이 켜졌고 통유리창 앞에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주혁은 육성재가 그를 위해 아가씨를 불러주자 순간 안색이 환해졌다.“도련님, 정말 감동이에요.”육성재는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혼자 와인을 들고 마셨다. 그가 한 모금 마셨을 때, 한 아가씨가 갑자기 그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가는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허벅지를 따라 계속 위로 올라왔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뭐 하는 거야?”여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향해 가까이 다가왔다.“성재 도련님, 여기까지 왔는데 마음껏 즐기셔야죠. 오늘 밤은 제가 도련님 모실게요.”사실 그는 아직 여자와 잠자리를 해본 적이 없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 한번 해봐?그러나 그 여자가 그의 허벅지에 걸터앉는 순간, 그는 이승하의 다리에 앉아 있는 서유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미쳤어?”그 생각이 떠오른 그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자신에게 하는 욕이었지만 그의 다리에 앉아 있던 아가씨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도련님... 제가 뭐 잘못이라도...”그가 싸늘한 눈빛으로 그 여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꺼져.”여자와 잠자리를 하더라도 클럽에서 술이나 따르는 아가씨와는 절대 관계를 가질 수 없다.한편, 숙취에 시달리고 있던 단이수는 이틀이 지나고 나서야 주서희를 만나러 갔다. 그런데 주서희를 만나러 가는 길에 이지민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크롭 반팔 티셔츠에 핫팬츠를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야구 모자를 쓴 시원한 옷차림였다. 도로변에 차를 세운 채 허리를 굽히고 차를 점검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차가 고장 난 듯했다.따가운 햇볕이 그녀의 몸을 비추자 그녀는 마치 금빛으로 둘러싸인 도자기 인형 같아 보였고 한 번 보면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예전 같았으면 그를 보자마자 바로 달려와서 그의 허리를 껴안으며 방긋 웃었을 것이다.그러나 지금은... 그녀가 했던 경고의 말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오빠랑 나 더 이상 아무 사이 아니야. 그러니까 앞으로 귀찮게 찾아오지 마
단이수는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참으며 시선을 거두고는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주서희의 병원으로 향했다.한편, 주서희는 그가 자신을 찾아온 목적을 듣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윤주원과 헤어진 후, 그가 포기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소준섭을 감옥에 보낼 일을 계속 계획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곧 재판이 열릴 예정입니다. 주서희 씨가 꼭 재판에 참석해 주기를 바라요.”계속해서 멍해 있는 그녀를 보고 단이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표정을 보니 그쪽은 소준섭과 소송할 생각이 별로 없는 것 같군요.”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싫은 게 아니라 이 소송에서 이길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소준섭이 누구인가? 그리 쉽게 이길 수 있는 사람인가?“소송을 하고 싶지 않다면 윤주원 선생한테 소송 취하하라고 해요. 내 시간까지 낭비하지 말고.”그녀와 소준섭의 과거를 잘 모르고 있었던 단이수는 그녀가 아직도 소준섭의 편을 들고 있다는 생각에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발길을 돌리려고 할 때, 그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단 변호사님, 제가 법정에 선다면 이길 자신 있으세요?”그가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그건 주서희 씨의 마음에 달렸습니다. 소준섭을 감옥에 보내고 싶은가요?”윤주원은 증거자료들을 주면서 스쳐 가듯 한마디 했었다. 두 사람이 혼인신고를 하던 날 소준섭이 주서희를 납치해 갔고 그녀를 성폭행했다고 말했다. 성폭행의 이유를 물었었지만 윤주원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었다. 주서희의 사생활을 지켜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소송을 하면서 어떻게 이런 일을 변호사한테 숨길 수 있겠는가?단이수는 국내에서 최고의 변호사로 명성이 높았고 이대로 어물쩍 법정에 설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를 이리 찾아온 것이었다. 주서희도 소준섭을 감옥에 보내고 싶었다. 그래야만 더 이상 그 때문에 골치 아픈 일이 생기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그를 감옥에 보낼 수 있을지 얼마나 오랜 시간의 형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JS 그룹, 금방 회의를 마친 이승하가 대표 이사 사무실로 들어왔다. 컴퓨터를 켜자 법원 소환장과 관련된 메일이 도착했다. 메일을 열려고 하는데 이연석이 사무실의 문을 벌컥 열고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형, 이수한테서 들었어요. 형과 형수가 자기 손녀를 납치했다고 심혜진이 고소했다고 하던데. 소환장 받았어요?”방금 소환장을 받은 이승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내 사무실에 노크도 없이 들어와? 한 달 치 월급 깍을 거야.”둘째 형이 이 소식을 들으면 적어도 당황할 줄 알았다. 근데 당황하기는커녕 그의 월급을 깎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줄이야?“형, 심혜진의 변호사는 해외에서 아주 유명한 변호사예요. 재판에서 져본 적이 없다고 하던데 재판에서 지면 어떡해요?”이승하의 사전에 실패는 없다. “그렇게 할 일 없으면 아프리카에서 가서 연준이나 도와줘.”한가하니까 이런 사소한 일에 호들갑을 떨며 찾아온 것이겠지. 정말 시끄러워 죽겠네.화가 치밀어오른 이연석은 발길을 돌렸고 문 앞에 다다른 그는 친구의 부탁이 떠올라 이를 악물고 다시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이수한테 이 사건 맡겨요. 그래도 걔가 이 바닥에서 알아주는 변호사이거든요.”이승하는 그를 차갑게 쳐다보았다.“우리 회사 법무팀도 재판에서 져본 적 없어.”“그거랑은 다르죠. 이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일이잖아요. 아이의 양육권에 관한 문제이니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더 낫지 않겠어요?”“이번 기회에 단이수와 지민이를 다시 만나게 할 생각이야?”그에게 속마음을 들킨 이연석은 바로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형도 알다시피 그 당시 이수가 지민이와 헤어진 건 우리 부모님 때문이었어요.”그 사실은 이지민은 잘 모르고 있었다. 이승하, 이승연 그리고 이연석 세 사람만이 진실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 당시, 이연석의 부모님은 단이수 때문에 아들이 망가졌다는 생각에 그를 원망하고 이지민까지 가두어두었다. 그들은 단씨 가문과 이지민의 미래를 가지고 단이수를 협박했고 핑계를 대어 이지민과 헤어지게
대표 이사 사무실을 나온 이연석은 단이수에게 전화를 걸었고 단이수는 그에게 골프장 위치를 보내왔다. 골프장으로 달려가니 파라솔 밑에 앉아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쓴 채 먼 곳을 응시하는 단이수의 모습이 보였다.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마침 상연훈이 이지민에게 스윙을 가르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민이는 골프 칠 줄 아는데.”단이수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한마디 내뱉었다. 그 뜻을 모를 리가 없었던 이연석은 의자를 끌어당겨 그의 옆에 앉았다. “상연훈이 굳이 가르치려고 한 거겠지.”남자가 여자를 꼬시는 수작이다. 공을 휘두르며 스킨십을 통해 자연스레 가까워지는 거.상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은 정직한 줄 알았는데 그도 예쁜 여자를 보면 일단 들이대는 날라리 성격인 듯하다. “네 동생이 먼저 가르쳐달라고 한 거야.”단이수가 고개를 들더니 이지민를 향해 턱을 치켜세웠다. “두 커플이랑 내기 중이야. 홀인원이면 팁으로 10억 쏘기로.”내기 때문에 이지민과 상연훈이 이렇게 힘을 합쳐 골프를 치는 것이었다.재밌게 노는군...한편, 이연석은 왠지 모르게 상연훈이 눈에 거슬렸다. 그가 자꾸만 여동생한테 치근덕거리는 것 같았다. “가. 우리도 공 치러 가자. 상연훈 저놈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줘야지.”그가 외투를 벗고는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리며 단단한 팔뚝을 드러냈다.“됐어.”단이수가 그를 막아섰다.“지민이가 나한테 다시는 자기 앞에 나타나지 말래. 걔 심기 건드려서 좋을 게 뭐가 있어?”“그렇다고 이렇게 여기서 풀이 죽어 있을 거야? 두 사람이 알콩달콩하는 모습 지켜만 볼 거냐고?”그녀를 품에 안고 있는 상연훈을 바라보며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럼 내가 뭘 할 수 있는데?”상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과 여자라도 빼앗을까?이씨 가문에게도 상대가 안 되는 가문에서 무슨 수로?게다가 이지민은 아마 그에 대한 마음을 접은 지 오래되었을 것이다. 풋풋했던 시절 그밖에 모르던 소녀를 결국 그는 잃고 말았다. “어떡하긴? 찾아오든가
단이수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내뱉고는 이내 이지민과 상연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홀인원이 가능할까?”말이 끝나자마자 그녀가 기쁜 표정을 지으며 펄쩍펄쩍 뛰었다. “연훈 씨, 진짜 대단하네요. 정말 한방에 들어갔어요.”그녀의 뒤에 서 있는 상연훈은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필드 쪽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10억이나 아껴줬는데 나한테 어떻게 감사할 거예요?”청순한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가득 번졌다.“이틀 동안 레슨 해줬으니까 나랑 같이 번지점프 하러 갈래요?”그가 작은 몸집의 마른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지민 씨가 그런 스포츠를 좋아할 줄은 몰랐네요.”야구모자를 쓴 이지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달콤하게 웃었다.“나도 안 좋아했었는데요. 예전에 어떤 사람이 자주 날 데리고 갔었거든요...”그녀는 뭔가 생각이 떠오른 듯 입가에 웃음이 사라졌다. 그녀의 표정을 상연훈은 바로 캐치할 수 있었다.“좋아하는 사람이에요?”골프채를 잡은 채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근데 다 지난 일이에요.”그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개의치 않는 그의 모습에 그녀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당신은요?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이 나이에 좋아했던 사람이 없었다는 건 거짓말이겠죠.”“근데 왜 헤어졌어요?”“그 여자가 결혼했으니까요.”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상대가 유부녀라니?깜짝 놀란 그녀가 애써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모습에 상연후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걸 믿어요?”“네? 나 놀리는 거였어요?”그가 그녀의 골프채를 낚아채며 그녀를 향해 눈썹을 치켜올렸다.“지민 씨, 한 판 더 할까요?”과거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아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좋아요.”그녀를 다시 품 안에 가둔 그가 은근슬쩍 저 멀리 선글라스를 낀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이 있는 곳마다 저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한편, 상대방의
친구와 골프 약속이 있었던 심형진은 그녀를 친구들에게 소개시켜 주려고 함께 왔다. 근데 이곳에서 이연석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무의식적으로 그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이연석을 발견하지 못했던 그녀는 그런 그의 행동 때문에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이연석을 발견하게 되었다. 푸른 잔디 필드 안, 흰색 캐주얼 차림에 야구모자를 쓴 남자가 골프채를 들고 파라솔 아래 서 있는 모습이 마치 만화 속 주인공 같았다.그동안 심형진과 데이트할 때 이연석을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는 두 사람을 피해 다녔다.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서 그녀는 별다른 생각 없이 이내 시선을 돌렸다. “옷 갈아입으러 가요.”심형진을 데리고 탈의실로 가려는데 하필 그쪽으로 가려면 이연석을 지나쳐야만 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심형진을 끌고 이연석을 스쳐 지나갔다. 이번에도 그가 모른 척할 줄 알았는데 그가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잠깐 얘기 좀 해요.”따뜻한 손길이 전해지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이연석의 손길이 스치기만 하면 늘 이렇게 온몸이 감전된 것 같았다. 그 느낌에 그녀는 늘 반응이 반 박자 늦었고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심형진과 함께 있을 때는 이런 적이 없었다. 손깍지를 끼더라도 그저 담담하기만 했고 설레는 마음이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그 생각이 든 그녀는 심형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이연석의 손을 얼른 뿌리쳤다.“연석 씨랑 더 이상 할 얘기 없어요. 지난번에 이미 얘기 끝난 거 아닌가요?”그가 그녀의 손을 또 잡아당기려 하자 심형진이 그녀를 자신의 뒤로 잡아당겼다. “이연석 씨, 당신이 바람둥이인 건 잘 알겠는데 그래도 예의는 좀 갖추시죠. 가혜는 지금 내 여자 친구예요. 이렇게 함부로 가혜한테 손을 대면 어떡합니까?”잘생긴 이연석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당신이 뭔데요? 내가 왜 그쪽까지 신경 써야 하는 겁니까?”190cm에 달하는
한편, 탈의실에서 나오니 이연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심형진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심형진은 그녀를 데리고 친구들을 만났고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다만 화장실에 갔는데 누군가 심형진의 앞에서 그녀에 대해 뭐라 하고 있었다. “클럽을 운영하는 여자 친구라... 직업이 조금 그런데. 부모님은 동의하셔?”“그 소식 몰라? 클럽 운영만 하는 게 아니라 한번 이혼한 적이 있는 여자래.”“전혀 그런 것 같지 않아 보이는데. 아이는 있어?”“글쎄. 그걸 누가 알겠어? 아이를 지웠을 수도 있고 전남편한테 아이를 줬을 수도 있고. 예쁘게 생겼으니까 얼굴 하나 믿고 좋은 남자 만나려고 했을지도 모르지. 근데 짐이 되는 아이를 데리고 있겠어?”참 듣기 거북한 말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심형진은 벌써 그들한테 뭐라 했을 거지만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금 이연석이 정가혜의 손목을 잡은 일에 대해 아직도 신경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실 그렇게 속 좁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신경 쓰이는 건 이연석의 손길에 그녀가 반응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자연히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하면 매번 그녀는 핑계를 대며 그를 완곡하게 거절하곤 했었다. 그런데 이연석에 대해서는 그런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 것이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가 침묵하는 동안 옆에 있던 친구들의 웅성거림은 점점 더 커졌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한참 동안 망설이던 그녀가 용기를 내어 앞으로 다가가 한마디 내뱉었다.“이혼은 했지만 아이는 없어요. 운영하고 있는 클럽은 연 매출이 몇백억이 넘어요. 굳이 조건 좋은 남자를 만날 필요는 없다는 얘기죠.”그녀의 말에 사람들은 하나 같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제야 정신이 든 심형진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잡아당겼다. “미안해. 저들이 상황을 잘 몰라서 헛소리를 한 것뿐이야.”“저 사람들은 모르지만 선배는 알고 있잖아요.”말을 마친 그녀는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