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는 밤새 문제를 풀고 나서야 컴퓨터에서 눈을 뗐다. 소파에 누워 작은 담요를 덮고 달콤하게 잠든 서유가 눈에 들어왔다. 햇살이 그녀에게 비쳐 황금빛으로 빛나는 모습은 여름날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워, 이승하의 눈가에 미소가 번졌다.이렇게 잠든 서유를 한참 바라본 후, 이승하는 일어나 그녀 앞에 서서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살짝 찔렀다. “일어나.”서유는 그의 손을 밀치며 몸을 돌려 등을 돌렸다. “조용히 해요, 나 피곤해...”이승하는 참을성 있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숙제를 다 하면 보상해준다고 했잖아.”반쯤 깬 서유는 심장이 덜컥하면서도 계속 모른 척했다.“여보, 너무 피곤해요, 저녁에...”이승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여보, 거래를 미루면 배로 보상해야 하는 거 알지?”서유는 무심하게 작은 머리를 끄덕였다. “배로 해도 좋아요.”저녁이 되면 다시 속이고 넘기면 되니까, 걱정 없었다.서유의 생각을 꿰뚫어 본 이승하는 그녀의 머리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럼 준비하고, 집에서 기다려.”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서유는 무의식적으로 오싹하며, 오늘 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못했다.이승하는 약간의 압박을 가한 후, 서재를 떠나 욕실에서 씻고 바로 JS 그룹으로 향했다.차 안에서 이승하는 택이의 영상 통화를 받았다. 택이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화면 가득 미소를 지었다.“대표님, 대표님의 방법, 정말 효과가 있었어요!”이 말을 듣고 이승하의 눈썹이 약간 올라갔다. “정말 무릎을 꿇었어?”“당연하죠!”택이는 자랑스럽게 가슴을 두드렸다. “대표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다 했어요.”이승하는 운전 중인 소수빈과 조수석의 소지섭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들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무릎 꿇으라고 하면 할 거야?”“안 해요.”“우린 바보가 아니거든요.”소수빈과 소지섭이 동시에 대답하자, 택이는 몇 초간 멍해 있다가 반응했다. “대표님, 저 놀리시는 거죠?”이승하는 눈을 풀고 별빛 같은 눈동자에 약간의 웃
택이와 육성아 두 사람이 사귀기 시작한 후부터 그녀는 육우성이 눈치채지 못하게 육성재한테 두 사람을 감싸달라고 부탁했다.택이가 창문을 드나들 때 육우성이 소리를 듣고 나오려고 하면 그녀는 육성재에게 빨리 가서 처리해달라고 했다. 또 두 사람이 데이트를 하거나 밥을 먹거나 영화를 볼 때면 모두 육성재와 함께하였고 그를 방패막이로 삼았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육성재는 늦은 밤 전용기를 타고 귀국했고 바로 블루리도 맞은 편에 별장을 샀다. 그는 여전히 이승하가 S 조직의 팀원이라고 의심하고 있었고 이 근처에 살면 이승하의 일거수일투족을 수시로 관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육성재는 유라시아연맹 상업 연합회의 부회장이다. S 조직에서는 명문 가문을 등에 업고 툭 하면 상업 연합회를 공격해 왔고 막대한 피해를 보게 하였기 때문에 재계에서는 큰 골칫거리였다. S 조직에서 제거한 기업들은 모두 재계에서 암적인 존재이지만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옳지 못한 것 같다. 부회장으로 S 조직의 배후를 반드시 밝혀내야 한다. 김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일로 서유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그렇다고 이 일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공과 사는 확실히 해야 하니까. 다만 그는 서유의 체면을 봐서 이승하가 S 조직의 팀원이라는 걸 밝혀낸다고 하더라도 세상에 알리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의 최종 목표는 단지 S 조직의 배후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이승하가 S 조직의 리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만약 이승하가 리더라면 분명 S 조직의 세력을 빌려 각 업계의 회사들을 인수하여 JS 그룹을 세계 최고로 만들었을 것이다. 한편, 육성재가 블루리도의 부근에 집을 산 사실을 서유는 우연히 알게 되었다. 망원경으로 별을 봐야 하는 연이의 숙제 때문에 그녀는 연이에게 망원경을 내어주었고 자신도 옆에 있는 작은 망원경을 들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마침 맞은편 산 중턱에 오랫동안 비어 있던 그 별장에 갑자기 불이 켜졌고 통유리창 앞에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주혁은 육성재가 그를 위해 아가씨를 불러주자 순간 안색이 환해졌다.“도련님, 정말 감동이에요.”육성재는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혼자 와인을 들고 마셨다. 그가 한 모금 마셨을 때, 한 아가씨가 갑자기 그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가는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허벅지를 따라 계속 위로 올라왔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뭐 하는 거야?”여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향해 가까이 다가왔다.“성재 도련님, 여기까지 왔는데 마음껏 즐기셔야죠. 오늘 밤은 제가 도련님 모실게요.”사실 그는 아직 여자와 잠자리를 해본 적이 없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 한번 해봐?그러나 그 여자가 그의 허벅지에 걸터앉는 순간, 그는 이승하의 다리에 앉아 있는 서유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미쳤어?”그 생각이 떠오른 그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자신에게 하는 욕이었지만 그의 다리에 앉아 있던 아가씨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도련님... 제가 뭐 잘못이라도...”그가 싸늘한 눈빛으로 그 여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꺼져.”여자와 잠자리를 하더라도 클럽에서 술이나 따르는 아가씨와는 절대 관계를 가질 수 없다.한편, 숙취에 시달리고 있던 단이수는 이틀이 지나고 나서야 주서희를 만나러 갔다. 그런데 주서희를 만나러 가는 길에 이지민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크롭 반팔 티셔츠에 핫팬츠를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야구 모자를 쓴 시원한 옷차림였다. 도로변에 차를 세운 채 허리를 굽히고 차를 점검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차가 고장 난 듯했다.따가운 햇볕이 그녀의 몸을 비추자 그녀는 마치 금빛으로 둘러싸인 도자기 인형 같아 보였고 한 번 보면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예전 같았으면 그를 보자마자 바로 달려와서 그의 허리를 껴안으며 방긋 웃었을 것이다.그러나 지금은... 그녀가 했던 경고의 말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오빠랑 나 더 이상 아무 사이 아니야. 그러니까 앞으로 귀찮게 찾아오지 마
단이수는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참으며 시선을 거두고는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주서희의 병원으로 향했다.한편, 주서희는 그가 자신을 찾아온 목적을 듣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윤주원과 헤어진 후, 그가 포기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소준섭을 감옥에 보낼 일을 계속 계획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곧 재판이 열릴 예정입니다. 주서희 씨가 꼭 재판에 참석해 주기를 바라요.”계속해서 멍해 있는 그녀를 보고 단이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표정을 보니 그쪽은 소준섭과 소송할 생각이 별로 없는 것 같군요.”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싫은 게 아니라 이 소송에서 이길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소준섭이 누구인가? 그리 쉽게 이길 수 있는 사람인가?“소송을 하고 싶지 않다면 윤주원 선생한테 소송 취하하라고 해요. 내 시간까지 낭비하지 말고.”그녀와 소준섭의 과거를 잘 모르고 있었던 단이수는 그녀가 아직도 소준섭의 편을 들고 있다는 생각에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발길을 돌리려고 할 때, 그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단 변호사님, 제가 법정에 선다면 이길 자신 있으세요?”그가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그건 주서희 씨의 마음에 달렸습니다. 소준섭을 감옥에 보내고 싶은가요?”윤주원은 증거자료들을 주면서 스쳐 가듯 한마디 했었다. 두 사람이 혼인신고를 하던 날 소준섭이 주서희를 납치해 갔고 그녀를 성폭행했다고 말했다. 성폭행의 이유를 물었었지만 윤주원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었다. 주서희의 사생활을 지켜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소송을 하면서 어떻게 이런 일을 변호사한테 숨길 수 있겠는가?단이수는 국내에서 최고의 변호사로 명성이 높았고 이대로 어물쩍 법정에 설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를 이리 찾아온 것이었다. 주서희도 소준섭을 감옥에 보내고 싶었다. 그래야만 더 이상 그 때문에 골치 아픈 일이 생기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그를 감옥에 보낼 수 있을지 얼마나 오랜 시간의 형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JS 그룹, 금방 회의를 마친 이승하가 대표 이사 사무실로 들어왔다. 컴퓨터를 켜자 법원 소환장과 관련된 메일이 도착했다. 메일을 열려고 하는데 이연석이 사무실의 문을 벌컥 열고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형, 이수한테서 들었어요. 형과 형수가 자기 손녀를 납치했다고 심혜진이 고소했다고 하던데. 소환장 받았어요?”방금 소환장을 받은 이승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내 사무실에 노크도 없이 들어와? 한 달 치 월급 깍을 거야.”둘째 형이 이 소식을 들으면 적어도 당황할 줄 알았다. 근데 당황하기는커녕 그의 월급을 깎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줄이야?“형, 심혜진의 변호사는 해외에서 아주 유명한 변호사예요. 재판에서 져본 적이 없다고 하던데 재판에서 지면 어떡해요?”이승하의 사전에 실패는 없다. “그렇게 할 일 없으면 아프리카에서 가서 연준이나 도와줘.”한가하니까 이런 사소한 일에 호들갑을 떨며 찾아온 것이겠지. 정말 시끄러워 죽겠네.화가 치밀어오른 이연석은 발길을 돌렸고 문 앞에 다다른 그는 친구의 부탁이 떠올라 이를 악물고 다시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이수한테 이 사건 맡겨요. 그래도 걔가 이 바닥에서 알아주는 변호사이거든요.”이승하는 그를 차갑게 쳐다보았다.“우리 회사 법무팀도 재판에서 져본 적 없어.”“그거랑은 다르죠. 이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일이잖아요. 아이의 양육권에 관한 문제이니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더 낫지 않겠어요?”“이번 기회에 단이수와 지민이를 다시 만나게 할 생각이야?”그에게 속마음을 들킨 이연석은 바로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형도 알다시피 그 당시 이수가 지민이와 헤어진 건 우리 부모님 때문이었어요.”그 사실은 이지민은 잘 모르고 있었다. 이승하, 이승연 그리고 이연석 세 사람만이 진실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 당시, 이연석의 부모님은 단이수 때문에 아들이 망가졌다는 생각에 그를 원망하고 이지민까지 가두어두었다. 그들은 단씨 가문과 이지민의 미래를 가지고 단이수를 협박했고 핑계를 대어 이지민과 헤어지게
대표 이사 사무실을 나온 이연석은 단이수에게 전화를 걸었고 단이수는 그에게 골프장 위치를 보내왔다. 골프장으로 달려가니 파라솔 밑에 앉아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쓴 채 먼 곳을 응시하는 단이수의 모습이 보였다.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마침 상연훈이 이지민에게 스윙을 가르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민이는 골프 칠 줄 아는데.”단이수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한마디 내뱉었다. 그 뜻을 모를 리가 없었던 이연석은 의자를 끌어당겨 그의 옆에 앉았다. “상연훈이 굳이 가르치려고 한 거겠지.”남자가 여자를 꼬시는 수작이다. 공을 휘두르며 스킨십을 통해 자연스레 가까워지는 거.상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은 정직한 줄 알았는데 그도 예쁜 여자를 보면 일단 들이대는 날라리 성격인 듯하다. “네 동생이 먼저 가르쳐달라고 한 거야.”단이수가 고개를 들더니 이지민를 향해 턱을 치켜세웠다. “두 커플이랑 내기 중이야. 홀인원이면 팁으로 10억 쏘기로.”내기 때문에 이지민과 상연훈이 이렇게 힘을 합쳐 골프를 치는 것이었다.재밌게 노는군...한편, 이연석은 왠지 모르게 상연훈이 눈에 거슬렸다. 그가 자꾸만 여동생한테 치근덕거리는 것 같았다. “가. 우리도 공 치러 가자. 상연훈 저놈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줘야지.”그가 외투를 벗고는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리며 단단한 팔뚝을 드러냈다.“됐어.”단이수가 그를 막아섰다.“지민이가 나한테 다시는 자기 앞에 나타나지 말래. 걔 심기 건드려서 좋을 게 뭐가 있어?”“그렇다고 이렇게 여기서 풀이 죽어 있을 거야? 두 사람이 알콩달콩하는 모습 지켜만 볼 거냐고?”그녀를 품에 안고 있는 상연훈을 바라보며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럼 내가 뭘 할 수 있는데?”상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과 여자라도 빼앗을까?이씨 가문에게도 상대가 안 되는 가문에서 무슨 수로?게다가 이지민은 아마 그에 대한 마음을 접은 지 오래되었을 것이다. 풋풋했던 시절 그밖에 모르던 소녀를 결국 그는 잃고 말았다. “어떡하긴? 찾아오든가
단이수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내뱉고는 이내 이지민과 상연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홀인원이 가능할까?”말이 끝나자마자 그녀가 기쁜 표정을 지으며 펄쩍펄쩍 뛰었다. “연훈 씨, 진짜 대단하네요. 정말 한방에 들어갔어요.”그녀의 뒤에 서 있는 상연훈은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필드 쪽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10억이나 아껴줬는데 나한테 어떻게 감사할 거예요?”청순한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가득 번졌다.“이틀 동안 레슨 해줬으니까 나랑 같이 번지점프 하러 갈래요?”그가 작은 몸집의 마른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지민 씨가 그런 스포츠를 좋아할 줄은 몰랐네요.”야구모자를 쓴 이지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달콤하게 웃었다.“나도 안 좋아했었는데요. 예전에 어떤 사람이 자주 날 데리고 갔었거든요...”그녀는 뭔가 생각이 떠오른 듯 입가에 웃음이 사라졌다. 그녀의 표정을 상연훈은 바로 캐치할 수 있었다.“좋아하는 사람이에요?”골프채를 잡은 채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근데 다 지난 일이에요.”그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개의치 않는 그의 모습에 그녀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당신은요?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이 나이에 좋아했던 사람이 없었다는 건 거짓말이겠죠.”“근데 왜 헤어졌어요?”“그 여자가 결혼했으니까요.”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상대가 유부녀라니?깜짝 놀란 그녀가 애써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모습에 상연후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걸 믿어요?”“네? 나 놀리는 거였어요?”그가 그녀의 골프채를 낚아채며 그녀를 향해 눈썹을 치켜올렸다.“지민 씨, 한 판 더 할까요?”과거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아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좋아요.”그녀를 다시 품 안에 가둔 그가 은근슬쩍 저 멀리 선글라스를 낀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이 있는 곳마다 저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한편, 상대방의
친구와 골프 약속이 있었던 심형진은 그녀를 친구들에게 소개시켜 주려고 함께 왔다. 근데 이곳에서 이연석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무의식적으로 그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이연석을 발견하지 못했던 그녀는 그런 그의 행동 때문에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이연석을 발견하게 되었다. 푸른 잔디 필드 안, 흰색 캐주얼 차림에 야구모자를 쓴 남자가 골프채를 들고 파라솔 아래 서 있는 모습이 마치 만화 속 주인공 같았다.그동안 심형진과 데이트할 때 이연석을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는 두 사람을 피해 다녔다.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서 그녀는 별다른 생각 없이 이내 시선을 돌렸다. “옷 갈아입으러 가요.”심형진을 데리고 탈의실로 가려는데 하필 그쪽으로 가려면 이연석을 지나쳐야만 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심형진을 끌고 이연석을 스쳐 지나갔다. 이번에도 그가 모른 척할 줄 알았는데 그가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잠깐 얘기 좀 해요.”따뜻한 손길이 전해지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이연석의 손길이 스치기만 하면 늘 이렇게 온몸이 감전된 것 같았다. 그 느낌에 그녀는 늘 반응이 반 박자 늦었고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심형진과 함께 있을 때는 이런 적이 없었다. 손깍지를 끼더라도 그저 담담하기만 했고 설레는 마음이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그 생각이 든 그녀는 심형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이연석의 손을 얼른 뿌리쳤다.“연석 씨랑 더 이상 할 얘기 없어요. 지난번에 이미 얘기 끝난 거 아닌가요?”그가 그녀의 손을 또 잡아당기려 하자 심형진이 그녀를 자신의 뒤로 잡아당겼다. “이연석 씨, 당신이 바람둥이인 건 잘 알겠는데 그래도 예의는 좀 갖추시죠. 가혜는 지금 내 여자 친구예요. 이렇게 함부로 가혜한테 손을 대면 어떡합니까?”잘생긴 이연석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당신이 뭔데요? 내가 왜 그쪽까지 신경 써야 하는 겁니까?”190cm에 달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