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전화를 끊은 이승하는 가로등이 켜진 창밖을 멀리 내다보았다. 내일 Y국에 가면 육성재는 반드시 물샐틈없는 그물을 쳐서 그를 잡을 것이다. 무사히 돌아오려면 그가 가장 아끼는 여동생이 큰 돌파구가 될 것이다. 이승하는 시선을 거두고 주서희에게 전화를 걸어 최대한 빨리 서유의 유전자 검사를 진행하라고 당부했다. 정가혜의 클럽으로 가서 좀 쉬려고 했던 주서희는 그의 전화를 받고 병원에 남았다. 잠시 후, 경호원에게서 샘플 두 개를 받자마자 검사실로 들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윤주원은 뒤를 따라갔다. 장갑을 끼다가 고개를 드니 문밖에 서서 망설이고 있는 윤주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와 그녀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날, 윤주원을 거절하고 나서 그녀는 줄곧 그를 피해 왔고 더 이상 그한테 일말의 희망도 주지 않았다. 지금 보니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고 안색도 예전 같지 않고 눈도 움푹 파인 것이니 며칠 동안 잘 쉬지 못한 것 같았다. 죄책감이 몰려왔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줬으니까.더 이상 윤주원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유전자 검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윤주원은 안으로 들어가서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 문밖에 서서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언제든 그는 늘 그녀를 존중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소준섭이 있었고 소준섭을 쓰러드려야만 그가 다시 주서희의 옆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에 접근하는 건 그저 끈질기게 달라붙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럼 그와 소준섭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한편, 밤을 새워 유전자 검사를 마친 주서희는 검사 결과를 이승하에게 전해준 뒤 병원을 나섰고 이미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윤주원이 간 줄 알았는데 집에 돌아와서 커튼을 치려는 그때 별장 맞은편에 차가 주차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동안 만난 사이였고 결혼까지 약속했던 사이였으니 그 사람이 어떤 차를 운전하는지 차에 어떤 번호판을 달았는지 그녀는 당
8시 정각, 이승하는 서유를 데리고 공항으로 나와 육성재와 김선우를 만난 뒤 각각 Y국행 전용기에 올랐다.한편, 택이는 시간을 계산하여 오후 6시쯤, 육성아의 제비집에 약을 넣고 직접 그녀에게 먹여줬다. 제비집을 먹고 난 뒤 허둥지둥 어지러운 몸을 가누며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예쁘게 화장해 달라고 하는 그녀를 보며 택이는 미간을 찌푸렸다.그녀는 자신의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이렇게 정성껏 화장을 하고 있었다. 설마 정말 그에게 마음이 움직였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는 툭하면 그한테 손찌검했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녀의 행동을 보면 그를 좋아하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 그저 그의 몸이 좋았을 뿐 어떻게 진심일 수가 있겠는가? 잠시 후, 그녀가 쓰러지기 직전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현우택, 제비집에 뭘 넣은 거야? 나한테 왜 이래...”미처 말하기도 전에 그녀는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택이는 부드러운 그녀의 몸을 덥석 안아 올려 그녀를 차에 태웠다. 안전벨트를 매주며 그녀를 쳐다보는데 두 눈을 꼭 감은 채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택이는 죄책감이 몰려왔다. 문득 이 순간에 봉태규의 생각이 났다. 그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봉태규가 왜 연지유한테 마음을 빼앗겼는지 이해가 되었다. 여자들은 그들한테 치명적인 약점인 듯하다. 하지만 임무의 상대와 정이 드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그는 봉태규가 아니고 보스를 배신할 일도 없다. 하여...택이는 마음에서 피어오르는 이상한 감정을 빠르게 짓누르고 그녀한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차가운 얼굴을 한 채 차에 시동을 걸고 런던 트라팔가 광장으로 향했다. 이승하의 전용기 착륙 시간은 저녁 8시였다. 아직 비행기에서 내리지도 않았는데 육성재가 경호원들을 이끌고 와서 그들을 데리고 병원으로 가려고 했다.“미안하지만 여긴 내 구역이야. 그러니까 이제부터 당신들의 일정은 내가 책임지도록 하지.”육성재는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기내에 서서 이승하를 쳐다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
뒤따라오던 김선우마저도 문밖에 갇혀버렸다.안에 있는 블라인드가 내려지는 것을 보고 김선우는 미간을 찌푸렸다.사촌 형이 이승하의 경호원을 들여보내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마저도 들여보내지 않는 건 이해할 수가 없었다.병실 안, 문을 닫은 육성재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두 사람의 앞으로 다가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서유를 쳐다보았다.“사촌 동생, 나 따라와요.”웃는 모습을 보면 전혀 사람을 해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눈 밑에 보이는 눈빛은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이 서유를 긴장하게 만들었고 옆에 있던 남자는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경호원으로 위장한 S 조직의 팀원들이 따라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이승하가 있는 한 그녀는 걱정이 되지 않았다. 마음을 가라앉힌 그녀는 이승하의 손을 꼭 잡고 육성재를 따라 하얀 문을 통과해 제일 안쪽에 있는 병실로 들어갔다.육성재가 문을 밀고 들어서자 병상에 누워 있는 김윤주가 한눈에 보였다. 50이 넘는 나이에 병으로 인한 고통으로 아름다움과 젊음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세월이 흘러간 흔적만 고스란히 얼굴에 남아있었다. 얼굴은 초췌하고 몸은 야위고 골병이 든 모습이었지만 움푹 패인 눈동자에는 살고 싶은 희망이 가득했다.“김영주...”산소호흡기를 하고 있던 김윤주는 서유가 들어오는 순간 눈을 부릅떴다.“날 데리러 온 거야?”서유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김영주가 자신을 데리로 온 것이라면서 깜짝 놀라는 김윤주의 모습을 보니 설마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은 아닌 건지?“어머니.”육성재가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차근차근 설명했다.“김영주 아니에요. 이 여자는 김영주의 둘째 딸 서유예요.”아들의 목소리에 김윤주는 눈동자를 살짝 굴리더니 이내 충격을 감추고 막막한 눈빛을 지었다. “김영주의 딸이었어? 난 김영주가 날 데리러 온 줄 알았네.”말을 마친 그녀는 손을 내밀고 육성재에게 일으켜 달라고 했다. 그의 부축에 의지해 몸을 꼿꼿이 세
김윤주가 이리 나오니 서유도 더 이상 따져 물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자신을 더는 뭐라 하지 않자 눈치가 빠른 김윤주도 이승하를 따돌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김윤주가 힘겹게 손을 들어 그녀에게 손짓했다.“이리 가까이 오너라. 이모가 네 얼굴 좀 똑똑히 보게.”지금까지 육성재가 경호원을 문밖에 가두고 김윤주가 이승하를 따돌리려고 했던 것 말고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고 서유는 안전했다. 그들의 모습에 이승하와 서유는 김윤주가 도대체 뭘 하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친 후 손을 잡고 김윤주의 병상으로 다가가 앉았다. 김윤주는 이승하의 존재를 무시하고 거친 손을 부들부들 떨며 서유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초희가 네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었는데 네가 더 많이 닮은 것 같구나.”거친 손길이 얼굴을 어루만지자 불편한 느낌이 들어 서유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절 왜 찾으셨어요?”가증스러운 가족 상봉 따위는 집어치우고 단도직입적으로 용건만 말하면 얼마나 좋을까? 뭐 하러 굳이 이리 연기까지 하는 건지?김윤주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승하를 힐끗 쳐다보고는 또 아무렇지 않은 척 서유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냥 마지막으로 널 한번 보고 싶었다. 이제 이리 봤으니 난 만족해...”서유를 앞에 두고 이 말 한마디만 하다니. 설마 정말 마지막으로 김영주의 딸을 보고 싶었던 걸까?서유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김윤주가 그녀의 손등을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는 정말 미안하다. 늘 사과하고 싶었어. 근데 기회를 찾지 못했지. 그래서 너희들을 찾아 보상해 주고 싶었다. 후회와 죄책감을 안고 죽고 싶지 않아서.”그 말에 서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우리 어머니를 당신이 죽인 거예요?”김윤주는 고개를 흔들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난 영주를 해친 적이 없어. 영주가 아이를 안고 나에게 돈을 빌리러 왔을 때 내가 거절했었어. 사실 영주에게 돈을 빌려줄 수 있었지만
김윤주는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이불을 들추고는 축 처진 다리를 드러내고 서유에게 보여주었다.“세상을 떠나기 전에 소원이 있어. 침대에서 내려와 햇빛을 바라보며 걸어 다니는 거야. 하지만 지금 난 피가 모자라서 움직일 수가 없어.”그녀는 잠깐 망설이다가 다시 미안한 얼굴을 하고 서유를 바라보았다.“너의 어머니가 그 당시 돈을 빌려달라고 할 때 김초희와 넌 나와 같은 AB형이라고 했었어. 내가 돈을 빌려주기만 한다면 나중에 내가 필요할 때 날 도와줄 것이라고 했었다...” 그 말을 하면서 자신이 뻔뻔스럽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서유한테 애원했다.“미안하다. 그때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어. 돈을 빌려줬어야 했었는데. 네가 괜찮다면 나한테 피를 조금 줄 수 있겠느냐? 400cc면 된다. 내가 일어설 수 있게만 해줘.”그럴듯해 보이는 말이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허점투성이였다. 그녀와 김초희는 AB형이 아니라 일반적인 O형이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김윤주에게 AB형이라고 말한 건 돈을 빌리기 위해 급히 핑계를 댄 게 분명했다. 이게 김윤주가 그들 자매를 이리 애타게 찾는 이유 중 하나가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김윤주가 일어나서 걸으려면 400cc 혈액으로는 턱도 없었다. 이렇게 말한 건 단지 그녀의 피를 뽑아 검사를 받으려는 핑계일 뿐이고 검사가 끝나면 무엇을 할지는 김윤주의 연기를 더 봐야 알 것 같다. 서유가 대답도 하기 전에 옆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제 아내의 피는 남한테 빌려줄 수 없습니다.”남자는 핑계조차 대지 않고 냉담하게 거절했고 얼굴이 굳어진 김윤주는 시선을 서유에게로 돌렸다. “이모는 그냥 너의 피를 조금 원할 뿐이야. 널 해치지 않아...”잠시 고민하던 서유는 육성재를 한번 쳐다보고는 김윤주에게 조건을 제시했다. “당신이 무슨 수를 써서 육우성과 결혼했는지 솔직히 말해주면 피 뽑아줄게요. 만약 제게 거짓말을 한다면 저도 거부할게요.”어젯밤 이승하가 돌아온 후, 육성재는 부모님의 지난 일들에 대해 모르고
서유는 그녀가 말을 아주 조심스럽게 하는 것을 보고 일부러 자극했다. “심혜진 아주머니를 만났어요. 그녀 말로는 당신이 그녀를 부추겨서 제 어머니 얼굴을 망가뜨리게 했다던데...”김윤주의 얼굴색이 하얗게 변했고, 마음이 떨렸지만 단호히 부인했다. “헛소리야. 나는 그저 심혜진 앞에서 네 어머니가 그 사람보다 예쁘다고 몇 마디 했을 뿐인데, 심혜진이 질투에 미쳐서 스스로 영주를 해치는 짓을 했고, 이제 와서 감히 나에게 누명을 씌우려 하는 거야?!”그저 무심코 한 말에 진실이 드러나자 서유는 놀랐다. “당신이 아주머니 앞에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분이 어떻게 질투해서 화학 약품으로 제 어머니 얼굴에 끼얹었겠어요?”김윤주는 감정이 격해져서 필사적으로 부인했다. “그렇지 않아. 이 일은 나랑 아무 상관이 없어!”서유는 다시 그녀를 자극했다. “그럼 당신이 부정한 수단을 써서 육우성성 씨랑 결혼한 일도 당신과 상관없나요?!”김윤주는 그녀의 말에 따라 흥분해서 말했다. “나는 그저 그이가 영주의 흉터를 받아들이지 못할 때 곁에 있어 준 것뿐이야. 굳이 누구의 잘못이라고 한다면 그이가 술에 취해 있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게 된 거야. 하지만 이게 어떻게 부정한 수단이 될 수 있어?!”옆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깎고 있던 육성재는 이 말을 듣고 칼을 잡은 손을 천천히 멈췄다.어렸을 때 김윤주는 그에게 아버지가 그녀를 매우 사랑했고, 둘은 죽마고우로 평생을 약속했다고 말했었다.그러나 그가 자라면서 김영주가 끼어들어 부정한 수단으로 아버지와 관계를 맺어 약혼하게 되었다고 했다.하지만 선과 악에는 보응이 있어 김영주의 얼굴이 망가졌고, 김씨 집안의 사람들은 이런 딸을 육우성에게 시집 보내기 부끄러워해서 그녀로 바꾸었다고 했다.누가 진실이 이럴 줄 알았겠는가. 사실은 어머니가 남의 약혼이 해제되기도 전에 부정한 수단으로 아버지와 관계를 맺었다니...그는 날카로운 눈빛을 담은 눈동자를 들어 연약해 보이지만 눈빛은 음험한 김윤주를
육성재의 얼굴색이 살짝 변했다. “왜 김초희는 가능한데, 서유는 안 되는 거죠? 친자매 아닌가요?”의사가 설명했다. “도련님, 이렇습니다. 친자매라고 해도 골수 이식이 반드시 일치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육성재는 김윤주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기대에 찬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며 마음속에 복잡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아마 1년 전쯤이었을 거다. 혈액은행에 있던 한 혈액 샘플이 김윤주와 HLA 유전자 검사를 했을 때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육성재는 그 혈액이 김초희가 장기 기증 협약을 체결한 후 보관된 것이라는 걸 알아냈고, 그래서 온 세상을 뒤져 김초희를 찾아다녔다.그런데 김초희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녀의 사망 소식은 지현우에 의해 철저히 감춰져 있어서 병원조차도 알지 못했다.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에게 동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의사는 친자매라도 골수 이식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김윤주는 육성재가 자신을 보며 말을 하지 않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의사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어요?”육성재는 휴대폰을 쥐고 잠시 침묵한 후 솔직하게 말했다. “골수가 일치하지 않대.”김윤주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눈 밑에 피어오르던 희망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러고는 다시 육성재의 휴대폰을 빼앗아 의사에게 물었다. “그럼 심장은요?”전화 너머의 의사는 부인의 목소리를 듣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검사 항목 여러 가지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심장은 더더욱 이식이 불가능합니다.”의사의 이 말은 김윤주의 희망을 완전히 꺾어버렸다. 그녀는 병상에 멍하니 앉아 한동안 반응이 없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의사가 위로했다.“사모님, 저희가 계속해서 적합한 공여자를 찾아보겠습니다. 마음 편히 가지시고 잘 요양하세요. 시간이 지나면...”김윤주는 갑자기 감정 조절을 못 하고 휴대폰을 향해 소리쳤다. “무슨 시간이 지나면이에요, 나는 거의 죽어가고 있는데 당신들은
골수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서유는 이미 충격을 받았는데, 김윤주가 그녀의 심장까지 원한다는 것을 알고 더욱 놀랐다. 이는 그녀의 목숨을 직접적으로 노리는 것이 아닌가?다행히 일치하지 않아서 그녀가 지금 멀쩡히 여기 앉아 김윤주와 육성재 모자가 이식이 불가능해 틈이 벌어지는 광경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볼만한 구경을 다 했다고 생각한 서유는 육성재에게 말했다. “제가 할 일이 없는 것 같으니 먼저 가보겠습니다...”이 말을 던지고 이승하의 손을 잡고 일어나려 했지만, 옆에 있던 남자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고, 길쭉한 손가락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가볍게 두드리면서 뼈를 에는 듯한 차가운 눈빛으로 김윤주를 싸늘하게 훑어보았다.“당신이 내 아내를 노리는 건, 내가 만만해 보여서입니까?”차갑고 담담하게, 가볍게 던진 이 한마디에 김윤주의 몸이 굳어버렸다. 눈 밑에서 세상의 불공평함을 저주하듯 찢어지던 감정도 점차 수그러들었다...“어차피 일치하지도 않는데, 괴롭힌다고 할 수는 없겠죠?”“만약 일치한다면요?”만약 일치한다면, 그녀는 당연히 누군가를 시켜 이승하에게 진정제를 놓고, 서유를 수술실로 끌고 가 즉시 이식 수술을 할 것이다.그녀는 김씨 가문의 장녀이자 육씨 집안의 사모님이었다. 그녀가 사는 것이 서유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김윤주는 속으로 사악하게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완곡하게 말했다.“만약 일치한다면, 서유한테 한 번만 골수를 기증해 달라고 부탁드릴 수밖에 없겠죠...”“그럼 심장은요?”서유가 끼어들어 김윤주에게 반문했다. “제 심장도 달라고 하실 생각 아니었나요?”김윤주는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네게 부탁하다니, 꿈도 꾸지 마. 그냥 직접 꺼내서 내게 옮겨 붙이면 될 일을.”하지만 겉으로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그렇지 않지. 다른 심장을 찾아볼 거야...”서유와 이승하는 그녀를 믿을 리가 없었다.“김 여사님, 만약 오늘 여기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