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받자마자 택이는 이승하에게 입을 열 기회조차 주지 않고 빠른 속도로 한마디 외쳤다.“아버지, 저예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이승하는 말문이 막혔다. 택이가 육씨 가문으로 간 후 머리가 나빠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 구차한 핑계를 대는 걸 보면 육성재와 똑같아 보였다. 그는 택이의 옆에 사람이 있다는 걸 짐작하고 노인의 목소리를 냈다.“괜찮아졌지만 계속 진료 받아야 한대.”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둔탁한 소리에 육성아는 총을 쥐고 있던 손을 살짝 풀면서 택이에게 말을 계속하라고 했다. 그녀가 더 이상 의심을 하지 않자 택이는 담담하게 이승하를 향해 물었다.“언제 또 병원에 가요? 예약은 하셨어요?”이승하는 유리 탁자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두들기면서 차갑게 입을 열었다.“내일 네 어머니가 날 데리고 Y국으로 가겠다고 했어. 너도 시간 되면 결혼할 사람 데리고 런던으로 와.”이승하의 목소리와 함께 전화기 맞은편에서 규칙적으로 탁자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S 조직의 비밀 코드였다. 택이는 그걸 바로 알아차렸다. 이승하는 그에게 육성아를 납치해 런던으로 오라고 했다. 보스의 의도는 잘 알지 못했지만 그는 보스의 말에 따를 것이다.“네, 몇 시에 가면 되나요?”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던 이승하가 대답했다.“내일 밤 8시,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 봐.”택이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내일 만나는 사람 데리고 갈게요.”이승하가 전화를 끊은 후에야 택이는 핸드폰을 접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들었지. 아버지가 Y국으로 오신대. 당신을 만나고 싶다고 하셨어. 봐, 거짓말 아니지?”통화 내용을 똑똑히 들은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총을 내려놓았다.“결혼할 사람이라는 게 나였어?”그녀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저 두 사람은 가볍게 만나는 사이인 줄 알았다. 택이가 자신과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깨끗하고 하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택이는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한편, 전화를 끊은 이승하는 가로등이 켜진 창밖을 멀리 내다보았다. 내일 Y국에 가면 육성재는 반드시 물샐틈없는 그물을 쳐서 그를 잡을 것이다. 무사히 돌아오려면 그가 가장 아끼는 여동생이 큰 돌파구가 될 것이다. 이승하는 시선을 거두고 주서희에게 전화를 걸어 최대한 빨리 서유의 유전자 검사를 진행하라고 당부했다. 정가혜의 클럽으로 가서 좀 쉬려고 했던 주서희는 그의 전화를 받고 병원에 남았다. 잠시 후, 경호원에게서 샘플 두 개를 받자마자 검사실로 들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윤주원은 뒤를 따라갔다. 장갑을 끼다가 고개를 드니 문밖에 서서 망설이고 있는 윤주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와 그녀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날, 윤주원을 거절하고 나서 그녀는 줄곧 그를 피해 왔고 더 이상 그한테 일말의 희망도 주지 않았다. 지금 보니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고 안색도 예전 같지 않고 눈도 움푹 파인 것이니 며칠 동안 잘 쉬지 못한 것 같았다. 죄책감이 몰려왔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줬으니까.더 이상 윤주원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유전자 검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윤주원은 안으로 들어가서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 문밖에 서서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언제든 그는 늘 그녀를 존중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소준섭이 있었고 소준섭을 쓰러드려야만 그가 다시 주서희의 옆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에 접근하는 건 그저 끈질기게 달라붙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럼 그와 소준섭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한편, 밤을 새워 유전자 검사를 마친 주서희는 검사 결과를 이승하에게 전해준 뒤 병원을 나섰고 이미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윤주원이 간 줄 알았는데 집에 돌아와서 커튼을 치려는 그때 별장 맞은편에 차가 주차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동안 만난 사이였고 결혼까지 약속했던 사이였으니 그 사람이 어떤 차를 운전하는지 차에 어떤 번호판을 달았는지 그녀는 당
8시 정각, 이승하는 서유를 데리고 공항으로 나와 육성재와 김선우를 만난 뒤 각각 Y국행 전용기에 올랐다.한편, 택이는 시간을 계산하여 오후 6시쯤, 육성아의 제비집에 약을 넣고 직접 그녀에게 먹여줬다. 제비집을 먹고 난 뒤 허둥지둥 어지러운 몸을 가누며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예쁘게 화장해 달라고 하는 그녀를 보며 택이는 미간을 찌푸렸다.그녀는 자신의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이렇게 정성껏 화장을 하고 있었다. 설마 정말 그에게 마음이 움직였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는 툭하면 그한테 손찌검했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녀의 행동을 보면 그를 좋아하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 그저 그의 몸이 좋았을 뿐 어떻게 진심일 수가 있겠는가? 잠시 후, 그녀가 쓰러지기 직전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현우택, 제비집에 뭘 넣은 거야? 나한테 왜 이래...”미처 말하기도 전에 그녀는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택이는 부드러운 그녀의 몸을 덥석 안아 올려 그녀를 차에 태웠다. 안전벨트를 매주며 그녀를 쳐다보는데 두 눈을 꼭 감은 채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택이는 죄책감이 몰려왔다. 문득 이 순간에 봉태규의 생각이 났다. 그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봉태규가 왜 연지유한테 마음을 빼앗겼는지 이해가 되었다. 여자들은 그들한테 치명적인 약점인 듯하다. 하지만 임무의 상대와 정이 드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그는 봉태규가 아니고 보스를 배신할 일도 없다. 하여...택이는 마음에서 피어오르는 이상한 감정을 빠르게 짓누르고 그녀한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차가운 얼굴을 한 채 차에 시동을 걸고 런던 트라팔가 광장으로 향했다. 이승하의 전용기 착륙 시간은 저녁 8시였다. 아직 비행기에서 내리지도 않았는데 육성재가 경호원들을 이끌고 와서 그들을 데리고 병원으로 가려고 했다.“미안하지만 여긴 내 구역이야. 그러니까 이제부터 당신들의 일정은 내가 책임지도록 하지.”육성재는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기내에 서서 이승하를 쳐다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
뒤따라오던 김선우마저도 문밖에 갇혀버렸다.안에 있는 블라인드가 내려지는 것을 보고 김선우는 미간을 찌푸렸다.사촌 형이 이승하의 경호원을 들여보내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마저도 들여보내지 않는 건 이해할 수가 없었다.병실 안, 문을 닫은 육성재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두 사람의 앞으로 다가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서유를 쳐다보았다.“사촌 동생, 나 따라와요.”웃는 모습을 보면 전혀 사람을 해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눈 밑에 보이는 눈빛은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이 서유를 긴장하게 만들었고 옆에 있던 남자는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경호원으로 위장한 S 조직의 팀원들이 따라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이승하가 있는 한 그녀는 걱정이 되지 않았다. 마음을 가라앉힌 그녀는 이승하의 손을 꼭 잡고 육성재를 따라 하얀 문을 통과해 제일 안쪽에 있는 병실로 들어갔다.육성재가 문을 밀고 들어서자 병상에 누워 있는 김윤주가 한눈에 보였다. 50이 넘는 나이에 병으로 인한 고통으로 아름다움과 젊음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세월이 흘러간 흔적만 고스란히 얼굴에 남아있었다. 얼굴은 초췌하고 몸은 야위고 골병이 든 모습이었지만 움푹 패인 눈동자에는 살고 싶은 희망이 가득했다.“김영주...”산소호흡기를 하고 있던 김윤주는 서유가 들어오는 순간 눈을 부릅떴다.“날 데리러 온 거야?”서유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김영주가 자신을 데리로 온 것이라면서 깜짝 놀라는 김윤주의 모습을 보니 설마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은 아닌 건지?“어머니.”육성재가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차근차근 설명했다.“김영주 아니에요. 이 여자는 김영주의 둘째 딸 서유예요.”아들의 목소리에 김윤주는 눈동자를 살짝 굴리더니 이내 충격을 감추고 막막한 눈빛을 지었다. “김영주의 딸이었어? 난 김영주가 날 데리러 온 줄 알았네.”말을 마친 그녀는 손을 내밀고 육성재에게 일으켜 달라고 했다. 그의 부축에 의지해 몸을 꼿꼿이 세
김윤주가 이리 나오니 서유도 더 이상 따져 물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자신을 더는 뭐라 하지 않자 눈치가 빠른 김윤주도 이승하를 따돌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김윤주가 힘겹게 손을 들어 그녀에게 손짓했다.“이리 가까이 오너라. 이모가 네 얼굴 좀 똑똑히 보게.”지금까지 육성재가 경호원을 문밖에 가두고 김윤주가 이승하를 따돌리려고 했던 것 말고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고 서유는 안전했다. 그들의 모습에 이승하와 서유는 김윤주가 도대체 뭘 하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친 후 손을 잡고 김윤주의 병상으로 다가가 앉았다. 김윤주는 이승하의 존재를 무시하고 거친 손을 부들부들 떨며 서유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초희가 네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었는데 네가 더 많이 닮은 것 같구나.”거친 손길이 얼굴을 어루만지자 불편한 느낌이 들어 서유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절 왜 찾으셨어요?”가증스러운 가족 상봉 따위는 집어치우고 단도직입적으로 용건만 말하면 얼마나 좋을까? 뭐 하러 굳이 이리 연기까지 하는 건지?김윤주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승하를 힐끗 쳐다보고는 또 아무렇지 않은 척 서유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냥 마지막으로 널 한번 보고 싶었다. 이제 이리 봤으니 난 만족해...”서유를 앞에 두고 이 말 한마디만 하다니. 설마 정말 마지막으로 김영주의 딸을 보고 싶었던 걸까?서유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김윤주가 그녀의 손등을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는 정말 미안하다. 늘 사과하고 싶었어. 근데 기회를 찾지 못했지. 그래서 너희들을 찾아 보상해 주고 싶었다. 후회와 죄책감을 안고 죽고 싶지 않아서.”그 말에 서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우리 어머니를 당신이 죽인 거예요?”김윤주는 고개를 흔들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난 영주를 해친 적이 없어. 영주가 아이를 안고 나에게 돈을 빌리러 왔을 때 내가 거절했었어. 사실 영주에게 돈을 빌려줄 수 있었지만
김윤주는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이불을 들추고는 축 처진 다리를 드러내고 서유에게 보여주었다.“세상을 떠나기 전에 소원이 있어. 침대에서 내려와 햇빛을 바라보며 걸어 다니는 거야. 하지만 지금 난 피가 모자라서 움직일 수가 없어.”그녀는 잠깐 망설이다가 다시 미안한 얼굴을 하고 서유를 바라보았다.“너의 어머니가 그 당시 돈을 빌려달라고 할 때 김초희와 넌 나와 같은 AB형이라고 했었어. 내가 돈을 빌려주기만 한다면 나중에 내가 필요할 때 날 도와줄 것이라고 했었다...” 그 말을 하면서 자신이 뻔뻔스럽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서유한테 애원했다.“미안하다. 그때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어. 돈을 빌려줬어야 했었는데. 네가 괜찮다면 나한테 피를 조금 줄 수 있겠느냐? 400cc면 된다. 내가 일어설 수 있게만 해줘.”그럴듯해 보이는 말이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허점투성이였다. 그녀와 김초희는 AB형이 아니라 일반적인 O형이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김윤주에게 AB형이라고 말한 건 돈을 빌리기 위해 급히 핑계를 댄 게 분명했다. 이게 김윤주가 그들 자매를 이리 애타게 찾는 이유 중 하나가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김윤주가 일어나서 걸으려면 400cc 혈액으로는 턱도 없었다. 이렇게 말한 건 단지 그녀의 피를 뽑아 검사를 받으려는 핑계일 뿐이고 검사가 끝나면 무엇을 할지는 김윤주의 연기를 더 봐야 알 것 같다. 서유가 대답도 하기 전에 옆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제 아내의 피는 남한테 빌려줄 수 없습니다.”남자는 핑계조차 대지 않고 냉담하게 거절했고 얼굴이 굳어진 김윤주는 시선을 서유에게로 돌렸다. “이모는 그냥 너의 피를 조금 원할 뿐이야. 널 해치지 않아...”잠시 고민하던 서유는 육성재를 한번 쳐다보고는 김윤주에게 조건을 제시했다. “당신이 무슨 수를 써서 육우성과 결혼했는지 솔직히 말해주면 피 뽑아줄게요. 만약 제게 거짓말을 한다면 저도 거부할게요.”어젯밤 이승하가 돌아온 후, 육성재는 부모님의 지난 일들에 대해 모르고
서유는 그녀가 말을 아주 조심스럽게 하는 것을 보고 일부러 자극했다. “심혜진 아주머니를 만났어요. 그녀 말로는 당신이 그녀를 부추겨서 제 어머니 얼굴을 망가뜨리게 했다던데...”김윤주의 얼굴색이 하얗게 변했고, 마음이 떨렸지만 단호히 부인했다. “헛소리야. 나는 그저 심혜진 앞에서 네 어머니가 그 사람보다 예쁘다고 몇 마디 했을 뿐인데, 심혜진이 질투에 미쳐서 스스로 영주를 해치는 짓을 했고, 이제 와서 감히 나에게 누명을 씌우려 하는 거야?!”그저 무심코 한 말에 진실이 드러나자 서유는 놀랐다. “당신이 아주머니 앞에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분이 어떻게 질투해서 화학 약품으로 제 어머니 얼굴에 끼얹었겠어요?”김윤주는 감정이 격해져서 필사적으로 부인했다. “그렇지 않아. 이 일은 나랑 아무 상관이 없어!”서유는 다시 그녀를 자극했다. “그럼 당신이 부정한 수단을 써서 육우성성 씨랑 결혼한 일도 당신과 상관없나요?!”김윤주는 그녀의 말에 따라 흥분해서 말했다. “나는 그저 그이가 영주의 흉터를 받아들이지 못할 때 곁에 있어 준 것뿐이야. 굳이 누구의 잘못이라고 한다면 그이가 술에 취해 있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게 된 거야. 하지만 이게 어떻게 부정한 수단이 될 수 있어?!”옆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깎고 있던 육성재는 이 말을 듣고 칼을 잡은 손을 천천히 멈췄다.어렸을 때 김윤주는 그에게 아버지가 그녀를 매우 사랑했고, 둘은 죽마고우로 평생을 약속했다고 말했었다.그러나 그가 자라면서 김영주가 끼어들어 부정한 수단으로 아버지와 관계를 맺어 약혼하게 되었다고 했다.하지만 선과 악에는 보응이 있어 김영주의 얼굴이 망가졌고, 김씨 집안의 사람들은 이런 딸을 육우성에게 시집 보내기 부끄러워해서 그녀로 바꾸었다고 했다.누가 진실이 이럴 줄 알았겠는가. 사실은 어머니가 남의 약혼이 해제되기도 전에 부정한 수단으로 아버지와 관계를 맺었다니...그는 날카로운 눈빛을 담은 눈동자를 들어 연약해 보이지만 눈빛은 음험한 김윤주를
육성재의 얼굴색이 살짝 변했다. “왜 김초희는 가능한데, 서유는 안 되는 거죠? 친자매 아닌가요?”의사가 설명했다. “도련님, 이렇습니다. 친자매라고 해도 골수 이식이 반드시 일치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육성재는 김윤주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기대에 찬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며 마음속에 복잡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아마 1년 전쯤이었을 거다. 혈액은행에 있던 한 혈액 샘플이 김윤주와 HLA 유전자 검사를 했을 때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육성재는 그 혈액이 김초희가 장기 기증 협약을 체결한 후 보관된 것이라는 걸 알아냈고, 그래서 온 세상을 뒤져 김초희를 찾아다녔다.그런데 김초희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녀의 사망 소식은 지현우에 의해 철저히 감춰져 있어서 병원조차도 알지 못했다.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에게 동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의사는 친자매라도 골수 이식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김윤주는 육성재가 자신을 보며 말을 하지 않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의사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어요?”육성재는 휴대폰을 쥐고 잠시 침묵한 후 솔직하게 말했다. “골수가 일치하지 않대.”김윤주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눈 밑에 피어오르던 희망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러고는 다시 육성재의 휴대폰을 빼앗아 의사에게 물었다. “그럼 심장은요?”전화 너머의 의사는 부인의 목소리를 듣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검사 항목 여러 가지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심장은 더더욱 이식이 불가능합니다.”의사의 이 말은 김윤주의 희망을 완전히 꺾어버렸다. 그녀는 병상에 멍하니 앉아 한동안 반응이 없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의사가 위로했다.“사모님, 저희가 계속해서 적합한 공여자를 찾아보겠습니다. 마음 편히 가지시고 잘 요양하세요. 시간이 지나면...”김윤주는 갑자기 감정 조절을 못 하고 휴대폰을 향해 소리쳤다. “무슨 시간이 지나면이에요, 나는 거의 죽어가고 있는데 당신들은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