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뭔데요?”지현우의 냉랭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그림 그릴 줄 알아요?”서유는 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했다.“네.”그녀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어서 디자인을 배웠다.“계약 첫 번째 조항은 초희가 완성하지 못한 프로젝트를 대신해주는 거예요.”서유는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김초희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건축 설계사이고, 서유는 그저 디자인 학과를 졸업했을 뿐인데 어떻게 언니를 대신해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을까?지현우는 그녀가 완성하든 못하든 계속 차갑게 말했다.“초희가 전에 설계했던 건축 도면을 초안이랑 완제품 모두 서유 씨에게 보냈어요. 그 중에 빈 그림책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초희가 맡은 프로젝트예요. 순서대로 완성하면 돼요.”서유는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하지만 저는 건축 디자인이 아니라 브랜드 디자인을 공부해서 건축 도면은 그릴 줄 몰라요.”지현우는 몇 초 동안 침묵했다. 그의 어이없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서울에 초희 건축회사가 있어요. 심이준이라는 사람이 수석 디자이너인데 내가 직접 서유 씨를 가르치라고 할게요. 절대 언니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배워요.”서유의 작은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하지만...”지현우는 약간 짜증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됐고 내 말대로 해요.”서유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지현우는 이번만큼은 그녀를 속이지 않았다. 확실히 언니와 관련된 일을 시켰으니 말이다.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근데 왜 저보고 언니 프로젝트를 맡으라는 거죠?”지현우는 몇 초간 침묵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저도 방금 알았거든요. 초희가 이루지 못한 꿈이 있다는 거...”서유는 그의 말을 듣고 따라서 침묵했다. 알고 보니 언니는 아쉬움을 안고 세상을 떠났다.지현우는 점차 마음을 가다듬고 무심코 말했다.“서유 씨가 초희 이름으로 이 프로젝트를 완성하면 초희 대신 꿈을 이루는 거나 마찬가지예요.”서유는 언니를 위한 것임을 알고 더
정가혜는 서유가 전화를 받은 후로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보고 급히 경적을 울렸다.서유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캐리어를 끌고 정가혜 쪽으로 갔다.두 사람은 별장에 도착했고 예전처럼 한 침대에 누워 과거, 현재와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서유는 정가혜의 재잘거리는 말을 들으며 점차 온몸의 간장을 풀고 그녀의 어깨에 기대어 깊은 잠에 빠졌다.정가혜는 서유가 잠든 것을 보고 이불을 덮어주고는 자신도 천천히 눈을 감고 꿈나라로 향했다.다음날, 정가혜는 원래 서유와 함께 송사월을 만나러 가려고 했다.하지만 가게에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겨 정가혜는 따라가지 않았다.서유는 외출하기 전에 그 혼인신고서를 작은 가방에 챙겼다.가방을 메고 휴대폰을 챙기고는 송사월이 있는 별장에 도착했다.송사월은 여전히 뒤뜰에 앉아 머리를 숙이고 책을 읽었는데 멀리서 보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다만 그 뒷모습은 적막하기 그지없었고 세상의 버림을 받은 듯 생기 하나 없었다.서유는 그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다가갔다.“사월아...”서유의 목소리를 들은 송사월은 예전처럼 기뻐하면서도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손에 든 책을 조금씩 움켜쥐었다.서유는 그의 앞에 서서 몸을 웅크리고는 쳐다보았다.“오늘 좀 어때? 어디 아픈 데 없어?”송사월은 속눈썹을 늘어뜨리며 빨개진 눈시울을 감추며 나지막이 말했다.“나 괜찮으니까 앞으로 찾아오지 않아도 돼.”서유는 그를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물었다.“사월아, 혹시 승하 씨가 널 구해준 것 때문에 그 사람한테 빚졌다고 생각하는 거야?”송사월은 입술을 앙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서유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으며 자신을 삼켜버릴 것 같은 죄책감에 마음이 무거웠다.서유는 그의 손에 있는 책을 빼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사월아, 네가 진 빚은 내가 꼭 갚을 테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송사월은 붉어진 눈동자를 치켜들고 물었다.“네가 어떻게 갚아...”서유는 그의 말에 눈썹을 드리웠
“서유야, 그건 나에 대한 죄책감이잖아. 네가 마음속으로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이승하잖아.”“그 사람도 너 많이 사랑해.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 좋자고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을 갈라놓겠어. 너...”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멈추더니 목소리가 점차 굳어졌다.“너 그 사람한테 돌아가. 나 신경 쓰지 마.”송사월은 이기적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승하가 자신을 위해 그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어떻게 마음 편히 서유를 차지하겠는가?그는 고개를 들고 눈물과 아쉬움을 애써 삼키더니 휠체어를 밀고 돌아섰다.서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실망해서 말했다.“사월아, 너... 나 버리는 거야?”송사월은 갑자기 멈춰 서서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서유를 돌아보았다.당장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고 도저히 버릴 수 없다고,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휠체어에 갇힌 쓸모없는 인간이었으니 서유에게 짐이 되고 폐만 끼칠 뿐이었다.그녀의 죄책감을 빌미로 이기적이게 자신의 곁에 둘 수는 없었다.송사월은 빨개진 눈으로 말했다.“서유야, 내 두 다리 때문에 죄책감 느낄 필요 없어. 이건 너랑 상관없이 내가 초래한 결과니까.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널 위해 한 모든 건 전부 내가 원했던 거였어. 내 사랑이 너한테 짐이 되는 건 싫어. 알겠어?”서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다시 그의 앞으로 다가간 후, 가방에서 혼인신고서를 꺼내 건네주었다.“혹시 나랑 결혼한 거 이미 잊었어?”서유는 혼인신고서에 박힌 도장을 가리키며 말했다.“여기 봐. 우리는 법적 부부라고.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널 내버려 둘 수 있겠어? 어떻게 네가 나한테 짐이냐고...”송사월은 그 혼인신고서를 보더니 꾹꾹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그는 한 손으로 눈을 가리며 서유가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지 못하게 했다.하지만 서유는 몸을 웅크리고 그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사월아, 너만 나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 다시 시작해.”다시 시작하자는 말은 송사월이
정가혜는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 너 정말 결정한 거야?”서유는 모델링 팩을 섞으며 대답했다.“혼인 신고했으니까 당연히 결혼식 해야지.”송사월이 불안해할까 봐 걱정되었던 그녀는 결혼식으로 그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그녀 또한 이번 계기로 과거를 다 잊고 다시 시작할 생각이었다. 이미 결정을 내린 서유를 보면서 정가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그녀를 쳐다보며 서유가 다시 입을 열었다.“가혜야, 예전에 나랑 사월이가 결혼하게 되면 네가 신부 들러리 해주겠다고 했었잖아.”정가혜는 아무 말도 없이 서유의 짧은 머리를 쓰다듬었다.“서유야, 너 정말 사월이랑 다시 시작할 거야?”그녀의 물음에 서유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평생 사월이를 돌보고 싶었어. 하지만 단지 죄책감 때문에 그를 돌본다면 그한테 너무 불공평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절에서 마음을 정리한 후, 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시 시작하기로 했어.”그 말을 들은 정가혜는 그녀를 데리고 절에 간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불행으로 여겨야 할지 몰랐다.이러는 건 이승하한테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승하는 서유를 위해 많은 일을 했고 송사월의 목숨까지 구해준 사람이었다. 서유는 정가혜의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가혜야, 이제 곧 언니를 대신해 일을 시작할 거야. 언니의 설계도 한 장의 가치는 몇백억에 달하는 수준이야. 언니가 죽기 전에 50여 개의 프로젝트를 맡았더라. 그 프로젝트를 다 끝내고 다른 프로젝트를 조금 더 맡으면 승하 씨의 6천억 원을 갚을 수 있을 거야. 그 사람이 사월이를 위해 한 일은 나중에 갚을 방법을 생각해 봐야지.” “앞으로 그 사람과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아. 돈을 충분히 다 모으고 나면 그때 네가 나 대신 그 사람한테 전해줘.”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정가혜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녀를 향해 물었다.“너... 혹시 그
서유는 두 장의 카드를 보고 마음이 따뜻해졌지만 그녀를 거절했다.“정가혜, 너한테 남겨준 건 나한테 돌려주지 말고 네가 가지고 있어. 그리고 네가 모은 돈도 잘 가지고 있고. 인생은 길고 돈을 써야 할 데가 많을 거야. 내가 진 빚은 내가 알아서 갚을게. 그러니까 내 걱정하지 마.”그러나 정가혜는 기어코 그녀에게 카드를 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서유야. 네가 아직 모르는 일이 있어. 네가 떠난 뒤 주서희 씨가 나한테 돈을 줬었어. 사월이도 그의 재산을 모두 나한테 줬고. 그중에서 사월의 돈만 돌려주지 못했고 주서희 씨가 준 돈은 이미 돌려줬어.”그 얘기를 하면서 정가혜는 잠시 머뭇거렸다.“내가 어떻게 돌려줬는지 알아?”서유는 고개를 저었고 정가혜는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카드 가지고 주서희 씨를 3년 동안이나 쫓아다녔어. 결국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건지 그제야 돈을 받더라. 평생 내가 너 쫓아다니길 바라는 건 아니지?”서유는 주서희에게 돈을 돌려주기 위해 정가혜가 3년 동안이나 그녀를 쫓아다닐 줄은 몰랐다.“정가혜, 네가 그렇게 쫓아다녔는데 주서희 씨가 가만있었어? 진정제 주사라도 안 놔줬어?”그 당시 어이없어하며 짜증을 내던 주서희의 모습이 떠올라 정가혜는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다시는 날 보고 싶지 않다고 했었어.”그 말에 서유도 웃음을 터뜨렸다.“나도 너 보고 싶지 않으니까 당장 카드 가지고 나가.”정가혜가 또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서유는 그녀를 욕실에서 밀어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송사월이 준 서류봉투에 카드를 다시 넣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정가혜는 일부러 서유가 깨어나지 않은 틈을 타서 서류봉투를 들고 송사월이 사는 곳으로 향했다. 문을 연 사람은 김민정이었다. 그녀를 발견한 김민정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달콤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가혜 씨, 좋은 아침에요.”밝게 웃는 김민정을 보고 정가혜는 참지 못하고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좋은 아침이에요. 사월이는요?”김민정은 정가혜를 별장 안으로
그의 말을 듣고 정가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다행이고. 하지만 난 네 재산을 가질 생각 없어.”말을 마친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뜨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송사월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정가혜는 어릴 때부터 남의 물건은 죽어도 가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렸을 때 그를 많이 보살펴 주었다. 하여 그 은혜는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고개를 돌리고 김태진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일단 넣어둬. 다음에 오면 그때 다시 줄 거야.”고개를 끄덕이던 김태진은 서류봉투를 집어 들고는 서재로 들어갔다.잠시 후, 서재를 나오는 그를 향해 송사월이 입을 열었다.“김 비서가 해야 할 일이 또 한 가지 있어.”“무슨 일입니까?”송사월은 별장과 주방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김민정을 쳐다보고는 김태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3년 동안 그 사람은 나한테 집을 마련해 주고 간병인도 찾아주고 날 보호하기 위해 경호원들도 보내줬어. 그동안 돈이 많이 들었을 거야. 비용 계산해서 그 사람한테 돌려줘.”그가 지금 갚을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다. 살려준 은혜에 대해서는 언젠가 갚아야 한다면 그도 목숨을 내놓을 것이다.김태진은 짧게 대답한 뒤 주방으로 들어가 아침을 먹고는 별장을 나섰다. JS 그룹의 회의실, 그룹 임원들이 정중앙에 앉아있는 남자를 향해 업무보고를 하고 있었다. 남자는 옆으로 돌아앉아 있었고 고급 양복을 차림을 하고 있는 그는 차갑고 우아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그가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놓고 길쭉한 손가락으로 한 번 또 한 번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한 번씩 테이블을 두드릴 때마다 모니터 앞에서 업무보고를 하고 있던 임원들은 가슴이 두근거려 목소리조차 떨렸다. 남자는 각진 얼굴에 금테 안경을 쓰고 있었고 안경테 아래 그의 두 눈은 차갑기만 했다. 이때,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화면에 있는 재무 데이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얼핏 봐도 손익 상황
그가 똑똑히 들었지만 단지 믿을 수 없어서 이런다는 걸 소수빈은 잘 알고 있었다.소수빈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이승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대표님, 대표님께서 직접 서유 씨를 김시후 씨한테 떠넘길 때부터 이런 결과는 정해진 것이었습니다.”잘생긴 이승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차가운 눈이 새빨갛게 변하였다. 그는 카드를 움켜쥔 채 불같이 화를 냈고 카드가 산산조각이 날 정도로 있는 힘껏 카드를 부러뜨렸다.“대표님.” 소수빈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차 대기시켜.”얼떨떨해 있던 소수빈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짧게 대답한 뒤 재빨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웨딩 숍, 피팅룸 커튼이 열리고 서유가 그 안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돌아섰다. 돌아서면 정가혜가 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밖에 서 있는 사람은 이승하였다. 그 남자는 검은 양복 차림을 하고 있었고 잘생긴 얼굴에 싸늘함이 가득했다. 그가 새빨간 눈으로 그녀를 뚫어지고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빛에 서유는 겁이 났고 이내 드레스 자락을 걷어 올리고 정가혜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그의 곁을 지나갈 때, 그가 갑자기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그녀를 피팅룸 안으로 다시 끌어당겼다.커튼이 가려지는 순간, 남자는 그녀를 벽에 밀쳤다.그가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웨딩드레스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축하해, 드디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돼서.”서유는 악착같이 발버둥 쳤지만 그에게 눌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맑고 깨끗한 눈빛으로 이승하를 쳐다보았다.“다시는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싸늘한 그의 얼굴에 조롱이 가득 찼다.“그 사람을 돌봐주는 것뿐이라고 당신이 그랬어. 근데 지금 결혼식을 올린다고? 당신이 결혼식을 한다고 하지 않았다면 내가 이렇게 미친 듯이 당신을 찾아올 일도 없었겠지.”비웃음을 짓던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미련과 아쉬움이 가득 찬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오랫동안 억누르고 있던 것이 갑자기 터진 것처럼 그는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었다. 서유는 있는 힘껏 저항했지만 그는 이성을 잃은 채 그녀의 드레스를 마구 찢어버렸다. 튜브톱 웨딩드레스가 찢어지는 순간 서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한이 맺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미친 듯이 그녀에게 키스하면서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받치고는 자신의 몸을 그녀에게 밀착시켰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이 모든 것을 받아내고 있었고 다리가 그의 다리에 짓눌려 도자기 인형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굳게 닫혀 있던 붉은 입술을 벌릴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거침없이 파고드는 남자의 숨결에 혼신의 힘을 다해 그를 덥석 물었다. 이승하는 너무 아파서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새빨갛게 눈이 달아오른 채, 그가 그녀의 손바닥만 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마치 그녀가 어디까지 더 독하게 굴지 한번 지켜보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서유는 그가 자신을 놓아주지 않자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이승하는 갑자기 입술을 깨물더니 가볍게 웃기 시작했다. 한참을 헛웃음 짓던 그가 실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천천히 놓아주었다. 그가 자신을 놓아주자 서유는 즉시 그를 밀어내고 벌떡 일어나서 침대 위의 이불을 잡아당겨 자신의 몸을 감쌌다. 그녀는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자신의 두 팔을 꼭 껴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차갑게 그를 노려보았다. 경계심이 가득 찬 그녀의 얼굴을 보며 이승하는 또다시 이성을 잃은 듯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여기가 어딘지 기억해?”엄청난 그의 힘에 그녀의 턱은 거의 탈골될 뻔했다. 그러나 그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침실을 가리키며 쉰 목소리로 그녀에게 따져 물었다. “당신이랑 나 이곳에서 5년 동안 함께했어. 당신 몸 중에서 내가 건드리지 않았던 곳이 있었나? 근데 뭐가 경우가 아니라는 거야?”‘그래서 지금 날 여기로 끌고 와 내 허락도 없이 이렇게 날 괴롭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