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뭔데요?”지현우의 냉랭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그림 그릴 줄 알아요?”서유는 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했다.“네.”그녀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어서 디자인을 배웠다.“계약 첫 번째 조항은 초희가 완성하지 못한 프로젝트를 대신해주는 거예요.”서유는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김초희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건축 설계사이고, 서유는 그저 디자인 학과를 졸업했을 뿐인데 어떻게 언니를 대신해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을까?지현우는 그녀가 완성하든 못하든 계속 차갑게 말했다.“초희가 전에 설계했던 건축 도면을 초안이랑 완제품 모두 서유 씨에게 보냈어요. 그 중에 빈 그림책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초희가 맡은 프로젝트예요. 순서대로 완성하면 돼요.”서유는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하지만 저는 건축 디자인이 아니라 브랜드 디자인을 공부해서 건축 도면은 그릴 줄 몰라요.”지현우는 몇 초 동안 침묵했다. 그의 어이없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서울에 초희 건축회사가 있어요. 심이준이라는 사람이 수석 디자이너인데 내가 직접 서유 씨를 가르치라고 할게요. 절대 언니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배워요.”서유의 작은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하지만...”지현우는 약간 짜증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됐고 내 말대로 해요.”서유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지현우는 이번만큼은 그녀를 속이지 않았다. 확실히 언니와 관련된 일을 시켰으니 말이다.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근데 왜 저보고 언니 프로젝트를 맡으라는 거죠?”지현우는 몇 초간 침묵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저도 방금 알았거든요. 초희가 이루지 못한 꿈이 있다는 거...”서유는 그의 말을 듣고 따라서 침묵했다. 알고 보니 언니는 아쉬움을 안고 세상을 떠났다.지현우는 점차 마음을 가다듬고 무심코 말했다.“서유 씨가 초희 이름으로 이 프로젝트를 완성하면 초희 대신 꿈을 이루는 거나 마찬가지예요.”서유는 언니를 위한 것임을 알고 더
정가혜는 서유가 전화를 받은 후로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보고 급히 경적을 울렸다.서유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캐리어를 끌고 정가혜 쪽으로 갔다.두 사람은 별장에 도착했고 예전처럼 한 침대에 누워 과거, 현재와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서유는 정가혜의 재잘거리는 말을 들으며 점차 온몸의 간장을 풀고 그녀의 어깨에 기대어 깊은 잠에 빠졌다.정가혜는 서유가 잠든 것을 보고 이불을 덮어주고는 자신도 천천히 눈을 감고 꿈나라로 향했다.다음날, 정가혜는 원래 서유와 함께 송사월을 만나러 가려고 했다.하지만 가게에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겨 정가혜는 따라가지 않았다.서유는 외출하기 전에 그 혼인신고서를 작은 가방에 챙겼다.가방을 메고 휴대폰을 챙기고는 송사월이 있는 별장에 도착했다.송사월은 여전히 뒤뜰에 앉아 머리를 숙이고 책을 읽었는데 멀리서 보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다만 그 뒷모습은 적막하기 그지없었고 세상의 버림을 받은 듯 생기 하나 없었다.서유는 그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다가갔다.“사월아...”서유의 목소리를 들은 송사월은 예전처럼 기뻐하면서도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손에 든 책을 조금씩 움켜쥐었다.서유는 그의 앞에 서서 몸을 웅크리고는 쳐다보았다.“오늘 좀 어때? 어디 아픈 데 없어?”송사월은 속눈썹을 늘어뜨리며 빨개진 눈시울을 감추며 나지막이 말했다.“나 괜찮으니까 앞으로 찾아오지 않아도 돼.”서유는 그를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물었다.“사월아, 혹시 승하 씨가 널 구해준 것 때문에 그 사람한테 빚졌다고 생각하는 거야?”송사월은 입술을 앙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서유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으며 자신을 삼켜버릴 것 같은 죄책감에 마음이 무거웠다.서유는 그의 손에 있는 책을 빼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사월아, 네가 진 빚은 내가 꼭 갚을 테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송사월은 붉어진 눈동자를 치켜들고 물었다.“네가 어떻게 갚아...”서유는 그의 말에 눈썹을 드리웠
“서유야, 그건 나에 대한 죄책감이잖아. 네가 마음속으로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이승하잖아.”“그 사람도 너 많이 사랑해.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 좋자고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을 갈라놓겠어. 너...”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멈추더니 목소리가 점차 굳어졌다.“너 그 사람한테 돌아가. 나 신경 쓰지 마.”송사월은 이기적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승하가 자신을 위해 그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어떻게 마음 편히 서유를 차지하겠는가?그는 고개를 들고 눈물과 아쉬움을 애써 삼키더니 휠체어를 밀고 돌아섰다.서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실망해서 말했다.“사월아, 너... 나 버리는 거야?”송사월은 갑자기 멈춰 서서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서유를 돌아보았다.당장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고 도저히 버릴 수 없다고,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휠체어에 갇힌 쓸모없는 인간이었으니 서유에게 짐이 되고 폐만 끼칠 뿐이었다.그녀의 죄책감을 빌미로 이기적이게 자신의 곁에 둘 수는 없었다.송사월은 빨개진 눈으로 말했다.“서유야, 내 두 다리 때문에 죄책감 느낄 필요 없어. 이건 너랑 상관없이 내가 초래한 결과니까.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널 위해 한 모든 건 전부 내가 원했던 거였어. 내 사랑이 너한테 짐이 되는 건 싫어. 알겠어?”서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다시 그의 앞으로 다가간 후, 가방에서 혼인신고서를 꺼내 건네주었다.“혹시 나랑 결혼한 거 이미 잊었어?”서유는 혼인신고서에 박힌 도장을 가리키며 말했다.“여기 봐. 우리는 법적 부부라고.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널 내버려 둘 수 있겠어? 어떻게 네가 나한테 짐이냐고...”송사월은 그 혼인신고서를 보더니 꾹꾹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그는 한 손으로 눈을 가리며 서유가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지 못하게 했다.하지만 서유는 몸을 웅크리고 그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사월아, 너만 나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 다시 시작해.”다시 시작하자는 말은 송사월이
정가혜는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 너 정말 결정한 거야?”서유는 모델링 팩을 섞으며 대답했다.“혼인 신고했으니까 당연히 결혼식 해야지.”송사월이 불안해할까 봐 걱정되었던 그녀는 결혼식으로 그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그녀 또한 이번 계기로 과거를 다 잊고 다시 시작할 생각이었다. 이미 결정을 내린 서유를 보면서 정가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그녀를 쳐다보며 서유가 다시 입을 열었다.“가혜야, 예전에 나랑 사월이가 결혼하게 되면 네가 신부 들러리 해주겠다고 했었잖아.”정가혜는 아무 말도 없이 서유의 짧은 머리를 쓰다듬었다.“서유야, 너 정말 사월이랑 다시 시작할 거야?”그녀의 물음에 서유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평생 사월이를 돌보고 싶었어. 하지만 단지 죄책감 때문에 그를 돌본다면 그한테 너무 불공평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절에서 마음을 정리한 후, 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시 시작하기로 했어.”그 말을 들은 정가혜는 그녀를 데리고 절에 간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불행으로 여겨야 할지 몰랐다.이러는 건 이승하한테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승하는 서유를 위해 많은 일을 했고 송사월의 목숨까지 구해준 사람이었다. 서유는 정가혜의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가혜야, 이제 곧 언니를 대신해 일을 시작할 거야. 언니의 설계도 한 장의 가치는 몇백억에 달하는 수준이야. 언니가 죽기 전에 50여 개의 프로젝트를 맡았더라. 그 프로젝트를 다 끝내고 다른 프로젝트를 조금 더 맡으면 승하 씨의 6천억 원을 갚을 수 있을 거야. 그 사람이 사월이를 위해 한 일은 나중에 갚을 방법을 생각해 봐야지.” “앞으로 그 사람과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아. 돈을 충분히 다 모으고 나면 그때 네가 나 대신 그 사람한테 전해줘.”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정가혜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녀를 향해 물었다.“너... 혹시 그
서유는 두 장의 카드를 보고 마음이 따뜻해졌지만 그녀를 거절했다.“정가혜, 너한테 남겨준 건 나한테 돌려주지 말고 네가 가지고 있어. 그리고 네가 모은 돈도 잘 가지고 있고. 인생은 길고 돈을 써야 할 데가 많을 거야. 내가 진 빚은 내가 알아서 갚을게. 그러니까 내 걱정하지 마.”그러나 정가혜는 기어코 그녀에게 카드를 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서유야. 네가 아직 모르는 일이 있어. 네가 떠난 뒤 주서희 씨가 나한테 돈을 줬었어. 사월이도 그의 재산을 모두 나한테 줬고. 그중에서 사월의 돈만 돌려주지 못했고 주서희 씨가 준 돈은 이미 돌려줬어.”그 얘기를 하면서 정가혜는 잠시 머뭇거렸다.“내가 어떻게 돌려줬는지 알아?”서유는 고개를 저었고 정가혜는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카드 가지고 주서희 씨를 3년 동안이나 쫓아다녔어. 결국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건지 그제야 돈을 받더라. 평생 내가 너 쫓아다니길 바라는 건 아니지?”서유는 주서희에게 돈을 돌려주기 위해 정가혜가 3년 동안이나 그녀를 쫓아다닐 줄은 몰랐다.“정가혜, 네가 그렇게 쫓아다녔는데 주서희 씨가 가만있었어? 진정제 주사라도 안 놔줬어?”그 당시 어이없어하며 짜증을 내던 주서희의 모습이 떠올라 정가혜는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다시는 날 보고 싶지 않다고 했었어.”그 말에 서유도 웃음을 터뜨렸다.“나도 너 보고 싶지 않으니까 당장 카드 가지고 나가.”정가혜가 또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서유는 그녀를 욕실에서 밀어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송사월이 준 서류봉투에 카드를 다시 넣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정가혜는 일부러 서유가 깨어나지 않은 틈을 타서 서류봉투를 들고 송사월이 사는 곳으로 향했다. 문을 연 사람은 김민정이었다. 그녀를 발견한 김민정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달콤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가혜 씨, 좋은 아침에요.”밝게 웃는 김민정을 보고 정가혜는 참지 못하고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좋은 아침이에요. 사월이는요?”김민정은 정가혜를 별장 안으로
그의 말을 듣고 정가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다행이고. 하지만 난 네 재산을 가질 생각 없어.”말을 마친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뜨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송사월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정가혜는 어릴 때부터 남의 물건은 죽어도 가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렸을 때 그를 많이 보살펴 주었다. 하여 그 은혜는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고개를 돌리고 김태진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일단 넣어둬. 다음에 오면 그때 다시 줄 거야.”고개를 끄덕이던 김태진은 서류봉투를 집어 들고는 서재로 들어갔다.잠시 후, 서재를 나오는 그를 향해 송사월이 입을 열었다.“김 비서가 해야 할 일이 또 한 가지 있어.”“무슨 일입니까?”송사월은 별장과 주방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김민정을 쳐다보고는 김태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3년 동안 그 사람은 나한테 집을 마련해 주고 간병인도 찾아주고 날 보호하기 위해 경호원들도 보내줬어. 그동안 돈이 많이 들었을 거야. 비용 계산해서 그 사람한테 돌려줘.”그가 지금 갚을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다. 살려준 은혜에 대해서는 언젠가 갚아야 한다면 그도 목숨을 내놓을 것이다.김태진은 짧게 대답한 뒤 주방으로 들어가 아침을 먹고는 별장을 나섰다. JS 그룹의 회의실, 그룹 임원들이 정중앙에 앉아있는 남자를 향해 업무보고를 하고 있었다. 남자는 옆으로 돌아앉아 있었고 고급 양복을 차림을 하고 있는 그는 차갑고 우아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그가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놓고 길쭉한 손가락으로 한 번 또 한 번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한 번씩 테이블을 두드릴 때마다 모니터 앞에서 업무보고를 하고 있던 임원들은 가슴이 두근거려 목소리조차 떨렸다. 남자는 각진 얼굴에 금테 안경을 쓰고 있었고 안경테 아래 그의 두 눈은 차갑기만 했다. 이때,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화면에 있는 재무 데이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얼핏 봐도 손익 상황
그가 똑똑히 들었지만 단지 믿을 수 없어서 이런다는 걸 소수빈은 잘 알고 있었다.소수빈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이승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대표님, 대표님께서 직접 서유 씨를 김시후 씨한테 떠넘길 때부터 이런 결과는 정해진 것이었습니다.”잘생긴 이승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차가운 눈이 새빨갛게 변하였다. 그는 카드를 움켜쥔 채 불같이 화를 냈고 카드가 산산조각이 날 정도로 있는 힘껏 카드를 부러뜨렸다.“대표님.” 소수빈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차 대기시켜.”얼떨떨해 있던 소수빈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짧게 대답한 뒤 재빨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웨딩 숍, 피팅룸 커튼이 열리고 서유가 그 안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돌아섰다. 돌아서면 정가혜가 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밖에 서 있는 사람은 이승하였다. 그 남자는 검은 양복 차림을 하고 있었고 잘생긴 얼굴에 싸늘함이 가득했다. 그가 새빨간 눈으로 그녀를 뚫어지고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빛에 서유는 겁이 났고 이내 드레스 자락을 걷어 올리고 정가혜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그의 곁을 지나갈 때, 그가 갑자기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그녀를 피팅룸 안으로 다시 끌어당겼다.커튼이 가려지는 순간, 남자는 그녀를 벽에 밀쳤다.그가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웨딩드레스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축하해, 드디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돼서.”서유는 악착같이 발버둥 쳤지만 그에게 눌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맑고 깨끗한 눈빛으로 이승하를 쳐다보았다.“다시는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싸늘한 그의 얼굴에 조롱이 가득 찼다.“그 사람을 돌봐주는 것뿐이라고 당신이 그랬어. 근데 지금 결혼식을 올린다고? 당신이 결혼식을 한다고 하지 않았다면 내가 이렇게 미친 듯이 당신을 찾아올 일도 없었겠지.”비웃음을 짓던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미련과 아쉬움이 가득 찬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오랫동안 억누르고 있던 것이 갑자기 터진 것처럼 그는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었다. 서유는 있는 힘껏 저항했지만 그는 이성을 잃은 채 그녀의 드레스를 마구 찢어버렸다. 튜브톱 웨딩드레스가 찢어지는 순간 서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한이 맺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미친 듯이 그녀에게 키스하면서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받치고는 자신의 몸을 그녀에게 밀착시켰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이 모든 것을 받아내고 있었고 다리가 그의 다리에 짓눌려 도자기 인형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굳게 닫혀 있던 붉은 입술을 벌릴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거침없이 파고드는 남자의 숨결에 혼신의 힘을 다해 그를 덥석 물었다. 이승하는 너무 아파서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새빨갛게 눈이 달아오른 채, 그가 그녀의 손바닥만 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마치 그녀가 어디까지 더 독하게 굴지 한번 지켜보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서유는 그가 자신을 놓아주지 않자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이승하는 갑자기 입술을 깨물더니 가볍게 웃기 시작했다. 한참을 헛웃음 짓던 그가 실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천천히 놓아주었다. 그가 자신을 놓아주자 서유는 즉시 그를 밀어내고 벌떡 일어나서 침대 위의 이불을 잡아당겨 자신의 몸을 감쌌다. 그녀는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자신의 두 팔을 꼭 껴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차갑게 그를 노려보았다. 경계심이 가득 찬 그녀의 얼굴을 보며 이승하는 또다시 이성을 잃은 듯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여기가 어딘지 기억해?”엄청난 그의 힘에 그녀의 턱은 거의 탈골될 뻔했다. 그러나 그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침실을 가리키며 쉰 목소리로 그녀에게 따져 물었다. “당신이랑 나 이곳에서 5년 동안 함께했어. 당신 몸 중에서 내가 건드리지 않았던 곳이 있었나? 근데 뭐가 경우가 아니라는 거야?”‘그래서 지금 날 여기로 끌고 와 내 허락도 없이 이렇게 날 괴롭히고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