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억누르고 있던 것이 갑자기 터진 것처럼 그는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었다. 서유는 있는 힘껏 저항했지만 그는 이성을 잃은 채 그녀의 드레스를 마구 찢어버렸다. 튜브톱 웨딩드레스가 찢어지는 순간 서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한이 맺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미친 듯이 그녀에게 키스하면서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받치고는 자신의 몸을 그녀에게 밀착시켰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이 모든 것을 받아내고 있었고 다리가 그의 다리에 짓눌려 도자기 인형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굳게 닫혀 있던 붉은 입술을 벌릴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거침없이 파고드는 남자의 숨결에 혼신의 힘을 다해 그를 덥석 물었다. 이승하는 너무 아파서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새빨갛게 눈이 달아오른 채, 그가 그녀의 손바닥만 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마치 그녀가 어디까지 더 독하게 굴지 한번 지켜보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서유는 그가 자신을 놓아주지 않자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이승하는 갑자기 입술을 깨물더니 가볍게 웃기 시작했다. 한참을 헛웃음 짓던 그가 실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천천히 놓아주었다. 그가 자신을 놓아주자 서유는 즉시 그를 밀어내고 벌떡 일어나서 침대 위의 이불을 잡아당겨 자신의 몸을 감쌌다. 그녀는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자신의 두 팔을 꼭 껴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차갑게 그를 노려보았다. 경계심이 가득 찬 그녀의 얼굴을 보며 이승하는 또다시 이성을 잃은 듯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여기가 어딘지 기억해?”엄청난 그의 힘에 그녀의 턱은 거의 탈골될 뻔했다. 그러나 그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침실을 가리키며 쉰 목소리로 그녀에게 따져 물었다. “당신이랑 나 이곳에서 5년 동안 함께했어. 당신 몸 중에서 내가 건드리지 않았던 곳이 있었나? 근데 뭐가 경우가 아니라는 거야?”‘그래서 지금 날 여기로 끌고 와 내 허락도 없이 이렇게 날 괴롭히고
“나한테 모자라는 게 과연 그 6천억 원일까? 아니면 송사월의 돈일까? 당신들이 뭔데 돈으로 나한테 모욕을 주는 거야?”“이미 당신을 놓아줬잖아. 근데 왜 그 인간이랑 같이 날 자극하는 건데? 내가 죽는 꼴을 봐야 속이 시원한 거야?”고함을 지르던 이승하는 그녀의 이마를 짚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서유야, 내가 죽어야 당신이 기쁜 거야?”그 말을 들은 서유는 심장이 털컥 내려앉았고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그럼 나더러 어떡하라고요? 당신이 나 때문에 그렇게 많은 돈을 썼다고 생각하니 내 마음은 돌덩이가 있는 것처럼 무거워요. 그 돌덩이 때문에 난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어요. 그래서 당신한테 그 돈을 갚으려고 하는 거예요.”이승하는 고개를 저었다.“당신이 나한테 돈 갚는 거 원치 않아. 내가 원하는 건 당신뿐이야. 제발 내 곁으로 돌아와 줘.”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애원했다. 그녀가 예전처럼 얌전하게 ‘좋아요’라고 대답하기를 기대하며 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반응이 없었고 담담하게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승하 씨, 이제 그만 날 잊어요.”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그는 그녀의 싸늘한 눈을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답답한 마음이 뭔가에 억눌려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그가 눈시울을 붉히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서유야, 왜 나한테 이렇게 잔인해? 너한테는 마음이라는 게 없어?”갑자기 안색이 창백해진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난 심장이 없는 사람이에요. 내 심장은 진작에 파헤쳐졌고 어딘가에 버려졌는지도 몰라요.”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보며 이승하는 방금 자신이 한 말을 깨달았다. 그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고 그녀한테 끊임없이 사과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실수했어. 잘못했어. 날 때려도 좋고 욕해도 좋아.”서유는 그
서유는 그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당신이 날 시집보내는 거 난 싫어요.”그녀는 이승하를 밀어내고는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두 팔을 꼭 껴안았다. 그 순간, 그녀의 두 눈은 무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승하는 그녀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한참 동안 그녀를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당신의 결혼식 날, 당신을 맞이하는 신랑은 내가 아니게 되었어. 그래서 말인데 난 적어도 당신을 시집보내는 사람은 되고 싶어. 당신의 결혼식에 내가 빠지고 싶지 않거든.”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난 싫어요.”그의 예쁜 눈망울이 점점 붉어졌다.“서유, 10년 동안 당신을 사랑한 걸 봐서 나한테도 기회를 줘.”그녀는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았다.“승하 씨, 제발... 날 강요하지 말아요.”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며 입을 열었다.“당신이 날 선택하지 않은 건 잘한 일이야. 난 당신을 울리기만 하는군.”그는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어갔다.“서유, 미안해. 5년 동안 내 곁에 있으면서 당신이 많이 힘들었을 거야.”서유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린 채 흐느꼈다. 그녀는 차갑고 자존심이 강한 이승하가 끊임없이 자신에게 사과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마음속의 방어선은 거듭 그로 인해 무너졌고 그녀를 울부짖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이승하는 숨쉬기조차 힘들 만큼 가슴이 아팠고 두 팔을 벌려 그녀를 다시 품에 안았다. 그녀의 머리에 턱을 괴고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울지 마. 이번 한번 뿐이야. 앞으로 다시는 당신 곤란하게 하지 않을게.”그의 품에 안겨있는 서유는 마치 실이 끊어진 구슬처럼 눈물이 멈추지 않고 계속 떨어졌다. 그는 그녀를 안은 채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그녀를 달래주었다, 그러나 모든 고통을 스스로 삼켜버렸다. 잠시 후, 서유가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야 그는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었다.“당신 드레스를 내가 찢어버렸으니 배상해 줄게.”서유는 눈을 내리깔고 대답했다.“아니에요.”씁쓸한 웃음을 짓던 그는
서유는 여전히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가 옷을 들고 들어가자 그녀는 눈꺼풀을 살짝 떨었다. 그녀를 쳐다보던 그는 감히 그녀 앞에 다가가지 못하고 옷만 소파에 올려놓았다. 차갑고 도도한 그의 뒷모습이 사라진 후, 그녀는 시선을 돌리고 옷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이불을 젖히고 옷을 입은 후 침실에 있는 욕실로 가서 세수를 했다.얼굴의 눈물 자국을 깨끗이 씻고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정리하고 나서야 그녀는 방에서 나왔다.그녀는 창가에 서 있는 이승하를 쳐다보았다. 노을이 그를 비추고 있었고 은은한 금빛이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듯했다. 인기척을 들은 그가 뒤돌아서서 짙은 눈빛으로 그녀의 치마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당신은 역시 하얀색이 잘 어울리는군.”그녀는 귀국한 후 줄곧 빨간 치마를 입었었는데 전혀 그녀의 모습 같지 않았다. 어색한 표정을 짓던 그녀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그만 가볼게요.”말을 마친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에 이승하는 손바닥을 움켜쥐었다. 그녀가 문을 나서려는 찰나 그가 그녀를 향해 뛰어갔다.“내가 데려다줄게.”“아니에요. 고마워요.”서유는 그를 돌아보며 정중히 거절했다. 그녀는 돌아서서 문을 닫고는 그 자리에서 잠깐 머뭇거리더니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맨션 안, 차디찬 문을 바라보던 남자는 문이 닫히는 순간 온몸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는 소파에 쓰러져 텅 빈 방 안을 둘러보았고 그의 마음도 덩달아 한쪽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하느님은 송사월의 손에서 그녀를 빼앗아 그에게 보냈지만 그는 그녀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지금 이런 결과가 있는 건 다 그의 탓이었고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일이었다.그는 한 시간 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핸드폰을 꺼내 소수빈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화진그룹 인수 건은 어떻게 됐어?”전화기 맞은 편의 소수빈은 한창 선을 보고 있던 중이었다. 그의 물음에 소수빈은 벌떡 일어나 레스토랑을 나섰다. “대표님, 화
허윤서는 주서희와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였고 비교적 뛰어난 외과 의사였다. 그녀는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예쁜 사람이었고 온화하고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근데 사촌 오빠는 밥 먹는 데 정신이 팔려 허윤서를 몇 번 쳐다보지도 않았다. 정말 이렇게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남자는 또 처음 본다.그러나 허윤서는 그를 이해하는 것 같았다.“괜찮아요, 나도 평소에 출근하면 많이 바쁘거든요.”주서희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촌오빠에 의해 가라앉은 분위기를 무슨 말로 풀어야 할지 그녀는 도저히 모르겠다.허윤서는 그녀를 보고는 센스 있게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스테이크 하나를 집어 맛있게 먹었다. “아까는 서희 씨 사촌 오빠가 있어서 먹을 엄두도 못 냈었는데. 급히 자리를 떠서 다행이에요. 안 그러면 나 굶어 죽을 뻔했어요.”호탕하게 먹는 허윤서의 모습에 주서희도 덩달아 긴장이 풀렸다. 두 사람이 식사를 하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소준섭이 어떤 여자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왔다.주서희를 본 순간,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떼려고 했지만 때마침 주서희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별 반응이 없었고 못 본 척 눈을 돌리고 허윤서와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화도 내지 않고 묻지도 않는 주서희의 모습에 그의 잘생긴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는 여자의 손을 잡고 일부러 두 사람의 옆 테이블에 착석했다. 그리고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주서희를 쳐다보았다.“주서희, 오랜만이네.”주서희는 그가 평소처럼 자신을 모른 척할 줄 알았다. 근데 뜻밖에도 그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다.그녀는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며 그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소 선생님, 서울에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소준섭은 무심하게 눈썹을 치켜올리며 입을 열었다.“내 여자가 보고 싶어서. 하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서 그 여자 보러 왔어.”그가 말한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었던 주서희는 일부러 고개를 숙이고 수줍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
소준섭은 감출 수 없었던 욕망을 간신히 억누르고 차를 몰고 교외로 향했다. 잠시 후, 그는 차를 세우고 뒷좌석으로 돌아가 주서희를 번쩍 들어 올리고는 그녀의 입술에 미친 듯이 키스했다.며칠 동안 쏟아졌던 그리움이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주서희는 그의 품에 안겨 욕정에 사로잡힌 그를 쳐다보며 그를 떠보듯 조심스럽게 물었다.“나랑... 언제 결혼할 거예요?”그 순간 그가 그녀의 뺨을 쓰다듬던 손길을 멈추고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소씨 가문에서는 내가 너와 결혼하는 걸 허락하지 않을 거야.”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며 애교를 부렸다.“그럼 당신은요?”흠칫하던 소준섭은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면서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난 결혼하고 싶지 않는데.”그 말을 듣고 실망한 주서희는 그의 목을 감싸고 있던 팔을 내려놓았다.“나도 이제 나이가 적지 않으니 결혼해야죠.”그녀가 결혼을 한다는 말에 소준섭은 심장이 텅 빈 것 같았고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그가 화를 내며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경고를 날렸다.“넌 결혼 못 해.”그녀는 화를 내는 그의 모습을 보고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입꼬리를 올렸다.“나랑 결혼하지도 않을 거면서 왜 내가 결혼하는 걸 안 된다고 하는 건데요? 설마 계속 이렇게 당신 곁에 있기를 바라는 건 아니죠?”소준섭은 그녀의 얼굴을 꼬집으며 피식 웃었다.“지금 딱 좋잖아. 각자 원하는 대로 관계 유지하는 거. 왜 굳이 결혼해야 하는 건데?”그녀는 그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난 결혼하고 싶어요. 가정을 꾸리고 싶다고요. 당신이 줄 수 없다면 우리 이제 그만해요.”안색이 어두워진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던 그의 손을 뿌리치고는 똑바로 앉아 담담하게 말했다. “소준섭 씨, 최근에 어떤 의사가 나한테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고 있거든요. 괜찮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 사람을 받아들일 생각이에요. 당
부산, 가랑비가 내리고 있고 가면을 쓴 사람들이 고급 차를 겹겹이 에워쌌다.차 안의 남자는 대략 50세 정도의 나이로 보였고 그는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예쁜 여인을 품에 안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옷을 입지 않은 채로 뒷좌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을 쳐다보며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더욱 절망적인 건 그 남자 아내가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의 친절한 초대로 현장에 와서 이 상황을 보게 되었다. “김태호, 뻔뻔스러운 인간.”그 여자는 으르렁거리며 죽기 살기로 두 사람한테 달려들었다. 택이는 옆에 있던 가면을 쓴 남자를 향해 턱을 치켜들었고 그 남자는 이내 여자의 입을 틀어막고 그녀를 끌고 갔다. 차 안에 있던 남자는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택이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때 택이가 문을 확 잡아당기고는 차에서 그를 끌어 내렸다. 그 남자는 바닥에 쓰러졌고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택이가 그의 등을 발로 밟았다.가슴에서 통증이 전해지고 몸이 돌덩이에 눌린 것처럼 숨이 막혔다. 그가 턱을 치켜들고는 눈을 크게 뜬 채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으며 사람들을 쳐다보았다.“당신들 도대체 누구야?”택이는 허리를 약간 숙이고 그의 얼굴을 툭툭 쳤다.“당신 와이프가 보낸 사람들.”말을 마친 그가 입고 있던 양복 점퍼를 벗어 차 안에 있던 여자의 몸을 덮어주고는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남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보스, 이미 다 가렸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김태호를 에워싸고 있던 가면을 쓴 사람들이 재빨리 길을 비켰다. ‘날 발로 밟은 사람이 이들의 보스인 줄 알았는데 정작 보스는 따로 있었군.’금동 색 가면을 쓴 남자가 금빛 칼을 들고 다가왔다. 190㎝에 육박하는 큰 키를 가지고 있는 남자는 엄청난 위압감을 주고 있었고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옷차림을 보면 겨우 스무 살 남짓한 젊은 친구로 보였다.‘이리 젊은 걸 보면 기껏해야 길거리의 날라리 놈이겠지.’순식간에 자신감이 생긴 김태호는 그를 향해
그의 눈빛을 보던 김태호는 더는 그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등골이 오싹해졌다.“너 도대체 누구야?”“1분 더 줄게.”이승하는 담담하게 그를 쳐다보고는 인내심이 바닥난 듯 차갑게 한마디 내뱉었다. 그는 손에 든 칼로 그 계약서를 가리키며 1분 안에 사인하라는 신호를 보냈고 그렇지 않으면 그의 기분에 따라 김태호의 처리할 것 생각이었다. 칼끝이 얇은 종이를 스쳐 지나가자 하얀빛이 났고 그 빛이 눈에 번쩍거리자 김태호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이승하와 계약서를 번갈아 보면서 한껏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화진그룹은 김씨 가문에서 대대로 이어온 기업이야. 내가 이 계약을 체결하면 난 화진그룹의 죄인이 될 거다.”인내심을 잃은 지 오래된 이승하는 더 이상 그의 헛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칼을 들어 단번에 그의 어깨를 찔렀다.칼을 찔러 넣은 후 재빨리 빼냈고 그 과정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이승하의 독한 기운을 보면 그가 살인을 일삼는 냉혈한 인간 같아 보였다. 김태호는 너무 아픈 나머지 비명을 터뜨렸고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이 넓은 야외에서 매우 괴이하게 들렸다. 차에 있던 여자는 가면을 쓴 사람들이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 바로 칼을 사용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놀라서 황급히 차 문을 밀고 도망치려 했지만 그들을 에워싼 가면을 쓴 남자들이 차 문을 막아섰다. 그녀는 외투를 두른 채 뒷좌석에 웅크리고 앉아 공포에 질린 얼굴로 차창 밖에 있는 금동 색 가면을 쓴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충고하는데 빨리 사인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가 당신 손을 잘라 손도장을 찍기를 기다리지 말고.”말을 마친 택이는 그의 등의 발을 밟고 다시 한번 힘껏 짓눌다. 엄청난 고통에 김태호는 소리를 질렀다. 나이가 든 그는 이런 고통을 견디지 못하였다.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펜을 들어 계약서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했다. 그는 서명을 마친 후에야 계약서에 적힌 인수인이 뜻밖에도 김시후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