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는 애써 자신을 진정시킨 후 휴대폰을 꺼내 바로 경찰에 신고했다.경찰은 그렇게 일찍 도착하지 않았고 차의 시동이 꺼진 후 안은 매우 후덥지근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막히고 답답한 느낌에 그녀의 호흡이 점점 흐트러졌다.그녀는 경찰이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보고 즉시 정가혜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정가혜는 급히 가게로 가서 일을 처리하느라 휴대폰을 차에 두고 와서 전화를 받지 못했다.서유는 몇 차례 전화했지만 아무도 받지 않자 더 이상 전화를 걸지 않았다.그녀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굳게 닫힌 별장 문을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그녀를 구하러 나오지 않았다.극도로 산소가 부족하고 질식할 것 같은 느낌에 그녀는 갑자기 화가 났다.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들어 힘껏 차창을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휴대폰 액정이 깨질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그녀는 지금까지 이 정도로 화난 적이 없었다. 이를 악물고 있는 힘을 다해 힘껏 내리쳤다.난간에 엎드린 지현우는 아래층을 한눈을 내려다보았지만 문을 열 생각은 않고 덤덤하게 바라만 보았다.서유의 휴대폰이 부서졌지만 차 유리창은 여전히 멀쩡했다.지칠 대로 지친 서유는 더 이상 힘이 없어 휴대폰을 내려놓았다.그리고 차에 우두커니 앉아 좁은 공간의 공기가 점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얼마나 지났을까, 지현우가 다가와 조수석의 창문을 내리고 허리를 굽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서유를 보았다.“앞으로는 제시간에 집에 돌아올 건가요?”창밖으로 찬 공기가 불어 들어오자 산소 부족에 허덕이던 서유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그녀는 차창에 엎드려 기를 쓰고 숨을 들이마시며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을 가라앉힌 후, 붉어진 눈으로 지현우를 차갑게 바라보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무수한 감정을 담은 그녀의 눈과 마주치자 지현우는 살짝 넋을 잃었다.예전의 김초희도 상처를 받을 때마다 그런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한마디도 하지 않으려 했다.김초희를 생각하자 지현우는 심장이 저리기 시작했고 무의식적으로 눈을 돌린 후 몸을 곧게 세워
움츠러든 그녀의 모습을 보았을 때,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차 세워!”택이는 즉시 속도를 늦추고 차를 세웠다.“보스, 왜 그러세요?”이승하는 문을 열고 재빨리 차에서 내려 서유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서유는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감지하고 즉시 몸을 일으켜 뒤로 물러났다.“오지 마!”이승하는 그녀가 이렇게까지 경계하는 것을 보고 자기가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싫은 줄 알고 걸음을 멈추었다.남자는 꼿꼿하게 서서 그녀를 유심히 보며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망울이 새빨갛게 물들더니 눈꼬리까지 붉어졌다.지금 이 순간에서야 그는 깨달았다. 이미 끝난 이상 그녀에게 한 발짝도 다가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서유는 눈앞의 사람이 누군지 모르지만 자신이 소리를 지른 후로 감히 앞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하지만 지금 자신이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들키면 다시 앞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유는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가 순간 공포심으로 바뀌었다.그녀는 재빨리 몸을 돌려 앞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상관하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서유의 저항, 방어와 무시에 이승하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그래, 모두 내 잘못이야.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겠다고 해놓고 또 이러고 있으니.’그는 시뻘건 눈으로 멀리 달아나는 여자의 모습을 보며 택이에게 말했다.“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따라가.”택이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재빨리 따라갔다.이승하는 마음의 통증을 억누르고 차로 돌아갔다.차에 타자마자 지현우의 차가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그제야 두 사람이 싸워서 서유가 집을 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지금은 송사월도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고, 지현우도 다가갈 수 있지만 유독 이승하만 불가능했다.이승하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가볍게 웃기 시작했다.씁쓸한 웃음이 미간을 물들일 때 마치 짙은 어둠이 그를 삼켜버릴 것 같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택이가 차로 돌아왔다.“보스, 누군가 와서
서유는 집에 돌아간다는 말을 듣고 웃음이 났다.“그건 당신 집이지 내 집이 아니죠.”그녀는 집이 없다. 어릴 때부터 없었다. 언니를 찾으면 집이 생길 것으로 생각했지만, 지금 눈앞의 이 형부라는 작자는 그녀가 제시간에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녀를 차 안에 가두어 숨 막혀 죽게 만들려 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와 집에 갈 수 있을까?지현우는 그녀가 돌아가려 하지 않자 느릿느릿 말했다.“그건 내가 당신 언니에게 사준 집이니 당신 집이기도 하죠.”서유는 더욱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언니는 당신 손에서 벗어나려고 자기 손으로 생을 마감했어요. 그건 전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말해주죠. 집이며 차며 전부 언니의 것이 아니죠. 당신이 일방적으로 언니에게 주려 했던 거죠.”지현우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눈 밑에는 순간 매서움이 피어올랐다.“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왜 10년 동안이나 나를 쫓아다녔겠어요? 그런데 나를 얻고 나서 날 배신하고, 버리고, 악착같이 벗어나려고 했죠. 근데 당신들은 이 모든 걸 왜 나에게 덮어씌우냐고!”서유는 어리둥절했다. 언니가 지현우를 10년이나 쫓아다녔을 줄은 몰랐다.‘그럼... 언니는 이 남자를 사랑한다는 말인데, 그럼 왜 버리려고 했을까?’서유는 의문이 가득했지만 지현우는 더 이상 김초희와 관련된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는 그녀를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었다.“지금 내가 초희에게 모든 것을 주려 하니 당신은 언니 대신 나에게 감사해야죠. 말끝마다 날 비난할 게 아니라.”“아직 내 인내심이 남아 있을 때 빨리 집에 가죠? 아니면 나도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겠는데?”김초희가 다른 남자와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직접 보았을 때, 지현우는 완전히 미쳐버렸다.그래서 그녀의 시신도 원하지 않았고 오직 이 심장만 원했다. 그녀의 심장은 적어도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에...하지만 그 심장을 담은 몸뚱이는 계속 말을 듣지 않고 그를 짜증 나게 해서 목 졸라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서유는 지금 지현
서유는 두피가 저리고 얼얼했지만 용기를 내어 말했다.“지현우 씨, 난 당신이 너무 무서워요. 집에 돌아가지 않으면 안 돼요?”잠시 눈이 먼 상황에서도 지현우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또다시 차 안에 잠겨 숨 막혀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까 봐 두려웠다...지현우는 초점 없는 서유의 눈동자에 비친 두려움을 보고 다시금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를 한참이나 지켜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일단 돌아가서 얘기해요.”이 말을 들은 서유는 상의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고 그에게 손을 건넨 후, 그의 손에 이끌려 자신을 질식시킬 뻔했던 차에 올라탔다.이곳은 별장에서 아주 가까웠고 불과 몇 분 만에 차가 멈췄다.지현우는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침실로 들여보낸 후 약 한 상자를 가져다주었다.“이건 조지 선생이 당신 눈 치료하라고 준 약이에요. 당신이 도망갈까 봐 계속 안 줬어요.”어쩐지 그녀의 눈이 갑자기 보이지 않더라니.알고 보니 지현우가 일부러 약을 숨겨 서유가 제시간에 먹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서유는 다시 주먹을 꽉 쥐었다.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더욱 강렬해졌다.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약상자를 열어 약 몇 알을 꺼내고는 입에 넣어 억지로 삼켰다.그러고는 옆에 있는 지현우에게 차갑게 말했다.“잘게요.”지현우는 덤덤한 표정으로 서유를 보았다. 그녀가 이불을 더듬고 젖히는 것을 보고 나서야 몸을 돌려 침실을 나섰다.다음날, 잠에서 깨어난 서유는 방 천장의 색깔을 본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히 잠시적인 실명이라 시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깊은 어둠 속에서 살 뻔했다.서유는 일어나서 세수를 마친 후 부서진 휴대폰을 집어 들고 전원을 켜려 했지만 도저히 켤 수 없었다.휴대폰 액정만 망가진 줄 알았는데 완전히 고장 났을 줄이야...서유는 전에 쓰던 휴대폰에 듀얼 카드를 넣을 수 있다는 생각에 서둘러 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원래 휴대폰을 꺼내 새 카드를 넣었다.설치를 완료한 후,
이번에도 어김없이 김씨였다.서유는 김씨가 이렇게 집착하는 것을 보고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여전히 그의 친구 신청을 수락하지 않았고 도리어 이 소식들을 전부 비웠다.카톡을 탈퇴하려고 할 때, 전에 협력했던 고객 단체 채팅방에서 누군가 이승하를 찾았다.이건 동아 그룹 대표가 고객 관리 차원에서 만든 단체 채팅방으로 안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룹의 대표들이었다.서유가 죽은 후에 회사 사람들이 그녀를 단체방에서 내보낼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아니었다...이승하에게 말한 사람은 바로 동아 그룹의 온재빈이었다. 급한 일이 있어 이승하를 찾고 있는데 연락이 닿지 않아 단체방에서 이승하를 찾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하지만 이승하는 이런 소식에 답할 리가 없었다. 그가 이 채팅방에 들어온 것도 동아 그룹이 서유에게 시켜 이승하를 억지로 들어오게 한 것이다.서유는 이런 과거를 생각하며 갑자기 손가락을 제어할 수 없었고 그의 프로필 사진을 클릭했다.두 사람이 헤어진 후 서유는 이승하를 차단했다. 지금은 친구 사이가 아니지만 예전에 오갔던 메시지들은 볼 수 있었다.[승하 씨, 해외 출장 간 지 3개월이 다 되는데 언제 돌아와요?]이건 서유가 그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할까 봐 용기를 내어 보낸 메시지이지만 그는 답장하지 않았다.그리고 대화창을 더 위로 끌어올렸다. 두 사람의 대화는 아주 짧은 글로 별로 특별할 것이 없었다.유일하게 그녀의 마음을 따듯하게 한 건, 이승하가 아팠을 때 그녀에게 보낸 두 통의 메시지였다.[보고 싶어.][위 아파. 나 보러와.]그때는 이미 한밤중이었지만 서유는 이 두 메시지를 보고 즉시 코트를 입고 약을 산 후 이승하에게 달려갔다.그는 소파에 누워 한 손으로 위를 감싸고 크고 곧은 몸을 약간 웅크리고 있었는데 아주 고통스러워 보였다.서유는 뜨거운 물을 받은 후 위약을 들고 그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서유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이승하는 굳게 감긴 두 눈을 천천히 뜨고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서유는 그런 디테일을 떠올리며 문득 그의 사랑을 느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에게는 이미 늦어버렸다...서유는 기억에서 벗어나 카톡을 로그아웃하고 정가혜에게 전화를 걸려 했다.전화를 걸기도 전에 조지에게서 먼저 전화가 왔다.“서유 씨, 제때 약 안 먹었어요?”그 말을 들은 서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선생님, 지현우 씨가 제가 도망갈까 봐 약을 주지 않았어요.”조지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이를 갈며 말했다.“제가 현우 씨를 만나볼게요.”서유는 그 약들을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조지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조지가 전화를 끊자마자 정가혜의 전화가 걸려왔다.“서유야, 너 휴대폰을 왜 계속 끄고 있어?”정가혜는 어제 나이트 레일에서 한밤중에 나왔다가 서유의 부재중 전화를 보고 급히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전원이 꺼져있었다.정가혜는 서유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두려워 차를 몰고 지현우의 별장으로 갔다. 하인에게서 서유가 이미 잠들었다는 말을 듣고서야 안심하고는 집으로 돌아갔다.오늘 아침 일어나서 또 서유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전원이 꺼져있었다.부랴부랴 별장으로 가려는데 마침 전화가 연결되었다.서유는 미안한 듯 말했다.“미안, 휴대폰이 망가져서 원래 휴대폰으로 바꿨어.”정가혜는 괜찮다고 말하고는 또 물었다.“어젯밤에는 무슨 일로 전화했었어?”서유는 지현우와의 갈등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 정가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켰다.“가혜야, 이따가 내가 너한테로 갈게. 너랑 같이 만날 사람이 있어.”정가혜는 누구를 만나는지 묻지도 않고 알겠다고만 대답했다.서유는 약속시간을 정하고 잠옷을 갈아입었다.이 잠옷은 어제 정가혜가 그녀에게 준 것인데 갈아입을 겨를도 없이 지현우에게 끌려왔다.서유는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전에 쓰던 휴대폰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식탁에 앉아 아침을 먹고 있던 지현우는 그녀를 보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식사를 계속했다.서유는 차갑게 그를 흘겨보고는 몸을 돌려 별장 밖
지현우는 느릿느릿 말했다.“사인 안 해도 돼요. 어차피 난 상관없으니까...”서유는 그를 훑어보았다.“왜 갑자기 영국으로 돌아가려는 거예요?”그는 분명 무슨 중요한 일이 있어서 떠나는 것이고, 떠난 후 서유를 통제할 수 없을까 봐 먼저 그녀에게 백지 계약서에 서명하게 하는 것이다.지현우는 아무 감정 없이 덤덤하게 말했다.“조지 선생이 초희 애가 아프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가봐야 해요.”‘언니의 아이?’서유는 갑작스러운 소식에 깜짝 놀랐다.“언니... 언니랑 당신 사이에 아이가 있었어요?”지현우는 갑자기 차갑게 웃더니 눈 밑에는 혐오감이 가득했다.“전남편 아이예요.”‘뭐? 언니에게 전남편이 있었다고?’서유는 어리둥절해서 지현우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덤덤하게 물었다.“서유 씨도 황당하죠?”서유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서서히 사그라졌다. 그녀는 언니에 대한 일을 잘 몰랐다. 모두 지현우를 통해 조금씩 들은 거라, 그의 일방적인 말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어서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지현우는 여전히 김초희와 관련된 일에 대해 많이 얘기하고 싶지 않아 했고, 손가락으로 계약서를 가리켰다.“구체적인 내용을 적지 않은 이유는 아직 나도 서유 씨가 뭘 했으면 좋을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안심해요. 난 단지 당신 언니 심장에만 관심이 있으니 서유 씨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전부 언니와 관련된 일일 거예요.”서유는 그 말을 듣고 덤덤하게 웃었다.“이런 계약서는 절대 서명할 수 없어요.”지현우는 원래 영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으니, 서유가 이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아도 그는 떠날 것이다. 그러니 서유는 굳이 서명할 이유가 없었다.지현우는 오히려 대수롭지 않은 얼굴이었다.“그럼 그러던가요. 어차피 초희가 다른 남자랑 낳은 아이인데 나랑 뭔 상관이에요?”즉, 서유가 서명하지 않으면 그는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고, 여전히 이곳에 남아 서유의 자유를 제한할 것이라는 뜻이다.방금 굳어진 신념이 갑
지현우는 말을 마치고 계약서를 들고는 서유를 쳐다보지도 않고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잔뜩 겁에 질린 서유는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조지에게 전화했다.조지는 그녀의 말을 듣고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서유 씨, 안심하세요. 만약 현우 씨가 연이를 죽이려고 했다면 진작 죽였겠죠. 지금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겠어요?”서유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이에 대해 다시 물었다.하지만 조지는 그저 김초희가 영국의 어느 귀족과 낳은 아이라고만 말하고는 더 이상 말을 아꼈다.서유는 귀족이라는 말을 듣고 무슨 비화가 있을까 봐 더 묻지 않고 걱정스레 물었다.“그럼 연이는 대체 무슨 병인데요?”조지는 침착하게 말했다.“아무 문제 없어요. 그냥 제가 거짓말 한 거예요. 서유 씨 약을 몰래 훔쳐서 내가 좀 괴롭혔어요.”서유는 깜짝 놀라더니 이내 따라 웃기 시작했다.“현우 씨가 이 사실을 알고 화낼까 봐 걱정도 안 되세요?”조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아니요. 뿐만 아니라 난 현우 씨가 계속 영국에 머물 수 있도록 방법을 찾을 건데요?”서유는 조지가 그녀를 돕기 위해 이렇게 한 것을 알고 서둘러 말했다.“선생님, 너무 감사드려요.”조지는 별것 아니라는 말을 한 뒤 신신당부했다.“참, 약은 꼭 챙겨 드세요. 눈 치료하는 약 말고 면역 억제제도 제때 챙겨 먹어야 해요.”서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면역 억제제는 계속 먹고 있었어요.”조지는 그제야 안심했다.“앞으로 약은 서유 씨에게 보내 줄 테니 주소 하나만 주세요.”귀국 후, 조지는 약을 모두 지현우의 별장으로 보냈지만 그 약들이 서유의 손에 들어가지 않을 줄은 몰랐다.서유는 조지가 귀찮을까 봐 국내에서 구할 수 있냐고 물었다.“그래도 제가 드린 약을 드시는 게 좋아요.”서유는 정가혜의 주소를 그에게 알려주고 다시 물었다.“선생님, 약값은 얼마죠? 제가 드릴게요.”“이 대표님께서 전 세계 의료자원을 이용해 심장을 찾아달라면서 당시 6천 억 원을 주셨어요. 그 돈 아직 다 못 썼으니까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