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혜가 이렇게 소리 지르더니 얼굴을 감싸고 통곡했다.그런 그녀를 보니 서유도 눈시울이 붉어졌다.서유는 온 힘을 다해 정가혜의 옷깃을 잡았다.하지만 정가혜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뒤로 물러섰다.정가혜는 울면서 병실 밖으로 뛰쳐나갔다.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서유는 참고 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정가혜는 단숨에 VIP 병동에서 달려 나왔다. 발걸음은 자기도 모르게 일반 병실에 멈춰 섰다.강은우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그가 무엇을 도울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그냥 기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정가혜는 울며 병실로 걸어갔다. 하지만 강은우 남매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옆에 있는 일인 병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그녀는 몸을 돌려 한 걸음 한 걸음 옆에 있는 병실로 걸어갔다.문은 잠겨 있었고 커튼도 닫혀 있었다. 하지만 살짝 열린 틈으로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천 쪼가리 하나 걸치지 않은 두 사람의 형체였다.정가혜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구역질이 나와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틀어막고 강은우와 강이설을 뚫어져라 쳐다봤다.집안은 별 볼 것 없지만 성실하고 듬직하다고 생각했고 강은우가 그녀를 배신할 일은 영원히 없을 줄 알았다.하지만 이는 한낱 웃음거리에 불과했다. 결혼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절대 자기를 배신할 리 없다고 생각한 남자가 ‘동생’과 침대에서 뒹굴고 있다.우스웠다, 정말 너무 우스웠다.정가혜가 믿던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면서 멘탈도 동시에 날아갔다.그녀는 비틀거리며 병원 밖으로 달려갔다.‘서유는 곧 죽는다고 그러고 강은우는 바람피우고, 그럼 나는, 나는 어떡하는 거지?’정가혜는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저 막무가내로 앞으로 내달렸다.얼마나 달렸는지, 어디로 달렸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누군가와 부딪혀서야 그녀는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마치 좀비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연석의 표정이 굳었다.“말 다 했어요?”정가혜는 그를 노려보더니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렸다.이연석이 정신을 차렸을 때 정가혜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그는 화를 이기지 못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고 끝내는 타고 온 고급 승용차에 분풀이했다.분풀이가 될 줄 알았으나 딱딱한 철판에 맞아 발가락이 부서졌다.오늘 재수가 없어도 너무 없는 이연석은 의사와 비서의 부축하에 응급실로 향했다.어젯밤 서유가 깨어났다는 간호사의 말에 주서희는 바로 청진기를 들고 VIP 병실로 향했다.주서희는 서유의 몸 상태를 체크했다. 뒤통수에 감염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주서희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서유 씨, 뒤통수는 칼을 댔기 때문에 감염 상황만 계속 관찰하면 됩니다. 다른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주서희는 멈칫하더니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서유를 보며 말했다.“심부전 악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어요. 얼마 버티지 못할 수도 있어요.”서유는 자기가 어떤 상태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 거죠?”두 손을 가운에 찔러넣은 주서희는 서유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말했다. 말투가 다소 무거웠다.“한주 정도 남았어요.”그렇게 심각한 부상을 당하지만 않았어도 특효약 같은 거로 한두 달은 더 버틸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하지만 못이 뒤통수를 관통하는 바람에 심부전이 급속도로 악화했다. 한 주를 더 버티는 것도 기적이라고 봐야 했다.주서희는 서유의 뒤통수에 못이 박혀 있던 장면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도 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서유 씨, 도대체 누가 당신 뒤통수에 대못을 박은 거예요?”이승하는 그저 주서희에게 그를 포함한 박하선과 연지유가 서유에게 손을 댔는데 바로 사람을 구하러 가달라고만 했다.하지만 서유 몸에 난 상처는 누가 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주서희는 여러 사람에게 맞아서 난 상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승하가 이 싸움에 참여했다고 믿지는 않았다.자세한 상황을 모르니 서유에게 물을
절망만이 남은 그녀의 얼굴을 보니 주서희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숙여 꼭 안아주었다.“서유 씨, 고마워요.”주서희의 부드러운 포옹이 서유를 사색에서 끌어냈다. 그녀는 힘겹게 손을 들어 주서희의 등을 토닥거렸다.“오히려 저를 살려주셔서 제가 고마운걸요. 주 선생님 아니었으면 언니와 작별 인사할 기회도 없었어요.”정가혜가 달려 나가자마자 간호사가 들어와 그녀의 상태를 체크하며 그녀에게 주서희가 그녀를 구한 것이라고 알려주었다.주서희가 왜 그녀를 살리려고 달려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다른 걸 더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 은혜만으로 충분했다.“사실은 이...”사실은 이승하가 알려줘서 간 거라고 서유에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유가 잘라버렸다.“주 선생님, 우리 언니, 그러니까 가혜는 어디 갔어요?”이미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는데 정가혜가 돌아오지 않자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봐 걱정되었다.주서희는 모든 신경이 서유에게 쏠려 있었기에 정가혜가 병실을 비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주서희는 병실을 빙 둘러보더니 서유에게 말했다.“찾아보라고 할까요?”서유는 감사를 전하며 다시 침대맡에 놓인 쇼핑백을 쳐다봤다.“주 선생님, 향수 가져가요.”주서희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서유가 목숨으로 바꾼 정성을 생각하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향수를 받은 주서희는 서유에게 일찍 쉬라고 당부하고는 병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몇몇 경비를 불러 CCTV를 돌려보라고 했다.병원에서 나온 정가혜는 병원에서 달려 나가다 실수로 이연석과 부딪혔고 둘 사이에 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하지만 별다른 큰 충돌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그저 몇 마디 주고받더니 정가혜는 다시 어디론가 달려갔고 그 뒤로는 찍힌 영상이 없었다.주서희는 시CCTV에 찍힌 정가혜를 가리키며 경비들에게 말했다.“사람 보내서 저 여자 좀 찾아와요.”경비는 바로 사람을 찾으러 갔다. 일 처리를 마친 주서희는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서유는 이미 잠에 든 상태였다. 간호사
정가혜는 병실로 돌아왔지만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문 앞에 서 있었다.서유의 얼굴을 보기 힘들어서가 아니라 서유가 곧 영원히 떠날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정가혜의 몸이 벽을 따라 천천히 미끄러지더니 두 팔로 다리를 부둥켜안은 채 바닥에 웅크리고 앉았다. 마치 세상에 버려진 사람처럼 가엽기 그지없었다.주서희는 의사들을 거닐고 진찰을 돌다가 그런 정가혜를 발견하고는 의사들을 먼저 보내고 그쪽으로 걸어가 정가혜를 일으켜 세웠다.“정가혜 씨, 괜찮아요?”정가혜는 멍해서 고개만 저었다.주서희는 퉁퉁 부어오른 그녀의 눈을 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정가혜 씨, 인명은 재천이라고 가혜 씨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서유 씨 곁을 지키는 거예요. 그래야 후회가 안 돼요.”이 말에 정가혜는 끝내 정신을 차렸다. 어두웠던 동공에 한 줄기 빛이 생겼다.“서유... 얼마나 더 살 수 있어요?”한참 침묵하던 정가혜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주서희는 사실 그대로 말했다.“한주 정도 남았어요...”정가혜는 비틀거리더니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주서희가 그녀를 잡으며 타일렀다.“이럴 때일수록 가혜 씨가 잘 버텨줘야 해요. 절대 무너지면 안 돼요. 가혜 씨가 무너지면 서유 씨는 어떡해요.”정가혜는 반쯤 나간 정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내가 잘 버텨야 해요. 서유 걱정시켜서는 안 되지...”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피곤한 몸을 이끌고 병실로 들어갔다.그러더니 서유의 침대맡으로 걸어가 서유의 볼을 쓰다듬었다. 주서희는 이 모습을 창문으로 지켜봤다.따스한 햇살이 기구한 운명의 두 사람을 비춰주었다. 마치 온기로 그들을 녹여주려는 것 같았다.주서희는 그제야 서유가 왜 아껴서 모은 돈을 정가혜에게 모두 남겨주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서로 생명을 의지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주서희는 몇 년간 의지할 사람 없이 혼자 싸워온 자신을 떠올리며 살짝 서글퍼졌다.그녀는 시선을 늘어트리며 몸을 돌렸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온전히
정가혜는 꼬박 2시간을 울었다. 남은 눈물을 모두 쏟아낸 후에야 울음을 그쳤다.서유가 입꼬리를 올리며 그런 정가혜를 비웃었다.“내가 기억하는 우리 가혜 언니는 늘 굳센 모습이었는데, 울음보 기질도 있구먼.”정가혜는 서유와 디스전을 펼칠 기분이 아니었다. 그저 수심에 가득 찬 얼굴로 서유에게 물었다.“너 눈 안 보이는 거 주 선생님은 알아?”서유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몰라.”그러더니 한마디 덧붙였다.“인제 그만 신세 져야지.”이를 들은 정가혜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서유도 살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으니 눈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정가혜는 빛을 잃은 서유의 눈동자를 보며 무너져오는 멘탈을 단단히 부여잡고는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서유야, 심부전은 언제부터 시작된 거야?”정가혜가 알아본 데 의하면 심부전은 말기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바로 이런 상태까지 악화하는 케이스는 없었다.서유는 이씨 집안 사람에게 당하기 전부터 이미 심부전을 앓고 있었다. 또 중간에 무슨 일을 겪으면서 말기로 악화한 게 틀림없었다.서유는 이제 정가혜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아니면 정가혜는 그녀가 어쩌다 죽게 되었는지도 모르게 된다.서유는 겨우 정신을 붙잡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5년 전에 김시후의 형 김준혁에게 발에 두 번 걷어차였던 거 기억나?”정가혜는 무언가 떠오른 듯 물었다.“그 발길질에 심부전에 걸린 거야?”서유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의사 선생님이 심부전이 올 수도 있다고 하셨거든. 잘 보호하면 몇 년 더 버틸지도 모른다고. 근데 잘 보호하지는 못했나 봐. 심부전이 점점 악화하더라고.”서유는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정가혜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서유는 정가혜가 진정할 수 있게 손등을 토닥이더니 말을 이어갔다.“부산에서 한동안 치료 받았어. 부산에서 돌아와서 다 말해주려 했는데 그때는 네가 송사월을 죽이겠
서유가 송사월을 탓하지 말라던 말이 떠올라 정가혜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지나치고는 물 뜨러 갔다.김시후는 문 앞에 선 채 침대에 누운 작고 가녀린 서유를 바라보며 눈물이 차올랐다.그는 최대한 몸을 떨지 않으려고 주먹을 불끈 쥐고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침대맡으로 다가갔다.앞이 보이지 않는 서유는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자 가혜가 돌아온 줄 알고 손을 내밀어 옷깃을 잡으려 했다.“가혜야...”옷깃을 잡기도 전에 크고 기다란 손이 그녀의 손을 감쌌다.그녀의 손을 꼭 잡은 그 손은 살짝 떨고 있었다. 김시후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어떻게 말할지 몰라 그저 그녀의 손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서유는 그 손이 남자의 손이라는 걸 알아채고는 머릿속에 이승하의 차갑지만 잘생긴 얼굴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서유는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불렀다.“사월아...”김시후는 그녀가 아직 자신을 알아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알아보고 나서도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무너졌던 멘탈에 죄책감까지 더해졌다.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더니 침대맡에 앉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서유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위부터 아래로 그녀의 얼굴을 열심히 그렸다.서유는 그런 김시후를 밀쳐내지 않고 만지작거리게 내버려두었다. 마음은 호수처럼 고요하기만 했다.한참 지나서야 김시후는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서유야...”그는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치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부르는 것처럼 처절하면서도 미련이 가득했다.“응.”서유가 대답하더니 되물었다.“왜 돌아온 거야?”김시후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냥 마음이 답답해서, 너 보러 온 거야...”그는 요 며칠 마음이 너무 어수선했다. 무슨 일이라도 날것처럼 심장이 벌렁거렸고 그녀를 찾아오고 싶은 충동을 잘 억제할 수가 없었다.아파트로 찾아가 밤새워 기다렸지만 문을 열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서유와 정가혜에게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기에 주서희를 찾는 수밖에 없었다.
김시후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전에 왜 그렇게 모질게 말했는지 말이다.그녀의 죽은 뒤 모습을 보고 그가 슬퍼하고 자책할까 봐 그를 쫓아낸 것이었다.사실 서유는 늘 그대로 변한 적이 없었다. 죽을 때까지 그를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그녀가 이승하를 사랑해서 자신을 그렇게 못되게 대하는 거라고 생각했다.깊은 죄책감이 그를 집어삼켰다. 그녀의 손을 잡은 손이 자기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렸다.서유는 그의 무력함을 느끼고 다시 손을 내밀어 그의 손바닥을 꼬집었다.“사월아, 이제 가면 안 돼?”김시후는 손을 내밀어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서유야, 이번엔 네가 뭐라 해도 안 가. 끝까지 네 옆에 있을 거야. 영원히 네 옆을 지킬 거라고...”영원이라는 말은 그녀가 감당하기에 너무 무거운 말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상처 주기 싫었다.그녀는 가슴이 답답한 듯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그에게 말했다.“사월아, 나 더 이상 말할 힘이 없어. 눈 좀 붙일게.”김시후는 그런 그녀가 너무 마음이 아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일단 좀 자. 내가 옆에 있을게.”그는 혹시나 그녀가 자신을 내쫓을까 봐 조심스럽게 말했다.서유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눈을 감았다.김시후는 참대맡에 앉아 가만히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그녀가 깊은 잠이 들고 나서야 그는 핸드폰을 꺼내 소준섭에게 전화를 걸었다.원장실에서 주서희를 귀찮게 하던 소준섭은 김시후가 걸어온 전화를 보고는 멈칫했다.저번에 김시후에게 문자를 보내 설명했지만 김시후는 답장이 없었다. 그런 김시후가 먼저 찾아왔으니 소준섭은 조금 기뻤다.그는 주서희를 놓아주더니 전화를 받았다.“시후야, 어쩌다 전화를 다 하고?”김시후가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심부전, 고칠 수 있어?”소준섭은 김시후의 질문을 듣고 바로 그가 누구를 말하는 건지 알아챘다.“적합한 심장은 찾았고?”김시후는 무력감이 몰려와 꼭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아니...”
요 며칠 서유는 자는 시간이 깨어있는 시간보다 많았다.깨어났다 해도 몇 마디 못 하고 바로 다시 스르르 깊은 잠에 빠졌다.김시후는 침대맡에 앉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핼쑥한 얼굴엔 수염이 자랐고 그 모습이 매우 수척해 보였다.서유가 깨어나 음식을 먹고 싶어 할까 봐 정가혜는 나가서 좀 사 오려고 했다. 서유가 별로 먹지 못해도 말이다.정가혜는 김시후에게 나가서 흰죽 좀 사 오겠다고 하고는 병실을 나섰다.그녀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유가 잠에서 깼다. 온몸이 부어올라 움직일 수가 없었다.어쩌면 얼굴도 부었을 것이다. 그 모습이 얼마나 흉할지 서유는 예상이 갔다.서유는 김시후가 손을 꼭 잡아주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고 이에 마음이 살짝 차분해졌다.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사월아... 혹시 해 떴어?”김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그녀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던 게 떠올라 얼른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응, 떴어...”그는 붉어진 눈시울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해가 뜰 리가 없었다.하지만 요 며칠 서유는 잠에서 깨자마자 늘 해가 떴는지를 제일 먼저 확인했다.해가 보고 싶은데 눈이 보이지 않으니 그저 해가 떴는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서유는 해가 떴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눈은 초점이 맞춰지지 않았지만 유리창으로 햇살 한줄기가 들어오는 게 보이는 것 같아 마음이 따듯해졌다.“사월아, 나 주워 온 날도 이런 날씨 아니었어?”“맞아. 하늘은 파랗고 구름이 예쁜 날이었어. 햇살도 엄청 따듯하고. 네가 잔디밭에 누워 있는 걸 단번에 봤지 뭐야.”송사월이 5살 되는 해 복지원 밖에서 연을 날리다가 풀숲에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 망설임 없이 바로 복지원에 데려갔다.그가 그녀를 안아 올린 그때부터 그녀를 위해 모든 걸 바칠 운명이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서유는 김시훈의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꿈에서 어떤 여자가 그녀를 향해 손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