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서유는 누군가가 귓속말을 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잘 들리지 않아 다가가서 똑똑히 들으려고 했지만 그녀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얼마 후, 귓가에 들리는 소리가 점점 또렷해졌다.“서유야, 너 3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있어. 대체 언제쯤 깨어날 거야?” 그 소리가 이번에는 잘 들렸고 다름 아닌 정가혜의 목소리였다. 눈을 떴지만 시선은 희미했다. 정가혜의 윤곽만 어렴풋이 보일 뿐 그녀의 이목구비는 잘 보이지 않았다.서유는 그녀의 볼을 만지고 싶었지만 손은 전혀 들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없었다. 그녀는 그제야 자신의 상황이 어느 정도인지 알게 되었고 아마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정가혜...”서유의 몸을 닦아주고 있던 정가혜는 그녀의 허약한 목소리에 얼른 수건을 내려놓고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서유야, 드디어 깨어났네. 어디 아픈 데는 없어? 빨리 말해.”서유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고 말이 잘 나오지 않아 그 대신 정가혜의 손을 잡았다. 소리 없는 그녀의 몸짓에 잔뜩 겁에 질렸던 정가혜의 마음이 드디어 가라앉았다. 그녀는 서유가 이대로 깨어나지 못할까 봐 걱정됐다. 다행히 깨어나긴 했지만...눈시울이 붉어진 정가혜는 산소 호흡기를 쓴 서유를 빤히 쳐다보았다.“서유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지난 3일 동안 서유의 가늘고 곧았던 다리가 갑자기 심하게 부어올랐다. 주서희를 찾아가 이유를 물었지만 주서희는 그녀에게 알려주려 하지 않았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네이버를 검색할 수밖에 없었다. 찾아보니 이것은 말기 심부전의 증상이라고 했다. 믿을 수 없었던 그녀는 서유가 직접 부인하는 것을 듣고 싶었다. 그녀의 물음에 서유는 정가혜가 이미 짐작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원래는 적당한 시기에 정가혜에게 알리려고 했다.그러나 세상의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이승하는...그의 이름을 생각하니 서유는 몸이 아팠다. 그녀는 그가 가족을 위해 자신을 때릴 줄은 몰랐다. 그가 때린 뺨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정가혜가 이렇게 소리 지르더니 얼굴을 감싸고 통곡했다.그런 그녀를 보니 서유도 눈시울이 붉어졌다.서유는 온 힘을 다해 정가혜의 옷깃을 잡았다.하지만 정가혜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뒤로 물러섰다.정가혜는 울면서 병실 밖으로 뛰쳐나갔다.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서유는 참고 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정가혜는 단숨에 VIP 병동에서 달려 나왔다. 발걸음은 자기도 모르게 일반 병실에 멈춰 섰다.강은우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그가 무엇을 도울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그냥 기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정가혜는 울며 병실로 걸어갔다. 하지만 강은우 남매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옆에 있는 일인 병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그녀는 몸을 돌려 한 걸음 한 걸음 옆에 있는 병실로 걸어갔다.문은 잠겨 있었고 커튼도 닫혀 있었다. 하지만 살짝 열린 틈으로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천 쪼가리 하나 걸치지 않은 두 사람의 형체였다.정가혜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구역질이 나와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틀어막고 강은우와 강이설을 뚫어져라 쳐다봤다.집안은 별 볼 것 없지만 성실하고 듬직하다고 생각했고 강은우가 그녀를 배신할 일은 영원히 없을 줄 알았다.하지만 이는 한낱 웃음거리에 불과했다. 결혼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절대 자기를 배신할 리 없다고 생각한 남자가 ‘동생’과 침대에서 뒹굴고 있다.우스웠다, 정말 너무 우스웠다.정가혜가 믿던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면서 멘탈도 동시에 날아갔다.그녀는 비틀거리며 병원 밖으로 달려갔다.‘서유는 곧 죽는다고 그러고 강은우는 바람피우고, 그럼 나는, 나는 어떡하는 거지?’정가혜는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저 막무가내로 앞으로 내달렸다.얼마나 달렸는지, 어디로 달렸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누군가와 부딪혀서야 그녀는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마치 좀비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연석의 표정이 굳었다.“말 다 했어요?”정가혜는 그를 노려보더니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렸다.이연석이 정신을 차렸을 때 정가혜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그는 화를 이기지 못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고 끝내는 타고 온 고급 승용차에 분풀이했다.분풀이가 될 줄 알았으나 딱딱한 철판에 맞아 발가락이 부서졌다.오늘 재수가 없어도 너무 없는 이연석은 의사와 비서의 부축하에 응급실로 향했다.어젯밤 서유가 깨어났다는 간호사의 말에 주서희는 바로 청진기를 들고 VIP 병실로 향했다.주서희는 서유의 몸 상태를 체크했다. 뒤통수에 감염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주서희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서유 씨, 뒤통수는 칼을 댔기 때문에 감염 상황만 계속 관찰하면 됩니다. 다른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주서희는 멈칫하더니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서유를 보며 말했다.“심부전 악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어요. 얼마 버티지 못할 수도 있어요.”서유는 자기가 어떤 상태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 거죠?”두 손을 가운에 찔러넣은 주서희는 서유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말했다. 말투가 다소 무거웠다.“한주 정도 남았어요.”그렇게 심각한 부상을 당하지만 않았어도 특효약 같은 거로 한두 달은 더 버틸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하지만 못이 뒤통수를 관통하는 바람에 심부전이 급속도로 악화했다. 한 주를 더 버티는 것도 기적이라고 봐야 했다.주서희는 서유의 뒤통수에 못이 박혀 있던 장면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도 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서유 씨, 도대체 누가 당신 뒤통수에 대못을 박은 거예요?”이승하는 그저 주서희에게 그를 포함한 박하선과 연지유가 서유에게 손을 댔는데 바로 사람을 구하러 가달라고만 했다.하지만 서유 몸에 난 상처는 누가 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주서희는 여러 사람에게 맞아서 난 상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승하가 이 싸움에 참여했다고 믿지는 않았다.자세한 상황을 모르니 서유에게 물을
절망만이 남은 그녀의 얼굴을 보니 주서희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숙여 꼭 안아주었다.“서유 씨, 고마워요.”주서희의 부드러운 포옹이 서유를 사색에서 끌어냈다. 그녀는 힘겹게 손을 들어 주서희의 등을 토닥거렸다.“오히려 저를 살려주셔서 제가 고마운걸요. 주 선생님 아니었으면 언니와 작별 인사할 기회도 없었어요.”정가혜가 달려 나가자마자 간호사가 들어와 그녀의 상태를 체크하며 그녀에게 주서희가 그녀를 구한 것이라고 알려주었다.주서희가 왜 그녀를 살리려고 달려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다른 걸 더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 은혜만으로 충분했다.“사실은 이...”사실은 이승하가 알려줘서 간 거라고 서유에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유가 잘라버렸다.“주 선생님, 우리 언니, 그러니까 가혜는 어디 갔어요?”이미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는데 정가혜가 돌아오지 않자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봐 걱정되었다.주서희는 모든 신경이 서유에게 쏠려 있었기에 정가혜가 병실을 비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주서희는 병실을 빙 둘러보더니 서유에게 말했다.“찾아보라고 할까요?”서유는 감사를 전하며 다시 침대맡에 놓인 쇼핑백을 쳐다봤다.“주 선생님, 향수 가져가요.”주서희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서유가 목숨으로 바꾼 정성을 생각하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향수를 받은 주서희는 서유에게 일찍 쉬라고 당부하고는 병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몇몇 경비를 불러 CCTV를 돌려보라고 했다.병원에서 나온 정가혜는 병원에서 달려 나가다 실수로 이연석과 부딪혔고 둘 사이에 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하지만 별다른 큰 충돌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그저 몇 마디 주고받더니 정가혜는 다시 어디론가 달려갔고 그 뒤로는 찍힌 영상이 없었다.주서희는 시CCTV에 찍힌 정가혜를 가리키며 경비들에게 말했다.“사람 보내서 저 여자 좀 찾아와요.”경비는 바로 사람을 찾으러 갔다. 일 처리를 마친 주서희는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서유는 이미 잠에 든 상태였다. 간호사
정가혜는 병실로 돌아왔지만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문 앞에 서 있었다.서유의 얼굴을 보기 힘들어서가 아니라 서유가 곧 영원히 떠날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정가혜의 몸이 벽을 따라 천천히 미끄러지더니 두 팔로 다리를 부둥켜안은 채 바닥에 웅크리고 앉았다. 마치 세상에 버려진 사람처럼 가엽기 그지없었다.주서희는 의사들을 거닐고 진찰을 돌다가 그런 정가혜를 발견하고는 의사들을 먼저 보내고 그쪽으로 걸어가 정가혜를 일으켜 세웠다.“정가혜 씨, 괜찮아요?”정가혜는 멍해서 고개만 저었다.주서희는 퉁퉁 부어오른 그녀의 눈을 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정가혜 씨, 인명은 재천이라고 가혜 씨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서유 씨 곁을 지키는 거예요. 그래야 후회가 안 돼요.”이 말에 정가혜는 끝내 정신을 차렸다. 어두웠던 동공에 한 줄기 빛이 생겼다.“서유... 얼마나 더 살 수 있어요?”한참 침묵하던 정가혜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주서희는 사실 그대로 말했다.“한주 정도 남았어요...”정가혜는 비틀거리더니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주서희가 그녀를 잡으며 타일렀다.“이럴 때일수록 가혜 씨가 잘 버텨줘야 해요. 절대 무너지면 안 돼요. 가혜 씨가 무너지면 서유 씨는 어떡해요.”정가혜는 반쯤 나간 정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내가 잘 버텨야 해요. 서유 걱정시켜서는 안 되지...”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피곤한 몸을 이끌고 병실로 들어갔다.그러더니 서유의 침대맡으로 걸어가 서유의 볼을 쓰다듬었다. 주서희는 이 모습을 창문으로 지켜봤다.따스한 햇살이 기구한 운명의 두 사람을 비춰주었다. 마치 온기로 그들을 녹여주려는 것 같았다.주서희는 그제야 서유가 왜 아껴서 모은 돈을 정가혜에게 모두 남겨주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서로 생명을 의지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주서희는 몇 년간 의지할 사람 없이 혼자 싸워온 자신을 떠올리며 살짝 서글퍼졌다.그녀는 시선을 늘어트리며 몸을 돌렸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온전히
정가혜는 꼬박 2시간을 울었다. 남은 눈물을 모두 쏟아낸 후에야 울음을 그쳤다.서유가 입꼬리를 올리며 그런 정가혜를 비웃었다.“내가 기억하는 우리 가혜 언니는 늘 굳센 모습이었는데, 울음보 기질도 있구먼.”정가혜는 서유와 디스전을 펼칠 기분이 아니었다. 그저 수심에 가득 찬 얼굴로 서유에게 물었다.“너 눈 안 보이는 거 주 선생님은 알아?”서유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몰라.”그러더니 한마디 덧붙였다.“인제 그만 신세 져야지.”이를 들은 정가혜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서유도 살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으니 눈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정가혜는 빛을 잃은 서유의 눈동자를 보며 무너져오는 멘탈을 단단히 부여잡고는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서유야, 심부전은 언제부터 시작된 거야?”정가혜가 알아본 데 의하면 심부전은 말기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바로 이런 상태까지 악화하는 케이스는 없었다.서유는 이씨 집안 사람에게 당하기 전부터 이미 심부전을 앓고 있었다. 또 중간에 무슨 일을 겪으면서 말기로 악화한 게 틀림없었다.서유는 이제 정가혜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아니면 정가혜는 그녀가 어쩌다 죽게 되었는지도 모르게 된다.서유는 겨우 정신을 붙잡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5년 전에 김시후의 형 김준혁에게 발에 두 번 걷어차였던 거 기억나?”정가혜는 무언가 떠오른 듯 물었다.“그 발길질에 심부전에 걸린 거야?”서유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의사 선생님이 심부전이 올 수도 있다고 하셨거든. 잘 보호하면 몇 년 더 버틸지도 모른다고. 근데 잘 보호하지는 못했나 봐. 심부전이 점점 악화하더라고.”서유는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정가혜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서유는 정가혜가 진정할 수 있게 손등을 토닥이더니 말을 이어갔다.“부산에서 한동안 치료 받았어. 부산에서 돌아와서 다 말해주려 했는데 그때는 네가 송사월을 죽이겠
서유가 송사월을 탓하지 말라던 말이 떠올라 정가혜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지나치고는 물 뜨러 갔다.김시후는 문 앞에 선 채 침대에 누운 작고 가녀린 서유를 바라보며 눈물이 차올랐다.그는 최대한 몸을 떨지 않으려고 주먹을 불끈 쥐고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침대맡으로 다가갔다.앞이 보이지 않는 서유는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자 가혜가 돌아온 줄 알고 손을 내밀어 옷깃을 잡으려 했다.“가혜야...”옷깃을 잡기도 전에 크고 기다란 손이 그녀의 손을 감쌌다.그녀의 손을 꼭 잡은 그 손은 살짝 떨고 있었다. 김시후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어떻게 말할지 몰라 그저 그녀의 손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서유는 그 손이 남자의 손이라는 걸 알아채고는 머릿속에 이승하의 차갑지만 잘생긴 얼굴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서유는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불렀다.“사월아...”김시후는 그녀가 아직 자신을 알아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알아보고 나서도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무너졌던 멘탈에 죄책감까지 더해졌다.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더니 침대맡에 앉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서유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위부터 아래로 그녀의 얼굴을 열심히 그렸다.서유는 그런 김시후를 밀쳐내지 않고 만지작거리게 내버려두었다. 마음은 호수처럼 고요하기만 했다.한참 지나서야 김시후는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서유야...”그는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치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부르는 것처럼 처절하면서도 미련이 가득했다.“응.”서유가 대답하더니 되물었다.“왜 돌아온 거야?”김시후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냥 마음이 답답해서, 너 보러 온 거야...”그는 요 며칠 마음이 너무 어수선했다. 무슨 일이라도 날것처럼 심장이 벌렁거렸고 그녀를 찾아오고 싶은 충동을 잘 억제할 수가 없었다.아파트로 찾아가 밤새워 기다렸지만 문을 열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서유와 정가혜에게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기에 주서희를 찾는 수밖에 없었다.
김시후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전에 왜 그렇게 모질게 말했는지 말이다.그녀의 죽은 뒤 모습을 보고 그가 슬퍼하고 자책할까 봐 그를 쫓아낸 것이었다.사실 서유는 늘 그대로 변한 적이 없었다. 죽을 때까지 그를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그녀가 이승하를 사랑해서 자신을 그렇게 못되게 대하는 거라고 생각했다.깊은 죄책감이 그를 집어삼켰다. 그녀의 손을 잡은 손이 자기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렸다.서유는 그의 무력함을 느끼고 다시 손을 내밀어 그의 손바닥을 꼬집었다.“사월아, 이제 가면 안 돼?”김시후는 손을 내밀어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서유야, 이번엔 네가 뭐라 해도 안 가. 끝까지 네 옆에 있을 거야. 영원히 네 옆을 지킬 거라고...”영원이라는 말은 그녀가 감당하기에 너무 무거운 말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상처 주기 싫었다.그녀는 가슴이 답답한 듯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그에게 말했다.“사월아, 나 더 이상 말할 힘이 없어. 눈 좀 붙일게.”김시후는 그런 그녀가 너무 마음이 아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일단 좀 자. 내가 옆에 있을게.”그는 혹시나 그녀가 자신을 내쫓을까 봐 조심스럽게 말했다.서유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눈을 감았다.김시후는 참대맡에 앉아 가만히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그녀가 깊은 잠이 들고 나서야 그는 핸드폰을 꺼내 소준섭에게 전화를 걸었다.원장실에서 주서희를 귀찮게 하던 소준섭은 김시후가 걸어온 전화를 보고는 멈칫했다.저번에 김시후에게 문자를 보내 설명했지만 김시후는 답장이 없었다. 그런 김시후가 먼저 찾아왔으니 소준섭은 조금 기뻤다.그는 주서희를 놓아주더니 전화를 받았다.“시후야, 어쩌다 전화를 다 하고?”김시후가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심부전, 고칠 수 있어?”소준섭은 김시후의 질문을 듣고 바로 그가 누구를 말하는 건지 알아챘다.“적합한 심장은 찾았고?”김시후는 무력감이 몰려와 꼭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