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태진을 본 순간 서유는 심장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두려움과 긴장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쳐왔다.“임, 임 대표님...”겁을 먹은 서유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고 목소리도 떨렸다.임태진은 그녀의 겁먹은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서유 씨, 오랜만이네.”서유는 온몸을 떨고 있었지만 억지로 침착한 척했다.“임 대표님, 무슨 일로 절 찾으러 여자 화장실까지 오셨죠?”임태진은 살짝 웃은 듯했다. 그리고 그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별거 아니야. 그냥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그는 말을 마친 뒤 마스크를 벗어 십여 바늘로 꿰맨 자신의 입을 보여줬다.촘촘한 바느질 자국을 보고 있으면 소름이 돋았다. 서유는 겁을 먹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그러나 임태진은 전혀 개의치 않는 건지 서유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이리 와.”서유는 고개를 저었다. 다가가기는커녕 오히려 몸을 돌려 옆 화장실로 달려갔다.그러나 임태진의 뒤에 있던, 손에 야구 배트를 든 경호원 두 명이 곧바로 그녀를 뒤따랐다.그들은 서유의 앞길을 막더니 양쪽으로 그녀의 팔을 고정해서 그녀를 임태진의 앞으로 데려갔다.경호원들에게 제압당한 서유는 아주 굴욕적인 자세로 임태진의 발치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서유 씨, 여전히 도망을 잘 치네.”임태진은 음험한 얼굴로 웃더니 고개를 숙여 서유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어디로 도망칠 수 있겠어?”임태진은 소름 끼치게 웃더니 험악한 눈빛으로 서유를 물끄러미 바라봤다.“서유 씨 덕분에 난 이제 팔도 다리도 못 써. 심지어 입까지 이 꼴이 됐지. 내가 서유 씨한테 어떻게 감사해야 할까?”임태진은 마지막 한 마디를 씹듯이 내뱉었다. 마치 서유를 갈가리 찢어놓고 싶다는 듯이 말이다.서유는 그의 모습에 겁을 먹고 덜덜 떨었다.“임, 임 대표님.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모르겠다고?”임태진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의 미소가 더욱 오싹해졌다.“서유 씨가 나한테 계약서를 넘긴 날, 난 모르는 사람들을 만났어. 그들 중에서 리더는 금색
서유가 잠깐 딴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임태진은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무릅쓰고 구두를 들어 발끝으로 서유의 턱을 쳐들었다.“천박한 년! 내가 지금 이 꼴이 된 건 다 네가 사람을 시켜서 한 짓 때문이야.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제대로 감사 인사를 해야 하지 않겠어?”서유는 조금 전 임태진의 노여움을 눈치채지 못했었다. 그러나 억지로 고개가 들려 그를 보게 되었을 때, 그제야 임태진의 눈빛에서 활활 불타오르는 분노를 보아냈다. 순간 숨이 멎을 정도로 겁이 났지만 지금은 겁먹을 때가 아니었다. 서유는 냉정해지려고 이를 악물며 애썼다.“임 대표님, 뭔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요. 전 사람을 시켜 임 대표님을 해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가면을 쓴 남자도 몰라요...”서유가 그 남자를 시켜 자신을 해치려 했다고 임태진이 의심한다고 해도, 그 남자와 아는 사이라는 걸 인정할 수는 없었다.게다가 서유는 그 남자에게 임태진을 혼내라고 지시한 적이 없었다. 그녀 역시 이튿날 기사를 보고 그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그리고 서유 또한 피해자였다.“모른다고?”임태진은 시치미를 떼는 서유의 모습에 음험하게 웃었다.“하하...”기괴하고 음산한 웃음소리에 서유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그녀는 주먹을 쥐더니 이를 악물고 부인했다.“그 가면을 쓴 사람이 임 대표님을 공격했다는 건 절대 평범치 않은 인물이란 걸 의미합니다. 저 같은 출신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대단한 사람을 알겠어요...”임태진은 여전히 입꼬리가 올라간 채 음산하게 웃고 있었다.“예전처럼 말은 잘하네. 하마터면 또 믿을 뻔했어. 하지만 이번에는...”그는 잠깐 뜸을 들였고, 노여움 가득한 눈빛에서 순간 지독함마저 뿜어졌다.“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는 그 한마디를 내뱉은 뒤 서유를 힘껏 걷어찼다.발에 차여서 바닥에 쓰러진 서유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경호원이 야구 배트로 서유의 등을 힘껏 내리쳤다.엄청난 통증이 등에서 천천히 퍼져나갔다. 너무 아픈 나머지 서유는
아팠다.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호흡하는 것마저 힘겨울 정도로 아팠다.그러나 임태진은 봐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그는 두 경호원에게 명령해 서유를 세면대 쪽으로 밀치고는 음흉한 얼굴로 웃으며 두 경호원을 바라보았다.“내가 유일하게 아쉬운 게 너랑 자지 못했다는 거야. 하지만 현장에서 라이브로 감상하는 것도 꽤 자극적일 것 같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그 말은 몸에서 느껴지는 통증보다 더 살벌하게 느껴졌다.서유는 등 뒤의 상처도 신경 쓰지 못한 채 필사적으로 임태진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임 대표님, 전 정말 그 가면을 쓴 남자가 누군지 몰라요. 그리고 왜 최경욱 부대표님 얘기를 꺼낸 건지도 모르겠고요...”서유는 이 악물고 가면을 쓴 남자가 누군지 얘기하지 않았다. 그가 누군지 얘기한다면 임태진은 정말로 경호원들에게 그녀를 강간하라고 할 것이니 말이다.임태진은 그저 이런 방식으로 서유에게 가면 쓴 남자가 누군지 얘기하라고 압박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얘기하지 않는다면 그래도 살길이 있었다.임태진은 서유가 아주 똑똑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제대로 겁을 주지 않는다면 서유는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그래서 그는 두 경호원을 향해 턱짓을 하며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벗겨!”경호원들은 명령이 떨어지자 곧바로 서유의 옷을 벗겼다.겁을 먹은 서유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두 남자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그들은 양쪽으로 서유의 팔을 잡고 그녀를 세면대 위에 엎드리게 했다.“꺼져! 내게 손대지 마!”서유는 미친 듯이, 필사적으로 반항했다. 그러나 그녀가 반항할수록 임태진은 더욱 흥분했다.“빨리, 빨리 해!”“임태진 씨, 가면을 쓴 남자가 누군지 알려줄게요. 그러니까 이거 놔요!”서유는 유일한 카드를 쥐고 이를 악물며 분노에 차서 임태진을 향해 소리쳤다.그러나 임태진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우선 해버려. 해버려서 단단히 혼쭐을 내.”임태진은 예전에도 서유랑 자고 싶었지만 서유의 말발에 넘어가서 몇 번이나 그녀에게 손을
임태진을 향한 김시후의 시선은 섬뜩했다.“임태진, 감히 내 여자를 건드려? 죽고 싶어?”김시후는 서유를 안고 임태진 앞에 서더니 그의 휠체어를 걷어찼다.임태진의 팔, 다리는 치료 중이라 힘을 쓸 수가 없었기에 걷어차이자 바닥에 넘어져서 꼼짝하지 못했다.그러나 임태진은 전혀 개의치 않는 것처럼 고개를 돌리더니 바느질로 꿰맨 입으로 음험하게 웃어 보였다.“서유, 정말 대단하네. 김시후마저 꼬드긴 거야? 그러니까 나랑 자지 않으려고 했지...”김시후는 그의 말이 너무 역겨웠다.마치 누군가 그가 애지중지하는 보물을 더럽힌 것처럼 김시후는 순식간에 집요하고 무시무시하게 돌변했다.그는 미친 사람처럼 무거운 구두로 임태진의 입을 힘껏 짓밟았다. 그의 입을 으스러뜨리려는 듯 말이다.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기에 임태진은 결국 두려움을 느끼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시후는 들리지 않는 것처럼 힘껏 짓눌렀다.서유는 김시후의 모습에 곧장 정신을 차렸다.그녀를 찾아온 사람은 송사월이 아니라 김시후였고, 당시 그 또한 그녀의 심장을 이렇게 짓밟았었다.서유가 잠깐 딴생각을 하고 김시후가 임태진을 상대하는 사이, 아무도 그들의 등 뒤로 경호원들이 일어나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김시후는 아무런 방어도 하지 못한 채 경호원에게 야구 배트로 머리를 공격당했다.엄청난 충격에 김시후는 눈앞이 까매지면서 그대로 고꾸라질 뻔했다.그러나 서유가 떨어질까 봐 걱정되어 이를 악물고 버텨서 한쪽 무릎만 꿇었다. 그리고 품 안의 서유가 무사한 걸 보고 그제야 안도했다.“김시후, 괜찮아?”그의 목덜미에 팔을 두르고 있던 서유는 손이 축축한 걸 느꼈다. 팔을 풀어서 보니 온통 피투성이였다.서유는 깜짝 놀라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그의 팔을 잡고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너 다쳤어. 우리 얼른 여기서 떠나서 병원에 가자.”서유는 등을 다쳤을 뿐이지만 김시후는 머리를 다쳤다. 치명적인 곳인 데다가 피도 많이 흘렸으니 심하게 다쳤을 것이다.김시후는 고개를 젓더니 말없이 그녀를
“안 다쳤어.”서유는 고개를 저었다. 김시후의 머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는데 그에 비하면 그녀의 등에 있는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너 많이 다친 것 같으니까 일단 병원부터 가자.”서유의 손에는 그의 피가 가득 묻어있었다. 그 자극적인 빨간색에 서유는 저도 모르게 5년 전, 그가 차에 치였던 그날 밤을 떠올렸다.서유는 더욱 죄책감을 느꼈다. 두 번 모두 그녀를 구하려고 크게 다쳤으니 말이다. 서유는 김시후가 왜 이렇게 자신을 보호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그래.”김시후는 고개를 끄덕인 뒤 서유를 안은 채로 파티장을 가로질렀다. 몇몇 경호원들은 두 사람을 보고 서둘러 다가가 그들을 둘러쌌다.김시후가 심하게 다친 것 같자 그들은 그를 지키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연신 사과했다.그러나 김시후는 개의치 않아 하며 임태진을 경찰서로 데려가라고 분부한 뒤 빠르게 호텔 로비 쪽으로 걸어갔다.서유는 옷을 입고 있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김시후의 겉옷이 커서 그녀의 가녀린 몸을 감싸기에는 충분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유는 불편함을 느꼈다. 혹시라도 호텔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볼까 봐 그녀는 김시후의 품속으로 머리를 파묻었다.서유가 김시후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순간, 호텔 문 앞에 경호원들이 몰려들었다. 스무 명 가까이 되는 경호원들이 그들의 앞길을 막았다.김시후는 걸음을 멈추고 링컨 타운카에서 내리는 남자를 바라보았다.남자는 검은색 정장 위에 검은색의 코트를 걸치고 어둠 속에 서 있었다.마치 조각상처럼 그 자리에 서 있던 그는 음험하고 매서운 눈초리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김 대표님.”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서유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그녀는 이승하가 왜 이곳에 있는지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더 깊게 김시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이렇게 하면 이승하가 자신을 보지 못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이승하의 싸늘한 시선은 줄곧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김시후는 이승하에게서 적의를 느꼈지만 왜 그가 자신에게 적의를 갖는 건지 알지는 못했다.“이 대표님, 이
눈앞의 이승하는 그 말을 듣더니 눈빛이 더욱 차가워지고 어두워졌다.서유는 그런 이승하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아 서둘러 고개를 돌려 김시후에게 말했다.“우리 가자.”김시후는 그 말을 듣자 안색이 훨씬 좋아졌다.그들의 어떤 사이이든 상관없이 지금 이 순간 서유가 자신을 선택해 줬으니, 이것이 가장 좋은 결과였다.김시후는 무거운 마음을 정리하고 서유를 꼭 끌어안은 뒤 말 한마디 없이 이승하를 지나쳐 갔다.이승하는 고개를 돌려 서유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드리워진 지울 수 없는 암울함은 그녀를 꿰뚫을 것만 같았다.서유는 빠르게 눈을 내리깔며 그의 뜨거운 시선을 피하려고 했지만 이승하가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뼈마디가 분명한 그 손은 엄청난 힘으로 서유를 김시후의 품 안에서 빼냈다.서유는 끌려가게 되자 그대로 바닥에 넘어지게 되었다.다쳤던 등이 바닥에 쓸리면서 식은땀이 날 정도로 아팠다.그러나 서유는 아픈 걸 신경 쓸 새도 없이 팔을 뻗어 흘러내린 겉옷을 주우려고 했다.하지만 손이 옷자락에 닿기도 전에 이승하가 그것을 차버렸다그리고 곧이어 몸이 따뜻해지면서 검은색 코트가 그녀를 꽉 감쌌다.그 코트는 아주 커서 노출된 두 다리까지 덮었다.은은하게 느껴지는 옅은 향기에 서유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녀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자신 앞에 서 있는 이승하를 바라보았다.잠깐이지만 서유는 그가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공공연히 김시후에게서 그녀를 빼앗다니, 그들의 사이를 누군가 눈치챌까 두렵지 않은 것일까?“이승하 씨!”김시후는 서유를 거칠게 대하는 이승하의 모습에 화가 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는 이승하가 어떤 신분인지도 고려하지 않고 그에게 주먹질하려 했다.조금 전, 서유의 옷이 흘러내렸을 때, 이승하가 데려온 경호원들은 몸을 돌렸었다.그러나 김시후에게서 깊은 적의를 감지한 그들은 즉시 몸을 돌려 그를 막았다.김시후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스무여 명의 경호원을 혼자 상대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그는 곧 바닥에 제압당
그 말에 서유의 목덜미에 멈춰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이승하는 한 손으로 서유의 목을 그러쥐고 그녀를 들었다.엄청난 힘이 호흡 기관을 짓누르자 숨이 턱턱 막히면서 심장이 아팠다.심부전을 앓고 있는 서유는 충분한 산소가 필요했다. 만약 산소가 부족하다면 그녀는 죽게 된다.게다가 등까지 다쳐서 원래도 아파서 숨쉬기 힘들었는데 이제는 목까지 졸리고 있으니...숨 막히는 느낌에 서유는 심장에서 통증을 느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입을 뻐끔거리면서 공기를 들이마시려고 했다.그러나 큰 손은 그녀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고 목을 조르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서유는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옷자락을 잡으려 했지만 힘이 달렸다.그래서 그저 눈물을 머금은 채로 이승하를 바라보며 그가 자신을 놓아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이승하는 서유의 안색이 심하게 창백한 걸 발견했다. 마치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말이다. 그래서 그는 황급히 손에 힘을 풀고 그녀를 바닥으로 밀었다.숨 쉴 기회를 얻은 서유는 바닥에 엎드린 채로 심장께를 부여잡고 온 힘을 다해 한 글자를 쥐어짜 냈다.“약...”서유는 빨리 약을 먹어야 했다. 바로 산소를 들이마시면 죽을 수도 있었다.그녀는 매번 이승하를 만나기 전에 약을 아주 많이 먹어서 증상을 억제했다.수년 동안 이승하 앞에서는 딱 한 번 발작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이승하는 그녀가 돈 때문에 엄살을 부린 거로 여겼다.그래서 그 뒤로 서유는 자신의 심장병을 철저히 숨겼고 단 한 번도 그에게 알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서유는 이승하를 향해 손을 뻗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사정했다.“나... 심장병이 있어서... 제발... 살려줘요...”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다만 숨 막히는 기분이 너무 괴로운 탓에 저도 모르게 살고 싶었을 뿐이다.이승하의 서늘한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약이 어디 있는데?”약은...서유는 외출하기 전 약을 많이 먹어서 집에서 나올 때 가방을 챙기지 않은 걸 떠올렸다.그 점을 떠올린 서유는 갑자기 손에 힘이
아직 숨이 붙어있던 서유는 사력을 다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빠른 속도로 운전하고 있는 이승하를 바라보았다.“얼른... 약혼녀 쫓아가요... 나 신경 쓰지 말고...”그 말 한마디 하는 것도 힘들어서 말이 뚝뚝 끊겼다. 서유는 힘겹게 조수석에 기대어 거칠게 숨을 쉬었지만 숨 막히는 느낌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이승하는 눈살을 찌푸리며 서유를 바라볼 뿐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차가운 얼굴로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빠르게 병원으로 달렸다.서유는 그가 자신을 안고 빠르게 병원으로 향하자 힘없이 손을 뻗어 그의 흰 셔츠를 잡아당겼다.“난... 병원은 싫어요...”피부에 닿은 그녀의 손가락은 차가웠다. 마치 죽기 직전이라 체온이 빠르게 내려가는 듯해서, 이승하는 심장이 철렁했다.“착하지. 말 들어. 병원에는 산소가 있어.”그렇게 달래놓은 뒤 이승하는 품속의 그녀를 꼭 끌어안고 데스크로 향했다.그곳에서 순찰 중이던 병원 책임자는 이승하가 온 걸 보고 서둘러 그를 맞이했다.“이 대표님...”“주서희, 심장병이야. 얼른 산소 가져와.”흰 가운을 입은 주서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승하는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그녀는 이승하의 품에 안겨 숨을 쉬지 못하는 여자를 바라보더니 황급히 그를 옆 병실로 안내했다.“대표님, 따라오세요!”주서희는 병실 문을 열고 이승하가 서유를 병상 위에 내려놓게 했다. 그러고는 빠르게 산소마스크를 서유에게 씌워줬다.신선한 산소를 들이마시게 된 서유는 마치 물을 떠난 물고기가 갑자기 연못으로 돌아온 것처럼 다시 태어나는 기분을 느꼈다.서유는 산소마스크를 쥐고 필사적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그제야 심장에 다시 산소가 공급되었다.이승하는 서유의 얼굴에 약간의 생기가 돌자 바짝 긴장해서 굳었던 표정이 서서히 다시 차가워졌다.그는 서유를 검진하고 있는 주서희를 바라보았다.“상태는 어때?”주서희는 서유의 심장 소리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산소를 마셔서 좀 나아지긴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는 더 검사해 봐
그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열었다.“난 죽는 게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당신을 만난 후부터 죽는 게 그렇게 겁이 나더라.”죽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전 서계를 돌아다니며 의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는 끝내 얻지 못하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겁이 난 서유는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당신한테는 내가 있고 우리 하준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요?”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5년을 버텨온 그는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고 하느님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전해지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통증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칩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 다만 떠나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가야 하는데...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이 가장 걱정되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만큼 뜨겁고 짜릿한 느낌, 슬픈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뜨겁게 몸을 섞으며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쯤, 두 사람의 아찔한 행위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소중한 물건을 끌어안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유람선 안으로 들어온 희미한 달빛을 빌려 그가 세월의 흔적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다음 생에도 당신이 내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당신의 다음 생은 송사월한테 주기로 약속했었나?”아직 잠들지 않은 서유가 그의 가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생에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가면 나 절대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음 생에 당신 안 만날 거라고요.”그가 슬픈 표정을
그 당시 풋풋한 어린 소녀였던 연이는 심우주가 자신과 같은 학교에 간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교과서는 정말 내가 가져오지 않았어. 아마도 애들이 가져간 것 같은데 내일 학교에 가면 돌려주라고 할게.”연이도 하준이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는 짱이었다. 친구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지만 너무 인기가 많아서 여자아이들이 그녀를 짱으로 받들고 남자아이들도 하루 종일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꼬리를 흔들었다.반면, 심우주는 착실히 공부만 했고 가끔 연이의 괴롭힘에 그는 반격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였기 때문에 심우주는 그런 그녀가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제멋대로 하는 걸 사랑스럽게 지켜보았았다. 다들 오냐오냐하니까 연이는 학교에서도 늘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그 당시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던 심우주는 연이의 그런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잠시 후, 어른들에게 차례로 작별 인사를 마친 이하준이 차에 올라탔다. 늘 차갑기만 하던 아이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차에서 내려와 서유를 덥석 끌어안았다.“엄마, 몸 잘 챙겨요.”갑작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서유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하준아, 엄마 아빠는 집에서 우리 하준이 기다리고 있을게.”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손을 풀고 옆에 있던 이승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아빠, 제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아빠도 절 이길 수 없을 거예요.”입꼬리를 살짝 올리던 그가 손을 뻗어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남의 칼에 찔리기 쉬운 법이야. 자세를 낮추는 법을 배우거라.”아빠의 충고를 아이는 가슴 깊이 새겼다.“네, 그렇게 할게요.”이내 그가 허리춤에서 ‘S'라고 새겨진 금빛 칼을 꺼내 아이한테 건네주었다. “돌잡이 때 네가 잡은 칼이야. 이제는 네가 갖고 있어.”전에 소지섭한테서 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서유는 어쩔 수 없이 의사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문밖을 지키고 있던 소지섭은 의사가 떠나는 것을 보고 급히 물었다.“방금 연이랑 하준이가 와서 묻더라고요. 대표님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서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감기라고 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고개를 끄덕이던 소지섭은 자리를 떴고 그녀 혼자 덩그러니 문밖에 서 있었다. 그가 얼마나 더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지...어느 순간 갑자기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가 옆에 있어도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하준이 유학길에 오른 그날, 이씨 가문과 상씨 가문 사람들이 그를 배웅하러 왔다. 마치 하준이의 돌잡이 때처럼 정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른들의 모습이 이미 많이 변했고 아이들도 훌쩍 자란 상태였다. 서유와 이승하의 우월한 유전자만 이어받은 이하준은 10살밖에 안 된 나이지만 정교한 이목구비에 곧은 몸매를 가지고 있어 보기만 해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쳤다. 게다가 180 가까이 되는 아이큐를 가지고 있어 누가 봐도 엄친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특히 이연석은 흰색 스웨터 차림에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에 가방을 든 채로 계단을 내려오는 이하준의 모습을 보고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그는 옆에서 초등학생 교복을 입은 채 케이크를 뺏어 먹고 있는 오뚝이와 깡순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똑같은 10살인데 이게 뭐냐? 누구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명문 학교에 입학하고 누구는 아직도 초등학교나 다니고 있으니.”그 말에 정가혜가 그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거죠. 내가 몇 번을 말해요. 자꾸만 애들 다그치지 말라고 했죠.”이를 갈던 그가 두 아이 앞으로 다가가 케이크를 낚아채 입에 쑤셔 넣었다.“너희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로 일찍 진학 못 하면 아빠 진짜 가만 안 둬.”두 아이는
“승하 씨...”깜짝 놀란 그녀는 미친 듯이 핸드폰을 찾았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어떻게 의사를 찾아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애틋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바닥을 짚고 있던 손에도 덩달아 힘이 풀렸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입술이 파르르 떨려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당신... 왜... 그래요?”지난 10년 동안, 이승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내온 그녀는 거의 울어본 적이 없다. 잠깐 정신을 잃은 모습에도 이렇게 펑펑 우는 것을 보니 그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애써 두통을 참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를 품에 안고 소파에 쓰러지더니 세월조차 비껴간 잘생긴 얼굴을 살짝 치켜들었다.“깊게 잠이 든 것뿐이야. 왜 이렇게 겁을 먹어?”말을 하면서 손을 뻗어 눈물로 뒤덮인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부러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당신 요즘 살이 좀 오른 것 같은데.”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두 눈을 들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도 그렇죠. 어떻게 사람이 깨우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요?”맑고 깨끗한 그녀의 눈을 그는 차마 마주칠 수가 없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 그녀의 등을 눌러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얹었다. “바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야. 피곤할 때는 꿈을 꾸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거든.”그 말을 그녀는 당연히 믿지 못하였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왜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단단한 가슴 위에 얹혀있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미안해요. 당신 머릿속에 있는 칩을 꺼낼 의사를 찾아야 하는데...”겁이 났다. 이승하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자신을 목숨보다 더
지난주, 토론 대회에 나간다고 말하는 연이를 향해 이하준은 엄청 비꼬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연이는 씩씩거리며 이하준과 내기를 했고 뜻밖에도 그녀가 이기게 될 줄은 몰랐다.눈꺼풀을 내리깔던 하준이가 손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렇게 재잘재잘하더니 실력 한번 제대로 발휘했네. 축하해.”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같지 않고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아무튼 이번에는 네가 졌어. 그러니까 잊지 말고 돈 입금해.”이하준은 천천히 냅킨을 깔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밥 먹고 나서 줄게. 근데 누나...”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세등등하게 연이를 쳐다보았다.“누나 올해 열일곱이지? 아직까지 고등학교에 다니고. 수시 자격도 따내지 못했으니 수능 봐서 어떤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 정말 걱정이다.”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잘난 척하지 마. 내년에 나도 그 학교에 합격할지 모르니까.”이하준은 칼과 포크를 집어 들고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그럼 내 후배가 되는 건가?”화가 난 연이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그가 또 빈정거렸다.“내년에 학교에서 만나. 만나면 나한테 선배라고 부르는 거 잊지 말고.”“아악. 열받아 죽겠네.”연이가 가슴을 내리치더니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유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댄 채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이모, 하준이 쟤 정말 얄미워죽겠어요. 빨리 학교에 보내버려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요.”서유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막상 가고 나면 또 보고 싶을걸?”“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입을 삐죽거리면서 시선은 이하준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솔직히 이 녀석과 10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얄미운 동생인 건 사실이다.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웃음을 짓던 서유가 포크로 과일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연이는 과일을 받아먹으면서 이하준을 향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회사에서 돌아온 서유는 정원에서 칼자루를 쥔 채 아이한테 칼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다가가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아름다운 광경에 발걸음을 멈추고는 문 옆에 살짝 기대어 잔디밭의 크고 작은 그림자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아이한테 관심이 없었던 남자는 아이를 뛰어난 인재로 키우기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았다. 시간이 흘러 아이는 아빠를 존경했고 아빠를 많이 따랐다. 이승하는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빠였다. 그가 있었기 때문에 이 집이 따뜻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좋은 남자가 그녀와 아이의 옆에서 평생을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랐다. 잠시 후,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날카롭던 시선도 이젠 나이가 드니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세월마저 그의 얼굴을 그냥 스쳐 지나간 듯 그는 처음 봤을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검은색 셔츠와 긴 바지 사이에 흰색 허리띠를 두르고 있는 그의 몸이 석양 아래에 우뚝 서 있었고 그가 양쪽 허리춤에 손을 얹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머리 뒤로 잘 빗겨져 있었고 약간 고개를 돌리니 머리카락이 왼쪽으로 살짝 흔들렸다. 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서유한테 가까이 오라고 했다. 옅은 미소를 짓던 그녀는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소지섭을 지나치다가 손에 있던 손수건을 챙겨 앞으로 다가갔다. “여보, 허리 숙여요.”그가 허리를 약간 숙이자 서유는 발끝은 세우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었다.“저녁에 뭐 먹고 싶어요?”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잡자 가녀린 그녀가 그의 품에 쏙 들어왔다. “우리 서 대표님이 직접 요리를 하실 건가?”그의 장난에도 그녀는 화를 내지 않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그렇게 좀 부르지 말아요.”지난 5년 동안 서유도 많이 바삐 보냈고 자신의 건축 사무소까지 차렸다. 그러나 프로젝트를 많이 맡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남편과 아이를 돌봤다. 하지만 이승하는
그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칼, 총, 레이싱카, 배, 비행기 이것들 중에서 뭐부터 배우고 싶어?”하준이가 초롱초롱한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아빠, 저한테 가르쳐주시려고요?”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남자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론 지식은 이미 거의 다 배웠으니 이제부터는 호신술을 가르쳐 줄 생각이야. 나중에 날 대신해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하니까.”아이는 머리를 살짝 기울인 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아빠가 옆에 있는데 왜 제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벌써 두통 증상이 심해진 그는 머릿속에 있는 칩에 대해 아이한테 얘기하지 않았다.“당분간은 로봇 프로젝트 때문에 많이 바쁠 거야. 자주 자리를 비우게 될 테니까 내가 없는 동안에는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즘 아빠가 로봇 개발 중인 걸 알고 있던 이하준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열심히 배워서 엄마를 지켜줄 거예요.”아이의 약속을 듣고 이승하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일단 총 쏘는 법부터 가르쳐줄게.”하준이도 냉큼 그의 뒤를 따라 일어섰다.“세 살 때, 총을 가지고 놀다가 아빠한테 호되게 맞았던 적이 있었는데. 다시는 총을 못 잡게 할 줄 알았어요.”아이가 그 어릴 때의 일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는 네가 너무 어렸으니까 총을 가지고 놀지 못하게 한 거야.”“저 이제 겨우 10살인데요. 지금은 총 가지고 노는 거 안심하세요?”발걸음을 멈추던 그가 뒤돌아서 어느새 허리 높이까지 키가 훌쩍 큰 아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공부하러 해외로 가잖아. 돌아와서 배우면 그땐 이미 늦었어.”천재가 맞는 건지 하준이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학교의 입학 통지서를 받게 되었고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이국땅에서 다른 천재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게 되었다. 서재로 들어간 그는 10년 동안 사용하지 않은 총을 꺼내 하준이를 데리고 정원으로 향했다.한편, 이승하가 아이에게 사격을 가르치려 한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이연석은 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아닙니다. 그냥 기부하려던 거예요.”하지만 전문가는 그런 돈을 받을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의 고지식한 태도에 이연석은 화가 나서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그러니까 머리카락 한 올 없이 다 빠졌지! 다 선생님 고지식함이 다 빨아먹은 거예요!”전문가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같은 책상을 치며 맞섰다.“도련님, 제 지능을 모욕하는 건 참겠는데, 머리카락을 모욕하는 건 안 됩니다!”“그래요? 그럼 선생님 머리카락을 모욕하죠!”두 사람이 거의 싸울 뻔한 순간, 이하율 남매가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아빠, 우리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너무 배고파요...”이연석은 남매에게 화살을 돌리며 소리쳤다.“하루 종일 먹을 것만 찾고! 하준이처럼 간식 줄이고 책 좀 보란 말이야!”이하율 남매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아빠, 우린 아직 글도 다 못 읽어요. 책 보는 것도 재미없어요. 우리에겐 간식이 제일 재미있어요.”옆에 있던 전문가는 그 말을 듣고 자신감이 생겼다.“보세요. 이 두 아이가 어디 130과 148의 IQ를 가진 것처럼 보이시나요?”이연석은 할 말을 잃었다. 화가 난 그는 두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이 고집불통 대머리야! 이런 허접한 기관은 확 망해버려!”전문가는 속으로 생각했다.‘지금까지 수많은 IQ 테스트를 해봤지만, 이런 사람은 처음이야. 이럴 수가!’A시로 돌아가기 전, 이연석은 테스트 결과를 컴퓨터로 수정하고 새로 출력한 뒤 두 아이를 데리고 이승하를 찾아갔다.“형, 봐봐. 우리 애들도 IQ가 엄청 높아! 특히 내 아들, 148이야! 나중에 mensa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그 말을 듣던 이승하는 고개도 들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이하율에게 물었다.“오뚝아, 68 곱하기 42는 얼마야?”감자칩을 먹으며 손에 기름이 잔뜩 묻은 이하율은 손가락을 세며 계산하기 시작했다.3분 뒤, 그는 대답했다.“110!”순간 이연석은 참지 못하고 이하율을 향해 발길질을 하
흐트러진 커튼 너머로 달빛이 스며드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서유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해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크게 외쳤다.“여보, 성재 씨의 보디가드가 그러던데 그 사람이 망원경으로 우리 집을 자주 훔쳐본대요. 제발 여기선 그러지 마요.”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던 이승하는 짙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는 맞은편 별장을 한 번 흘겨보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리모컨을 집어 들고 불을 꺼버렸다.“걱정 마, 안 보여.”“하지만...”서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자 팔걸이에 손을 짚은 이승하가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리고 늑대처럼 그녀의 혀끝을 휘감아 그녀가 하려던 말을 그대로 삼켜버렸다.처음에는 저항하던 서유도 이승하가 한쪽 무릎을 꿇는 순간, 온몸이 떨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두 손톱으로 의자 등받이를 필사적으로 긁을 뿐이었다.예전에는 체력에만 의지하던 이승하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가 꺼낸 물건들은 서유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제발 그런 거 쓰지 마요!”서유가 간절히 부탁했지만,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여보, 참지 말고 소리 내봐.”서유는 도저히 소리를 낼 수가 없어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런 그녀를 본 이승하는 도구와 체력을 총동원해 강도를 높였다.“난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만약 방음이 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커튼이 창문을 가리지 않았다면, 서유는 지금 부끄러움에 혀를 깨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더욱 끔찍한 것은 그녀가 꼼짝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저 이승하에게 온전히 ‘당하기’만 했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두 번, 세 번...기진맥진한 서유는 뒤돌아 닫혀 있는 방문을 바라보며 간절히 바랐다.‘제발, 하준이가 문을 두드리며 배가 아프다고, 병원에 같이 가달라고 했으면...’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이하준은 수많은 문제 속에 갇혀 있었다.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