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연이를 붙잡고 얘기를 더 했고 툭툭 튀어나오는 연이의 말에 그녀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요즘 애들은 정말 대단하다니까. 아는 것도 많고 어찌나 총명한지.”이때, 안으로 들어오던 주서희가 그 말을 듣고 입을 열었다.“연이의 아이큐를 측정해 본 적 있었는데 가혜 씨보다 더 높았어요. 그러니까 어린애 취급하지 말아요.”정말이냐고 물어보려는데 주서희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엄마 아빠가 그렇게 훌륭한 사람들이었으니 아이도 분명 빠지지 않을 거예요.”주서희와 정가혜는 연이와 함께 레고 놀이를 한참 하다가 서유를 따라 소파로 향했다. 서유는 하인들에게 커피와 디저트를 내오라고 명한 뒤, 그제야 정가혜를 향해 물었다.“오늘 심형진 씨 부모님 뵈러 간 거지? 어땠어?”정가혜가 블루리도로 서유를 찾아온 것도 그녀와 이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였다.“선배 아버지는 별말씀 없으셨는데 선배 어머니는 내 출신과 직업을 얕잡아보셨어. 대놓고 뭐라 하신 건 아니지만 말 속에 숨은 뜻을 내가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두 사람 모두 고아로 자라왔으니 남들에게 홀대받는 느낌이 어떤 건지 자연히 알 수 있었다.“심형진 씨는 뭐래?”정가혜는 고개를 저었다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있는 자리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근데 화장실 다녀오고 나니까 선배 어머니의 태도가 확 바뀌었어. 아마도 선배가 말한 거겠지.”결과를 알고 싶었던 주서희는 확신하지 않는 정가혜를 보며 한마디 물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결혼할 거예요? 아니면...” 그녀는 손을 저었다.“선배 어머니가 날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시고 나도 그렇게 빨리 결혼하고 싶지 않아서 그 자리에서 결혼을 미루자고 했어요.”“심형진 씨도 동의했어?”“동의했어. 내 뜻에 따르겠다고 했어.”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쳤고 결국 주서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미루는 것도 어쩌면 잘된 일이에요. 두 사람이 사귄 지도 얼마 안 됐고 서로가
“서유 씨, 오랜만이에요.”차에 앉아 있는 강세은을 보고 서유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주위를 둘러보며 다른 수상한 차량이 따라오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강세은 씨, 지난번에 오빠와 함께 날 찾아왔을 때 육성재 씨와 마주치지 않았나요? 어떻게 또 이리 대놓고 찾아와요?”그녀가 선글라스를 벗자 매혹적인 눈이 드러났다.“차에서 내리지 않으면 육성재 씨가 볼 수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안심해요.”말을 마친 그녀는 조수석에서 포장된 선물 상자를 꺼내 서유에게 건네주었다.“지난번에 서유 씨를 납치한 일 때문에 늘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내 마음이니 받아줬으면 해요.”오래된 일이라 서유는 마음에 두지 않았었다. 그러나 강세은의 입장은 달랐다. 자신의 강요에 서유가 바다에 뛰어들었고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문제인데 어떻게 쉽게 넘어갈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서유가 그녀의 손에 죽었더라면 이승하는 이미 그녀를 산산조각 냈을 것이다. 그러니 서유가 살아있는 건 그녀의 목숨을 구한 것과 다름없었다.그 미안함과 고마움을 꼭 직접 전하고 싶었다. 서유는 손을 뻗어 선물 상자를 건네받았다.“세은 씨도 어르신의 핍박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세은 씨 탓만 할 수 없죠.”강세은은 고개를 흔들며 모든 책임을 떠안았다.“아버지는 서유 씨를 붙잡고 있으라고만 하셨지 바다에 뛰어들도록 강요하라고 하신 적은 없어요. 그러니 책임은 저한테 있는 거예요.”자책하는 그녀의 모습에 서유도 더는 뭐라 하지 않고 그녀의 앞에서 선물 상자를 뜯었다. 그 안에는 순금으로 만든 두 개의 동심결이 들어 있었고 햇빛을 받은 동심결은 금빛을 반짝였다. 서유는 동심결을 어루만지며 강세은을 향해 웃었다.“선물 마음에 들어요. 하지만 다시는 그 일 때문에 찾아와서 사과하지 말아요.”그녀의 해맑고 달콤한 미소에 강세은도 환한 미소를 지었다.“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에요
강세은은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차창 밖으로 내밀었다.“맹세해요. 또다시 서유 씨를 납치하면 그땐 내가 천벌을 받을 거예요. 죽어도 좋아요.”서유는 그녀에게 얼른 손을 내려놓으라고 했다.“맹세해도 세은 씨랑 같이 갈 수 없어요. 클럽에 가서 남자들 만난 걸 승하 씨가 알게 되면 나 진짜 죽을지도 몰라요.”이런 위험한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남들은 와이프를 무서워하던데 왜 서유 씨는 이렇게 남편을 무서워하는 거예요?”서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그 사람 무섭지 않아요?”“무섭죠.”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피식 웃었다.“가혜 연락처 줄게요. 정말 가고 싶다면 가혜한테 연락해서 제일 좋은 룸으로 남겨달라고 해요.”서유는 핸드폰을 꺼내 연락처를 보낸 뒤 고개를 들어 강세은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근데 거기 선수들은 같이 노래나 부르고 음식이나 먹여주는 것밖에 안 해요. 세은 씨가 원하는 건...”“나도 노래나 부르고 음식이나 먹으려고 했어요. 내가 뭘 하고 싶은 줄 알았는데요?”아무 말도 없이 그저 웃기만 하는 서유를 향해 강세은은 눈을 흘겼다. “결혼하더니 머릿속에 온통 이상한 생각뿐이네요.”“네?”서유가 변명을 하려던 그때 한정판 고급 차 한대가 다가왔다.조수석의 사람이 누구인지를 똑똑히 보았을 때, 강세은은 이미 액셀을 밟고 앞쪽의 산길로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한정판 고급 차와 차이를 벌렸고 산길에서 폭주하는 건 안전하지 않은 것 같아 반쯤 쫓아가던 차가 후진해서 서유의 앞에 멈춰 섰다. 차창이 내려오고 잘생긴 얼굴이 드러났다.“서유 씨, 방금 차 안에 있던 사람 말이에요. 지난번에 강도윤을 따라왔던 그 여자 맞죠?”그 질문에 당황하면서도 그녀는 겉으로 침착한 척했다.“강도윤이 누구인데요? 여기 왔었어요?”문을 밀고 차에서 내린 육성재가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로 걸어왔다.“시치미 떼지 말아요. 이곳에 온 게 한두
서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육성재는 안면인식장애가 있는 사람 아닌가? 어떻게 강세은을 한 번만 보고 얼굴을 기억할 수 있는 거지?어떻게 그의 의심을 풀어야 할지 깊이 고민하고 있을 때, 그가 갑자기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너무 가까이 다가오는 바람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서다가 실수로 돌멩이를 밟아 무게중심이 옆으로 쏠렸다.바닥에 쓰러질 때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받쳐주며 그녀를 잡아주었다.그의 힘을 빌려 겨우 자리를 잡은 그녀가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고마워요.”한편, 그가 그녀의 허리를 잡았던 손을 살며시 뒤로 숨겼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인지 아니면 너무 긴장해서인지 손에 땀이 가득 찼다.이때, 서유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방금 온 여자는 정말 이지민 씨였어요. 못 믿겠으면 지금 바로 전화할게요.”그의 시선은 시종일관 그녀의 잘록한 허리에 있었고 머릿속에는 온통 방금 그녀를 껴안던 장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손가락이 스친 곳은 부드럽고 부서질 듯 가는 그녀의 허리뿐만이 아니었고 향긋한 그녀의 긴 곱슬머리도 그의 손끝에 닿았었다. 부드러운 머릿결이 손끝을 스쳐 지나가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설렜고 잠깐이었지만 푹 빠져들게 되었고 손을 놓기가 싫었다. 머릿속에 이런 장면들이 반복되어 서유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그를 향해 손을 흔들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네? 방금 뭐라고 했어요?”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내 얘기 하나도 안 듣고 있었어요? 그런 것도 모르고 난 또 열심히 설명했네요.”“무슨 설명이요?”그녀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육성재 도련님, 지금 괜히 트집 잡는 거죠?”그제야 그는 자신이 S 조직의 행적을 조사하러 왔다는 것을 떠올렸다. 서유 때문에 마음이 복잡해진 그는 순간적으로 그녀가 못마땅하였다.“나한테서 멀리 떨어지라고 했죠?”“그쪽이 먼저 다가온 거거든요. 내가 일부러 다가온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뭐라 그래요? 육성재 씨가
한편, 강세은의 방문 소식을 듣고 CCTV를 켠 이승하는 육성재와 서유의 모습을 보고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내를 바라보는 육성재의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설마 정말 그의 아내를 좋아하게 된 걸까?의자에 앉아 턱을 괴고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그가 강세은에게 전화를 건 뒤 또 이지민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내 육성재의 망원경에 강세은의 차가 나타났고 이번에는 눈꼬리가 올라간 여우 눈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그가 흥분된 표정을 지으며 망원경을 내려놓고 그녀를 잡으려 가려는 찰나 여우 눈을 가진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카메라 속 그 얼굴은 여우 눈을 하고 있었지만 그가 전에 본 모습은 아니었다. 네이버 창에 이지민을 검색해 사진을 확대하여 망원경에 있는 사람과 비교해 보았다. 사진 속의 사람은 옅은 화장을 하고 있었고 망원경 속의 사람은 짙은 화장을 하고 있었지만 같은 사람이었다.설마 내가 정말 잘못 알아본 걸까?망원경을 들고 차 번호판과 옷을 자세히 확인해 보니 아까와 똑같았다.같은 사람이라면 왜 그를 보자마자 도망간 것인지?도둑이 제 발 저린 게 분명하다. 그가 의심하고 있을 때, 차의 주인은 경비원에게 물건을 건네주고 방금 전과 똑같이 빠른 속도로 산길로 달려갔다. 설마 그저 운전 습관인 걸까? 그가 오는 것을 보고 도망친 게 아니란 말인가?이승하의 속임수에 육성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다시 망원경을 들고 보는데 마침 이승하가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정원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는 몸을 옆으로 돌리고 싸늘한 눈빛으로 맞은편은 훑어보았다. 차가운 눈이 카메라에 잡히자 육성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한테 미안한 일이라도 한 듯 재빨리 망원경을 내려놓고는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 말아야 할 생각을 한 건 사실이니까. 이승하는 시선을 거두고 차가운 표정을 지은 채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한편, 거실에서 설계도를 구상하던 서유는 그가 들어오
그녀는 대꾸도 안 하고 그를 밀어내지도 않고 이유에 대해 묻지도 않았다. 그저 반응조차 없이 그릇에 국을 담았다. 완전히 무시당한 이승하는 그제야 자신의 냉담한 태도에 그녀가 화가 났다는 걸 알게 되었고 연신 사과했다.“미안해. 잘못했어. 그러니까 제발 나 못 본 척하지 마.”그녀는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고 당황한 그는 그녀의 손에 있던 국자를 낚아채고는 그녀를 벽에 밀치고 키스를 퍼부었다.“육성재가 당신 허리를 안고 있는 모습 보고 질투가 나서 그랬어.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그가 그녀의 빨간 입술을 베어 물며 중얼거렸다.“앞으로 다시는 안 그럴게. 당신 무시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이제 그만 화 풀어.”돌아오자마자 그녀에게 쌀쌀맞게 대한 건 육성재 때문에 질투가 나서 그런 것이었다.그러나 참 어이없는 질투였다. 그녀가 일부러 육성재의 앞으로 다가간 것도 아닌데.그의 성격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화가 나면 늘 곁에 있는 사람을 무시했다. 이 고질병은 제대로 고쳐줘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질투할 때마다 그녀에게 분풀이를 하게 될 테니까. 그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생각에 그녀는 그를 밀어내며 담담하게 말했다.“화 안 났으니까 얼른 가서 씻고 와요. 저녁 먹게.”여자들이란.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서도 얼굴에는 아직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는 걸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는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아직도 화 안 풀린 것 같은데.”그녀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내가 어떻게 감히 대표님한테 화를 내겠어요? 다 대표님 뜻에 따르는 거죠. 나한테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시가 박힌 그녀의 말을 그는 단번에 알아차렸다.“당신 무시한 건 내가 잘못했어.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럴게. 그러니까 제발 이러지 마.”그녀의 모습에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서유가 그를 밀어내며 입을 열었다.“그래요. 대표님이 하자는 대로 해야죠.”여전히 화를 내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마음이 조급
부엌에서는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거실에 앉아 있는 남자는 안절부절못하였다.마침 당고머리를 한 채 감자칩을 안고 뛰어 내려오는 연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웬일로 손을 뻗어 아이를 향해 손짓했다.“지연초, 이리 와봐.”간식을 몰래 먹다가 들킨 줄 알고 아이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감자칩을 뒤로 숨겼다. “저 조금밖에 안 먹었어요. 벌 주지 마세요.”하지만 그는 지금 아이가 간식을 얼마 먹었는지에 대해 전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가 연이를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이모부 한 가지만 도와주면 벌하지 않을게.”그제야 연이는 통통한 다리로 그의 앞으로 달려왔다. “말해요. 제가 무슨 일을 도와드리면 되는 거예요?”주방 쪽을 훑어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이모한테 가서 이모부 칭찬 좀 해줘.”아이는 단번에 눈치챘다.“이모부, 우리 이모 화나게 한 거예요?”아이를 힐끗 쳐다보다니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쓸데없이 묻지 말고.”아이는 손을 뻗어 자신의 당고머리를 만지며 씩씩거렸다.“지금 저한테 부탁하시는 입장에 너무 사나운 거 아니에요? 안 도와줄 거예요.”그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하게 아이의 손에 든 간식을 쳐다보았다.“나한테 벌받을 거야? 아니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할 거야? 선택해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던 아이는 그 말을 듣고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이모부, 진짜 미워요.”그는 전혀 개의치 않아 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나 미워하는 사람 많아. 너 하나쯤 더 생긴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이모부라는 사람과 대화하면 화가 날 일밖에 없는 듯했다. 하필 그한테 꼬투리까지 잡혔으니 정말 괘씸했다. 연이는 이를 악물며 들고 있던 감자칩을 그에게 건네주었다.“도와드릴 테니까 감자칩 잘 지키고 계세요. 일이 해결되면 그땐 저한테 직접 먹여 주세요.”씩씩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감자칩을 하인에게 던졌다.“가져다 버려.”아무것도 모르는 연이는 부엌으로
밤 열 시가 다 되어서야 서유는 연이의 방에서 나왔다. 에스컬레이터 옆에 있던 그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녀를 껴안고 밖으로 나가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가혜 씨 클럽에 가고 싶으면 나랑 같이 가. 응? 이제 그만 화 풀어.”마치 억울한 일을 당한 것처럼 남자의 목소리는 풀이 죽어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혼자 갈 거예요.”그녀를 안고 있던 손이 갑자기 굳어졌고 잘생긴 얼굴에 그늘이 졌다. “당신도 알잖아.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그렇게 사랑해서 화날 때마다 나 무시하는 거예요?”그녀의 물음에 그가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고치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야.”남자는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다시 한번만 기회를 줘.”마음속 방어의 벽이 점차 무너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간신히 참았다.“세은 씨랑 약속했어요.”그의 안색이 점차 어두워지더니 그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얼굴을 한참 동안 쳐다보던 그가 그녀를 내려놓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재로 돌아갔다. 문이 쾅 닫히는 순간 그녀의 심장도 덩달아 덜컹 내려앉았다. 화가 난 그의 모습은 역시 무서웠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수가 없었던 그녀는 소지섭을 불렀다.차가 정원을 나선 후, 소지섭은 노파심에 몇 번이나 그녀를 설득했다.“사모님, 이 늦은 시간에 클럽이라니요? 대표님께서 아시면 난리 나실 텐데...”그가 언짢아할 거라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 또한 참을 수가 없었다.“그저 시늉만 하는 거예요. 절대 허튼짓 안 해요.”말려도 소용이 없자 소지섭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백미러를 쳐다보았다. 마침 뒤편에서 고급 차 십여 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왔다. 소지섭은 고개를 저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만 터진 꼴이다. 운전기사만 재수가 없게 되었으니...한편, 서유와 강세은은 VIP룸에서 만나 먹을 것을 잔뜩 주문했다.정가혜는 시간이 날 때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