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심한 밤, 차 한 대가 병원에서 출발하여 외곽에 있는 한 폐쇄된 낡은 공장 밖에 멈추었다.구승훈이 발을 들어 작업장 문을 걷어차고 들어가자, 안에서는 분에 겨운 욕설이 한창이었다.“그 빌어먹을 년이 내 딸을 해치고 나까지 모함했어! 너희들이 정경유착까지 해서 날 이렇게 만들어? 그년은 벌 받을 거야, 내가 나가면 그년 죽여버릴 거야!”구승훈은 약간 뻣뻣해진 손목을 좌우로 회전하며 바닥에서 나무막대기를 집어 들어 무게를 짚어보고는 다른 사람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막대기를 휘둘러 남자의 정강이를 한 대 세게 내리쳤다.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폐기된 작업장 안에서 메아리쳤다.구승훈은 몽둥이를 버리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누가 그러라고 시켰어?”그 남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구승훈을 쳐다봤다.“그 여자가 내 딸을 해쳤어. 분명 그 여자가 먼저 그런 거라고. 그래서 내가 그냥 좀 밀쳤는데, 그것도 안 돼?”류덕구 서장은 옆에 서서 머리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대로 때려서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그도 난처하게 될 판이다.“구 대표님, 저희도 오늘 하루 동안 취조했는데, 줄곧 이 말밖에 없습니다. 강하리 씨가 이 사람 딸과 합의를 안 하니까 홧김에 강하리 씨를 밀어버린 거라고요. 이것도 사실 말이 되긴 하거든요.”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서장은 그의 표정을 살피더니 서둘러 또 물었다.“혹시 의심 가는 상대가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말씀해 주세요, 저희가 조사해 보겠습니다.”구승훈은 오랫동안 침묵했다.“아닙니다.”말을 마치고 그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다음 날 아침이 되자 손연지는 병실에 와서 강하리의 몸 상태를 체크하고 괜찮은 걸 확인하고 나서야 퇴원 수속을 밟으라고 했다.그녀는 소파에 앉아 있는 어두운 낯빛의 구승훈을 보며 물었다.“구 대표님, 혹시 불편하시면 제가 하리 몸조리를 맡을게요.”구승훈은 짙은 눈매를 살짝 들어 올리며 약간 언짢은 말투로 대답했다.“다른 사람한테
구승훈은 그녀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병원 안의 숱한 사람들이 그들을 지켜봤다.강하리는 이런 모습으로 그들의 주목을 받는 게 좀 거북했다.“나 절로 갈 수 있어요.”구승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걸을 수 있는 게 확실해?”“네.”구승훈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내려놓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막 들어가려 할 때, 구승훈의 발걸음이 멈칫하였다.강하리가 고개를 돌려보니, 엘리베이터 안에 송유라와 안현우가 있었다.뜻밖에도 송유라의 팔목에는 거즈가 감겨 있었다.구승훈은 그걸 보고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어떻게 된 거야?”송유라는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며 대답했다.“괜찮아요.”안현우가 웃으며 말했다.“승훈아, 너 어젯밤 유라 씨가 전화했는데 왜 안 받았어? 어제 유라 씨가 다쳐서 우리가 데리고 병원에 왔잖아.”구승훈은 송유라의 거즈로 감긴 팔목에 시선을 떨궜다.“어떻게 다쳤는데?”송유라는 눈시울을 붉히며 새침해서 말했다.“그게 걱정되긴 한 거예요?”구승훈은 가볍게 웃었다.“말하기 싫으면 안 물을게.”“오빠!”두 사람은 이렇게 강하리를 사이에 두고 한마디씩 대화가 오고 갔고, 중간에 끼어 있는 강하리는 민망할 따름이었다.구승훈의 눈매가 부드러워진 걸 그녀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송유라의 팔목에 시선이 떨어질 때 그의 눈에 스치는 안타까움도 오롯이 그녀의 눈동자에 비쳤다.그의 품에 안긴 사람은 그녀인데, 그의 눈에는 온통 다른 여자에 관한 관심뿐이었다.그 순간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이것이 바로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의 차이구나...“대표님.”강하리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얘기했다.“내려줘요, 저 이제 걸을 수 있어요.”혼자 애쓰며 버티고 서 있을지라도, 그 둘 사이에 끼어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다.구승훈은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아마 송유라한테 자신이 다른 여자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 싫은 것인지, 결국 그녀를 내려놓았다.강하리는 벽에 겨우 버티고
송유라는 옆에 서서 눈시울을 붉혔다.“현우 씨, 그만 해요, 난 그저 강 부장님의 화가 좀 가라앉으라고 그런 거예요. 누굴 책임지게 하려고 그러진 않았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안현우는 눈살을 찌푸렸다.“유라 씨, 유라 씨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송유라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구승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강 부장님이 더는 화만 안 내면, 난 어떡해도 좋아요.”구승훈은 아까부터 계속 어두운 눈빛을 하고 안색이 매우 나빴다.그는 강하리를 쳐다봤지만, 그녀의 표정에서 타협할 의사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송유라 씨가 그렇게 사과하고 싶으시다면 하세요, 사과.”그녀가 말을 마치자 송유라는 어안이 벙벙하여 눈을 크게 떴다.송유라 뿐만 아니라 안현우도 멍하니 정신을 못 차린 듯 보였다.“무슨 말이에요, 그게?”강하리는 안현우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쳤다.“아까 안 대표님이 제가 송유라 씨 사과를 안 받아들인다면서요. 그러니까 사과하시라고요, 사과하시면 받아줄게요. 그리고...”그녀는 이번엔 고개를 돌려 송유라를 바라보며 말했다.“송유라 씨도 제가 화만 풀린다면 무엇이든 한다면서요. 그럼 사과하세요. 사과하시면 저도 화 풀릴 겁니다.”“강 부장님...”송유라는 강하리가 이렇게 나올지 몰랐다.“정말 제 사과를 받으실 거예요?”“그렇지 않으면요? 송유라 씨가 또 저한테 미안해서 자해하는 일을 더 벌이기 전에, 사과하시라는 건데, 이것도 송유라 씨를 위한 일이 아닌가요?”“강 부장님, 전 이미 다쳤어요. 더 이상 뭘 바라요?”송유라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그 모습이 얼마나 불쌍한지, 사람이라면 다 가서 그녀를 안아주고 싶을 만큼 마음을 측은하게 했다.그에 비하면 강하리는 악랄한 요부 같았다.그녀는 한 치도 물러설 기색이 없이 버티고 섰다.안현우가 옆에서 이제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구승훈의 팔을 당기며 말했다.“승훈아, 너 강하리가 유라 씨를 이렇게 괴롭히는데 보고만 있을 거야?”구승훈의 어두운 눈빛은 송유
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웃었다.“네, 꽤 통쾌하네요.”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입을 열었다.“송유라의 일은 이렇게 끝내자. 이제부터 다시 언급하지 마.”구승훈은 말속에 담긴 질책을 숨기지도 않았다.강하리는 처량하게 웃었다.“구 대표님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이런 말을 꺼낸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제가 송유라를 비난했다고 생각하세요? 송유라가 굳이 제 앞에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 필요까지 있었을까요?”구승훈의 표정이 많이 어두워졌다.“넌 비난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니야?”“그럼, 생각도 마음대로 하지 말라는 뜻인가요?”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하리는 마음이 불편했고 어색한 분위기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사실 그녀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걷는 것이 엄청 힘들었지만 구승훈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지 않아 그저 꾹 참았다.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더니 결국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아 올렸다.“저 혼자 갈 수 있어요. 대표님은 송유라 씨 만나러 가세요. 다쳤잖아요. 그것도 저 때문에. 저는 그 책임을 질 수 없어요.”구승훈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강하리, 송유라의 일은 이제 그만 얘기하자고 내 말을 이해 못 하겠어? 그리고 내가 널 안은 건 내 책임을 다할 뿐이야.”강하리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마침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도 침묵하며 굳은 얼굴로 그녀를 안고서는 차로 향했다. 차는 이미 다른 차로 바뀌어 있었다. 그자 자주 쓰는 차는 세차를 맡겼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길에서도 두 사람은 서로 아무 말도 없었다. 집에 도착한 뒤 구승훈은 또 강하리를 안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의 말 대로 자기의 책임을 다하는 것 같았다. 마음이 아프거나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그녀를 임신시킨 것이 자기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것뿐이었지 다른 뜻은 없었다.두 사람이 문 앞에 도착했을 때 구승훈이 문을 열기도 전에 문이 안쪽에서
하지만 그녀는 도저히 음식을 넘길 수가 없었다.“차라리 죽 같은 걸로 부탁해요.”“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끓여드릴게요.”도우미가 미역국을 들고 침실을 나오자 구승훈은 미간을 찌푸렸다.“안 먹어요?”“죽을 드시겠다고 하셨습니다.”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그럼, 죽으로 끓여주세요. 이제부터는 요리하기 전에 뭘 먹고 싶은지 먼저 물어보시고요.”“알겠습니다.”도우미는 재빠르게 대답을 한 뒤 부엌으로 들어갔다.구승훈은 꾹 잠긴 침실문을 바라보다가 결국 서재로 들어갔다.도우미는 강하리에게 야채죽을 끓여주었다. 강하리는 여전히 입맛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다 먹었다.그녀도 구승훈의 말이 맞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녀는 몸을 잘 챙겨야 했다. 자기 스스로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이 자기를 돌봐줄 거라는 기대를 할 수 있을까?구승훈은 언제나 현명하고 냉철했다.강하리는 씁쓸한 느낌이 들었지만 도우미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웃었다.“구 대표님께서 아가씨를 정말 잘 챙기세요.”강하리는 고개를 들어 도우미를 바라보았지만 그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정말 잘 챙겨준다면 그녀가 유산한 것을 보고도 어떻게 가만히 있었을까?그녀를 정말 생각해 주는 거라면 오늘 같은 상황에서도 망설임 없이 송유라의 편을 들었을까?죽을 다 먹은 뒤 강하리는 침대에 기대어 무의식적으로 아랫배를 만져보았다.그러나 그녀는 만지자마자 몸을 웅크렸다. 사실 임신하고 나서부터 유산까지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그저 아랫배를 자주 만지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그녀는 아랫배에서 손을 떼며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 마치 이것이 그녀의 마음속에 퍼지는 고통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시트를 움켜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눈물은 자기도 모르게 흘러내렸다.도우미는 그런 모습에 순간 당황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강하리는 심호흡하며 감정을 조절하려고 노력했다.“괜찮아요. 저 좀 쉴게요.”“네, 알겠습니다.”도우미는 다급하게 침실을
강하리는 마치 심장이 날카로운 칼에 찔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이 남자에게 자기가 더 이상 임신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말하면 마치 또 책임을 지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하지만 구승훈의 말은 날카로운 칼처럼 그녀의 심장을 찔러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너무 고통스러워 제대로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웠다.그녀는 심호흡하며 구승훈에게 미소를 지었다.“알겠어요. 그럴게요.”구승훈은 찌푸린 미간이 더 깊어졌다. 분명 그가 한 말이었지만 그녀가 대답하는 찰나 그의 마음 또한 더 불편해졌다.설마 정말로 다른 남자와 아이를 낳고 싶은 걸까?그의 어두운 눈빛이 강하리의 몸에 떨어졌다.“하지만 너무 좋은 생각은 하지 마. 요즘 남자들은 너와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널 반드시 사랑하는 건 아니니까. 이다음에 남자를 만날 때는 잘 보고 만나.”강하리는 웃었다.“적어도 아이를 낳게 하겠죠.”구승훈의 얼굴은 순간 더욱 굳어졌다. 한참이 지난 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그럼, 쉬어.”강하리는 눈을 감았다.“나가 줄래요?”구승훈은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왜? 내가 여기 있으면 너 쉬는 데 방해 돼?”“네.”강하리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대표님이 내 휴식을 방해하고 있어요. 구 대표님, 나가 주시겠어요?”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이런 강하리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녀는 마음속으로부터 그와 거리를 두는 것 같았다.그제야 그는 계약서로 그녀를 묶어두지 않았다면 이 여자는 반드시 멀리 숨어 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그는 강하리의 턱을 움켜쥐었다.“강하리, 얌전하게 굴어.”강하리는 웃었다.“이미 아주 얌전하게 있는 거 같은데요?”구승훈은 눈썹을 치켜떴다. 확실히 강하리는 얌전했다. 지난 3년 동안 그녀는 말대꾸조차 거의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이런 질문을 하면서 온몸에 가시를 세우고 있는 것 같았다.“더 얌전하게 굴어.”강하리는 구승훈을 바라보
강하리는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괜찮아. 그냥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힘이 있는 게 더 이상한 거야. 너 어젯밤에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알지?”강하리는 몰랐지만 차에서부터 출혈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구승훈은 너 잘 챙겨주니?”강하리가 대답했다.“응 잘 챙겨줘. 전문 도우미까지 구해줬어.”“어머.”손연지는 조금 놀랐다.“그래도 완전히 양심이 없는 건 아닌가 보네.”강하리는 웃었다. 비록 계약을 맺은 사이였지만 구승훈은 그래도 최선을 다하는 편에 속했다.그녀가 숨긴 것에 대해 그녀를 비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까지 고용해 그녀를 챙겨주었다.“집에서 푹 쉬어. 내가 시간 나면 너 보러 갈게.”“그래.”두 사람은 몇 마디 더 나눴고 전화를 끊기 전에 손연지가 한마디 덧붙였다.“맞다, 우리 고등학교 동창회 때면 너 몸도 거의 회복될 텐데 참석할래?”강하리는 당황했다. 지난번 단톡방에서 동창회가 열린다는 말은 확실히 있었지만 그 당시 그녀는 송유라의 일 때문에 짜증이 나서 무시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날짜를 정했을 줄은 몰랐다.“그러자.”강하리는 전화를 끊은 뒤 다시 잠에 들었다. 도우미가 깨우는 소리에 그녀는 잠에서 깼다.“아가씨, 일어나서 뭐 좀 드셔야죠.”강하리는 눈을 뜨며 물었다.“승훈 씨는 돌아왔어요?”도우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이런 시기에 그녀의 앞에서 송유라의 전화를 받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는 최대한 그녀의 체면을 생각해 준 것이었다.게다가 송유라가 다쳤는데 그는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의 첫사랑은 송유라였고 그는 순정파였다.오늘 병원에서 그녀를 집에 데려다준 뒤 바로 송유라와 함께 드레싱을 하러 가지 않은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강하리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네, 조금 있다가 나갈게요.”“네.”강하리는 겨우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아랫배와 허리에서 통증이 느껴졌고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녀는 도우미를 불러 부축해달라고
강하리는 구승훈이 그날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쪽에서 송유라가 계속 그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뜻밖에도 그는 밤에 다시 돌아왔다.“구 대표님, 돌아오셨어요?”도우미는 구승훈에게 물었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침묵한 뒤 다시 물었다.“좀 어때요? 밥은 먹었어요?”“네, 아가씨께서 조금이라도 드시긴 했습니다.”구승훈은 다시 고개를 끄덕인 뒤 침실 문을 열었다.방안에는 강하리가 손에 영어 원본 책을 들고 침대에 기대어 있었다.그녀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마침 구승훈의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구승훈은 조용히 침대 옆으로 다가가서 그녀의 손에 들린 책을 뺏었다.“너 지금 책 읽으면 안 돼. 요즘에는 보지 마.”강하리는 잠시 말이 없더니 대답했다.“알겠어요.”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차가웠고 여전히 그에게 무관심과 거리감을 보여줬다.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셔츠 단추를 풀더니 잠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씻고 나온 뒤 그는 서재로 향했다.잠시 뒤 그는 한 서류를 갖고 들어왔다.“읽어 보고 괜찮으면 사인해.”강하리는 서류를 살펴보니 재산 양도 계약서였다. 구승훈 명의 아래에 있는 별장 중에 하나를 그녀의 명의로 넘긴다는 것이었다. 서류를 들고 있는 강하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적어?”강하리는 고개를 들지 않고 쓴웃음을 지었다.“충분해요.”충분하다 못해 넘친다.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아이로 몇십억짜리 별장을 바꿔준다는 데 어떻게 감히 적다고 할 수 있을까?구승훈은 감정도 없는 냉혈인이었다. 하지만 이런 거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감사합니다. 구 대표님.”강하리는 마침내 고개를 들어 웃었다.구승훈은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바라보았지만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강하리, 웃고 싶지 않으면 웃지 마. 보기 힘들어.”그러나 강하리 얼굴에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일찍 자. 난
그런데 갑자기 진태형에게 친딸이 하나 더 생기고 그게 심씨 가문의 손녀일 줄 누가 알았겠나.이제 진시연의 처지가 어색해진 건 당연했고 사람들은 진시연을 보고 웃으며 인사를 나눈 뒤 곧바로 흩어졌다.진시연은 짙은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샴페인 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는 사람들의 의미심장한 시선을 못 본 척 걸음을 옮겨 구승훈에게 다가갔다.“구승훈 씨, 오랜만이네요.”구승훈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무심하게 와인 잔을 들고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대답하지도 않았고 그녀와 대화를 나눌 생각도 없어 보이자 진시연은 그의 옆에 서서 우울한 표정으로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구승훈 씨, 내가 F 대륙에서 야생동물에게 공격당했을 때 날 구해주고 밤새 업고 병원으로 가 치료받게 해준 거 기억나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그땐 개나 소나 다 구해줬을 겁니다.”진시연의 얼굴이 다소 일그러졌다.그녀는 오랜 세월 기억하고 있던 것이 구승훈의 입에서 개나 소나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우울한 눈빛을 감춘 채 말을 이어갔다.“그래도 저한텐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에요. 구승훈 씨, 우리 앞으로 잘 지내봐요, 네? 전 정말 그쪽이랑 잘 지내고 싶어요.”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진시연 씨, 진심으로 살려줘서 고마우면 나한테서 멀리 떨어져요. 내 아내가 날 오해하는 건 싫으니까.”진시연은 당황했다.“아내요? 두 사람 결혼해요?”구승훈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진시연 씨, 멀리하라고요. 못 알아들어요?”구승훈이 그렇게 말한 뒤 걸음을 옮겨 강하리에게 다가가는데 진시연이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그의 뒤에서 소리쳤다.“구승훈 씨, 강하리가 정말 좋은 여자라고 생각해요? 그쪽 잡고 놓아주지 않으면서 주해찬이랑 알콩달콩 지내는데 정말 하나도 신경 안 쓰여요?”구승훈은 걸음을 멈추고 얼음같이 싸늘한 얼굴로 돌아보았다.“진시연 씨, 멀쩡히 진씨 가문에 남고 싶으면 얌전히 있어요. 아니면 심씨 가문도, 나도 그쪽 무사히 B시에 남겨두지 않을 테니까.”진시연의 얼
강하리는 결국 구승훈이 보내준 드레스를 입었다.파란 드레스에 네크라인과 치맛단에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혀있어 여성스러우면서도 고상하고 품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오픈 숄더는 쇄골을 모두 드러냈고 새하얀 쇄골에는 투명한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달려 있었다.강하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진태형의 딸, 심씨 가문의 손녀라는 대단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 B시에 몇이나 되겠나.게다가...허리를 굽혀 강하리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리는 구승훈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구씨 가문이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 모두가 안다.비록 구승훈이 구씨 가문을 처참히 무너뜨렸지만 그의 손에는 구씨 가문의 재산 90%와 B시 문씨 가문의 모든 재산이 있으니 기존 구씨 가문보다 그 세력이 더 대단했다.모두의 시선이 여기로 쏠렸지만 구승훈의 눈에는 눈앞에 있는 여자만 보였다.몸을 살짝 굽혀 강하리에게 손을 내밀자 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에 자기 손을 얹었다.심준호가 선물한 드레스를 아무 말 없이 찢어버린 구승훈에게 조금 화가 났지만 개자식의 소유욕이 발동한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다.오히려 그런 그의 반응에 다시 예전 구승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그동안 그녀의 마음을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옅어지는 느낌이었다.구승훈의 눈가에 미소가 번지며 강하리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팔을 뻗었다.강하리는 그의 팔짱을 낀 채 사람들의 시선 아래 진씨 가문 저택으로 따라 들어갔다.“이게 우리 결혼식이면 얼마나 좋을까. 왠지 정말 결혼식 같지 않아?”구승훈이 강하리의 귀에 속삭이자 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았다.“나도 이게 우리 결혼식이었으면 좋겠어.”구승훈이 걸음을 멈칫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서두르지 마, 결혼식 할 거니까.”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진태형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강하리를 보자 눈을 반짝이며 이쪽으로 걸어왔다.“아빠.”강하리가 낮은 소리로 부르고 곧이어 구승훈도 그를
“언제 왔어?” 강하리가 구승훈을 바라보며 그의 빨갛게 충혈된 눈동자에 시선이 향했다.지난 며칠 동안 구승훈은 이곳에 머물지 않았다.회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요 며칠 구승훈은 많이 바빴고 모임이 끊이질 않아 근처에 미리 준비해 둔 별장으로 갔다.강하리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봤다.“지난 며칠 동안 잠은 잤어?”구승훈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품에 안았다.“잠을 못 자. 강 대표님이 와서 재워주면 안 돼?”강하리가 웃었다.“그래, 오늘 짐 챙겨서 그쪽으로 갈게.”구승훈은 멈칫하다가 이내 입꼬리를 피식 올렸다.쉽게 승낙하니 다소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원래 상처들은 거의 다 나았지만 그가 요즘 매일 복싱장으로 가서 속에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풀었기에 몸에 새로운 상처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강하리가 정말 오면 그는 괴롭기만 할 거다.아내가 옆에 있는 데도 안지 못하는 그 기분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정말 올 거야?”강하리가 웃었다.“왜, 내가 가는 게 싫어? 아니면 다른 여자가 있는 거야?”구승훈은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그럴 배짱이 있는 것 같아?”강하리는 그의 넥타이를 잡고 끌어당겨 허리를 굽히게 한 뒤 시선을 마주 보았다.“그러면 방 청소나 하고 나랑 연정이가 갈 테니까 기다려.”말을 마친 그녀는 구승훈의 넥타이를 놓아주고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구승훈은 문에 기댄 채 웃음을 터뜨리며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강하리를 거절할 수가 없다는 걸 인정했다.잠시 후 드레스룸에서 나온 강하리는 심플한 드레스를 입었는데도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다.하지만 구승훈은 그녀가 나오는 순간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보낸 드레스는 어딨어?”강하리는 머리를 뒤로 넘기며 무심하게 대꾸했다.“너무 더워서 시원한 걸로 바꿨어.”구승훈은 강하리의 등 뒤로 훤히 뚫린 구멍을 바라봤다.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위로 끌어올리자 뒤쪽의 아름다운 나비 모양의 뼈가 드러났다.허리까지 훤히 뚫린 디자인의 옷을 바라보는 구승훈의 눈빛이 어두
강하리의 입꼬리가 움찔했다.건너편 사옥에 새로 회사가 들어왔다는 건 아는데 에비뉴와 정안 그룹일 줄은 몰랐다.하지만 생각해 보니 이해가 됐다.그렇지 않고서야 구승훈이 왜 회사 근처 식당에 나타났겠는가.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연성으로 안 돌아가?”구승훈의 눈동자는 온통 그녀로 가득 찼다.“너랑 아이가 어디 있으면 나도 함께 할 거야.”강하리가 구승훈의 시선을 마주했다.“나도 꼭 B시에 있을 필요는 없어. JM의 업무는 어디서든 할 수 있으니까.”어쨌든 연성은 구씨 가문의 영역이었고 연성에 깊게 뿌리 박은 구씨 가문은 B시에서 그다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구승훈이 시선을 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하지만 네가 다시는 가족과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네가 연인이든 가족이든 둘 다 가졌으면 좋겠어, 자기야.”두 사람 중에 적어도 한쪽은 가족의 사랑을 받아야 하니까.강하리의 코끝이 갑자기 시큰해지며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예물도 도착했는데 그러면 결혼할래, 구승훈?”멈칫한 구승훈은 씁쓸함이 가슴에 밀려왔지만 그래도 얼굴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강 대표님, 그렇게 급한가?”강하리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나랑 결혼할 거야?”구승훈의 눈에 머금었던 미소가 점점 사라지더니 손가락이 강하리의 눈가에 닿았다.“자기야, 준비할 시간 좀 줘.” 강하리는 쓴웃음을 내뱉었다.“알았어, 기다릴게.”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곧장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구승훈은 복잡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회사 앞에 서서 얼굴을 찡그렸다.그가 돌아서서 길 건너편으로 걸어가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구승재는 진작 위에서 구승훈과 강하리가 함께 서 있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두 사람이 화해했는지 확인하려고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왔다.하지만 아래에 내려오자 형이 찌푸린 얼굴로 걸어올 줄이야.‘쯧... 아직 화해 못 했네.’“형, 하리 씨가 아직 용서 안 해준대?”구승훈은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눈가에 억눌린 짜증을 내비
하지만 구승훈의 숨김과 솔직하지 못한 태도는 강하리의 마음을 조금 불편하게 만들었다.구승훈은 강하리가 화가 났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뒤 강하리를 품에 안고 입을 열었다.“제 아내, 강하리에요.”강하리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자 구승훈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나지막이 말했다.“내 체면 좀 살려주면 안 돼, 여보?”강하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여자의 시선이 반짝이더니 강하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안녕하세요, 사모님. 전 구승훈 씨 담당 정신과 의사, 여나경이라고 해요.”강하리는 멈칫하다가 구승훈의 불면증이 떠올라 그를 슬쩍 보고는 이렇게 물었다.“이 사람 상태 어때요?”구승훈의 눈동자가 살짝 어두워지고 여자는 눈치껏 웃으며 말했다.“복잡한 경우라 치료 과정도 번거로울 수 있지만 제가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사모님.”강하리는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여자가 먼저 웃으며 말했다.“죄송하지만 전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그러고는 이내 자리를 떴다.여자가 가고 구승훈은 힘껏 강하리의 허리를 꼬집었다.“정주현이랑 밥 맛있게 먹었어?”강하리는 곧장 그의 손을 떼어냈다.“다른 여자랑 밥 맛있게 먹었어?”구승훈이 웃었다.“그래도 강 대표님이랑 먹는 게 맛있지.”강하리는 능글맞게 웃는 남자를 보며 문득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어젯밤 혼자 발코니에 서 있을 때처럼 왠지 이 남자가 홀로 버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구승훈, 당신 몸...”구승훈은 속으로 흠칫하며 조용히 강하리를 품에 안고 만족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강 대표님 걱정하는 눈빛을 보니 다 나은 것 같네.”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구승훈의 품에 기대어 안겼고 구승훈의 눈동자는 한층 어두워졌다.강하리가 걱정한다는 걸 잘 안다.예전 같았으면 걱정해 주는 그녀의 모습에 날 듯이 기뻐했을 텐데 지금 상황에서는 강하리가 알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지금은 감히 프러포즈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그 약은 그에게 시한폭탄과
강하리는 구승훈을 여기서 볼 줄은 몰랐다.더군다나 맞은편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앉아 있자 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시선을 돌렸다.구승훈의 정상적인 사교 활동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다가가 묻지도, 방해하지도 않았다.그런데 정주현이 그녀의 표정이 이상함을 감지하고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다가 눈썹을 살짝 치켜들고 강하리를 돌아보았다.“바람피우는 현장 목격한 건가요?”강하리는 다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아니요.”이런 면에서 강하리는 구승훈을 믿었다.다만 구승훈이 저 여성과 밥을 먹는 것이 그녀에게 숨기는 일과 관련이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을 뿐이었다.강하리는 사실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다른 사람들은 알아도 자신은 알면 안 되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연정이 사건 때도 구승훈은 노진우를 믿을지언정 그녀를 믿지는 않았다.강하리는 눈가의 상실감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고 정주현은 보기 드문 미소를 지었다.“여전히 저 사람에게 잘해주네요.”정주현의 말투에는 무의식적으로 약간의 서운함이 묻어났지만 그 역시 자신과 강하리 사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가지 않고 되물었다.“어떻게 지냈어요?”정주현의 얼굴에 번지던 미소가 갑자기 사라졌다.요즘 어떻게 지냈냐고? 굳이 한 단어로 설명하자면 엉망이다.사실 그동안 어떻게 버텼는지 그조차 모르겠다.정양철과 줄곧 사이가 돈독했던 그였고 정양철이 업무상 아무리 엄격하게 요구해도 그에겐 좋은 아버지였다.그래서 정양철이 그런 짓을 했다는 게 믿을 수가 없었지만 증거까지 나온 이상 믿을 수밖에 없었다.정주현은 애써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그냥 그렇죠. 산 사람은 계속 살아야 하니까. 그냥... 하리 씨 볼 면목이 없네요.”강하리는 잠시 정주현을 바라보다가 말했다.“그쪽이랑 상관없어요.”정주현이 웃었다.“그럼 뻔뻔하게 친구 해도 돼요?”강하리도 웃었다.“당연하죠.”정주현의 표정이 눈에 띄게 풀렸고 두 사람은 이
“당신 원하면 해.”구승훈은 심장이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자기야, 내일 침대에서 못 일어날까 봐 걱정되지 않아?”강하리가 웃었다.“할 거야?”숨이 멎은 구승훈이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았다.“아니, 우선은 강 대표님이 재워주는 걸 누리고 싶어.”말을 마친 그가 강하리를 안아 침대에 눕혔고 강하리는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잘 자, 구승훈.”구승훈은 웃었다.“잘 자, 자기야.”강하리는 구승훈의 품에 몸을 밀착했고 구승훈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녀를 꽉 안았다.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한 침실에서 강하리의 귀에는 구승훈의 심장 박동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두 사람은 더 말하지 않았다.고요한 방 안에서 구승훈이 고개를 숙여 강하리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사랑해.”강하리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눈을 떠 구승훈의 시선을 마주했다.“나도 사랑해.”언제 잠이 들었는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구승훈은 곁에 없었고 연정이도 누군가 안고 간 뒤였다.강하리는 침대에 앉아 구승훈이 누웠던 곳을 바라봤다.다소 구겨진 이불을 만지던 그녀의 손가락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릴게.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마, 구승훈.”구승훈은 바쁜지 강하리가 아래층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자리를 떠난 뒤였다.강하리도 굳이 묻지 않고 평소처럼 연정이에게 밥을 먹인 뒤 사무실로 갔다.회사에 도착했을 때 사무실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리시안셔스 꽃다발이 있었고 그녀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데 안예서가 뒤에서 은근하게 웃으며 말을 붙여왔다.“대표님, 곧 좋은 일 생길 것 같은데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굳어졌다. 구승훈은 그녀에게 프러포즈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그래도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오늘 일정은 뭐야?”안예서는 서둘러 강하리에게 하루 일정을 알렸고 고개를 끄덕인 강하리는 꽃을 옆으로 치웠다.안예서가 그녀를 따라 들어왔다.“대표님, 지난번에 제가 말씀드린 임명우 씨 기억하시죠?”강하리는
구승훈은 강하리의 입술을 깨물며 샤워기 아래로 그녀를 안고 갔다.머리 위로 쏟아지는 뜨거운 물은 달아오른 불을 끄기는커녕 오히려 더 견디기 힘들게 만들었다.“원해? 자기야, 말해봐.”구승훈이 턱을 잡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머릿속이 윙윙거리던 강하리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그녀가 깨물자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구승훈이 강하리를 들어 올려 벽에 밀쳤다.구승훈이 얼마나 그녀를 탐했는지는 모른다. 그저 모든 게 끝났을 때 강하리는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구승훈은 강하리를 안아 침대에 눕혔고 강하리는 몸을 뒤척이며 잠이 들었다.잠든 강하리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구승훈은 입술에 뽀뽀한 뒤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구승훈은 이미 흠뻑 젖어 있는 자기 셔츠 단추를 천천히, 그리고 차분하게 풀었다.단추가 풀리면서 그의 몸에 난 상처가 드러났다.최면은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았고 그는 점점 더 마음속의 난폭함을 참기 힘들어졌다.마치 잠깐의 고통만이 마음속 짜증을 잠시나마 잊게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구승훈은 무표정하게 웃옷을 벗고 샤워했다.차가운 물이 몸을 적시자 구승훈은 쓴웃음을 내뱉으며 자신의 욕망을 내려다보았다.그는 강하리를 원했다.하지만 지금 당장은 강하리가 기꺼이 응한다고 해도 그녀 앞에서 감히 옷을 벗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욕실에서 나온 구승훈은 침대에서 단잠을 자는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들고 뒤돌아 발코니로 갔다.휴대폰에는 노민준과 구승재에게 걸려 온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있었고 구승훈은 담배에 불을 붙인 뒤 노민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왜 또 갔어?”구승훈은 개의치 않는 어투로 대꾸했다.“효과 없잖아.”노민준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묻어났다.“효과가 없으면 치료 안 할 거야? 승훈아, 포기하지 마. 나도 포기하지 않을 거야.”구승훈은 담배를 한 모금 머금더니 알 수 없는 시간이 흐른 뒤 이렇게 물었다.“형, 확실하게 대답해 줘. 이 약으로 고칠 수 있어?”희망이 없다면 그도 더 발
“그래, 우리 연정이에게 완전한 가정을 만들어주자.”강하리는 구승훈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눈시울이 시큰거렸다.더 이상 주저하고 싶지 않았다.평생 이 남자와 얽혀야 할 운명이라면 차라리 빨리 서로를 곁에 붙잡아 두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삼촌이 말한 것처럼 서로 좋아하는 관계는 소중한 거니까.구승훈이 고개를 돌려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별장으로 갈까? 콘돔 한 박스 샀는데 써보지 않을래, 강 대표님?”강하리는 깜짝 놀라서 재빨리 뻔뻔한 남자를 밀어내려는데 구승훈이 순순히 물러날 리 없었다.“한 번만 하고 돌아가는 건 어때?”강하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뜨거워졌고 구승훈은 직접 그녀의 손을 잡아 그곳에 갖다 댔다.“느껴져? 널 본 순간부터 원했어.”강하리는 단번에 손에 닿은 물건을 알아차리고 화가 나서 물건을 콱 잡았다.“참아!”며칠 동안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와서는 그런 생각만 하다니, 어림도 없지!구승훈은 그녀의 귓불을 살며시 깨물며 옷 속으로 손이 파고들었다.“그러면 오늘은 내가 강 대표님을 모실게, 어때?”말을 마친 뒤 강하리에게 반응할 시간을 주지 않고 바로 입술을 막았다.남자의 민첩한 손놀림이 그녀의 몸 곳곳에 불을 지폈고 그가 그녀의 허리를 쓸어내릴 때쯤 강하리가 갑자기 그를 밀어냈다.“일단 먼저 돌아가.”구승훈은 웃었다.“알았어, 그러면 오늘 밤에 강 대표님 제대로 모실게.”그녀가 원한다는 듯이 말하는 상대에 강하리는 얼굴이 타는 듯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강하리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보았다.“젖었어? 어디 봐.”강하리의 얼굴에 또 한 번 홍조가 올라왔다.“닥쳐!”개자식!구승훈은 더 이상 그녀를 건드리지 않고 시동을 걸어 차를 몰고 나갔다.별장으로 돌아오자 걸음마를 배우고 있는 연정이가 보행기를 탄 채 달려왔고 구승훈의 곁에 도착하자 연정이는 작고 뚱뚱한 두 손을 쭉 뻗으며 구승훈을 향해 웅얼거렸다.누가 봐도 아빠에게 안아달라고 조르는 모습이라 구승훈은 연정이를 안아 볼에 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