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순간까지도 그는 그녀에게 일말의 희망도 주려고 하지 않았다.그는 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시종일관 그의 태도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매우 심플하면서도 단호한 대답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녀의 한 줄기 희망을 끊어버렸다.구승훈의 손을 꽉 잡고 있었던 그녀의 손은 천천히 힘이 풀렸다.“미안해.”강하리는 나지막이 말했다.누구한테 이 말을 한 건지 그녀도 알지 못했다.구승훈한테 한 말이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또 배 속의 아이한테 한 말이었을지도 모른다.그것도 아니면 그녀 자신한테 한 말이었거나.“미안해......”눈을 스르르 감으며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조용히 미끄러져 내려왔다.이쯤 되니 몸이 더 아픈지 마음이 더 아픈지 헷갈릴 정도였다.그저 찬 기운이 온몸을 적시고, 하체에서는 뜨거운 샘물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그녀의 입술은 더 하얗게 변해갔다.어떤 소중한 것이 그녀를 점점 떠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구승훈은 한 손으로 운전대를 꽉 잡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그 손은 천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텅 빈 손바닥이 처음으로 허전하게 느껴지며 마음마저 무거워졌다.그는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었고, 손등에는 핏줄이 불거졌다.컬리넌 차가 빛의 속도로 병원에 들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급정거했다.강하리를 차에서 안고 내렸을 때 그는 손바닥이 축축해지는 감을 비로소 느꼈다.새빨간 피가 그의 눈동자를 자극해 흔들리게 했다.어려서부터 어둠 속에서 살아온 그는, 지금까지 그 어떤 일도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할 거라 자부했다.하지만 이 순간 숨이 가빠져 오는 것만 같았다.그는 강하리를 안고 응급실로 뛰어 들어갔다.그녀를 의사에게 넘겨주고 나서야 그는 넋이 나간 듯 빨갛게 피로 물든 자기 손을 바라보았다.뒤따라온 구승재가 구승훈의 손에 묻은 피를 보고 놀라 눈을 껌벅였다.“형... 강 부장님이...”구승훈은 다시 아무런 감정 없는 얼굴로 구승재를 돌아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아마 유산한 거 같아.
“저 여자는 처음부터 내가 이 아이를 원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어. 날 속이지 말았어야 했다고.”구승훈은 말을 마치고 밖으로 걸어 나갔고, 구승재는 그의 뒤를 바짝 따라나섰다.“형,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강 부장이 형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녔는데, 형은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거야? 그렇다면, 왜 강 부장을 계속 곁에 두는 거야? 그냥 보내주지? 그럼 형도 송유라랑 잘 지낼 수 있잖아!”구승훈은 발걸음을 갑자기 멈춰 실눈을 뜨며 구승재를 흘겨봤다.“구승재, 네가 내 동생이라고 내 사생활에 간섭할 수 있다고 생각해?!”구승재는 말문이 꽉 막혔다.“형, 난 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 됐어, 솔직히 말할게. 난 강 부장을 형수처럼 생각했어, 어쨌든 송유라보다는 나은 것 같아.”구승훈은 그를 힐긋 쳐다보고는 입술을 약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응급실 밖.손연지는 부리나케 달려왔다.그리고 응급실 밖에 서 있는 구승훈을 보자 곧장 그리로 뛰어갔다.“어떻게 된 거예요? 하리가 왜 유산해요? 방금 저한테 전화했을 때만 해도 멀쩡했는데!”“구승훈 씨! 대체 왜 유산했냐니까? 걔가 이 아기를 얼마나 원했는데! 아니 왜, 왜 하리를 이렇게 만든 거야, 왜?!”“구승훈! 너 이 나쁜 새끼! 애를 안 가질 거면 네가 꿰매, 네가 정관수술을 받으라고! 네가 싸질러놓고 왜 하리가 이 고생을 해야 하는데! 이 개 쓰레기, 나쁜 놈아!”구승재는 손연지의 욕설에 적잖게 놀랐다.저도 감히 구승훈과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었다.그는 서둘러 앞에 막아서며 손연지의 팔을 붙잡았다.“당신 미쳤어?”“이거 놔, 내가 하리 대신해서 이 형편없는 쓰레기한테 욕 좀 퍼부어 주려니까!”구승재는 마구 몸부림을 치는 손연지의 허리를 힘껏 껴안고 한쪽으로 끌고 갔다.구승훈은 어두운 표정으로 손연지가 잡아당겨 흐트러진 옷을 정리했다.그리고 정리가 끝나자, 그는 손연지한테 눈길을 돌렸다.의외로 화난 얼굴은 아니었고, 그저 눈빛만 냉담했다
병실 안에서는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구승훈은 자세도 바꾸지 않은 채 그대로 문 옆에 계속 서 있었다.그 후 한참 지나, 안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가 멎자, 그는 그제야 손에 든 부서진 담배를 내려다보며 그걸 쓰레기통에 버리고, 또 새 담배를 꺼내 흡연 구역으로 걸어갔다.손연지는 퇴근 후에 바로 또 찾아왔다.병실에는 강하리 혼자 병상에 누워있었고, 그녀의 눈가에는 촉촉한 이슬이 맺혀있었다.그걸 보자 손연지는 억지스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사실 없어도 괜찮아, 오히려 잘 됐을지도 몰라... 너 혼자서 아줌마도 돌봐야 하고 애까지 돌보면 너무 힘들잖아.”강하리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안간힘을 다해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알아.”자신의 상황이 어떤지 그녀도 모르지는 않았다.아기가 지워진 게 더 좋은 일일지도 몰랐다.그렇지 않으면 태어나서부터 그녀를 따라 고생해야 하니까.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고통스러웠다.손연지는 그녀의 슬픈 표정을 보며 가슴이 아파, 애써 말머리를 돌렸다.“배는 안 고파? 내가 뭐 좀 사다 줄까?”강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 나 병원에서 얼마나 있어야 해?”“하룻밤 지내보고, 아픈 데 없으면 내일 아침에 퇴원하면 될 거야. 퇴원하면, 나랑 같이 갈래? 내가 네 산후조리 돌봐줄게.”“그래.”강하리는 지금 그 어떤 위로의 말도 듣고 싶지 않았는데 다행히 손연지는 하지 않았고 그저 그녀의 이불을 위로 걷어 올렸다.“왜 갑자기 유산하게 된 거야? 그전에... 통화하고 있을 때만 해도 괜찮았잖아.”손연지는 말하면서 눈시울을 약간 붉혔다.그녀조차도 이 아이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든데, 강하리는 오죽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강하리는 천장을 보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겨우 한마디 꺼냈다.“계단에서 누가 날 밀어서 넘어졌어.”손연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널 밀었다고? 누구야 그 사람? 난 구승훈이 널 이렇게 만든 줄...”그녀는 말하다가 멈췄다.강하리는 씁쓸하게 고개를
구승훈은 강하리를 부축하여 일어나 앉혀, 죽 한 그릇을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컨디션이 너무 안 좋은 탓인지, 그녀는 그릇을 제대로 쥐지 못하고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하였다.다행히 구승훈은 재빨리 그 그릇을 잡았고, 눈에는 보기 드문 측은한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왜 그릇도 못 받아?”말을 마친 그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먹여줄까?”“아니에요, 저 혼자 할 수 있어요.”강하리는 그릇을 다시 받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구승훈은 주지 않았다.그는 침대 옆에 앉아, 매우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강하리는 그의 시선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아이를 가지려고 한 건 제 선택이에요. 지키지 못한 것도 제 탓이고요. 대표님은 저한테 빚졌다고 생각할 필요 없어요.”그러자 구승훈은 그릇을 협탁에 올려놓고 손을 닦기 시작했다.굳어진 표정으로 휴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서 눈을 들어 입을 열었다.“강하리, 우리 사이는 공평한 거래 관계였어. 난 당연히 너한테 빚진 거 없고. 오히려 네가 임신을 숨겼고 계약을 위반했잖아.”강하리는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목구멍이 막혔다.한참 후에야 그녀는 자조하듯 입을 열었다.“네, 내 잘못이에요.”짤막한 몇 글자를 내뱉는 것이 그녀의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만 가능했다.그러고는 힘이 풀려 침대에 기대어 앉으며, 얼굴은 종잇장처럼 하얬다.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또 말을 꺼냈다.“하지만 어쨌든 네가 임신한 건 내 책임 맞아. 그러니까 널 이렇게 돌보는 거로, 그동안 너한테 소홀했던 거 보상하는 셈 치자. 미안해, 너한테 임신시켜 놓고 유산까지 하게 만든 거, 고생했어.”그는 말을 마치고 다시 그 죽그릇 들었다.강하리는 그의 미안하다는 들으면서 알 수 없는 감정이 턱밑까지 차올라 숨을 쉴 수가 없었다.그녀가 여태 원했던 건 그의 미안함이 아니었는데 말이다.하지만 인제 와서 무슨 말을 한들 소용이 있을까.아이가 이미 없어졌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눈가가 시큼해져 오는 걸 애써 참
구승훈은 별로 이 말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하리야, 넌 끝내자고 말할 자격이 없다는 걸 너도 잘 알 텐데. 임신한 사실을 속인 건 따지지 않겠지만, 그걸 빌미로 나한테 헤어지자고 말할 생각은 마!”그의 냉담한 말투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강하리는 씁쓸하게 웃었다.맞다. 그녀가 헤어지자고 말할 자격이 없는 거였지.둘이 사인한 그 계약서 내용에는 그녀한테 유리한 조건은 하나도 없이 그저 노예계약 같은 거였다. 그저 복종하는 것 말고는, 그의 앞에서 그녀는 아무런 자격도 없다.화를 낼 자격도 없고, 성질낼 자격도 없으며, 헤어지자고 말할 자격조차 없었다.“왜, 억울해?”구승훈이 물었다.“아니요.”강하리는 그저 웃었다.미친 듯이 발광하지도 않고, 그저 고스란히 슬픔을 받아들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듣는 사람조차 가슴이 답답해지게 말이다.화가 갑자기 치밀어 오른 구승훈은 그녀의 몸을 돌려 자신을 마주하게 했다.“너 애초에 그 애를 낳을 생각 했을 때부터,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 다 알아야 했던 거 아니야? 지금 와서 누구 보라고 이 청승맞은 얼굴인데?”그의 무정한 말들이 한 글자 한 글자 강하리의 마음속에 비수처럼 들어와 박혔다.그녀의 하얀 이마에 핏줄이 솟아올랐다.그리고 눈시울은 몹시 시큰시큰하고 입가도 잘게 떨리고 있었다.“승훈 씨, 당신은 마음이라는 게 있어?”마음을 가진 인간이라면 이런 말이 가능했을까.그러나 그 말에 구승훈은 가볍게 웃기만 했다.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그도 잘 몰라,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아마 없는 거겠지...그는 일어나 협탁 위에 놓인 담뱃갑을 집어 한 개비를 뽑아 입에 물었다.불은 안 붙이고 그냥 물고만 있었다.“하리야, 이 세상일들이 마음 갖고 되는 게 아니야. 네가 마음이 있으면 뭐 해. 애가 살아남기라도 했어? 그런 뜬구름 잡는 소리보다, 손에 쥐고 있는 돈과 권력이야말로 진짜라는 걸 알아야 해. 난 너처럼 마음이 없지만, 권력이 있고 힘이 있어. 그럼
야심한 밤, 차 한 대가 병원에서 출발하여 외곽에 있는 한 폐쇄된 낡은 공장 밖에 멈추었다.구승훈이 발을 들어 작업장 문을 걷어차고 들어가자, 안에서는 분에 겨운 욕설이 한창이었다.“그 빌어먹을 년이 내 딸을 해치고 나까지 모함했어! 너희들이 정경유착까지 해서 날 이렇게 만들어? 그년은 벌 받을 거야, 내가 나가면 그년 죽여버릴 거야!”구승훈은 약간 뻣뻣해진 손목을 좌우로 회전하며 바닥에서 나무막대기를 집어 들어 무게를 짚어보고는 다른 사람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막대기를 휘둘러 남자의 정강이를 한 대 세게 내리쳤다.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폐기된 작업장 안에서 메아리쳤다.구승훈은 몽둥이를 버리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누가 그러라고 시켰어?”그 남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구승훈을 쳐다봤다.“그 여자가 내 딸을 해쳤어. 분명 그 여자가 먼저 그런 거라고. 그래서 내가 그냥 좀 밀쳤는데, 그것도 안 돼?”류덕구 서장은 옆에 서서 머리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대로 때려서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그도 난처하게 될 판이다.“구 대표님, 저희도 오늘 하루 동안 취조했는데, 줄곧 이 말밖에 없습니다. 강하리 씨가 이 사람 딸과 합의를 안 하니까 홧김에 강하리 씨를 밀어버린 거라고요. 이것도 사실 말이 되긴 하거든요.”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서장은 그의 표정을 살피더니 서둘러 또 물었다.“혹시 의심 가는 상대가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말씀해 주세요, 저희가 조사해 보겠습니다.”구승훈은 오랫동안 침묵했다.“아닙니다.”말을 마치고 그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다음 날 아침이 되자 손연지는 병실에 와서 강하리의 몸 상태를 체크하고 괜찮은 걸 확인하고 나서야 퇴원 수속을 밟으라고 했다.그녀는 소파에 앉아 있는 어두운 낯빛의 구승훈을 보며 물었다.“구 대표님, 혹시 불편하시면 제가 하리 몸조리를 맡을게요.”구승훈은 짙은 눈매를 살짝 들어 올리며 약간 언짢은 말투로 대답했다.“다른 사람한테
구승훈은 그녀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병원 안의 숱한 사람들이 그들을 지켜봤다.강하리는 이런 모습으로 그들의 주목을 받는 게 좀 거북했다.“나 절로 갈 수 있어요.”구승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걸을 수 있는 게 확실해?”“네.”구승훈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내려놓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막 들어가려 할 때, 구승훈의 발걸음이 멈칫하였다.강하리가 고개를 돌려보니, 엘리베이터 안에 송유라와 안현우가 있었다.뜻밖에도 송유라의 팔목에는 거즈가 감겨 있었다.구승훈은 그걸 보고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어떻게 된 거야?”송유라는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며 대답했다.“괜찮아요.”안현우가 웃으며 말했다.“승훈아, 너 어젯밤 유라 씨가 전화했는데 왜 안 받았어? 어제 유라 씨가 다쳐서 우리가 데리고 병원에 왔잖아.”구승훈은 송유라의 거즈로 감긴 팔목에 시선을 떨궜다.“어떻게 다쳤는데?”송유라는 눈시울을 붉히며 새침해서 말했다.“그게 걱정되긴 한 거예요?”구승훈은 가볍게 웃었다.“말하기 싫으면 안 물을게.”“오빠!”두 사람은 이렇게 강하리를 사이에 두고 한마디씩 대화가 오고 갔고, 중간에 끼어 있는 강하리는 민망할 따름이었다.구승훈의 눈매가 부드러워진 걸 그녀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송유라의 팔목에 시선이 떨어질 때 그의 눈에 스치는 안타까움도 오롯이 그녀의 눈동자에 비쳤다.그의 품에 안긴 사람은 그녀인데, 그의 눈에는 온통 다른 여자에 관한 관심뿐이었다.그 순간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이것이 바로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의 차이구나...“대표님.”강하리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얘기했다.“내려줘요, 저 이제 걸을 수 있어요.”혼자 애쓰며 버티고 서 있을지라도, 그 둘 사이에 끼어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다.구승훈은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아마 송유라한테 자신이 다른 여자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 싫은 것인지, 결국 그녀를 내려놓았다.강하리는 벽에 겨우 버티고
송유라는 옆에 서서 눈시울을 붉혔다.“현우 씨, 그만 해요, 난 그저 강 부장님의 화가 좀 가라앉으라고 그런 거예요. 누굴 책임지게 하려고 그러진 않았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안현우는 눈살을 찌푸렸다.“유라 씨, 유라 씨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송유라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구승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강 부장님이 더는 화만 안 내면, 난 어떡해도 좋아요.”구승훈은 아까부터 계속 어두운 눈빛을 하고 안색이 매우 나빴다.그는 강하리를 쳐다봤지만, 그녀의 표정에서 타협할 의사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송유라 씨가 그렇게 사과하고 싶으시다면 하세요, 사과.”그녀가 말을 마치자 송유라는 어안이 벙벙하여 눈을 크게 떴다.송유라 뿐만 아니라 안현우도 멍하니 정신을 못 차린 듯 보였다.“무슨 말이에요, 그게?”강하리는 안현우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쳤다.“아까 안 대표님이 제가 송유라 씨 사과를 안 받아들인다면서요. 그러니까 사과하시라고요, 사과하시면 받아줄게요. 그리고...”그녀는 이번엔 고개를 돌려 송유라를 바라보며 말했다.“송유라 씨도 제가 화만 풀린다면 무엇이든 한다면서요. 그럼 사과하세요. 사과하시면 저도 화 풀릴 겁니다.”“강 부장님...”송유라는 강하리가 이렇게 나올지 몰랐다.“정말 제 사과를 받으실 거예요?”“그렇지 않으면요? 송유라 씨가 또 저한테 미안해서 자해하는 일을 더 벌이기 전에, 사과하시라는 건데, 이것도 송유라 씨를 위한 일이 아닌가요?”“강 부장님, 전 이미 다쳤어요. 더 이상 뭘 바라요?”송유라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그 모습이 얼마나 불쌍한지, 사람이라면 다 가서 그녀를 안아주고 싶을 만큼 마음을 측은하게 했다.그에 비하면 강하리는 악랄한 요부 같았다.그녀는 한 치도 물러설 기색이 없이 버티고 섰다.안현우가 옆에서 이제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구승훈의 팔을 당기며 말했다.“승훈아, 너 강하리가 유라 씨를 이렇게 괴롭히는데 보고만 있을 거야?”구승훈의 어두운 눈빛은 송유
주해찬의 표정이 확 바뀌며 핸들을 꺾었지만 그래도 피할 수 없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강하리를 보호했고 강하리의 시선은 다가오는 차에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구승훈의 차다.차 번호판도 똑같았다.구승훈이 B시에 올 때마다 몰던 차였다.순식간에 강하리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곧 눈앞이 핑글 돌았다....강하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구승훈이 보였다.“좀 어때?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강하리는 멍한 표정으로 옆에 앉은 남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구승훈, 당신이야?”구승훈의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고 의심을 받은 그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하리야, 너 정말 나라고 의심하는 거야?”입술을 달싹이며 그를 바라보는 강하리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의심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차는 분명 구승훈의 것이었다.하지만 구승훈이 아니라고 말할 때 오히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서늘한 구승훈의 시선을 피하며 나지막이 물었다.“선배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네가 신경 쓰는 건 주해찬밖에 없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날 구해준 사람이야.”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구승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내가 널 구해준 적은 없어? 하리야, 너 정말 사람 마음 아프게 한다.”강하리는 그의 손에서 손을 빼냈다.지금은 그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주해찬이 그녀의 몸을 감쌌기에 그는 꽤 심하게 다쳤을 거다.처음부터 주해찬에겐 미안한 것투성이였다.오랜 시간 동안 그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면서도 그에게 해줄 대답이 없었다.게다가 구승훈의 차로 교통사고까지 났으니 마음속에는 죄책감이 커져만 갔다.“선배는 어떻게 됐어?”여전히 똑같은 말에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주해찬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목숨은 건졌지만 그가 깨어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지금 강하리의 태도로 볼 때, 주해찬이 자신을 구하려다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지 정말 알 수 없
주해찬의 표정이 잠시 번뜩이다가 미소를 지으며 정양철에게로 향했다.“아저씨, 오랜만이네요.”정양철의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가 이내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해찬아, 여긴 무슨 일이야?”주해찬이 미소를 지었다.“친구 데려다주고 나오는데 여기서 아저씨랑 만났네요.”정양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그럼 가서 일 봐. 난 아직 할 일이 남아서.”“알았어요.”주해찬은 그 말을 하고 돌아서서 문을 나섰다.정양철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전화기를 꽉 쥐었다.한편 주해찬은 안에서 나오기 바쁘게 훅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멍한 표정으로 길가에 서 있었다.방금 정양철이 한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강하리나 구승훈과 무슨 일이 있는 걸까?손을 댔다고 했는데, 무슨 짓을 한 걸까.정주현에게 선을 긋던 강아리의 모습과 연관 짓자 주해찬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그는 다소 창백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강하리가 샤워하러 가려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선배?”하지만 강하리가 전화를 받을 때 주해찬은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적어도 제대로 알아보고 강하리에게 알려줘야지 무턱대고 말하는 건 무책임한 행동이었다.“아니야, 그냥 내일 나랑 같이 팔찌 가지러 가자고.”“선배, 나 혼자 갈 수 있어요.” 강하리가 여전히 거절하려는데 주해찬이 말을 막았다.“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오늘 밤엔 일찍 쉬어.”주해찬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다음 날 이른 아침, 준봉은 구승훈의 전화를 받고 강하리에게 아침을 가져다주었다.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 순간, 강하리 방 앞에 두 사람이 수상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그를 보자마자 뒤돌아 복도 쪽으로 달려갔고 준봉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그들을 쫓아갔다.일직 강하리가 묵고 있는 호텔 아래층에 도착한 주해찬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어젯밤 정양철의 그 말 때문에 거의 밤을 새
준봉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대표님께서 마실 것 가져다드리래요.”말을 마친 준봉은 강하리에게 밀크티 한 잔을 건넸고 강하리는 눈앞에 놓인 밀크티를 보고 화를 내며 다시 한번 문을 닫았다.주해찬은 방에 앉아서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안 가면 조금 있다가 또 올걸.”주해찬은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오늘 밤 모임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죄송해요, 선배.”구승훈이 이러면 주해찬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난처했다.주해찬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문득 어젯밤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던 모습이 떠올라 결국 포기했다.준봉은 강하리의 방에서 나오는 주해찬을 바라보며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았다면 다음에 문을 두드리러 갈 때 또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주해찬이 나오며 준봉을 보고 웃었다.“구 대표님한테 그럴 필요 없다고 전해요. 하리가 원하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고 하리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절대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요.”준봉은 주해찬을 바라보기만 했다.“안녕히 가세요, 주해찬 씨.”주해찬은 강하리를 힐끗 쳐다보며 작별 인사를 속삭인 뒤 곧장 돌아섰다.주해찬이 떠난 뒤에야 준봉은 다시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차는 경찰서를 향해 빠르게 달렸고 통화를 마친 그는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구승재를 바라보았다.“목란정원 쪽 상황은 어때요?”“우리 쪽 사람들이 들어갔는데 안에 연정이가 없었대. 그리고 사람들이 들어갈 때 꼭 큰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순조롭게 들어갔대.”시선을 내려 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이 차갑게 웃었다.“역시.”구승재가 얼굴을 찡그렸다.“역시 뭐?”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빛만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어젯밤에 그녀는 일부러 그를 그곳으로 유인한 거다.연정이 사건은 여초연이 한 짓이다.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뒤틀렸다.하지만 잠시 후 그는
정주현은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강하리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본인이 말하지 않으니 더 물어볼 수도 없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강하리 씨 데려다줬어. 웬일로 아들이 보고 싶어서 그래?”연미숙이 잠시 멈칫했다.“이 자식, 누가 보면 내가 평소에 너한테 관심 없는 줄 알겠다.”정주현은 연미숙 앞에서 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그래, 관심 많은 거 알겠으니까 무슨 일인데 그래?”연미숙은 잠시 침묵했다.“강하리한테 같이 밥 먹자고 해.”차라리 말하지 않으면 좋았을걸. 그 말을 꺼내니 정주현은 더 우울해졌다.“엄마, 강하리 씨 바빠.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친구들이나 만나지 강하리는 왜?”연미숙이 웃었다.“우리 아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여자를 내가 좀 만나면 안 돼?”정주현이 입을 삐죽거렸다.“영감탱이가 엄마처럼 정신 차렸으면 강하리가 며느리 됐을 텐데.”연미숙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루 종일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빨리 돌아와.”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후, 그녀의 눈에는 악의에 찬 눈빛만이 번쩍였다.강하리는 정주현을 배웅하고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주해찬은 그녀의 뒤에 서서 물었다. “일부러 주현 씨랑 거리를 두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정신을 차린 강하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선배, 난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일 봐요.”주해찬은 그녀가 말하지 않으려는 것을 보며 다소 무력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만약 이 순간 그녀의 곁에 있던 사람이 구승훈이었다면 그녀는 바로 말하지 않았을까?아니면 구승훈은 굳이 묻지 않아도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고 있었을까?질투가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분명 그가 구승훈보다 먼저 강하리를 좋아했는데.“하리야, 가능하면 나도 네가 기댈 곳이 되어주고 싶어.”강하리의 표정은 굳어졌고 말투에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다.“선배, 정말 고맙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구승훈이 제일 잘 안다.정말 여초연이 연정이를 데려갔다면 그렇게 쉽게 꼬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테고 초조했던 그는 계속해서 그녀가 먼저 빈틈을 보이길 기다릴 수가 없었다.그래서 소란을 일으킨 뒤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할 생각이었다.그녀의 수단으로 봤을 때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는 걸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오늘 대놓고 이곳으로 왔다는 건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유인한 걸까?그렇다면 연정이에게 일어난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지지 않나?어쨌든 구승훈은 연정이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연정이가 정말 그녀의 손에 있고 막다른 길에 이른 그녀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그 시각 목란정원에서 여초연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쪽의 깊은 밤과 달리 저쪽은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다음 날 주해찬과 함께 B시로 갔다.비행기에서 막 내린 두 사람은 입국 게이트에서 정주현이 신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강하리 씨, 드디어 왔네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주해찬을 흘깃 쳐다보았다.주해찬은 무기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었어. 계속 물어보니까 시간을 알려줄 수밖에.”정주현은 곧바로 불만을 터뜨렸다. “강하리 씨, B시로 오면 알려준다면서 이러는 건 아니죠!”강하리는 힘없이 웃었다.“가요.”그러던 중 정주현은 강하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걸 다시 한번 언급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정주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하리 씨, 그래도 우리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이러면 대양그룹에 불만이 있는 것 같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정 회장님이 절 찾아오라고 시켰어요?”정주현은 부인하지 않았다.“영감탱이한테 불만 있는 건 아니죠? 지난번에 구정우 도와줘서 그래요?”강하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주현은 그
구승훈의 주변에 우중충한 공기가 감돌았고 차가운 시선은 올곧게 주해찬에게 향했다.가까이 다가온 주해찬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구승훈은 조금도 피할 생각 없이 그대로 얻어맞은 뒤 이윽고 주해찬의 손목에 주먹을 내리쳤다.그 손이 조금 전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 구승훈은 그의 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달려들었다.주해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구승훈, 하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아? 병원에서 그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아? 네가 뭔데 계속해서 걔한테 상처를 줘, 네가 뭐라고 걔한테 그런 식으로 강요해!”강하리가 병원에서 지냈던 걸 언급하자 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당연히 그는 그녀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있었다.매일 의사가 진정제를 놓아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심한 우울증이었다.노민준이 그날 했던 말을 그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이러면 언제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위험이 있어. 이젠 살아갈 의욕을 완전히 잃었어.”구승훈의 몸이 경직되었지만 꿋꿋하게 받아쳤다.“주해찬 당신이 뭔데 나랑 하리 사이에 끼어들어?”주해찬은 입가에 무심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아무리 그냥 선배라도 걔가 너한테 괴롭힘당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정말 그냥 선배가 되고 싶은 거야? 주해찬, 네 개수작을 모를 것 같아?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거잖아.”잠시 멈칫하던 주해찬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내가 아무리 이용하는 거라고 해도 억지로 강요하는 너보다 나아. 구승훈, 사람 존중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다시 하리 앞에 나타나. 그전까지 넌 자격 없으니까.”주해찬은 말을 마치고 곧장 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비를 맞으며 서 있던 구승훈은 한참이 지나서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자격이 없다고...맞는 말이긴 한데 그럼 주해찬은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그는 입가를 가볍게 문지르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강하리는 주방에 약을 먹으러 가다가 비속에 서 있는 구승훈을 보게 될 줄은 몰랐
가서 팔찌를 가지고 백아영의 생일을 보낸 후 출국할 생각이었고 그 외 일은 지금 당장 처리할 기분이 아니었다.구승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손연지의 집 밑에 우산을 쓴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주해찬이었다.비 오는 밤, 가로등에 반사된 남자의 모습은 약간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무척 적극적이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렬한 불빛이 주해찬에게 비추자 뒤를 돌아본 그가 구승훈의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강하리를 발견했다.구승훈은 보지 못한 듯 강하리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검은 우산이 머리 위로 드리워지며 주해찬의 낮은 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걱정돼서 보러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난 괜찮아요. 걱정시켜서 미안해요.”그때 주해찬이 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하리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구 대표님.”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가벼운 웃음을 내뱉으며 주해찬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주해찬 씨가 뭐라고 저한테 감사 인사를 하는 거죠?”주해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하리의 선배로서요.”그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집에 가서 쉬어.”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해찬이 우산을 들고 건물 쪽으로 따라나섰다.구승훈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에 서리가 낀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의 실루엣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비를 맞으며 우산 아래서 두 사람의 어깨는 단단히 맞닿은 것 같았다.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야 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했다.“선배, 나 혼자 올라가면 돼요.”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입술이 어딘가 부딪힌 것처럼 살이 갈라져 있었다.갈 때는 괜찮았는데 돌아올 땐 입술이 찢어진 채로 왔다.구승훈에 대한 강하리의 쌀쌀맞은 태도는 다 지켜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요했어?”주해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강하리는 몸이 굳어지더
한편 여초연은 거실 소파에 앉아있고 도우미가 옆에서 옷을 걸쳐주었다.“사모님, 시간이 늦었는데 일찍 쉬세요.”여초연은 밖의 하늘을 바라보다가 옷을 두른 채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승훈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요?”도우미는 얼굴을 찡그렸다.“잘 지내지 못해요. 강하리라는 여자가 우리 집안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세요. 어르신까지 들여보냈는데 큰 도련님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여자한테 홀딱 넘어간 게 틀림없어요.”여초연은 밖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요. 승훈이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내 며느리니까.”도우미가 입술을 달싹였다.“그래도 구씨 집안이 그 여자 때문에 이 모양이 됐잖아요!”SH그룹이 합병되면서 구씨 집안은 뿌리 없는 나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도우미들의 일자리도 위협받는 상황에서 정작 여초연은 조금의 초조함도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큰 도련님도 그 여자 때문에 사모님께 화를 냈잖아요.”여초연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우산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따라오지 마요.”그녀가 속삭이자 도우미는 즉시 발걸음을 멈췄다.비 내리는 어느 날 밤, 검은색 승용차가 구씨 집안 저택에서 시내 반대편 목란정원을 향해 유유히 달렸다.목란정원은 여초연이 소유한 정원인데 그녀는 때때로 며칠씩 이곳에 오곤 했다.구승재는 그녀를 따라 목란정원 입구까지 갔다가 차를 멈췄다.그는 목란정원의 출입구를 바라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그동안 형의 지시로 구씨 저택에 머물면서 집안사람들을 돌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여초연을 감시하는 것이었다.여초연의 차가 목란정원에 들어가는 것을 본 구승재는 휴대폰을 꺼내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고요한 밤, 구승훈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의 입술은 그녀의 귀에 닿은 상태였다.“전화 좀 받고 올게.”구승훈이 떠난 후 강하리 휴대폰도 울렸다.주해찬의 전화였다.“하리야, 비행기표 샀으니까 내일 데리러 갈게.”“그래요.
구승훈은 상처받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었다.“하리야, 넌 늘 그렇듯 매정하네.”강하리가 뒤돌아 휴대폰으로 택시를 부르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휴대폰을 움켜잡았다.“딱 하룻밤만. 너 안 건드릴게, 응?”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하리야, 내 소원 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해. 네가 이 집에서 아이와 함께 지내는 모습을 몇 번이나 상상했는지 몰라. 여기가 우리 집이야.”강하리의 코끝이 시큰거렸지만 그래도 결국 구승훈의 손을 뿌리쳤다.너무도 분명한 그녀의 거절에 구승훈은 답답한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고 쓴웃음을 짓던 그는 더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샤워하고 나오면 다시 데려다줄게.”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화장실로 들어갔다.구승훈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강하리는 통화 중이었다.발걸음이 멈칫한 그는 통화 상대가 주해찬이란 것을 알아차렸다.“선배, 전 괜찮아요.”“알았어, 항공편 예약해. 나도 같이 갈게.”강하리가 전화를 끊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를 껴안고 고개를 숙여 입 맞추었다.“구승훈!” 강하리는 그의 키스에 깜짝 놀라 그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구승훈은 점점 더 꽉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강하리의 턱을 잡고 깊숙이 파고들며 조금의 부드러움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마치 화풀이나 비난하듯 키스를 퍼부었다.강하리는 벽에 단단히 밀려서 몸부림을 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그녀가 다리를 들어 그의 아랫도리를 가격하려는데 구승훈이 먼저 그녀의 다리를 붙들었다.강하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구승훈의 키스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힘의 격차로 인해 그녀는 반격할 방법이 없었다.강하리는 화가 나서 얼굴마저 하얗게 질렸고 구승훈은 실컷 헤집어놓은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강하리가 그의 뺨을 때렸고 이내 구승훈의 얼굴엔 손자국이 생겨났다.그러나 그의 손가락은 키스로 인해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하리야, 나 생각이 바뀌었어.”강하리가 멈칫했다.“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