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순간까지도 그는 그녀에게 일말의 희망도 주려고 하지 않았다.그는 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시종일관 그의 태도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매우 심플하면서도 단호한 대답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녀의 한 줄기 희망을 끊어버렸다.구승훈의 손을 꽉 잡고 있었던 그녀의 손은 천천히 힘이 풀렸다.“미안해.”강하리는 나지막이 말했다.누구한테 이 말을 한 건지 그녀도 알지 못했다.구승훈한테 한 말이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또 배 속의 아이한테 한 말이었을지도 모른다.그것도 아니면 그녀 자신한테 한 말이었거나.“미안해......”눈을 스르르 감으며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조용히 미끄러져 내려왔다.이쯤 되니 몸이 더 아픈지 마음이 더 아픈지 헷갈릴 정도였다.그저 찬 기운이 온몸을 적시고, 하체에서는 뜨거운 샘물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그녀의 입술은 더 하얗게 변해갔다.어떤 소중한 것이 그녀를 점점 떠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구승훈은 한 손으로 운전대를 꽉 잡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그 손은 천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텅 빈 손바닥이 처음으로 허전하게 느껴지며 마음마저 무거워졌다.그는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었고, 손등에는 핏줄이 불거졌다.컬리넌 차가 빛의 속도로 병원에 들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급정거했다.강하리를 차에서 안고 내렸을 때 그는 손바닥이 축축해지는 감을 비로소 느꼈다.새빨간 피가 그의 눈동자를 자극해 흔들리게 했다.어려서부터 어둠 속에서 살아온 그는, 지금까지 그 어떤 일도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할 거라 자부했다.하지만 이 순간 숨이 가빠져 오는 것만 같았다.그는 강하리를 안고 응급실로 뛰어 들어갔다.그녀를 의사에게 넘겨주고 나서야 그는 넋이 나간 듯 빨갛게 피로 물든 자기 손을 바라보았다.뒤따라온 구승재가 구승훈의 손에 묻은 피를 보고 놀라 눈을 껌벅였다.“형... 강 부장님이...”구승훈은 다시 아무런 감정 없는 얼굴로 구승재를 돌아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아마 유산한 거 같아.
“저 여자는 처음부터 내가 이 아이를 원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어. 날 속이지 말았어야 했다고.”구승훈은 말을 마치고 밖으로 걸어 나갔고, 구승재는 그의 뒤를 바짝 따라나섰다.“형,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강 부장이 형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녔는데, 형은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거야? 그렇다면, 왜 강 부장을 계속 곁에 두는 거야? 그냥 보내주지? 그럼 형도 송유라랑 잘 지낼 수 있잖아!”구승훈은 발걸음을 갑자기 멈춰 실눈을 뜨며 구승재를 흘겨봤다.“구승재, 네가 내 동생이라고 내 사생활에 간섭할 수 있다고 생각해?!”구승재는 말문이 꽉 막혔다.“형, 난 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 됐어, 솔직히 말할게. 난 강 부장을 형수처럼 생각했어, 어쨌든 송유라보다는 나은 것 같아.”구승훈은 그를 힐긋 쳐다보고는 입술을 약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응급실 밖.손연지는 부리나케 달려왔다.그리고 응급실 밖에 서 있는 구승훈을 보자 곧장 그리로 뛰어갔다.“어떻게 된 거예요? 하리가 왜 유산해요? 방금 저한테 전화했을 때만 해도 멀쩡했는데!”“구승훈 씨! 대체 왜 유산했냐니까? 걔가 이 아기를 얼마나 원했는데! 아니 왜, 왜 하리를 이렇게 만든 거야, 왜?!”“구승훈! 너 이 나쁜 새끼! 애를 안 가질 거면 네가 꿰매, 네가 정관수술을 받으라고! 네가 싸질러놓고 왜 하리가 이 고생을 해야 하는데! 이 개 쓰레기, 나쁜 놈아!”구승재는 손연지의 욕설에 적잖게 놀랐다.저도 감히 구승훈과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었다.그는 서둘러 앞에 막아서며 손연지의 팔을 붙잡았다.“당신 미쳤어?”“이거 놔, 내가 하리 대신해서 이 형편없는 쓰레기한테 욕 좀 퍼부어 주려니까!”구승재는 마구 몸부림을 치는 손연지의 허리를 힘껏 껴안고 한쪽으로 끌고 갔다.구승훈은 어두운 표정으로 손연지가 잡아당겨 흐트러진 옷을 정리했다.그리고 정리가 끝나자, 그는 손연지한테 눈길을 돌렸다.의외로 화난 얼굴은 아니었고, 그저 눈빛만 냉담했다
병실 안에서는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구승훈은 자세도 바꾸지 않은 채 그대로 문 옆에 계속 서 있었다.그 후 한참 지나, 안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가 멎자, 그는 그제야 손에 든 부서진 담배를 내려다보며 그걸 쓰레기통에 버리고, 또 새 담배를 꺼내 흡연 구역으로 걸어갔다.손연지는 퇴근 후에 바로 또 찾아왔다.병실에는 강하리 혼자 병상에 누워있었고, 그녀의 눈가에는 촉촉한 이슬이 맺혀있었다.그걸 보자 손연지는 억지스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사실 없어도 괜찮아, 오히려 잘 됐을지도 몰라... 너 혼자서 아줌마도 돌봐야 하고 애까지 돌보면 너무 힘들잖아.”강하리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안간힘을 다해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알아.”자신의 상황이 어떤지 그녀도 모르지는 않았다.아기가 지워진 게 더 좋은 일일지도 몰랐다.그렇지 않으면 태어나서부터 그녀를 따라 고생해야 하니까.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고통스러웠다.손연지는 그녀의 슬픈 표정을 보며 가슴이 아파, 애써 말머리를 돌렸다.“배는 안 고파? 내가 뭐 좀 사다 줄까?”강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 나 병원에서 얼마나 있어야 해?”“하룻밤 지내보고, 아픈 데 없으면 내일 아침에 퇴원하면 될 거야. 퇴원하면, 나랑 같이 갈래? 내가 네 산후조리 돌봐줄게.”“그래.”강하리는 지금 그 어떤 위로의 말도 듣고 싶지 않았는데 다행히 손연지는 하지 않았고 그저 그녀의 이불을 위로 걷어 올렸다.“왜 갑자기 유산하게 된 거야? 그전에... 통화하고 있을 때만 해도 괜찮았잖아.”손연지는 말하면서 눈시울을 약간 붉혔다.그녀조차도 이 아이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든데, 강하리는 오죽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강하리는 천장을 보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겨우 한마디 꺼냈다.“계단에서 누가 날 밀어서 넘어졌어.”손연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널 밀었다고? 누구야 그 사람? 난 구승훈이 널 이렇게 만든 줄...”그녀는 말하다가 멈췄다.강하리는 씁쓸하게 고개를
구승훈은 강하리를 부축하여 일어나 앉혀, 죽 한 그릇을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컨디션이 너무 안 좋은 탓인지, 그녀는 그릇을 제대로 쥐지 못하고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하였다.다행히 구승훈은 재빨리 그 그릇을 잡았고, 눈에는 보기 드문 측은한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왜 그릇도 못 받아?”말을 마친 그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먹여줄까?”“아니에요, 저 혼자 할 수 있어요.”강하리는 그릇을 다시 받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구승훈은 주지 않았다.그는 침대 옆에 앉아, 매우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강하리는 그의 시선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아이를 가지려고 한 건 제 선택이에요. 지키지 못한 것도 제 탓이고요. 대표님은 저한테 빚졌다고 생각할 필요 없어요.”그러자 구승훈은 그릇을 협탁에 올려놓고 손을 닦기 시작했다.굳어진 표정으로 휴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서 눈을 들어 입을 열었다.“강하리, 우리 사이는 공평한 거래 관계였어. 난 당연히 너한테 빚진 거 없고. 오히려 네가 임신을 숨겼고 계약을 위반했잖아.”강하리는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목구멍이 막혔다.한참 후에야 그녀는 자조하듯 입을 열었다.“네, 내 잘못이에요.”짤막한 몇 글자를 내뱉는 것이 그녀의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만 가능했다.그러고는 힘이 풀려 침대에 기대어 앉으며, 얼굴은 종잇장처럼 하얬다.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또 말을 꺼냈다.“하지만 어쨌든 네가 임신한 건 내 책임 맞아. 그러니까 널 이렇게 돌보는 거로, 그동안 너한테 소홀했던 거 보상하는 셈 치자. 미안해, 너한테 임신시켜 놓고 유산까지 하게 만든 거, 고생했어.”그는 말을 마치고 다시 그 죽그릇 들었다.강하리는 그의 미안하다는 들으면서 알 수 없는 감정이 턱밑까지 차올라 숨을 쉴 수가 없었다.그녀가 여태 원했던 건 그의 미안함이 아니었는데 말이다.하지만 인제 와서 무슨 말을 한들 소용이 있을까.아이가 이미 없어졌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눈가가 시큼해져 오는 걸 애써 참
구승훈은 별로 이 말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하리야, 넌 끝내자고 말할 자격이 없다는 걸 너도 잘 알 텐데. 임신한 사실을 속인 건 따지지 않겠지만, 그걸 빌미로 나한테 헤어지자고 말할 생각은 마!”그의 냉담한 말투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강하리는 씁쓸하게 웃었다.맞다. 그녀가 헤어지자고 말할 자격이 없는 거였지.둘이 사인한 그 계약서 내용에는 그녀한테 유리한 조건은 하나도 없이 그저 노예계약 같은 거였다. 그저 복종하는 것 말고는, 그의 앞에서 그녀는 아무런 자격도 없다.화를 낼 자격도 없고, 성질낼 자격도 없으며, 헤어지자고 말할 자격조차 없었다.“왜, 억울해?”구승훈이 물었다.“아니요.”강하리는 그저 웃었다.미친 듯이 발광하지도 않고, 그저 고스란히 슬픔을 받아들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듣는 사람조차 가슴이 답답해지게 말이다.화가 갑자기 치밀어 오른 구승훈은 그녀의 몸을 돌려 자신을 마주하게 했다.“너 애초에 그 애를 낳을 생각 했을 때부터,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 다 알아야 했던 거 아니야? 지금 와서 누구 보라고 이 청승맞은 얼굴인데?”그의 무정한 말들이 한 글자 한 글자 강하리의 마음속에 비수처럼 들어와 박혔다.그녀의 하얀 이마에 핏줄이 솟아올랐다.그리고 눈시울은 몹시 시큰시큰하고 입가도 잘게 떨리고 있었다.“승훈 씨, 당신은 마음이라는 게 있어?”마음을 가진 인간이라면 이런 말이 가능했을까.그러나 그 말에 구승훈은 가볍게 웃기만 했다.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그도 잘 몰라,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아마 없는 거겠지...그는 일어나 협탁 위에 놓인 담뱃갑을 집어 한 개비를 뽑아 입에 물었다.불은 안 붙이고 그냥 물고만 있었다.“하리야, 이 세상일들이 마음 갖고 되는 게 아니야. 네가 마음이 있으면 뭐 해. 애가 살아남기라도 했어? 그런 뜬구름 잡는 소리보다, 손에 쥐고 있는 돈과 권력이야말로 진짜라는 걸 알아야 해. 난 너처럼 마음이 없지만, 권력이 있고 힘이 있어. 그럼
야심한 밤, 차 한 대가 병원에서 출발하여 외곽에 있는 한 폐쇄된 낡은 공장 밖에 멈추었다.구승훈이 발을 들어 작업장 문을 걷어차고 들어가자, 안에서는 분에 겨운 욕설이 한창이었다.“그 빌어먹을 년이 내 딸을 해치고 나까지 모함했어! 너희들이 정경유착까지 해서 날 이렇게 만들어? 그년은 벌 받을 거야, 내가 나가면 그년 죽여버릴 거야!”구승훈은 약간 뻣뻣해진 손목을 좌우로 회전하며 바닥에서 나무막대기를 집어 들어 무게를 짚어보고는 다른 사람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막대기를 휘둘러 남자의 정강이를 한 대 세게 내리쳤다.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폐기된 작업장 안에서 메아리쳤다.구승훈은 몽둥이를 버리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누가 그러라고 시켰어?”그 남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구승훈을 쳐다봤다.“그 여자가 내 딸을 해쳤어. 분명 그 여자가 먼저 그런 거라고. 그래서 내가 그냥 좀 밀쳤는데, 그것도 안 돼?”류덕구 서장은 옆에 서서 머리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대로 때려서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그도 난처하게 될 판이다.“구 대표님, 저희도 오늘 하루 동안 취조했는데, 줄곧 이 말밖에 없습니다. 강하리 씨가 이 사람 딸과 합의를 안 하니까 홧김에 강하리 씨를 밀어버린 거라고요. 이것도 사실 말이 되긴 하거든요.”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서장은 그의 표정을 살피더니 서둘러 또 물었다.“혹시 의심 가는 상대가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말씀해 주세요, 저희가 조사해 보겠습니다.”구승훈은 오랫동안 침묵했다.“아닙니다.”말을 마치고 그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다음 날 아침이 되자 손연지는 병실에 와서 강하리의 몸 상태를 체크하고 괜찮은 걸 확인하고 나서야 퇴원 수속을 밟으라고 했다.그녀는 소파에 앉아 있는 어두운 낯빛의 구승훈을 보며 물었다.“구 대표님, 혹시 불편하시면 제가 하리 몸조리를 맡을게요.”구승훈은 짙은 눈매를 살짝 들어 올리며 약간 언짢은 말투로 대답했다.“다른 사람한테
구승훈은 그녀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병원 안의 숱한 사람들이 그들을 지켜봤다.강하리는 이런 모습으로 그들의 주목을 받는 게 좀 거북했다.“나 절로 갈 수 있어요.”구승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걸을 수 있는 게 확실해?”“네.”구승훈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내려놓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막 들어가려 할 때, 구승훈의 발걸음이 멈칫하였다.강하리가 고개를 돌려보니, 엘리베이터 안에 송유라와 안현우가 있었다.뜻밖에도 송유라의 팔목에는 거즈가 감겨 있었다.구승훈은 그걸 보고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어떻게 된 거야?”송유라는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며 대답했다.“괜찮아요.”안현우가 웃으며 말했다.“승훈아, 너 어젯밤 유라 씨가 전화했는데 왜 안 받았어? 어제 유라 씨가 다쳐서 우리가 데리고 병원에 왔잖아.”구승훈은 송유라의 거즈로 감긴 팔목에 시선을 떨궜다.“어떻게 다쳤는데?”송유라는 눈시울을 붉히며 새침해서 말했다.“그게 걱정되긴 한 거예요?”구승훈은 가볍게 웃었다.“말하기 싫으면 안 물을게.”“오빠!”두 사람은 이렇게 강하리를 사이에 두고 한마디씩 대화가 오고 갔고, 중간에 끼어 있는 강하리는 민망할 따름이었다.구승훈의 눈매가 부드러워진 걸 그녀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송유라의 팔목에 시선이 떨어질 때 그의 눈에 스치는 안타까움도 오롯이 그녀의 눈동자에 비쳤다.그의 품에 안긴 사람은 그녀인데, 그의 눈에는 온통 다른 여자에 관한 관심뿐이었다.그 순간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이것이 바로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의 차이구나...“대표님.”강하리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얘기했다.“내려줘요, 저 이제 걸을 수 있어요.”혼자 애쓰며 버티고 서 있을지라도, 그 둘 사이에 끼어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다.구승훈은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아마 송유라한테 자신이 다른 여자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 싫은 것인지, 결국 그녀를 내려놓았다.강하리는 벽에 겨우 버티고
송유라는 옆에 서서 눈시울을 붉혔다.“현우 씨, 그만 해요, 난 그저 강 부장님의 화가 좀 가라앉으라고 그런 거예요. 누굴 책임지게 하려고 그러진 않았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안현우는 눈살을 찌푸렸다.“유라 씨, 유라 씨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송유라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구승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강 부장님이 더는 화만 안 내면, 난 어떡해도 좋아요.”구승훈은 아까부터 계속 어두운 눈빛을 하고 안색이 매우 나빴다.그는 강하리를 쳐다봤지만, 그녀의 표정에서 타협할 의사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송유라 씨가 그렇게 사과하고 싶으시다면 하세요, 사과.”그녀가 말을 마치자 송유라는 어안이 벙벙하여 눈을 크게 떴다.송유라 뿐만 아니라 안현우도 멍하니 정신을 못 차린 듯 보였다.“무슨 말이에요, 그게?”강하리는 안현우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쳤다.“아까 안 대표님이 제가 송유라 씨 사과를 안 받아들인다면서요. 그러니까 사과하시라고요, 사과하시면 받아줄게요. 그리고...”그녀는 이번엔 고개를 돌려 송유라를 바라보며 말했다.“송유라 씨도 제가 화만 풀린다면 무엇이든 한다면서요. 그럼 사과하세요. 사과하시면 저도 화 풀릴 겁니다.”“강 부장님...”송유라는 강하리가 이렇게 나올지 몰랐다.“정말 제 사과를 받으실 거예요?”“그렇지 않으면요? 송유라 씨가 또 저한테 미안해서 자해하는 일을 더 벌이기 전에, 사과하시라는 건데, 이것도 송유라 씨를 위한 일이 아닌가요?”“강 부장님, 전 이미 다쳤어요. 더 이상 뭘 바라요?”송유라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그 모습이 얼마나 불쌍한지, 사람이라면 다 가서 그녀를 안아주고 싶을 만큼 마음을 측은하게 했다.그에 비하면 강하리는 악랄한 요부 같았다.그녀는 한 치도 물러설 기색이 없이 버티고 섰다.안현우가 옆에서 이제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구승훈의 팔을 당기며 말했다.“승훈아, 너 강하리가 유라 씨를 이렇게 괴롭히는데 보고만 있을 거야?”구승훈의 어두운 눈빛은 송유
아무리 멍청해도 지금 강하리가 그녀에게 한 방 먹였다는 걸 깨달은 여명희는 가슴 속 분노가 순식간에 치밀어 올랐고 이를 갈며 강하리를 노려보았다.하지만 강하리는 고개를 진태형 쪽으로 돌릴 뿐이었다.“별일 없으면 전 가볼게요. 외할머니댁에 다녀와야 해서.”진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조심히 가.”강하리가 대답을 마치고 뒤돌아 떠나려는데 여명희가 소리를 질렀다.“강하리 씨, 거기 서요.”말을 마친 그가 진태형을 돌아보았다.“진 장관님은 계속 사적인 일에 권력을 행사하실 건가요? 그쪽 따님은 잘못해도 벌을 받지 않나요?”여명희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진태형에게 집중됐다.그동안 외교부 내부에서는 진태형이 권력을 남용해 JM과 계약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강하리의 비즈니스 능력과 JM의 업무 태도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게다가 외교부에는 모든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통역사가 부족했기에 소문이 돌아도 진정 캐묻는 사람은 없었다.이제 여명희가 이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이상 사람들은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 없었다.강하리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여명희를 돌아보았다.“여명희 씨는 사람을 모함하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네요. 제가 무슨 실수를 했죠?”“통역할 때 실수하지 않았나요?”여명희의 말이 끝나자 진태형 옆에 서 있던 통역실 주임이 얼굴을 찡그렸다.“강하리 씨의 번역은 한 치의 실수도 없었는데 그러는 여명희 씨는 오늘 어떻게 된 거예요?”여명희는 깜짝 놀랐다.“뭐라고요? 강하리가 실수한 게 하나도 없다고요? 하지만 아까는... 나한테 거짓말했어? 또 날 속였네! 망할 년, 강하리 이 망할 년, 네가 진 장관님 딸이라고...”“입 다물어!”여명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누군가 호통을 쳤고 진태형이 어두운 눈빛으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외교부가 당신들이 장난하는 곳인 줄 알아? 오늘 통역에 큰 문제가 없어서 다행이지, 만약 문제가 생겼다면 당신들 중 누가 그 책임을 질 건데!”진태형이 단호하게 말하자 아무도 감히 소리를
강하리는 무심하게 시선을 거두었다.손목시계를 내려다보던 그녀는 지금 원고를 찾으러 가기에는 너무 늦었고 옆에 있는 독일어 번역본을 살펴본 뒤 다시 돌려주었다.러시아어 번역을 맡은 강하리는 회의 과정을 간단히 종이에 적고 헤드셋을 착용했다.여명희는 강하리의 무심한 표정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원고가 없어졌는데 잘난 척은.’비록 강하리의 통역 실력은 외교부 내에서 전설과 같은 존재였지만 오늘 회의의 번역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은 참석한 모든 번역가가 알고 있었다.10년 차 베테랑 통역사도 조심스러울 정도로 난해한 전문 용어가 많은데 강하리가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동시통역을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지 않았다.강하리가 조금의 실수라도 하면 그녀를 외교부에서 쫓아낼 수 있는 방법이 생긴다!여명희는 비웃으며 시선을 돌려 헤드셋을 들어 올렸고 장장 세 시간이 넘는 긴 회의가 이어졌다.강하리는 마침내 헤드셋을 벗고 나지막이 한숨을 쉰 뒤 고개를 돌려 여명희를 바라봤다. 여명희의 얼굴은 극도로 일그러져 있었다.회의가 시작된 후 강하리 일만 생각하느라 정신이 산만해져 초반에 작은 실수를 저질렀는데 이후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이미 당황한 상태였다.이후에는 더 이상 실수를 하지 않았지만 전체 번역 과정에서 그녀의 실력은 그리 좋지 않았다.뛰어나지도 않았고 심지어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한 대학생들보다 뒤처지는 수준이었다.여명희는 헤드셋을 탁자 위로 던져버리고는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는데 강하리는 이미 시선을 돌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문 앞에 다다랐을 때야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참, 오늘 통역본 누가 담당했어요?”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부드러웠지만 순식간에 장내에 고요함이 찾아왔다.회의 시작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주임님께 물어볼게요.”말을 마친 강하리가 나가려는데 여명희가 그녀
강하리의 표정은 태연했지만 커피잔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최근 증상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어요? 어떤 치료를 받고 있나요?”임희주는 그런 질문을 할 줄 몰랐는지 잠시 말을 멈추고 난감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사실 지금은 증상이 뚜렷하지 않은데 유난히 조급하세요. 빨리 낫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사모님은 왜 그렇게 서두르는지 아세요? 혹시 무슨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건가요? 그게 아니면 일상에서 누가 부담을 주고 있나요?”강하리의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질리더니 커피잔을 잡고 있던 손가락 마디마디도 서서히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그녀는 한참 동안 임희주를 바라보다가 말했다.“지금 증상이 어떤지, 어느 정도인지 알려주세요.”임희주는 잠시 침묵했다.“죄송하지만 대표님께서 말하지 않으셨다면 저도 말씀드릴 수 없어요.”“제가 아내인 데도요?”“죄송해요.”강하리가 웃었다.“임 선생님, 만약 구승훈 씨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수술 동의서에 사인해야 할 사람이 나란 건 알고 있죠?”임희주의 입꼬리가 움찔했지만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죄송해요.”강하리는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부담감을 느끼는 부분에 대해선 제가 나중에 물어볼게요.”임희주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요.”강하리가 떠난 뒤에야 임희주는 시선을 돌려 한숨을 내쉬며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대표님, 사모님 상대하기 너무 힘드네요.”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제 아내를 만났습니까?”“네, 우연히 만났어요.”임희주가 커피를 살며시 저었다.“미안해요. 아직 대표님 상황에 대해 모르는 줄 모르고 서두르지 않게 설득해 달라던 참이었는데.”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속도 늦출 필요 없다고 했는데 제 말 못 알아들으세요?”“다른 뜻이 아니라 그냥...”“할 말 있으면 나한테 직접 얘기하고 다시는 내 아내한테 찾아가지 마세요.”구승훈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임희주는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구승훈
노민우는 다음 날 아침 일찍 떠났고 손연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문 앞에 서 있었다.“아쉬워?”강하리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뒤에서 묻자 돌아보는 손연지의 눈에 머금은 눈물이 보였다.강하리는 깜짝 놀라 황급히 손연지를 토닥였다.“그렇게 아쉬우면 돌아오라고 해. 울긴 왜 울어?”하지만 손연지는 웃으며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돌아오라고 하겠어. 하리야, 지금은 약혼녀가 있는 사람이야.”“그럼 넌?”강하리는 손연지의 다소 부은 눈을 바라보니 어젯밤에 운 게 분명했다.“난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야지. 돈, 돈, 돈을 벌 거야. 난 돈 많은 사람이 될 거야!”손연지는 말을 마친 후 웃음을 터뜨리더니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참, 나 몸조리 끝나면 이사 갈 거야. 계속 너희 집에서 애정행각이나 보면서 신세 질 수는 없어.”그녀가 구승훈을 흘끗 쳐다보며 말하자 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손 선생님은 신세 지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시네요?”손연지는 그를 흘겨보며 강하리를 안았다.“아니면 하리야, 나랑 같이 나가서 살래?”순간 구승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손 선생님은 B시에서도 쫓겨나고 싶은 건 아니죠?”손연지는 강하리에게 기대었다.“자기야, 나 B시에서 쫓아낼 거야?”강하리는 다소 어이가 없다는 듯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구승훈을 노려보았다.“얼른 출근이나 해.”구승훈은 다가와 손연지의 품에서 그녀를 떼어냈다.“일단 약부터 바르자.”강하리의 어깨는 사실 더 이상 아프지 않았지만 물집이 더 커진 상태였다.구승훈은 이틀 정도 쉬라고 했지만 강하리는 오늘 외교부 회의가 있어 출근해야 했다.약을 바르고 나니 손연지도 준비를 마친 뒤라 강하리는 그녀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자리를 잡게 도와준 뒤 이렇게 덧붙였다.“연지야, 난 그래도 네가 나와 함께 좀 더 지냈으면 좋겠어.”노민우는 약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갔지만 이미 약혼한 이상 그렇게 쉽게 파혼할 리 만무했다.그 과정에서 분명 손연지도 끌어들일 텐
손연지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옆에 있던 샴푸를 집어 들어 그에게 던졌다.“나가!”노민우는 샴푸를 피하며 순식간에 옷을 벗었다.“씻으면서 얘기하자.”“얘기하긴 뭘... 읍...”손연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노민우가 그녀의 입을 막았고 몇 번이나 그를 밀어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욕실의 온도가 빠르게 올라가고 닿은 두 몸이 곧바로 욕망에 달아올랐다.노민우는 손연지의 입술을 깨물었다.“이젠 해도 돼?”손연지가 다리를 들어 가격하자 노민우는 중요 부위를 가린 채 뒤로 물러섰다.익숙한 행동에 괜히 안쓰러웠지만 그는 얼굴이 파랗게 질릴 정도로 화가 난 손연지를 능글맞게 바라봤다.“농담이야. 아직 몸이 성치 않은데 못한다는 거 알아.”손연지가 타월을 꺼내 몸을 감싸고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가자 노민우도 서둘러 수건을 집어 들고 뒤를 따랐다.“안 해도 되니까 오늘 밤에 같이 자면 안 돼? 손연지, 앞으로 1년 동안 못 볼 수도 있잖아.”머리를 말리던 손연지의 손이 멈칫하며 이렇게 말했다.“바닥에서 자.”“네.”노민우가 말을 마치자마자 아래층에서 강하리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고 손연지가 놀라며 옷을 입고 내려가려고 하자 노민우가 말렸다.“가지 마. 승훈이가 있잖아.”손연지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내려가지 않았다.다행히도 구승훈이 강하리를 품에 안고 올라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두 사람은 문 앞에서 엿들은 뒤 노민우는 절뚝거리며 바닥으로 돌아갔다.손연지가 침대 옆에 기댄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있자 노민우가 그녀에게 다가갔다.“바보가 됐네?”정신을 차린 손연지가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들자 노민우는 손연지의 발목을 잡았다.“마지막 밤인데 나 좀 그만 찰 수는 없어?”손연지는 그의 손에서 발을 빼고 싶었지만 노민우는 놓지 않았다.“내가 모를 줄 알아? 이거 놓으면 또 발길질할 거잖아.”손연지는 이를 갈며 베개를 집어 들어 노민우의 얼굴에 내리쳤다.“나가서 자!”노민우는 베개를 껴안은 채 바닥에
노민우는 식사를 마치고 손연지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고 손연지가 그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노민우의 휴대폰이 울렸다.그의 모친이었다.노민우는 무의식적으로 손연지를 바라봤지만 손연지는 이미 시선을 거둔 뒤였다.그녀는 옷을 챙겨서 욕실로 들어가기 전 한 마디만 남겼다.“난 쉴 거니까 넌 가.”노민우는 혀를 차고는 어머니의 전화를 끊은 뒤 손연지를 끌어당겼다.“손연지, 우리 제대로 얘기 좀 하면 안 돼?”손연지가 눈을 흘겼다.“돼.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얘기하다 내 기분 망치면 넌 끝장이야!”노민우가 손연지에게 다가왔다.“화내지 마.”손연지는 노민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누구는 화내고 싶어서 내는 줄 알아?’“할 말 있으면 빨리 해.”노민우는 잠시 머뭇거렸다.“손연지, 나 기다려줄 수 있어? 1년만 기다리면 내가 가서 집에서 정해준 약혼 해결할 테니까 우선 파혼하고 우리 둘이 어떤 관계로 지낼지는 나중에 얘기하자, 응?”옷을 든 손연지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고개를 돌려 노민우를 바라봤다.“어떻게 할 건데?”노민우는 사실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어머니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약혼했고 만약 그가 고집을 부리면 어머니에게 죽을 때까지 매를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결혼은 언젠가 취소해야 하는 것이었다.“내가 방법을 생각해 볼게. 여차하면 승훈이처럼 인연 끊으면 되지.”손연지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진심이야?”“당연히 진심이지.”“그래.”노민우는 손연지가 이렇게 빨리 동의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손연지에게 1년 더 기다리라고 하면 그를 한대 쥐어패기라도 할 줄 알았다.“정말 동의하는 거야?”손연지는 한심하단 표정을 지었다.“그럼 다시 생각해 볼게.”노민우는 갑자기 얼굴에 미소를 띠며 그녀를 껴안았다.“아니야, 생각하지 마. 내가 헛소리 한 거라고 생각해.”노민우는 말을 마치고 손연지를 안은 채 욕실로 들어가려 했다.이 틈에 손연지와 가까워지려
입안의 술맛이 남자의 입속으로 전부 빨려 들어갔을 때쯤 구승훈이 그녀를 놓아주었다.“화 풀어, 응? 아니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까?”강하리는 웃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해봐.”구승훈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낮게 웃었다.“무릎을 꿇다 다리가 아프면 밤에 너 챙겨주지 못하잖아.”강하리는 웃으며 나지막이 욕설을 뱉고는 그를 밀어낸 뒤 식탁에 앉아 다시 한 잔을 따랐다.식당에는 조명 하나만 켜져 있었고 강하리의 실크 가운은 구승훈의 손길에 미끄러져 내려가 불빛에 붉어진 그녀의 어깨가 선명하게 보였다.구승훈은 순간 멈칫하며 두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어쩌다 이런 거야?”강하리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말을 꺼냈다.“맞춰봐.”구승훈이 가운을 잡아당겨 어깨 전체가 드러나도록 했다.붉게 물든 어깨에는 물집까지 생겼다.“대체 무슨 일이야? 아파? 왜 나한테 말...”말하던 구승훈은 이내 알아차리고 다소 무기력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봤다.“그렇게 화났어? 다친 걸 얘기하지도 않을 만큼? 난 그냥 네가 걱정하는 게 싫었어.”강하리는 어지러워 손가락으로 구승훈의 얼굴을 훑다가 한참 후 욕설을 뱉었다.“개자식, 그러면 내가 걱정하지 않을 줄 알았어? 그동안 내가 계속 걱정하고 있었던 거 알아? 구승훈, 대체 언제쯤 홀로 모든 걸 감당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을 건데? 이 나쁜 놈! 망할 놈!”강하리의 욕설이 커졌고 구승훈은 그녀를 껴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큰 별장에는 그렇게 적막이 감돌고 구승훈의 얼굴에는 죄책감이 가득했다.하지만 강하리에게 진실을 말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여전히 분명했다.그런 추하고 더러운 가족을 강하리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애써 감정을 조절하며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미안해, 자기야. 한 번만 더 용서해 줘, 응?”구승훈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강하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노려보았다. 남자가 안쓰러워 사실 더 화를
노민우는 멈칫하며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손연지에게 약속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을 거다.손연지가 발을 들어 그의 낭심을 걷어찼다.“꺼져, 고자가 되고 싶지 않으면 내 앞에 나타나지 마.”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화를 내며 계단을 쿵쾅쿵쾅 올라갔다.강하리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욕실로 들어가 보니 어깨의 피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뒤돌아 실크 가운을 집어 들고 옷을 갈아입은 뒤 밖으로 나가는데 손연지는 그녀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무슨 일이야? 구승훈이랑 싸웠어?”“아니.” 강하리가 웃으며 말했다.“동료랑 갈등이 있었어.”손연지가 얼굴을 찡그리며 무언가 물어보려던 찰나 강하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내일이면 몸조리도 끝나지? 내가 일자리 마련해 놨으니까 바로 출근하면 돼.”손연지는 깜짝 놀랐다.“그렇게 빨리?” 강하리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왜, 노민우랑 집에서 며칠 더 놀고 싶어?”손연지의 표정이 어색하게 바뀌었다.“내가 그 자식이랑 놀기는. 그러는 넌 얼른 쫓아내기나 해. 짜증 나 죽겠어.”강하리가 혀를 찼다.“내가 볼 땐 네 기분이 좋아진 것 같은데?”“어딜 봐서 내 기분이 좋다는 거야? 난 그냥, 그냥...”“알아, 다 알아.”강하리가 웃으며 대꾸한 뒤 손연지를 바라보다가 문득 이렇게 말했다.“노민우는 널 좋아하는 것 같은데 가족들을 이기기 힘들 거야. 손연지, 저 사람이 파혼만 하면 너도 시도해 볼 수 있어. 물론 이건 그냥 내 단순한 조언이고 난 네가 나와 같은 길을 걷는 걸 원하지 않아. 하지만 네 선택을 응원해.”손연지는 입술을 달싹이며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알아.”하지만 문제는 노민우가 그녀를 좋아할까?조금 전 아래층에서 노민우가 보이던 반응을 생각하니 마음속에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강하리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한 손연지는 오래 머물지 않고 자리를 떠났고 방문이 닫히자 강하리의 얼굴에서 미소가 말끔히 사라졌다.
하지만 강하리는 한 번도 상대하지 않았다.애초에 민감한 신분이고 만약 반격하면 진태형에게 성가신 일이 생길 테니까.그래서 오늘도 강하리가 예전처럼 행동할 거라 생각했는데 감히 그녀에게 물을 붓다니.여명희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강하리 씨, 감히 나한테 물을 뿌려요?”강하리가 비웃었다.“못 할 것 있나요? 아니면 나는 그쪽이 물을 뿌려도 반격도 못 한 채 당하고만 있어야 하나요?”여명희는 너무 화가 나서 원래 하얗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아, 그러면 저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뒤돌아 밖으로 나갔다.원래도 구승훈의 일 때문에 머리가 복잡한데 어깨가 너무 아프고 자료도 다 젖어 여기서 시간 낭비할 기분이 아니었다.그런데 두 발짝도 떼기 전에 여명희가 갑자기 뒤에서 그녀를 붙잡았다.“강하리 씨, 이런 식으로 사람을 괴롭혀요? 진 장관님 딸이라고 멋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강하리가 여명희의 손을 뿌리쳤다.“내가 괴롭히는 건지 아닌지 그쪽이 더 잘 알지 않나요? 여명희 씨, 아무리 진시연을 도와준다고 하지만 날 만만하게 보지는 마요.”그렇게 말한 후 강하리는 여명희의 손을 뿌리친 뒤 뒤돌아 가버렸고 여명희가 계속해서 그녀를 붙잡으려는데 누군가 말렸다.“명희 씨, 그만해요. 괜히 건드리지 마요.”강하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밖으로 걸어 나갔다.통역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가쁜 숨을 내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가끔은 진태형과 부녀 사이인 것을 인정한 게 잘못된 것인지 의심이 들 때가 있었다.그게 아니면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받아들이지 못하겠나.강하리는 홀로 병원으로 가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이제 막 차가 멈춰 서는데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진태형이었다.강하리는 심호흡하고 전화를 받았다.“아빠.”“그런 일이 있었는데 왜 아빠한테 얘기 안 해?”강하리는 문득 참아왔던 서글픔이 속절없이 치밀어 올랐다.분명 그녀의 친아빠인데 왜 사람들은 진시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