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순간까지도 그는 그녀에게 일말의 희망도 주려고 하지 않았다.그는 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시종일관 그의 태도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매우 심플하면서도 단호한 대답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녀의 한 줄기 희망을 끊어버렸다.구승훈의 손을 꽉 잡고 있었던 그녀의 손은 천천히 힘이 풀렸다.“미안해.”강하리는 나지막이 말했다.누구한테 이 말을 한 건지 그녀도 알지 못했다.구승훈한테 한 말이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또 배 속의 아이한테 한 말이었을지도 모른다.그것도 아니면 그녀 자신한테 한 말이었거나.“미안해......”눈을 스르르 감으며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조용히 미끄러져 내려왔다.이쯤 되니 몸이 더 아픈지 마음이 더 아픈지 헷갈릴 정도였다.그저 찬 기운이 온몸을 적시고, 하체에서는 뜨거운 샘물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그녀의 입술은 더 하얗게 변해갔다.어떤 소중한 것이 그녀를 점점 떠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구승훈은 한 손으로 운전대를 꽉 잡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그 손은 천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텅 빈 손바닥이 처음으로 허전하게 느껴지며 마음마저 무거워졌다.그는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었고, 손등에는 핏줄이 불거졌다.컬리넌 차가 빛의 속도로 병원에 들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급정거했다.강하리를 차에서 안고 내렸을 때 그는 손바닥이 축축해지는 감을 비로소 느꼈다.새빨간 피가 그의 눈동자를 자극해 흔들리게 했다.어려서부터 어둠 속에서 살아온 그는, 지금까지 그 어떤 일도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할 거라 자부했다.하지만 이 순간 숨이 가빠져 오는 것만 같았다.그는 강하리를 안고 응급실로 뛰어 들어갔다.그녀를 의사에게 넘겨주고 나서야 그는 넋이 나간 듯 빨갛게 피로 물든 자기 손을 바라보았다.뒤따라온 구승재가 구승훈의 손에 묻은 피를 보고 놀라 눈을 껌벅였다.“형... 강 부장님이...”구승훈은 다시 아무런 감정 없는 얼굴로 구승재를 돌아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아마 유산한 거 같아.
“저 여자는 처음부터 내가 이 아이를 원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어. 날 속이지 말았어야 했다고.”구승훈은 말을 마치고 밖으로 걸어 나갔고, 구승재는 그의 뒤를 바짝 따라나섰다.“형,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강 부장이 형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녔는데, 형은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거야? 그렇다면, 왜 강 부장을 계속 곁에 두는 거야? 그냥 보내주지? 그럼 형도 송유라랑 잘 지낼 수 있잖아!”구승훈은 발걸음을 갑자기 멈춰 실눈을 뜨며 구승재를 흘겨봤다.“구승재, 네가 내 동생이라고 내 사생활에 간섭할 수 있다고 생각해?!”구승재는 말문이 꽉 막혔다.“형, 난 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 됐어, 솔직히 말할게. 난 강 부장을 형수처럼 생각했어, 어쨌든 송유라보다는 나은 것 같아.”구승훈은 그를 힐긋 쳐다보고는 입술을 약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응급실 밖.손연지는 부리나케 달려왔다.그리고 응급실 밖에 서 있는 구승훈을 보자 곧장 그리로 뛰어갔다.“어떻게 된 거예요? 하리가 왜 유산해요? 방금 저한테 전화했을 때만 해도 멀쩡했는데!”“구승훈 씨! 대체 왜 유산했냐니까? 걔가 이 아기를 얼마나 원했는데! 아니 왜, 왜 하리를 이렇게 만든 거야, 왜?!”“구승훈! 너 이 나쁜 새끼! 애를 안 가질 거면 네가 꿰매, 네가 정관수술을 받으라고! 네가 싸질러놓고 왜 하리가 이 고생을 해야 하는데! 이 개 쓰레기, 나쁜 놈아!”구승재는 손연지의 욕설에 적잖게 놀랐다.저도 감히 구승훈과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었다.그는 서둘러 앞에 막아서며 손연지의 팔을 붙잡았다.“당신 미쳤어?”“이거 놔, 내가 하리 대신해서 이 형편없는 쓰레기한테 욕 좀 퍼부어 주려니까!”구승재는 마구 몸부림을 치는 손연지의 허리를 힘껏 껴안고 한쪽으로 끌고 갔다.구승훈은 어두운 표정으로 손연지가 잡아당겨 흐트러진 옷을 정리했다.그리고 정리가 끝나자, 그는 손연지한테 눈길을 돌렸다.의외로 화난 얼굴은 아니었고, 그저 눈빛만 냉담했다
병실 안에서는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구승훈은 자세도 바꾸지 않은 채 그대로 문 옆에 계속 서 있었다.그 후 한참 지나, 안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가 멎자, 그는 그제야 손에 든 부서진 담배를 내려다보며 그걸 쓰레기통에 버리고, 또 새 담배를 꺼내 흡연 구역으로 걸어갔다.손연지는 퇴근 후에 바로 또 찾아왔다.병실에는 강하리 혼자 병상에 누워있었고, 그녀의 눈가에는 촉촉한 이슬이 맺혀있었다.그걸 보자 손연지는 억지스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사실 없어도 괜찮아, 오히려 잘 됐을지도 몰라... 너 혼자서 아줌마도 돌봐야 하고 애까지 돌보면 너무 힘들잖아.”강하리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안간힘을 다해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알아.”자신의 상황이 어떤지 그녀도 모르지는 않았다.아기가 지워진 게 더 좋은 일일지도 몰랐다.그렇지 않으면 태어나서부터 그녀를 따라 고생해야 하니까.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고통스러웠다.손연지는 그녀의 슬픈 표정을 보며 가슴이 아파, 애써 말머리를 돌렸다.“배는 안 고파? 내가 뭐 좀 사다 줄까?”강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 나 병원에서 얼마나 있어야 해?”“하룻밤 지내보고, 아픈 데 없으면 내일 아침에 퇴원하면 될 거야. 퇴원하면, 나랑 같이 갈래? 내가 네 산후조리 돌봐줄게.”“그래.”강하리는 지금 그 어떤 위로의 말도 듣고 싶지 않았는데 다행히 손연지는 하지 않았고 그저 그녀의 이불을 위로 걷어 올렸다.“왜 갑자기 유산하게 된 거야? 그전에... 통화하고 있을 때만 해도 괜찮았잖아.”손연지는 말하면서 눈시울을 약간 붉혔다.그녀조차도 이 아이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든데, 강하리는 오죽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강하리는 천장을 보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겨우 한마디 꺼냈다.“계단에서 누가 날 밀어서 넘어졌어.”손연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널 밀었다고? 누구야 그 사람? 난 구승훈이 널 이렇게 만든 줄...”그녀는 말하다가 멈췄다.강하리는 씁쓸하게 고개를
구승훈은 강하리를 부축하여 일어나 앉혀, 죽 한 그릇을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컨디션이 너무 안 좋은 탓인지, 그녀는 그릇을 제대로 쥐지 못하고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하였다.다행히 구승훈은 재빨리 그 그릇을 잡았고, 눈에는 보기 드문 측은한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왜 그릇도 못 받아?”말을 마친 그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먹여줄까?”“아니에요, 저 혼자 할 수 있어요.”강하리는 그릇을 다시 받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구승훈은 주지 않았다.그는 침대 옆에 앉아, 매우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강하리는 그의 시선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아이를 가지려고 한 건 제 선택이에요. 지키지 못한 것도 제 탓이고요. 대표님은 저한테 빚졌다고 생각할 필요 없어요.”그러자 구승훈은 그릇을 협탁에 올려놓고 손을 닦기 시작했다.굳어진 표정으로 휴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서 눈을 들어 입을 열었다.“강하리, 우리 사이는 공평한 거래 관계였어. 난 당연히 너한테 빚진 거 없고. 오히려 네가 임신을 숨겼고 계약을 위반했잖아.”강하리는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목구멍이 막혔다.한참 후에야 그녀는 자조하듯 입을 열었다.“네, 내 잘못이에요.”짤막한 몇 글자를 내뱉는 것이 그녀의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만 가능했다.그러고는 힘이 풀려 침대에 기대어 앉으며, 얼굴은 종잇장처럼 하얬다.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또 말을 꺼냈다.“하지만 어쨌든 네가 임신한 건 내 책임 맞아. 그러니까 널 이렇게 돌보는 거로, 그동안 너한테 소홀했던 거 보상하는 셈 치자. 미안해, 너한테 임신시켜 놓고 유산까지 하게 만든 거, 고생했어.”그는 말을 마치고 다시 그 죽그릇 들었다.강하리는 그의 미안하다는 들으면서 알 수 없는 감정이 턱밑까지 차올라 숨을 쉴 수가 없었다.그녀가 여태 원했던 건 그의 미안함이 아니었는데 말이다.하지만 인제 와서 무슨 말을 한들 소용이 있을까.아이가 이미 없어졌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눈가가 시큼해져 오는 걸 애써 참
구승훈은 별로 이 말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하리야, 넌 끝내자고 말할 자격이 없다는 걸 너도 잘 알 텐데. 임신한 사실을 속인 건 따지지 않겠지만, 그걸 빌미로 나한테 헤어지자고 말할 생각은 마!”그의 냉담한 말투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강하리는 씁쓸하게 웃었다.맞다. 그녀가 헤어지자고 말할 자격이 없는 거였지.둘이 사인한 그 계약서 내용에는 그녀한테 유리한 조건은 하나도 없이 그저 노예계약 같은 거였다. 그저 복종하는 것 말고는, 그의 앞에서 그녀는 아무런 자격도 없다.화를 낼 자격도 없고, 성질낼 자격도 없으며, 헤어지자고 말할 자격조차 없었다.“왜, 억울해?”구승훈이 물었다.“아니요.”강하리는 그저 웃었다.미친 듯이 발광하지도 않고, 그저 고스란히 슬픔을 받아들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듣는 사람조차 가슴이 답답해지게 말이다.화가 갑자기 치밀어 오른 구승훈은 그녀의 몸을 돌려 자신을 마주하게 했다.“너 애초에 그 애를 낳을 생각 했을 때부터,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 다 알아야 했던 거 아니야? 지금 와서 누구 보라고 이 청승맞은 얼굴인데?”그의 무정한 말들이 한 글자 한 글자 강하리의 마음속에 비수처럼 들어와 박혔다.그녀의 하얀 이마에 핏줄이 솟아올랐다.그리고 눈시울은 몹시 시큰시큰하고 입가도 잘게 떨리고 있었다.“승훈 씨, 당신은 마음이라는 게 있어?”마음을 가진 인간이라면 이런 말이 가능했을까.그러나 그 말에 구승훈은 가볍게 웃기만 했다.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그도 잘 몰라,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아마 없는 거겠지...그는 일어나 협탁 위에 놓인 담뱃갑을 집어 한 개비를 뽑아 입에 물었다.불은 안 붙이고 그냥 물고만 있었다.“하리야, 이 세상일들이 마음 갖고 되는 게 아니야. 네가 마음이 있으면 뭐 해. 애가 살아남기라도 했어? 그런 뜬구름 잡는 소리보다, 손에 쥐고 있는 돈과 권력이야말로 진짜라는 걸 알아야 해. 난 너처럼 마음이 없지만, 권력이 있고 힘이 있어. 그럼
야심한 밤, 차 한 대가 병원에서 출발하여 외곽에 있는 한 폐쇄된 낡은 공장 밖에 멈추었다.구승훈이 발을 들어 작업장 문을 걷어차고 들어가자, 안에서는 분에 겨운 욕설이 한창이었다.“그 빌어먹을 년이 내 딸을 해치고 나까지 모함했어! 너희들이 정경유착까지 해서 날 이렇게 만들어? 그년은 벌 받을 거야, 내가 나가면 그년 죽여버릴 거야!”구승훈은 약간 뻣뻣해진 손목을 좌우로 회전하며 바닥에서 나무막대기를 집어 들어 무게를 짚어보고는 다른 사람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막대기를 휘둘러 남자의 정강이를 한 대 세게 내리쳤다.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폐기된 작업장 안에서 메아리쳤다.구승훈은 몽둥이를 버리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누가 그러라고 시켰어?”그 남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구승훈을 쳐다봤다.“그 여자가 내 딸을 해쳤어. 분명 그 여자가 먼저 그런 거라고. 그래서 내가 그냥 좀 밀쳤는데, 그것도 안 돼?”류덕구 서장은 옆에 서서 머리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대로 때려서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그도 난처하게 될 판이다.“구 대표님, 저희도 오늘 하루 동안 취조했는데, 줄곧 이 말밖에 없습니다. 강하리 씨가 이 사람 딸과 합의를 안 하니까 홧김에 강하리 씨를 밀어버린 거라고요. 이것도 사실 말이 되긴 하거든요.”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서장은 그의 표정을 살피더니 서둘러 또 물었다.“혹시 의심 가는 상대가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말씀해 주세요, 저희가 조사해 보겠습니다.”구승훈은 오랫동안 침묵했다.“아닙니다.”말을 마치고 그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다음 날 아침이 되자 손연지는 병실에 와서 강하리의 몸 상태를 체크하고 괜찮은 걸 확인하고 나서야 퇴원 수속을 밟으라고 했다.그녀는 소파에 앉아 있는 어두운 낯빛의 구승훈을 보며 물었다.“구 대표님, 혹시 불편하시면 제가 하리 몸조리를 맡을게요.”구승훈은 짙은 눈매를 살짝 들어 올리며 약간 언짢은 말투로 대답했다.“다른 사람한테
구승훈은 그녀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병원 안의 숱한 사람들이 그들을 지켜봤다.강하리는 이런 모습으로 그들의 주목을 받는 게 좀 거북했다.“나 절로 갈 수 있어요.”구승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걸을 수 있는 게 확실해?”“네.”구승훈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내려놓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막 들어가려 할 때, 구승훈의 발걸음이 멈칫하였다.강하리가 고개를 돌려보니, 엘리베이터 안에 송유라와 안현우가 있었다.뜻밖에도 송유라의 팔목에는 거즈가 감겨 있었다.구승훈은 그걸 보고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어떻게 된 거야?”송유라는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며 대답했다.“괜찮아요.”안현우가 웃으며 말했다.“승훈아, 너 어젯밤 유라 씨가 전화했는데 왜 안 받았어? 어제 유라 씨가 다쳐서 우리가 데리고 병원에 왔잖아.”구승훈은 송유라의 거즈로 감긴 팔목에 시선을 떨궜다.“어떻게 다쳤는데?”송유라는 눈시울을 붉히며 새침해서 말했다.“그게 걱정되긴 한 거예요?”구승훈은 가볍게 웃었다.“말하기 싫으면 안 물을게.”“오빠!”두 사람은 이렇게 강하리를 사이에 두고 한마디씩 대화가 오고 갔고, 중간에 끼어 있는 강하리는 민망할 따름이었다.구승훈의 눈매가 부드러워진 걸 그녀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송유라의 팔목에 시선이 떨어질 때 그의 눈에 스치는 안타까움도 오롯이 그녀의 눈동자에 비쳤다.그의 품에 안긴 사람은 그녀인데, 그의 눈에는 온통 다른 여자에 관한 관심뿐이었다.그 순간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이것이 바로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의 차이구나...“대표님.”강하리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얘기했다.“내려줘요, 저 이제 걸을 수 있어요.”혼자 애쓰며 버티고 서 있을지라도, 그 둘 사이에 끼어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다.구승훈은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아마 송유라한테 자신이 다른 여자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 싫은 것인지, 결국 그녀를 내려놓았다.강하리는 벽에 겨우 버티고
송유라는 옆에 서서 눈시울을 붉혔다.“현우 씨, 그만 해요, 난 그저 강 부장님의 화가 좀 가라앉으라고 그런 거예요. 누굴 책임지게 하려고 그러진 않았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안현우는 눈살을 찌푸렸다.“유라 씨, 유라 씨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송유라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구승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강 부장님이 더는 화만 안 내면, 난 어떡해도 좋아요.”구승훈은 아까부터 계속 어두운 눈빛을 하고 안색이 매우 나빴다.그는 강하리를 쳐다봤지만, 그녀의 표정에서 타협할 의사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송유라 씨가 그렇게 사과하고 싶으시다면 하세요, 사과.”그녀가 말을 마치자 송유라는 어안이 벙벙하여 눈을 크게 떴다.송유라 뿐만 아니라 안현우도 멍하니 정신을 못 차린 듯 보였다.“무슨 말이에요, 그게?”강하리는 안현우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쳤다.“아까 안 대표님이 제가 송유라 씨 사과를 안 받아들인다면서요. 그러니까 사과하시라고요, 사과하시면 받아줄게요. 그리고...”그녀는 이번엔 고개를 돌려 송유라를 바라보며 말했다.“송유라 씨도 제가 화만 풀린다면 무엇이든 한다면서요. 그럼 사과하세요. 사과하시면 저도 화 풀릴 겁니다.”“강 부장님...”송유라는 강하리가 이렇게 나올지 몰랐다.“정말 제 사과를 받으실 거예요?”“그렇지 않으면요? 송유라 씨가 또 저한테 미안해서 자해하는 일을 더 벌이기 전에, 사과하시라는 건데, 이것도 송유라 씨를 위한 일이 아닌가요?”“강 부장님, 전 이미 다쳤어요. 더 이상 뭘 바라요?”송유라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그 모습이 얼마나 불쌍한지, 사람이라면 다 가서 그녀를 안아주고 싶을 만큼 마음을 측은하게 했다.그에 비하면 강하리는 악랄한 요부 같았다.그녀는 한 치도 물러설 기색이 없이 버티고 섰다.안현우가 옆에서 이제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구승훈의 팔을 당기며 말했다.“승훈아, 너 강하리가 유라 씨를 이렇게 괴롭히는데 보고만 있을 거야?”구승훈의 어두운 눈빛은 송유
그런데 갑자기 진태형에게 친딸이 하나 더 생기고 그게 심씨 가문의 손녀일 줄 누가 알았겠나.이제 진시연의 처지가 어색해진 건 당연했고 사람들은 진시연을 보고 웃으며 인사를 나눈 뒤 곧바로 흩어졌다.진시연은 짙은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샴페인 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는 사람들의 의미심장한 시선을 못 본 척 걸음을 옮겨 구승훈에게 다가갔다.“구승훈 씨, 오랜만이네요.”구승훈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무심하게 와인 잔을 들고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대답하지도 않았고 그녀와 대화를 나눌 생각도 없어 보이자 진시연은 그의 옆에 서서 우울한 표정으로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구승훈 씨, 내가 F 대륙에서 야생동물에게 공격당했을 때 날 구해주고 밤새 업고 병원으로 가 치료받게 해준 거 기억나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그땐 개나 소나 다 구해줬을 겁니다.”진시연의 얼굴이 다소 일그러졌다.그녀는 오랜 세월 기억하고 있던 것이 구승훈의 입에서 개나 소나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우울한 눈빛을 감춘 채 말을 이어갔다.“그래도 저한텐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에요. 구승훈 씨, 우리 앞으로 잘 지내봐요, 네? 전 정말 그쪽이랑 잘 지내고 싶어요.”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진시연 씨, 진심으로 살려줘서 고마우면 나한테서 멀리 떨어져요. 내 아내가 날 오해하는 건 싫으니까.”진시연은 당황했다.“아내요? 두 사람 결혼해요?”구승훈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진시연 씨, 멀리하라고요. 못 알아들어요?”구승훈이 그렇게 말한 뒤 걸음을 옮겨 강하리에게 다가가는데 진시연이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그의 뒤에서 소리쳤다.“구승훈 씨, 강하리가 정말 좋은 여자라고 생각해요? 그쪽 잡고 놓아주지 않으면서 주해찬이랑 알콩달콩 지내는데 정말 하나도 신경 안 쓰여요?”구승훈은 걸음을 멈추고 얼음같이 싸늘한 얼굴로 돌아보았다.“진시연 씨, 멀쩡히 진씨 가문에 남고 싶으면 얌전히 있어요. 아니면 심씨 가문도, 나도 그쪽 무사히 B시에 남겨두지 않을 테니까.”진시연의 얼
강하리는 결국 구승훈이 보내준 드레스를 입었다.파란 드레스에 네크라인과 치맛단에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혀있어 여성스러우면서도 고상하고 품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오픈 숄더는 쇄골을 모두 드러냈고 새하얀 쇄골에는 투명한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달려 있었다.강하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진태형의 딸, 심씨 가문의 손녀라는 대단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 B시에 몇이나 되겠나.게다가...허리를 굽혀 강하리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리는 구승훈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구씨 가문이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 모두가 안다.비록 구승훈이 구씨 가문을 처참히 무너뜨렸지만 그의 손에는 구씨 가문의 재산 90%와 B시 문씨 가문의 모든 재산이 있으니 기존 구씨 가문보다 그 세력이 더 대단했다.모두의 시선이 여기로 쏠렸지만 구승훈의 눈에는 눈앞에 있는 여자만 보였다.몸을 살짝 굽혀 강하리에게 손을 내밀자 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에 자기 손을 얹었다.심준호가 선물한 드레스를 아무 말 없이 찢어버린 구승훈에게 조금 화가 났지만 개자식의 소유욕이 발동한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다.오히려 그런 그의 반응에 다시 예전 구승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그동안 그녀의 마음을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옅어지는 느낌이었다.구승훈의 눈가에 미소가 번지며 강하리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팔을 뻗었다.강하리는 그의 팔짱을 낀 채 사람들의 시선 아래 진씨 가문 저택으로 따라 들어갔다.“이게 우리 결혼식이면 얼마나 좋을까. 왠지 정말 결혼식 같지 않아?”구승훈이 강하리의 귀에 속삭이자 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았다.“나도 이게 우리 결혼식이었으면 좋겠어.”구승훈이 걸음을 멈칫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서두르지 마, 결혼식 할 거니까.”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진태형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강하리를 보자 눈을 반짝이며 이쪽으로 걸어왔다.“아빠.”강하리가 낮은 소리로 부르고 곧이어 구승훈도 그를
“언제 왔어?” 강하리가 구승훈을 바라보며 그의 빨갛게 충혈된 눈동자에 시선이 향했다.지난 며칠 동안 구승훈은 이곳에 머물지 않았다.회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요 며칠 구승훈은 많이 바빴고 모임이 끊이질 않아 근처에 미리 준비해 둔 별장으로 갔다.강하리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봤다.“지난 며칠 동안 잠은 잤어?”구승훈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품에 안았다.“잠을 못 자. 강 대표님이 와서 재워주면 안 돼?”강하리가 웃었다.“그래, 오늘 짐 챙겨서 그쪽으로 갈게.”구승훈은 멈칫하다가 이내 입꼬리를 피식 올렸다.쉽게 승낙하니 다소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원래 상처들은 거의 다 나았지만 그가 요즘 매일 복싱장으로 가서 속에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풀었기에 몸에 새로운 상처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강하리가 정말 오면 그는 괴롭기만 할 거다.아내가 옆에 있는 데도 안지 못하는 그 기분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정말 올 거야?”강하리가 웃었다.“왜, 내가 가는 게 싫어? 아니면 다른 여자가 있는 거야?”구승훈은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그럴 배짱이 있는 것 같아?”강하리는 그의 넥타이를 잡고 끌어당겨 허리를 굽히게 한 뒤 시선을 마주 보았다.“그러면 방 청소나 하고 나랑 연정이가 갈 테니까 기다려.”말을 마친 그녀는 구승훈의 넥타이를 놓아주고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구승훈은 문에 기댄 채 웃음을 터뜨리며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강하리를 거절할 수가 없다는 걸 인정했다.잠시 후 드레스룸에서 나온 강하리는 심플한 드레스를 입었는데도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다.하지만 구승훈은 그녀가 나오는 순간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보낸 드레스는 어딨어?”강하리는 머리를 뒤로 넘기며 무심하게 대꾸했다.“너무 더워서 시원한 걸로 바꿨어.”구승훈은 강하리의 등 뒤로 훤히 뚫린 구멍을 바라봤다.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위로 끌어올리자 뒤쪽의 아름다운 나비 모양의 뼈가 드러났다.허리까지 훤히 뚫린 디자인의 옷을 바라보는 구승훈의 눈빛이 어두
강하리의 입꼬리가 움찔했다.건너편 사옥에 새로 회사가 들어왔다는 건 아는데 에비뉴와 정안 그룹일 줄은 몰랐다.하지만 생각해 보니 이해가 됐다.그렇지 않고서야 구승훈이 왜 회사 근처 식당에 나타났겠는가.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연성으로 안 돌아가?”구승훈의 눈동자는 온통 그녀로 가득 찼다.“너랑 아이가 어디 있으면 나도 함께 할 거야.”강하리가 구승훈의 시선을 마주했다.“나도 꼭 B시에 있을 필요는 없어. JM의 업무는 어디서든 할 수 있으니까.”어쨌든 연성은 구씨 가문의 영역이었고 연성에 깊게 뿌리 박은 구씨 가문은 B시에서 그다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구승훈이 시선을 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하지만 네가 다시는 가족과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네가 연인이든 가족이든 둘 다 가졌으면 좋겠어, 자기야.”두 사람 중에 적어도 한쪽은 가족의 사랑을 받아야 하니까.강하리의 코끝이 갑자기 시큰해지며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예물도 도착했는데 그러면 결혼할래, 구승훈?”멈칫한 구승훈은 씁쓸함이 가슴에 밀려왔지만 그래도 얼굴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강 대표님, 그렇게 급한가?”강하리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나랑 결혼할 거야?”구승훈의 눈에 머금었던 미소가 점점 사라지더니 손가락이 강하리의 눈가에 닿았다.“자기야, 준비할 시간 좀 줘.” 강하리는 쓴웃음을 내뱉었다.“알았어, 기다릴게.”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곧장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구승훈은 복잡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회사 앞에 서서 얼굴을 찡그렸다.그가 돌아서서 길 건너편으로 걸어가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구승재는 진작 위에서 구승훈과 강하리가 함께 서 있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두 사람이 화해했는지 확인하려고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왔다.하지만 아래에 내려오자 형이 찌푸린 얼굴로 걸어올 줄이야.‘쯧... 아직 화해 못 했네.’“형, 하리 씨가 아직 용서 안 해준대?”구승훈은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눈가에 억눌린 짜증을 내비
하지만 구승훈의 숨김과 솔직하지 못한 태도는 강하리의 마음을 조금 불편하게 만들었다.구승훈은 강하리가 화가 났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뒤 강하리를 품에 안고 입을 열었다.“제 아내, 강하리에요.”강하리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자 구승훈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나지막이 말했다.“내 체면 좀 살려주면 안 돼, 여보?”강하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여자의 시선이 반짝이더니 강하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안녕하세요, 사모님. 전 구승훈 씨 담당 정신과 의사, 여나경이라고 해요.”강하리는 멈칫하다가 구승훈의 불면증이 떠올라 그를 슬쩍 보고는 이렇게 물었다.“이 사람 상태 어때요?”구승훈의 눈동자가 살짝 어두워지고 여자는 눈치껏 웃으며 말했다.“복잡한 경우라 치료 과정도 번거로울 수 있지만 제가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사모님.”강하리는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여자가 먼저 웃으며 말했다.“죄송하지만 전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그러고는 이내 자리를 떴다.여자가 가고 구승훈은 힘껏 강하리의 허리를 꼬집었다.“정주현이랑 밥 맛있게 먹었어?”강하리는 곧장 그의 손을 떼어냈다.“다른 여자랑 밥 맛있게 먹었어?”구승훈이 웃었다.“그래도 강 대표님이랑 먹는 게 맛있지.”강하리는 능글맞게 웃는 남자를 보며 문득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어젯밤 혼자 발코니에 서 있을 때처럼 왠지 이 남자가 홀로 버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구승훈, 당신 몸...”구승훈은 속으로 흠칫하며 조용히 강하리를 품에 안고 만족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강 대표님 걱정하는 눈빛을 보니 다 나은 것 같네.”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구승훈의 품에 기대어 안겼고 구승훈의 눈동자는 한층 어두워졌다.강하리가 걱정한다는 걸 잘 안다.예전 같았으면 걱정해 주는 그녀의 모습에 날 듯이 기뻐했을 텐데 지금 상황에서는 강하리가 알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지금은 감히 프러포즈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그 약은 그에게 시한폭탄과
강하리는 구승훈을 여기서 볼 줄은 몰랐다.더군다나 맞은편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앉아 있자 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시선을 돌렸다.구승훈의 정상적인 사교 활동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다가가 묻지도, 방해하지도 않았다.그런데 정주현이 그녀의 표정이 이상함을 감지하고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다가 눈썹을 살짝 치켜들고 강하리를 돌아보았다.“바람피우는 현장 목격한 건가요?”강하리는 다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아니요.”이런 면에서 강하리는 구승훈을 믿었다.다만 구승훈이 저 여성과 밥을 먹는 것이 그녀에게 숨기는 일과 관련이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을 뿐이었다.강하리는 사실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다른 사람들은 알아도 자신은 알면 안 되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연정이 사건 때도 구승훈은 노진우를 믿을지언정 그녀를 믿지는 않았다.강하리는 눈가의 상실감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고 정주현은 보기 드문 미소를 지었다.“여전히 저 사람에게 잘해주네요.”정주현의 말투에는 무의식적으로 약간의 서운함이 묻어났지만 그 역시 자신과 강하리 사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가지 않고 되물었다.“어떻게 지냈어요?”정주현의 얼굴에 번지던 미소가 갑자기 사라졌다.요즘 어떻게 지냈냐고? 굳이 한 단어로 설명하자면 엉망이다.사실 그동안 어떻게 버텼는지 그조차 모르겠다.정양철과 줄곧 사이가 돈독했던 그였고 정양철이 업무상 아무리 엄격하게 요구해도 그에겐 좋은 아버지였다.그래서 정양철이 그런 짓을 했다는 게 믿을 수가 없었지만 증거까지 나온 이상 믿을 수밖에 없었다.정주현은 애써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그냥 그렇죠. 산 사람은 계속 살아야 하니까. 그냥... 하리 씨 볼 면목이 없네요.”강하리는 잠시 정주현을 바라보다가 말했다.“그쪽이랑 상관없어요.”정주현이 웃었다.“그럼 뻔뻔하게 친구 해도 돼요?”강하리도 웃었다.“당연하죠.”정주현의 표정이 눈에 띄게 풀렸고 두 사람은 이
“당신 원하면 해.”구승훈은 심장이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자기야, 내일 침대에서 못 일어날까 봐 걱정되지 않아?”강하리가 웃었다.“할 거야?”숨이 멎은 구승훈이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았다.“아니, 우선은 강 대표님이 재워주는 걸 누리고 싶어.”말을 마친 그가 강하리를 안아 침대에 눕혔고 강하리는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잘 자, 구승훈.”구승훈은 웃었다.“잘 자, 자기야.”강하리는 구승훈의 품에 몸을 밀착했고 구승훈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녀를 꽉 안았다.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한 침실에서 강하리의 귀에는 구승훈의 심장 박동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두 사람은 더 말하지 않았다.고요한 방 안에서 구승훈이 고개를 숙여 강하리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사랑해.”강하리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눈을 떠 구승훈의 시선을 마주했다.“나도 사랑해.”언제 잠이 들었는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구승훈은 곁에 없었고 연정이도 누군가 안고 간 뒤였다.강하리는 침대에 앉아 구승훈이 누웠던 곳을 바라봤다.다소 구겨진 이불을 만지던 그녀의 손가락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릴게.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마, 구승훈.”구승훈은 바쁜지 강하리가 아래층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자리를 떠난 뒤였다.강하리도 굳이 묻지 않고 평소처럼 연정이에게 밥을 먹인 뒤 사무실로 갔다.회사에 도착했을 때 사무실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리시안셔스 꽃다발이 있었고 그녀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데 안예서가 뒤에서 은근하게 웃으며 말을 붙여왔다.“대표님, 곧 좋은 일 생길 것 같은데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굳어졌다. 구승훈은 그녀에게 프러포즈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그래도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오늘 일정은 뭐야?”안예서는 서둘러 강하리에게 하루 일정을 알렸고 고개를 끄덕인 강하리는 꽃을 옆으로 치웠다.안예서가 그녀를 따라 들어왔다.“대표님, 지난번에 제가 말씀드린 임명우 씨 기억하시죠?”강하리는
구승훈은 강하리의 입술을 깨물며 샤워기 아래로 그녀를 안고 갔다.머리 위로 쏟아지는 뜨거운 물은 달아오른 불을 끄기는커녕 오히려 더 견디기 힘들게 만들었다.“원해? 자기야, 말해봐.”구승훈이 턱을 잡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머릿속이 윙윙거리던 강하리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그녀가 깨물자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구승훈이 강하리를 들어 올려 벽에 밀쳤다.구승훈이 얼마나 그녀를 탐했는지는 모른다. 그저 모든 게 끝났을 때 강하리는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구승훈은 강하리를 안아 침대에 눕혔고 강하리는 몸을 뒤척이며 잠이 들었다.잠든 강하리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구승훈은 입술에 뽀뽀한 뒤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구승훈은 이미 흠뻑 젖어 있는 자기 셔츠 단추를 천천히, 그리고 차분하게 풀었다.단추가 풀리면서 그의 몸에 난 상처가 드러났다.최면은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았고 그는 점점 더 마음속의 난폭함을 참기 힘들어졌다.마치 잠깐의 고통만이 마음속 짜증을 잠시나마 잊게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구승훈은 무표정하게 웃옷을 벗고 샤워했다.차가운 물이 몸을 적시자 구승훈은 쓴웃음을 내뱉으며 자신의 욕망을 내려다보았다.그는 강하리를 원했다.하지만 지금 당장은 강하리가 기꺼이 응한다고 해도 그녀 앞에서 감히 옷을 벗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욕실에서 나온 구승훈은 침대에서 단잠을 자는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들고 뒤돌아 발코니로 갔다.휴대폰에는 노민준과 구승재에게 걸려 온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있었고 구승훈은 담배에 불을 붙인 뒤 노민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왜 또 갔어?”구승훈은 개의치 않는 어투로 대꾸했다.“효과 없잖아.”노민준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묻어났다.“효과가 없으면 치료 안 할 거야? 승훈아, 포기하지 마. 나도 포기하지 않을 거야.”구승훈은 담배를 한 모금 머금더니 알 수 없는 시간이 흐른 뒤 이렇게 물었다.“형, 확실하게 대답해 줘. 이 약으로 고칠 수 있어?”희망이 없다면 그도 더 발
“그래, 우리 연정이에게 완전한 가정을 만들어주자.”강하리는 구승훈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눈시울이 시큰거렸다.더 이상 주저하고 싶지 않았다.평생 이 남자와 얽혀야 할 운명이라면 차라리 빨리 서로를 곁에 붙잡아 두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삼촌이 말한 것처럼 서로 좋아하는 관계는 소중한 거니까.구승훈이 고개를 돌려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별장으로 갈까? 콘돔 한 박스 샀는데 써보지 않을래, 강 대표님?”강하리는 깜짝 놀라서 재빨리 뻔뻔한 남자를 밀어내려는데 구승훈이 순순히 물러날 리 없었다.“한 번만 하고 돌아가는 건 어때?”강하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뜨거워졌고 구승훈은 직접 그녀의 손을 잡아 그곳에 갖다 댔다.“느껴져? 널 본 순간부터 원했어.”강하리는 단번에 손에 닿은 물건을 알아차리고 화가 나서 물건을 콱 잡았다.“참아!”며칠 동안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와서는 그런 생각만 하다니, 어림도 없지!구승훈은 그녀의 귓불을 살며시 깨물며 옷 속으로 손이 파고들었다.“그러면 오늘은 내가 강 대표님을 모실게, 어때?”말을 마친 뒤 강하리에게 반응할 시간을 주지 않고 바로 입술을 막았다.남자의 민첩한 손놀림이 그녀의 몸 곳곳에 불을 지폈고 그가 그녀의 허리를 쓸어내릴 때쯤 강하리가 갑자기 그를 밀어냈다.“일단 먼저 돌아가.”구승훈은 웃었다.“알았어, 그러면 오늘 밤에 강 대표님 제대로 모실게.”그녀가 원한다는 듯이 말하는 상대에 강하리는 얼굴이 타는 듯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강하리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보았다.“젖었어? 어디 봐.”강하리의 얼굴에 또 한 번 홍조가 올라왔다.“닥쳐!”개자식!구승훈은 더 이상 그녀를 건드리지 않고 시동을 걸어 차를 몰고 나갔다.별장으로 돌아오자 걸음마를 배우고 있는 연정이가 보행기를 탄 채 달려왔고 구승훈의 곁에 도착하자 연정이는 작고 뚱뚱한 두 손을 쭉 뻗으며 구승훈을 향해 웅얼거렸다.누가 봐도 아빠에게 안아달라고 조르는 모습이라 구승훈은 연정이를 안아 볼에 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