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메뉴판을 꽉 쥐더니 말했다.“그래요? 제가 가격을 제시한다고 해도 구 대표님의 사람을 감히 건드릴 수나 있겠어요?”안현우는 박장대소를 지었다.“그 부분은 걱정할 필요 없을 거예요. 승훈이가 그러는데 제가 하리 씨를 만나는 데 성공하면 하리 씨를 저에게 주겠다고 했거든요.”강하리는 어지러운 느낌과 함께 얼굴이 창백해졌다.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팠지만 그래도 억지웃음을 지었다.“언제 그러셨는데요?”강하리는 전에 구승훈과 싸웠을 때 홧김에 한 말이라고 생각했다.구승훈은 감정이 없는 사람이긴 해도 소유욕이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갑자기 떠난다고 했으니 홧김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정상이라고 생각했다.예전에 자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안현우랑 가도 된다고 말했을 때처럼 말이다.하지만 안현우의 말 한마디에 이 모든 환상이 깨지고 말았다.“두 날 전에요. 제가 하리 씨한테 관심 있다고 말했더니 마음대로 하라더군요. 그리고 가격을 제시할 때 좀 더 올려보라고 하기도 했고요.”이때 메뉴판 날카로운 종이에 손이 베어 피가 뚝뚝 흘러내렸지만,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여전히 메뉴판을 꽉 잡은 채 마지막 자존심을 위해 억지 미소를 지었다.“안 대표님 저 편식한다는 거 잊으셨어요?”대놓고 거절했지만 안현우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고 갑자기 강하리 앞으로 다가오더니 말했다.“강 부장, 지금은 가격 제시할 자격이 있다지만 승훈이한테 차이면 사람들한테 놀아나는 노리개일 뿐이에요. 그때 되면 값어치도 없어요.”그러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앉더니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니까 강 부장,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다음 스폰서를 알아보는 것이 좋을 거예요. 저는 강 부장이 먼저 가격 제시하기를 기다리고 있을게요.”말을 끝낸 안현우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강하리는 고개 숙여 자신의 피가 묻은 메뉴판을 바라보았다.비록 작은 상처였지만 깊숙이 파여 피가 멈추지 않았다.하지만 마음이 더욱 아팠다.그동안 구승훈이 자신을 향해 보여줬던 소유욕 때문에
손연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전에는 강하리가 아이를 지우겠다면서 구승훈과 헤어지겠다고 말한 적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아이를 위해서인지 그 일을 다시 입 밖에 꺼낸 적 없었다.‘요즘 들어 승훈 씨도 언급하지 않더니. 오늘은 왜 이러는 거지?’“구승훈 그 개자식 또 무슨 짓을 했는데?”손연지는 그녀를 쳐다보면서 물었다.“송유라 때문이야?”강하리는 고개를 흔들었다.“계속 생각해 왔던 일이야.”단지... 여러 가지 원인 때문에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강찬수 때문인 것도 있었고 엄마 치료비 때문인 것도 있었지만 지금은...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위해서였다.걱정되는 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엄마의 치료비는 몇 달 치 모아두긴 했지만 임신한 후부터 구승훈을 떠나면 바로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그리고 출산하면 아이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충분한 저축이 없이는 생활하기가 어려웠다.그래서 계속 구승훈의 옆에 남아있기로 한 것이다.구승훈이 송유라를 향한 부드러움을 지켜보면서도, 자신을 향한 차가움을 견딜 수밖에 없었다.아이를 위해서라면 구승훈과 송유라가 함께 자는 것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렇게 나중에 멋있게 뒤돌아 떠나려고 했지만, 너무도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자신의 감정이 이미 마비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구승훈이 자꾸만 그녀를 심란하게 하고 마음의 상처를 안겨주고 있었다.“정말 잘 생각했어?”손연지는 미간을 찌푸렸다.비록 늘 구승훈이 나쁜 놈이라고 욕했지만 그래도 그가 강하리한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을까 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아이가 생겼기 때문에 아이한테는 온전한 가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그리고 중요한 것은 강하리가 매달 4천만 원 정도의 의료비를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구승훈을 떠나면 의료비 때문에 숨을 못 쉴 거고 더욱이 아이도 키우지 못할 것이었다.그래서 강하리가 더는 구승훈을 떠나겠다는 말을 하지 않자 손연지도 굳이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최소한 아이는 구승훈
구승훈의 옆에는 늘 여자가 부족한 적이 없었다.그중에는 연예인들도 많았지만, 종래로 어느 연예인과 스캔들이 난 적 없었다.그는 이런 장소에 참석하지 않고 카메라 앞에도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이번이 처음이었다.강하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역시 첫사랑은 다르네.’이렇게 대놓고 공식 석상에 선 이 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안현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자신이 마치 다른 사람의 자리를 빼앗은 도둑처럼 비겁하고 파렴치하다고 느껴졌다....강하리는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먼 곳에 있는 강찬수를 발견했다.그는 손에 술병을 하나 든 채 어질어질한 상태로 동네 입구에 앉아있었다.그렇게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물었다.“혹시 강하리를 아세요?”강하리는 발걸음을 멈칫하더니 뒤돌아 옆에 있던 나무 뒤에 숨었다.그녀는 머리가 어지러운 느낌을 받았다.‘왜 날 찾으러 온 거지? 2억 원 벌써 다 쓰셨나?’강하리는 나무 뒤에 숨어 한숨을 내쉬더니 핸드폰을 꺼내 경비 아저씨한테 전화하려고 했다.하지만 경비 아저씨는 몇 번이고 내쫓았는데 안 간다고 대답했다.그리고 입구에서 강하리를 아는지만 묻고 다른 짓을 안 했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었다.나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신도윤의 전화였다.그녀는 한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전화를 받았다.“강 부장님, 대표님께서 이따 기사님이 데리러 오신다고 짐 정리 해놓으라십니다. B 시로 출장 가셔야 될 것 같습니다.”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렸다.“B 시에는 무슨 일로요?”신도윤은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께서 말씀 안 하셨습니다. 그저 오시라고 하셨습니다.”강하리는 가기 싫었다.‘유라와 함께 B 시 예술 페스티벌에 참석했으면서 왜 나보고 오라는 거야?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그러는 건가?’강하리는 이에 관심이 없었다.“저... 안 가도 돼요?”신도윤이 말했다.“대표님께서 만약 가기 싫으면 합리한 이유를 대라고 하셨습니다.”강하리는 할 말이
강하리는 동공이 흔들렸다.“대표님, 지금 신경 쓰여서 그러는 거예요?”구승훈은 피식 웃었다.“강 부장 아직 잠 덜 깼어?”강하리는 갑자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답 안 했으니까요.”구승훈은 그녀를 차갑게 쳐다보았다.“왜, 가격이 마음에 안 들었어?”“저한테 가격 제시하라고 하면서 제 소식을 기다리겠다고 하셨어요.”구승훈은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그러면 강 부장이 아직 가격을 결정하지 못했다는 뜻이야?”강하리는 구승훈을 쳐다보면서 일부러 자연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제가 제시하는 가격이 마음에 걸리는 거예요, 아니면 제가 가격을 제시할까 봐 걱정되시는 거예요?”구승훈은 피식 웃으면서 그녀를 놓아주더니 소파에 앉아 쳐다만 볼 뿐이었다.“가격을 제시하든 말든, 얼마를 제시하든 그건 너의 일이야. 나는 그저 강 부장이 계약을 어길지 말지에만 관심 있는 거고.”마치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이 말해 강하리는 가슴이 아팠다.진작에 이런 식의 떠보기는 자신의 얼굴에 침 뱉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시도해 보려고 했다.이 남자가 자신을 조금이라도 신경 쓰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결국엔... 예상대로 조금이라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이러한 결과라고 해도 그나마 예상했던 것보다 나은 결과라고 생각했다.강하리는 생각을 멈추더니 말했다.“그저 물어봤을 뿐이에요. 대표님이랑은 계약 기간이 아직 2년이 남아있기 때문에 이 기간에 다른 스폰서를 찾을 생각은 없었어요. 가격을 얼마로 제시하든 동의할 마음도 없고요.”구승훈은 그녀를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강 부장 그래도 계약을 잘 지키는 사람이네.”비웃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고 질문했다.“대표님,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구승훈은 소파에 늘어진 채 그녀의 허리에 손을 올려놓더니 말했다.“내일 F 국 고객을 만나야 하는데 강 부장 번역하는 거 좋아하잖아? 내일 나를 따라 번역일이나 해.”강하리는 그가 이런 제
구승훈은 그녀를 밀쳐내고 다시 고개 숙여 자료를 쳐다보더니 한마디 내뱉었다.“강 부장 질문이 너무 많아. 이제부터 유라와 관련된 일 묻지 마.”강하리는 소파에 앉아 손을 꼼지락거리더니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네.”될수록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웃었다.“다시는 물어보지 않을 테니 화내지 마세요.”그러고는 또다시 차를 준비했다.구승훈 수중에 있는 자료는 내일 쓰일 자료인지 유난히 열심히 보고 있었다.강하리도 온밤 그의 옆을 지켰다.최근에 입덧은 좀 가라앉았지만 그 대신 자꾸만 졸음이 몰려왔다.고요한 방안, 자료를 넘기는 소리만 들려왔다.찻상 앞에 앉아있던 강하리는 자기도 모르게 잠들어버렸다.구승훈은 그녀를 들어 안아 침대에 눕혔다.“뭐 때문에 이렇게 피곤해? 내가 집에 없는 동안 밖에서 무슨 짓을 했길래?”구승훈의 중저음에 강하리는 순간 정신을 차렸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요즘 수면 질량이 안 좋아서요.”구승훈은 피식 웃었다.“수면 질량이 안 좋다면서 아까는 잘만 자던데?”강하리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구승훈의 옆에서 늘 긴장을 늦추지 못했던 그녀는 오늘 결국 곯아떨어지고 말았다.편해져서인지 아니면 임신 초기 증상 때문인지 몰랐다.구승훈은 그녀를 안방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고는 뒤돌아 욕실로 향했다.아직 잠이 덜 깨서인지 구승훈이 자신을 부드럽게 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개를 돌렸을 때 구승훈은 천천히 셔츠 단추를 풀고 있었다.셔츠를 벗어 내리자 넓은 어깨, 넓은 등판, 완벽한 허리라인이 시야에 들어왔다.그는 이 순간 남자의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승훈 씨.”강하리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고 구승훈은 그녀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강하리는 침대에서 내려오더니 결국 그의 목을 감싸안았다.지금 이러는 것은 그의 부드러움에 혹했는지, 아니면 B 시에 온 이유가 송유라 때문이 아니라는 말 때문인지 몰랐다.강하리는 구승훈과 싸운 이후로 처음으로 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구승훈은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강하리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을 받아 벌떡 윗몸을 일으키더니 네이버 포털사이트를 열었다.인기 검색어에는 ‘송유라, 의문의 남자와 호텔을 드나들어’라는 검색어가 떡하니 있었다.강하리는 사진 속 의문의 남자를 보자마자 구승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전날 함께 찍힌 사진이 있었기 때문에 네티즌들도 그 남자가 구승훈이라는 것을 눈치챘다.「구승훈은 구씨 가문의 진정한 실세잖아요.」「에비뉴 주얼리도 갖고 있잖아요.」「이렇게 권력도 있고 돈도 많은 남자가 갓 귀국한 연예인을 만나다니, 스폰서로 만나는 거 아닐까요?」댓글 방향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송유라는 에비뉴 주얼리 광고모델로서 브랜드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자신의 이미지가 바닥나면 브랜드도 망할 수 있었다.강하리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여러 가지 수습할 방법을 모색해 보았다.이때 안예서에게 전화하기도 전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문을 열자 신도윤이 문 앞에 서 있었다.“강 부장님, 대표님께서 모시고 오라십니다.”강하리는 멈칫하고 말았다.“인기 검색어 때문에 그러세요?”신도윤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고개만 끄덕였다.강하리는 더는 질문하지 않고 짐을 정리한 후 신도윤을 따라나섰다.현재 구승훈이 있는 호텔은 이곳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강하리가 도착했을 때 구승훈은 어두운 표정으로 방 안에 앉아있었다.그리고 그 옆에는 구승재와 송유라의 매니저가 서 있었다.“대표님.”강하리가 노크하면서 들어왔다.“인기 검색어에 관해서는...”“너야?”강하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구승훈이 먼저 질문했다.그는 어두운 눈빛과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강하리는 나머지 하려던 말을 그대로 꿀꺽 삼키고 물었다.“무슨 뜻이에요?”구승훈의 목소리에는 전혀 감정 기복이 없었다.“인기 검색어 네가 그런 거야?”강하리는 머릿속이 복잡해졌고 이 순간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누가 감히 대표님을 기사에 올려? 그것도 모자라 사진까지? 예전에도 대표님 곁에는 늘 연예인이 함께했는데 파파라치한
“강 부장님, 괜찮으세요?”강하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더니 입을 열었다.“괜찮아요.”신도윤은 그녀를 위로 해주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결국, 입을 다문 채로 조용히 강하리를 위해 차 문을 열어주었다.강하리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눈을 감았다.‘어제저녁에는 내가 무슨 생각으로 대표님이 나한테 부드럽게 대한다고 느꼈었지?’이때 심장이 질식할 듯이 아파져 왔다.얼마 지나지 않아, 안예서한테서 전화가 왔다.“부장님, 수습은 어떻게 할까요? 송유라 씨 매니저한테 연락해 볼까요?”강하리는 침묵을 지키더니 말했다.“상관 마. 대표님이 알아서 처리할 거야.”안예서는 멈칫하더니 알겠다면서 말했다.“부장님, 괜찮으세요?”강하리는 웃으면서 말했다.“괜찮아.”...호텔.구승훈은 무표정으로 소파에 기대어 있었다.그의 옆을 지키고 있던 구승재는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말했다.“형, 강 부장은 아닐 거야.”구승훈은 그를 쳐다보더니 말했다.“또 뭘 알고 있는 거야?”구승재가 피식 웃었다.“이렇게 해서 자신한테 아무런 도움이 없잖아. 그리고 강 부장은 몰래 이런 짓이나 꾸밀 사람이 아니라는 거 형도 잘 알잖아. 3년이나 함께 있었는데.”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이 점을 이용해서 한 짓이라면?”구승재는 미간을 찌푸렸다.‘설마...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이렇게 큰 리스크를 무릅쓸 이유가 있었을까? 형이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낫겠지.’“제일 처음 이 기사를 퍼뜨린 기자를 불러봐.”구승재가 대답했다.“그래, 기자한테 물어보면 되잖아.”구승재가 입구까지 걸어가기도 전에 구승훈이 한마디 했다.“유라 몰래 알아봐.”구승재는 멈칫하더니 대답했다.“알았어.”이 기사를 처음으로 퍼뜨린 기자는 30몇 살짜리 파파라치였다. 구승재한테 끌려왔을 때까지만 해도 어리둥절해하더니 구승훈을 보자마자 이렇게 질문했다.“혹시 구승훈 씨 맞으세요?”구승훈이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포스를
호텔로 돌아온 강하리는 핸드폰으로 계좌이체 메시지를 받게 되었다.바로 그 1억 원이었다.강하리는 이 메시지를 보더니 곧바로 인기 검색어를 확인했다.역시나 기사 제목은 의문의 남자로부터 송유라의 첫사랑이라고 바뀌어 있었다.밑에 있는 댓글도 난리가 났다.축하해주는 사람도 있었고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심지어 둘이 화해했냐고 질문하는 사람도 있었다.강하리는 잠시 후 에야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은 유라가 원하는 대로 관계를 밝힌 거야. 그리고 나는 어차피 돈을 목적으로 만났으니까 돈으로 입막음한 거지. 역시 대표님은 아주 냉정해.’강하리가 핸드폰을 거두려고 했을 때 신도윤한테서 연락이 왔다.“대표님께서 옷을 갈아입으시라고 하십니다. 잠시 후 고객님 만나러 데리러 오실 겁니다.”강하리는 침묵을 지킬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비록 서운했지만 구승훈한테 서운하다고 말할 자격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강 부장님?”강하리가 대답했다.“네.”강하리는 전화를 끊은 후 구승훈이 전날 저녁에 사줬던 치마로 갈아입었다.길이가 무릎까지 오는 블루 계열의 치마였다.그녀는 환복을 마치고 메이크업까지 마쳤다.임신한 뒤로 메이크업한 적 없었지만, 오늘은 특별히 메이크업하기로 했다.반 시간 뒤, 구승훈한테서 연락이 왔다.강하리가 1층에 내려오고, 구승훈은 차창을 내려 그녀를 보더니 눈썹을 움찔했다.블루 계열의 치마를 입으니 피부가 더욱 백옥같았다.“치마 괜찮네.”구승훈은 차창에 기대어 무심결에 한마디 내뱉었고 강하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차에 올라탔다.고객님과는 골프장에서 만나기로 했고 강하리는 구승훈의 곁을 따르면서 조용히 그가 하는 말들을 번역만 할 뿐 끝날 때까지 쓸데없는 말 한마디조차 하지 않았다.그래도 일이 원만히 끝나 상대방이 계속 합작하려는 의향을 보여주었다.차에 올라타고, 구승훈은 고개 돌려 강하리를 쳐다보았다.“화났어?”강하리는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대표님, 혹시 저희 관계 일찍
구승훈은 상처받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었다.“하리야, 넌 늘 그렇듯 매정하네.”강하리가 뒤돌아 휴대폰으로 택시를 부르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휴대폰을 움켜잡았다.“딱 하룻밤만. 너 안 건드릴게, 응?”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하리야, 내 소원 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해. 네가 이 집에서 아이와 함께 지내는 모습을 몇 번이나 상상했는지 몰라. 여기가 우리 집이야.”강하리의 코끝이 시큰거렸지만 그래도 결국 구승훈의 손을 뿌리쳤다.너무도 분명한 그녀의 거절에 구승훈은 답답한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고 쓴웃음을 짓던 그는 더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샤워하고 나오면 다시 데려다줄게.”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화장실로 들어갔다.구승훈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강하리는 통화 중이었다.발걸음이 멈칫한 그는 통화 상대가 주해찬이란 것을 알아차렸다.“선배, 전 괜찮아요.”“알았어, 항공편 예약해. 나도 같이 갈게.”강하리가 전화를 끊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를 껴안고 고개를 숙여 입 맞추었다.“구승훈!” 강하리는 그의 키스에 깜짝 놀라 그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구승훈은 점점 더 꽉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강하리의 턱을 잡고 깊숙이 파고들며 조금의 부드러움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마치 화풀이나 비난하듯 키스를 퍼부었다.강하리는 벽에 단단히 밀려서 몸부림을 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그녀가 다리를 들어 그의 아랫도리를 가격하려는데 구승훈이 먼저 그녀의 다리를 붙들었다.강하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구승훈의 키스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힘의 격차로 인해 그녀는 반격할 방법이 없었다.강하리는 화가 나서 얼굴마저 하얗게 질렸고 구승훈은 실컷 헤집어놓은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강하리가 그의 뺨을 때렸고 이내 구승훈의 얼굴엔 손자국이 생겨났다.그러나 그의 손가락은 키스로 인해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하리야, 나 생각이 바뀌었어.”강하리가 멈칫했다.“무
그리고는 강하리를 곧장 차에 밀어 넣었다.차는 빗속을 뚫고 달려 나갔다.구승훈의 차는 굉장히 빨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시내를 벗어나 한 별장 앞에 멈춰 섰다.구승훈은 주차가 끝나자마자 차에서 내려 강하리를 빌라 안으로 끌어당겼다.빌라는 강하리가 선호하는 스타일로 안팎을 의도적으로 꾸몄다.안으로 들어선 강하리는 몸이 굳어버렸다.“여긴 내가 준비한 신혼집이야.”구승훈이 문득 등 뒤에서 이렇게 말했다.“결혼하면 여기서 지내려고 했어. 하리야, 정말 이대로 날 버릴 거야?”강하리는 꾸며진 방을 둘러보며 마음이 씁쓸했지만 애써 두 눈에 담기는 감정을 감추었다.“구승훈, 내가 그렇게 고통받는 걸 어떻게 지켜보기만 했어?”말문이 막힌 구승훈은 갑자기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미안해.” 남자의 목소리는 죄책감으로 가득했다.“다 내 잘못이야.”강하리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며 낮은 웃음을 지었다.너무 지쳤다.한때 열정적이었던 사랑이 이제는 고문처럼 느껴졌다.그날 구승훈이 아직도 자기를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강하리는 답을 알 수 없었다.어쩌면 오랫동안 사랑했던 남자일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미워하는 마음이 더 컸다.강하리는 구승훈이 진심으로 미웠다.그의 무자비함과 강압적인 성격이 싫었다.둘 사이에서 그는 항상 그녀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행동했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그래, 어쩌면 그는 그녀를 위해, 아이를 위해 그랬을 수도 있다.하지만 자신이 해준 것들이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인지 물어본 적은 없었다.강하리가 발버둥쳤지만 구승훈은 더 꽉 끌어안았다.“구승훈, 그만하자.”구승훈의 목소리가 잠겼다.“그만하자니, 무슨 말이야? 하리야, 우리 사이가 이대로 끝날 것 같아? 문씨 집안도, 구씨 집안도 망했고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다 사라졌는데 이제 와서 그만하자고?”“우리 아이가 죽었잖아!”뒤돌아선 강하리의 눈엔 온통 고통만이 가득한 채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구
“어떻게 알았어?”구승훈은 웃으며 눈을 내리깔고 테이블 아래 두 사람이 잡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이상해?”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하리야, 내가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당연히 네 일에 대해선 다 알고 있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손을 빼냈다.“그럴 필요 없어.”유난히 침착한 그 말이 구승훈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필요한지 아닌지는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강하리, 내가 뭘 하든 그건 내 일이야.”강하리가 비웃었다.“하지만 난 이제 당신이랑 더 엮이고 싶지 않아.”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몇 마디 말로 두 사람 사이는 또다시 교착 상태에 빠졌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온 강하리는 그제야 휴대폰을 꺼내 안예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녀는 최소한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는 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구승훈이 옆에 앉아있자 마치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던 치유할 수 없는 상처, 두 사람의 목숨이 다시금 떠오르는 듯했다.그녀의 어머니와 아이...강하리가 가정에서 나오는데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멍하니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데 문득 연정이가 사고를 당한 날 밤도 비 오는 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그날 밤이 어땠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연정이가 이렇게 비 오는 밤에 춥고 무서워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강하리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비를 바라보다가 눈가에 차오르는 시큰함을 꾹 참고 빗속으로 걸어가는 순간 머리 위로 드리워진 우산이 그녀를 덮었다.고개를 들자 미소를 머금은 주해찬의 눈동자와 마주쳤다.“그렇게 비속우로 달려가면 감기 걸리잖아.”강하리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우산 챙기는 걸 깜빡해서.”“왜 전화 안 했어?”주해찬의 우산은 완전히 그녀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내가 마침 저녁을 먹으러 오지 않았으면 이대로 비를 맞으며 돌아가려고 했어?”주해찬의 눈에는 나무람과 관심이 가득했고 강하리는 웃으며 시선을 다른 곳
B시 대양그룹.정양철이 사무실로 들어가니 이미 비서가 대기하고 있었다.“강하리 검색어는 어떻게 된 거야?”비서는 잠시 머뭇거렸다.“사모님께서 대양그룹 명의로 매수한 것인데 아마도 회장님을 시험하려는 의도 같습니다.”정 회장이 강하리를 아낀다면 이 일을 거론할 것이고 신경 쓰지 않는다면 하든 말든 넘어가겠지.정양철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스쳤고 그가 말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주현이 통해 강하리에게 연락해서 대양그룹이 JM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말을 전하라고 해.”말을 마친 그가 멈칫했다.“집사람이 물어보면 강하리에 대한 보상이라고 하고.”비서의 눈이 번뜩이더니 대답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강하리는 정주현의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지난번 구승훈과 함께 대양그룹 입찰을 뺏은 이후 정양철 측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하지만 이번에는 정양철이 무슨 꿍꿍이로 합작을 원하는 건지 모르겠다.지금은 정양철을 상대로 놀아줄 기분이 아니었다.“정주현 씨, 대양그룹에서 마음만 먹으면 파트너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겠죠?”정주현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듣고는 다소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강하리 씨, 우리랑 같이 일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강하리가 함께 일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려던 찰나, 정주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B시에 언제 와요? 얼굴 보고 얘기할까요? 협업 안 해도 오랜만에 얼굴 한번 봐요. 우리 안 본 지 오래됐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알았어요, 그럼 가면 연락할게요.”정주현이 전화를 끊자 사무실 앞에 서 있는 연미숙의 모습이 보였다.“엄마, 여기서 뭐 해?”연미숙이 웃었다.“우리가 강하리랑 같이 일해?”정주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아빠가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구씨 집안에 매달리는 게 아니라 밖으로 사업을 넓히려는 것 같아.”연미숙은 인상을 찌푸렸다. “꼭 강하리여야만 대외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거야?”정주현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강하리가 왜?”연미숙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
구승훈은 차갑게 웃으며 자신도 모르게 핸들을 꽉 움켜쥐었다.그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두 사람이 차 안에서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모르겠지만 강하리의 얼굴에 번진 미소가 전혀 억지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화사한 아침 햇살 같은 그 미소가 구승훈은 왠지 모르게 눈에 거슬렸다.강하리는 차에서 내려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구승훈의 차가 보였다.그녀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지만 시선을 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강하리가 안으로 들어간 후 주해찬은 차에서 내려 구승훈의 차 쪽으로 걸어갔다.그가 창문을 살며시 두드리자 구승훈이 창문을 내렸다.“구 대표님 시간 있으세요? 얘기 좀 할까요?”구승훈은 가볍게 웃었다.“주해찬 씨는 남의 연애에 참견하는 걸 좋아하나 봐요?”구승훈의 가시 돋친 말에도 주해찬은 계속 웃기만 했다.“구승훈 씨, 당신과 하리가 잘 지낸다면 나도 굳이 끼어들고 싶진 않은데 당신은 하리를 행복하게 해준 적이 있긴 한가요?”그의 말에 구승훈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그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들이마신 후 말을 시작했다.“주해찬 씨, 행복하든 아니든 그건 다 나와 강하리 사이의 일이지 당신이랑은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주해찬은 조롱 섞인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웃었다. “구승훈 씨, 내가 하리 데려간다고 했죠. 이번엔 말한 대로 합니다.”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다시 차로 향했다.구승훈의 얼굴에서 미소가 조금씩 완전히 사라진 채 떠나는 차를 바라보았다.그는 한참 동안 손에 쥔 휴대폰을 내려다보면서 결국 강하리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했다.[그 자식이랑 떠날 거야?]강하리가 위층으로 올라가는데 전화벨이 울렸고 그녀는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그냥 대화창을 닫아버렸다.구승훈은 전송된 메시지에 답장이 오지 않자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며 입안의 쓴맛을 삼키고 휴대폰을 치우려던 찰나, 구승재의 전화가 걸려 왔다.“형, 큰어머니가 그
“죽기 전엔 안 해.”심준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극단적인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구승훈의 손가락이 한참을 굳어 있다가 말을 꺼냈다.“안 해.”하고 싶었지만 그게 그녀를 더 멀리 밀어낼까 봐 더 두려웠다.심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 문제의 핵심은 아이였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곧바로 아이 문제로 말을 돌렸다.“아이는 어떻게 된 거야? 문연진이 어떻게 아이의 존재를 안 거야?”구승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구승재가 통화하는 걸 들었어.”심준호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정말 문연진이 아니야?”구승훈은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그 여자가 아니야.”문연진은 이미 연정이를 죽였다고 인정했는데 굳이 연정이를 차로 치어 산에서 떨어뜨렸다고 말할 필요는 없었다.그녀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단 한 가지, 도중에 가정부가 연정이와 함께 차에서 내린 사실을 모른다는 것.“그럼 문연진 말고 또 아는 사람이 있어?”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여초연, 문연진 말로는 그날 밤 그 말을 들었을 때 마침 여초연이 그 자리에 있었다고 했어.”멈칫한 심준호의 눈에서 차가움이 번뜩였다.여초연이란 사람은 솔직히 줄곧 속내를 알 수 없었다.전에는 여러 번이나 구승훈을 죽이려고 했다가 지금은 무척 다정하게 굴었다.그 여자는 지금까지도 끔찍한 존재로 느껴졌다.“설마 그 사람이?”심준호는 문득 구승훈이 안타까웠다.정말 여초연이라면 구승훈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아직 확인하고 있어.”심준호는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만 해.”구승훈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심준호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고 이 문제가 해결되었기에 그도 떠났다.심준호를 배웅하고 차로 돌아온 구승훈의 휴대폰이 울렸다.“형, 어제 강하리 씨 인기 검색어가 대양그룹과 관련이 있어.”구승훈의 눈에 냉기가 감돌았다.“최근 정양철 측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었어?”“아니, 이 검색어 말고는 그동안 잠잠했
강하리의 입꼬리가 굳어지며 다시 말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심준호는 인상을 찌푸리며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한 대의 자동차가 도로변에 멈춰 서는 것을 목격했다.주해찬이 차에서 내려 이쪽으로 걸어왔다.심준호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이렇게 말했다.“직접 만나서 고맙다고 말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말을 마친 그는 강하리에게 눈썹을 치켜세웠고 강하리는 길 건너편에 주차된 너무나도 낯익은 차를 보았다.검은색 마이바흐 창문은 반쯤 내려져 있고 차에 탄 남자는 담배를 손에 쥐고 있었다. 멀리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구승훈이 이쪽을 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그쪽을 힐끗 쳐다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그러면 나중에 메시지 보낼게요.”심준호는 웃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해찬을 바라보기만 했다.“그러면 그동안 잘 돌봐주세요.”주해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말을 마친 그가 강하리를 이끌고 나가려는 순간 갑자기 강하리의 손목이 잡혔다.어느 틈엔가 구승훈이 길을 건너 이쪽으로 걸어왔고 주해찬이 얼굴을 찡그리며 막으려는데 심준호가 옆에서 말렸다.강하리의 손가락이 살짝 조여졌다.“구승훈 씨, 이거 놔요.”구승훈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웃었다.“하리야, 이제 고맙다는 말도 안 할 거야?”강하리의 몸이 굳어지고 입꼬리가 몇 번 움직이다가 말을 꺼냈다.“고마워요.”말을 마친 그녀는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이제 놔줄래요?”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놓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나한테 꼭 이래야겠어?”강하리가 시선을 피했다.“구승훈 씨,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잖아요.”그가 원망스러웠다.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를 보면 연정이가 생각난다는 사실이었다.숨도 쉴 수 없을 것만 같은 고통은 더 이상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구승훈은 차갑게 웃었다.“나도 놔주지 않겠다고 했잖아. 하리야, 얘기 좀 하자.”강하리의 눈이 빨개지며 입을 열자 목소리까지 떨리고 있었다
강하리가 유치장 벤치에 기대어 홀로 앉아 있었다.머릿속에는 구승훈이 차를 막았을 때와 이곳을 떠날 때의 모습만이 가득했다.강하리는 눈을 지그시 감고 그 모든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밀어내려 했지만 그 남자의 움직임은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그가 이름을 불러줄 때, 그 다급하면서도 부드러운 어투가.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점점 더 가슴이 아파져 오는 것을 느꼈다.노민우의 말이 틀린 게 없다는 건 안다.구승훈의 의도는 좋지만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생각만 해도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밤새 달려온 심준호의 시야에 들어온 건 여자가 벤치에 홀로 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가녀린 어깨를 떨고 있는 모습이었다.그는 부드럽게 한숨을 쉬며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강하리는 고개를 들어 앞에 서 있는 심준호를 보았다.“심 변호사님.” 낮게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엔 어딘가 억울함이 담겨 있었다.심준호는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살살 어루만지며 나지막이 말했다.“겁내지 마요. 내가 아무 일도 없게 할 테니까.”강하리는 눈가에 맺힌 시큰한 감각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심준호는 손에 든 음식을 그녀에게 건넸다.“아직 밥 안 먹었죠?”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 “배 안 고파요.”심준호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배 안 고프면 안 먹을 거예요?” 그는 곧바로 음식을 열고 숟가락을 그녀의 손에 밀어 넣었다.“마침 나도 안 먹었는데 같이 먹어요.”강하리는 거절하지 못했지만 그 음식들을 보자마자 그녀의 움직임은 멈췄고 자신도 모르게 숟가락을 꽉 움켜쥐었다.“왜요, 입맛에 안 맞아요?”심준호는 눈썹을 치켜뜬 채 그녀를 바라보았고 강하리는 음식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안 맞는 게 아니라 너무 입맛에 맞아서 문제다.그녀의 취향에 딱 맞는 요리를 주문했다.심준호가 웃었다.“좋아하면 많이 먹어요. 그동안 야윈 것 좀 봐요.”강하리가 그를 슬쩍 쳐다봤다.“구승훈 씨가 주문한 거예요?”심준호는 새우를 그녀의 그릇에 넣어주었다
구승훈이 떠난 후 강하리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하리야...”손연지는 어쩔 줄 몰라 했다.하지만 막상 부르고 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노민우를 노려보았다.노민우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대략 알고 있었기에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꺼냈다.“강하리 씨, 이번 일은 승훈이 잘못이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 거예요. 승훈이도 아이를 지키기 위한 의도였어요. 아이의 상황이 그렇게 위험하지 않았다면 절대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거예요. 지금까지 힘들게 버텨왔는데 그래도 하리 씨가 조금만 더 너그럽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요...”“됐어, 입 다물어!”손연지가 끼어들었다.“하리가 얼마나 더 너그럽게 봐줘야 해? 심지어... 아주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하리는 더 원망하지 않았어. 그 사람은 뭔데? 그래, 정말 아이를 지키려고 그랬을지 몰라도 하리를 고통스럽게 한 건 사실이잖아. 한번 또 한 번 하리가 그 사람 때문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는지 알아? 하리는 이해해 줬는데 그 사람은 하리를 이해해 준 적 있어? 하리가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고통까지 겪어야 해?”손연지의 이어지는 반박에 노민우는 할 말을 잃었다.“난 그냥 강하리 씨에게 좋은 말을 해주려고 그런 건데.”손연지는 강하리를 바라보았다.“하리야, 무슨 일이 있어도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남자든 아이든 너만큼 중요하지 않아, 알겠지?”강하리는 눈가에 담긴 씁쓸함을 감추기 위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알아. 고마워, 연지야.”손연지가 부드럽게 토닥이며 주해찬에게 고개를 돌렸다.“더 달래봐요.”주해찬은 고개를 끄덕였고 손연지는 노민우를 밖으로 끌어냈다.주해찬은 몸을 숙인 채 강하리를 같은 높이에서 바라봤고 강하리는 그의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선배, 난 괜찮아요.”주해찬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지만 거절당할 것을 생각하며 결국 참았다.그는 말을 하기 전까지 한참 동안 침묵했다.“하리야, 이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