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주해찬은 가슴속에 아릿한 통증이 밀려왔다.그저 단순하고 행복하게 살아도 될 여자가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할까.거듭 아이를 잃는 고통을 그녀가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내가 아이를 못 지켰어요, 내가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어요.”자책으로 가득 찬 그녀의 말을 들으며 주해찬은 가슴이 아파 숨조차 쉴 수 없었다.“하리야, 넌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 알겠지? 넌 그 아이에게 잘못한 게 하나도 없어.”하지만 강하리의 눈물은 코끝을 타고 조용히 흘러내렸다.주해찬은 아릿한 고통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꾹 참던 그는 결국 주체하지 못하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하리야, 울지 마.”손연지는 붉어진 눈으로 애써 시선을 돌리며 그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자기가 울면 강하리의 마음이 더 아플까 봐.강하리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으려 애썼다.“선배, 고마워요. 진 장관님께도 고맙다고 전해줘요.”주해찬은 얼굴을 찡그렸다.“고맙다는 말은 됐어. 진 장관님도 오시려다가 외교부에 일이 많아서 쓸데없는 생각 말고 푹 쉬라는 말 전해달라고 하셨어.”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리자 휠체어에 앉아 있는 구승훈이 보였다.그의 얼굴은 핏기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창백했다.“선배, 전 괜찮아요.”강하리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낮은 목소리로 주해찬에게 말했다.구승훈은 울어서 빨갛게 부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둔탁한 아픔이 가슴에 밀려왔고 안색도 한층 더 창백해졌다.“형...” 그걸 지켜보는 구승재도 가슴이 아팠다.구승훈은 고개만 저었다.“괜찮아, 나 좀 밀어줘.”구승재가 휠체어를 밀고 들어오자 구승훈이 말했다.“인터넷 문제는 해결됐어.”강하리는 시선을 돌리며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다리 위에 있던 죽을 침대 옆 탁자에 올려놓고 포장을 뜯었다.“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뭐 좀 먹을래?”“배 안 고파.”구승훈은
“형!”구승훈이 황급히 손을 들었다.“괜찮으니까 소란 피우지 마.”하지만 구승재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그를 데리고 다시 검진받으러 갔다.강하리는 방에서 구승재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잠시 멈칫했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주해찬은 옆에 놓인 죽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어?”강하리는 시선을 내리며 답했다.“선배, 저 입맛 없어요.”주해찬은 한숨을 쉬며 죽을 건넸다.“애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이 입맛 없다고 안 먹으면 안 되지.”말하며 손연지를 돌아보았다.“그쪽이 먹여줘요.”손연지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와 죽을 건네받았다.강하리는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지만 한입 먹을 때마다 속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것 같았다.주해찬은 강하리가 죽 한 그릇 먹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누워서 좀 쉬어. 너 자는 거 보고 갈게.”강하리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그저 빨리 낫고 싶었고 그래야 아이의 복수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주해찬은 옆에서 눈을 감고 있는 그녀를 지켜보면서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다가 곧 눈가가 촉촉이 젖어갔다.손연지가 옆에서 한숨을 쉬었다.“주해찬 씨, 이만 돌아가세요.”주해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강하리를 다시 한번 바라본 뒤 밖으로 나갔다.병동 문을 나서자 밖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구승훈은 응급실로 이송되었고 주해찬은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구승훈이 어떤 상태인지, 심지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오로지 강하리가 무사히 이겨내는 것만이 그의 관심사였다.그녀가 삶의 의지를 버리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겨우 아이로 한 줄기 희망을 붙들고 살았는데 이젠 아이도...주해찬은 남자인 자신도 이런 일을 겪으면 이겨낼 자신이 없었을 것 같았다.그가 문 앞에서 한참 동안 서 있는데 이윽고 손연지가 밖으로 나왔다.손연지는 아직도 문 앞에 서 있는 주해찬을 보자
그에게서 이런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교통사고를 당했을 때조차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강하리는 가슴이 답답했지만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그녀가 시선을 내린 채 그의 눈을 피하는데 구승훈은 이미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그는 신발도 신지 않은 채 한겨울에 맨발로 차가운 바닥을 밟고 있었다.강하리의 시선이 그의 발을 스쳐 지나갔다.“퇴원하는 거야?”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해찬을 바라보았다.“선배, 가요.”주해찬이 다가가 강하리에게 목도리를 둘러주려 했지만 놀랍게도 구승훈이 먼저 큰손으로 그녀의 목도리를 잡고 조심스럽게 둘러준 뒤 장갑까지 끼워주었다.“밖에 추워, 따뜻하게 입어.”산부인과 검진을 받으러 갔던 날에도 했던 똑같은 말에 강하리의 눈시울이 이유 없이 붉어졌다.그녀는 구승훈의 시선을 외면했다.“구 대표님, 이러실 필요 없어요.”강하리는 고개를 숙인 채 옷을 추스르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그런데 구승훈이 갑자기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하리야, 돌아가면 몸조심해.”강하리는 눈가에 눈물이 맺히며 가슴 한구석에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구승훈에게서 벗어나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갔다.그녀의 결연한 뒷모습을 바라보는 구승훈의 두 눈엔 억눌린 아픔이 고스란히 담겼다.“형, 그냥 얘기해. 이러다 하리 씨 정말 떠나겠어.”구승훈은 다소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아이의 안전이 먼저야.”“그럼 송유라 일은? 그건 왜 설명 안 해? 분명...”구승훈은 멀어지는 강하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나와 멀어지는 게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 있어. 내 옆은 너무 위험하니까.”구승재는 심장이 저리며 통증에 숨조차 쉬지 못했다.구승훈은 담배 한 모금 빨아들이며 말했다.“가서 퇴원 수속해.”구승재가 경악했다.“형, 아직 그 몸으로 퇴원 못 해!”구승재가 피식 웃었다.“걱정하지 마, 나 안 죽어.”구승훈은 병원에서 나와 차에 올라탔고 그 차는 연성 휴게소에 도착했다. 구승훈
구승훈은 그날 밤 구씨 가문으로 돌아가 구씨 가문 사람들을 모두 저택으로 불러 모았다.“가주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으니 오늘 여러분을 불러서 제대로 얘기할까 합니다. 이 가주 자리 저도 안 하면 그만입니다. 다른 사람으로 바꾸고 싶으면 오늘 밤 분명하게 얘기하세요.”사람들은 충격받은 얼굴로 서로만 바라보았다.멀쩡한 가주를 갑자기 왜 바꾸겠나?구승훈이 늘 무모하게 행동해도 타고난 사업적 재능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었다.그가 가주가 된 이후 구씨 가문은 줄곧 상승세를 보였는데 이 시점에서 가주를 바꾸는 건 미친 짓이 아닌가?하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을 것 같던 순간, 구정우가 말을 꺼냈다.“자고로 가주는 구씨 가문의 이익을 위해 생각해야 하는데 형은 그동안 무슨 짓을 했지?”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우리 동생이 가주 자리가 탐나나 봐?”구정우는 인정하지 않았다.“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그런 것도 가주라고 한다면 나도 할 수 있지.”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그럼 가주 자리는 이제부터 네가 맡아. 앞으로 이 구승훈은 구씨 가문과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니까.”그의 말에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당황했고 구동근은 허옇게 질린 얼굴로 구승훈을 노려보았다.“구승훈, 대체 원하는 게 뭐야?”구승훈은 웃었다.“없어요. 약속대로 구씨 가문을 무너뜨리려고요.”그날 밤, 구승훈은 10여년 동안 구씨 가문에 심어놓은 세력을 모두 제거했다.구씨 가문 사람들은 구승훈이 지난 10여년간 구씨 가문의 거의 모든 것을 자신의 명의로 옮겼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채무 주식 계약을 통해 구씨 가문의 모든 자산을 대놓고 에비뉴의 명의로 이전하고 모든 인맥과 자원, 심지어 구씨 가문에서 작성한 계약서까지 전부 구승훈이 책임자라는 걸 명확하게 명시해 놓았다.따라서 구승훈이 떠나면 모든 계약은 무효가 된다.구승훈은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고 그날로 즉시 구씨 가문의 자산, 인맥, 자원, 계약서 등을 가지고 구씨 가문을 떠났다.다
강하리는 눈빛에 조금의 온기도 없이 창문 앞에 서 있었다.“하기 싫으면 다른 사람 찾아봐요. 강요하는 사람 없으니까.”“어휴... 못 들은 걸로 해요. 근데 그 몸으로 정말 괜찮겠어요?”강하리가 시선을 내렸다.“내가 전에 말했던 것들 다 준비됐어요?”나문빈은 피식 웃었다.“진작 준비했으니 옆에서 재밌게 구경이나 하라고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주해찬은 담요를 손에 들고 강하리의 어깨에 덮어주었다.“가서 좀 누워 있어.”하지만 강하리는 고개만 저으며 다시 일하러 갔다.며칠 후, 강하리가 드디어 휴식을 끝마치는 날 한동안 강하리를 저격하던 번역업체의 재무 상황 실체가 드러났다.재정 적자, 횡령, 탈세, 불법 계약 등의 문제가 잇따라 불거지며 회사 대표인 문연진은 놀라서 얼굴이 핏기가 없을 정도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그녀는 울면서 문원진에게 달려갔다.“할아버지, 우리 어떡해요!”문원진은 온라인에서 폭로한 재정 문제 기사를 보며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사실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재정적인 문제 하나 없는 회사가 어디 있겠나.그런데 누군가 이것들을 전부 대외적으로 폭로할 줄이야.그는 나지막이 문연진을 다독였다.“겁내지 마, 누가 우리 문씨 가문 사람들을 함부로 건드리겠어. 이미 사람 보내서 윗선에 연락했어. 그깟 작은 회사에 적자가 나도 메꾸면 그만인 거 아니야?”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이미 일이 크게 벌어진 상황이었고 문씨 가문은 큰 노력을 기울였지만 열기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문원진은 여전히 식지 않은 열기에 화가 나서 피를 토할 지경이었다.문연진은 집에서 울며불며 난리를 쳤다.“분명 강하리 짓이야, 강하리 그 나쁜 년이 나한테 복수하는 거야!”옆에서 염진숙이 짜증을 냈다.“네 회사에 문제가 생긴 걸 넌 모르고 있었어? 왜 강하리를 탓해? 너한테 문제가 없었으면 강하리가 아무리 들춰내도 약점 잡힐 일이 있었겠어?”“조용히 해!” 문연진의 눈이 분노로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문원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할
강하리가 모를 리 있나.위험하기도 하고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들도 많았다.문연진을 상대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문씨 가문의 뿌리까지 건드리는 건 힘겨운 일이었다.“알아요.”심준호는 짧게 대꾸하며 말했다.“안다니 다행이네요. 아무튼 내 말은 위험한 일에 휘말리지 마요. 이번 문씨 가문 일은 이미 저질렀으니 내가 도와주겠지만 앞으로 혼자 할 생각이라면 이만 접어요. 하리 씨 안전이 제일 중요하고 복수는 승훈이가 할 일이에요.”강하리의 눈가에 살짝 열감이 오르며 그녀가 답했다.“알아요, 심 변호사님. 감사합니다.”심준호는 몇 마디 더 당부한 뒤 전화를 끊었다.나문빈은 구씨 가문의 정보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강하리 씨, 다음 싸움은 이렇게 쉽지 않을 것 같네요. 문씨 가문은 뿌리가 깊게 박혀 있고 구씨 가문은 무너지고 있어도 아직 남아있는 잔해만 해도 엄청나서 우리가 상대하기 쉽지 않아요. 특히 구씨 가문 시스템은 구승훈이 어떻게 해놨는지 우리 쪽 해커들도 전혀 들어가지 못해요.”강하리는 다소 멍하니 창가에 서 있었다.귀에는 나문빈의 횡설수설이, 머릿속에는 심준호의 당부가 맴돌았다.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나지막이 말했다.“며칠 후면 매년 행사로 진행하는 자선 파티가 있죠?”나문빈이 멈칫했다.“네, 왜요?”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아무것도 아니에요.”한편 구승훈도 이미 강하리가 문연진에게 손을 댔다는 소식을 접하고 미간을 찡그리며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전에는 움직일 기미가 안 보였어?”구승재는 다소 침울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강하리 씨 현재 업무 능력으론 우리가 감시할 수준을 넘어섰어. 같이 일하는 나문빈이 테크 회사를 가지고 있는데 아마 그 회사 직원 중 한 명이 문연진 쪽 재무 시스템을 해킹했나 봐.”미간을 꾹 누르던 구승훈은 다소 씁쓸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그녀가 정말로 혼자 복수할 생각인가보다.“문씨 가문에서 또 복수하지 못하도록 하리 주변에 사람들 심어놔.”구승재는 대답을 하고 서둘러 준비하러 갔
차가 파티장 입구에 멈추고 나서야 강하리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차에서 내려 눈앞에 펼쳐진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던 그녀는 갑자기 송유라의 팬에게 팔을 긁혔던 때가 떠올라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나문빈의 팔짱을 끼고 파티장에 들어서는데 입장하자마자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지나치게 예쁜 얼굴 덕분에 가는 곳마다 시선을 끌었고 나문빈은 미소를 지으며 강하리 옆을 걸었다.“미인과 함께 걷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죠.”하지만 강하리는 입장하는 순간부터 중앙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모두가 떠받들고 있는 남자에게 시선이 쏠렸다.정안그룹은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구승훈의 영향력은 구씨 가문에 있을 때 못지않았다.더군다나 독립해서 스스로 일궈낸 사업이라 젊은 사람들이 더더욱 그를 우러러보았다.이 순간, 그 남자는 이미 파티장에 서 있는 순간부터 이목을 집중시켰다.하지만 오늘 밤 그의 옆에는 또 다른 여자가 있었다.강하리가 구승훈 옆에 있는 여자를 힐끗 보니 바로 자기 귀걸이를 디자인한 유명 주얼리 디자이너 천아름이었다.구승훈도 강하리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관심이 그곳으로 쏠려있었다.그녀의 날씬해진 허리선을 보며 구승훈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임신한 틈을 타 겨우 한 달 동안 찌웠던 살이 금방 사라져 버렸고 심지어 예전보다 더 말랐다.나문빈은 강하리와 구승훈을 번갈아 바라봤다.“둘이 계속 그렇게 서로만 쳐다보면 파티 참석한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줘야 할 것 같잖아요.”정신을 차린 강하리는 눈가에 담긴 씁쓸함을 감추고 와인 잔을 손에 든 채 저쪽으로 걸어갔다.붉은색 드레스가 그녀의 몸에서 하늘거렸고 특별히 컬을 넣은 짙은 머리카락은 여성스러운 매력을 더했다.구승훈은 그녀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는 순간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기 시작했다.구승훈의 행동을 알아챈 천아름도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주얼리 디자이너의 예민함 때문인지 강하리의 귀에 걸린 귀걸이가 한눈에 들어왔다.그녀는 곧바로 알아차리고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저분을
구승훈은 눈앞에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거절의 말이 입술에 맴돌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한 달 동안 그녀를 보지 못했기에 너무 보고 싶었다.그녀가 자신에게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그렇지 않고서야 그녀의 성격상 다시는 그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을 테니까.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도 그는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다.이런 느낌을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그녀가 자신에게 기대길 바라면서도 너무 가까이 다가오면 다칠까 봐 두려웠다.“한 달 동안 잘 지냈어?”질문을 던진 구승훈은 다소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이렇게 야위고 초췌한 모습인데 잘 지냈을 리가 있나.구승훈은 가슴이 너무 아파서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녀를 안아주며 연정이가 무사하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는 참아야 했다.“나쁘지 않았어.”강하리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구승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살 많이 빠졌네.” 강하리는 대답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고 구승훈은 다소 쓴웃음을 지었다.“편식하지 말고 많이 먹어.”강하리의 코끝이 시큰해나며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가자, 데려다줄게.”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돌아 밖으로 걸어 나갔다.강하리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의 뒤를 바라보며 뒤따랐다.두 사람은 함께 파티장을 빠져나갔고 파티장 한구석에서 문연진은 이를 악물고 지켜보고 있었다.‘강하리 망할 년, 날 이렇게 만들어놓고 또 승훈 오빠를 꼬드겨?’아무도 그녀가 지난 일주일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모른다. 문씨 가문 아가씨가 잡혀 들어갔다니, 지금 생각해도 피를 토할 것 같았다!문연진이 분노에 떨고 있는데 이때 한 남자가 술잔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왔다.“문연진 씨.”문연진은 불쾌한 표정으로 구정우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이죠?”구정우는 와인 잔을 들고 문 앞에 서 있는 두 남녀의 뒷모습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강하리한테 당했다면서요?”문연진은 이미 화가 난 상태였기에 구정우의 이 말을 듣자 얼굴이 일그러졌다.“구정우, 사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