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생각을 거두고 몸에 묻은 물기를 닦은 후 방으로 들어갔다.이때 구승훈의 핸드폰이 울렸다.띵동띵동.누군가가 계속 메시지를 보내왔다.구승훈은 인내심 없는 표정으로 힐끔 보더니 그 상대방에게 전화했다.“네가 데려다줘.”전화기 너머에서 안현우가 이상한 말투로 말했다.“승훈아, 유라 씨 취하셔서 계속 너의 이름만 불러. 네가 자기를 안 좋아한다나 뭐라나. 혹시 싸웠어?”구승훈은 담배 한 모금 빨더니 말했다.“아니.”송유라는 워낙 제멋대로 하는 성격이라 구승훈이 달래주기를 원하면서 가끔 오늘처럼 이렇게 행패를 부릴 때가 있었다.송유라는 오늘 구승훈이 집에 돌아가겠다고 했을 때 말렸지만 그는 결국 제멋대로 집으로 돌아갔던 것이다.“빨리 와서 데려가.”구승훈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네가 데려다주기 싫으면 유라 집에 전화해서 기사님더러 데려가라고 해.”안현우가 말했다.“승훈아, 넌 뭐 때문에 바쁜데? 유라 씨도 나 몰라라 하기로 한 거야?”안현우는 멈칫하더니 질문했다.“지금 강 부장이랑 같이 있는 건 아니지? 승훈아, 어떻게 강 부장 때문에 유라 씨를 내버려둘 수 있어?”구승훈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누구랑 함께 있든 나의 일이야. 네가 유라를 집까지 데려다줘.”구승훈은 말을 끝내자마자 전화를 끊더니 고개 돌려 강하리를 쳐다보았다.“내일 임 변호사님한테 말해. 만약 정말 번역관이 필요하다면 밖에서 찾아보라고. 그 돈마저 아까우면 변호사 사무실 때려치우라고.”강하리는 침묵을 지키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이 아르바이트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돈 때문인 것도 있고 입 밖에 내지 않았던 사심 때문인 것도 있었다.언젠가 자신의 꿈을 되찾고 싶었고 진정한 자신으로 거듭나기를 원했다.구승훈이 바라는 강 부장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승훈의 노리개가 아닌 진정한 자신 말이다.“저는 하고 싶어요. 저희 계약서에 제가 아르바이트하면 안 된다는 사항은 없었잖아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강 부장, 지금
결국, 고개를 숙이고 강하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마음대로 하라지 뭐.’강하리가 계약 기간 동안 자신을 더럽히지만 않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담배 하나를 쥐고 있던 구승훈은 담배에 불을 붙이지도 않고 무표정으로 안현우와 송유라를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룸 안에서 이들은 그저 서로를 쳐다만 볼 뿐이었다.안현우가 속으로 생각했다.‘싸웠네, 싸웠어.’송유라는 이번에 정말 상심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안현우는 그런 그녀를 잡아당기더니 구승훈의 옆에 앉혔다.송유라는 많이 슬픈 모양이었다.“내가 하리 언니한테 술 먹여서 화났어요?”구승훈은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더니 말했다.“내가 화낼 줄 알았으면서. 이제부터는 그런 짓 하지 마.”송유라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다른 뜻은 없었어요. 그냥 저 때문에 일에 지장이 갔을까 봐 사과하고 싶을 뿐이에요.”“그래.”구승훈은 강하리 때문에 송유리와 화를 낼 수가 없어 그저 알겠다고 대답하더니 이렇게 말했다.“시간도 늦었는데 집까지 데려다주라고 할게. 여자애가 저녁 늦게까지 밖에 있으면 안 돼.”여느 때처럼 부드러운 말투에 송유라는 그제야 미소를 되찾았다.“알았어요.”송유라가 떠나고, 안현우는 구승훈의 옆에 앉더니 말했다.“승훈아, 무슨 생각이야? 유라 씨도 돌아왔는데 왜 화해하지 않았어?”구승훈은 고개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다.“너나 잘하세요.”안현우는 머쓱하게 웃더니 말했다.“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잖아.”그러더니 잠깐 멈칫하면서 말했다.“설마 강 부장 포기하지 못해서 그래?”구승훈은 담배만 피울 뿐 대답하지 않았다.하지만 안현우는 그가 무언의 긍정을 했다고 생각했다.“승훈아, 정신 차려. 강 부장 같은 여자랑은 잠깐 놀 수는 있지만,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돼. 그런 여자를 만나면 평생 불행할 거야. 그 여자는 돈밖에 모르거든.”구승훈은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피식 웃었다.“잘 알고 있나 본데?”안현우는 혀를 차더니 말했다.
강하리는 손연지의 말에 놀라더니 어이없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그럴 리가?”구승훈이 송유라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할 수가 없다.그가 유일하게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은 송유라뿐이었다.송유라한테만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왜 그럴 리가 없는데?”손연지는 여전히 자기 생각을 고집했다.강하리는 더는 말을 이어가지 않고 아예 화제를 돌렸다.“우리 함께 밥 먹은 지도 오라잖아. 뭐 먹고 싶어? 내가 살게.”음식 얘기에 손연지는 역시나 반응을 보였다.“어디 보자...”손연지는 결국 인기 레스토랑을 떠올리게 되었다.두 사람은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레스토랑에 들어갔다가 안현우를 만나게 되었다.안현우의 옆에는 여자가 앉아있었다.강하리가 들어오는 것을 본 안현우는 동공이 흔들렸다.강하리는 그를 아는 체도 하지 않고 손연지와 함께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았다.손연지가 화장실에 간 사이, 안현우가 다가와 손연지의 자리에 앉더니 말했다.“강 부장, 이렇게 뵙네요.”메뉴판을 보고 있던 강하리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그러게요. 안 대표님, 저 못 본 척해주셔도 돼요.”안현우가 피식 웃었다.“강 부장, 왜 이렇게 사람을 무안하게 해?”강하리는 고개 들어 그를 쳐다보더니 말했다.“서로 가는 길이 다른 사람은 만나지도 말아야 된다는 거 모르세요?”“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전에는 우리 사이가 좋았잖아요.”강하리는 갑자기 머리가 아파 났다.구승훈의 친구라 예전에는 친하게 지냈었지만 구승훈과의 관계가 들통난 뒤로 안현우는 아예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다.강하리는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만약 내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된다면 나를 계속 쫓아다녔겠지. 그런데 내가 돈만 보고 잠자리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된다면 본성을 드러낼 거고.’안현우는 입으로는 강하리를 좋아한다면서 뒤에서는 그녀를 욕하고 다녔다.‘이런 모습은 부잣집 도련님들의 공통점이겠지. 나를 그저 노리개로 보
강하리는 메뉴판을 꽉 쥐더니 말했다.“그래요? 제가 가격을 제시한다고 해도 구 대표님의 사람을 감히 건드릴 수나 있겠어요?”안현우는 박장대소를 지었다.“그 부분은 걱정할 필요 없을 거예요. 승훈이가 그러는데 제가 하리 씨를 만나는 데 성공하면 하리 씨를 저에게 주겠다고 했거든요.”강하리는 어지러운 느낌과 함께 얼굴이 창백해졌다.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팠지만 그래도 억지웃음을 지었다.“언제 그러셨는데요?”강하리는 전에 구승훈과 싸웠을 때 홧김에 한 말이라고 생각했다.구승훈은 감정이 없는 사람이긴 해도 소유욕이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갑자기 떠난다고 했으니 홧김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정상이라고 생각했다.예전에 자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안현우랑 가도 된다고 말했을 때처럼 말이다.하지만 안현우의 말 한마디에 이 모든 환상이 깨지고 말았다.“두 날 전에요. 제가 하리 씨한테 관심 있다고 말했더니 마음대로 하라더군요. 그리고 가격을 제시할 때 좀 더 올려보라고 하기도 했고요.”이때 메뉴판 날카로운 종이에 손이 베어 피가 뚝뚝 흘러내렸지만,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여전히 메뉴판을 꽉 잡은 채 마지막 자존심을 위해 억지 미소를 지었다.“안 대표님 저 편식한다는 거 잊으셨어요?”대놓고 거절했지만 안현우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고 갑자기 강하리 앞으로 다가오더니 말했다.“강 부장, 지금은 가격 제시할 자격이 있다지만 승훈이한테 차이면 사람들한테 놀아나는 노리개일 뿐이에요. 그때 되면 값어치도 없어요.”그러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앉더니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니까 강 부장,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다음 스폰서를 알아보는 것이 좋을 거예요. 저는 강 부장이 먼저 가격 제시하기를 기다리고 있을게요.”말을 끝낸 안현우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강하리는 고개 숙여 자신의 피가 묻은 메뉴판을 바라보았다.비록 작은 상처였지만 깊숙이 파여 피가 멈추지 않았다.하지만 마음이 더욱 아팠다.그동안 구승훈이 자신을 향해 보여줬던 소유욕 때문에
손연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전에는 강하리가 아이를 지우겠다면서 구승훈과 헤어지겠다고 말한 적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아이를 위해서인지 그 일을 다시 입 밖에 꺼낸 적 없었다.‘요즘 들어 승훈 씨도 언급하지 않더니. 오늘은 왜 이러는 거지?’“구승훈 그 개자식 또 무슨 짓을 했는데?”손연지는 그녀를 쳐다보면서 물었다.“송유라 때문이야?”강하리는 고개를 흔들었다.“계속 생각해 왔던 일이야.”단지... 여러 가지 원인 때문에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강찬수 때문인 것도 있었고 엄마 치료비 때문인 것도 있었지만 지금은...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위해서였다.걱정되는 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엄마의 치료비는 몇 달 치 모아두긴 했지만 임신한 후부터 구승훈을 떠나면 바로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그리고 출산하면 아이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충분한 저축이 없이는 생활하기가 어려웠다.그래서 계속 구승훈의 옆에 남아있기로 한 것이다.구승훈이 송유라를 향한 부드러움을 지켜보면서도, 자신을 향한 차가움을 견딜 수밖에 없었다.아이를 위해서라면 구승훈과 송유라가 함께 자는 것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렇게 나중에 멋있게 뒤돌아 떠나려고 했지만, 너무도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자신의 감정이 이미 마비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구승훈이 자꾸만 그녀를 심란하게 하고 마음의 상처를 안겨주고 있었다.“정말 잘 생각했어?”손연지는 미간을 찌푸렸다.비록 늘 구승훈이 나쁜 놈이라고 욕했지만 그래도 그가 강하리한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을까 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아이가 생겼기 때문에 아이한테는 온전한 가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그리고 중요한 것은 강하리가 매달 4천만 원 정도의 의료비를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구승훈을 떠나면 의료비 때문에 숨을 못 쉴 거고 더욱이 아이도 키우지 못할 것이었다.그래서 강하리가 더는 구승훈을 떠나겠다는 말을 하지 않자 손연지도 굳이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최소한 아이는 구승훈
구승훈의 옆에는 늘 여자가 부족한 적이 없었다.그중에는 연예인들도 많았지만, 종래로 어느 연예인과 스캔들이 난 적 없었다.그는 이런 장소에 참석하지 않고 카메라 앞에도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이번이 처음이었다.강하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역시 첫사랑은 다르네.’이렇게 대놓고 공식 석상에 선 이 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안현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자신이 마치 다른 사람의 자리를 빼앗은 도둑처럼 비겁하고 파렴치하다고 느껴졌다....강하리는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먼 곳에 있는 강찬수를 발견했다.그는 손에 술병을 하나 든 채 어질어질한 상태로 동네 입구에 앉아있었다.그렇게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물었다.“혹시 강하리를 아세요?”강하리는 발걸음을 멈칫하더니 뒤돌아 옆에 있던 나무 뒤에 숨었다.그녀는 머리가 어지러운 느낌을 받았다.‘왜 날 찾으러 온 거지? 2억 원 벌써 다 쓰셨나?’강하리는 나무 뒤에 숨어 한숨을 내쉬더니 핸드폰을 꺼내 경비 아저씨한테 전화하려고 했다.하지만 경비 아저씨는 몇 번이고 내쫓았는데 안 간다고 대답했다.그리고 입구에서 강하리를 아는지만 묻고 다른 짓을 안 했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었다.나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신도윤의 전화였다.그녀는 한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전화를 받았다.“강 부장님, 대표님께서 이따 기사님이 데리러 오신다고 짐 정리 해놓으라십니다. B 시로 출장 가셔야 될 것 같습니다.”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렸다.“B 시에는 무슨 일로요?”신도윤은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께서 말씀 안 하셨습니다. 그저 오시라고 하셨습니다.”강하리는 가기 싫었다.‘유라와 함께 B 시 예술 페스티벌에 참석했으면서 왜 나보고 오라는 거야?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그러는 건가?’강하리는 이에 관심이 없었다.“저... 안 가도 돼요?”신도윤이 말했다.“대표님께서 만약 가기 싫으면 합리한 이유를 대라고 하셨습니다.”강하리는 할 말이
강하리는 동공이 흔들렸다.“대표님, 지금 신경 쓰여서 그러는 거예요?”구승훈은 피식 웃었다.“강 부장 아직 잠 덜 깼어?”강하리는 갑자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답 안 했으니까요.”구승훈은 그녀를 차갑게 쳐다보았다.“왜, 가격이 마음에 안 들었어?”“저한테 가격 제시하라고 하면서 제 소식을 기다리겠다고 하셨어요.”구승훈은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그러면 강 부장이 아직 가격을 결정하지 못했다는 뜻이야?”강하리는 구승훈을 쳐다보면서 일부러 자연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제가 제시하는 가격이 마음에 걸리는 거예요, 아니면 제가 가격을 제시할까 봐 걱정되시는 거예요?”구승훈은 피식 웃으면서 그녀를 놓아주더니 소파에 앉아 쳐다만 볼 뿐이었다.“가격을 제시하든 말든, 얼마를 제시하든 그건 너의 일이야. 나는 그저 강 부장이 계약을 어길지 말지에만 관심 있는 거고.”마치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이 말해 강하리는 가슴이 아팠다.진작에 이런 식의 떠보기는 자신의 얼굴에 침 뱉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시도해 보려고 했다.이 남자가 자신을 조금이라도 신경 쓰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결국엔... 예상대로 조금이라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이러한 결과라고 해도 그나마 예상했던 것보다 나은 결과라고 생각했다.강하리는 생각을 멈추더니 말했다.“그저 물어봤을 뿐이에요. 대표님이랑은 계약 기간이 아직 2년이 남아있기 때문에 이 기간에 다른 스폰서를 찾을 생각은 없었어요. 가격을 얼마로 제시하든 동의할 마음도 없고요.”구승훈은 그녀를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강 부장 그래도 계약을 잘 지키는 사람이네.”비웃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고 질문했다.“대표님,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구승훈은 소파에 늘어진 채 그녀의 허리에 손을 올려놓더니 말했다.“내일 F 국 고객을 만나야 하는데 강 부장 번역하는 거 좋아하잖아? 내일 나를 따라 번역일이나 해.”강하리는 그가 이런 제
구승훈은 그녀를 밀쳐내고 다시 고개 숙여 자료를 쳐다보더니 한마디 내뱉었다.“강 부장 질문이 너무 많아. 이제부터 유라와 관련된 일 묻지 마.”강하리는 소파에 앉아 손을 꼼지락거리더니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네.”될수록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웃었다.“다시는 물어보지 않을 테니 화내지 마세요.”그러고는 또다시 차를 준비했다.구승훈 수중에 있는 자료는 내일 쓰일 자료인지 유난히 열심히 보고 있었다.강하리도 온밤 그의 옆을 지켰다.최근에 입덧은 좀 가라앉았지만 그 대신 자꾸만 졸음이 몰려왔다.고요한 방안, 자료를 넘기는 소리만 들려왔다.찻상 앞에 앉아있던 강하리는 자기도 모르게 잠들어버렸다.구승훈은 그녀를 들어 안아 침대에 눕혔다.“뭐 때문에 이렇게 피곤해? 내가 집에 없는 동안 밖에서 무슨 짓을 했길래?”구승훈의 중저음에 강하리는 순간 정신을 차렸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요즘 수면 질량이 안 좋아서요.”구승훈은 피식 웃었다.“수면 질량이 안 좋다면서 아까는 잘만 자던데?”강하리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구승훈의 옆에서 늘 긴장을 늦추지 못했던 그녀는 오늘 결국 곯아떨어지고 말았다.편해져서인지 아니면 임신 초기 증상 때문인지 몰랐다.구승훈은 그녀를 안방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고는 뒤돌아 욕실로 향했다.아직 잠이 덜 깨서인지 구승훈이 자신을 부드럽게 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개를 돌렸을 때 구승훈은 천천히 셔츠 단추를 풀고 있었다.셔츠를 벗어 내리자 넓은 어깨, 넓은 등판, 완벽한 허리라인이 시야에 들어왔다.그는 이 순간 남자의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승훈 씨.”강하리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고 구승훈은 그녀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강하리는 침대에서 내려오더니 결국 그의 목을 감싸안았다.지금 이러는 것은 그의 부드러움에 혹했는지, 아니면 B 시에 온 이유가 송유라 때문이 아니라는 말 때문인지 몰랐다.강하리는 구승훈과 싸운 이후로 처음으로 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구승훈은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그런데 갑자기 진태형에게 친딸이 하나 더 생기고 그게 심씨 가문의 손녀일 줄 누가 알았겠나.이제 진시연의 처지가 어색해진 건 당연했고 사람들은 진시연을 보고 웃으며 인사를 나눈 뒤 곧바로 흩어졌다.진시연은 짙은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샴페인 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는 사람들의 의미심장한 시선을 못 본 척 걸음을 옮겨 구승훈에게 다가갔다.“구승훈 씨, 오랜만이네요.”구승훈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무심하게 와인 잔을 들고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대답하지도 않았고 그녀와 대화를 나눌 생각도 없어 보이자 진시연은 그의 옆에 서서 우울한 표정으로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구승훈 씨, 내가 F 대륙에서 야생동물에게 공격당했을 때 날 구해주고 밤새 업고 병원으로 가 치료받게 해준 거 기억나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그땐 개나 소나 다 구해줬을 겁니다.”진시연의 얼굴이 다소 일그러졌다.그녀는 오랜 세월 기억하고 있던 것이 구승훈의 입에서 개나 소나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우울한 눈빛을 감춘 채 말을 이어갔다.“그래도 저한텐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에요. 구승훈 씨, 우리 앞으로 잘 지내봐요, 네? 전 정말 그쪽이랑 잘 지내고 싶어요.”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진시연 씨, 진심으로 살려줘서 고마우면 나한테서 멀리 떨어져요. 내 아내가 날 오해하는 건 싫으니까.”진시연은 당황했다.“아내요? 두 사람 결혼해요?”구승훈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진시연 씨, 멀리하라고요. 못 알아들어요?”구승훈이 그렇게 말한 뒤 걸음을 옮겨 강하리에게 다가가는데 진시연이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그의 뒤에서 소리쳤다.“구승훈 씨, 강하리가 정말 좋은 여자라고 생각해요? 그쪽 잡고 놓아주지 않으면서 주해찬이랑 알콩달콩 지내는데 정말 하나도 신경 안 쓰여요?”구승훈은 걸음을 멈추고 얼음같이 싸늘한 얼굴로 돌아보았다.“진시연 씨, 멀쩡히 진씨 가문에 남고 싶으면 얌전히 있어요. 아니면 심씨 가문도, 나도 그쪽 무사히 B시에 남겨두지 않을 테니까.”진시연의 얼
강하리는 결국 구승훈이 보내준 드레스를 입었다.파란 드레스에 네크라인과 치맛단에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혀있어 여성스러우면서도 고상하고 품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오픈 숄더는 쇄골을 모두 드러냈고 새하얀 쇄골에는 투명한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달려 있었다.강하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진태형의 딸, 심씨 가문의 손녀라는 대단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 B시에 몇이나 되겠나.게다가...허리를 굽혀 강하리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리는 구승훈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구씨 가문이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 모두가 안다.비록 구승훈이 구씨 가문을 처참히 무너뜨렸지만 그의 손에는 구씨 가문의 재산 90%와 B시 문씨 가문의 모든 재산이 있으니 기존 구씨 가문보다 그 세력이 더 대단했다.모두의 시선이 여기로 쏠렸지만 구승훈의 눈에는 눈앞에 있는 여자만 보였다.몸을 살짝 굽혀 강하리에게 손을 내밀자 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에 자기 손을 얹었다.심준호가 선물한 드레스를 아무 말 없이 찢어버린 구승훈에게 조금 화가 났지만 개자식의 소유욕이 발동한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다.오히려 그런 그의 반응에 다시 예전 구승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그동안 그녀의 마음을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옅어지는 느낌이었다.구승훈의 눈가에 미소가 번지며 강하리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팔을 뻗었다.강하리는 그의 팔짱을 낀 채 사람들의 시선 아래 진씨 가문 저택으로 따라 들어갔다.“이게 우리 결혼식이면 얼마나 좋을까. 왠지 정말 결혼식 같지 않아?”구승훈이 강하리의 귀에 속삭이자 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았다.“나도 이게 우리 결혼식이었으면 좋겠어.”구승훈이 걸음을 멈칫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서두르지 마, 결혼식 할 거니까.”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진태형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강하리를 보자 눈을 반짝이며 이쪽으로 걸어왔다.“아빠.”강하리가 낮은 소리로 부르고 곧이어 구승훈도 그를
“언제 왔어?” 강하리가 구승훈을 바라보며 그의 빨갛게 충혈된 눈동자에 시선이 향했다.지난 며칠 동안 구승훈은 이곳에 머물지 않았다.회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요 며칠 구승훈은 많이 바빴고 모임이 끊이질 않아 근처에 미리 준비해 둔 별장으로 갔다.강하리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봤다.“지난 며칠 동안 잠은 잤어?”구승훈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품에 안았다.“잠을 못 자. 강 대표님이 와서 재워주면 안 돼?”강하리가 웃었다.“그래, 오늘 짐 챙겨서 그쪽으로 갈게.”구승훈은 멈칫하다가 이내 입꼬리를 피식 올렸다.쉽게 승낙하니 다소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원래 상처들은 거의 다 나았지만 그가 요즘 매일 복싱장으로 가서 속에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풀었기에 몸에 새로운 상처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강하리가 정말 오면 그는 괴롭기만 할 거다.아내가 옆에 있는 데도 안지 못하는 그 기분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정말 올 거야?”강하리가 웃었다.“왜, 내가 가는 게 싫어? 아니면 다른 여자가 있는 거야?”구승훈은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그럴 배짱이 있는 것 같아?”강하리는 그의 넥타이를 잡고 끌어당겨 허리를 굽히게 한 뒤 시선을 마주 보았다.“그러면 방 청소나 하고 나랑 연정이가 갈 테니까 기다려.”말을 마친 그녀는 구승훈의 넥타이를 놓아주고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구승훈은 문에 기댄 채 웃음을 터뜨리며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강하리를 거절할 수가 없다는 걸 인정했다.잠시 후 드레스룸에서 나온 강하리는 심플한 드레스를 입었는데도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다.하지만 구승훈은 그녀가 나오는 순간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보낸 드레스는 어딨어?”강하리는 머리를 뒤로 넘기며 무심하게 대꾸했다.“너무 더워서 시원한 걸로 바꿨어.”구승훈은 강하리의 등 뒤로 훤히 뚫린 구멍을 바라봤다.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위로 끌어올리자 뒤쪽의 아름다운 나비 모양의 뼈가 드러났다.허리까지 훤히 뚫린 디자인의 옷을 바라보는 구승훈의 눈빛이 어두
강하리의 입꼬리가 움찔했다.건너편 사옥에 새로 회사가 들어왔다는 건 아는데 에비뉴와 정안 그룹일 줄은 몰랐다.하지만 생각해 보니 이해가 됐다.그렇지 않고서야 구승훈이 왜 회사 근처 식당에 나타났겠는가.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연성으로 안 돌아가?”구승훈의 눈동자는 온통 그녀로 가득 찼다.“너랑 아이가 어디 있으면 나도 함께 할 거야.”강하리가 구승훈의 시선을 마주했다.“나도 꼭 B시에 있을 필요는 없어. JM의 업무는 어디서든 할 수 있으니까.”어쨌든 연성은 구씨 가문의 영역이었고 연성에 깊게 뿌리 박은 구씨 가문은 B시에서 그다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구승훈이 시선을 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하지만 네가 다시는 가족과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네가 연인이든 가족이든 둘 다 가졌으면 좋겠어, 자기야.”두 사람 중에 적어도 한쪽은 가족의 사랑을 받아야 하니까.강하리의 코끝이 갑자기 시큰해지며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예물도 도착했는데 그러면 결혼할래, 구승훈?”멈칫한 구승훈은 씁쓸함이 가슴에 밀려왔지만 그래도 얼굴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강 대표님, 그렇게 급한가?”강하리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나랑 결혼할 거야?”구승훈의 눈에 머금었던 미소가 점점 사라지더니 손가락이 강하리의 눈가에 닿았다.“자기야, 준비할 시간 좀 줘.” 강하리는 쓴웃음을 내뱉었다.“알았어, 기다릴게.”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곧장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구승훈은 복잡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회사 앞에 서서 얼굴을 찡그렸다.그가 돌아서서 길 건너편으로 걸어가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구승재는 진작 위에서 구승훈과 강하리가 함께 서 있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두 사람이 화해했는지 확인하려고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왔다.하지만 아래에 내려오자 형이 찌푸린 얼굴로 걸어올 줄이야.‘쯧... 아직 화해 못 했네.’“형, 하리 씨가 아직 용서 안 해준대?”구승훈은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눈가에 억눌린 짜증을 내비
하지만 구승훈의 숨김과 솔직하지 못한 태도는 강하리의 마음을 조금 불편하게 만들었다.구승훈은 강하리가 화가 났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뒤 강하리를 품에 안고 입을 열었다.“제 아내, 강하리에요.”강하리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자 구승훈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나지막이 말했다.“내 체면 좀 살려주면 안 돼, 여보?”강하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여자의 시선이 반짝이더니 강하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안녕하세요, 사모님. 전 구승훈 씨 담당 정신과 의사, 여나경이라고 해요.”강하리는 멈칫하다가 구승훈의 불면증이 떠올라 그를 슬쩍 보고는 이렇게 물었다.“이 사람 상태 어때요?”구승훈의 눈동자가 살짝 어두워지고 여자는 눈치껏 웃으며 말했다.“복잡한 경우라 치료 과정도 번거로울 수 있지만 제가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사모님.”강하리는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여자가 먼저 웃으며 말했다.“죄송하지만 전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그러고는 이내 자리를 떴다.여자가 가고 구승훈은 힘껏 강하리의 허리를 꼬집었다.“정주현이랑 밥 맛있게 먹었어?”강하리는 곧장 그의 손을 떼어냈다.“다른 여자랑 밥 맛있게 먹었어?”구승훈이 웃었다.“그래도 강 대표님이랑 먹는 게 맛있지.”강하리는 능글맞게 웃는 남자를 보며 문득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어젯밤 혼자 발코니에 서 있을 때처럼 왠지 이 남자가 홀로 버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구승훈, 당신 몸...”구승훈은 속으로 흠칫하며 조용히 강하리를 품에 안고 만족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강 대표님 걱정하는 눈빛을 보니 다 나은 것 같네.”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구승훈의 품에 기대어 안겼고 구승훈의 눈동자는 한층 어두워졌다.강하리가 걱정한다는 걸 잘 안다.예전 같았으면 걱정해 주는 그녀의 모습에 날 듯이 기뻐했을 텐데 지금 상황에서는 강하리가 알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지금은 감히 프러포즈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그 약은 그에게 시한폭탄과
강하리는 구승훈을 여기서 볼 줄은 몰랐다.더군다나 맞은편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앉아 있자 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시선을 돌렸다.구승훈의 정상적인 사교 활동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다가가 묻지도, 방해하지도 않았다.그런데 정주현이 그녀의 표정이 이상함을 감지하고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다가 눈썹을 살짝 치켜들고 강하리를 돌아보았다.“바람피우는 현장 목격한 건가요?”강하리는 다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아니요.”이런 면에서 강하리는 구승훈을 믿었다.다만 구승훈이 저 여성과 밥을 먹는 것이 그녀에게 숨기는 일과 관련이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을 뿐이었다.강하리는 사실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다른 사람들은 알아도 자신은 알면 안 되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연정이 사건 때도 구승훈은 노진우를 믿을지언정 그녀를 믿지는 않았다.강하리는 눈가의 상실감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고 정주현은 보기 드문 미소를 지었다.“여전히 저 사람에게 잘해주네요.”정주현의 말투에는 무의식적으로 약간의 서운함이 묻어났지만 그 역시 자신과 강하리 사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가지 않고 되물었다.“어떻게 지냈어요?”정주현의 얼굴에 번지던 미소가 갑자기 사라졌다.요즘 어떻게 지냈냐고? 굳이 한 단어로 설명하자면 엉망이다.사실 그동안 어떻게 버텼는지 그조차 모르겠다.정양철과 줄곧 사이가 돈독했던 그였고 정양철이 업무상 아무리 엄격하게 요구해도 그에겐 좋은 아버지였다.그래서 정양철이 그런 짓을 했다는 게 믿을 수가 없었지만 증거까지 나온 이상 믿을 수밖에 없었다.정주현은 애써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그냥 그렇죠. 산 사람은 계속 살아야 하니까. 그냥... 하리 씨 볼 면목이 없네요.”강하리는 잠시 정주현을 바라보다가 말했다.“그쪽이랑 상관없어요.”정주현이 웃었다.“그럼 뻔뻔하게 친구 해도 돼요?”강하리도 웃었다.“당연하죠.”정주현의 표정이 눈에 띄게 풀렸고 두 사람은 이
“당신 원하면 해.”구승훈은 심장이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자기야, 내일 침대에서 못 일어날까 봐 걱정되지 않아?”강하리가 웃었다.“할 거야?”숨이 멎은 구승훈이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았다.“아니, 우선은 강 대표님이 재워주는 걸 누리고 싶어.”말을 마친 그가 강하리를 안아 침대에 눕혔고 강하리는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잘 자, 구승훈.”구승훈은 웃었다.“잘 자, 자기야.”강하리는 구승훈의 품에 몸을 밀착했고 구승훈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녀를 꽉 안았다.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한 침실에서 강하리의 귀에는 구승훈의 심장 박동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두 사람은 더 말하지 않았다.고요한 방 안에서 구승훈이 고개를 숙여 강하리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사랑해.”강하리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눈을 떠 구승훈의 시선을 마주했다.“나도 사랑해.”언제 잠이 들었는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구승훈은 곁에 없었고 연정이도 누군가 안고 간 뒤였다.강하리는 침대에 앉아 구승훈이 누웠던 곳을 바라봤다.다소 구겨진 이불을 만지던 그녀의 손가락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릴게.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마, 구승훈.”구승훈은 바쁜지 강하리가 아래층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자리를 떠난 뒤였다.강하리도 굳이 묻지 않고 평소처럼 연정이에게 밥을 먹인 뒤 사무실로 갔다.회사에 도착했을 때 사무실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리시안셔스 꽃다발이 있었고 그녀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데 안예서가 뒤에서 은근하게 웃으며 말을 붙여왔다.“대표님, 곧 좋은 일 생길 것 같은데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굳어졌다. 구승훈은 그녀에게 프러포즈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그래도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오늘 일정은 뭐야?”안예서는 서둘러 강하리에게 하루 일정을 알렸고 고개를 끄덕인 강하리는 꽃을 옆으로 치웠다.안예서가 그녀를 따라 들어왔다.“대표님, 지난번에 제가 말씀드린 임명우 씨 기억하시죠?”강하리는
구승훈은 강하리의 입술을 깨물며 샤워기 아래로 그녀를 안고 갔다.머리 위로 쏟아지는 뜨거운 물은 달아오른 불을 끄기는커녕 오히려 더 견디기 힘들게 만들었다.“원해? 자기야, 말해봐.”구승훈이 턱을 잡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머릿속이 윙윙거리던 강하리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그녀가 깨물자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구승훈이 강하리를 들어 올려 벽에 밀쳤다.구승훈이 얼마나 그녀를 탐했는지는 모른다. 그저 모든 게 끝났을 때 강하리는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구승훈은 강하리를 안아 침대에 눕혔고 강하리는 몸을 뒤척이며 잠이 들었다.잠든 강하리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구승훈은 입술에 뽀뽀한 뒤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구승훈은 이미 흠뻑 젖어 있는 자기 셔츠 단추를 천천히, 그리고 차분하게 풀었다.단추가 풀리면서 그의 몸에 난 상처가 드러났다.최면은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았고 그는 점점 더 마음속의 난폭함을 참기 힘들어졌다.마치 잠깐의 고통만이 마음속 짜증을 잠시나마 잊게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구승훈은 무표정하게 웃옷을 벗고 샤워했다.차가운 물이 몸을 적시자 구승훈은 쓴웃음을 내뱉으며 자신의 욕망을 내려다보았다.그는 강하리를 원했다.하지만 지금 당장은 강하리가 기꺼이 응한다고 해도 그녀 앞에서 감히 옷을 벗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욕실에서 나온 구승훈은 침대에서 단잠을 자는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들고 뒤돌아 발코니로 갔다.휴대폰에는 노민준과 구승재에게 걸려 온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있었고 구승훈은 담배에 불을 붙인 뒤 노민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왜 또 갔어?”구승훈은 개의치 않는 어투로 대꾸했다.“효과 없잖아.”노민준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묻어났다.“효과가 없으면 치료 안 할 거야? 승훈아, 포기하지 마. 나도 포기하지 않을 거야.”구승훈은 담배를 한 모금 머금더니 알 수 없는 시간이 흐른 뒤 이렇게 물었다.“형, 확실하게 대답해 줘. 이 약으로 고칠 수 있어?”희망이 없다면 그도 더 발
“그래, 우리 연정이에게 완전한 가정을 만들어주자.”강하리는 구승훈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눈시울이 시큰거렸다.더 이상 주저하고 싶지 않았다.평생 이 남자와 얽혀야 할 운명이라면 차라리 빨리 서로를 곁에 붙잡아 두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삼촌이 말한 것처럼 서로 좋아하는 관계는 소중한 거니까.구승훈이 고개를 돌려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별장으로 갈까? 콘돔 한 박스 샀는데 써보지 않을래, 강 대표님?”강하리는 깜짝 놀라서 재빨리 뻔뻔한 남자를 밀어내려는데 구승훈이 순순히 물러날 리 없었다.“한 번만 하고 돌아가는 건 어때?”강하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뜨거워졌고 구승훈은 직접 그녀의 손을 잡아 그곳에 갖다 댔다.“느껴져? 널 본 순간부터 원했어.”강하리는 단번에 손에 닿은 물건을 알아차리고 화가 나서 물건을 콱 잡았다.“참아!”며칠 동안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와서는 그런 생각만 하다니, 어림도 없지!구승훈은 그녀의 귓불을 살며시 깨물며 옷 속으로 손이 파고들었다.“그러면 오늘은 내가 강 대표님을 모실게, 어때?”말을 마친 뒤 강하리에게 반응할 시간을 주지 않고 바로 입술을 막았다.남자의 민첩한 손놀림이 그녀의 몸 곳곳에 불을 지폈고 그가 그녀의 허리를 쓸어내릴 때쯤 강하리가 갑자기 그를 밀어냈다.“일단 먼저 돌아가.”구승훈은 웃었다.“알았어, 그러면 오늘 밤에 강 대표님 제대로 모실게.”그녀가 원한다는 듯이 말하는 상대에 강하리는 얼굴이 타는 듯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강하리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보았다.“젖었어? 어디 봐.”강하리의 얼굴에 또 한 번 홍조가 올라왔다.“닥쳐!”개자식!구승훈은 더 이상 그녀를 건드리지 않고 시동을 걸어 차를 몰고 나갔다.별장으로 돌아오자 걸음마를 배우고 있는 연정이가 보행기를 탄 채 달려왔고 구승훈의 곁에 도착하자 연정이는 작고 뚱뚱한 두 손을 쭉 뻗으며 구승훈을 향해 웅얼거렸다.누가 봐도 아빠에게 안아달라고 조르는 모습이라 구승훈은 연정이를 안아 볼에 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