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끊고 나서야 구승훈의 감정은 차분해졌다.구승재는 그 옆에서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형을 다루는 데는 강하리가 제격이었다.“형, 송동혁은?”구승훈은 손을 닦으며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돌려보내, 저쪽에서 잘 대접하라고 해. 쉽게 죽여선 안 돼. 장진영도 그때 강하리를 납치한 혐의를 뒤집어씌워서 같이 보내!”구승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고 구승훈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물었다.“정신과 의사는 찾았어?”구승재가 답했다.“찾았는데 형 ...”형이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알아낸 것들과 조금 전 송동혁의 말까지 더해져 구승재는 거의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구승훈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대답했다.“데려와.”강하리의 마음은 구씨 가문에 대한 뉴스를 본 후부터 조금 복잡해졌다.구씨 가문이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구승훈의 짓이라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녀는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가쁜 숨을 내쉬었고 노진우가 옆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강하리 씨, 구 대표님이 어르신과 등을 돌렸어요.”강하리는 굳어버린 채 한참 후에야 물었다.“그 사람 위험해질까요?”노진우는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요.”“어르신도 젊었을 때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았는데 두 사람이 이렇게 등을 돌리니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어요.”그는 강하리를 바라봤다.“강하리 씨, 구 대표님께 직접 전화해서 물어보는 게 어때요?”강하리는 두 손을 말아쥐었다.호텔에 돌아와 샤워하고 나온 그녀는 휴대폰을 멍하니 쳐다보기 시작했다.한참 만에 겨우 휴대폰을 들었지만 전화를 걸기도 전에 주해찬에게서 연락이 왔고 그녀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선배, 무슨 일 있어요?”주해찬은 미소를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로키 씨가 널 만나고 싶어 해.”강하리는 멈칫했다. 로키는 그녀에게도 익숙한 사람이었다.유엔 세계 언어 연구 센터의 설립자였기에 강하리는 주저하지 않았다.“좋아요, 언
주해찬은 그녀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걸어왔다.“무슨 일 있어요?”주해찬은 웃으며 말했다.“널 스카우트할 생각인가 봐.”강하리는 순간 당황했다. “정말요?”주해찬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봐.”로키는 강하리를 보고 무척 반가워했다.“강하리 씨, 늦은 시간에 또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강하리는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로키 씨. 무슨 일 있으세요?” 로키는 옆에 앉은 청년을 바라보았고 청년이 자기소개를 했다.“안녕하세요, 나문빈이라고 합니다.”그러고는 곧바로 강하리 앞에 기획서를 내밀었고 강하리는 어색하고 그걸 건네받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이건...”나문빈은 웃으며 말했다.“L국에 있는 제 회사인데 강하리 씨를 모셔가고 싶습니다.”말을 마친 그가 이어서 강하리에게 한바탕 소개를 늘어놓았고 강하리는 계속 귀를 기울였다.나문빈이 말한 회사는 JM그룹으로 사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강하리는 알고 있었다.세계 최고의 고급 비즈니스 번역 회사였다.번역가만 아니라 번역 소프트웨어와 번역 로봇 개발도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하지만 나문빈의 말을 듣고도 강하리는 웃기만 했다.“미안하지만 지금 당장 사업을 할 생각은 없어요.” 나문빈은 개의치 않았다.“알아요, 하지만 이 회사는 유엔 언어기구에 소속되어 있고 사업이 다가 아니에요. 전 세계의 고급 비즈니스 번역을 받을 뿐만 아니라 각국의 고위 인사들과도 협력하죠. 게다가 유엔 산하 회사라 외교부 업무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아요.”로키가 웃으며 말했다.“강하리 씨, 잘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요. 당신은 언어에 특출난 재능을 가진 귀한 인재거든요.”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회사는 이미 잘 되고 있고 제 생각에는 저 같은 사람이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해요.”로키는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강하리 씨를 통해 이곳 시장을 개척하고 싶어 스카우트하는 겁니다.”강하리는 멈칫했다. 그런 거였군.“강하리
강하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무의식적으로 배를 감싸려다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그녀는 애써 행동을 참으며 옆 테이블을 잡았다.이를 본 주해찬은 황급히 일어나 얼른 강하리를 부축하려 했지만 노진우가 한발 빨랐다.강하리는 노진우의 부축을 받고 나서야 얼굴이 조금 나아진 듯 보였다.주해찬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아? 어디 안 다쳤어?”강하리는 충격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고 주해찬은 무의식적으로 강하리의 작은 배를 바라봤다.강하리는 몸을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선배, 나 진짜 괜찮아요.”조금 전 그 애는 속도가 빨랐지만 힘은 세지 않았다.그녀가 정말 괜찮다는 말에 주해찬은 고개를 끄덕였고 노진우가 다가와서 아이를 옆으로 들어 올렸다.어린아이는 자신이 사고 쳤다는 것을 알았는지 노진우가 들어 올리자 울음을 터뜨렸다.그런데 곧바로 아이 엄마가 서둘러 달려왔다.“당신들 뭐야, 왜 우리 애를 괴롭혀?”노진우의 웃지 않는 표정은 다소 위협적이었다.“아주머니, 여기가 공공장소인 건 아세요? 애 똑바로 안 봐요? 그러다 부딪혀서 사람 다치면 어떡하시려고요.”순간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여기가 공공장소면 우리도 마음대로 할 수 있죠. 어린애가 부딪히면 얼마나 아프겠어요. 조금 뛰어다니는 게 왜요, 그쪽 레스토랑이에요?”노진우가 다른 말을 하려던 찰나 강하리가 그를 쳐다보았고 노진우는 입을 다물며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려 했다.하지만 강하리는 고집을 부리며 그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식당엔 사람도 보는 눈도 많은데 보통 사람이 애와 부딪힌 걸로 누가 부축을 받나.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바로 노진우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식당을 나서고 나서야 그녀는 말했다.“가서 저 여자와 어린아이를 잘 지켜보고 다른 사람과 접촉한 건 없는지 살펴봐요. 그리고 심 변호사님께 연락해서 식당 카메라 돌려보라고 해요. 저 아이가 계속 뛰어다닌 건지 아니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온 건지 확인하세요.”노진우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고 주해찬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
“게다가 병원에 가서 확인해 봤더니 임신 검사 기록도 없고 오히려 임신이 쉽지 않다는 진단이 나왔어. 네가 괜히 의심하는 거야. 생각해 봐, 구승훈이 그렇게 신경을 많이 쓰는데 정말 임신했다면 이렇게 며칠을 혼자 이쪽에 두고 갔겠어?”문연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승훈 오빠가 신경 쓴다니 무슨 말이야? 승훈 오빠는 그냥 데리고 노는 거야.”염진숙은 웃었다.“그래그래, 네 승훈 오빠가 구씨 가문 어르신이랑 등을 돌리고 자기 부하 보내서 곁을 지킬 만큼 데리고 노는가 보다.”문연진은 염진숙의 말에 짜증이 났고 속이 터질 것 같았다.“그만 좀 할 수 없어? 임신한 거 보라고 부른 거잖아!”염진숙은 콧방귀를 뀌었다.“내가 봤을 땐 임신한 것 같지 않은데.”“그러면 왜 하이힐을 안 신어? 화장은 왜 안 해? 이런 큰 행사에 화장을 하나도 안 했잖아!”“힐을 신지 않아도 충분히 키가 크고 화장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예쁘니까.”문연진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다.“엄마는 도대체 누구 편이야?”염진숙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문연진은 화가 나서 시선을 홱 돌렸다.‘강하리, 임신한 게 아니어야 할 거야. 정말 임신했다면 내가 가만 안 둘 거니까!’염진숙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진정해, 네 승훈 오빠가 알면 널 가만히 안 둘 거야.”강하리는 호텔로 돌아와 문을 닫은 뒤 온몸에 힘이 풀려 소파에 주저앉았다.조금 전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최대한 침착하게 행동했던 그녀가 사실은 얼마나 당황했는지 그녀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그 순간, 떠밀려서 유산했던 기억이 떠올랐고 이 아이까지 잃으면 정말 더 이상 살아갈 용기가 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강하리는 소파에 앉아 뼈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고 구승훈의 전화가 걸려 왔다.강하리는 마음을 추스르고 전화를 받았다.“하리야, 겁내지 마.”저쪽에서 들려온 구승훈의 목소리에 문득 강하리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강하리는 욕조에 몸을 기대고 오늘 있었던 일들을 머릿속으로 되새겼다.아직도 그녀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다소 아픈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일어나려는 순간 갑자기 욕실 문이 열렸다.강하리는 예상치 못하게 들어온 구승훈을 보고 깜짝 놀랐다.“얼마나 오래 있었던 거야?”강하리는 멍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물었다.“여긴 어떻게 왔어?”구승훈은 대답 대신 그저 다가와서 그녀를 욕조에서 안아 들었다.강하리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를 안은 채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구승훈, 이거 놔!”하지만 구승훈은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그녀를 안아서 침대에 바로 눕혔고 강하리는 그 틈에 몸을 이불로 감싸고 그를 향해 발길질했다.구승훈이 그런 그녀의 발목을 잡고 몸을 숙이자 강하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온몸이 덩달아 긴장태세에 돌입했다.“구승훈, 당장...”“무서워?”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 대고 물었다.강하리의 마음속에 억누르고 있던 두려움이 갑자기 다시 한번 솟구쳤다.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나지막이 답했다.“무서워.”구승훈은 가슴이 아릿해지며 그녀를 부드럽게 품에 안았다.“하리야, 그때 네 곁에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강하리의 눈가가 붉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누군가 일부러...”“알아, 더 생각하지 말고 푹 쉬어. 나머지는 나한테 다 맡기고.”강하리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말했다.“알았어.”구승훈은 그녀의 곁에서 그녀를 품에 안았다.강하리의 귀에는 강하고 힘찬 심장 박동이 들렸고 뒤에서는 남자의 단단한 가슴이 느껴졌다.가만히 누워있던 그녀는 놀랍게도 잠깐은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시선을 내린 채 두 눈에 담긴 복잡한 감정을 숨긴 그녀는 오늘 하룻밤만이라도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렇게 어느샌가 강하리는 잠에 들었고 구승훈은 그녀가 잠드는 것을 지켜보다가 몸을 기울여 입술에 키스했다.
“구동근은 걱정하지 마. 절대 강하리를 내버려둘 양반이 아니니까 넌 침착하게 있으면 돼.”문연진은 여전히 마음속으로 분노를 품고 있었지만 문원진의 말에 조금은 진정이 되었다.하지만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전에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고 외교부에서 걸려 온 전화라 문연진은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다음 날 아침, 강하리가 눈을 뜨기도 전에 주해찬의 전화가 걸려 왔다.그녀가 움직이려는데 구승훈이 다시 품으로 끌어당겼다.“조금만 더 자, 아직 이른 시간이야.”그의 말에 강하리는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고 옆에 누워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잘생겼고 다소 잠긴 목소리에는 약간의 섹시함이 묻어났으며 턱에는 갓 돋아난 수염이 있었는데 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잠깐 넋을 잃었다.구승훈은 웃으며 큰 손을 이불 아래로 뻗어 그녀의 작은 배를 감쌌다.“아기 엄마, 왜 그렇게 쳐다봐?”강하리는 순간 정신을 차리자 어젯밤의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다소 민망해서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내 휴대폰 돌려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주해찬의 전화를 바로 끊어버린 뒤였다.강하리는 인상을 찌푸리며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구승훈이 그녀를 끌어당기며 위로 덮쳤다.“강하리 씨, 또 나 몰라라 하는 거야?”강하리는 그를 힘껏 밀어냈다.“구승훈, 내 배!”구승훈은 그녀의 눈가를 어루만지며 말했다.“걱정 마, 아기 안 건드리고 너만 덮치는 거야.”강하리는 부끄러움과 분노가 동시에 밀려와 힘껏 구승훈을 옆으로 밀어버렸다.“저리 꺼져!”그녀는 잠옷을 끌어당겨 입었고 그런 그녀의 행동을 빤히 바라보는 구승훈의 두 눈엔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곧바로 베개를 집어 들어 구승훈의 얼굴에 직격탄을 날렸지만 구승훈은 웃으며 말했다.“확실히 이른 아침부터 보면 안 될 모습이긴 하네.”그렇게 말한 후 그는 일어나서 화장실로 향했고 잠시 후 안에서 물소리가 들렸다.시선을 내린 강하리는 동요하는 마음을 애써 누르
구승훈은 무심하게 답한 뒤 고개를 숙여 강하리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그 여자가 외교부에 있는 한 넌 항상 조심해야 해. 하리야, 난 네가 그렇게 힘든 건 싫어.”강하리의 속눈썹이 파들 떨리며 이윽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여긴 갑자기 어떻게 왔어? 집안일 다 처리했어? 혹시 나 때문에... 할아버지랑 등 돌린 거야?”“네가 보고 싶어서 왔어.” 구승훈은 그녀의 어깨 움푹 들어간 곳에 턱을 대고 말했다.“그 영감탱이는... 꼭 너 때문이 아니라 이젠 나도 구씨 가문을 손에 넣을 때가 됐으니까.”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이 조금은 놓이는 듯했다.그녀는 그를 밀어내고 화장실로 들어갔다.구승훈은 아침으로 먹을 것을 주문하고 강하리가 나왔을 때는 이미 멀끔히 차려입은 뒤였다.강하리는 당장이라도 갈 듯한 그의 모습을 보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가려고?”구승훈은 다가와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네가 나랑 헤어지기 싫다면 여기 있고.”강하리는 그를 쳐다보더니 곧바로 밀어냈지만 잠시 후 이렇게 덧붙였다.“안전 조심해.”구승훈이 웃었다.“강하리 씨, 지금 날 걱정해 주는 건가?”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구승훈, 당신은 그래도 내 아이 아빠야. 당신한테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어.”구승훈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리야, 네가 아직도 날 걱정해 줘서 너무 기뻐.”강하리는 시선을 내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그들 사이엔 너무 많은 것들이 둘을 갈라놓고 있지만 그래도 한때 깊이 사랑했던 사람이었다.앞으로 함께하지 못한다 해도 그를 없는 존재로 취급할 수는 없었다.구승훈은 강하리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강하리는 그를 배웅하러 가지 않고 그냥 위층에 서서 그가 차에 타는 모습을 지켜봤다.구승훈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같은 시각 문씨 가문은 난리가 났다.어젯밤 문연진은 해고된 후 집에 돌아와 울기 시작했고 밤새 울
문원진은 콧방귀를 뀌었다.“그동안 넌 얌전히 집에 있어. 또 나가서 사고 치지 말고, 알았지?”문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구승훈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구승재가 바로 다가왔다.“할아버지가 깨어나셔서 계속 형을 찾고 있었어.”구승훈은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고 구승재가 그를 바라봤다.“어떡하려고?”“정신과 의사한테 가자.”구승재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형, 할아버지가 큰삼촌한테 연락하기 시작한 것 같아.”구승훈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더니 비웃었다.“뭐, 마음대로 하시라고 해.”구승재는 말없이 구승훈을 바라봤고 두 사람이 진료실에 도착했을 때 정신과 의사는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구승재는 밖에 있었고 구승훈은 홀로 치료실에 들어섰다.“그냥 누우면 되나요?”정신과 의사는 인상을 찌푸렸다. “구 대표님, 다시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저희...” 구승훈이 웃었다.“다른 의사로 바꿀까요?”정신과 의사는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고 구승훈은 자리에 누운 뒤 눈을 감았다.지난 20년 동안 그는 한 번도 기억을 되찾고 싶지 않았다.고통스러웠으니까.강주에서의 짧은 기쁨의 순간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고통뿐이었고 지금까지도 기나긴 치료 과정만 기억하고 있었다.매일 마주치는 정신과 의사의 얼굴은 그에게 천사이자 악마였고 그 시절은 그의 기억 속에 온통 고통밖에 없었다.뼛속 깊이 파고드는 고통.하지만 이제 이 방법을 통해 어린 시절을 조금이라도 떠올릴 수 있다면 그는 기꺼이 시도할 거다.치료 과정 내내 구승훈은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고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만이 그가 괴롭다는 것을 알려주었다.그의 머릿속에는 기억은 한 편의 공백으로 남아있었다.구승훈이 눈을 감고 떠올려 봐도 생각나는 건 일부 장면뿐이었다.어두컴컴한 지하 감옥에서 여초연은 그를 물속으로 밀어 넣었고 여자의 얼굴에는 증오가 가득했다.그녀가 말했다.“죽어, 죽으라고!”그게 그의 기억 속 여초연이 처음 그를 죽이려고 시도한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