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전화기 너머로 구승훈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구승훈 씨, 무슨 일 있었어?”구승훈이 낮게 웃었다.“무슨 일이 있어야만 네 생각을 할 수 있어?”강하리는 갑자기 침묵했고 구승훈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조용히 휴대폰으로 서로의 숨소리를 들었다.얼마나 지났을까, 강하리가 먼저 조용히 말을 꺼냈다.“별일 없으면 먼저 끊을게.”구승훈이 웃었다.“하리야, 나 안 보고 싶어?”강하리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반나절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 보고 싶기는 무슨.하지만 구승훈의 말투를 들어보니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구승재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망설이다가 결국 포기했다.지금 이런 사이에 그가 굳이 얘기하지 않는데 자신이 먼저 물어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JM그룹 업무에 참여하기로 동의한 이후 강하리는 점점 더 바빠졌다.외교부 업무 외에도 새 회사를 위한 국내 시장 개척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사실 국내 시장은 지난 2년 동안 나라에서도 대외 무역을 강력하게 추진하기에 개척하는데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JM그룹은 이미 탄탄한 실력에 유엔의 지원까지 받고 있었고 외교부에서 강하리의 입지까지 더해져 한결 쉽게 일을 진행해 한 달만에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대양그룹 연성 지사가 무너진 이후 그럭저럭 지내던 안예서는 강하리의 부름을 받고 B로 향했다.강하리는 이 기회에 안예서에게도 업무를 맡길 생각이었다.안예서는 일을 열심히 했고 강하리 밑에서 업무 능력을 상당 수준 끌어올렸기에 대부분 강하리가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다.나문빈은 강하리가 놀라운 성과를 이룩하자 직접 축하해주러 해외에서 오려고 했지만 강하리가 이를 거절했다.조금 전 안예서의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누군가 JM그룹의 통역으로 속여 협업하는 척 협상 회의와 계약체결식을 엉망으로 만들어서 현재 JM은 고소까지 당한 상태였고 인터넷에서도 크게 퍼뜨려 JM그룹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고 한다.강하리는 인터넷
“오케이! 같이 일할 사람을 보내줄게요.”강하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문빈 씨, 날 믿어줘서 고마워요.”나문빈이 웃었다.“당신과 함께 일하게 된 덕분에 영부인께서 사업하는 데 많은 편의를 주신다는 걸 모르죠?”강하리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노진우가 문을 두드렸다.“강하리 씨, 문제가 해결됐어요. 그 남자가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고소도 취하했어요.” 강하리가 당황하며 황급히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JM을 사칭한 사람이 온라인에서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고소장도 취하된 상태였다.그 사람의 정보를 파헤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고 국내 오래된 번역 회사 사람이었는데 최근 시장을 너무 많이 빼앗겨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그런데 일이 이렇게 빨리 밝혀질 줄은 몰랐고 보상하고 사과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한편 JM그룹은 이번 일로 인해 한층 더 화제를 불러왔고 일은 시작도, 끝도 빠르게 진행되었다.강하리는 손에 쥔 자료를 넘기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쪽 대표님께서 해결해 주셨어요?”옆에 있던 노진우의 눈빛이 흔들렸다.“대표님께선 강하리 씨가 너무 힘든 걸 원하지 않으십니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옆에 있는 휴대전화를 바라보다가 한참 후 집어 들어 구승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고마워.]구승훈은 재빨리 답장을 보냈다.[보고 싶어.]강하리는 이 네 글자에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그 이후로 강하리는 점점 더 바쁜 시간을 보냈고 밤이 깊어지고 주위가 고요해질 무렵이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 남자를 떠올렸다.강하리는 호텔 통유리창 앞에서 휴대전화를 손에 꼭 쥔 채 서 있었다.휴대폰 안에는 구승재가 보낸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사진 속 구승훈은 창백한 얼굴로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있었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하리 씨, 아직도 형한테 화난 거 알지만 우리 형도 속은 거예요. 두 사람 다 불쌍한 사람이라고요. 우리 형 어린 시절 기억 되찾겠다고 매일 심
구승훈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미소가 가득했다.“알아, 하지만 난 알고 싶어. 하리야, 난 기억을 떠올려서 우리 사이에 잃어버렸던 것들을 하나하나 보상하고 싶을 뿐이야.”강하리의 가슴이 먹먹해지며 한참이 지나서야 말을 꺼냈다.“구승훈 씨, 알고 싶다면 내가 알려줄게.”구승훈의 목울대가 일렁거리더니 한참 후 대답했다.“좋아.”그녀는 구승훈에게 어린 시절에 대해 말하는 것이 옳은 건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그가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정말 괴로웠다.배 속에 있는 아이를 위해서라도 한 발짝 물러서기로 했다.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11월이 되고 식어버린 날씨와 함께 강하리의 배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헐렁한 니트는 그녀의 온몸을 따뜻하고 부드럽게 감싸주면서도 그녀의 아우라를 감추지 못했다.강하리가 주위 사람들과 낮게 웃고 떠들며 외교부 밖으로 나오는데 밖으로 나오는 순간 누군가 그녀의 어깨에 코트를 씌워주었고 강하리는 습관적으로 노진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곧 그녀의 걸음이 멈췄다.옷에서 그녀에게 너무도 익숙한 냄새가 났다.강하리가 뒤를 돌아보니 구승훈이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뒤에 서 있었다.강하리는 그가 무척 야윈 것을 발견했고 강하리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옆에 있던 동료들이 서둘러 말을 전했다.“하리 씨, 그럼 우린 먼저 가볼게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나머지 일은 전화로 연락드릴게요.”일행이 가고 강하리가 입을 열었다.“언제 왔어?”구승훈은 웃으며 그녀를 곧장 품으로 끌어안았다.“오후에 왔는데 강하리 씨 한번 만나기 힘드네.”주위에 오가는 사람들 전부 외교부 동료들이었기에 강하리는 다소 어색하게 그를 밀어냈지만 구승훈은 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강하리는 문득 후회되었다. 이 남자는 늘 그렇듯 뻔뻔하게 선을 넘는데 도가 터 있었다.“이거 놔.”하지만 구승훈은 그녀를 곧장 차 안으로 끌어당겼고 차에 탄 그는 그녀가 숨을 돌릴 틈도 주지 않은 채 키스를 퍼부었다.뜨겁고 거친 키스에
구승훈은 웃으며 그녀를 놓아주더니 그녀의 다리를 꾹 눌렀다.“어딜 들이밀어!”강하리가 그를 노려보며 싫은 기색으로 입가를 연신 닦는데 구승훈이 손을 들어 그녀의 연약한 뺨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하리야, 고마워.”강하리는 움직임을 멈추고 그의 시선을 피했다.“아이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 아이 아빠가 그깟 어린 시절 기억 때문에 몸 망치는 건 싫으니까.”구승훈의 눈에는 식지 않은 열기가 담겨 있었다.“알아.”그는 웃으며 그녀의 손가락을 잡고 자기 턱에 문질렀다.“아기를 위해서지만 그래도 고마워.”강하리가 손을 뒤로 빼려 했지만 구승훈은 더 꽉 잡았다.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근처에 있던 수납함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자 강하리는 멈칫했다.“이게 뭐야?”구승훈의 눈빛에는 온통 미소뿐이었다.“열어봐.”강하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열어보고는 깜짝 놀랐다.구승훈이 에비뉴의 주식 51%를 자신의 명의로 이전한 것이었다.강하리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구승훈 씨, 당신 뭐 하는 거야?”구승훈의 눈에는 다정함이 가득했다.“네 거라고 했잖아. 에비뉴는 원래 네 거였어.”강하리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서류를 다시 구승훈의 손에 밀어 넣었다.“싫어.”구승훈은 그녀의 손가락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렸다.“그럼 우리 아이한테 줘. 이제부터는 너랑 아이를 위해 일할게. 강 대표님, 할 수만 있다면 평생 당신 위해서 일하고 싶어.”강하리의 손가락이 움츠러들며 그녀는 시선을 내린 채 한참 후 입을 열었다.“구승훈 씨, 이럴 필요 없어.”구승훈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필요한지 아닌지는 내가 결정해. 너랑 아이를 위해서 난 뭐든지 할 수 있어.”말을 마친 그는 시동을 걸고 차를 몰고 출발했다.강하리는 시트에 뒤로 기대어 밤하늘을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생각에 잠겼다.같은 시각, 외교부 앞 한 차에서는 문연진이 두 사람이 차고 있던 차가 떠나는 걸 보며 분노에 핸들을 쾅 내리쳤다.그동안
강하리는 구승훈이 자신의 앞에서 최선을 다해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하지만 때때로 그 느낌이 여지없이 다가왔다.강하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식탁에 앉아서 음식을 세팅했고 구승훈은 상대방에게 몇 마디 덧붙인 뒤 전화를 끊었다.“이사 가려고?”강하리는 멈칫하다가 한참 후에야 말을 꺼냈다.“응.”강하리는 B시에서 하는 일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 늘 호텔에 머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그래서 그녀는 주해찬에게 아파트를 구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말을 마친 강하리는 구승훈을 바라보았다.그가 따라오겠다거나 뭐 그런 말을 할 줄 알았는데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계속 호텔에만 지내기엔 불편하지.”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이 웃었다.“왜? 내가 따라간다는 말 안 해서 실망했어?”강하리는 그를 노려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날 밤 강하리는 웬일로 구승훈과 얼굴을 붉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노을이 하늘을 가득 채운 그날의 만남부터 그녀가 울며 그의 차를 쫓아가던 날까지.구승훈은 그녀가 하는 모든 말을 머릿속에 새기려는 듯 귀를 기울였다.그동안 일부 기억을 되찾긴 했지만 전부 암담하고 추악한 것들이었다.그 작은 어촌에서 있었던 기억은 세상 어딘가에 철저히 버려진 듯 그의 머릿속에서 잊혔다.“하리야.”구승훈은 그녀를 품에 안았다.“언제 한번 강주에 다시 가보자.”강하리가 한참 동안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오래전에 철거됐어.”간다고 해도 원래의 모습을 보아낼 수 없었다.마치 두 사람처럼.전부 돌아갈 수 없는 과거로 되어 사람도, 상황도 모든 게 달라져 버렸다.어느샌가 강하리는 잠에 들었고 다시 깨어났을 때 그녀는 창가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앉아 있는 구승훈을 발견했다.강하리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니 그 모습에 설명할 수 없는 외로움과 연약함이 느껴졌다.눈가가 시큰 해나자 한참 후 그녀는 시
남자는 다소 씁쓸하게 웃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손연지와 헤어진 후에야 구승훈은 시선을 내리며 강하리에게 말했다.“하리야, 너와 아이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할게.”강하리는 바닥을 내려보며 웃다가 한참 후에야 말했다.“구승훈 씨, 가끔은 그런 약속이 아무런 소용 없을 때도 있어.”피식 웃은 구승훈은 그녀가 뭘 얘기하는지 알았다. 과거 그가 제대로 해내지 못한 건 사실이었지만 이젠 목숨을 걸고서라도 아이와 그녀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했다.그저 겉으로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을 뿐.구승훈은 강하리에게 개인 의사와의 약속을 잡았고 진찰을 마친 의사가 적극적으로 가리키며 말했다.“여기가 머리고 여기가 엉덩이예요. 아이가 무척 건강해 보이네요.”강하리는 컴퓨터 화면의 이미지를 바라보다가 문득 코끝이 찡해졌다.그녀의 아이, 그녀의 핏줄인 아이였다.강하리는 손을 들어 촉촉한 눈가를 닦았다.“건강하게 낳을 수 있겠죠?”의사가 웃었다.“당연하죠.”의사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물었다.“사진 한 장 출력해 드릴까요?”검사 기록을 남기지 말라는 말을 미리 들었지만 이 아가씨가 아이를 무척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강하리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쓸어보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필요 없어요.”의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강하리는 이미 작별 인사를 고했다.“감사해요.”그러고는 금방 자리를 떠났다.의사는 한숨을 내쉬며 검사 기록을 모두 지운 뒤 생리불순으로 바꿨다.강하리와 구승훈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연진이 조용히 들어왔다.“선생님, 방금 그 여자는 무슨 검사 때문에 온 거예요?”의사는 인상을 찌푸렸다.“죄송하지만 환자 정보는 알려드릴 수 없어요.”문연진은 웃으며 의사 앞에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여기 1억이 있는데 저 여자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지만 알면 돼요.”의사의 눈이 번뜩이며 천천히 그 카드를 받았고 컴퓨터에 있던 검사 기록을 전부 찾아냈다.[생리불순.
구승훈은 그녀를 식탁으로 끌어당겼다.“네 곁에 돌봐줄 사람이 없으면 내가 불안해서 그래. 계속 배달 음식만 먹을 수는 없잖아.”강하리는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하리는 외교부 업무를 중단했다.배가 점점 불러와 불편하기도 했기에 JM의 일은 전부 집에서 처리했다.나문빈이 소유한 다른 회사도.나문빈은 강하리를 도와줄 사람을 보낸다고 했는데 그게 그 본인일 줄은 몰랐다.매일 강하리를 찾아오는 나문빈을 보며 구승훈의 표정은 갈수록 굳어만 갔다.하지만 둘이 그저 일 얘기만 했기에 구승훈은 뭐라 하고 싶어도 할 말이 없었다.안예서가 강하리와 구승훈에 대해 알게 된 건 B시에 도착한 후였다.예전부터 강하리와 구승훈이 만나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긴 했지만 두 사람이 실제로 만났다는 사실에 며칠 동안 충격을 받았다.특히 사람들이 감히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던 구 대표님이 하루 종일 강하리 곁에 달라붙어 있는 모습을 보고는 세상이 뒤집어지는 느낌이었다.겨우 구승훈이 강하리 곁을 비운 사이 안예서는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부장님 쫓아다닌다던 사람이 구 대표님은 아니겠죠?”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여긴 어디, 나는 누구?’안예서는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겨우 자료를 챙겨 자리를 떠났다.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심문석의 생일을 앞둔 11월 말, 일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강하리의 임신 6개월 가까이 된 배는 헐렁하고 두꺼운 점퍼를 입으면 숨길 수 있었다.하지만 드레스를 입으면 배를 감출 수 없었기에 심문석의 생일날 원래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심준호가 직접 그녀를 데리러 왔다.“드레스 말고 평소처럼 입어도 돼요. 엄마랑 할아버지가 하리 씨 보고 싶다고 하셔서 그냥 가서 얼굴만 비추고 더 머물고 싶지 않으면 일찍 와도 돼요.”강하리는 결국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안으로 들어가자 심준호는 현관에
TV나 뉴스에서 그를 거의 매일 본다.“그냥 할아버지라고 불러.”강하리는 낮게 불렀다.“안녕하세요, 할아버지.”심금천은 멍하니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앞으로 집에 자주 놀러 와.”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고 심문석은 이어서 둘째, 셋째에게도 그녀를 소개했다.셋째를 소개할 때 석미란은 눈을 흘길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막 뭐라 하려던 찰나 구승훈의 눈길이 이쪽으로 향했고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지금도 구승훈을 보면 얼굴에 아픔이 느껴졌다.구승훈만 있는 게 아니라 큰집 식구들과 어르신까지 있었고 대체 저 계집이 무슨 약이라도 먹였는지 하나 같이 자기 딸보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저 계집한테 더 잘해주었다.석미란은 남몰래 몇 마디를 중얼거리며 옆으로 걸어갔다.심문석이 강하리를 데리고 일일이 소개를 마친 뒤 백아영이 그녀를 곁으로 끌어당겼다.“태형 씨 말로는 일 다 넘겼다면서?”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마음 편히 해외 파견을 기다리고 싶어요.”백아영은 인상을 찌푸리며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문연진과 함께 밖에서 들어오는 문원진을 보았다.멈칫하던 강하리의 안색이 굳어지자 백아영의 두 눈이 번뜩였다.“여기 있기 싫으면 승훈이랑 나가서 둘러봐. 여긴 별로 볼 것도 없고 노인네들만 많으니까.”강하리는 문씨 일가와 마주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바로 답했다.헐렁한 니트를 입었어도 문연진의 눈을 완벽히 속일 자신이 없었다.그녀는 지난번 유산을 경험한 뒤 눈앞에 겨눈 총보다 뒤에 숨어 쏜 화살이 더 무섭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 터라 지금은 문연진을 피하고만 싶었다.“백 장관님 감사합니다.”백아영이 웃으며 말했다.“가 봐.”강하리가 구승훈과 함께 자리를 뜨려는 찰나 때마침 문씨 일가와 정면으로 부딪쳤다.문연진은 강하리가 입고 있던 헐렁한 니트와는 대조적으로 유난히 화려해 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그녀는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 씨, 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