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구승훈이 자신의 앞에서 최선을 다해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하지만 때때로 그 느낌이 여지없이 다가왔다.강하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식탁에 앉아서 음식을 세팅했고 구승훈은 상대방에게 몇 마디 덧붙인 뒤 전화를 끊었다.“이사 가려고?”강하리는 멈칫하다가 한참 후에야 말을 꺼냈다.“응.”강하리는 B시에서 하는 일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 늘 호텔에 머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그래서 그녀는 주해찬에게 아파트를 구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말을 마친 강하리는 구승훈을 바라보았다.그가 따라오겠다거나 뭐 그런 말을 할 줄 알았는데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계속 호텔에만 지내기엔 불편하지.”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이 웃었다.“왜? 내가 따라간다는 말 안 해서 실망했어?”강하리는 그를 노려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날 밤 강하리는 웬일로 구승훈과 얼굴을 붉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노을이 하늘을 가득 채운 그날의 만남부터 그녀가 울며 그의 차를 쫓아가던 날까지.구승훈은 그녀가 하는 모든 말을 머릿속에 새기려는 듯 귀를 기울였다.그동안 일부 기억을 되찾긴 했지만 전부 암담하고 추악한 것들이었다.그 작은 어촌에서 있었던 기억은 세상 어딘가에 철저히 버려진 듯 그의 머릿속에서 잊혔다.“하리야.”구승훈은 그녀를 품에 안았다.“언제 한번 강주에 다시 가보자.”강하리가 한참 동안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오래전에 철거됐어.”간다고 해도 원래의 모습을 보아낼 수 없었다.마치 두 사람처럼.전부 돌아갈 수 없는 과거로 되어 사람도, 상황도 모든 게 달라져 버렸다.어느샌가 강하리는 잠에 들었고 다시 깨어났을 때 그녀는 창가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앉아 있는 구승훈을 발견했다.강하리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니 그 모습에 설명할 수 없는 외로움과 연약함이 느껴졌다.눈가가 시큰 해나자 한참 후 그녀는 시
남자는 다소 씁쓸하게 웃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손연지와 헤어진 후에야 구승훈은 시선을 내리며 강하리에게 말했다.“하리야, 너와 아이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할게.”강하리는 바닥을 내려보며 웃다가 한참 후에야 말했다.“구승훈 씨, 가끔은 그런 약속이 아무런 소용 없을 때도 있어.”피식 웃은 구승훈은 그녀가 뭘 얘기하는지 알았다. 과거 그가 제대로 해내지 못한 건 사실이었지만 이젠 목숨을 걸고서라도 아이와 그녀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했다.그저 겉으로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을 뿐.구승훈은 강하리에게 개인 의사와의 약속을 잡았고 진찰을 마친 의사가 적극적으로 가리키며 말했다.“여기가 머리고 여기가 엉덩이예요. 아이가 무척 건강해 보이네요.”강하리는 컴퓨터 화면의 이미지를 바라보다가 문득 코끝이 찡해졌다.그녀의 아이, 그녀의 핏줄인 아이였다.강하리는 손을 들어 촉촉한 눈가를 닦았다.“건강하게 낳을 수 있겠죠?”의사가 웃었다.“당연하죠.”의사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물었다.“사진 한 장 출력해 드릴까요?”검사 기록을 남기지 말라는 말을 미리 들었지만 이 아가씨가 아이를 무척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강하리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쓸어보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필요 없어요.”의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강하리는 이미 작별 인사를 고했다.“감사해요.”그러고는 금방 자리를 떠났다.의사는 한숨을 내쉬며 검사 기록을 모두 지운 뒤 생리불순으로 바꿨다.강하리와 구승훈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연진이 조용히 들어왔다.“선생님, 방금 그 여자는 무슨 검사 때문에 온 거예요?”의사는 인상을 찌푸렸다.“죄송하지만 환자 정보는 알려드릴 수 없어요.”문연진은 웃으며 의사 앞에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여기 1억이 있는데 저 여자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지만 알면 돼요.”의사의 눈이 번뜩이며 천천히 그 카드를 받았고 컴퓨터에 있던 검사 기록을 전부 찾아냈다.[생리불순.
구승훈은 그녀를 식탁으로 끌어당겼다.“네 곁에 돌봐줄 사람이 없으면 내가 불안해서 그래. 계속 배달 음식만 먹을 수는 없잖아.”강하리는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하리는 외교부 업무를 중단했다.배가 점점 불러와 불편하기도 했기에 JM의 일은 전부 집에서 처리했다.나문빈이 소유한 다른 회사도.나문빈은 강하리를 도와줄 사람을 보낸다고 했는데 그게 그 본인일 줄은 몰랐다.매일 강하리를 찾아오는 나문빈을 보며 구승훈의 표정은 갈수록 굳어만 갔다.하지만 둘이 그저 일 얘기만 했기에 구승훈은 뭐라 하고 싶어도 할 말이 없었다.안예서가 강하리와 구승훈에 대해 알게 된 건 B시에 도착한 후였다.예전부터 강하리와 구승훈이 만나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긴 했지만 두 사람이 실제로 만났다는 사실에 며칠 동안 충격을 받았다.특히 사람들이 감히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던 구 대표님이 하루 종일 강하리 곁에 달라붙어 있는 모습을 보고는 세상이 뒤집어지는 느낌이었다.겨우 구승훈이 강하리 곁을 비운 사이 안예서는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부장님 쫓아다닌다던 사람이 구 대표님은 아니겠죠?”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여긴 어디, 나는 누구?’안예서는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겨우 자료를 챙겨 자리를 떠났다.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심문석의 생일을 앞둔 11월 말, 일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강하리의 임신 6개월 가까이 된 배는 헐렁하고 두꺼운 점퍼를 입으면 숨길 수 있었다.하지만 드레스를 입으면 배를 감출 수 없었기에 심문석의 생일날 원래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심준호가 직접 그녀를 데리러 왔다.“드레스 말고 평소처럼 입어도 돼요. 엄마랑 할아버지가 하리 씨 보고 싶다고 하셔서 그냥 가서 얼굴만 비추고 더 머물고 싶지 않으면 일찍 와도 돼요.”강하리는 결국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안으로 들어가자 심준호는 현관에
TV나 뉴스에서 그를 거의 매일 본다.“그냥 할아버지라고 불러.”강하리는 낮게 불렀다.“안녕하세요, 할아버지.”심금천은 멍하니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앞으로 집에 자주 놀러 와.”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고 심문석은 이어서 둘째, 셋째에게도 그녀를 소개했다.셋째를 소개할 때 석미란은 눈을 흘길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막 뭐라 하려던 찰나 구승훈의 눈길이 이쪽으로 향했고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지금도 구승훈을 보면 얼굴에 아픔이 느껴졌다.구승훈만 있는 게 아니라 큰집 식구들과 어르신까지 있었고 대체 저 계집이 무슨 약이라도 먹였는지 하나 같이 자기 딸보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저 계집한테 더 잘해주었다.석미란은 남몰래 몇 마디를 중얼거리며 옆으로 걸어갔다.심문석이 강하리를 데리고 일일이 소개를 마친 뒤 백아영이 그녀를 곁으로 끌어당겼다.“태형 씨 말로는 일 다 넘겼다면서?”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마음 편히 해외 파견을 기다리고 싶어요.”백아영은 인상을 찌푸리며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문연진과 함께 밖에서 들어오는 문원진을 보았다.멈칫하던 강하리의 안색이 굳어지자 백아영의 두 눈이 번뜩였다.“여기 있기 싫으면 승훈이랑 나가서 둘러봐. 여긴 별로 볼 것도 없고 노인네들만 많으니까.”강하리는 문씨 일가와 마주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바로 답했다.헐렁한 니트를 입었어도 문연진의 눈을 완벽히 속일 자신이 없었다.그녀는 지난번 유산을 경험한 뒤 눈앞에 겨눈 총보다 뒤에 숨어 쏜 화살이 더 무섭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 터라 지금은 문연진을 피하고만 싶었다.“백 장관님 감사합니다.”백아영이 웃으며 말했다.“가 봐.”강하리가 구승훈과 함께 자리를 뜨려는 찰나 때마침 문씨 일가와 정면으로 부딪쳤다.문연진은 강하리가 입고 있던 헐렁한 니트와는 대조적으로 유난히 화려해 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그녀는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 씨, 심
문원진의 말이 끝나자 구승훈은 비웃었다.“어르신,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그 문제는 내부 부서와 징계위원회에서 결정한 건데 하리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겁니까?”문원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승훈아, 무슨 일이 있어도 연진이는 여전히 네 약혼녀야!”구승훈의 얼굴은 싸늘한 서리로 뒤덮인 듯 차가웠다.“전 평생 딱 한 명의 여자한테만 프러포즈했고 그게 하리입니다. 어르신께서 계속 그러시면 창피를 당하는 건 그쪽일 텐데요.”“구승훈, 너...”“그만해!” 보다 못한 심문석이 소리를 질렀다.“우리 심씨 가문을 뭐로 보는 거야? 여기 있기 싫으면 당장 꺼져!”문원진은 구승훈을 힐끗 쳐다보다가 시선을 거두고 능글맞게 다가와서 준비한 선물을 심문석에게 건넸다.“어르신, 그래도 연진이 크는 걸 옆에서 지켜보셨잖아요. 지난번 일은 잘못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애 앞길 망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심문석이 콧방귀를 뀌었고 그가 말하기도 전에 백아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자기가 선택한 길이고 본인이 자초한 일 아닌가요. 문원진 씨, 얘 앞길이 어떻게 되든 그건 본인이 결정할 일이지 다른 사람에게 책임 전가하지 마세요. 남들도 사람 앞길 망칠 만큼 큰 책임을 짊어질 리가 없고요.”문원진은 말문이 막혔다.“백아영 씨, 그래도 우린 어렸을 때부터 봐 온 사이고 연진이는 친손녀 같은 애인데 이런 일로...”“내 손녀가 그런 짓을 했다면 외교부나 징계위원회에서 나서기 전에 내 손으로 외교부에서 쫓아냈을 겁니다. 그런 사람은 남아 있을 자격이 없어요.”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분하며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 백아영 앞에서 문원진은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일그러진 얼굴로 가지도 못하고 자리에 서 있었다.문연진은 순간 눈시울을 붉혔다.“백 장관님, 저는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그럼 강하리는요? 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는데 외교부에 남아있을 자격이 있나요?”“무슨 일?” 구승훈이 비웃으며 물었다.“당연히 돈 많은 사람에게 스폰받은 것 말이에요. 승훈 오빠
그런데 강하리는 그저 웃기만 했다.“백 장관님,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다들 감싸주셔서 감사해요.”눈시울이 붉어진 채 말하던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들의 가족을 부러워했다.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있는 사람을 부러워했고 나중에는 어머니를 때리지 않는 아버지가 있는 사람을 부러워했으며 그러다 엄마가 있는 사람까지 부러워하고 있었다.그녀는 유독 자신에게만 가족의 연이 박하다는 걸 느꼈는데 오늘 이곳에서 심씨 가문 사람들이 가족처럼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순간 백아영의 가슴이 더욱 아파지며 다가와 강하리를 꼭 안아주었다.“바보 같긴, 우리는 그냥 진실을 말한 것뿐인데.”방에서 나온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그러쥐고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주었다.“심씨 가문 사람들 몇 마디에 감동한 거야?”그의 손을 떨쳐낸 강하리는 저도 모르게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그녀가 눈물을 닦으며 무슨 말을 하려는데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강하리 씨.”정주현은 그녀를 보고 이쪽으로 걸어왔고 그 뒤를 정양철이 따라왔다.“하리 양, 오랜만이네요.”강하리는 정양철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정 회장님?”정양철은 고개를 끄덕였다.“나쁘지 않게 지내고 있죠.”정주현은 옆에서 눈을 흘겼다.“나쁘지 않긴, 이사회가 다 뒤집어지게 생겼는데 뭐가 나쁘지 않아.”정양철이 그를 노려보았다.“말 안 한다고 아무도 널 벙어리로 생각 안 해.”정주현은 콧방귀를 뀌었다.“내가 하리 씨 우리 회사의 복덩어리라고 했지, 안 믿더니.”정양철은 그를 무시하고 강하리만 바라봤다.“외교부 일은 어떻게 돼가요?”강하리는 웃으며 말했다.“할만해요.”정양철의 눈이 번뜩였다.“오호? 재능 있는 사람은 어딜 가나 잘 되나 보군요.”강하리는 웃으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구승훈은 옆에서 다소 어두운 눈빛으로 정양철을 바라봤다.정양철은 그를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B시로 돌아왔어요. B시에서 무슨 일
문연진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어색하게 굳어갔다.“사모님, 전 그런 뜻이 아니라 강하리가 단순한 여자가 아니란 걸 알려드리는 겁니다. 들을지 말지는 사모님이 결정할 일이죠.”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와인 잔을 손에 들고 활짝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연미숙은 문연진이 떠나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다가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말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지만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대양그룹 지사의 강하리가 사실 어리고 예쁜 아가씨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마음속으로 막연하게 불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오늘 문연진의 말이 그녀의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그녀가 옆으로 손을 흔들자 경호원 복장을 한 사람이 다가왔다.“가서 정 회장님이 연성에서 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다 확인해 봐요, 전부 다.”경호원은 대답하고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심문석 생신 잔치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자 강하리는 다시 그의 곁으로 불려 갔고 그는 강하리를 데리고 B시의 모든 고위 인사들과 인사를 나누게 했다.강하리를 대하는 그의 태도를 지켜보며 사람들은 어느 정도 낌새를 알아차렸다.앞으로 심씨 가문에 딸 하나가 더 생긴 것 같다, 과거 심예진처럼.하여 저마다 정신을 바짝 차렸다.심준호가 구승훈 옆에 서서 말했다.“문씨 가문을 잘 지켜봐. 저대로 가만히 있을 사람들은 아니야.”구승훈이 대답하며 연미숙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그녀는 멀리서 그를 향해 잔을 들어 올렸다.“정양철 알아?”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묻자 심준호는 얼굴을 찡그렸다.“정양철은 사람이 점잖기로 유명하고 당시 별 볼 일 없던 정씨 가문을 지금의 규모로 키우기까지 했잖아. 왜, 무슨 일 있어?”구승훈은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저었고 이때 갑자기 밖에서 고함이 들렸다.심준호의 표정이 확 바뀌더니 구승훈을 바라보았고 그의 눈에서 냉기가 번뜩였다.“네가 처리해. 난 하리 데리고 갈게.”심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은 심문석에게 다가가 몇 마디 말을 건넨 뒤 강하리를 데리고 나가려 했다.그런데
강하리는 구승훈의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했다.한 번도 구승훈이 이 아이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었고 애초에 구승훈에게 이 아이의 존재를 알릴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그녀나 구승훈이 애를 써도 이 아이의 안전을 백 퍼센트 장담하긴 어렵다는 걸 잘 알았다.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 사람들을 피해 한국을 떠나 조용히 아이를 낳는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해외 파견이 아닌 이상 해외에 나가려면 여러 단계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설령 나가더라도 감시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하지만 해외 파견에 대해서 좀처럼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데 출국 허가는 쉬울?그녀는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았다.머릿속엔 온통 사생아라는 남자의 매서운 눈빛뿐이었다.구승훈의 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문질렀다.“겁내지 마, 내가 너희 둘 다 지켜줄 테니까.”강하리가 다소 짜증스럽게 그의 손을 쳐냈지만 여자의 쌀쌀맞은 태도가 오히려 구승훈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큰 손으로 그녀의 작은 배를 감쌌다.“오늘 밤에 내가 책 읽어줄까?”강하리는 그를 밀어내고 차에서 바로 내렸다.“필요 없어.”하지만 밤이 되어 구승훈이 동화책을 들고 다가왔을 때 강하리는 거절하지 않았다.이제 그녀는 선명한 태동을 느낄 수 있었다.구승훈이 배를 만지거나 태교를 빌미로 그녀에게 은근슬쩍 스킨십을 할 때면 태아는 유난히 활발하게 움직였다.강하리는 이게 혈육의 교감인지 생각하곤 했다.아이에겐 아빠가 필요하니까.강하리는 헐렁한 잠옷 차림으로 침대 옆에 기대어 앉아 영어책을 손에 들고 있었다.구승훈이 침대 쪽으로 걸어가 그런 강하리를 품에 안았다.“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대?”강하리는 그의 손에 든 동화책을 바라보며 한참을 생각하더니 말했다.“사실 아무것도 못 알아들어. 그냥 당신 목소리를 좋아하는 거지.”구승훈이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럼 내가 읽어줄까? 강주에서 네가 나한테 책 읽어줄 때처럼.”강하리는 잠시 침묵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
강하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후에야 구승훈은 다시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하지만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익살스러운 미소가 남아 있지 않았다.“여진 쪽은 어떻게 됐어?”그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준봉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출시일이 확정됐습니다. 에비뉴보다 하루 빠릅니다.”구승훈은 손에 불경스러운 듯 염주를 굴리며 냉소를 지었다.“승재와 천아름 쪽에 협조 잘하라고 전해.”“네.”준봉이 재빨리 대답했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대표님, 사실 이 일은 사모님께도 일부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구승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조용히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준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구승훈은 항상 그랬다. 강하리를 도와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다.‘정말 답답해.’여진 주얼리는 지난 몇 년간 에비뉴와 계속해서 대립해 왔다.겉보기에는 구씨 가문이나 강하리와 아무 관련 없는 작은 회사처럼 보이지만 이런 작은 회사들이 대형 브랜드의 모조품을 내놓는 건 흔한 일이었다.하지만 여진 주얼리는 단순한 모조품에 만족하지 않았다.작년에 해외에서 에비뉴 주얼리의 표절 사건이 터졌을 때 그 배후에는 여진 주얼리가 있었다.그 사건으로 여진 주얼리는 큰 이득을 봤고 에비뉴는 큰 타격을 입었다.그 후 여진 주얼리는 더욱 탐욕스러워졌다.사람이란 달콤한 맛을 보면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마련이다.여진 주얼리는 에비뉴에게 항상 위험 요소였다.구승훈은 에비뉴를 강하리에게 넘긴 이상 그녀에게 어떤 위험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대표님, 상대방의 배후 세력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대놓고 에비뉴를 도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구승훈은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뭐? 지금 내가 잃을 게 뭐가 있다고?”준봉은 놀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한참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강하리가 때린 따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고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강렬했다.그러자 구승훈의 뺨에는 순식간에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천아름은 그대로 얼어붙었지만 이내 강하리를 향해 천천히 엄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잘했어.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은 맞아야 해. 제대로 한 대쯤은 맞아 봐야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알지. 이제라도 자기 잘못을 좀 깨달아야 해.’천아름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며 통쾌해했다.한편 구승훈은 손등으로 뺨을 한 번 스치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강하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그의 눈엔 고통이 어리어 있었다.“몸이 안 좋은 거야? 아니면...” 그는 목울대를 두 번 삼킨 뒤에야 겨우 말을 이었다. “아니면... 나를 봐서... 토한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지만 더는 이 남자 앞에서 눈물 흘리고 싶지 않아 애써 참고 있었다.“다신 제 앞에 나타나지 마요.” 강하리의 차디찬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런데 구승훈의 눈에는 오히려 그 말이 묘하게 따뜻하게 비쳤다.지금 이 순간 그는 마음속에... 이상하게도 만족감이 들었다.‘적어도 하리 마음속에 아직 내가 있긴 한 거잖아. 미움이든 혐오든... 감정이 있는 한 아직 끝은 아니겠지.’그는 수트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레 강하리의 입가를 닦아주었고 긴 손가락이 그녀의 입가를 스치고는 가볍게 떠났다.구승훈은 고개를 숙인 채 쓸쓸하게 웃었다.“불쾌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하리야, 미안하지만 다신 안 나타날 수는 없을 거 같아. 난 그건 못 해.”그 말과 함께 그는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내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천천히 화장실을 나갔다.순간, 화장실 안은 적막 속에 잠겼다.강하리는 다시금 구역질했고 천아름은 재빨리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밖에서 구승훈은 그녀의 헛구역질 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얼마 후, 급히 달려온 준봉의 목소리에 그가 정신을 차렸다.“대표님, 무슨 일 있었습니까?”
두 채의 30층이 넘는 오피스 빌딩 사이에는 다섯 층마다 하나씩 연결하는 공중 회랑이 있었다.회랑 위에는 각종 카페와 음식점이 입점해 있었고 그 주변에는 다양한 꽃들이 화사하게 장식되어 있었다.강하리는 사실 정안 타워에 자주 오지는 않았다.심지어 구승훈과 결혼을 앞두고 있던 그 시절에도 여기에는 발걸음을 거의 하지 않았다.솔직히 말해서 그녀보다 임희주가 더 자주 왔을지도 몰랐다.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그녀는 입꼬리를 삐죽이며 말했다.“구승훈이야 뭐 인간쓰레기지만 그래도 통 큰 건 인정해야겠네. 이렇게 큰 회사를 그냥 덜컥 넘겨주다니. 에비뉴 주얼리잖아? 보석 업계에선 꽤 이름 있는 브랜드인데. 이렇게 보면... 그 인간은 그렇게 나쁘진 않았던 것 같기도 하네. 그렇지?”강하리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과 한 달 남짓한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구승훈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서 너무도 멀어진 것만 같았다.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오늘은 꼭 광고 모델 확정해야 해. 원래 계약하려던 사람이 며칠 전에 갑자기 마음을 바꿨어. 이유 알아봤어?”그러자 천아름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이유야 뻔하지. 뺏긴 거지 뭐. 거의 계약 직전까지 갔는데... 갑자기 말을 바꾸더라.”“누가 뺏어갔는데?”강하리가 조용히 물었다.천아름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며칠 만에 마주친 구승훈이었다. 깔끔한 수트를 입고 있었지만 여전히 전해지는 그 특유의 냉기가 몸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강하리는 구승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했다.구승훈 역시 이 순간에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던지 평소 차가운 눈빛은 놀랍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그의 시선은 곧장 강하리에게 꽂혀 그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녀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얼굴빛은 생각보다 좋았다.홍조가 돌아 있었고 얼굴도 약간 도톰해진 듯했다.그는 기뻐해
항구에서 보경시로 돌아오자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구승훈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누군가의 사무실로 들어섰다.“어떻게 됐어?”그 말에 노진우는 고개도 들지 않고 리모컨부터 눌렀다. 그러자 벽에 걸려있던 TV가 켜지더니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화면 속에는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여초천이 이성을 잃은 채 날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의 가구를 부수며 바닥에서 뒹굴기 시작하더니 그럼에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는 벽에 머리를 쾅쾅 들이박았다.여초연의 이마는 이미 피범벅이 된 상태였다.그 모습을 본 구승훈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됐어. 그만해.”노진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이렇게 끝내시겠다고요? 대표님께서 발작 났을 땐 이것보다 훨씬 심했어요. 제가 만든 약은 효과가 얼마 못 가거든요. 급하게 만든 거니까요. 하지만 대표님은 온 하루 동안 고통스러워하셨잖아요.”“게다가 대표님은 이 약 때문에 하리 씨 곁을 떠나야 했잖아요. 하리 씨가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다 이 약 때문인데 이제 와서 마음이 약해졌다고요?”구승훈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담배를 꺼내 거기에 불을 붙였다.“마음이 약해진 게 아니야. 저런 꼴을 보고 있으니까 그냥... 그때 내 모습이 떠올라서...”“생각할 때마다 너무 후회돼. 하리를 혼자 예식장에 두고 떠났던 거 말이야. 내가 어떻게 잡았는데 또다시 놓쳐버리다니...”“그런데 또 여초연이 저러고 있는 걸 보니까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 내가 하리를 밀어내지 않았더라면 하리가 내 저런 모습을 봐야 했을 수도 있잖아.”노진우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실 제 책임도 좀 있어요. 제 대학 동기인 데다가 능력도 괜찮아 보여서 추천했었는데 배경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으니까요.”구승훈은 씁쓸하게 웃었다.“임희주가 아니었어도 이렇게 되었을 거야. 여초연이 날 가만 내버려뒀을 리 없으니까.”노진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하리 씨 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