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강하리는 그저 웃기만 했다.“백 장관님,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다들 감싸주셔서 감사해요.”눈시울이 붉어진 채 말하던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들의 가족을 부러워했다.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있는 사람을 부러워했고 나중에는 어머니를 때리지 않는 아버지가 있는 사람을 부러워했으며 그러다 엄마가 있는 사람까지 부러워하고 있었다.그녀는 유독 자신에게만 가족의 연이 박하다는 걸 느꼈는데 오늘 이곳에서 심씨 가문 사람들이 가족처럼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순간 백아영의 가슴이 더욱 아파지며 다가와 강하리를 꼭 안아주었다.“바보 같긴, 우리는 그냥 진실을 말한 것뿐인데.”방에서 나온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그러쥐고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주었다.“심씨 가문 사람들 몇 마디에 감동한 거야?”그의 손을 떨쳐낸 강하리는 저도 모르게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그녀가 눈물을 닦으며 무슨 말을 하려는데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강하리 씨.”정주현은 그녀를 보고 이쪽으로 걸어왔고 그 뒤를 정양철이 따라왔다.“하리 양, 오랜만이네요.”강하리는 정양철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정 회장님?”정양철은 고개를 끄덕였다.“나쁘지 않게 지내고 있죠.”정주현은 옆에서 눈을 흘겼다.“나쁘지 않긴, 이사회가 다 뒤집어지게 생겼는데 뭐가 나쁘지 않아.”정양철이 그를 노려보았다.“말 안 한다고 아무도 널 벙어리로 생각 안 해.”정주현은 콧방귀를 뀌었다.“내가 하리 씨 우리 회사의 복덩어리라고 했지, 안 믿더니.”정양철은 그를 무시하고 강하리만 바라봤다.“외교부 일은 어떻게 돼가요?”강하리는 웃으며 말했다.“할만해요.”정양철의 눈이 번뜩였다.“오호? 재능 있는 사람은 어딜 가나 잘 되나 보군요.”강하리는 웃으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구승훈은 옆에서 다소 어두운 눈빛으로 정양철을 바라봤다.정양철은 그를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B시로 돌아왔어요. B시에서 무슨 일
문연진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어색하게 굳어갔다.“사모님, 전 그런 뜻이 아니라 강하리가 단순한 여자가 아니란 걸 알려드리는 겁니다. 들을지 말지는 사모님이 결정할 일이죠.”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와인 잔을 손에 들고 활짝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연미숙은 문연진이 떠나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다가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말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지만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대양그룹 지사의 강하리가 사실 어리고 예쁜 아가씨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마음속으로 막연하게 불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오늘 문연진의 말이 그녀의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그녀가 옆으로 손을 흔들자 경호원 복장을 한 사람이 다가왔다.“가서 정 회장님이 연성에서 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다 확인해 봐요, 전부 다.”경호원은 대답하고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심문석 생신 잔치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자 강하리는 다시 그의 곁으로 불려 갔고 그는 강하리를 데리고 B시의 모든 고위 인사들과 인사를 나누게 했다.강하리를 대하는 그의 태도를 지켜보며 사람들은 어느 정도 낌새를 알아차렸다.앞으로 심씨 가문에 딸 하나가 더 생긴 것 같다, 과거 심예진처럼.하여 저마다 정신을 바짝 차렸다.심준호가 구승훈 옆에 서서 말했다.“문씨 가문을 잘 지켜봐. 저대로 가만히 있을 사람들은 아니야.”구승훈이 대답하며 연미숙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그녀는 멀리서 그를 향해 잔을 들어 올렸다.“정양철 알아?”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묻자 심준호는 얼굴을 찡그렸다.“정양철은 사람이 점잖기로 유명하고 당시 별 볼 일 없던 정씨 가문을 지금의 규모로 키우기까지 했잖아. 왜, 무슨 일 있어?”구승훈은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저었고 이때 갑자기 밖에서 고함이 들렸다.심준호의 표정이 확 바뀌더니 구승훈을 바라보았고 그의 눈에서 냉기가 번뜩였다.“네가 처리해. 난 하리 데리고 갈게.”심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은 심문석에게 다가가 몇 마디 말을 건넨 뒤 강하리를 데리고 나가려 했다.그런데
강하리는 구승훈의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했다.한 번도 구승훈이 이 아이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었고 애초에 구승훈에게 이 아이의 존재를 알릴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그녀나 구승훈이 애를 써도 이 아이의 안전을 백 퍼센트 장담하긴 어렵다는 걸 잘 알았다.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 사람들을 피해 한국을 떠나 조용히 아이를 낳는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해외 파견이 아닌 이상 해외에 나가려면 여러 단계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설령 나가더라도 감시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하지만 해외 파견에 대해서 좀처럼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데 출국 허가는 쉬울?그녀는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았다.머릿속엔 온통 사생아라는 남자의 매서운 눈빛뿐이었다.구승훈의 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문질렀다.“겁내지 마, 내가 너희 둘 다 지켜줄 테니까.”강하리가 다소 짜증스럽게 그의 손을 쳐냈지만 여자의 쌀쌀맞은 태도가 오히려 구승훈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큰 손으로 그녀의 작은 배를 감쌌다.“오늘 밤에 내가 책 읽어줄까?”강하리는 그를 밀어내고 차에서 바로 내렸다.“필요 없어.”하지만 밤이 되어 구승훈이 동화책을 들고 다가왔을 때 강하리는 거절하지 않았다.이제 그녀는 선명한 태동을 느낄 수 있었다.구승훈이 배를 만지거나 태교를 빌미로 그녀에게 은근슬쩍 스킨십을 할 때면 태아는 유난히 활발하게 움직였다.강하리는 이게 혈육의 교감인지 생각하곤 했다.아이에겐 아빠가 필요하니까.강하리는 헐렁한 잠옷 차림으로 침대 옆에 기대어 앉아 영어책을 손에 들고 있었다.구승훈이 침대 쪽으로 걸어가 그런 강하리를 품에 안았다.“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대?”강하리는 그의 손에 든 동화책을 바라보며 한참을 생각하더니 말했다.“사실 아무것도 못 알아들어. 그냥 당신 목소리를 좋아하는 거지.”구승훈이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럼 내가 읽어줄까? 강주에서 네가 나한테 책 읽어줄 때처럼.”강하리는 잠시 침묵
진태형은 잠시 침묵했다.“해외 파견은 잠시 미뤄야 할 것 같아요.”“그럼 제가 개인 사정으로 출국 신청을 하는 건요?”진태형은 나지막이 말했다.“신청은 할 수 있지만 승인 떨어지는 게 무척 어렵고 기간도 오래 걸릴 거예요.”강하리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네, 알겠어요.”강하리가 전화를 끊자 구승훈이 상쾌한 기운을 풍기며 욕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구승훈은 파자마 한 벌을 몸에 걸친 뒤 강하리에게 다가와 포옹했다.“안 피곤해?”강하리가 낮게 물었다.“구승훈 씨, 우리 아기 괜찮겠지?”구승훈은 한참을 꽉 껴안고 있다가 대답했다.“응.”강하리는 어느새 잠이 들었고 자면서도 깊게 찡그린 그녀의 미간을 보자 구승훈은 마음이 아파 그녀를 다시 품에 꼭 껴안았다.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에게 다시는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그 후로 강하리는 계속 바쁘게 지냈지만 그녀는 구승훈이 동네에 많은 사람들을 심어놓았다는 걸 알았다.안팎으로 남녀불문하고 그가 데려온 사람이 대부분이었다.먹을 것과 입는 것도 가져다주는 사람이 있었고 나문빈마저 들어오려면 여러 번의 확인을 거쳐야 했다.그래서 나문빈은 들어올 때마다 투덜거렸다.“그쪽 집에 오는 게 유엔 본부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네요.”하지만 강하리는 그저 웃기만 했다.“최근 B시에 에너지 회사 입찰이 있는데 잘 준비해 봐요.”나문빈은 혀를 찼다.“알겠어요.”온라인 회의를 속속들이 마치고 드물게 여유시간이 생기자 그녀는 가정부 아주머니에게 발코니 쪽으로 의자를 놓아달라고 부탁했다.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집안은 따뜻했다.계약서를 들고 무심하게 들여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폰 벨이 울렸다.낯선 번호였다.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냥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해당 번호로 메시지가 전송되었다.[정양철 씨 아내 되는 사람이에요.]메시지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전화가 걸려 왔고 강하리는 전화를 받았다.“사모님, 안녕하세요.”전화기
구승훈의 눈빛이 번뜩였다.“애초에 널 자기 회사로 데려간 게 네 어머니를 해치려고 그랬다는 거야?”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건 정양철은 우리 엄마와 아무런 접점도 없는데 왜 그렇게까지 했냐는 거야...”강하리는 말하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구승훈의 손을 꽉 잡았다.“송동혁은? 구승훈 씨, 송동혁 어디 있어?”송동혁이 애초에 엄마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이 혹시... 정양철?강하리는 머릿속이 어지러웠다.저도 모르게 떠오른 생각에 깜짝 놀랐다.줄곧 엄마와 정양철이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엄마가 기억상실증에 걸렸고 송동혁을 만나기 전까지의 모든 기억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혹시 엄마가 오래전에 정양철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정말 그런 거라면 모든 게 말이 된다.정양철이 엄마를 쫓고 있었는데 송동혁이 구해줬다.그래서 그는 엄마가 죽었다고 생각해서 찾지 않았던 게 아닐까?그런데 나중에 엄마와 닮은 자신이 정주현과 일하는 걸 얼떨결에 보게 되어 곧장 연성으로 온 게 아닐까?강하리는 문득 팔다리가 저리는 느낌이 들었다.멍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보던 그녀는 계약서를 들고 있던 손마저 떨렸다.그녀는 덜컥 겁이 났다.정말 그런 걸까 봐.그렇다면 정서원을 그렇게 만든 게 결국 자신이니까.구승훈은 얼굴을 찡그리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송동혁은 아직 구치소에 있어, 왜 그래?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강하리의 입술이 살짝 하얗게 변했다.“그 사람 만나고 싶어.”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렸다.“알았어, 내가 준비할게. 근데 지금은 네 몸이 안 좋아서 안 될 것 같아. 애 낳고 가는 건 어때?”강하리는 임신 7개월 된 자신의 배를 바라보았다.이 상태로 외출하는 건 정말 위험했기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래, 기다리자.”한편, 전화를 끊은 연미숙의 시선이 책상 위에 있는 서류 더미로 향했다.처음에는 믿지 않
강하리가 헛웃음을 지었다.“둬도 난 쓸데없는데.”구승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그래, 나랑 아이가 누려야지.”“아이만이야.”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근데 나 이미 많이 먹었는데.”강하리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창피한 것도 몰라?”구승훈의 눈엔 온통 웃음기가 가득했다.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고 구승훈은 조심스럽게 운전했다.앞뒤, 좌우, 사방에 경호원들의 차가 가득했고 원래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지만 오늘은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병원 측에서는 구승훈이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전용 통로를 통해 들어선 그는 곧바로 의사 진료실로 들어갔다.몇 가지 검사를 마치고 나니 시간은 벌써 정오가 가까워졌다.석미란이 진료실에서 나오자 구승훈이 한 여자를 품에 안고 병원 제일 안쪽 진료실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몸매와 분위기가 확실히 강하리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다만... 강하리의 걷는 모습을 보던 그녀는 다소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잠시 멈칫하다가 황급히 그쪽으로 걸어갔다.하지만 몇 발짝 내딛기 전에 갑자기 누군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여긴 통행금지입니다.”여러 명의 경호원이 석미란 앞에 서서 단호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석미란은 순간적으로 불안해졌다.“내가 누구인지 알아? 여긴 심씨 가문 병원이고 난 심씨 가문 사람이야!”하지만 경호원은 움직이지 않았고 석미란은 더욱 화가 났다.“당신들 눈이 먼 거야 아님 귀가 안 들려?”경호원이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자 석미란은 이를 악물고 두 경호원을 노려보더니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밖으로 나오자 구승훈이 이미 강하리를 차에 태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그녀의 눈빛이 번뜩이다가 다시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경호원 두 명이 떠난 후에야 그녀는 진료실로 향했고 의사는 당연히 그가 심씨 가문 셋째 사모님이라는 걸 알았다.그녀가 묻자 도저히 어쩔 수 없었지만 여전히 답은 전과 같았다, 생리 불순.석미란은 그
문연진은 한동안 잔뜩 심통이 나 있었다.심문석 생일 잔치에서 했던 말로 연미숙이 움직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인내심이 많은 여자인 줄 몰랐고 지금까지 그녀는 강하리를 찾아가지도 않았다.게다가 강하리가 갑자기 외교부 일을 그만두었다는 것까지 생각하면 할수록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평소 강하리가 얼마나 책임감 있게 일을 처리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이제 박근형의 일을 맡았으니 더 열심히 할 텐데 하필 이때 일을 그만두다니.부서 사람들을 통해 알아봤지만 이유를 알지 못했다.한창 짜증이 나 있던 찰나 석미란의 전화가 걸려 왔다.“문연진 씨, 흥미로운 일이 있는데요.”문연진은 웃으며 조롱하는 어투로 말했다.똑같이 심씨 가문 사람이지만 첫째네와 너무도 다르다는 걸 누가 모르겠나.“사모님께서는 저를 잘 아시는 모양이군요.”석미란이 웃었다.“당연하죠.”문연진은 짜증스러운 기색이 가득했지만 차분한 어조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사모님, 하실 말씀 있으시면 그냥 하세요.”석미란도 빙 돌려 얘기하지 않았다.“강하리 임신한 거 아직 모르죠”문연진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뭐라고요?”“강하리가 임신했다고요.”“진짜요?”“물론이죠, 나 지금 한미병원 산부인과에 있어요.”문연진의 표정이 극도로 일그러지며 너무 화가 나서 휴대전화를 옆으로 내리쳤다.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온 문원진이 이 광경을 목격했다.“또 왜 성질을 부려!”문연진은 너무 화가 나서 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할아버지, 강하리가 진짜 임신했대요. 그년이 진짜 승훈 오빠 애를 임신했다고요!”문원진의 표정도 굳어졌다.“누가 그래?”“심씨 가문 셋째 사모님이 방금 전화해서 알려줬어요. 내가 전에 임신했다고 했을 때 다 안 믿었잖아요. 이제 어떡해요, 애가 곧 나오게 생겼는데!”문원진은 잔뜩 굳어진 얼굴로 한참이 지난 후에야 이렇게 말했다.“뭐가 그리 급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잖아.”“안 급할 수가 있어요? 승훈 오빠는 지금까지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데 강하리가
여러 대의 구급차가 병원으로 달려왔고 심준호는 어두운 얼굴로 응급실 문 앞에 서 있었다.허둥지둥 연성으로 달려온 구승재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준호 형, 우리 형이랑 강하리 씨...”“강하리 씨는 출혈 때문에 응급조치 중이고 아이는 조산해서 2킬로도 안 돼. 상황이 안 좋아. 네 형은 쇳조각이 튀어 심장 뒤쪽을 찔러서... 방금 위독하다는 통보를 받았어.”건장한 체격의 구승재도 다리가 풀리며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심준호가 황급히 그를 일으켜 세웠다.“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심준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일단 진정해. 작정하고 해친 거면 괜찮은지 알아보러 오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야. 병원에는 사람도 많아서 어떤 눈과 귀가 있는지 몰라.”구승재는 몸을 추스르고 일어섰지만 마음 한구석은 찌릿한 통증이 밀려왔다.셋 중 누구 하나라도 잘못되면 남은 둘은 죽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삶을 살 거다.응급실 문이 거듭 열리며 혈액 주머니가 드나들었다.이날 밤 구승훈은 총 세 번의 위급하다는 통보를 받았고 난리 속에 하룻밤이 지나고 손연지는 다음날이 되어서야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그녀가 왔을 때는 이미 울어서 눈이 충혈된 상태였다.“하리는요, 아기는요?”노민우는 서둘러 그녀를 옆으로 끌어당겼다.“일단 진정해. 구승재, 천천히 얘기해 봐.”“강하리 씨는 괜찮은데 아이 상태가 안 좋아요.”손연지는 순식간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아이는 이제 겨우 7개월이에요, 7개월이면 생존 확률이 10%밖에 안 돼요!”그녀의 말에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고통으로 물들어갔다.노민우는 서둘러 휴지를 건네며 물었다.“승훈이는 어딨어?”구승재 역시 붉어진 눈으로 답했다.“형은 방금 위기 넘겼어.”노민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VIP 병실 문이 열렸다.“환자 깨어났어요.”구승재는 멈칫했다.하룻밤 사이에 세 번이나 위독 통보를 받았던 사람이 이렇게 빨리 깨어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의사도 충격에 휩싸였다.구승훈의 얼굴은 핏기
다시 입을 연 구승훈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져 있었다.“자기야, 한 번만 더 불러봐. 응?”강하리의 표정이 어색함으로 물들었다.조금 전에는 몰랐는데 이제야 얼굴에 열기가 치솟는 게 느껴졌다.“내 남편이라고.”그녀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했고 구승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네 남편은 나잖아?”강하리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누가 나랑 결혼하면 그 사람이 내 남편이지.”구승훈은 홧김에 그녀를 콱 끌어안았다.“우리 강 대표님이 주방에서 하고 싶나 봐?”남자가 말하며 그녀의 옷 속으로 손을 뻗자 놀란 강하리가 순간적으로 몸부림을 쳤다.두 사람은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들었고 손연지가 내려와서 그 광경을 목격했다.그녀는 부엌에 있는 두 사람을 조용히 바라보며 말로 표현 못할 감정을 느꼈다.부러움?아마도 부러운 거겠지.하지만 사실 그녀는 강하리의 결단이 더 부러웠다.구승훈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때도 강하리는 망설임이 없었다.매번 노민우와 깨끗이 손절하려고 마음먹었어도 몇 번이나 다시 엮이고 타협하는 자신과 달리.그래서 이런 결과가 나온 거다.손연지는 마음이 답답했다. 사실 누구도 탓할 수가 없었고 탓하려면 결단력이 부족했던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심호흡한 뒤 마음을 추스르며 아래로 내려갔고 강하리는 손연지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구승훈에게서 떨어졌다.“연지야, 아침 뭐 먹을래?”손연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애정 행각에 이미 배가 불러.”강하리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밥 먹고 연정이 데리러 갈 거야.”손연지의 눈빛이 순식간에 밝아졌다.“좋아. 내가 연정이 선물도 챙겨왔어.”하지만 그다음 순간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그녀의 얼굴에 머금은 미소엔 씁쓸함이 섞여 있었다.강하리는 그걸 분명히 알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때론 본인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것들이 있다.지금 손연지를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손연지를 돌봐주는 것뿐이고 손연지가 몸을 추스르고 나면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구승훈은 강하리가 보낸 메시지를 보며 세 식구라는 단어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다가 피식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좋아.]그의 의견을 묻다니, 어떻게 감히 싫다고 하겠나.답장을 마친 구승훈은 욕실로 들어갔고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쉬지 않고 울리는 휴대폰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전화가 끊어지려고 할 때쯤 통화 버튼을 눌렀다.전화기 너머에서 구동근의 연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정안그룹과 에비뉴를 강하리한테 다 넘겼어?”구승훈은 비웃었다.“네, 왜요? 불만 있으세요, 어르신?”구동근은 그의 말에 피를 토하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구승훈, 그건 다 우리 구씨 가문 재산이야! 네가 뭔데 그 여자한테 줘!”강하리가 심씨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을 안 후 구동근은 더 이상 구승훈과 강하리의 만남을 반대하지 않았고 심지어 몸을 굽혀 심씨 가문에게 사죄할 수도 있었지만 구씨 가문의 재산이 그렇게 쉽게 넘어갔다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게 다 구씨 가문의 재산이었는데!이 망할 자식이 그렇게 쉽게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다니!구승훈은 여전히 나른한 목소리로 가볍게 웃었다.“왜요? 벌써 잊으셨어요? 구씨 가문 재산은 어르신 귀한 손주가 다 망쳐버렸어요.”“너!” 말을 꺼내지 않으면 모를까, 그 말을 하자 구동근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차갑고 냉정한 손자가 한 여자 때문에 자기 가족을 내팽개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구승훈은 웃음을 터뜨리며 목소리가 점점 더 차가워졌다.“다시는 나랑 강하리 사이 방해하지 마세요. 저한테도 할아버지가 꼭 필요한 건 아니니까요.”구승훈이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자 저쪽에서 구동근은 너무 화가 나서 전화기를 부술 뻔했다.전화를 끊자 옆에 서 있던 구씨 가문의 둘째가 다소 불안한 듯 물었다.“아버지, 어떻게 됐어요? 정말 그 두 회사를 강하리한테 다 줬대요?”구씨 가문의 둘째는 노인의 표정을 보고 순간적으로 불안해졌다.“그놈이 무슨 권리로 두 회사를 망할 년에게 넘겨줘요? 거기
거칠게 원하던 구승훈이 마침내 움직임을 멈춘 순간 강하리는 비틀거렸고 구승훈이 단숨에 그녀를 품에 낚아챘다.“너무 좋아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겠어?”강하리는 너무 화가 나서 그를 발로 차버리고 싶었다.“좋기는 개뿔!”구승훈은 웃으며 강하리를 안고 화장실로 들어갔다.“응, 나도 좋았어.”“...”개자식과 더 실랑이를 벌일 기운도 없었다. 뻔뻔한 걸로는 절대 그를 이길 수 없었다.구승훈은 강하리를 씻겨주고 그녀를 안아 침대로 돌아왔다.강하리는 손가락을 들 수 없을 정도로 피곤했지만 그래도 꿋꿋이 옷을 끌어당겨 입었고 구승훈은 그녀의 움직임을 보며 눈썹을 치켜들었다.“어디 가?”“연지 보러 갈 거야. 오늘 밤엔 연지랑 잘 거야.”구승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강하리, 넌 내 아내야.”강하리가 그를 슬쩍 보았다.“아직 결혼 안 했잖아.”구승훈이 그녀를 껴안았다.“그러면 내일 혼인신고 하러 갈래?”강하리의 몸이 경직되며 문득 지난번에 구승훈이 혼인신고 하자는 말을 했던 게 떠올랐다.그러다 그녀에게 돌아온 건 심미현의 죽음과 오지 않는 구승훈이었다.강하리의 몸이 눈에 띄게 굳어지자 구승훈은 무거운 마음으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지난번 같은 일은 없어.”강하리가 그를 돌아보았다.“만약 또 그런 일이 생기면...”구승훈의 짙고 검은 눈동자에 밝은 빛이 비쳤다.“또 그런 일이 생기면 난 고자가 될 테지만 걱정하지 마, 강 대표님. 내가 손으로도 잘 모실 수 있으니까.”“... 닥쳐!”말을 마친 그녀가 잠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가다가 두 걸음도 못 가서 갑자기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았다.“또 콘돔 안 썼어?”강하리는 말하며 지난번에도 구승훈이 콘돔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구승훈, 미쳤어? 난 지금...”구승훈이 그녀의 턱을 그러쥐었다.“걱정하지 마, 임신 안 해.”강하리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는 눈빛으로 구승훈을 바라봤고 구승훈은 손으로 강하리의 턱을 어루만지기만 했다.“나 묶었어.”
손연지는 식사를 마치고 잠을 청하기 위해 방으로 돌아갔다.아직 몸조리가 필요한 그녀는 도저히 찾아갈 데가 없어 결국 강하리를 찾으러 B시까지 왔다.강하리는 구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손연지는 자신이 겪은 일을 몇 마디로 설명했지만 강하리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구승재도 별말 없이 바로 손연지에 대해 알아본 사실을 강하리에게 전했고 대충 손연지가 말한 내용과 거의 같았지만 몇 가지 세부적인 내용이 빠져 있었다.손연지가 병원에서 손가락질받고 있었다는 것, 노민우의 약혼녀라는 사람이 손연지를 머물 곳도 없게 궁지로 내몰았다는 것 등등...손연지는 노민우를 그냥 두지 않았다고 했지만 사실은 노민우의 어머니가 노민우 몰래 손연지를 노씨 가문으로 데려와 심한 모욕을 준 것뿐이었다.그래도 손연지가 고분고분 말을 듣는 성격은 아니라 노씨 가문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웠고 상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손연지에게 수표를 던지며 연성을 떠나라고 했다.손연지는 자신이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했고 노민우의 결혼을 파탄 낼 생각도 없었기에 처음엔 연성을 떠나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노민우의 어머니가 그녀의 부모님까지 찾아갔다.강하리는 죄책감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손연지에게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는데도 그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하리를 뒤에서 껴안았다.“나를 이렇게 걱정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어떻게 같아?”구승훈은 납득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뭐가 다른데?”강하리는 시선을 떨구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많은 일을 겪었지만 그녀를 정말로 기쁘게 만드는 건 별로 없었다.어릴 적 강찬수의 가정 폭력부터 나중에 구승훈에게 받은 상처까지,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손연지가 곁에 있었고 그녀에게 손연지는 가족이었다.강하리는 대답이 없었고 구승훈도 더 묻지 않아 거실은 무척 조용했다.하지만 조용한 시간은 얼마 가지 않았고 구승훈이 귓불을 깨물며 그녀의 몸을 달구기 시작했다.강하리는 조금 긴장한
구승훈은 강하리를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도 결국 순순히 입을 다물었고 손연지는 구승훈을 보고 웃었다.구승훈은 굳어진 표정으로 두 사람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다가 모퉁이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강하리를 한 손으로 잡아당긴 뒤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오늘 밤에 보상해 줄 거야?”강하리는 순간 조금 전 당황스러운 장면이 떠올랐고 손연지가 지금 슬픈 상황에서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싶지 않았다.“가만히 있어.”구승훈의 입술이 그녀의 귀에 닿았다.“그러면 손으로만 하는 건?”남자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가로질러 그녀가 승낙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꽉 감싸자 강하리는 결국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이따가 내려가선 얌전히 있어.”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아내 말은 들어야지.”손연지는 식사 내내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식사가 끝날 무렵 강하리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노민우였다.강하리는 손연지를 바라보며 바로 전화를 끊었고 손연지는 못 본 척했지만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하지만 잠시 후 구승훈의 휴대폰도 울렸고 그는 눈썹을 치켜들며 전화를 집어 든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바깥에 도착하고 나서야 구승훈은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노민우가 아닌 노민준의 전화였고 그는 뒤를 돌아보고는 전화를 받았다.“그 주사 효과가 어때?”구승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괜찮아. 지난 이틀 동안 상태가 전보다 훨씬 안정됐어.”거짓말이 아니었다. 구승훈은 노민준이 건넨 주사를 맞고 나서부터 지난 이틀 동안 단 한 번의 이상도 느끼지 못했고 그것이 그가 오늘 유난히 기분이 좋았던 이유였다.노민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포기하지 말라고 했잖아.”짧게 대꾸한 구승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말을 마친 노민준이 잠시 멈칫했다.“참, 내 동생이 할 말이 있대.”곧이어 저쪽에서 노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승훈아, 손연지는 지금 어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네 여자를 왜 나한테 물어봐?”“승훈아, 나도 네가 강하리 씨
강하리는 사실 자신이 꽤 한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거듭되는 상처에도 수없이 용서했다.마치 구승훈이 없으면 모든 게 그대로 멈춰버릴 듯이.구승훈이 사라져도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가지만 구승훈이 없는 세상이 되어버리고 그건 그녀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또 무슨 일이 생기면 난 당해도 싸.”강하리는 손연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손연지는 다가와 강하리를 껴안았다.“구승훈 이 개자식이 전생에 우주라도 구한 거야?”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손연지의 어깨에 기대었다. 의지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위로에 가까웠다.“그러는 넌, 대체 무슨 일인데?”자기 일을 언급하자 손연지는 순식간에 흥미가 사라진 표정이었다.“별건 아니야. 사실... 하리야, 나 임신했었어.”강하리는 깜짝 놀랐다.“뭐? 그래서? 지금은 어떤데? 아기는?”손연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노민우는 다른 여자와 약혼하고 있었어. 노민우에게 말할 생각도 없었고 사실 아이도 남길 생각 없었어. 노씨 가문이나 노민우에겐 관심 없어. 40일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술하려고 했는데 그날 밤 내가 당직일 때 노민우 약혼녀가 병원에 찾아와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난동을 부렸어. 병원에서도 노씨 가문에 밉보일 수 없어서 날 해고했어.”강하리의 표정이 차가워졌다.“그러고 나서?”손연지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그리고 다음 날 아이를 지웠는데 노민우가 어떻게 알았는지 낙태한 걸 알고는 나한테 화를 냈어.”강하리의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다.노민우가 약혼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때 손연지에게 연락했을 때만 해도 그녀는 멀쩡했었다.고작 얼마나 됐다고 노민우 그 개자식이 손연지를 이렇게 힘들게 한 건지!“왜 나한테 말 안 했어?”손연지는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웃었다.“말해도 달라질 게 뭐가 있어. 그래도 노민우를 그냥 두지는 않았어. 자기가 뭐라고 나한테 화를 내? 약혼까지 했는데 내가 아이를 낳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노씨 가문에 찾아가서 업무에
강하리의 눈빛이 번쩍이며 구승훈의 말에 담긴 의미를 순식간에 알아차렸다.그가 오늘 인터넷 속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는 역할을 자처했으니 이젠 그녀가 자신을 데려가야 한다는 말이었다.강하리는 구승훈의 목에 팔을 걸고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속삭였다.“보답이라, 문제없지. 구 대표님이 우선 그 쓸데없는 여자들 먼저 해결하면!”이번 일에 진시연이 연루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석미란이 심준호에게 고소당한 이후 석연란조차 한동안 잠잠했고 그녀가 대외적으로 자신에 대한 악담을 퍼뜨릴지 몰라도 온라인에 증거를 남기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니 누가 이 모든 일을 주도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개자식, 하여간 여자가 너무 많이 꼬인다.강하리는 계속해서 구승훈과 사무실에서 꽁냥거리진 않았다.집에 손연지가 있었기에 가는 길에 백아영에게 전화를 건 강하리는 구승훈을 따라 별장으로 돌아왔다.어두운 별장을 보며 강하리는 손연지가 아직 자는 줄 알았다.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인공지능이 불을 켜자 갑자기 별장 전체가 환하게 밝아졌다.강하리가 가방을 내려놓고 손연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갑자기 구승훈이 뒤에서 안았고 곧이어 그녀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소파에 쓰러뜨렸다.강하리가 말하기도 전에 구승훈은 그녀의 입술을 막았고 남자의 손이 불순하게 그녀의 다리를 어루만졌다.“자기야, 다리 예쁘다.”강하리는 남자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챘다.이 개자식!머릿속엔 그 짓밖에 없는 건지.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그녀는 손연지에 대해 말하는 것도 잊어버렸다.“당신... 읍...구승훈은 거침없이 그녀의 스타킹을 찢어버리고는 그녀의 손을 끌어 벨트로 가져갔다.“도와줘, 자기야.”강하리의 얼굴이 화끈거렸다.“일단 기다려.”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종아리를 잡고 부드럽게 주물렀다.“못 기다려.”강하리는 그를 세게 밀었다.“아니, 내 말은...”“어머!”강하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계단 너머에서 손연지
주해찬은 다소 침울한 표정으로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아니라고 하면 믿어줄래?”주해찬은 정말 강하리에게 계속 사실을 숨길 생각도, 진시연을 도울 생각도 없었다.그냥... 강하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때 나서서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러면 강하리의 마음속 망가진 그의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아서.그런데 구승훈이 이토록 매몰차게 굴 줄은 몰랐다.아버지가 얼마나 깨끗하고 정직한 사람인지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부패한 관리들처럼 부정부패와 뇌물 수수를 일삼지는 않을 것이고 할아버지도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둘 리 없었다.하지만 부패를 철저히 타도하는 지금 같은 시기에 작은 선물을 몇 개 받은 것만으로도 큰 문제가 된다.게다가 구승훈은 그 증거를 노골적으로 인터넷에 올렸고 관련 부서에 실명으로 가차 없이 신고했다.구승훈은 결코 자신을 감추는 사람이 아니었다.그가 원하는 건 주해찬의 타협과 강하리 앞에서 완전히 신뢰를 잃는 것이었다.사실 구승훈이 처음 병원에서 그를 떠봤을 때부터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다만 줄곧 비현실적인 희망을 붙잡고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주해찬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의 완전한 패배라는 걸.“미안해, 하리야. 엄마한테 사과하라고 할게. 그리고... 인터넷에 너에 대한 루머를 유포한 것도 이모가 한 짓이야. 이모한테도 사과하라고 할게. 그리고 하리야, 내 다리...”주해찬은 말하며 심호흡하듯 잠시 멈춘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사실 거의 다 나았어.”강하리는 당황했고 주해찬은 다시 입을 열었다.“미안해. 조금만 더 나랑 같이 있어 주길 바라서, 구승훈이랑 다시 만나서 네가 또 상처받을까 봐 내가...”“선배.” 강하리가 갑자기 주해찬의 말을 가로챘다.“고마워요.”그녀가 고맙다고 말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강하리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예전에 여러 번 날 도와주고 날 이렇게 생각해 주고 지금도 날 위해 나서서 진실을
두 사람 관계에 있어서 누가 봐도 을인 모습이었다.사무실에 있던 몇몇 기자들은 서로 눈치만 봤다.에비뉴와 정안그룹이 강하리 명의로 되어 있다고?그렇다면 강하리 혼자서도 B시 재벌과 맞먹는 것 아닌가.여러 기자가 모두 멍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봤다.구씨 가문의 권력자 구승훈이 자신은 아내 덕분에 먹고 사는 놈이라고 말하다니, 그것도 제법 자랑스러워하는 듯했다.“그러면 강 대표님이 구 대표님과 송유라 씨 사이에 개입했다는 건...”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제가 우리 강 대표님과 언제 만났는지 아세요?”기자는 고개를 저었고 구승훈은 오른손 손가락으로 왼쪽 약지에 낀 반지를 살며시 돌리면서 시선을 내리깔고 웃었다.“아홉살 때 만났어요. 그 여자가... 제 삶의 유일한 구원이었죠.”구승훈은 복잡한 감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자기야, 미안해. 오랜 세월 많이 힘들었지? 오늘 여기서 맹세할게. 나 구승훈은 평생 강하리의 것이란 걸.”강하리는 화면 속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코끝이 시큰거렸다.개자식, 인터뷰만 할 것이지 왜 저런 말을 해서는.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구승훈의 말에 그녀의 마음속에 작게나마 남아있던 불편함이 말끔히 사라졌다는 걸.인터넷에 그 많은 루머들이 떠돌아다녀도 언제나 그녀를 감싸줄 사람이 있었다.구승훈의 인터뷰는 곧 화제성을 끌어모았고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댓글 창에는 축복의 글이 가득했다.강하리는 휴대폰에 달린 축복의 댓글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의 목소리에는 미소가 묻어났다.“강 대표님, 나 보고 싶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오늘 밤 일찍 돌아가서 맛있는 거 해줄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맛있는 음식만 있어?” 강하리는 멈칫했다.“또 뭘 원해?”“다리. 자기야, 한번 해보자.”강하리는 이를 갈며 그냥 전화를 끊었고 구승훈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