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가방을 옷걸이에 걸어놓고 신발을 갈아신었다.“전통시장에 다녀왔어요.”“누구랑?”강하리는 멈칫하긴 했지만, 굳이 숨기지 않으려고 했다.구승훈은 이미 무언가 알고 있는 듯싶었다.“혼자요. 오는 길에 우연히 정원 씨를 만나 정원 씨가 집까지 데려다줬어요.”구승훈은 소파에 앉아 그녀를 쳐다보았다.“우연히?”“네. 우연히요.”“이런 우연이.”구승훈은 피식 웃더니 옆자리를 두드렸다.“자, 와서 앉아서 말해. 어떻게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지.”강하리는 느껴지는 그의 분노에 등골이 오싹해 나더니 우물쭈물하면서 말했다.“길가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정원 씨가 지나가면서 저를 발견하고 집까지 데려다줬어요. 대표님, 저는 누구한테 전화하면 바로 달려올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사람이 아니에요.”구승훈은 어두운 표정으로 피식 웃더니 말했다.“강 부장, 내가 전에 했던 말을 기억해 두고 있는 것이 좋을 거야. 다른 남자들이랑 그만 어울려. 몸을 더럽혔다간 가치 없는 사람이 되는 거야.”이 말이 가슴에 비수가 꽂힌 듯 아팠지만, 그의 앞에서 굳이 내색하지 않으려고 웃으면서 말했다.“기억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표님.”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전통시장에서 뭐 샀어?”강하리는 매번 전통시장에서 산 자잘한 물건들을 그에게 보여주곤 했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구승훈처럼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수가 없었다.“아무것도 안 사고 그냥 돌아다녔어요.”구승훈은 딱딱한 그녀의 말투에 만족스럽지 않은지 그저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하리는 멈칫하더니 결국 두 쌍의 양말을 꺼냈다.“양말을 좀 샀어요.”구승훈의 것 한 쌍, 강하리의 것 한 쌍, 총 두 쌍이었다.구승훈은 이 두 쌍의 양말을 보더니 표정이 풀리기 시작했다.“씻어.”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욕실로 향했다.그녀가 욕실에 들어가기 전, 구승훈이 물었다.“밥은 먹었어? 전에 먹었던 거 다 토했다며.”강하리는 그대로 제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
구승훈은 그녀의 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강하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키스로 인해 온몸이 나른해졌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입을 열어 그의 혀를 맞이했다.어둠 속에서 그렇게 이 둘은 여느 커플과도 같이 가까이 붙어있었다.구승훈은 어젯밤보다도 더 거칠었다.벌칙인지 불만을 털어놓는 것인지 몰랐지만, 유독 사랑의 감정만은 느껴지지 않았다.늘 강압적으로 다른 사람을 리드하기 좋아하던 그는 이 방면에서도 그랬지만, 오늘 저녁은 그녀의 허리를 잡더니 자신의 몸에 올라타게 했다.그녀의 허리를 쓰다듬더니 몸을 일으켜 그녀의 귓불을 깨물었다.강하리도 무의식적으로 그를 꽉 끌어안았다.이때, 강하리의 핸드폰이 울렸다.강하리가 아직 정신을 차리지 않은 틈을 타 구승훈이 대신 전화를 받아 스피커를 켰다.전화기 너머에서는 임정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리 씨, 내일 시간 있으세요? 자료 좀 부탁하고 싶은데.”나른해져 있던 강하리는 마치 몸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바로 정신을 차리더니 표정이 창백해졌다.구승훈은 억지로 핸드폰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자기야, 전화 받아.”강하리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끊고 싶었지만 구승훈이 그러지 못하게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구승훈은 그녀의 목에 키스를 퍼붓더니 말했다.“받아. 임 변호사님 난처해지는 꼴을 보고 싶어?”강하리는 난처함을 무릅쓰고 결국 전화를 받았다.“죄송해요... 변호사님... 저... 내일 시간 없어요.”강하리는 최대한 호흡을 가다듬고 대답하더니 바로 전화를 끊었다.구승훈은 막무가내로 또 그녀에게 키스했다.갑작스러운 키스에 강하리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비겁한 자식.’구승훈은 그녀의 처지가 얼마나 난처한지는 생각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그대로 그녀를 안고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앉혔다.그렇게 달아올랐던 욕정이 식어버리고, 강하리는 구승훈을 바라보면서 설명을 시도했다.“대표님, 임 변호사님이 이번에 국제 사건을 맡았는데 제가 번역해 드리기를 원하세요.”
강하리는 생각을 거두고 몸에 묻은 물기를 닦은 후 방으로 들어갔다.이때 구승훈의 핸드폰이 울렸다.띵동띵동.누군가가 계속 메시지를 보내왔다.구승훈은 인내심 없는 표정으로 힐끔 보더니 그 상대방에게 전화했다.“네가 데려다줘.”전화기 너머에서 안현우가 이상한 말투로 말했다.“승훈아, 유라 씨 취하셔서 계속 너의 이름만 불러. 네가 자기를 안 좋아한다나 뭐라나. 혹시 싸웠어?”구승훈은 담배 한 모금 빨더니 말했다.“아니.”송유라는 워낙 제멋대로 하는 성격이라 구승훈이 달래주기를 원하면서 가끔 오늘처럼 이렇게 행패를 부릴 때가 있었다.송유라는 오늘 구승훈이 집에 돌아가겠다고 했을 때 말렸지만 그는 결국 제멋대로 집으로 돌아갔던 것이다.“빨리 와서 데려가.”구승훈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네가 데려다주기 싫으면 유라 집에 전화해서 기사님더러 데려가라고 해.”안현우가 말했다.“승훈아, 넌 뭐 때문에 바쁜데? 유라 씨도 나 몰라라 하기로 한 거야?”안현우는 멈칫하더니 질문했다.“지금 강 부장이랑 같이 있는 건 아니지? 승훈아, 어떻게 강 부장 때문에 유라 씨를 내버려둘 수 있어?”구승훈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누구랑 함께 있든 나의 일이야. 네가 유라를 집까지 데려다줘.”구승훈은 말을 끝내자마자 전화를 끊더니 고개 돌려 강하리를 쳐다보았다.“내일 임 변호사님한테 말해. 만약 정말 번역관이 필요하다면 밖에서 찾아보라고. 그 돈마저 아까우면 변호사 사무실 때려치우라고.”강하리는 침묵을 지키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이 아르바이트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돈 때문인 것도 있고 입 밖에 내지 않았던 사심 때문인 것도 있었다.언젠가 자신의 꿈을 되찾고 싶었고 진정한 자신으로 거듭나기를 원했다.구승훈이 바라는 강 부장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승훈의 노리개가 아닌 진정한 자신 말이다.“저는 하고 싶어요. 저희 계약서에 제가 아르바이트하면 안 된다는 사항은 없었잖아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강 부장, 지금
결국, 고개를 숙이고 강하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마음대로 하라지 뭐.’강하리가 계약 기간 동안 자신을 더럽히지만 않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담배 하나를 쥐고 있던 구승훈은 담배에 불을 붙이지도 않고 무표정으로 안현우와 송유라를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룸 안에서 이들은 그저 서로를 쳐다만 볼 뿐이었다.안현우가 속으로 생각했다.‘싸웠네, 싸웠어.’송유라는 이번에 정말 상심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안현우는 그런 그녀를 잡아당기더니 구승훈의 옆에 앉혔다.송유라는 많이 슬픈 모양이었다.“내가 하리 언니한테 술 먹여서 화났어요?”구승훈은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더니 말했다.“내가 화낼 줄 알았으면서. 이제부터는 그런 짓 하지 마.”송유라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다른 뜻은 없었어요. 그냥 저 때문에 일에 지장이 갔을까 봐 사과하고 싶을 뿐이에요.”“그래.”구승훈은 강하리 때문에 송유리와 화를 낼 수가 없어 그저 알겠다고 대답하더니 이렇게 말했다.“시간도 늦었는데 집까지 데려다주라고 할게. 여자애가 저녁 늦게까지 밖에 있으면 안 돼.”여느 때처럼 부드러운 말투에 송유라는 그제야 미소를 되찾았다.“알았어요.”송유라가 떠나고, 안현우는 구승훈의 옆에 앉더니 말했다.“승훈아, 무슨 생각이야? 유라 씨도 돌아왔는데 왜 화해하지 않았어?”구승훈은 고개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다.“너나 잘하세요.”안현우는 머쓱하게 웃더니 말했다.“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잖아.”그러더니 잠깐 멈칫하면서 말했다.“설마 강 부장 포기하지 못해서 그래?”구승훈은 담배만 피울 뿐 대답하지 않았다.하지만 안현우는 그가 무언의 긍정을 했다고 생각했다.“승훈아, 정신 차려. 강 부장 같은 여자랑은 잠깐 놀 수는 있지만,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돼. 그런 여자를 만나면 평생 불행할 거야. 그 여자는 돈밖에 모르거든.”구승훈은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피식 웃었다.“잘 알고 있나 본데?”안현우는 혀를 차더니 말했다.
강하리는 손연지의 말에 놀라더니 어이없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그럴 리가?”구승훈이 송유라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할 수가 없다.그가 유일하게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은 송유라뿐이었다.송유라한테만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왜 그럴 리가 없는데?”손연지는 여전히 자기 생각을 고집했다.강하리는 더는 말을 이어가지 않고 아예 화제를 돌렸다.“우리 함께 밥 먹은 지도 오라잖아. 뭐 먹고 싶어? 내가 살게.”음식 얘기에 손연지는 역시나 반응을 보였다.“어디 보자...”손연지는 결국 인기 레스토랑을 떠올리게 되었다.두 사람은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레스토랑에 들어갔다가 안현우를 만나게 되었다.안현우의 옆에는 여자가 앉아있었다.강하리가 들어오는 것을 본 안현우는 동공이 흔들렸다.강하리는 그를 아는 체도 하지 않고 손연지와 함께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았다.손연지가 화장실에 간 사이, 안현우가 다가와 손연지의 자리에 앉더니 말했다.“강 부장, 이렇게 뵙네요.”메뉴판을 보고 있던 강하리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그러게요. 안 대표님, 저 못 본 척해주셔도 돼요.”안현우가 피식 웃었다.“강 부장, 왜 이렇게 사람을 무안하게 해?”강하리는 고개 들어 그를 쳐다보더니 말했다.“서로 가는 길이 다른 사람은 만나지도 말아야 된다는 거 모르세요?”“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전에는 우리 사이가 좋았잖아요.”강하리는 갑자기 머리가 아파 났다.구승훈의 친구라 예전에는 친하게 지냈었지만 구승훈과의 관계가 들통난 뒤로 안현우는 아예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다.강하리는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만약 내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된다면 나를 계속 쫓아다녔겠지. 그런데 내가 돈만 보고 잠자리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된다면 본성을 드러낼 거고.’안현우는 입으로는 강하리를 좋아한다면서 뒤에서는 그녀를 욕하고 다녔다.‘이런 모습은 부잣집 도련님들의 공통점이겠지. 나를 그저 노리개로 보
강하리는 메뉴판을 꽉 쥐더니 말했다.“그래요? 제가 가격을 제시한다고 해도 구 대표님의 사람을 감히 건드릴 수나 있겠어요?”안현우는 박장대소를 지었다.“그 부분은 걱정할 필요 없을 거예요. 승훈이가 그러는데 제가 하리 씨를 만나는 데 성공하면 하리 씨를 저에게 주겠다고 했거든요.”강하리는 어지러운 느낌과 함께 얼굴이 창백해졌다.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팠지만 그래도 억지웃음을 지었다.“언제 그러셨는데요?”강하리는 전에 구승훈과 싸웠을 때 홧김에 한 말이라고 생각했다.구승훈은 감정이 없는 사람이긴 해도 소유욕이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갑자기 떠난다고 했으니 홧김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정상이라고 생각했다.예전에 자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안현우랑 가도 된다고 말했을 때처럼 말이다.하지만 안현우의 말 한마디에 이 모든 환상이 깨지고 말았다.“두 날 전에요. 제가 하리 씨한테 관심 있다고 말했더니 마음대로 하라더군요. 그리고 가격을 제시할 때 좀 더 올려보라고 하기도 했고요.”이때 메뉴판 날카로운 종이에 손이 베어 피가 뚝뚝 흘러내렸지만,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여전히 메뉴판을 꽉 잡은 채 마지막 자존심을 위해 억지 미소를 지었다.“안 대표님 저 편식한다는 거 잊으셨어요?”대놓고 거절했지만 안현우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고 갑자기 강하리 앞으로 다가오더니 말했다.“강 부장, 지금은 가격 제시할 자격이 있다지만 승훈이한테 차이면 사람들한테 놀아나는 노리개일 뿐이에요. 그때 되면 값어치도 없어요.”그러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앉더니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니까 강 부장,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다음 스폰서를 알아보는 것이 좋을 거예요. 저는 강 부장이 먼저 가격 제시하기를 기다리고 있을게요.”말을 끝낸 안현우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강하리는 고개 숙여 자신의 피가 묻은 메뉴판을 바라보았다.비록 작은 상처였지만 깊숙이 파여 피가 멈추지 않았다.하지만 마음이 더욱 아팠다.그동안 구승훈이 자신을 향해 보여줬던 소유욕 때문에
손연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전에는 강하리가 아이를 지우겠다면서 구승훈과 헤어지겠다고 말한 적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아이를 위해서인지 그 일을 다시 입 밖에 꺼낸 적 없었다.‘요즘 들어 승훈 씨도 언급하지 않더니. 오늘은 왜 이러는 거지?’“구승훈 그 개자식 또 무슨 짓을 했는데?”손연지는 그녀를 쳐다보면서 물었다.“송유라 때문이야?”강하리는 고개를 흔들었다.“계속 생각해 왔던 일이야.”단지... 여러 가지 원인 때문에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강찬수 때문인 것도 있었고 엄마 치료비 때문인 것도 있었지만 지금은...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위해서였다.걱정되는 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엄마의 치료비는 몇 달 치 모아두긴 했지만 임신한 후부터 구승훈을 떠나면 바로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그리고 출산하면 아이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충분한 저축이 없이는 생활하기가 어려웠다.그래서 계속 구승훈의 옆에 남아있기로 한 것이다.구승훈이 송유라를 향한 부드러움을 지켜보면서도, 자신을 향한 차가움을 견딜 수밖에 없었다.아이를 위해서라면 구승훈과 송유라가 함께 자는 것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렇게 나중에 멋있게 뒤돌아 떠나려고 했지만, 너무도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자신의 감정이 이미 마비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구승훈이 자꾸만 그녀를 심란하게 하고 마음의 상처를 안겨주고 있었다.“정말 잘 생각했어?”손연지는 미간을 찌푸렸다.비록 늘 구승훈이 나쁜 놈이라고 욕했지만 그래도 그가 강하리한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을까 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아이가 생겼기 때문에 아이한테는 온전한 가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그리고 중요한 것은 강하리가 매달 4천만 원 정도의 의료비를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구승훈을 떠나면 의료비 때문에 숨을 못 쉴 거고 더욱이 아이도 키우지 못할 것이었다.그래서 강하리가 더는 구승훈을 떠나겠다는 말을 하지 않자 손연지도 굳이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최소한 아이는 구승훈
구승훈의 옆에는 늘 여자가 부족한 적이 없었다.그중에는 연예인들도 많았지만, 종래로 어느 연예인과 스캔들이 난 적 없었다.그는 이런 장소에 참석하지 않고 카메라 앞에도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이번이 처음이었다.강하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역시 첫사랑은 다르네.’이렇게 대놓고 공식 석상에 선 이 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안현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자신이 마치 다른 사람의 자리를 빼앗은 도둑처럼 비겁하고 파렴치하다고 느껴졌다....강하리는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먼 곳에 있는 강찬수를 발견했다.그는 손에 술병을 하나 든 채 어질어질한 상태로 동네 입구에 앉아있었다.그렇게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물었다.“혹시 강하리를 아세요?”강하리는 발걸음을 멈칫하더니 뒤돌아 옆에 있던 나무 뒤에 숨었다.그녀는 머리가 어지러운 느낌을 받았다.‘왜 날 찾으러 온 거지? 2억 원 벌써 다 쓰셨나?’강하리는 나무 뒤에 숨어 한숨을 내쉬더니 핸드폰을 꺼내 경비 아저씨한테 전화하려고 했다.하지만 경비 아저씨는 몇 번이고 내쫓았는데 안 간다고 대답했다.그리고 입구에서 강하리를 아는지만 묻고 다른 짓을 안 했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었다.나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신도윤의 전화였다.그녀는 한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전화를 받았다.“강 부장님, 대표님께서 이따 기사님이 데리러 오신다고 짐 정리 해놓으라십니다. B 시로 출장 가셔야 될 것 같습니다.”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렸다.“B 시에는 무슨 일로요?”신도윤은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께서 말씀 안 하셨습니다. 그저 오시라고 하셨습니다.”강하리는 가기 싫었다.‘유라와 함께 B 시 예술 페스티벌에 참석했으면서 왜 나보고 오라는 거야?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그러는 건가?’강하리는 이에 관심이 없었다.“저... 안 가도 돼요?”신도윤이 말했다.“대표님께서 만약 가기 싫으면 합리한 이유를 대라고 하셨습니다.”강하리는 할 말이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
강하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후에야 구승훈은 다시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하지만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익살스러운 미소가 남아 있지 않았다.“여진 쪽은 어떻게 됐어?”그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준봉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출시일이 확정됐습니다. 에비뉴보다 하루 빠릅니다.”구승훈은 손에 불경스러운 듯 염주를 굴리며 냉소를 지었다.“승재와 천아름 쪽에 협조 잘하라고 전해.”“네.”준봉이 재빨리 대답했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대표님, 사실 이 일은 사모님께도 일부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구승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조용히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준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구승훈은 항상 그랬다. 강하리를 도와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다.‘정말 답답해.’여진 주얼리는 지난 몇 년간 에비뉴와 계속해서 대립해 왔다.겉보기에는 구씨 가문이나 강하리와 아무 관련 없는 작은 회사처럼 보이지만 이런 작은 회사들이 대형 브랜드의 모조품을 내놓는 건 흔한 일이었다.하지만 여진 주얼리는 단순한 모조품에 만족하지 않았다.작년에 해외에서 에비뉴 주얼리의 표절 사건이 터졌을 때 그 배후에는 여진 주얼리가 있었다.그 사건으로 여진 주얼리는 큰 이득을 봤고 에비뉴는 큰 타격을 입었다.그 후 여진 주얼리는 더욱 탐욕스러워졌다.사람이란 달콤한 맛을 보면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마련이다.여진 주얼리는 에비뉴에게 항상 위험 요소였다.구승훈은 에비뉴를 강하리에게 넘긴 이상 그녀에게 어떤 위험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대표님, 상대방의 배후 세력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대놓고 에비뉴를 도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구승훈은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뭐? 지금 내가 잃을 게 뭐가 있다고?”준봉은 놀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한참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강하리가 때린 따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고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강렬했다.그러자 구승훈의 뺨에는 순식간에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천아름은 그대로 얼어붙었지만 이내 강하리를 향해 천천히 엄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잘했어.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은 맞아야 해. 제대로 한 대쯤은 맞아 봐야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알지. 이제라도 자기 잘못을 좀 깨달아야 해.’천아름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며 통쾌해했다.한편 구승훈은 손등으로 뺨을 한 번 스치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강하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그의 눈엔 고통이 어리어 있었다.“몸이 안 좋은 거야? 아니면...” 그는 목울대를 두 번 삼킨 뒤에야 겨우 말을 이었다. “아니면... 나를 봐서... 토한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지만 더는 이 남자 앞에서 눈물 흘리고 싶지 않아 애써 참고 있었다.“다신 제 앞에 나타나지 마요.” 강하리의 차디찬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런데 구승훈의 눈에는 오히려 그 말이 묘하게 따뜻하게 비쳤다.지금 이 순간 그는 마음속에... 이상하게도 만족감이 들었다.‘적어도 하리 마음속에 아직 내가 있긴 한 거잖아. 미움이든 혐오든... 감정이 있는 한 아직 끝은 아니겠지.’그는 수트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레 강하리의 입가를 닦아주었고 긴 손가락이 그녀의 입가를 스치고는 가볍게 떠났다.구승훈은 고개를 숙인 채 쓸쓸하게 웃었다.“불쾌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하리야, 미안하지만 다신 안 나타날 수는 없을 거 같아. 난 그건 못 해.”그 말과 함께 그는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내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천천히 화장실을 나갔다.순간, 화장실 안은 적막 속에 잠겼다.강하리는 다시금 구역질했고 천아름은 재빨리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밖에서 구승훈은 그녀의 헛구역질 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얼마 후, 급히 달려온 준봉의 목소리에 그가 정신을 차렸다.“대표님, 무슨 일 있었습니까?”
두 채의 30층이 넘는 오피스 빌딩 사이에는 다섯 층마다 하나씩 연결하는 공중 회랑이 있었다.회랑 위에는 각종 카페와 음식점이 입점해 있었고 그 주변에는 다양한 꽃들이 화사하게 장식되어 있었다.강하리는 사실 정안 타워에 자주 오지는 않았다.심지어 구승훈과 결혼을 앞두고 있던 그 시절에도 여기에는 발걸음을 거의 하지 않았다.솔직히 말해서 그녀보다 임희주가 더 자주 왔을지도 몰랐다.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그녀는 입꼬리를 삐죽이며 말했다.“구승훈이야 뭐 인간쓰레기지만 그래도 통 큰 건 인정해야겠네. 이렇게 큰 회사를 그냥 덜컥 넘겨주다니. 에비뉴 주얼리잖아? 보석 업계에선 꽤 이름 있는 브랜드인데. 이렇게 보면... 그 인간은 그렇게 나쁘진 않았던 것 같기도 하네. 그렇지?”강하리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과 한 달 남짓한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구승훈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서 너무도 멀어진 것만 같았다.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오늘은 꼭 광고 모델 확정해야 해. 원래 계약하려던 사람이 며칠 전에 갑자기 마음을 바꿨어. 이유 알아봤어?”그러자 천아름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이유야 뻔하지. 뺏긴 거지 뭐. 거의 계약 직전까지 갔는데... 갑자기 말을 바꾸더라.”“누가 뺏어갔는데?”강하리가 조용히 물었다.천아름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며칠 만에 마주친 구승훈이었다. 깔끔한 수트를 입고 있었지만 여전히 전해지는 그 특유의 냉기가 몸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강하리는 구승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했다.구승훈 역시 이 순간에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던지 평소 차가운 눈빛은 놀랍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그의 시선은 곧장 강하리에게 꽂혀 그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녀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얼굴빛은 생각보다 좋았다.홍조가 돌아 있었고 얼굴도 약간 도톰해진 듯했다.그는 기뻐해
항구에서 보경시로 돌아오자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구승훈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누군가의 사무실로 들어섰다.“어떻게 됐어?”그 말에 노진우는 고개도 들지 않고 리모컨부터 눌렀다. 그러자 벽에 걸려있던 TV가 켜지더니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화면 속에는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여초천이 이성을 잃은 채 날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의 가구를 부수며 바닥에서 뒹굴기 시작하더니 그럼에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는 벽에 머리를 쾅쾅 들이박았다.여초연의 이마는 이미 피범벅이 된 상태였다.그 모습을 본 구승훈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됐어. 그만해.”노진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이렇게 끝내시겠다고요? 대표님께서 발작 났을 땐 이것보다 훨씬 심했어요. 제가 만든 약은 효과가 얼마 못 가거든요. 급하게 만든 거니까요. 하지만 대표님은 온 하루 동안 고통스러워하셨잖아요.”“게다가 대표님은 이 약 때문에 하리 씨 곁을 떠나야 했잖아요. 하리 씨가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다 이 약 때문인데 이제 와서 마음이 약해졌다고요?”구승훈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담배를 꺼내 거기에 불을 붙였다.“마음이 약해진 게 아니야. 저런 꼴을 보고 있으니까 그냥... 그때 내 모습이 떠올라서...”“생각할 때마다 너무 후회돼. 하리를 혼자 예식장에 두고 떠났던 거 말이야. 내가 어떻게 잡았는데 또다시 놓쳐버리다니...”“그런데 또 여초연이 저러고 있는 걸 보니까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 내가 하리를 밀어내지 않았더라면 하리가 내 저런 모습을 봐야 했을 수도 있잖아.”노진우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실 제 책임도 좀 있어요. 제 대학 동기인 데다가 능력도 괜찮아 보여서 추천했었는데 배경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으니까요.”구승훈은 씁쓸하게 웃었다.“임희주가 아니었어도 이렇게 되었을 거야. 여초연이 날 가만 내버려뒀을 리 없으니까.”노진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하리 씨 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