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재는 당황했다.“형, 대체 무슨 일이야?”“송유라 데려오라고, 내 말 못 알아들어?”구승재는 침을 꿀꺽 삼켰다.“알았어, 형. 바로 Y국에 연락할게.”구승훈은 전화를 끊고 밖으로 나간 뒤 노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강하리 어디 있어?”“은행에 있어요.”은행 입구에 막 도착한 구승훈은 안쪽에서 강하리와 손연지가 걸어 나오는 모습을 봤다.강하리의 눈이 빨갛게 충혈된 걸 보아 운 게 분명했다.그의 목울대가 일렁거리며 순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오호라, 구 대표님께서 또 오셨네?” 손연지가 잔뜩 비꼬았다.구승훈은 그녀를 무시한 채 강하리만 바라봤고 그 눈빛에는 모든 것이 극도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였지만 어느 한 마디조차 꺼내기가 두려웠다.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돌려 손연지를 바라보았다. “가자.”구승훈이 다가가 강하리를 끌어당기더니 애써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하리야, 내가 데려다줄게.”“그럴 필요 없어.” 강하리가 그의 손을 뿌리쳤다.구승훈이 다시 잡으려 해봐도 그녀는 번번이 피할 뿐이었다.강하리는 곧장 손연지의 차로 향했고 구승훈은 씁쓸한 마음이 밀려왔다.하지만 이대로 강하리를 눈앞에서 놓아줄 수는 없었기에 그는 차가 시동을 걸기 직전에 뒷좌석 문을 열고 따라 올랐다.손연지는 그가 타는 것을 보고 순식간에 얼굴이 일그러졌다.“꺼져요! 내 차에 더러운 남자는 못 타요!”구승훈은 여전히 강하리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건 진작 알아차렸다.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아주머니 유품 가지러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창밖을 내다봤다.“구승훈 씨, 나한테 그만 매달려요.”구승훈의 목울대가 일렁거리며 다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화나면 날 때리고 욕해, 응?”강하리가 피식 웃었다.“난 당신 때리지도 욕하지도 않을 거예요. 당신이랑 어떤 이유에서든 엮이고 싶지 않으니까.”손연지는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노려보았다.“구승훈 씨, 당
하지만 뭐가 됐든 이제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손연지는 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으면서 운전했다.전화를 끊고 무슨 말을 하려던 그녀의 얼굴이 확 변했다.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았다.손연지의 얼굴이 하얗게 일그러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리야, 브레이크가 말을 안 들어.” 강하리는 깜짝 놀랐고 손연지는 그대로 핸들을 돌려 가로수를 들이받았다.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배를 감싸며 보호했고 곧 차가 심하게 흔들리다가 겨우 멈췄다.시내였고 차가 너무 빨리 달리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다친 손연지는 이마에서부터 피가 뺨으로 흘러내렸다.강하리도 팔이 긁혔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손가락마저 덜덜 떨렸다.곧 누군가 차 문을 벌컥 열었고 그녀보다 더 핏기 없는 얼굴을 한 채 구승훈이 허둥지둥 강하리의 안전벨트를 풀더니 그대로 안아서 밖으로 옮겼다.“어디 다친 데는 없어? 배는, 어디 불편한 데는 없고?”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연지가 다쳤어.”하지만 구승훈은 그녀를 안고 자신의 차에 태운 뒤 최대한 빨리 병원으로 달려갔다.“연지는!” 강하리가 그를 향해 소리치자 구승훈이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챙겨줄 사람 있어.”그는 강하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그제야 강하리는 남자의 손도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가슴이 찡했지만 그래도 손을 뒤로 뺐다.“난 괜찮아, 배도 아프지 않으니까 이럴 필요 없어.”말은 그렇게 했어도 그녀의 안색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구승훈은 다시 한번 손을 잡았고 강하리는 뿌리치고 싶었지만 힘이 다한 듯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았다.방금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무도 모를 거다.만약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도저히 버티면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구승훈의 차는 재빨리 병원에 도착했고 미리 노민준에게 연락해 전문의를 데려와 검사한 뒤 괜찮다는 말을 들은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손연지도 빠르게 병원에 실려 왔고 노민우는 노진우에게 안겨 들어온 손연지를 바
강하리도 저쪽에서 구승재의 말을 어렴풋이 들었다.그녀는 손톱이 살 속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다물었다.역시.그녀는 구승훈을 힐끗 쳐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번엔 또 누군데? 송씨 가문? 문씨 가문? 아니면 당신네 구씨 가문?”구승훈은 시선을 내려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할 뿐 극심한 죄책감에 말로 다 못 할 아픔이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왔다.“누구든 내가 찾아내서 제대로 처리할게.” 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이번엔 찾아내도 다음엔? 아직도 모르는 걸까.그가 자신의 곁에만 있으면 그들은 몇 번이고 자신을 사지로 내몰 거라는 걸!게다가 더 용납할 수 없는 것은 손연지가 또다시 연루되었다는 거다!오늘 손연지가 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차의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입가에 차오른 말을 삼켜버렸다.그래도 오늘은 그가 자신을 도와준 셈이니 한참 동안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고마워.”고맙다는 말이 구승훈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자신이 참 쓰레기같이 느껴졌다.그녀가 용기를 내서 앞으로 내디딘 한 걸음이 또다시 그에게 짓밟혔다.그때 굳이 송유라를 만나러 갈 필요가 없었다.그는 자신이 가서 무슨 말을 해도 송유라가 소란을 피울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래도 갔다.단지 그녀가 하양이라고 생각해서 성의를 보여주고 싶었다.그런데 신이 자신에게 이런 장난을 칠 줄이야.강하리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으로 착각해서 미안했다고.하지만 착각이든 아니든 어쨌든 그녀에게 상처를 줬고 한번 받은 상처는 엎어진 물처럼 되돌릴 수 없었다.이런 상황에서 미안하다는 말은 부질없는 것이었다.구승훈의 목울대가 일렁거리다가 한참 후 그가 입을 열었다.“하리야, 다 내가 해야 할 일이잖아.”강하리는 그를 바라보았다.“구승훈 씨,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다시는 내 주변에 나타나지 않는 거야. 아직도
응급실에서 노민우는 손연지를 안고 들어와 급하게 소리를 질렀다.“의사 선생님, 의사 선생님, 여기 사람이 다쳤어요!”손연지는 그가 외치는 소리에 창피해서 힘껏 노민우의 가슴을 꼬집었다.“좀 조용히 해!”노민우는 고통에 신음했다.“손연지, 너 걱정돼서 그러는 거잖아!”“나 아직 살아있거든? 뭘 그렇게 소리를 질러, 누가 들으면 내가 당장이라도 죽는 줄 알겠네!”“괜찮을지 안 괜찮을지는 의사 말 들어봐야 알지!”손연지가 혀를 찼다.“내려줘!”노민우는 곧바로 입을 다물고 그녀를 근처 의자에 내려놓은 뒤 의사를 불러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손연지는 겉으로는 센 척해도 속으로는 아픈 게 무서웠다.의사가 상처 부위에 과산화수소를 붓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곧바로 옆에 있던 노민우의 손을 꼬집었다.노민우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그런 도련님을 옆에서 지켜보던 의사가 눈을 흘겼다.‘대체 누가 다친 건지.’손연지는 상처에 약을 바른 후 이렇게 물었다.“흉터가 남을까요?”노민우가 그녀를 바라봤다.“흉터 때문에 소영준이 싫다고 할까 봐?”손연지가 곧장 그의 손을 뿌리쳤다.“소 교수님이 너처럼 얼굴만 보는 줄 알아?”노민우가 그녀를 끌어당겼다. “가서 뇌 CT도 찍어.”그는 손연지를 CT 촬영실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소영준이야말로 얼굴을 제일 많이 보는 사람이야. 그 사람 평소 잠자리 파트너들도 엄청난 미녀라는 걸 모르지?”손연지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 식으로 소 교수님을 깎아내리지 않고는 하루도 못 사는 거야?”노민우는 울화가 치밀었다.“내가 그 사람을 깎아내린다고?”손연지는 콧방귀를 뀌었다.“아니면 뭐겠어?”말하기 바쁘게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그리고 우리 병원 연수도 당신이 망친 거야?”노민우는 괜히 마음에 찔렸다.“우리 병원에서 연수 기회 얻으려다가 그쪽 병원 자리까지 뺏게 된 거야.”손연지는 너무 화가 나서 발로 그를 걷어찼다.“노민우, 너 진짜 미쳤어?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는데!”그녀의 고함소리에
손연지의 눈동자가 번쩍였다.“설마 장서연 그 망할 년?”강하리도 당연히 장서연을 떠올렸다.오늘 그녀가 손연지 차에 탄 걸 본 사람은 장서연밖에 없으니까.하지만 송씨 집안 사람이자 송유라 사촌 동생이라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다.구승훈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무슨 말을 하려는데 손연지가 갑자기 콧방귀를 뀌었다.“허, 맞네. 구 대표님이 감싸고 도는데 장서연이면 뭐 어때? 기껏해야 경고로 끝나겠지, 안 그래?”손연지를 바라보는 구승훈의 얼굴은 차갑게 가라앉았고 눈빛에는 냉기가 가득했다.노민우는 옆에서 목을 가다듬으며 손연지를 잡아끌었다.“그만해.”손연지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개자식이 나쁜 짓까지 해놓고 욕먹는 걸 무서워해?”구승훈의 얼굴이 점점 더 추해졌다.“정말 그 사람이라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손 선생님도 말씀 가려서 하세요.”구승훈은 강하리에 대한 죄책감으로 가득했기에 손연지의 행동도 어느 정도 참고 넘어갔다.하지만 결국 그는 구승훈이었고 강하리 앞에서는 몸을 낮출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연지에게 항상 관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손연지는 이 말을 듣자마자 발끈했고 노민우는 황급히 그녀를 뒤로 끌어당겼다.그러자 그녀의 화살이 이번엔 노민우에게 향했다.“왜 날 잡아당기는 거야!”노민우는 그녀를 바라봤다.“헛소리 그만해, 이건 결국 하리 씨랑 승훈이 일이잖아.”“하리랑 구승훈 일이라니, 나도 오늘 피해자라고!”노민우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밖에서 구승재가 황급히 들어왔다.“형, 형수님.”강하리를 보자마자 그는 자연스럽게 형수님이라고 불렀다.지금까지 강하리가 구승훈과 헤어졌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그였기에 형수님 호칭이 나오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웠다.하지만 강하리에겐 다소 조롱 섞인 말로 들렸다.“구승재 씨, 난 이제 그쪽 형수님 아니니까 그냥 날 강하리라고 불러요.”당황한 구승재는 깜짝 놀란 얼굴로 구승훈을 바라보았고 구승훈의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가 번지며 어느새 부드러운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강하리가 멈칫했다.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다소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하리야, 나... 내가 했던 잘못들 전부 다 보상해 줄게, 알았지? 용서를 구하는 게 아니라 바로잡을 기회를 달라는 거야.”강하리의 마음은 씁쓸했다.아무리 그래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있었다.그녀는 대답 대신 이렇게 말했다.“놔, 내가 알아서 가.”하지만 구승훈은 절대 놓지 않았다.구승훈이 강하리를 끌고 가자 손연지가 바로 발끈했다.“젠장, 구승훈, 그 손 놔... 읍읍...”손연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민우가 그녀의 입을 막았다.손연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자 더욱 화가 나 노민우의 손을 깨물었다.노민우의 손은 이미 그녀에게 꼬집혀 피가 어느 정도 새어 나온 상태였는데 이젠 이빨 자국까지 생겼다.그는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서둘러 손연지를 놓아주었다.“손연지, 너 개야?”손연지가 그를 노려보았다. “다시 한번 내 입 막으면 그땐 너 잡아먹을 거야!”노민우는 어이가 없었다.“두 사람 일에 왜 자꾸 끼어들어?”“무슨 개소리야! 우리 하리가 왜 저 개자식이랑 엮여!”노민우는 인상을 찌푸린 채 그녀를 바라봤다.“말 그렇게 하지 마. 승훈이는 하리 씨 얼굴 봐서 가만히 있는 거지. 정말로 걔를 건드렸다간...”“건드리면 뭐?”그녀는 노민우를 노려보았다.“역시 끼리끼리라더니. 개자식이 개자식을 돕네.”그녀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노민우가 서둘러 따라갔다.“내가 데려다줄게.”“필요 없어!”하지만 노민우는 굴하지 않고 따라갔다.“다친 사람 혼자 집에 보내는 건 우리 병원 스타일이 아니야.”“...”‘명인 병원 서비스가 참 좋네.’구승훈은 강하리를 손연지 아파트까지 데려다준 뒤에 차를 세웠지만 문을 열지 않았다.강하리가 그를 노려보았다.“문 열어.”구승훈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하리야, 사람 보내서 정양철에 대해 조사 중이야. 아주머니 일은 내가 책임지고 제대로 알아낼게.”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한참을
장서연은 다시 눈을 떴을 때 앞에 구승훈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그를 불렀다.“형부, 악!”형부라는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구승재가 그녀의 뺨을 때렸다.“함부로 부르지 마, 목숨 아껴야지.”장서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형... 구, 구 대표님, 우리 사촌 언니가 당신 여자인데... 아악!”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구승재가 또다시 뺨을 때렸다.“헛소리하지 말란 말 못 알아들어?”두 번 연속 따귀를 맞은 장서연의 창백한 얼굴이 부어올랐다.구승재는 조금도 봐주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뺨을 때렸던 거다.“구, 구 대표님,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구승훈은 두 발짝 떨어져 서서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손연지 차 네가 건드렸지?”장서연은 당황하며 순간 마음에 찔렸지만 뻔뻔하게 말했다.“아니요, 제가 안 그랬어요. 구 대표님, 제가 안 그랬어요.”그러자 구승훈은 갑자기 손목에서 염주 팔찌를 빼내 주머니에 넣더니 이쪽으로 한 걸음걸음을 다가왔다.장서연의 얼굴은 굳어졌고 눈앞의 구승훈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살기를 품고 있는 듯했다.그녀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아무리 그래도 송유라는 구승훈의 첫사랑인데?그래서 오늘 강하리를 봤을 때도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그런데 지금 그녀는 왠지 모르게 남자의 두 눈에서 증오 비슷한 게 보였다.장서연은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구승훈의 눈에 증오와 살기가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이 사람이 날 죽이려 한다.’그 생각만 들었다.장서연은 그제야 눈치를 채고 큰 소리로 선처를 호소했다.“구 대표님, 제가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강하리 건드리지 않을게요. 제가 잘못했어요, 전...”장서연은 연신 선처를 호소했지만 그럼에도 구승훈은 여전히 앞으로 다가가 바로 그녀의 목을 졸랐고 장서연은 순식간에 숨이 턱 막혔다.그녀는 충격에 가득 찬 얼굴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이 순간 그녀는 구승훈이 정말 자신을 죽이고
안 그래도 창백했던 송유라의 얼굴이 이쯤 되니 투명할 정도로 하얗게 변했다. “승훈 오빠,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하양이잖아요, 잊었어요? 어릴 때 그 어촌에서 내가... 아악-” 송유라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단도가 그녀의 얼굴을 베었고 단숨에 그 고운 얼굴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승훈 오빠!” 송유라는 처절하게 소리 질렀다.“내가 하양이에요, 내가 진짜 하양이라고!”그렇게 말하면서도 송유라의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구승훈이 어떻게 알았을까? 그 일은 빈틈이 없게 진행됐는데.송동혁은 당시 구승훈의 곁을 지키고 있던 가정부에게까지 물어봤고 그녀의 가족까지 매수했다. 그리고 그 목걸이도 강하리에게서 진품을 훔치고 가짜로 바꾼 다음 적절한 타이밍에 가짜를 망가뜨려서 철저하게 진행했다.그런데 구승훈이 어떻게 알았지? 송유라의 당황한 눈은 점점 커져만 갔고 구승훈은 손을 들어 단도를 송유라의 어깨에 찔렀다. 또 한 번 소름 끼치는 비명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네가 하양이야?” “맞아요, 승훈 오빠, 나라고요!”단도를 뽑은 구승훈이 이윽고 그녀의 팔에 칼을 찔러넣었다.“다시 물어볼게. 네가 맞아, 아니야!”송유라는 고통스러워하며 이마에 식은땀을 흘렸다.“승훈 오빠,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내가 하양이에요. 잊었어요? 우리 같이 강가에 앉아서 일출과 일몰을 보곤 했잖아요. 승훈 오빠, 왜 그래요? 왜 이러는 건데요?”붉어진 눈으로 송유라를 노려보는 구승훈의 눈동자엔 아픔만이 가득했다.이 여자, 이 망할 여자한테 그렇게 오랫동안 속아 왔다!이 여자 때문에 강하리를 그토록 힘들게 했다!“강하리가 받은 상처, 송유라 네가 두 배로 갚아.”송유라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그녀는 앞으로 다가와 구승훈을 껴안았다. “승훈 오빠, 왜 그래요?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요, 내가 진짜 하양이...” 하지만 구승훈은 단숨에 그녀를 바닥으로 걷어찼다. “다시는 하양이라는 말 입에 담지 마!”송유라는 절망에 가득 찬 얼굴로 구승훈을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
강하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후에야 구승훈은 다시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하지만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익살스러운 미소가 남아 있지 않았다.“여진 쪽은 어떻게 됐어?”그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준봉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출시일이 확정됐습니다. 에비뉴보다 하루 빠릅니다.”구승훈은 손에 불경스러운 듯 염주를 굴리며 냉소를 지었다.“승재와 천아름 쪽에 협조 잘하라고 전해.”“네.”준봉이 재빨리 대답했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대표님, 사실 이 일은 사모님께도 일부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구승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조용히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준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구승훈은 항상 그랬다. 강하리를 도와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다.‘정말 답답해.’여진 주얼리는 지난 몇 년간 에비뉴와 계속해서 대립해 왔다.겉보기에는 구씨 가문이나 강하리와 아무 관련 없는 작은 회사처럼 보이지만 이런 작은 회사들이 대형 브랜드의 모조품을 내놓는 건 흔한 일이었다.하지만 여진 주얼리는 단순한 모조품에 만족하지 않았다.작년에 해외에서 에비뉴 주얼리의 표절 사건이 터졌을 때 그 배후에는 여진 주얼리가 있었다.그 사건으로 여진 주얼리는 큰 이득을 봤고 에비뉴는 큰 타격을 입었다.그 후 여진 주얼리는 더욱 탐욕스러워졌다.사람이란 달콤한 맛을 보면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마련이다.여진 주얼리는 에비뉴에게 항상 위험 요소였다.구승훈은 에비뉴를 강하리에게 넘긴 이상 그녀에게 어떤 위험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대표님, 상대방의 배후 세력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대놓고 에비뉴를 도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구승훈은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뭐? 지금 내가 잃을 게 뭐가 있다고?”준봉은 놀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한참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강하리가 때린 따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고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강렬했다.그러자 구승훈의 뺨에는 순식간에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천아름은 그대로 얼어붙었지만 이내 강하리를 향해 천천히 엄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잘했어.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은 맞아야 해. 제대로 한 대쯤은 맞아 봐야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알지. 이제라도 자기 잘못을 좀 깨달아야 해.’천아름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며 통쾌해했다.한편 구승훈은 손등으로 뺨을 한 번 스치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강하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그의 눈엔 고통이 어리어 있었다.“몸이 안 좋은 거야? 아니면...” 그는 목울대를 두 번 삼킨 뒤에야 겨우 말을 이었다. “아니면... 나를 봐서... 토한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지만 더는 이 남자 앞에서 눈물 흘리고 싶지 않아 애써 참고 있었다.“다신 제 앞에 나타나지 마요.” 강하리의 차디찬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런데 구승훈의 눈에는 오히려 그 말이 묘하게 따뜻하게 비쳤다.지금 이 순간 그는 마음속에... 이상하게도 만족감이 들었다.‘적어도 하리 마음속에 아직 내가 있긴 한 거잖아. 미움이든 혐오든... 감정이 있는 한 아직 끝은 아니겠지.’그는 수트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레 강하리의 입가를 닦아주었고 긴 손가락이 그녀의 입가를 스치고는 가볍게 떠났다.구승훈은 고개를 숙인 채 쓸쓸하게 웃었다.“불쾌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하리야, 미안하지만 다신 안 나타날 수는 없을 거 같아. 난 그건 못 해.”그 말과 함께 그는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내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천천히 화장실을 나갔다.순간, 화장실 안은 적막 속에 잠겼다.강하리는 다시금 구역질했고 천아름은 재빨리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밖에서 구승훈은 그녀의 헛구역질 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얼마 후, 급히 달려온 준봉의 목소리에 그가 정신을 차렸다.“대표님, 무슨 일 있었습니까?”
두 채의 30층이 넘는 오피스 빌딩 사이에는 다섯 층마다 하나씩 연결하는 공중 회랑이 있었다.회랑 위에는 각종 카페와 음식점이 입점해 있었고 그 주변에는 다양한 꽃들이 화사하게 장식되어 있었다.강하리는 사실 정안 타워에 자주 오지는 않았다.심지어 구승훈과 결혼을 앞두고 있던 그 시절에도 여기에는 발걸음을 거의 하지 않았다.솔직히 말해서 그녀보다 임희주가 더 자주 왔을지도 몰랐다.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그녀는 입꼬리를 삐죽이며 말했다.“구승훈이야 뭐 인간쓰레기지만 그래도 통 큰 건 인정해야겠네. 이렇게 큰 회사를 그냥 덜컥 넘겨주다니. 에비뉴 주얼리잖아? 보석 업계에선 꽤 이름 있는 브랜드인데. 이렇게 보면... 그 인간은 그렇게 나쁘진 않았던 것 같기도 하네. 그렇지?”강하리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과 한 달 남짓한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구승훈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서 너무도 멀어진 것만 같았다.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오늘은 꼭 광고 모델 확정해야 해. 원래 계약하려던 사람이 며칠 전에 갑자기 마음을 바꿨어. 이유 알아봤어?”그러자 천아름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이유야 뻔하지. 뺏긴 거지 뭐. 거의 계약 직전까지 갔는데... 갑자기 말을 바꾸더라.”“누가 뺏어갔는데?”강하리가 조용히 물었다.천아름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며칠 만에 마주친 구승훈이었다. 깔끔한 수트를 입고 있었지만 여전히 전해지는 그 특유의 냉기가 몸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강하리는 구승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했다.구승훈 역시 이 순간에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던지 평소 차가운 눈빛은 놀랍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그의 시선은 곧장 강하리에게 꽂혀 그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녀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얼굴빛은 생각보다 좋았다.홍조가 돌아 있었고 얼굴도 약간 도톰해진 듯했다.그는 기뻐해
항구에서 보경시로 돌아오자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구승훈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누군가의 사무실로 들어섰다.“어떻게 됐어?”그 말에 노진우는 고개도 들지 않고 리모컨부터 눌렀다. 그러자 벽에 걸려있던 TV가 켜지더니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화면 속에는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여초천이 이성을 잃은 채 날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의 가구를 부수며 바닥에서 뒹굴기 시작하더니 그럼에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는 벽에 머리를 쾅쾅 들이박았다.여초연의 이마는 이미 피범벅이 된 상태였다.그 모습을 본 구승훈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됐어. 그만해.”노진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이렇게 끝내시겠다고요? 대표님께서 발작 났을 땐 이것보다 훨씬 심했어요. 제가 만든 약은 효과가 얼마 못 가거든요. 급하게 만든 거니까요. 하지만 대표님은 온 하루 동안 고통스러워하셨잖아요.”“게다가 대표님은 이 약 때문에 하리 씨 곁을 떠나야 했잖아요. 하리 씨가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다 이 약 때문인데 이제 와서 마음이 약해졌다고요?”구승훈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담배를 꺼내 거기에 불을 붙였다.“마음이 약해진 게 아니야. 저런 꼴을 보고 있으니까 그냥... 그때 내 모습이 떠올라서...”“생각할 때마다 너무 후회돼. 하리를 혼자 예식장에 두고 떠났던 거 말이야. 내가 어떻게 잡았는데 또다시 놓쳐버리다니...”“그런데 또 여초연이 저러고 있는 걸 보니까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 내가 하리를 밀어내지 않았더라면 하리가 내 저런 모습을 봐야 했을 수도 있잖아.”노진우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실 제 책임도 좀 있어요. 제 대학 동기인 데다가 능력도 괜찮아 보여서 추천했었는데 배경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으니까요.”구승훈은 씁쓸하게 웃었다.“임희주가 아니었어도 이렇게 되었을 거야. 여초연이 날 가만 내버려뒀을 리 없으니까.”노진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하리 씨 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