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그 후 이틀 동안 정주현에게 업무를 넘기면서 외교부에 제출할 자료를 준비했다.그녀는 지금까지의 추측대로라면 정양철이 그렇게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인수인계 마지막 날까지 정양철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강하리는 자신이 정말 괜한 생각을 한 건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업무 인계가 끝났으니 구승훈에게 연락한 다음 퇴근하고 곧장 공항으로 가려고 했다.그런데 회사 아래층에 있던 한 남자가 그녀를 막았다.“강하리 씨, 안녕하세요.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앞에 서 있는 예쁘고 상냥한 여자를 바라보았다.“누구세요?”“저 승훈이 엄마예요.”강하리는 잠시 당황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요, 옆에 있는 카페로 가요.”여초연은 강하리를 본 순간부터 강하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강하리 씨 정말 예쁘네요. 이러니까 승훈이가 그렇게 좋아하죠.”강하리는 여초연의 의도를 알 수 없어 그저 담담하게 웃기만 했다.“칭찬 감사합니다.”여초연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눈으로 바라보았다.“걱정하지 마요, 긴장도 하지 말고. 귀찮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승훈이 떠나라는 말도 안 해요. 그냥 그 자식 정신 차리게 한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서요.”강하리는 약간 놀란 표정이었다.구승훈의 엄마도 그의 할아버지와 같은 생각인 줄 알았는데 이런 태도를 보일 줄은 몰랐다.여초연은 커피를 강하리 쪽으로 밀었다.“승훈이 성격이 워낙 유별나서 평소에 힘든 부분이 많죠?”강하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그래도 절 잘 챙겨줘요.”여초연은 커피를 들고 가볍게 한 모금 마신 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하리 씨, 승훈이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인 나를 포함해서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어본 적이 없어요. 아마 하리 씨가 처음일 거예요. 그래서 부탁 좀 할게요. 인내심 갖고 지켜봐 줘요. 사랑을 몰라도 내가 보기엔 하리 씨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으니까.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영감탱이가 문씨 가문이랑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강하리도 알아들었다.구승훈은 웃으며 말했다.“약속할게, 파티에서 문연진이랑 절대 가까이 있지 않을게, 알았지?”강하리는 왠지 씁쓸함이 밀려왔다.그에게 안 가면 안 되냐고 묻고 싶었다.가까이하든 말든 구동근은 분명 문연진을 구씨 가문의 예비 며느리로 소개할 것이다.하지만 입가에 차오른 말을 그대로 삼켜버렸다.구승훈은 어쨌든 구씨 가문 사람인데 본인 할아버지 생신에 무슨 이유로 가지 말라고 하겠나.구승훈은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손을 뻗어 얼굴을 어루만졌다.“나랑 같이 갈래?”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싫어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당겼다.“괜히 찾아가서 욕만 먹을 텐데요.”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강하리의 손을 붙잡고 낮게 속삭였다.“하리야, 조금만 더 시간을 줘.”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저녁 비행기로 B시에 가야 했고 구승훈은 공항에 그녀를 내려주면서도 보내주기 싫은 표정으로 껴안고 입 맞추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이틀 동안 겨우 즐겁게 지내나 싶었는데 다시 혼자 있으라고?”강하리가 웃었다.“나랑 같이 갈래요?”구승훈은 홧김에 그녀의 목을 힘껏 빨아당겼다.“못 간다는 거 잘 알잖아.”강하리는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흔적 남기지 마요, 일하다가 보이면 어쩌려고.”그 말에 구승훈은 그녀의 옷깃을 열고 가슴에 자국 몇 개를 남겼다.“거기 가면 주해찬이랑은 떨어져 있어, 알았지?”강하리가 그를 밖으로 밀어냈다.“알았어요.”구승훈은 이를 갈았다.“오면 나랑 밤새 같이 있어, 피곤하단 말 하지 마.”할 말을 잃은 강하리는 그를 밀어내고 곧장 차 밖으로 나갔다.강하리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걸 보고 나서야 구승훈은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여초연은 구승훈의 전화를 받고도 놀라지 않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저녁 언제 먹으러 올 거야? 네가 좋아하는 거 만
주해찬은 더 이상 얘기하지 않고 회의 흐름에 맞춰 최종 확인만 한 뒤 자리를 떠났다.주해찬이 떠난 후 문연진이 강하리 옆에 나타났다.“강하리 씨, 주해찬 씨랑 아직도 그렇게 사이좋은 거 승훈 오빠도 알아요?”강하리가 그녀를 힐끗 보았다.“문연진 씨 상처는 다 나았어요?”당연히 상처는 아직 낫지 않았고 얼굴에 흉터가 남을지도 모른다.이 말을 들은 문연진은 울컥 화가 치미는 것 같았다.구승훈이 강하리를 위해 자신을 건드릴 줄은 몰랐다.문씨 가문 사람들이 구씨 가문을 찾아갔고 구동근은 그녀에게 제대로 된 보상을 해주겠다고 말했다.하지만 구승훈이 강하리를 이렇게 감싸고 도니 속에 열불이 나 견딜 수가 없었다.문연진이 피식 웃었다.“강하리 씨는 뭐가 그렇게 당당해요? 승훈 오빠가 당신 곁에 있다고 해서 승훈 오빠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아요?”강하리가 대본을 내려다보며 그녀를 무시했지만 문연진은 굴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구씨 가문에서 인정한 며느리는 나고 오빠 마음속에 있는 여자는 송유라예요. 명분이든 오빠 마음이든 다 가지지 못했으면서 뭐가 그렇게 의기양양한데요? 고작 같이 밤이나 보내는 장난감 주제에!”강하리가 마침내 시선을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문연진 씨는 통역이 아니라 이간질하는 일이 더 잘 어울리겠어요.”말을 마친 그녀가 원고를 들고 가려는데 문연진이 뒤에서 말했다.“아직 모르죠? 승훈 오빠가 송유라 걷게 하려고 의사 찾아주고 있다는 거.”강하리의 걸음이 멈칫했지만 곧 다시 제 갈 길을 갔다.자리로 돌아와 보니 손에 들고 있던 원고가 이미 구겨져 있었다.구겨진 원고를 펴고 나니 마음속의 혼란스러움도 함께 진정되었다.문연진의 도발이 아닌 구승훈을 믿어야 한다.문연진이 둘 사이를 갈라놓는다는 걸 알기에 더더욱 그녀를 믿지 말아야 했다.하지만 그럼에도 원고를 보면서 넋이 나갔고 옆에 있던 사람이 그녀를 불러서야 정신을 차렸다.곧 회의를 시작하기에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집중해 업무에 임했다.기자 회견은 총
말을 마친 강하리가 유창한 외국어로 인사를 건네자 대통령은 놀란 눈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진태형은 웃으며 말했다.“이 여사님을 봐요.”강하리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다가 이윽고 지난 이임식 때 자신이 화장실에서 구해준 여성임을 알아차렸다.그 여성은 강하리를 보자마자 감격해서 곧바로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았다.“강하리 씨, 드디어 만났네요. 이번에 특별히 당신을 보러 왔어요. 지난번에 구해줘서 고마워요.”강하리는 웃으며 답했다.“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하지만 여자는 여전히 그녀를 껴안고 놓지 않았다.“아니요, 당신에겐 단지 호의일지 몰라도 나에겐 생명의 은인이에요.”그녀의 남편이 감사의 말을 건넸고 진태형도 그 옆에서 웃으며 말했다.“이분들이 하리 양을 L국 친선 대사로 초대하고 싶다는데 마침 백 장관님과 저도 하리 양을 파견하고 싶어요. 하리 양 생각은 어때요? 이건 쉽게 오지 않을 좋은 기회예요.”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놓칠 수 없는 좋은 기회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구승훈과 화해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해외 파견을 수락하면 다시 헤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그녀가 이틀 동안 B시에 오는 것도 구승훈은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데 3년씩이나 해외에 나가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었다.“진 장관님, 백 장관님, 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백아영과 진태형이 서로를 바라보더니 진태형이 먼저 말했다.“네, 잘 생각해 봐요. 그래도 우린 이번 기회를 잡았으면 좋겠어요.”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미소를 지었다.“네,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요.”백아영과 진태형은 볼 일이 있었고 강하리는 대통령 부부와 한참을 더 이야기를 나눈 뒤 자리를 떠났다.문연진은 손가락이 살에 파고들 기세로 주먹을 꽉 쥔 채 강하리의 뒷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다.조금 전까지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들었다.‘지난번 화장실에서 강하리가 L국 대통령 부인을 구해줬다고?’자신이 시간을 끌기 위해 그 안에 집어넣은 건
구승훈은 이미 지쳐 있는 강하리를 안고 욕실에서 나왔다.강하리는 그의 가슴에 기댄 채 금방이라도 잠들 기세였다.하지만 여전히 구승훈의 기분을 살피고 있었다.오늘 구승훈에게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평소에도 때때로 감정이 들쑥날쑥한 남자였지만 두 사람이 화해한 뒤로 지금처럼 거친 감정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오늘 어딘가 이상하다.“오늘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구승훈은 품에 안긴 여자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많이 티 나?”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구승훈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드라이기를 가지러 돌아섰다.그는 대답 대신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말려주며 에어컨을 적당한 온도로 맞춘 뒤 그녀를 안고 눈을 감았다.“보고 싶어서 왔어. 오는 길에 다른 남자가 널 데려가는 꿈도 꿨어.”강하리는 다소 어이가 없었고 구승훈은 다시 힘껏 그녀를 품에 가두었다.“조금만 누워 있어. 먹을 것 가져오라고 할 테니까 일어나면 먹자.”강하리는 그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살짝 한숨만 쉬었다.“나 여기 있잖아요, 아무도 안 데려가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널 내 곁에 묶어둘 방법을 생각해야겠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그를 바라봤다. 해외 파견에 관해 얘기하려고 했는데 지금 상황에서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일단 좀 자.”강하리는 정말 피곤한 상태였기에 잠이 드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구승훈은 잠든 강하리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휴대폰에는 강하리가 주해찬과 함께 서 있는 사진이 열댓 장 정도 있었다.강하리가 미소를 지으며 주해찬을 올려다보는 사진, 두 사람이 서로 기대어 귓속말을 하는 사진, 심지어 주해찬의 입술이 강하리의 이마에 닿은 것처럼 보이는 사진도 있었다.앵글이 굉장히 잘 잡혔고 두 사람 분위기도 무척 다정해 보였다.구승훈은 사람들도 많은 그런 자리에서 두 사람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
“가요, 집에 어르신 몇 분이 기다리고 있어요.”말을 마친 그가 강하리를 바라보았다.“특히 우리 집 어르신께서 지난번 만난 이후로 계속 하리 씨 얘기만 해요.”강하리는 웃으며 말했다.“진작 왔어야 했는데.”심준호는 웃으며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얼마 가지 않아 백아영이 심문석을 부축하며 안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드디어 왔네!”심문석은 강하리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하리야, 얼른 이리 와 봐. 이 할아버지가 너 살 야윈 건 아닌지 보게.”심준호는 옆에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할아버지, 하리 씨 안 본 지 며칠밖에 안 됐는데 과장이 좀 심하시네요.”심문석은 그를 노려보며 강하리를 안으로 끌어당겼다.강하리는 구승훈을 힐끗 쳐다보았고 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강하리와 심문석이 사라지자 구승훈은 백아영에게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아주머니.”백아영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호랑 얘기 나누고 있어. 난 요리하러 부엌에 가야 해서.”백아영이 떠난 뒤에야 심준호는 입을 열었다.“어르신 팔순 생신이지? 잘 왔어. 선물 너한테 보낼 테니까 나 대신 전해드려. 난 안 갈래.”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나란히 안으로 들어갔다.심준호는 강하리가 사라진 방향을 힐끗 쳐다보았다.“너랑 강하리 씨 만나는 거 어르신은 뭐라고 하셔?”구동근을 언급하자 구승훈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싸늘해졌다.“할아버지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심준호는 그 말에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깊은 눈빛으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두 사람 만나는 거 반대하시나 보네.”구승훈의 깊은 눈동자가 어두워졌다.“내 일 그 사람 동의는 필요 없어.”심준호는 웃었다.“알지, 넌 늘 그렇게 무모하게 행동하는 게 익숙하잖아. 근데 승훈아, 넌 어르신 태도 무시할 수 있어도 하리 씨는, 하리 씨도 괜찮대? 처음부터 끝까지 집안에서 인정을 못 받고 집안에서 결혼까지 주선하는 걸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구승훈은 한 손을
“여긴 준호 누나네 마당인데 몇 년 동안 아무도 살지 않았고 안에 있는 물건도 건드리지 않아서 가끔 이렇게 보면 마음이 너무 힘들어.”어르신은 살짝 한숨을 쉬었다.강하리는 예전에 백아영에게 사라진 딸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그녀가 입술을 달싹이며 무슨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아빠, 손님이 오셨다고 들었어요.”두 사람이 뒤를 돌아보니 한 여성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그 여자는 다름 아닌 주해찬의 이모, 심준호의 숙모 석미란이었다.석미란은 강하리를 보자마자 얼굴에 가득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난 또 누구라고, 망할 년 너였어?”심문석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어디서 그런 말을 해!”석미란은 어르신의 호통에 순간 당황했다.“아빠, 진짜예요. 이 년이 해찬이를 유혹하고 다른 남자들이랑 놀아났어요. 어떤 돈 많은 사람한테 빌붙어서 유산한 적도...”“닥쳐! 이년이라니, 어디서 감히 그런 말을 입 밖에 꺼내?”심문석은 석미란을 노려보며 다시 한번 고함을 질렀다.“당장 여기서 꺼져!”석미란은 분노했다.“아빠, 정말이에요. 못 믿겠으면 주씨 가문에 가서 물어봐요. 우리 해찬이 저년 때문에 지금 여자도 안 만나요. 아빠도 설마 저년한테 홀린 거예요? 저년이...”“여사님.”석미란이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뒤돌아보니 멀지 않은 곳에 구승훈과 심준호가 서 있었고 두 사람 모두 똑같이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여사님, 말을 제대로 할 줄 모르시면 제가 직접 가르쳐 드리죠.”구승훈이 어두운 얼굴로 말하자 석미란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심준호가 이미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그녀는 심준호를 보자 살짝 겁이 났다.이 집안에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독 심준호는 두려운 존재였다.심준호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지며 주위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준호야, 난 사실을 말한 것뿐이야. 이년이 정말 예전에...”그녀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얼굴에 손바닥이 날아
강하리는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혼란스러웠지만 그녀도 착용할 생각은 없었다.한눈에 봐도 너무 비싼 물건인데 망가지거나 잃어버리면 너무 아깝지 않나.두 사람은 오후에 연성으로 돌아왔고 공항에서 나오던 구승훈은 강하리를 끌고 차에 태웠다.“집에 가요?”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 보러 병원에 가고 싶어요.”정서원은 상태가 조금 안정되어 중환자실에서 나왔다.한동안 이리저리 다니느라 제대로 돌보지 못했는데 이제야 시간이 났으니 엄마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차를 몰고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하자 강하리가 그를 바라보았다.“이따 나랑 같이 들어가요.”구승훈은 살짝 당황했다. 그녀와 따라 들어갈 생각이긴 했어도 강하리의 입에서 나온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 없었다.정서원에게 남자 친구로 그를 데려가겠단 뜻이다.구승훈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가와 강하리의 허리를 붙잡고 무릎에 앉혔다.“강 대표님 지금 나 데리고 부모님 뵈러 가는 건가?”강하리가 웃었다.오늘 심씨 가문에서 그녀는 왠지 모르게 정서원 생각이 났다.진작 구승훈을 데리고 정서원을 만나러 갈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앞으로 자신과 구승훈이 잘 될지 안 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의 곁에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걸 정서원에게 알리고 싶었다.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갈 거예요?”구승훈의 목울대가 움찔하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답했다.“갈 거야, 무릎 꿇고 기어 오라고 해도 가.”강하리가 웃었다.구승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붉어진 눈가에 입맞춤했다.“걱정하지 마, 앞으로 내가 곁에 있을 테니까.”강하리는 참아왔던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구승훈은 그녀의 눈물에 입을 맞추며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였다.한참이 지나서야 강하리가 겨우 진정하고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입원 병실로 향했다.그런데 복도에 다다르자 손연지가 씩씩거리며 밖에서 들어왔고 당황한 강하리는 서둘러 손연지를 붙잡았다.“연지야, 무슨 일이야?”손연지는 화가
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기만 했다.“내가 진짜 주해찬을 건드렸다면 어떻게 할래?”강하리가 그를 마주 보았다.“살인은 대가를 치러야 해. 구승훈 당신은 나한테 특별할 게 없어.”구승훈의 마음속이 온통 씁쓸함으로 물들었다.그는 쓴웃음을 내뱉었지만 그래도 말을 이어갔다.“아직 몰라. 의사가 그럴 수도 있다고 했어.”하지만 강하리의 마음은 다소 무겁게 가라앉았다.그때 정서원이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도 의사가 그렇게 말했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선배 좀 보고 올게.”구승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결국 막지 않았다.그녀를 보내주지 않으면 그녀가 계속 불안해할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구승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따라 나갔다.중환자실 밖에서 여전히 울고 있는 석미란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강하리의 몸이 굳어졌다.그녀는 손가락에 힘을 주고 저쪽으로 걸어갔다.다만 아직 중환자실 앞으로 가기도 전에 걸음이 뚝 멈췄다.정양철과 정주현이 거기 있을 줄이야.그녀가 정양철을 힐끗 쳐다보자 정양철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강하리는 문득 정서원이 납치되었을 때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는 게 떠오르며 손가락을 말아쥐었다.정서원에게 일이 생겼을 때 정양철이 병원에 나타났다.그녀가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는지 확인하러 온 듯이.구승훈은 강하리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정양철을 힐끗 쳐다보더니 큰 손으로 강하리의 뒤 허리를 살며시 그러잡았다.강하리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거두었다.정주현은 강하리를 보자마자 서둘러 이쪽으로 다가왔다.“강하리 씨, 좀 어때요?”강하리가 고개를 저었다.“난 괜찮아요.”말을 마친 그녀가 중환자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두꺼운 유리 벽 너머로 드디어 주해찬이 보였다.항상 온화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는 현재 침대에 누워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몸에 여러 개의 튜브를 삽입하고 누워 있었다.강하리의 마음이 아팠다.밀려오는 죄책감이 그녀를 익사시킬 것만 같았
강하리의 머릿속이 하얘졌다.“뭐라고요?”석미란은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해찬이가 식물인간이 됐다고, 이제 만족해?”강하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손끝까지 떨리고 있었다.“가볼래요.”그녀는 이불을 걷어 올리고 밖으로 나가려고 일어났지만 구승훈이 그녀를 붙잡았다.“지금 가도 소용없어. 중환자실에 있어서 못 만나.”그때 석미란이 갑자기 강하리를 붙잡았다.“망할 년,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해찬이를 보러 가! 해찬이가 정말로 못 깨어나면 내가 네 목숨을 가져갈 거야!”석미란이 말하며 강하리의 목을 조르려고 달려들자 구승훈이 그녀의 손을 잡고 내동댕이쳤다.“여사님, 말 가려서 하세요. 대체 누가 누구 때문에 힘들다는 겁니까? 지금 전부 하리 탓으로 돌리는데 만약 주해찬 때문에 하리가 피해를 본 거면 저도 하리 복수를 위해 중환자실로 가서 주해찬을 죽여도 됩니까?”석미란은 눈이 빨개진 채 구승훈을 노려보았다.주해찬이 깨어나지 못할 위험에 처해있는데 죽여버리겠다고?“구승훈, 이 살인자 새끼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을 것 같아? 너랑 강하리, 너네 둘 다 살인자야! 내가 죗값 치르게 해줄 테니까 기다려. 망할 네년은 해찬이 목숨값 내놔!”석미란의 울부짖는 소리가 병동 전체에 울려 퍼졌고 준봉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여사님, 방금 경찰에서 그 차가 구 대표님 번호판을 덧씌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대표님은 누명을 쓴 겁니다.”석미란은 여전히 증오에 가득 찬 눈빛으로 구승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구승훈이 진짜 아들을 죽인 범인이라는 듯이.“경찰을 매수하면 그만인 줄 알아? 구승훈, 내가 죗값을 치르게 할 거야!”강하리는 준봉의 말을 듣고 순간 몸이 굳어졌다.구승훈은 출입구를 지키고 있는 준봉을 바라보았다.“여사님 나가시라고 해.”준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석미란을 막기 위해 앞으로 달려갔다.“여사님, 이만 나가 주세요.”석미란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주해찬의 아버지에게 제지당했다.주해찬을 닮은 외모에 겉과 속이 모두 반듯한
주해찬의 표정이 확 바뀌며 핸들을 꺾었지만 그래도 피할 수 없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강하리를 보호했고 강하리의 시선은 다가오는 차에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구승훈의 차다.차 번호판도 똑같았다.구승훈이 B시에 올 때마다 몰던 차였다.순식간에 강하리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곧 눈앞이 핑글 돌았다....강하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구승훈이 보였다.“좀 어때?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강하리는 멍한 표정으로 옆에 앉은 남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구승훈, 당신이야?”구승훈의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고 의심을 받은 그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하리야, 너 정말 나라고 의심하는 거야?”입술을 달싹이며 그를 바라보는 강하리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의심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차는 분명 구승훈의 것이었다.하지만 구승훈이 아니라고 말할 때 오히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서늘한 구승훈의 시선을 피하며 나지막이 물었다.“선배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네가 신경 쓰는 건 주해찬밖에 없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날 구해준 사람이야.”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구승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내가 널 구해준 적은 없어? 하리야, 너 정말 사람 마음 아프게 한다.”강하리는 그의 손에서 손을 빼냈다.지금은 그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주해찬이 그녀의 몸을 감쌌기에 그는 꽤 심하게 다쳤을 거다.처음부터 주해찬에겐 미안한 것투성이였다.오랜 시간 동안 그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면서도 그에게 해줄 대답이 없었다.게다가 구승훈의 차로 교통사고까지 났으니 마음속에는 죄책감이 커져만 갔다.“선배는 어떻게 됐어?”여전히 똑같은 말에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주해찬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목숨은 건졌지만 그가 깨어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지금 강하리의 태도로 볼 때, 주해찬이 자신을 구하려다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지 정말 알 수 없
주해찬의 표정이 잠시 번뜩이다가 미소를 지으며 정양철에게로 향했다.“아저씨, 오랜만이네요.”정양철의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가 이내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해찬아, 여긴 무슨 일이야?”주해찬이 미소를 지었다.“친구 데려다주고 나오는데 여기서 아저씨랑 만났네요.”정양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그럼 가서 일 봐. 난 아직 할 일이 남아서.”“알았어요.”주해찬은 그 말을 하고 돌아서서 문을 나섰다.정양철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전화기를 꽉 쥐었다.한편 주해찬은 안에서 나오기 바쁘게 훅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멍한 표정으로 길가에 서 있었다.방금 정양철이 한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강하리나 구승훈과 무슨 일이 있는 걸까?손을 댔다고 했는데, 무슨 짓을 한 걸까.정주현에게 선을 긋던 강아리의 모습과 연관 짓자 주해찬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그는 다소 창백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강하리가 샤워하러 가려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선배?”하지만 강하리가 전화를 받을 때 주해찬은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적어도 제대로 알아보고 강하리에게 알려줘야지 무턱대고 말하는 건 무책임한 행동이었다.“아니야, 그냥 내일 나랑 같이 팔찌 가지러 가자고.”“선배, 나 혼자 갈 수 있어요.” 강하리가 여전히 거절하려는데 주해찬이 말을 막았다.“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오늘 밤엔 일찍 쉬어.”주해찬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다음 날 이른 아침, 준봉은 구승훈의 전화를 받고 강하리에게 아침을 가져다주었다.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 순간, 강하리 방 앞에 두 사람이 수상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그를 보자마자 뒤돌아 복도 쪽으로 달려갔고 준봉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그들을 쫓아갔다.일직 강하리가 묵고 있는 호텔 아래층에 도착한 주해찬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어젯밤 정양철의 그 말 때문에 거의 밤을 새
준봉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대표님께서 마실 것 가져다드리래요.”말을 마친 준봉은 강하리에게 밀크티 한 잔을 건넸고 강하리는 눈앞에 놓인 밀크티를 보고 화를 내며 다시 한번 문을 닫았다.주해찬은 방에 앉아서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안 가면 조금 있다가 또 올걸.”주해찬은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오늘 밤 모임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죄송해요, 선배.”구승훈이 이러면 주해찬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난처했다.주해찬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문득 어젯밤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던 모습이 떠올라 결국 포기했다.준봉은 강하리의 방에서 나오는 주해찬을 바라보며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았다면 다음에 문을 두드리러 갈 때 또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주해찬이 나오며 준봉을 보고 웃었다.“구 대표님한테 그럴 필요 없다고 전해요. 하리가 원하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고 하리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절대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요.”준봉은 주해찬을 바라보기만 했다.“안녕히 가세요, 주해찬 씨.”주해찬은 강하리를 힐끗 쳐다보며 작별 인사를 속삭인 뒤 곧장 돌아섰다.주해찬이 떠난 뒤에야 준봉은 다시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차는 경찰서를 향해 빠르게 달렸고 통화를 마친 그는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구승재를 바라보았다.“목란정원 쪽 상황은 어때요?”“우리 쪽 사람들이 들어갔는데 안에 연정이가 없었대. 그리고 사람들이 들어갈 때 꼭 큰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순조롭게 들어갔대.”시선을 내려 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이 차갑게 웃었다.“역시.”구승재가 얼굴을 찡그렸다.“역시 뭐?”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빛만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어젯밤에 그녀는 일부러 그를 그곳으로 유인한 거다.연정이 사건은 여초연이 한 짓이다.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뒤틀렸다.하지만 잠시 후 그는
정주현은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강하리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본인이 말하지 않으니 더 물어볼 수도 없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강하리 씨 데려다줬어. 웬일로 아들이 보고 싶어서 그래?”연미숙이 잠시 멈칫했다.“이 자식, 누가 보면 내가 평소에 너한테 관심 없는 줄 알겠다.”정주현은 연미숙 앞에서 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그래, 관심 많은 거 알겠으니까 무슨 일인데 그래?”연미숙은 잠시 침묵했다.“강하리한테 같이 밥 먹자고 해.”차라리 말하지 않으면 좋았을걸. 그 말을 꺼내니 정주현은 더 우울해졌다.“엄마, 강하리 씨 바빠.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친구들이나 만나지 강하리는 왜?”연미숙이 웃었다.“우리 아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여자를 내가 좀 만나면 안 돼?”정주현이 입을 삐죽거렸다.“영감탱이가 엄마처럼 정신 차렸으면 강하리가 며느리 됐을 텐데.”연미숙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루 종일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빨리 돌아와.”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후, 그녀의 눈에는 악의에 찬 눈빛만이 번쩍였다.강하리는 정주현을 배웅하고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주해찬은 그녀의 뒤에 서서 물었다. “일부러 주현 씨랑 거리를 두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정신을 차린 강하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선배, 난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일 봐요.”주해찬은 그녀가 말하지 않으려는 것을 보며 다소 무력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만약 이 순간 그녀의 곁에 있던 사람이 구승훈이었다면 그녀는 바로 말하지 않았을까?아니면 구승훈은 굳이 묻지 않아도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고 있었을까?질투가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분명 그가 구승훈보다 먼저 강하리를 좋아했는데.“하리야, 가능하면 나도 네가 기댈 곳이 되어주고 싶어.”강하리의 표정은 굳어졌고 말투에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다.“선배, 정말 고맙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구승훈이 제일 잘 안다.정말 여초연이 연정이를 데려갔다면 그렇게 쉽게 꼬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테고 초조했던 그는 계속해서 그녀가 먼저 빈틈을 보이길 기다릴 수가 없었다.그래서 소란을 일으킨 뒤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할 생각이었다.그녀의 수단으로 봤을 때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는 걸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오늘 대놓고 이곳으로 왔다는 건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유인한 걸까?그렇다면 연정이에게 일어난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지지 않나?어쨌든 구승훈은 연정이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연정이가 정말 그녀의 손에 있고 막다른 길에 이른 그녀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그 시각 목란정원에서 여초연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쪽의 깊은 밤과 달리 저쪽은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다음 날 주해찬과 함께 B시로 갔다.비행기에서 막 내린 두 사람은 입국 게이트에서 정주현이 신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강하리 씨, 드디어 왔네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주해찬을 흘깃 쳐다보았다.주해찬은 무기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었어. 계속 물어보니까 시간을 알려줄 수밖에.”정주현은 곧바로 불만을 터뜨렸다. “강하리 씨, B시로 오면 알려준다면서 이러는 건 아니죠!”강하리는 힘없이 웃었다.“가요.”그러던 중 정주현은 강하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걸 다시 한번 언급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정주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하리 씨, 그래도 우리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이러면 대양그룹에 불만이 있는 것 같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정 회장님이 절 찾아오라고 시켰어요?”정주현은 부인하지 않았다.“영감탱이한테 불만 있는 건 아니죠? 지난번에 구정우 도와줘서 그래요?”강하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주현은 그
구승훈의 주변에 우중충한 공기가 감돌았고 차가운 시선은 올곧게 주해찬에게 향했다.가까이 다가온 주해찬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구승훈은 조금도 피할 생각 없이 그대로 얻어맞은 뒤 이윽고 주해찬의 손목에 주먹을 내리쳤다.그 손이 조금 전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 구승훈은 그의 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달려들었다.주해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구승훈, 하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아? 병원에서 그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아? 네가 뭔데 계속해서 걔한테 상처를 줘, 네가 뭐라고 걔한테 그런 식으로 강요해!”강하리가 병원에서 지냈던 걸 언급하자 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당연히 그는 그녀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있었다.매일 의사가 진정제를 놓아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심한 우울증이었다.노민준이 그날 했던 말을 그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이러면 언제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위험이 있어. 이젠 살아갈 의욕을 완전히 잃었어.”구승훈의 몸이 경직되었지만 꿋꿋하게 받아쳤다.“주해찬 당신이 뭔데 나랑 하리 사이에 끼어들어?”주해찬은 입가에 무심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아무리 그냥 선배라도 걔가 너한테 괴롭힘당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정말 그냥 선배가 되고 싶은 거야? 주해찬, 네 개수작을 모를 것 같아?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거잖아.”잠시 멈칫하던 주해찬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내가 아무리 이용하는 거라고 해도 억지로 강요하는 너보다 나아. 구승훈, 사람 존중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다시 하리 앞에 나타나. 그전까지 넌 자격 없으니까.”주해찬은 말을 마치고 곧장 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비를 맞으며 서 있던 구승훈은 한참이 지나서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자격이 없다고...맞는 말이긴 한데 그럼 주해찬은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그는 입가를 가볍게 문지르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강하리는 주방에 약을 먹으러 가다가 비속에 서 있는 구승훈을 보게 될 줄은 몰랐
가서 팔찌를 가지고 백아영의 생일을 보낸 후 출국할 생각이었고 그 외 일은 지금 당장 처리할 기분이 아니었다.구승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손연지의 집 밑에 우산을 쓴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주해찬이었다.비 오는 밤, 가로등에 반사된 남자의 모습은 약간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무척 적극적이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렬한 불빛이 주해찬에게 비추자 뒤를 돌아본 그가 구승훈의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강하리를 발견했다.구승훈은 보지 못한 듯 강하리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검은 우산이 머리 위로 드리워지며 주해찬의 낮은 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걱정돼서 보러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난 괜찮아요. 걱정시켜서 미안해요.”그때 주해찬이 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하리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구 대표님.”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가벼운 웃음을 내뱉으며 주해찬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주해찬 씨가 뭐라고 저한테 감사 인사를 하는 거죠?”주해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하리의 선배로서요.”그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집에 가서 쉬어.”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해찬이 우산을 들고 건물 쪽으로 따라나섰다.구승훈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에 서리가 낀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의 실루엣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비를 맞으며 우산 아래서 두 사람의 어깨는 단단히 맞닿은 것 같았다.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야 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했다.“선배, 나 혼자 올라가면 돼요.”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입술이 어딘가 부딪힌 것처럼 살이 갈라져 있었다.갈 때는 괜찮았는데 돌아올 땐 입술이 찢어진 채로 왔다.구승훈에 대한 강하리의 쌀쌀맞은 태도는 다 지켜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요했어?”주해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강하리는 몸이 굳어지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