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훈이 보낸 건 사진 한 장이었다.비행기에서 찍은 일출, 하늘의 절반을 물들인 찬란한 아름다움이 시선을 사로잡았다.강하리는 그 사진에 한참 동안 시선이 머물렀다가 저장한 뒤 휴대폰을 베개 밑에 넣고 잠이 들었다.진태형이 데리러 올 사람을 보낸다고 했는데 놀랍게도 그 사람은 주해찬이었고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가득했다.“어젯밤에 잘 잤어?”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럭저럭요.”주해찬이 싱긋 웃었다.“다행이다, 잘 못 잤을까 봐 걱정했어.”그렇게 말한 뒤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물었다.“하리야, 너랑 구승훈 씨 화해한 거야?”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아직요.”아직 화해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강하리는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구승훈이 다가오는 걸 점점 거절하기 힘들었다.다만 구씨 가문 사람들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그녀는 주해찬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짐을 챙겨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엘리베이터 안에서 주해찬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하리야, 내가 잘못했어.”강하리는 깜짝 놀랐고 주해찬은 더 말하지 않았다.그는 자신이 잘못한 걸 후회하고 있었다.애초에 그렇게 포기하는 게 아닌데.지금 구승훈의 상황은 그와 비슷했지만 분명한 건 구승훈은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만약 자신도 그때 조금만 버텼다면 지금 그들 사이가 달라지지 않았을까?강하리는 구승훈의 전화가 왔을 때 막 차에 올라탄 상태였다.그녀는 통화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영상통화라는 사실을 깨달았다.“출발했어?”말을 마친 구승훈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주해찬 차에 있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진 장관님께서 저를 데리러 오라고 보냈어요.”구승훈이 차갑게 웃었다.“진 장관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그 많은 사람 중에 하필 저 사람을 보내?”“구승훈 씨, 말조심해요!”말을 가려 할 여념이 없었던 구승훈은 지금 당장 다시 날아가고 싶었다.“주해찬도 이번 일에 참여해?”강하리는 지금까지도 이번 일 구성원에 누
강하리는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려 주해찬을 바라보았다.“미안해요, 선배.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주해찬은 피식 웃었다.그는 개의치 않았다. 구승훈을 이해할 수 있으니까.그런 위기감은 자신도 전에 겪어본 적이 있는데 이번엔 상황이 정반대였다.주해찬은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하리야, 내가 그때 네 손 놓지 않았으면 우린 어떻게 됐을까?”메시지를 보내던 강하리의 손이 순간 멈칫하며 그녀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 역시 확신이 서지 않았다.하지만 구승훈이 옆에서 방해하는 상황에선 아무리 버텨도 그들은 결실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선배, 지나간 일은 그냥 내려놔요.”하지만 주해찬은 그저 미소만 지었다.내려놓으라고, 그게 어디 쉽나.애초에 자신과 강하리가 헤어지게 된 원인이 구승훈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더더욱 그러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이제 와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지는 않을 것이다.구승훈이 강하리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면 그도 기꺼이 축복해 주겠지만, 만약 그가 또다시 그녀에게 상처를 준다면 미련 없이 그녀를 데려갈 것이다....외교부에서 열린 오전 회의는 주로 이번 일에 대한 설명회였다.교포 출신의 한 부유한 사업가가 Y국에서 은밀한 경로를 통해 해외에서 분실된 문화유물을 발견했는데 상대와 정보를 교환해 문화유물을 정상적인 방법으로 국내에 들여오려다가 문화 유물 밀수범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썼다.이번 임무는 그 부유한 사업가를 구출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문화유물 일괄을 국내로 되찾아오는 것이었다.강하리를 포함한 협상팀은 총 15명으로 구성되었다.문화유적 전문가, 외교부 관계자, 고문 변호사,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국방부 관계자까지 함께했다.그리고 그 선두에는 놀랍게도 90대의 심문석이 있었다.심씨 가문의 어르신인 심문석은 아흔이 넘었지만 여전히 백발의 정정한 모습이었다.심문석 옆에는 심준호가 고문 변호사 역할로 서 있었다.심문석의 시선이 모두를 훑어보다가 강하리에게 향했고 그는 잠시 멈칫
“아이고, 나이가 드니 감수성이 풍부해지나 보네.”심준호는 그가 심미현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옆으로 데려가 몇 마디 위로를 건넸다.강하리는 떠나기 전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구승훈은 이사회에 참석 중이었고 책상 위에 놓인 그의 휴대폰이 울리자 회의실 안에 있던 SH그룹 어르신들의 얼굴이 일제히 어두워졌다.“구승훈, 지금 이사회를 하는데 어른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야지.”구승훈은 휴대폰 화면을 흘깃 쳐다보고는 곧바로 휴대폰을 들었다.이사회에 참석한 어르신들은 하나둘씩 얼굴이 일그러졌다.“구승훈! 우리 말이 안 들리는 거야?”구승훈의 어두운 눈빛이 번뜩이자 버럭버럭하며 날뛰던 이사들의 표정이 다시 시들해졌다.저쪽에서 강하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바빠요? 그럼 먼저 끊을게요.”구승훈은 짧게 대답할 뿐 끊지 않고 그대로 전화기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강하리도 대답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전화가 끊어지기도 전에 저쪽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구승훈, 북교 땅에 관해 설명해 봐!”강하리는 잠시 멈칫하며 별안간 전화를 끊으려던 손가락이 멈췄다.곧이어 그곳에서 여러 사람의 화난 고함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그래 구승훈, 그렇게 풍수 좋은 땅이 네 말 한마디에 다른 사람한테 넘어갔어. 우리 임원들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거야?”“듣기론 여자한테 줬다고 하던데? F대륙 시장의 3분의 1과 맞바꾼 그 땅을 여자한테 그냥 준 거야? 구승훈, 너 미쳤어?”“여자가 없는 것도 아닌데 그까짓 여자 하나 때문에 그렇게 해? F대륙 시장의 3분의 1이 무슨 뜻인지 네가 누구보다 잘 알 텐데!”강하리는 잇달아 들리는 질책에 휴대폰을 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구승훈이 그 땅을 얻기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렀을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 대가가 F대륙 시장의 3분의 1인 줄은 몰랐다.F대륙 시장의 3분의 1이 고작 땅 하나와 교환하는 데 사용되었다.강하리는 마음이 복잡했다.구승훈이 일부러 그 말을 들려준 건 아닌지
10시간의 비행 끝에 일행은 다음 날 드디어 Y국에 도착했다.비행기에서 막 내린 강하리는 경호팀 사이로 걸어 나오는 노진우를 보고 당황했다.“여긴 어떻게 왔어요?”노진우가 웃었다.“구 대표님께서 강하리 씨 안전이 걱정돼서 진 장관님께 저를 경호팀에 배치하라고 하셨어요.”강하리는 구승훈이 무슨 뜻인지 단번에 알아들었다.이번 여행에서는 안전과 경호에 대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국방부 요원들이 따라다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외교부에서도 특별히 경호원을 배치해 줬기 때문이었다.구승훈이 노진우를 보낸 건 주해찬과 함께 일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개자식, 강하리는 속으로 한 마디 욕설을 퍼부었지만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노진우를 다시 돌려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주해찬은 비행기에서 내려 곧장 강하리 옆으로 걸어오다가 노진우를 보고 발걸음이 살짝 멈췄다.“이분은...”노진우는 웃으며 주해찬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주해찬 씨, 전 강하리 씨 전담 경호원입니다.”주해찬이 강하리를 돌아보자 그녀는 한숨을 살짝 내쉬며 별다른 설명 없이 손에 든 짐을 노진우에게 건넸다.“가요, 여기까지 왔으니 시키는 대로 해요, 규칙 어기지 말고.”노진우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고 주해찬은 두 사람 뒤에 서서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구승훈, 되게 조심스럽네.주해찬은 입안의 쓴맛을 삼키고 걸음을 옮겨 따라갔다.대사관에서 마련해준 숙소에 체크인을 마친 강하리는 휴대폰을 꺼내 가장 아름다운 노을 사진을 골라 구승훈에게 보냈다.그런데 잠시 후 구승훈에게서 전화가 왔다.“방금 도착했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노진우 씨가 다 얘기했죠?”구승훈은 망설이는 기색 없이 답했다.“난 정말 네 안전이 걱정돼서 그래.”강하리도 알면서 굳이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앞으로 한동안 아주 바쁠 것 같아요.”구승훈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알아, 네 일은 늘 바쁘잖아.”강하리가 피식 웃었다.“일 끝나면 며칠
심문석은 살짝 당황했고 강하리의 말에 협상팀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문연진은 시선을 내린 채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역시 뭣도 모르는 건 어딜 가나 똑같다.이런 협상에서 자기가 끼어들 생각을 한다니.하지만 심문석이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문연진이 인상을 확 찌푸리며 강하리를 돌아보니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체 없이 유물의 유래와 역사적 가치에 대해 이야기했다.그 말을 듣던 문연진의 눈에 조롱 섞인 기색이 번쩍였다.이 상황에서 강하리가 대체 얼마나 그럴듯한 제안을 할까 싶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일 줄이야.이 유물들은 국내 시장에 유통된 적이 없다. 오기 전에 할아버지께도 구체적으로 물어봤지만 안타깝게도 할아버지조차도 아는 게 거의 없었다.할아버지도, 심문석도 잘 모르는 걸 강하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나.그렇게 생각한 문연진은 강하리가 망신당하는 걸 지켜보려 했다.심문석을 뒤따르던 협상 팀원들도 조금은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강하리 씨, 모르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하지만 강하리는 조금도 멈출 생각이 없었다.협상 팀원들은 불안해졌고 강하리의 말을 끊으려는 순간 심문석이 그들을 말렸다.그는 강하리가 헛소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오기 전에 미리 공부했던 그는 이 청동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봤고 심지어 이 청동기가 국내 암시장 거래에 나온 적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해외로 불법 반출된 대부분의 문화재가 그렇듯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해 환수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그런데 강하리가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듣고 문득 증거가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해졌다.아니나 다를까, 말을 마친 강하리가 휴대폰에서 사진을 찾아냈는데 바로 오늘 회수할 청동 그릇을 찍은 것이었다.사진을 찍은 장소는 한눈에 봐도 국내 유물 거래 시장 중 하나였다.현장에서 문연진은 말할 것도 없고 심문석마저 깜짝 놀랐다.그는 사진을 건네받고 반나절 동안 살펴보다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얘야, 이 사진은 어
협상이 끝난 후 외교부와 박물관은 공동으로 협상 과정을 온라인에 공개했고 협상 회의에서 큰 성과를 거둔 강하리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얼마 전 화제를 모았던 ‘미녀 통역사'가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인기 검색어에 ‘미녀 통역사’와 함께 ‘강국의 기세’, ‘웰컴 백홈’ 등 말들이 나타났는데 전부 강하리와 관련된 것들이었다.또한 이번 문화 유물 회수 과정은 국내 문화 유물 회수 협상의 전형적인 사례가 되었다.강하리는 그날 밤 백아영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고 전화기 너머 백아영은 한바탕 그녀를 칭찬하기 바빴다.문연진은 높아지는 강하리의 인기에 점점 더 화가 났다.애초에 그녀의 눈에 강하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놀잇감에 불과했고 자신은 집안도, 재능도 뛰어나고 구동근이라는 든든한 조력자도 있으니 강하리가 구승훈의 곁에 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구승훈이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그녀는 구씨 가문에 들어가는 동시에 구승훈의 마음도 얻고 싶었다.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지 보여줄 기회를 찾으며 강하리보다 뒤처지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하지만 거듭해서 강하리의 들러리가 되자 문연진은 속에서 열불이 나지 않는 게 이상했다.특히 심씨 가문 어르신까지 강하리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자 문연진은 더더욱 마음이 불편했다.문씨 가문은 B시에서나 대단했지 심씨 가문에 비하면 여전히 한 발 뒤처져 있었다.그동안 문씨 가문에선 여러 번 그녀를 백아영의 밑으로 보내려 했지만 백아영은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그러나 지금 백아영이 강하리를 대하는 태도가 남달랐고 심문석마저 강하리를 편애하는 것이 분명했다.자신이 열망하던 모든 건 강하리가 전부 차지한 것 같았다.문연진은 이를 악물고 구동근에게 전화를 걸었다.“할아버지, 전에 승훈 오빠가 Y국에 온다고 한 거 사실인가요? 정확히 몇 시예요? 데리러 가고 싶어요.”그날 저녁 구승훈이 탄 비행기가 Y국 공항에 착륙했고 그는 밖으로 나가기 전 하늘
강하리는 고개를 들어 구승훈의 시선을 마주했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에는 반가움이 숨겨져 있었다.“어떻게 연락도 없이 여기 왔어요?”구승훈의 목소리는 원망으로 가득했다.“내 전화 받을 시간은 있고?”강하리는 괜히 마음에 찔렸다.“그동안 너무 바빴어요.”며칠 동안 줄곧 낮에는 협상, 밤에는 회의가 있었고 회의가 끝나면 깊은 밤이 되곤 했다.그래서 한동안 구승훈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은 적이 손에 꼽혔다.“그렇게 바쁜데 주해찬이랑 웃고 떠들고, 밥도 먹었어? 선배 앞에서는 안 바쁜가 봐.”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리며 그를 바라봤다.“일 얘기 했어요.”구승훈은 그래도 심통이 났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제 막 만난 터라 주해찬 때문에 괜히 기분 잡치고 싶지 않았다.구승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간절한 마음을 담아 그녀의 입술을 깨물었다.“나 안 보고 싶었어?”확인받고 싶은 어린아이 같았다.강하리의 심장이 세차게 뛰며 가볍게 답했다.“보고 싶었어요.”멈칫하던 구승훈은 거칠게 몰아쉬는 호흡마저 열기로 가득했다.그는 그녀의 허리를 감싼 채 고개를 숙여 그녀를 집어삼킬 듯 거칠게 입술을 탐했다.강하리는 거친 입맞춤에 그의 목을 감싼 채 겨우 버티고 있었다.구승훈은 그 틈을 타 그녀의 치마 지퍼를 열어젖혔고 큰 손이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을 파고들어 탐욕스럽게 움켜잡았다.남자의 크고 거친 손이 그녀의 연약한 피부를 조금씩 문지르자 그 손길에 강하리도 몸을 떨었다.“구승훈 씨...”강하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승훈이 다시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아래를 타고 내려가던 남자의 큰 손이 그녀의 납작한 배에 머문 채 더 움직이지 않았다. 유혹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다.강하리가 벗어나려 했지만 남자는 더욱 단단히 옭아맬 뿐이었다.갑자기 따뜻한 물이 쏟아지며 구승훈은 거추장스러운 그녀의 옷을 찢어버렸다.조금 전 거칠게 문질렀던 부위에 손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고 구승훈은 부드럽게 웃으며
“휴대폰 무음으로 해놨어요.” 요즘 회의가 많아서 강하리의 휴대폰은 며칠 동안 거의 무음으로 설정되어 있었다.주해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건너편 바에 있으니까 준비하고 와.”강하리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닫았다.문을 닫는 순간 그녀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반면 문 앞에 서 있던 주해찬은 눈가에 담긴 씁쓸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강하리는 너무 급하게 나온 탓인지 목에 새겨진 키스 마크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그는 피식 웃고는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방으로 돌아온 강하리는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구승훈 씨, 당신... 앗!”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구승훈이 다시 그녀를 끌어당겼고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남자의 힘에 의해 세면대 쪽으로 밀려났다.“나 회식 있어요, 그만해요.”하지만 구승훈은 못 들은 척 그녀의 옷을 들치며 등에 키스를 퍼부었다.“일단 한번하고, 응?”강하리의 몸이 경직되는 동시에 구승훈이 안으로 파고들었다.거친 숨소리와 살결이 부딪히는 소리가 욕실에 울려 퍼졌다.강하리는 입가에 흘러나오는 소리를 억누르며 다리마저 달달 떨렸다.하지만 구승훈은 굶주린 사나운 짐승처럼 거세게 몰아붙이더니 갑자기 그녀의 목 뒤쪽을 세게 물었다.“또 주해찬이야, 짜증 나는 자식!”강하리는 그의 멈추지 않는 움직임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낮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외칠 뿐이었다.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가자 밖에는 이미 환한 불빛이 켜졌다.강하리는 물에서 금방 건져 올린 듯 온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구승훈은 그런 그녀를 안고 씻는 것을 도왔다.강하리는 문득 그가 이번에 콘돔을 쓰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물어보고 싶었지만 입가에 차오른 말을 도로 삼켰다.원래도 임신이 쉽지 않은 데다 지난번 일을 겪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그녀 같은 몸이면 콘돔을 쓰든 안 쓰든 어차피 똑같았다.순간 그녀의 가슴에 상실감이 밀려왔다.그녀는 일어나서 수건을 꺼내 몸을 감쌌다.“가서 얼굴 좀 비춰야겠어요.”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냥 식사한 것뿐이야. 임 선생에게 분명히 말했어. 앞으로는 다시는 너를 귀찮게 하지 않을 거야.”강하리는 레드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지 않고 손가락으로 잔을 살짝 쓸며 말했다.“그게 당신이 말하는 임희주 씨를 처리하는 방법인가?”구승훈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자기야, 좀 더 시간을 줘.”“얼마나 더? 구승훈, 이제 3일 뒤면 우리 결혼식이야.”“3일 안에 처리할게. 응?”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강하리는 눈을 내리깔고 더 이상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구승훈과 노민우 회사 인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마치 임희주 일을 잊은 것처럼.하지만 구승훈은 강하리가 속으로는 불편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저녁 식사는 그렇게 즐겁지 않았다.집으로 돌아온 구승훈은 바로 서재로 들어갔고 강하리는 연정이를 안고 침실로 돌아갔다.구승훈이 서재에서 나왔을 때, 강하리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구승훈은 한숨을 쉬며 준봉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임희주 씨를 다른 데로 보내. 앞으로 보경시에 나타나지 못하게 해.]잠시 후, 준봉의 답장이 왔다.[대표님, 임 선생의 진료소가 폐쇄되었습니다. 불법 진료 행위로 신고가 들어왔고 의사 면허증도 압수당했다고 합니다.]구승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침대에 누워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러고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그의 강 대표님은 정말이지 말한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었다.[됐어. 신경 쓰지 마.]그가 임희주에게 직접 손을 대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여초연이 눈치채고 임희주를 포기할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강하리가 직접 나서면 매우 자연스러워 보인다.구승훈은 휴대전화를 넣고 샤워를 한 후, 침대에 누워 강하리를 끌어안았다.다음 날, 강하리는 다시 바쁜 하루를 보냈다.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아 처리해야 할 일들을 모두 마무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특히 노민우 회사 인수 건이 중요했는데 강하리는 처음으로 인수합병을 진
강하리가 심씨 가문에 도착하자 심문석은 응접실에 앉아 오랜 벗과 바둑을 두고 계셨다.심문석은 강하리를 보자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하리야, 이리 와 봐.”“할아버지!”강하리는 웃으며 심문석 옆으로 다가갔다.“장씨,봤지? 이 아이가 내 증손녀야. 어때? 예쁘지?”심문석은 강하리를 옆자리에 앉히며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마주 앉은 장씨 할아버지는 강하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정말 예쁘구나. 구씨 가문 그 녀석은 어쩜 이렇게 복이 많아?”그 말에 심문석은 매우 만족스러워했다.강하리가 두 할아버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심준호가 밖에서 들어왔다.“서재로 와.”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심준호를 따라 서재로 들어갔다.“혹시 임 선생 문제에요?”심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문제가 좀 있긴 한데, 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너 혹시 임희주와 구승훈의 관계를 의심하는 거야?”강하리는 웃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삼촌. 전 그냥 구승훈이 걱정돼서.”심준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조사한 자료를 강하리에게 건넸다.강하리는 천천히 자료를 넘기다가 뒷장의 사진을 보고는 손이 멈추었다.사진은 총 세 장이었다.첫 번째 사진은 임희주와 임명우가 함께 서서 무언가 이야기하는 모습이었는데 분명히 두 사람은 아는 사이 같았다.두 번째 사진은 임희주와 구승훈이 식당에 앉아 있는 매우 친밀해 보이는 모습이었는데, 사진 촬영 날짜는 오늘이었다.세 번째 사진은 임희주가 구승훈의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었다.사진을 쥔 강하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심준호는 강하리의 표정을 보며 말했다.“임희주의 출신은 좀 의심스럽지만 구승훈의 심리 상담사니까 두 사람이 만나는 건 어쩔 수 없어. 두 장의 사진 때문에 화내지 말고 구승훈에게 직접 물어봐. 구승훈이 합리적인 설명을 해 줄 거야.”심준호가 자신 때문에 강하리와 구승훈와 싸우는 것을 걱정했다.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삼촌,
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안예서는 그녀를 따라갔고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강하리는 화장실에 들어가 손을 씻었다. 원래 하얀 피부였던 그녀의 손은 쉴 새 없이 씻겨졌다.안예서가 그녀를 위로하려는 순간, 강하리는 갑자기 수도꼭지를 잠그더니 표정이 평소처럼 돌아왔다.“괜찮아. 회의가 곧 시작될 것 같으니 준비하도록 해.”하지만 안예서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정말 괜찮아요? 구 대표님께 전화를 드려볼까요?”강하리의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괜찮아.”안예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강하리는 세면대 앞에 서서 천천히 휴지로 손을 닦으며 복잡한 생각을 정리했다.만약 임명우의 말이 사실이라면 구승훈은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구승훈의 신중함을 생각해 볼 때, 아무런 조사 없이 그 약을 사용했을 리가 없었다.하지만 만약 조사를 했다면, 왜 그 약을 계속 사용했을까?강하리는 침묵 속에 휴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삼촌, 사람 한 명 조사 좀 해줘요.”이후 회의에서 강하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고 침착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임명우는 평소에 자주 보이던 웃는 표정을 거두고 진지하게 회의에 임했다.협상은 3시간 가까이 이어졌다.회의가 끝나고 강하리는 무표정하게 짐을 챙겼다.임명우는 깔끔한 옷차림으로 회사 파트너들을 배웅한 후, 강하리 앞으로 다가왔다.“같이 식사하면서 출장 이야기 좀 나눌까요?”강하리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출장은 일주일 전에 통보해야죠, 그러니 이번에는 못 가요.”임명우는 씁쓸하게 웃으며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말했다.“알았어요. 출장은 못 가도 그 일은 강 대표님께서 신중하게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전화하세요.”강하리는 발걸음을 잠시 멈췄다가 바로 다시 걸어갔다.회사로 돌아온 강하리는 바로 임원들을 소집하여 노민우의 회사 인수 계획을 세
문을 잠그는 소리가 조용한 회의실에 울려 퍼지며 묘한 긴장감을 자아냈다.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문 앞에 서 있는 임명우를 바라보고는 잠겨진 문손잡이에 시선을 고정했다.“임 대표님, 무슨 뜻이세요?”임명우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강 대표님, 오해하지 마세요. 그냥 오늘 회의 내용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싶어서요.”“그렇다고 문을 잠글 필요까지 있나요?”강하리는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문을 잠그는 행동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그녀는 임명우와의 협력을 계속 거부해 왔는데 임명우의 의도적인 접근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그런 의도적인 접근은 마치 예전의 정양철처럼 대개 특정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는 임명우에게 항상 거부감을 느껴왔다.하지만 지금까지 임명우는 특별히 이상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오늘처럼 문을 잠근 것은 처음이었다.강하리는 임명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임명우는 웃으며 어딘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저는 강 대표님의 신뢰를 받을 자격이 없나요?”강하리는 차가운 눈빛으로 임명우를 바라보았다.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주고받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임 대표님,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어요. 우리 모두의 시간은 소중하니까요. 그렇죠?”임명우는 또 한 번 그녀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강하리의 표정이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것을 보며 그는 어색한 미소를 거두었다.“제가 꼼수를 써서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요? 강 대표님, 왜 저를 그렇게 싫어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싫어하는 데는 이유가 필요 없어요. 임 대표님, 본론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강하리는 말을 마치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하지만 그녀가 문에 도착하기 전에, 임명우가 그녀를 가로막았다.“임명우 씨!”강하리는 임명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대체 무슨 짓이에요?”“강하리 씨, 저와 거래를 하죠. 강하리 씨가 저를 다정하게 대해주면 제가 그 심리 상담사를 구승훈 옆에서 떼어내
강하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노민우 씨는 해야 할 일 해요. 손연지와 얘기 좀 할게요.”노민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연지를 돌아보았다.“어제 진짜 아무것도 안 했어.”손연지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럼 내 몸에 있는 이 흔적들은 내가 스스로 만든 거야?”“그냥 키스만 했어.”“아까는 아무것도 안 했다더니, 이제는 키스만 했다고?”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자 강하리는 재빨리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병원 정원에서.강하리는 손연지의 화난 모습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아직도 웃겨? 너 누구 편이야?”강하리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화내지 마. 노민우는 사실 괜찮은 사람이야.”손연지가 말하려던 순간, 강하리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내 말 좀 들어봐.”강하리는 어제 노민우가 자신에게 했던 이야기를 손연지에게 대략적으로 전했다.손연지는 강하리를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미쳤어?”강하리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번졌다.“미쳤는지는 그 사람이 더 잘 알겠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미쳐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렇지?”강하리는 손연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하지만 노민우 씨가 여씨 가문과 완전히 관계를 끊기 전까지는 더 깊은 관계는 맺지 마.”손연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참 후, 그녀가 강하리를 돌아보며 물었다.“왜 병원에 왔어? 혹시 아픈 거야?”“일이 좀 있어서.”손연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두 사람은 정원에 앉아 있다가 각자의 일을 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강하리는 약병을 약리 연구소에 가져다주고 인성 테크로 향했다.안예서는 이미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강하리를 보자마자 달려왔다.“대표님, 방금 회의 일정이 추가되었어요. 오후에 출장을 가야 할 수도 있다고 하네요.”강하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안예서를 돌아보았다.“언제 통보받았어?”“방금이요.”강하리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안예서는 불안해졌다.안예서는 강하리가 원래 임명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지금 이렇게 온 것도 계약 때
구승훈은 자연스럽게 강하리 앞으로 다가갔다.그녀 손에 들린 작은 병을 빼앗아 들고 우유 컵을 그녀에게 건넸다.“노민준이 준 약이야. 손 찔리겠다.”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시선을 구승훈의 얼굴에 고정한 채 그의 표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하지만 구승훈이 너무 잘 감추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그의 얼굴에서 어떠한 이상한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괜찮다고 하지 않았어?”“응, 괜찮아.”구승훈은 대답하며 그녀의 팔을 끌어당겨 의자에 앉혔다.“노민준이 신경 써서 꾸준히 복용해야 한다고 했어. 걱정하지 마, 괜찮아. 나중에 연성시에 돌아가서 심리 치료도 함께 받으면 금방 나을 거야.”강하리는 구승훈이 다시 쓰레기통에 버린 앰플 병을 내려다보다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같이 야근할까?”“괜찮아. 가서 쉬어.”그러고는 일어나서 프린터 옆에 있는 자료를 가져왔다.구승훈은 떠날 생각 없이 그 자리에 앉아 이메일을 확인했고 강하리도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일을 계속했다.구승훈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임희주의 계획을 노민준에게 이메일로 보냈다.서재의 고요함은 새벽 2시까지 이어졌고 강하리가 일을 계속하고 있자 구승훈은 그녀의 손에서 자료를 빼앗았다.“자.”그러고는 강제로 강하리를 끌어안고 침실로 향했다.두 사람은 밤새도록 아무 말도 없었다. 그 앰플 병에 대한 일은 잊힌 듯했다.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바빴다.구승재는 미국에서 돌아왔고 구승훈은 오늘 회사에 가서 그를 만나야 했다.“회사에 데려다줄까?”구승훈은 강하리의 허리를 잡으며 물었고 강하리는 생각할 틈도 없이 거절했다.“직접 거래처에 갈 거야.”“그럼 내가 거래처까지 데려다줄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거절했다.구승훈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집을 나섰다.강하리는 연정이와 조용히 아침 식사를 했다.연정이
강하리는 침실 문을 흘끗 보고는 구승훈을 무시했다.하지만 곧 밖에서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강하리가 ‘꺼져!’라고 말하려던 순간, 가정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사모님이 술 드셨으니, 숙취 해소에 좋은 차를 끓여 드리라고 하셨습니다.”“구승훈은 지금 옆에 있어요?”가정부는 옆에 서 있는 구승훈을 힐끗 보며 대답했다.“아니요, 대표님은 방금 준봉 씨와 함께 서재로 가셨습니다.”가정부가 말을 마치자 강하리는 바로 문을 열었다.그러자 문 앞에는 숙취 해소차를 들고 있는 구승훈과 그의 뒤에 서서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정부가 있었다.“이제 가서 쉬세요.”구승훈은 가정부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러고는 숙취 해소차를 들고 침실로 들어왔다.강하리가 말할 틈도 없이 그는 숙취 해소차를 한 모금 마시고 바로 강하리에게 입을 맞췄다.강하리는 구승훈에게 숙취 해소차를 넘겨받았지만 삼키기도 전에 구승훈은 다시 키스를 퍼부었다.강하리가 숨이 가쁠 때까지 구승훈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고 숙취 해소차는 누가 더 많이 마셨는지 알 수 없었다.“맛있어?”구승훈은 강하리의 입술을 핥으며 아쉬운 듯 물었다.강하리는 그를 밀어내며 침실 안쪽으로 걸어갔다.“나가서 자.”구승훈은 숙취 해소차를 옆에 내려놓고 강하리의 손을 잡았다.“아직 화났어? 내가 잘못했어. 임희주 씨 문제는 내가 잘 처리할게. 응?”강하리는 그를 무시하고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구승훈은 강하리를 무릎에 앉히고 따뜻한 숨결을 그녀의 목덜미에 뿌리며 부드럽게 입술을 핥았다.“그럼 내가 잘못을 만회할게.”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오늘 밤, 강 대표님을 편안하게 모실게. 어때?”강하리는 임희주의 끈질긴 집착 때문에 짜증이 났을 뿐이지 진짜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지금 이 남자의 뻔뻔한 모습을 보니 화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좀 염치가 있어야지.”“염치가 중요한 게 아니야.”구승훈은 콧방귀를 뀌며 손을 강하리의 잠옷
구승훈은 휴대전화 화면에 뜬 메시지를 보자마자 주저 없이 준봉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재로 와.”준봉은 곧 자료를 들고 서재로 왔다.“말해 봐.”준봉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보고했다.“임희주 씨의 과거는 조작된 것 같습니다. 이전에 조사했던 정보에 따르면 임희주 씨는 남쪽 작은 도시의 보육원 출신이고 여 사모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걸로 보입니다. 며칠 전에 대표님께서 여 사모님 쪽을 조사해 보라고 하셔서 관련된 사람들을 추적해 봤는데 여씨 가문의 오래된 집사가 몇 년 동안 연성시 외곽의 보육원을 후원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보육원을 조사해 보니 실제로 임희주 씨는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입양되었는데 입양한 사람이 그 집사의 고향 친구였답니다.”준봉은 말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구승훈의 표정을 살폈다.임희주의 출신을 보면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사람을 키워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만약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을 해치기 위해 이렇게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마음이 어떨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준봉은 구승훈의 표정을 긴장하며 지켜보았지만 구승훈의 표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었다.다만, 그 깊고 짙은 눈동자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대표님, 괜찮으세요?”구승훈은 눈썹을 살짝 올리며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별일 아니야.”준봉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했다.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대표님은 사모님과 아가씨가 계시잖아요. 두 분 다 잘 지내고 계시니까요.”구승훈은 대답하지 않고 잠시 후 다시 물었다.“아내가 화난 데다가 꼬맹이까지 울려버렸어. 어떻게 달래야 할까?”“네?”준봉은 잠시 억울한 표정을 짓다가 한참 만에 대답했다.“대표님, 저는 아직 솔로예요.”구승훈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나가 봐.”“그럼 임 선생은 어떻게 할까요?”구승훈의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다.“계속 감시해. 조만간 여씨 가문 사모님과 연락할 거야.”준봉은
노민우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얼굴에 가득했던 득의만만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강하리의 화난 모습을 보니 솔직히 겁이 났다.“저기, 승훈이랑 싸웠어요?”“민우 씨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말해봐요, 무슨 일이에요? 손연지는 어디 있어요?”“손연지는 호텔에 있어요.”노민우는 잠시 말을 멈췄다.강하리는 서두르지 않고 노민우를 가만히 지켜보았다.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 노민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우리 회사, 강하리 씨가 인수해 줬으면 좋겠어요.”강하리는 놀라서 노민우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노씨 가문은 의학계의 명문가였고 대대로 의사 집안이었다.이번 세대에는 병원을 노민준에게 물려주었지만 노민우 또한 의료계를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다.그는 명인병원 지분 외에도 의약품과 의료기기 사업을 하는 회사를 직접 설립했고 꾸준히 잘 운영해 왔다.그런데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가 뭘까?“무슨 뜻이에요?”노민우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솔직히 말해서, 전 어릴 때부터 엄마를 무서워했어요. 엄마는 항상 강압적이었고 제 결혼을 강요하면서 제가 거부하면 손연지에게 달려갈 거라고 협박했어요.”그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엄마 말에 따라 결혼했는데도 엄마는 손연지를 찾아가는 바람에 손연지가 많이 억울하게 됐어요. 다 제가 잘못한 탓이죠.”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무 말 없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노민우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손연지에게 보상을 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저도 노력해서 손연지에게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사실 전 승훈이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손연지에게 달려갈 수 없어요.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손연지에게 가면, 오히려 우리 둘 다 더 힘들어질 거예요. 그래서 우리 회사를 먼저 정리하고 싶어요.”강하리는 이제야 그의 의도를 이해했다.“하지만 굳이 저한테 부탁할 필요가 있을까요? 노민우 씨도 회사를 독립시킬 수 있잖아요. 아니면, 구승훈이 도와줄 수도 있고요.”노민우는 웃으며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