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이 끝난 후 외교부와 박물관은 공동으로 협상 과정을 온라인에 공개했고 협상 회의에서 큰 성과를 거둔 강하리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얼마 전 화제를 모았던 ‘미녀 통역사'가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인기 검색어에 ‘미녀 통역사’와 함께 ‘강국의 기세’, ‘웰컴 백홈’ 등 말들이 나타났는데 전부 강하리와 관련된 것들이었다.또한 이번 문화 유물 회수 과정은 국내 문화 유물 회수 협상의 전형적인 사례가 되었다.강하리는 그날 밤 백아영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고 전화기 너머 백아영은 한바탕 그녀를 칭찬하기 바빴다.문연진은 높아지는 강하리의 인기에 점점 더 화가 났다.애초에 그녀의 눈에 강하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놀잇감에 불과했고 자신은 집안도, 재능도 뛰어나고 구동근이라는 든든한 조력자도 있으니 강하리가 구승훈의 곁에 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구승훈이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그녀는 구씨 가문에 들어가는 동시에 구승훈의 마음도 얻고 싶었다.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지 보여줄 기회를 찾으며 강하리보다 뒤처지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하지만 거듭해서 강하리의 들러리가 되자 문연진은 속에서 열불이 나지 않는 게 이상했다.특히 심씨 가문 어르신까지 강하리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자 문연진은 더더욱 마음이 불편했다.문씨 가문은 B시에서나 대단했지 심씨 가문에 비하면 여전히 한 발 뒤처져 있었다.그동안 문씨 가문에선 여러 번 그녀를 백아영의 밑으로 보내려 했지만 백아영은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그러나 지금 백아영이 강하리를 대하는 태도가 남달랐고 심문석마저 강하리를 편애하는 것이 분명했다.자신이 열망하던 모든 건 강하리가 전부 차지한 것 같았다.문연진은 이를 악물고 구동근에게 전화를 걸었다.“할아버지, 전에 승훈 오빠가 Y국에 온다고 한 거 사실인가요? 정확히 몇 시예요? 데리러 가고 싶어요.”그날 저녁 구승훈이 탄 비행기가 Y국 공항에 착륙했고 그는 밖으로 나가기 전 하늘
강하리는 고개를 들어 구승훈의 시선을 마주했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에는 반가움이 숨겨져 있었다.“어떻게 연락도 없이 여기 왔어요?”구승훈의 목소리는 원망으로 가득했다.“내 전화 받을 시간은 있고?”강하리는 괜히 마음에 찔렸다.“그동안 너무 바빴어요.”며칠 동안 줄곧 낮에는 협상, 밤에는 회의가 있었고 회의가 끝나면 깊은 밤이 되곤 했다.그래서 한동안 구승훈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은 적이 손에 꼽혔다.“그렇게 바쁜데 주해찬이랑 웃고 떠들고, 밥도 먹었어? 선배 앞에서는 안 바쁜가 봐.”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리며 그를 바라봤다.“일 얘기 했어요.”구승훈은 그래도 심통이 났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제 막 만난 터라 주해찬 때문에 괜히 기분 잡치고 싶지 않았다.구승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간절한 마음을 담아 그녀의 입술을 깨물었다.“나 안 보고 싶었어?”확인받고 싶은 어린아이 같았다.강하리의 심장이 세차게 뛰며 가볍게 답했다.“보고 싶었어요.”멈칫하던 구승훈은 거칠게 몰아쉬는 호흡마저 열기로 가득했다.그는 그녀의 허리를 감싼 채 고개를 숙여 그녀를 집어삼킬 듯 거칠게 입술을 탐했다.강하리는 거친 입맞춤에 그의 목을 감싼 채 겨우 버티고 있었다.구승훈은 그 틈을 타 그녀의 치마 지퍼를 열어젖혔고 큰 손이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을 파고들어 탐욕스럽게 움켜잡았다.남자의 크고 거친 손이 그녀의 연약한 피부를 조금씩 문지르자 그 손길에 강하리도 몸을 떨었다.“구승훈 씨...”강하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승훈이 다시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아래를 타고 내려가던 남자의 큰 손이 그녀의 납작한 배에 머문 채 더 움직이지 않았다. 유혹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다.강하리가 벗어나려 했지만 남자는 더욱 단단히 옭아맬 뿐이었다.갑자기 따뜻한 물이 쏟아지며 구승훈은 거추장스러운 그녀의 옷을 찢어버렸다.조금 전 거칠게 문질렀던 부위에 손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고 구승훈은 부드럽게 웃으며
“휴대폰 무음으로 해놨어요.” 요즘 회의가 많아서 강하리의 휴대폰은 며칠 동안 거의 무음으로 설정되어 있었다.주해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건너편 바에 있으니까 준비하고 와.”강하리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닫았다.문을 닫는 순간 그녀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반면 문 앞에 서 있던 주해찬은 눈가에 담긴 씁쓸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강하리는 너무 급하게 나온 탓인지 목에 새겨진 키스 마크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그는 피식 웃고는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방으로 돌아온 강하리는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구승훈 씨, 당신... 앗!”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구승훈이 다시 그녀를 끌어당겼고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남자의 힘에 의해 세면대 쪽으로 밀려났다.“나 회식 있어요, 그만해요.”하지만 구승훈은 못 들은 척 그녀의 옷을 들치며 등에 키스를 퍼부었다.“일단 한번하고, 응?”강하리의 몸이 경직되는 동시에 구승훈이 안으로 파고들었다.거친 숨소리와 살결이 부딪히는 소리가 욕실에 울려 퍼졌다.강하리는 입가에 흘러나오는 소리를 억누르며 다리마저 달달 떨렸다.하지만 구승훈은 굶주린 사나운 짐승처럼 거세게 몰아붙이더니 갑자기 그녀의 목 뒤쪽을 세게 물었다.“또 주해찬이야, 짜증 나는 자식!”강하리는 그의 멈추지 않는 움직임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낮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외칠 뿐이었다.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가자 밖에는 이미 환한 불빛이 켜졌다.강하리는 물에서 금방 건져 올린 듯 온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구승훈은 그런 그녀를 안고 씻는 것을 도왔다.강하리는 문득 그가 이번에 콘돔을 쓰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물어보고 싶었지만 입가에 차오른 말을 도로 삼켰다.원래도 임신이 쉽지 않은 데다 지난번 일을 겪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그녀 같은 몸이면 콘돔을 쓰든 안 쓰든 어차피 똑같았다.순간 그녀의 가슴에 상실감이 밀려왔다.그녀는 일어나서 수건을 꺼내 몸을 감쌌다.“가서 얼굴 좀 비춰야겠어요.”
구승훈의 목울대가 살짝 움찔하다가 잠깐의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공항에서 봤어.”말을 마친 그가 강하리의 몸을 돌리며 설명했다.“하리야, 나랑 걔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어. 내 말 믿어줘. 난 오늘 널 보러 온 거고 걔가 어떻게 공항에 나타났는지 몰라.”강하리는 꽉 막힌 마음을 억누르며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물었다.“그 여자가 당신 Y국에 온 건 어떻게 알아요?”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아직 몰라. 알아낼 테니까 화내지 마, 응?”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을 이어갔다.“걔가 오늘 나를 안았는데 내가 바로 밀어냈어. 하리야, 못 믿겠으면 공항 카메라 돌려봐도 돼.”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구승훈을 바라봤다.그를 믿어야 한다는 건 알지만 마음속에 무언가 꽉 막힌 듯 답답했다.송유라는 그녀의 마음속에 풀리지 않는 매듭이었다.그 죽일 놈의 첫사랑이 자신과 구승훈 사이를 떼어놓는 장애물이었다.그걸 뛰어넘으려 애썼고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매번 넘어섰다고 생각할 때마다 장애물은 다시 나타났다.“사람 보내서 걔 감시하고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할게, 응?”강하리는 그를 힐끗 보았다.“정말 그 여자를 통제할 수 있어요? 그 여자가 죽으면 상관 안 해도 되잖아요.”구승훈은 강하리의 허리를 붙잡았다.“나 그렇게 못 믿어?”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전화벨은 계속 울렸다. 외교부 사람들이 계속 그녀를 재촉했다.그녀는 감정을 추스르고 뒤돌아 밖으로 향했다.구승훈은 다소 침울한 표정으로 그녀를 뒤따랐다.두 사람이 술집에 도착했을 때 술집 안은 시끌벅적했다.강하리가 들어오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소리를 질렀다.“강하리! 늦었으니까 벌주 세잔 마셔야지!”“맞아, 후래자 삼배.”강하리는 웃으며 그쪽으로 다가갔고 주해찬이 강하리를 보고 물었다.“뭐 마실래? 내가 주문할게. 저 사람들은 무시해. 마실 필요 없어.” 강하리가 말하기도 전에 주위에서 흥을 돋우기 시작했다.“주해찬 씨 행동 너무 뻔히 보이는
“나 오늘 당직이야. 너 기분 안 좋을까 봐 그러지. 계속 전화를 안 받길래 걱정했어.” “정말 괜찮아.” 강하리는 손연지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눴고 손연지는 그녀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한 후 전화를 끊었다. 그녀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구승훈이 옆으로 끌어당겼다. “그냥 친구?” 강하리가 힐끗 돌아보았다.“아니면 뭔데요?”구승훈은 너무 화가 나서 그녀의 허리를 확 낚아챘다. “하리야, 아직 내 물건이 네 몸 안에 있잖아!” 강하리의 몸이 움찔하더니 홱 고개를 들어 뻔뻔한 개자식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구승훈은 웃기만 했다.“넌 친구랑 그런 짓을 해?”강하리가 피식 웃었다.“전에는 우리 직장 동료였어요. 동료끼리는 해도 되는데 친구는 안 돼요?” 구승훈은 순식간에 말문이 막혔다.쓴웃음을 짓던 그는 마음속으로 이 모든 것을 자초한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과거에 저질렀던 죗값을 이런 식으로 돌려받고 있다.그는 강하리가 여전히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송유라의 문제를 쉽게 흘려보내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침대에 올라갔다.강하리는 그를 무시한 채 돌아와서는 롱아일랜드 아이스티 한 잔을 주문해 혼자서 마셨다. 문연진은 옆에 앉아 두 사람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두 사람은 분명 싸웠다. 설마 송유라 때문인가?쓰레기 송유라가 아직 쓸모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강하리와 주해찬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 미소가 번뜩였다.“강하리 씨, 저랑 건배해요. 이번 일 많이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곧바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며칠 전에 주해찬 씨랑 두 분 방해해서 죄송해요.” 그 말에 주위 사람들이 모두 조용해졌다. 예비 남자 친구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지 않나?하지만 문연진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물었다.“왜 그래요, 왜 다들 절 보세요?”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강하리는 롱아일랜드 아이스티를 손에 들고 홀짝일 뿐 문연진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문연진도 흥미를 잃은
그 질문에 사람들은 굳어버렸다.문연진이 대체 왜 이러는 걸까.당사자의 예비 남자 친구가 자리에 있는데도 계속해서 주해찬을 끌어들였다.주해찬은 피식 웃었다.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답할 수 있는 뻔한 질문이었다.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이미 강하리와 구승훈이 이 정도 사이로 발전했기에 그가 개입할 필요가 없었다.그는 술잔을 들고 연달아 세 번 마셨고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당황했다.주해찬은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다들 재밌게 노세요. 저는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말을 마친 그가 뒤돌아 밖으로 나가자 미간을 찌푸린 채 주해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강하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치밀어 올랐다.구승훈이 옆에서 비웃었다.“속상해?”강하리는 시선을 내린 채 술을 들이켰다.속상한 게 아니라 화가 날 뿐이다.오늘 밤 문연진의 도발은 너무 뻔했다.그녀는 이 관계에 아무 상관도 없는 주해찬을 굳이 끌어들였다.강하리는 구승훈을 무시하고 문연진을 돌아보며 말했다.“문연진 씨,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가서 스피치 연습이나 하세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허튼짓하지 마시고. 나중에 미션 나갈 때 창피하지 않게요!”말을 마친 강하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하자 구승훈도 서둘러 뒤를 따랐다.문연진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강하리, 지금 내 실력이 부족하다고 비꼬는 거야?자기가 무슨 자격으로?그저 업무상 능력이 조금 뛰어날 뿐이잖아.주변 사람들은 다소 복잡한 표정으로 문연진을 바라봤다.그 사람 중에는 문연진과 함께 일했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전에 봤던 그녀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그런데 오늘 밤엔 어딘가 미쳐있는 사람 같았다.그러니 강하리처럼 성격 좋은 사람도 그녀 때문에 저렇게 화를 내지.밖으로 나온 강하리는 구승훈의 목을 끌어당겨 그대로 그의 턱을 콱 물었다.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온 힘을 다해.구승훈은 고통에 낮게 신음하며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품에 안았다
오히려 그녀의 시선이 여전히 주해찬에게 머물러 있었고 그가 씁쓸하게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강하리는 그의 품에 기대어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마 취한 것 같았다.잔뜩 취해서 어떻게든 이 남자를 곁에 두고 싶었다.송유라고, 구씨 가문이고 다 신경 쓰지 않은 채.하지만 아직 술에 덜 취했는지 이성이 남아있어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구승훈은 그녀를 안고 호텔로 돌아왔다.방으로 들어서기 바쁘게 그녀를 문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하리야, 난 네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너도 나만 봐, 알았지?”강하리가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구승훈 씨, 난 항상 당신을 바라봤어요, 항상. 가 버린 것도, 잊은 것도, 날 버린 것도 다 당신이잖아요...”구승훈은 그녀의 눈물을 보며 가슴이 저릿했다.“난 널 버린 적 없어. 하리야, 너만 날 원하면 언제든 난 여기 있어.”강하리는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날 버리고, 우리 아이도 버렸잖아요.”구승훈은 가슴이 찢어질 듯한 아픔을 느끼며 그녀를 안고 침대로 향했다.“원해. 전에는 내가 못난 놈이었어. 지금은 원해, 하리야, 우리 아이 갖자, 응?”강하리의 머릿속이 느리게 굴러갔다. 또 가질 수 있을까?구승훈이 그녀를 덮치는 순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말했다.“구승훈 씨, 콘돔 써요. 나 유산하는 거 싫어요, 아픈 거 싫다고요.”그녀의 입술을 깨무는 구승훈의 마음에 씁쓸함이 밀려왔다.“겁내지 마, 다신 안 그럴 거야. 하리야, 가능하다면 우리 아이 갖자, 알았지?”강하리가 또 임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그는 줄곧 아이를 원하지 않았고 갖고 싶다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원했다. 아이가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면 적어도 그녀가 다시는 떠나지 않을 테니까.구승훈은 언젠가 자신이 아이를 이용해 여자를 잡고 싶다는 생각을 할 줄은 몰랐다.하지만 지금은 정말 그녀를 임
구승훈의 눈동자에 싸늘한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감정이 극에 달했지만 차마 터뜨리지 못하는 모습이었다.“언제 안 거야?”“두 시간쯤 저쪽에서 전화가 와서 사라졌다고 하더라고, 연락도 안 돼.”두 시간 전이면 그와 강하리는 막 술집을 나섰을 때였다.구승훈의 눈빛은 깊고 차가웠다.아무런 예고도 없이 공항에 나타나더니 이번엔 사라졌다.송유라 혼자 할 수 있는 일인가?그는 고개를 숙이고 담배를 한 모금 들이켰다.“영감탱이 부하들 반 죽여서 돌려보내!”“그럼 송유라는...”구승훈은 침묵하며 창밖의 야경을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일단 찾아보고 안 되면 경찰 불러.”구승재는 대답과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송유라, 며칠 얌전하더니 또 시작이다.찾는 건 둘째 치고 또 무슨 짓을 할까 봐 걱정이다.형이 이제 막 강하리와 만났는데 송유라가 또 방해할까 봐.구승재는 서둘러 전화를 끊고 사람들에게 지시했다.씻고 나온 강하리는 아직 머리가 어지러웠다.그녀가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안쪽에서 걸어 나오자 창가에 서 있는 구승훈이 보였다.주위에 우중충한 기운이 잔뜩 드리워진 그는 한눈에 봐도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심지어 그는 그녀가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무슨 일 있어요?” 강하리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정신을 차린 구승훈의 얼굴에 서늘함이 사라졌다.그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능글맞게 되물었다. “왜 그렇게 빨리 씻었어, 나 기다리지도 않고.”강하리는 불순한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수건을 가져와 머리를 문지르며 말을 이어갔다.“구승훈 씨, 가서 약 좀 사 와요.”걸음을 멈칫한 구승훈은 그녀가 말하는 약이 어떤 약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그녀는 임신을 원치 않았다.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었다.전에 그가 원하지 않을 땐 그토록 갈망하더니, 이제 그가 원하니 그녀가 싫단다.그는 강하리에게 다가가 안아주었다.“아이 좋다고 하지 않았어?”강하리의 손가락이 살짝 안으로 말렸지만 곧 아무 일도 없었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
강하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후에야 구승훈은 다시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하지만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익살스러운 미소가 남아 있지 않았다.“여진 쪽은 어떻게 됐어?”그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준봉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출시일이 확정됐습니다. 에비뉴보다 하루 빠릅니다.”구승훈은 손에 불경스러운 듯 염주를 굴리며 냉소를 지었다.“승재와 천아름 쪽에 협조 잘하라고 전해.”“네.”준봉이 재빨리 대답했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대표님, 사실 이 일은 사모님께도 일부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구승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조용히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준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구승훈은 항상 그랬다. 강하리를 도와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다.‘정말 답답해.’여진 주얼리는 지난 몇 년간 에비뉴와 계속해서 대립해 왔다.겉보기에는 구씨 가문이나 강하리와 아무 관련 없는 작은 회사처럼 보이지만 이런 작은 회사들이 대형 브랜드의 모조품을 내놓는 건 흔한 일이었다.하지만 여진 주얼리는 단순한 모조품에 만족하지 않았다.작년에 해외에서 에비뉴 주얼리의 표절 사건이 터졌을 때 그 배후에는 여진 주얼리가 있었다.그 사건으로 여진 주얼리는 큰 이득을 봤고 에비뉴는 큰 타격을 입었다.그 후 여진 주얼리는 더욱 탐욕스러워졌다.사람이란 달콤한 맛을 보면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마련이다.여진 주얼리는 에비뉴에게 항상 위험 요소였다.구승훈은 에비뉴를 강하리에게 넘긴 이상 그녀에게 어떤 위험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대표님, 상대방의 배후 세력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대놓고 에비뉴를 도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구승훈은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뭐? 지금 내가 잃을 게 뭐가 있다고?”준봉은 놀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한참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강하리가 때린 따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고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강렬했다.그러자 구승훈의 뺨에는 순식간에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천아름은 그대로 얼어붙었지만 이내 강하리를 향해 천천히 엄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잘했어.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은 맞아야 해. 제대로 한 대쯤은 맞아 봐야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알지. 이제라도 자기 잘못을 좀 깨달아야 해.’천아름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며 통쾌해했다.한편 구승훈은 손등으로 뺨을 한 번 스치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강하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그의 눈엔 고통이 어리어 있었다.“몸이 안 좋은 거야? 아니면...” 그는 목울대를 두 번 삼킨 뒤에야 겨우 말을 이었다. “아니면... 나를 봐서... 토한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지만 더는 이 남자 앞에서 눈물 흘리고 싶지 않아 애써 참고 있었다.“다신 제 앞에 나타나지 마요.” 강하리의 차디찬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런데 구승훈의 눈에는 오히려 그 말이 묘하게 따뜻하게 비쳤다.지금 이 순간 그는 마음속에... 이상하게도 만족감이 들었다.‘적어도 하리 마음속에 아직 내가 있긴 한 거잖아. 미움이든 혐오든... 감정이 있는 한 아직 끝은 아니겠지.’그는 수트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레 강하리의 입가를 닦아주었고 긴 손가락이 그녀의 입가를 스치고는 가볍게 떠났다.구승훈은 고개를 숙인 채 쓸쓸하게 웃었다.“불쾌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하리야, 미안하지만 다신 안 나타날 수는 없을 거 같아. 난 그건 못 해.”그 말과 함께 그는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내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천천히 화장실을 나갔다.순간, 화장실 안은 적막 속에 잠겼다.강하리는 다시금 구역질했고 천아름은 재빨리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밖에서 구승훈은 그녀의 헛구역질 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얼마 후, 급히 달려온 준봉의 목소리에 그가 정신을 차렸다.“대표님, 무슨 일 있었습니까?”
두 채의 30층이 넘는 오피스 빌딩 사이에는 다섯 층마다 하나씩 연결하는 공중 회랑이 있었다.회랑 위에는 각종 카페와 음식점이 입점해 있었고 그 주변에는 다양한 꽃들이 화사하게 장식되어 있었다.강하리는 사실 정안 타워에 자주 오지는 않았다.심지어 구승훈과 결혼을 앞두고 있던 그 시절에도 여기에는 발걸음을 거의 하지 않았다.솔직히 말해서 그녀보다 임희주가 더 자주 왔을지도 몰랐다.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그녀는 입꼬리를 삐죽이며 말했다.“구승훈이야 뭐 인간쓰레기지만 그래도 통 큰 건 인정해야겠네. 이렇게 큰 회사를 그냥 덜컥 넘겨주다니. 에비뉴 주얼리잖아? 보석 업계에선 꽤 이름 있는 브랜드인데. 이렇게 보면... 그 인간은 그렇게 나쁘진 않았던 것 같기도 하네. 그렇지?”강하리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과 한 달 남짓한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구승훈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서 너무도 멀어진 것만 같았다.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오늘은 꼭 광고 모델 확정해야 해. 원래 계약하려던 사람이 며칠 전에 갑자기 마음을 바꿨어. 이유 알아봤어?”그러자 천아름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이유야 뻔하지. 뺏긴 거지 뭐. 거의 계약 직전까지 갔는데... 갑자기 말을 바꾸더라.”“누가 뺏어갔는데?”강하리가 조용히 물었다.천아름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며칠 만에 마주친 구승훈이었다. 깔끔한 수트를 입고 있었지만 여전히 전해지는 그 특유의 냉기가 몸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강하리는 구승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했다.구승훈 역시 이 순간에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던지 평소 차가운 눈빛은 놀랍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그의 시선은 곧장 강하리에게 꽂혀 그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녀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얼굴빛은 생각보다 좋았다.홍조가 돌아 있었고 얼굴도 약간 도톰해진 듯했다.그는 기뻐해
항구에서 보경시로 돌아오자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구승훈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누군가의 사무실로 들어섰다.“어떻게 됐어?”그 말에 노진우는 고개도 들지 않고 리모컨부터 눌렀다. 그러자 벽에 걸려있던 TV가 켜지더니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화면 속에는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여초천이 이성을 잃은 채 날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의 가구를 부수며 바닥에서 뒹굴기 시작하더니 그럼에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는 벽에 머리를 쾅쾅 들이박았다.여초연의 이마는 이미 피범벅이 된 상태였다.그 모습을 본 구승훈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됐어. 그만해.”노진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이렇게 끝내시겠다고요? 대표님께서 발작 났을 땐 이것보다 훨씬 심했어요. 제가 만든 약은 효과가 얼마 못 가거든요. 급하게 만든 거니까요. 하지만 대표님은 온 하루 동안 고통스러워하셨잖아요.”“게다가 대표님은 이 약 때문에 하리 씨 곁을 떠나야 했잖아요. 하리 씨가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다 이 약 때문인데 이제 와서 마음이 약해졌다고요?”구승훈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담배를 꺼내 거기에 불을 붙였다.“마음이 약해진 게 아니야. 저런 꼴을 보고 있으니까 그냥... 그때 내 모습이 떠올라서...”“생각할 때마다 너무 후회돼. 하리를 혼자 예식장에 두고 떠났던 거 말이야. 내가 어떻게 잡았는데 또다시 놓쳐버리다니...”“그런데 또 여초연이 저러고 있는 걸 보니까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 내가 하리를 밀어내지 않았더라면 하리가 내 저런 모습을 봐야 했을 수도 있잖아.”노진우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실 제 책임도 좀 있어요. 제 대학 동기인 데다가 능력도 괜찮아 보여서 추천했었는데 배경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으니까요.”구승훈은 씁쓸하게 웃었다.“임희주가 아니었어도 이렇게 되었을 거야. 여초연이 날 가만 내버려뒀을 리 없으니까.”노진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하리 씨 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