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오늘 당직이야. 너 기분 안 좋을까 봐 그러지. 계속 전화를 안 받길래 걱정했어.” “정말 괜찮아.” 강하리는 손연지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눴고 손연지는 그녀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한 후 전화를 끊었다. 그녀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구승훈이 옆으로 끌어당겼다. “그냥 친구?” 강하리가 힐끗 돌아보았다.“아니면 뭔데요?”구승훈은 너무 화가 나서 그녀의 허리를 확 낚아챘다. “하리야, 아직 내 물건이 네 몸 안에 있잖아!” 강하리의 몸이 움찔하더니 홱 고개를 들어 뻔뻔한 개자식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구승훈은 웃기만 했다.“넌 친구랑 그런 짓을 해?”강하리가 피식 웃었다.“전에는 우리 직장 동료였어요. 동료끼리는 해도 되는데 친구는 안 돼요?” 구승훈은 순식간에 말문이 막혔다.쓴웃음을 짓던 그는 마음속으로 이 모든 것을 자초한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과거에 저질렀던 죗값을 이런 식으로 돌려받고 있다.그는 강하리가 여전히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송유라의 문제를 쉽게 흘려보내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침대에 올라갔다.강하리는 그를 무시한 채 돌아와서는 롱아일랜드 아이스티 한 잔을 주문해 혼자서 마셨다. 문연진은 옆에 앉아 두 사람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두 사람은 분명 싸웠다. 설마 송유라 때문인가?쓰레기 송유라가 아직 쓸모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강하리와 주해찬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 미소가 번뜩였다.“강하리 씨, 저랑 건배해요. 이번 일 많이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곧바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며칠 전에 주해찬 씨랑 두 분 방해해서 죄송해요.” 그 말에 주위 사람들이 모두 조용해졌다. 예비 남자 친구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지 않나?하지만 문연진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물었다.“왜 그래요, 왜 다들 절 보세요?”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강하리는 롱아일랜드 아이스티를 손에 들고 홀짝일 뿐 문연진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문연진도 흥미를 잃은
그 질문에 사람들은 굳어버렸다.문연진이 대체 왜 이러는 걸까.당사자의 예비 남자 친구가 자리에 있는데도 계속해서 주해찬을 끌어들였다.주해찬은 피식 웃었다.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답할 수 있는 뻔한 질문이었다.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이미 강하리와 구승훈이 이 정도 사이로 발전했기에 그가 개입할 필요가 없었다.그는 술잔을 들고 연달아 세 번 마셨고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당황했다.주해찬은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다들 재밌게 노세요. 저는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말을 마친 그가 뒤돌아 밖으로 나가자 미간을 찌푸린 채 주해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강하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치밀어 올랐다.구승훈이 옆에서 비웃었다.“속상해?”강하리는 시선을 내린 채 술을 들이켰다.속상한 게 아니라 화가 날 뿐이다.오늘 밤 문연진의 도발은 너무 뻔했다.그녀는 이 관계에 아무 상관도 없는 주해찬을 굳이 끌어들였다.강하리는 구승훈을 무시하고 문연진을 돌아보며 말했다.“문연진 씨,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가서 스피치 연습이나 하세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허튼짓하지 마시고. 나중에 미션 나갈 때 창피하지 않게요!”말을 마친 강하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하자 구승훈도 서둘러 뒤를 따랐다.문연진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강하리, 지금 내 실력이 부족하다고 비꼬는 거야?자기가 무슨 자격으로?그저 업무상 능력이 조금 뛰어날 뿐이잖아.주변 사람들은 다소 복잡한 표정으로 문연진을 바라봤다.그 사람 중에는 문연진과 함께 일했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전에 봤던 그녀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그런데 오늘 밤엔 어딘가 미쳐있는 사람 같았다.그러니 강하리처럼 성격 좋은 사람도 그녀 때문에 저렇게 화를 내지.밖으로 나온 강하리는 구승훈의 목을 끌어당겨 그대로 그의 턱을 콱 물었다.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온 힘을 다해.구승훈은 고통에 낮게 신음하며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품에 안았다
오히려 그녀의 시선이 여전히 주해찬에게 머물러 있었고 그가 씁쓸하게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강하리는 그의 품에 기대어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마 취한 것 같았다.잔뜩 취해서 어떻게든 이 남자를 곁에 두고 싶었다.송유라고, 구씨 가문이고 다 신경 쓰지 않은 채.하지만 아직 술에 덜 취했는지 이성이 남아있어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구승훈은 그녀를 안고 호텔로 돌아왔다.방으로 들어서기 바쁘게 그녀를 문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하리야, 난 네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너도 나만 봐, 알았지?”강하리가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구승훈 씨, 난 항상 당신을 바라봤어요, 항상. 가 버린 것도, 잊은 것도, 날 버린 것도 다 당신이잖아요...”구승훈은 그녀의 눈물을 보며 가슴이 저릿했다.“난 널 버린 적 없어. 하리야, 너만 날 원하면 언제든 난 여기 있어.”강하리는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날 버리고, 우리 아이도 버렸잖아요.”구승훈은 가슴이 찢어질 듯한 아픔을 느끼며 그녀를 안고 침대로 향했다.“원해. 전에는 내가 못난 놈이었어. 지금은 원해, 하리야, 우리 아이 갖자, 응?”강하리의 머릿속이 느리게 굴러갔다. 또 가질 수 있을까?구승훈이 그녀를 덮치는 순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말했다.“구승훈 씨, 콘돔 써요. 나 유산하는 거 싫어요, 아픈 거 싫다고요.”그녀의 입술을 깨무는 구승훈의 마음에 씁쓸함이 밀려왔다.“겁내지 마, 다신 안 그럴 거야. 하리야, 가능하다면 우리 아이 갖자, 알았지?”강하리가 또 임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그는 줄곧 아이를 원하지 않았고 갖고 싶다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원했다. 아이가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면 적어도 그녀가 다시는 떠나지 않을 테니까.구승훈은 언젠가 자신이 아이를 이용해 여자를 잡고 싶다는 생각을 할 줄은 몰랐다.하지만 지금은 정말 그녀를 임
구승훈의 눈동자에 싸늘한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감정이 극에 달했지만 차마 터뜨리지 못하는 모습이었다.“언제 안 거야?”“두 시간쯤 저쪽에서 전화가 와서 사라졌다고 하더라고, 연락도 안 돼.”두 시간 전이면 그와 강하리는 막 술집을 나섰을 때였다.구승훈의 눈빛은 깊고 차가웠다.아무런 예고도 없이 공항에 나타나더니 이번엔 사라졌다.송유라 혼자 할 수 있는 일인가?그는 고개를 숙이고 담배를 한 모금 들이켰다.“영감탱이 부하들 반 죽여서 돌려보내!”“그럼 송유라는...”구승훈은 침묵하며 창밖의 야경을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일단 찾아보고 안 되면 경찰 불러.”구승재는 대답과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송유라, 며칠 얌전하더니 또 시작이다.찾는 건 둘째 치고 또 무슨 짓을 할까 봐 걱정이다.형이 이제 막 강하리와 만났는데 송유라가 또 방해할까 봐.구승재는 서둘러 전화를 끊고 사람들에게 지시했다.씻고 나온 강하리는 아직 머리가 어지러웠다.그녀가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안쪽에서 걸어 나오자 창가에 서 있는 구승훈이 보였다.주위에 우중충한 기운이 잔뜩 드리워진 그는 한눈에 봐도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심지어 그는 그녀가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무슨 일 있어요?” 강하리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정신을 차린 구승훈의 얼굴에 서늘함이 사라졌다.그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능글맞게 되물었다. “왜 그렇게 빨리 씻었어, 나 기다리지도 않고.”강하리는 불순한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수건을 가져와 머리를 문지르며 말을 이어갔다.“구승훈 씨, 가서 약 좀 사 와요.”걸음을 멈칫한 구승훈은 그녀가 말하는 약이 어떤 약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그녀는 임신을 원치 않았다.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었다.전에 그가 원하지 않을 땐 그토록 갈망하더니, 이제 그가 원하니 그녀가 싫단다.그는 강하리에게 다가가 안아주었다.“아이 좋다고 하지 않았어?”강하리의 손가락이 살짝 안으로 말렸지만 곧 아무 일도 없었
강하리가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휴대폰을 내려놓는데 바로 그때 구승재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웃더니 곧바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전화를 받고 그녀가 말하기도 전에 구승재의 목소리가 들렸다.“형, 송유라 찾았어. 요양원 꼭대기 옥상에 있어. 지금 건물에서 뛰어내리려고 난리야.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없고 형만 찾고 있어. 이미 아래층에 사람들 보내서 조치했고 위에도 올려보냈는데...”강하리는 구승재의 말을 듣고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말을 꺼냈다.“구승재 씨, 저 강하리에요. 그쪽 형 샤워 중인데, 제가 휴대폰 넘겨줄게요.”당황한 구승재가 멈칫하더니 저도 모르게 해명했다.“하리 씨, 오해하지 마세요...”하지만 강하리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나한테 설명할 필요도 없고, 설명해야 할 사람도 당신이 아니잖아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구승훈의 완벽하고 섹시한 몸매가 눈에 들어왔다.강하리는 그를 2초간 바라보다가 휴대전화를 건넸다.“구승재 씨 전화 왔어요. 그쪽 유라가 뛰어내린대요.”구승훈은 샤워기를 끄고 물이 흘러내리는 머리를 뒤로 넘긴 뒤 전화기를 건네받아 뚝 끊었다.강하리가 그에게 휴대폰을 건네고 문밖으로 나가려고 돌아서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뒤로 끌어당겼다.“화났어?”강하리는 마음이 씁쓸했다.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가슴 속 둔탁한 통증을 참으며 말했다.“구승훈 씨, 송유라한테 갈 기회를 줄게요. 하지만 이대로 가면 다시는 나 찾아오지 마요. 난 다른 여자랑 남자 공유할 생각 없으니까.”말을 마친 그녀는 구승훈의 손을 뿌리치고 화장실에서 나왔다.밖으로 나오자 눈가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분명 마음속으로 그를 믿어야 한다고 되뇌었지만 그래도 괴로운 건 어쩔 수 없었다.화장실에서 구승훈은 이미 끊긴 휴대전화를 차가운 얼굴로 바라보았다.그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긴 뒤 타월을 꺼내 무심하게
구승재의 눈가가 싸늘해지며 소름 돋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사람은?”구승재의 목소리도 살짝 가라앉았다.“밑에 구명 매트를 깔고 가운데 가림막까지 있어서 충격을 덜었어. 의사 말로는 죽지는 않아도 일어서기는 힘들 것 같대.”구승훈은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고 한참을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사람을 보내서 지켜보고 주변 사람들 한번 살펴봐.” 말을 마친 뒤 전화를 끊고 뒤돌아보니 강하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 안 죽었어요?” 구승훈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조금 망설여졌다. 아마 지금 무슨 말을 하든 그녀의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다. 강하리는 그를 등지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명이 참 기네.”구승훈은 저도 모르게 낮은 웃음을 내뱉으며 다가가 그녀를 안았다.“이러면서 질투 안 한다고?”강하리는 그를 등지고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말했다.“구승훈 씨, 언젠가 당신이 송유라를 선택한다면 난 미련 없이 돌아설 거예요.” 구승훈은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걱정하지 마, 그런 기회는 주지 않을 테니까.”강하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구승훈은 송유라에게 가지 않았지만 송유라의 문제는 언제나 그의 책임이었다. 말로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여전히 신경 쓰고 있었다.강하리는 속이 상했지만 더 이상 뭐라 하지 않고 얌전히 구승훈의 품에 기대어 있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잠은 오지 않았다.이때 다른 방에서 문연진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문연진은 저쪽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듣고 아쉬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쓰레기는 쓰레기야. 건물에서 뛰어내려도 사람 하나 부르지 못하네. 그렇게 애썼는데 다 소용없게 됐어.”그녀는 몰래 이를 갈았다. 보아하니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 ... 유물 회수 작업과 사업가 구출 작전이 모두 완료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유물 인계식이었다. 인계식은 상대방이 지정한 연회장에서 진행되었다. 강하리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주해찬이 강하리 옆으로 걸어왔다. “어젯밤에
강하리는 곧바로 전화를 끊고 밖으로 나갔다.다만 문 앞에 도착해서야 화장실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잠시 당황한 그녀는 문을 몇 번이나 잡아당겼지만 문은 움직이지 않았다.순간 그녀의 심장이 철렁하며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려고 할 때 옆에서 비명이 들렸다.이윽고 한 여성이 갑자기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입에 거품을 물고 바닥에 쓰러졌다.화장실에 있던 몇 명은 그 광경에 모두 비명을 질렀고 강하리는 굳어버렸다.하지만 잠시 후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바닥에 반쯤 무릎을 꿇고 재빠른 동작으로 여성의 옷깃을 풀고 입 안에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았는지 확인한 후, 상대의 한쪽 팔을 들어 올린 다음 반대쪽 팔을 가슴에 대고 동시에 반대쪽 다리를 위로 말아 몸을 옆으로 눕게 했다.그러면서 옆에서 덩달아 놀라 허둥지둥 하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119 좀 불러주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화장실 문을 아직 열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경련하는 여자가 다른 물건을 만지지 못하도록 바닥에 눕힌 채 휴대전화를 꺼냈다.무의식적으로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구승훈이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망설이다가 주해찬에게 전화를 걸었다.“선배, 여자 화장실 문이 밖에서 잠겼는데 여기 응급처치가 필요한 사람이 있어요.”주해찬은 재빨리 대답했고 화장실에 있던 몇 명의 여자들은 모두 놀란 얼굴로 강하리를 바라봤다.“의사세요?”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하지만 그녀는 응급처치를 배운 적이 있었다.대학 시절 국제적십자사 콘퍼런스를 다니면서 준비를 위해 여러 가지 응급 상황에 대비한 응급처치를 구체적으로 배운 적이 있었는데 그게 지금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다.곧 밖에서 화장실 문이 열렸고 주해찬이 구급대원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강하리는 바닥에 쓰러진 여성을 구급대원에게 넘긴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주해찬은 다소 긴장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괜찮아?”강하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네, 아까 저 문은 어떻게 된 거예
강하리는 조금 불안했다.“구승훈 씨, 나 인터뷰 있어요.”구승훈의 시선이 무겁게 내려앉았다.“왜 나한테 전화 안 했어?”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전화하려고 했는데 당신은 여기 못 들어오니까요.”강하리가 전화하려 했다는 말을 듣고 구승훈은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어디 다치진 않았어?”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하지만 구승훈은 불안한 듯 강하리의 온몸을 살핀 뒤 그녀를 내보냈다.나가보니 자신과 인터뷰하기로 한 기자가 민연진을 인터뷰하고 있었고 순간 강하리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인터뷰가 진행 중이었고 국내 방송과 연결돼 있었기 때문에 민연진이 시작했으면 그녀가 인터뷰를 끝내야 했다.인터뷰가 끝나고 나서야 기자는 다소 미안한 듯 강하리에게 다가갔다.“강하리 씨, 조금 전 계속 오지 않으시고 생방송 쪽에도 시간이 촉박해서 민연진 씨를 인터뷰하게 됐어요.”강하리가 민연진을 바라보자 민연진은 싱긋 웃었다.“강하리 씨, 괜찮죠? 기자님들도 바쁘신 분들이라 계속 그쪽 기다릴 수는 없으니까요.”“화장실 일 그쪽 짓이에요?”민연진은 순진한 표정을 지었다. “강하리 씨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강하리의 입가가 굳어졌다. 민연진이라고 의심은 했지만 증거는 없었다.민연진은 옆에서 웃으며 말했다.“강하리 씨 지금 본인이 기회 놓친 걸 내 탓이라고 하는 거 아니죠?”민연진의 얼굴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다.하지만 말이 끝나기 바쁘게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구승훈이 어두운 눈동자로 바라보는 것을 알아차렸다.구승훈은 비웃으며 민연진에게 다가갔다.“민연진, 내가 너 건드리게 만들지 마.”민연진은 순간 발바닥부터 한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미소를 지었다.“승훈 오빠,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구승훈은 다른 말 없이 다가와 강하리를 밖으로 끌어냈다.밖으로 나온 뒤에야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화났어?”강하리는 피식 웃었다. 화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민연진의 거듭되는 도발과 수작, 그
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기만 했다.“내가 진짜 주해찬을 건드렸다면 어떻게 할래?”강하리가 그를 마주 보았다.“살인은 대가를 치러야 해. 구승훈 당신은 나한테 특별할 게 없어.”구승훈의 마음속이 온통 씁쓸함으로 물들었다.그는 쓴웃음을 내뱉었지만 그래도 말을 이어갔다.“아직 몰라. 의사가 그럴 수도 있다고 했어.”하지만 강하리의 마음은 다소 무겁게 가라앉았다.그때 정서원이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도 의사가 그렇게 말했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선배 좀 보고 올게.”구승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결국 막지 않았다.그녀를 보내주지 않으면 그녀가 계속 불안해할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구승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따라 나갔다.중환자실 밖에서 여전히 울고 있는 석미란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강하리의 몸이 굳어졌다.그녀는 손가락에 힘을 주고 저쪽으로 걸어갔다.다만 아직 중환자실 앞으로 가기도 전에 걸음이 뚝 멈췄다.정양철과 정주현이 거기 있을 줄이야.그녀가 정양철을 힐끗 쳐다보자 정양철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강하리는 문득 정서원이 납치되었을 때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는 게 떠오르며 손가락을 말아쥐었다.정서원에게 일이 생겼을 때 정양철이 병원에 나타났다.그녀가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는지 확인하러 온 듯이.구승훈은 강하리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정양철을 힐끗 쳐다보더니 큰 손으로 강하리의 뒤 허리를 살며시 그러잡았다.강하리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거두었다.정주현은 강하리를 보자마자 서둘러 이쪽으로 다가왔다.“강하리 씨, 좀 어때요?”강하리가 고개를 저었다.“난 괜찮아요.”말을 마친 그녀가 중환자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두꺼운 유리 벽 너머로 드디어 주해찬이 보였다.항상 온화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는 현재 침대에 누워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몸에 여러 개의 튜브를 삽입하고 누워 있었다.강하리의 마음이 아팠다.밀려오는 죄책감이 그녀를 익사시킬 것만 같았
강하리의 머릿속이 하얘졌다.“뭐라고요?”석미란은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해찬이가 식물인간이 됐다고, 이제 만족해?”강하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손끝까지 떨리고 있었다.“가볼래요.”그녀는 이불을 걷어 올리고 밖으로 나가려고 일어났지만 구승훈이 그녀를 붙잡았다.“지금 가도 소용없어. 중환자실에 있어서 못 만나.”그때 석미란이 갑자기 강하리를 붙잡았다.“망할 년,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해찬이를 보러 가! 해찬이가 정말로 못 깨어나면 내가 네 목숨을 가져갈 거야!”석미란이 말하며 강하리의 목을 조르려고 달려들자 구승훈이 그녀의 손을 잡고 내동댕이쳤다.“여사님, 말 가려서 하세요. 대체 누가 누구 때문에 힘들다는 겁니까? 지금 전부 하리 탓으로 돌리는데 만약 주해찬 때문에 하리가 피해를 본 거면 저도 하리 복수를 위해 중환자실로 가서 주해찬을 죽여도 됩니까?”석미란은 눈이 빨개진 채 구승훈을 노려보았다.주해찬이 깨어나지 못할 위험에 처해있는데 죽여버리겠다고?“구승훈, 이 살인자 새끼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을 것 같아? 너랑 강하리, 너네 둘 다 살인자야! 내가 죗값 치르게 해줄 테니까 기다려. 망할 네년은 해찬이 목숨값 내놔!”석미란의 울부짖는 소리가 병동 전체에 울려 퍼졌고 준봉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여사님, 방금 경찰에서 그 차가 구 대표님 번호판을 덧씌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대표님은 누명을 쓴 겁니다.”석미란은 여전히 증오에 가득 찬 눈빛으로 구승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구승훈이 진짜 아들을 죽인 범인이라는 듯이.“경찰을 매수하면 그만인 줄 알아? 구승훈, 내가 죗값을 치르게 할 거야!”강하리는 준봉의 말을 듣고 순간 몸이 굳어졌다.구승훈은 출입구를 지키고 있는 준봉을 바라보았다.“여사님 나가시라고 해.”준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석미란을 막기 위해 앞으로 달려갔다.“여사님, 이만 나가 주세요.”석미란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주해찬의 아버지에게 제지당했다.주해찬을 닮은 외모에 겉과 속이 모두 반듯한
주해찬의 표정이 확 바뀌며 핸들을 꺾었지만 그래도 피할 수 없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강하리를 보호했고 강하리의 시선은 다가오는 차에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구승훈의 차다.차 번호판도 똑같았다.구승훈이 B시에 올 때마다 몰던 차였다.순식간에 강하리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곧 눈앞이 핑글 돌았다....강하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구승훈이 보였다.“좀 어때?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강하리는 멍한 표정으로 옆에 앉은 남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구승훈, 당신이야?”구승훈의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고 의심을 받은 그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하리야, 너 정말 나라고 의심하는 거야?”입술을 달싹이며 그를 바라보는 강하리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의심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차는 분명 구승훈의 것이었다.하지만 구승훈이 아니라고 말할 때 오히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서늘한 구승훈의 시선을 피하며 나지막이 물었다.“선배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네가 신경 쓰는 건 주해찬밖에 없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날 구해준 사람이야.”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구승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내가 널 구해준 적은 없어? 하리야, 너 정말 사람 마음 아프게 한다.”강하리는 그의 손에서 손을 빼냈다.지금은 그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주해찬이 그녀의 몸을 감쌌기에 그는 꽤 심하게 다쳤을 거다.처음부터 주해찬에겐 미안한 것투성이였다.오랜 시간 동안 그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면서도 그에게 해줄 대답이 없었다.게다가 구승훈의 차로 교통사고까지 났으니 마음속에는 죄책감이 커져만 갔다.“선배는 어떻게 됐어?”여전히 똑같은 말에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주해찬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목숨은 건졌지만 그가 깨어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지금 강하리의 태도로 볼 때, 주해찬이 자신을 구하려다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지 정말 알 수 없
주해찬의 표정이 잠시 번뜩이다가 미소를 지으며 정양철에게로 향했다.“아저씨, 오랜만이네요.”정양철의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가 이내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해찬아, 여긴 무슨 일이야?”주해찬이 미소를 지었다.“친구 데려다주고 나오는데 여기서 아저씨랑 만났네요.”정양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그럼 가서 일 봐. 난 아직 할 일이 남아서.”“알았어요.”주해찬은 그 말을 하고 돌아서서 문을 나섰다.정양철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전화기를 꽉 쥐었다.한편 주해찬은 안에서 나오기 바쁘게 훅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멍한 표정으로 길가에 서 있었다.방금 정양철이 한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강하리나 구승훈과 무슨 일이 있는 걸까?손을 댔다고 했는데, 무슨 짓을 한 걸까.정주현에게 선을 긋던 강아리의 모습과 연관 짓자 주해찬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그는 다소 창백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강하리가 샤워하러 가려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선배?”하지만 강하리가 전화를 받을 때 주해찬은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적어도 제대로 알아보고 강하리에게 알려줘야지 무턱대고 말하는 건 무책임한 행동이었다.“아니야, 그냥 내일 나랑 같이 팔찌 가지러 가자고.”“선배, 나 혼자 갈 수 있어요.” 강하리가 여전히 거절하려는데 주해찬이 말을 막았다.“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오늘 밤엔 일찍 쉬어.”주해찬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다음 날 이른 아침, 준봉은 구승훈의 전화를 받고 강하리에게 아침을 가져다주었다.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 순간, 강하리 방 앞에 두 사람이 수상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그를 보자마자 뒤돌아 복도 쪽으로 달려갔고 준봉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그들을 쫓아갔다.일직 강하리가 묵고 있는 호텔 아래층에 도착한 주해찬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어젯밤 정양철의 그 말 때문에 거의 밤을 새
준봉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대표님께서 마실 것 가져다드리래요.”말을 마친 준봉은 강하리에게 밀크티 한 잔을 건넸고 강하리는 눈앞에 놓인 밀크티를 보고 화를 내며 다시 한번 문을 닫았다.주해찬은 방에 앉아서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안 가면 조금 있다가 또 올걸.”주해찬은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오늘 밤 모임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죄송해요, 선배.”구승훈이 이러면 주해찬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난처했다.주해찬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문득 어젯밤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던 모습이 떠올라 결국 포기했다.준봉은 강하리의 방에서 나오는 주해찬을 바라보며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았다면 다음에 문을 두드리러 갈 때 또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주해찬이 나오며 준봉을 보고 웃었다.“구 대표님한테 그럴 필요 없다고 전해요. 하리가 원하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고 하리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절대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요.”준봉은 주해찬을 바라보기만 했다.“안녕히 가세요, 주해찬 씨.”주해찬은 강하리를 힐끗 쳐다보며 작별 인사를 속삭인 뒤 곧장 돌아섰다.주해찬이 떠난 뒤에야 준봉은 다시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차는 경찰서를 향해 빠르게 달렸고 통화를 마친 그는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구승재를 바라보았다.“목란정원 쪽 상황은 어때요?”“우리 쪽 사람들이 들어갔는데 안에 연정이가 없었대. 그리고 사람들이 들어갈 때 꼭 큰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순조롭게 들어갔대.”시선을 내려 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이 차갑게 웃었다.“역시.”구승재가 얼굴을 찡그렸다.“역시 뭐?”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빛만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어젯밤에 그녀는 일부러 그를 그곳으로 유인한 거다.연정이 사건은 여초연이 한 짓이다.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뒤틀렸다.하지만 잠시 후 그는
정주현은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강하리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본인이 말하지 않으니 더 물어볼 수도 없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강하리 씨 데려다줬어. 웬일로 아들이 보고 싶어서 그래?”연미숙이 잠시 멈칫했다.“이 자식, 누가 보면 내가 평소에 너한테 관심 없는 줄 알겠다.”정주현은 연미숙 앞에서 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그래, 관심 많은 거 알겠으니까 무슨 일인데 그래?”연미숙은 잠시 침묵했다.“강하리한테 같이 밥 먹자고 해.”차라리 말하지 않으면 좋았을걸. 그 말을 꺼내니 정주현은 더 우울해졌다.“엄마, 강하리 씨 바빠.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친구들이나 만나지 강하리는 왜?”연미숙이 웃었다.“우리 아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여자를 내가 좀 만나면 안 돼?”정주현이 입을 삐죽거렸다.“영감탱이가 엄마처럼 정신 차렸으면 강하리가 며느리 됐을 텐데.”연미숙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루 종일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빨리 돌아와.”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후, 그녀의 눈에는 악의에 찬 눈빛만이 번쩍였다.강하리는 정주현을 배웅하고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주해찬은 그녀의 뒤에 서서 물었다. “일부러 주현 씨랑 거리를 두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정신을 차린 강하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선배, 난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일 봐요.”주해찬은 그녀가 말하지 않으려는 것을 보며 다소 무력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만약 이 순간 그녀의 곁에 있던 사람이 구승훈이었다면 그녀는 바로 말하지 않았을까?아니면 구승훈은 굳이 묻지 않아도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고 있었을까?질투가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분명 그가 구승훈보다 먼저 강하리를 좋아했는데.“하리야, 가능하면 나도 네가 기댈 곳이 되어주고 싶어.”강하리의 표정은 굳어졌고 말투에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다.“선배, 정말 고맙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구승훈이 제일 잘 안다.정말 여초연이 연정이를 데려갔다면 그렇게 쉽게 꼬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테고 초조했던 그는 계속해서 그녀가 먼저 빈틈을 보이길 기다릴 수가 없었다.그래서 소란을 일으킨 뒤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할 생각이었다.그녀의 수단으로 봤을 때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는 걸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오늘 대놓고 이곳으로 왔다는 건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유인한 걸까?그렇다면 연정이에게 일어난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지지 않나?어쨌든 구승훈은 연정이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연정이가 정말 그녀의 손에 있고 막다른 길에 이른 그녀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그 시각 목란정원에서 여초연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쪽의 깊은 밤과 달리 저쪽은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다음 날 주해찬과 함께 B시로 갔다.비행기에서 막 내린 두 사람은 입국 게이트에서 정주현이 신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강하리 씨, 드디어 왔네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주해찬을 흘깃 쳐다보았다.주해찬은 무기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었어. 계속 물어보니까 시간을 알려줄 수밖에.”정주현은 곧바로 불만을 터뜨렸다. “강하리 씨, B시로 오면 알려준다면서 이러는 건 아니죠!”강하리는 힘없이 웃었다.“가요.”그러던 중 정주현은 강하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걸 다시 한번 언급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정주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하리 씨, 그래도 우리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이러면 대양그룹에 불만이 있는 것 같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정 회장님이 절 찾아오라고 시켰어요?”정주현은 부인하지 않았다.“영감탱이한테 불만 있는 건 아니죠? 지난번에 구정우 도와줘서 그래요?”강하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주현은 그
구승훈의 주변에 우중충한 공기가 감돌았고 차가운 시선은 올곧게 주해찬에게 향했다.가까이 다가온 주해찬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구승훈은 조금도 피할 생각 없이 그대로 얻어맞은 뒤 이윽고 주해찬의 손목에 주먹을 내리쳤다.그 손이 조금 전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 구승훈은 그의 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달려들었다.주해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구승훈, 하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아? 병원에서 그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아? 네가 뭔데 계속해서 걔한테 상처를 줘, 네가 뭐라고 걔한테 그런 식으로 강요해!”강하리가 병원에서 지냈던 걸 언급하자 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당연히 그는 그녀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있었다.매일 의사가 진정제를 놓아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심한 우울증이었다.노민준이 그날 했던 말을 그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이러면 언제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위험이 있어. 이젠 살아갈 의욕을 완전히 잃었어.”구승훈의 몸이 경직되었지만 꿋꿋하게 받아쳤다.“주해찬 당신이 뭔데 나랑 하리 사이에 끼어들어?”주해찬은 입가에 무심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아무리 그냥 선배라도 걔가 너한테 괴롭힘당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정말 그냥 선배가 되고 싶은 거야? 주해찬, 네 개수작을 모를 것 같아?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거잖아.”잠시 멈칫하던 주해찬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내가 아무리 이용하는 거라고 해도 억지로 강요하는 너보다 나아. 구승훈, 사람 존중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다시 하리 앞에 나타나. 그전까지 넌 자격 없으니까.”주해찬은 말을 마치고 곧장 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비를 맞으며 서 있던 구승훈은 한참이 지나서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자격이 없다고...맞는 말이긴 한데 그럼 주해찬은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그는 입가를 가볍게 문지르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강하리는 주방에 약을 먹으러 가다가 비속에 서 있는 구승훈을 보게 될 줄은 몰랐
가서 팔찌를 가지고 백아영의 생일을 보낸 후 출국할 생각이었고 그 외 일은 지금 당장 처리할 기분이 아니었다.구승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손연지의 집 밑에 우산을 쓴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주해찬이었다.비 오는 밤, 가로등에 반사된 남자의 모습은 약간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무척 적극적이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렬한 불빛이 주해찬에게 비추자 뒤를 돌아본 그가 구승훈의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강하리를 발견했다.구승훈은 보지 못한 듯 강하리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검은 우산이 머리 위로 드리워지며 주해찬의 낮은 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걱정돼서 보러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난 괜찮아요. 걱정시켜서 미안해요.”그때 주해찬이 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하리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구 대표님.”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가벼운 웃음을 내뱉으며 주해찬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주해찬 씨가 뭐라고 저한테 감사 인사를 하는 거죠?”주해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하리의 선배로서요.”그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집에 가서 쉬어.”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해찬이 우산을 들고 건물 쪽으로 따라나섰다.구승훈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에 서리가 낀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의 실루엣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비를 맞으며 우산 아래서 두 사람의 어깨는 단단히 맞닿은 것 같았다.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야 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했다.“선배, 나 혼자 올라가면 돼요.”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입술이 어딘가 부딪힌 것처럼 살이 갈라져 있었다.갈 때는 괜찮았는데 돌아올 땐 입술이 찢어진 채로 왔다.구승훈에 대한 강하리의 쌀쌀맞은 태도는 다 지켜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요했어?”주해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강하리는 몸이 굳어지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