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훈은 그 메시지를 보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정주현은 옆에서 구승훈을 바라보며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같은 자리에 구 대표님도 오시나?”구승훈은 그를 흘끗 쳐다봤다. “여자 친구가 이렇게 잘나가는데 정주현 씨는 내가 빠질 줄 알았나 봐?”정주현은 피식 웃었다.“여자 친구? 본인 상상 속 여자 친구?”구승훈은 그를 슬쩍 보며 말했다.“조만간 그렇게 될 텐데.”정주현의 얼굴에 머금었던 웃음이 옅어졌다.“구 대표님 자신감이 넘치시네.”구승훈은 애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아직 무대 위에 있는 여성을 바라보며 말했다.“강하리에 대해선 내가 늘 한발 빨랐던 거 정주현 씨도 잘 알지 않나?”정주현은 씁쓸한 감정이 치솟았다. 둘이 아직 정식으로 관계를 확정 지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강하리가 이미 그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마음속으로 짜증이 났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과 강하리는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았다.저 영감탱이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계동회가 끝나고 강하리는 구승훈을 따라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정양철의 눈빛이 무척 어두웠고 옆에서 정주현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후회하세요? 후회하는 거면 내가 지금 쫓아가고요. 강하리는 아직 구승훈 마음 안 받아줬거든요.”그러자 정양철은 그를 노려봤다. “괜히 소란 피우지 마!” 구승훈과 강하리는 행사장을 나와 곧장 시청으로 향했다.“사실 첩자가 누군지 이미 알 것 같아요.”구승훈의 눈빛이 번뜩였다.“그래도 증거는 있어야지.” 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시청에 도착하니 저쪽에는 이미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다.구승훈을 보자마자 그 남자는 이번 입찰의 모든 입찰서를 건네주었고 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수고했어요.”그리고는 강하리를 사무실로 데려갔다.입찰서를 살펴보기 전 강하리가 낮게 중얼거렸다.“입찰 전날 밤에 프로젝트팀원들에게 전화를 돌려서 입찰서를 바꾼다고 했어요. 누가 유출했는지 파악하기 쉽도록 각자 금액을 다르
강하리가 두 눈을 깜빡였다.“아직은 비밀이에요.”구승훈은 속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그동안 강하리는 자신의 일에만 집중하며 기회를 준다고 말해놓고도 그에게 할애한 시간은 극도로 적었지만 차마 그녀를 곁에 붙잡아 둘 이유가 없었다.“며칠 정도 가 있는 거야?”“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 정도요.”구승훈은 속이 상했지만 겉으로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그 기간에 외부인은 만날 수 있나?”“잘 모르겠어요.”구승훈은 우울함이 잔뜩 밀려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그럼 통화는 할 수 있겠지.”강하리는 그의 표정을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최대한 받으려고 노력해 볼게요.”구승훈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문득 자신도 예전에 그녀에게 같은 말을 했던 게 떠올라 순간 화를 낼 기운조차 사라졌다.강하리는 손에 든 입찰서를 보며 말했다.“전 사무실로 돌아가서 이번 일 처리해야 하는데, 당신은요?”사실은 나랑 같이 가지 않겠냐고 말하고 싶었다.두 사람이 제대로 함께 시간을 보낸 지 꽤 오래된 건 사실이었으니까.하지만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구승훈의 전화벨이 울렸다.그는 휴대폰을 쳐다보다가 무의식적으로 강하리를 올려다봤다.Y국에서 걸려 온 전화는 두 사람 모두에게 예민한 번호였다.강하리는 시선을 피하며 못 본 척했고 구승훈은 곧바로 전화를 끊더니 그 번호도 차단해 버렸다.그러고 나서야 이렇게 말했다.“이제 걔 전화 안 받을 테니 걱정하지 마.”강하리는 짧게 대꾸할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잠시 후 구승재의 전화가 걸려 왔고 구승훈은 전화를 받고 그저 두 번 대꾸할 뿐이었다.“나도 처리할 일이 좀 있는데 이따 밤에 공항에 데려다줄까?”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은 그녀를 회사까지 데려다준 다음 떠났고 강하리는 한참 동안 그의 차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사무실에는 이미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다.사무실에 들어가기 전, 강하리는 휴대폰 녹음기를 켰다.안으로 들어간 그녀가 입찰
다행히 노진우의 운전 실력이 현란해 급히 방향을 틀어 엇갈리게 되었다.상대도 실제로 부딪힐 생각은 없었는지 1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정차했다.이윽고 송동혁이 생채기 가득한 얼굴로 화를 내며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송동혁은 충돌할 의도는 없었고 누군가를 들이받을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그저 강하리를 만나고 싶었을 뿐이다.하지만 강하리가 지난번에 대양그룹에 한 발짝도 들어가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이곳에서 그녀의 앞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송동혁을 보자 강하리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노진우는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봤다.“강하리 씨, 괜찮아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쪽은요?”“나도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강하리, 내려와 봐. 할 말 있어.” 밖에서 송동혁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노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내가 내려가서 처리할게요.”노진우가 차에서 내리자 송동혁이 갑자기 이쪽을 향해 소리쳤다.“강하리, 그때 네 엄마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지 않아?”강하리의 얼굴은 순식간에 싸늘해졌고 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더니 결국 차 문을 열고 내려왔다.“송동혁 씨, 아는 게 뭐예요?”“둘이 얘기하지!”강하리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노진우 씨는 차에서 기다려요.”노진우는 불안했지만 차로 돌아가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어차피 이곳은 도처에 카메라도 있으니 송동혁은 무슨 짓을 하고 싶어도 할 배짱이 없을 것 같았다.“강하리 씨, 조심하세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노진우가 차에 돌아가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아는 게 뭐예요?”그러자 송동혁은 문득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그때 네 엄마를 해친 사람이 누군지 알지.”강하리는 당황했다.“우리 엄마가 누군가에게 해를 입은 거라고요?”송동혁의 얼굴에는 조롱이 가득했다.“그때 내가 네 엄마를 주웠을 때는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어. 그러다 실수로 발을 헛디뎌 산 아래로 떨어졌을 때 내가 구해줬는데 안타깝게도 깨어나서 기억을 잃었지.
“이년이 감히 날 협박해!”강하리는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역시 송동혁은 또 그녀를 속일 생각이었다.강하리는 피식 웃었다.“이게 무슨 협박이에요. 송동혁 씨, 그냥 당신이 저지른 일 아닌가요? 게다가 그쪽 S제약 회사를 어떻게 세운 건지는 본인이 그 누구보다 잘 알 텐데요!”당시 장씨 집안은 기껏해야 의약품을 파는 자영업자에 불과했고 S제약은 송동혁이 정서원에게서 가져온 보석을 발판 삼아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한 회사였다!“전 다만 우리 모녀에게 빚진 것을 갚으라고 하는 것뿐이에요!”송동혁의 얼굴이 추악하게 변했다.“내가 너희 모녀에게 빚을 졌다니 무슨 소리야? 강하리, 아무리 그래도 난 네 아빠야! 아버지와 딸 사이에 무슨 빚을 지고 말고 할 게 있어!”강하리는 문득 그의 말이 우습게 느껴졌다.“아버지? 어떻게 그런 말을 뻔뻔하게 하지, 송동혁 씨 당신이 아버지라고?”송동혁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말을 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알고 있었어?”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송동혁 씨, 당신이 우리 엄마를 만났을 때 엄마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죠? 그때 이미 장진영이랑 만나고 있으면서 엄마한테 있는 보물이 탐나서 속인 거죠?”송동혁은 순간 찡그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이미 알고 있으니까 더 숨길 것도 없겠네. 그때 내가 구해줬을 때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어. 그래도 어쨌든 내가 목숨을 살려줬으니 대가를 받아야 하지 않겠어?”강하리는 손가락이 떨릴 정도로 화가 났다.살면서 이런 터무니없는 말을 이렇게 뻔뻔하게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자신의 이기적인 욕망 때문에 정서원 인생의 반을 송두리째 날리고 자신만의 행복은 얻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견디게 만들고 강찬수 같은 나쁜 놈까지 만나게 했다.강하리는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홱 손을 들어 송동혁의 뺨을 때렸다.“송동혁, 이 따귀는 당신이 우리 엄마한테 진 빚이야. 나머지는 내가 천천히 갚아줄게!”송동혁은 따귀를 맞고 눈이 뒤집혔다.“이년이 감히 날 때려!” 송동혁이 반격을 하려
구승훈은 강하리와 헤어진 후 곧바로 로열 클럽으로 향했다.그는 차를 세워놓은 다음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저 창문을 내린 채 담배에 불을 붙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류덕구가 직원들과 함께 내부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구승현도 그중 한 명이었다.구승훈은 그를 힐끗 보고는 시선을 거두고 느긋하게 담배까지 피워댔다.구승현은 구승훈을 발견하고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너야, 네가 날 해친 거야! 구승훈, 너 두고 봐. 할아버지가 너 가만 안 둘 거야! 할아버지가 이제부터 구씨 가문은 나한테 넘겨준다고 했어, 구승훈 너 딱 기다려!”옆에 있던 직원이 이를 보고 곧바로 바닥에 눌러 그를 제압하며 그렇게 수갑이 채워졌다.그제야 문을 열고 걸어온 구승훈의 발이 구승현의 손을 짓밟았고 구승현은 곧바로 비명을 질렀다.구승현은 몸을 숙인 채 손에 쥔 담배꽁초를 그의 팔에 대고 비볐다.“구승훈! 이거 놔, 네가 뭔데 날 잡아!”구승훈은 웃으며 그의 팔을 힘껏 밟은 뒤 자리를 떴다.류덕구가 구승훈에게 다가갔다.“우리가 들어갔을 때는 이미 몇 사람이 함께 흡입 중이어서 현장을 잡았습니다만, 그 댁 어르신께서 곧 아실 테고 그러면 오래 못 붙잡고 있을 것 같습니다.”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수고하셨습니다.”류덕구는 웃으며 말했다.“수고는 무슨, 덕분에 실적이 쌓이는데요.”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인 뒤 구승재를 힐끗 돌아보았다.“팔다리를 부러뜨려서 노인네한테 보내.”구승재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럼 할아버지한테는...” 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약쟁이가 환각에 취해 자기 팔다리를 부러뜨린 걸 누구 탓을 해?”“구승훈, 웃기지 마. 나 건드리기만 해!”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구승훈이 발로 그의 팔을 밟았고, 우두둑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구승현의 얼굴은 순식간에 고통으로 하얗게 질렸다.“앞으로 그따위로 말하지 마. 승현아, 형 처음 보는 거 아니잖아?”구승훈은 느긋하게 발을 치우고 돌아서서 차에 탔다.노진우가
강하리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둘이 짜고 치는 걸 모를 줄 알고?하지만 구승훈이 그사이 살이 빠진 것은 사실이었기에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가정부를 돌아보았다.“이따가 이 사람 좋아하는 요리 보내드릴 테니 그대로 따라 해 보세요.” 가정부가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하리 씨. 사실 하리 씨가 집에 오는 게 그 어떤 요리보다 도움 돼요. 오늘 대표님 얼마나 행복해하시는지 봐요.”강하리는 말 속에 담긴 의미를 못 들은 척 젓가락을 움직이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구승훈은 많이 먹지 않고 이따금 음식을 집어주며 그녀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강하리의 그릇이 가득 차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강하리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흘겨보았다.“내가 알아서 먹을 수 있으니까 얼른 먹기나 해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난 배 안 고파.”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그에게 갈비 한 조각을 건넸고 그제야 구승훈은 젓가락을 움직여 먹기 시작했다.가정부는 옆에서 몰래 웃으며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오후에 진 장관님께 전화 드렸어. 이번에 Y국으로 가지? 거긴 조금 추우니까 두꺼운 옷이랑 생필품도 준비했어. 부족하면 거기서 사면 되고 또...”강하리는 눈앞에서 쉴 새 없이 말하는 남자를 보며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졌다.그녀는 고기 한 조각을 그의 입에 넣어주었다.“그만해요, 내가 해외로 간 적 없는 것도 아니고.”말을 마친 그녀가 계속해서 먹기 시작했고 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입안에 있는 고기를 천천히 씹어먹었다. 눈빛은 마치 그녀를 잠식할 것만 같았다.구승훈은 입에 넣은 코코넛 과육을 씹으며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의 눈빛은 그녀를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진태형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가 오늘 안에 도착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그는 정말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공항으로 가는 길에 구승훈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고 ‘어르신’이라는 세 글자가 계속 화면에 떴다.강하리는 그걸 보고 시선을 돌렸다.“바쁘면 전화부터 받
강하리는 도망치듯 차에서 뛰어내렸다.구승훈은 당황한 그녀의 뒷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 휴대폰을 들고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내 생각 꼭 해. 며칠 뒤에 시간 나면 보러 갈게.]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다시 전화벨이 울렸고 구승훈은 화면에 뜬 세 글자를 바라보다가 어두운 눈빛으로 마침내 전화를 받았다.통화가 연결되자 저쪽에서 노인의 성난 고함이 터져 나왔다.“이 개자식아! 내가 화가 나서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거냐?”구승훈은 대답 대신 담배에 불을 붙이며 몸 안의 욕망을 진정시켰다.저쪽에서 구동근은 여전히 소리치고 있었다.“그깟 여자 하나 때문에 친동생을 몇 번이고 배신해? 구승훈, 잘하는 짓이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네요. 걔가 돌아온 이후 지금까지 할아버지가 싸고도는데 제가 어떻게 건드려요.”“구승훈, 모르는 척하지 말고 당장 이리로 와!”구승훈은 대답 대신 바로 전화를 끊었고 한편에서 구동근은 피를 토할 지경으로 화가 났다.구승현은 상처투성이로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고 구씨 가문 둘째 내외도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다.어르신은 전화를 끊고 화를 내며 침대로 걸어갔다. 침대에 누워 있는 구승현을 바라보며 속으로 저주를 퍼붓지 않을 수 없었다. 쓰레기 같은 놈!구승현을 이용해 구승훈을 협박하려 했는데 그 정도 유혹도 못 견디다니.하지만 그렇다고 구승훈을 내버려둘 생각은 아니었다. 자신이 죽기 전에는 절대 그 여자를 절대 집안으로 들이지 않을 거다.강하리는 터미널에 들어선 뒤에야 구승훈이 보낸 메시지를 보았다.그녀는 휴대폰을 쥐고 잠시 망설이다가 답장을 보냈다.[알았어요.]구승훈은 휴대폰으로 돌아온 메시지를 보고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지 못하고 결국 전화를 걸었다.강하리가 B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9시가 넘은 시간이었다.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박근형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하리야, 마중 나갈 사람을 보냈어. 오늘 밤에 일이 좀 생겨서 네가 잠시 외교부로 와줘야 할 것 같다.”강하리는
강하리가 입술을 달싹였다.“알겠어요.”박근형이 이 일은 분명히 잘 처리할 수 있다고 설명했지만 강하리는 왠지 마음속으로 답답한 억울함이 밀려왔다.박근형의 말처럼 정당한 경쟁을 두려워한 적이 없지만 이런 비열한 수작은 역겨웠다.구승훈은 아마도 그녀가 비행기에서 내린 것을 알았는지 바로 전화를 걸었고 강하리는 맥없이 전화를 받았다.구승훈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녀가 지금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았다.“무슨 일이야?”강하리는 잠시 고민했지만 곧바로 이야기를 꺼냈고 말을 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 것 같았다.그녀는 오히려 구승훈을 다독이며 말했다.“괜찮아요, 정정당당하게 싸워도 난 무서울 게 없어요.”구승훈의 얼굴은 어두워졌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살짝 묻어났다.“그래, 알겠어. 우리 강 대표님 실력이야 말하지 않아도 알지.”강하리는 그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고 웃고 나니 다시 억울함이 밀려왔다.“어떻게 그런 소문을 낼 수 있죠?”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네가 지금 가진 걸 탐내는 거지. 정작 본인은 가질 수 없으니까 흠집 내려는 거고.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 가지 더 알 수 있지.”강하리가 물었다. “뭐요?”구승훈이 웃었다.“네가 뛰어나다는 거.”피식 웃던 강하리는 구승훈이 자신을 위로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웃으니 기분이 훨씬 좋아졌다.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외교부 앞에 멈췄다.“외교부 도착했어요, 먼저 끊을게요.”구승훈이 답했다.“걱정 말고 해. 잘 해결될 거야.”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래요.”구승훈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표정이 다소 어두워졌다.그는 구승재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전용기 좀 준비해 줘, B시로 가야겠어.”구승재는 순간 당황했다.“형, 내일 아침 일찍 SH그룹 이사회가 있는데 오늘 밤에 B시로 간다고?”구승훈이 짧게 답했다.“할 일만 끝나면 바로 돌아올 거야.”구승재와의 전화를 끊은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진태형에게 전화를 걸었다.진태형은 전
문을 잠그는 소리가 조용한 회의실에 울려 퍼지며 묘한 긴장감을 자아냈다.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문 앞에 서 있는 임명우를 바라보고는 잠겨진 문손잡이에 시선을 고정했다.“임 대표님, 무슨 뜻이세요?”임명우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강 대표님, 오해하지 마세요. 그냥 오늘 회의 내용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싶어서요.”“그렇다고 문을 잠글 필요까지 있나요?”강하리는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문을 잠그는 행동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그녀는 임명우와의 협력을 계속 거부해 왔는데 임명우의 의도적인 접근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그런 의도적인 접근은 마치 예전의 정양철처럼 대개 특정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는 임명우에게 항상 거부감을 느껴왔다.하지만 지금까지 임명우는 특별히 이상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오늘처럼 문을 잠근 것은 처음이었다.강하리는 임명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임명우는 웃으며 어딘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저는 강 대표님의 신뢰를 받을 자격이 없나요?”강하리는 차가운 눈빛으로 임명우를 바라보았다.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주고받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임 대표님,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어요. 우리 모두의 시간은 소중하니까요. 그렇죠?”임명우는 또 한 번 그녀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강하리의 표정이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것을 보며 그는 어색한 미소를 거두었다.“제가 꼼수를 써서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요? 강 대표님, 왜 저를 그렇게 싫어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싫어하는 데는 이유가 필요 없어요. 임 대표님, 본론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강하리는 말을 마치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하지만 그녀가 문에 도착하기 전에, 임명우가 그녀를 가로막았다.“임명우 씨!”강하리는 임명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대체 무슨 짓이에요?”“강하리 씨, 저와 거래를 하죠. 강하리 씨가 저를 다정하게 대해주면 제가 그 심리 상담사를 구승훈 옆에서 떼어내
강하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노민우 씨는 해야 할 일 해요. 손연지와 얘기 좀 할게요.”노민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연지를 돌아보았다.“어제 진짜 아무것도 안 했어.”손연지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럼 내 몸에 있는 이 흔적들은 내가 스스로 만든 거야?”“그냥 키스만 했어.”“아까는 아무것도 안 했다더니, 이제는 키스만 했다고?”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자 강하리는 재빨리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병원 정원에서.강하리는 손연지의 화난 모습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아직도 웃겨? 너 누구 편이야?”강하리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화내지 마. 노민우는 사실 괜찮은 사람이야.”손연지가 말하려던 순간, 강하리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내 말 좀 들어봐.”강하리는 어제 노민우가 자신에게 했던 이야기를 손연지에게 대략적으로 전했다.손연지는 강하리를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미쳤어?”강하리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번졌다.“미쳤는지는 그 사람이 더 잘 알겠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미쳐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렇지?”강하리는 손연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하지만 노민우 씨가 여씨 가문과 완전히 관계를 끊기 전까지는 더 깊은 관계는 맺지 마.”손연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참 후, 그녀가 강하리를 돌아보며 물었다.“왜 병원에 왔어? 혹시 아픈 거야?”“일이 좀 있어서.”손연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두 사람은 정원에 앉아 있다가 각자의 일을 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강하리는 약병을 약리 연구소에 가져다주고 인성 테크로 향했다.안예서는 이미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강하리를 보자마자 달려왔다.“대표님, 방금 회의 일정이 추가되었어요. 오후에 출장을 가야 할 수도 있다고 하네요.”강하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안예서를 돌아보았다.“언제 통보받았어?”“방금이요.”강하리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안예서는 불안해졌다.안예서는 강하리가 원래 임명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지금 이렇게 온 것도 계약 때
구승훈은 자연스럽게 강하리 앞으로 다가갔다.그녀 손에 들린 작은 병을 빼앗아 들고 우유 컵을 그녀에게 건넸다.“노민준이 준 약이야. 손 찔리겠다.”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시선을 구승훈의 얼굴에 고정한 채 그의 표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하지만 구승훈이 너무 잘 감추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그의 얼굴에서 어떠한 이상한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괜찮다고 하지 않았어?”“응, 괜찮아.”구승훈은 대답하며 그녀의 팔을 끌어당겨 의자에 앉혔다.“노민준이 신경 써서 꾸준히 복용해야 한다고 했어. 걱정하지 마, 괜찮아. 나중에 연성시에 돌아가서 심리 치료도 함께 받으면 금방 나을 거야.”강하리는 구승훈이 다시 쓰레기통에 버린 앰플 병을 내려다보다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같이 야근할까?”“괜찮아. 가서 쉬어.”그러고는 일어나서 프린터 옆에 있는 자료를 가져왔다.구승훈은 떠날 생각 없이 그 자리에 앉아 이메일을 확인했고 강하리도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일을 계속했다.구승훈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임희주의 계획을 노민준에게 이메일로 보냈다.서재의 고요함은 새벽 2시까지 이어졌고 강하리가 일을 계속하고 있자 구승훈은 그녀의 손에서 자료를 빼앗았다.“자.”그러고는 강제로 강하리를 끌어안고 침실로 향했다.두 사람은 밤새도록 아무 말도 없었다. 그 앰플 병에 대한 일은 잊힌 듯했다.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바빴다.구승재는 미국에서 돌아왔고 구승훈은 오늘 회사에 가서 그를 만나야 했다.“회사에 데려다줄까?”구승훈은 강하리의 허리를 잡으며 물었고 강하리는 생각할 틈도 없이 거절했다.“직접 거래처에 갈 거야.”“그럼 내가 거래처까지 데려다줄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거절했다.구승훈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집을 나섰다.강하리는 연정이와 조용히 아침 식사를 했다.연정이
강하리는 침실 문을 흘끗 보고는 구승훈을 무시했다.하지만 곧 밖에서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강하리가 ‘꺼져!’라고 말하려던 순간, 가정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사모님이 술 드셨으니, 숙취 해소에 좋은 차를 끓여 드리라고 하셨습니다.”“구승훈은 지금 옆에 있어요?”가정부는 옆에 서 있는 구승훈을 힐끗 보며 대답했다.“아니요, 대표님은 방금 준봉 씨와 함께 서재로 가셨습니다.”가정부가 말을 마치자 강하리는 바로 문을 열었다.그러자 문 앞에는 숙취 해소차를 들고 있는 구승훈과 그의 뒤에 서서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정부가 있었다.“이제 가서 쉬세요.”구승훈은 가정부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러고는 숙취 해소차를 들고 침실로 들어왔다.강하리가 말할 틈도 없이 그는 숙취 해소차를 한 모금 마시고 바로 강하리에게 입을 맞췄다.강하리는 구승훈에게 숙취 해소차를 넘겨받았지만 삼키기도 전에 구승훈은 다시 키스를 퍼부었다.강하리가 숨이 가쁠 때까지 구승훈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고 숙취 해소차는 누가 더 많이 마셨는지 알 수 없었다.“맛있어?”구승훈은 강하리의 입술을 핥으며 아쉬운 듯 물었다.강하리는 그를 밀어내며 침실 안쪽으로 걸어갔다.“나가서 자.”구승훈은 숙취 해소차를 옆에 내려놓고 강하리의 손을 잡았다.“아직 화났어? 내가 잘못했어. 임희주 씨 문제는 내가 잘 처리할게. 응?”강하리는 그를 무시하고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구승훈은 강하리를 무릎에 앉히고 따뜻한 숨결을 그녀의 목덜미에 뿌리며 부드럽게 입술을 핥았다.“그럼 내가 잘못을 만회할게.”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오늘 밤, 강 대표님을 편안하게 모실게. 어때?”강하리는 임희주의 끈질긴 집착 때문에 짜증이 났을 뿐이지 진짜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지금 이 남자의 뻔뻔한 모습을 보니 화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좀 염치가 있어야지.”“염치가 중요한 게 아니야.”구승훈은 콧방귀를 뀌며 손을 강하리의 잠옷
구승훈은 휴대전화 화면에 뜬 메시지를 보자마자 주저 없이 준봉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재로 와.”준봉은 곧 자료를 들고 서재로 왔다.“말해 봐.”준봉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보고했다.“임희주 씨의 과거는 조작된 것 같습니다. 이전에 조사했던 정보에 따르면 임희주 씨는 남쪽 작은 도시의 보육원 출신이고 여 사모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걸로 보입니다. 며칠 전에 대표님께서 여 사모님 쪽을 조사해 보라고 하셔서 관련된 사람들을 추적해 봤는데 여씨 가문의 오래된 집사가 몇 년 동안 연성시 외곽의 보육원을 후원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보육원을 조사해 보니 실제로 임희주 씨는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입양되었는데 입양한 사람이 그 집사의 고향 친구였답니다.”준봉은 말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구승훈의 표정을 살폈다.임희주의 출신을 보면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사람을 키워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만약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을 해치기 위해 이렇게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마음이 어떨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준봉은 구승훈의 표정을 긴장하며 지켜보았지만 구승훈의 표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었다.다만, 그 깊고 짙은 눈동자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대표님, 괜찮으세요?”구승훈은 눈썹을 살짝 올리며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별일 아니야.”준봉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했다.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대표님은 사모님과 아가씨가 계시잖아요. 두 분 다 잘 지내고 계시니까요.”구승훈은 대답하지 않고 잠시 후 다시 물었다.“아내가 화난 데다가 꼬맹이까지 울려버렸어. 어떻게 달래야 할까?”“네?”준봉은 잠시 억울한 표정을 짓다가 한참 만에 대답했다.“대표님, 저는 아직 솔로예요.”구승훈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나가 봐.”“그럼 임 선생은 어떻게 할까요?”구승훈의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다.“계속 감시해. 조만간 여씨 가문 사모님과 연락할 거야.”준봉은
노민우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얼굴에 가득했던 득의만만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강하리의 화난 모습을 보니 솔직히 겁이 났다.“저기, 승훈이랑 싸웠어요?”“민우 씨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말해봐요, 무슨 일이에요? 손연지는 어디 있어요?”“손연지는 호텔에 있어요.”노민우는 잠시 말을 멈췄다.강하리는 서두르지 않고 노민우를 가만히 지켜보았다.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 노민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우리 회사, 강하리 씨가 인수해 줬으면 좋겠어요.”강하리는 놀라서 노민우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노씨 가문은 의학계의 명문가였고 대대로 의사 집안이었다.이번 세대에는 병원을 노민준에게 물려주었지만 노민우 또한 의료계를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다.그는 명인병원 지분 외에도 의약품과 의료기기 사업을 하는 회사를 직접 설립했고 꾸준히 잘 운영해 왔다.그런데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가 뭘까?“무슨 뜻이에요?”노민우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솔직히 말해서, 전 어릴 때부터 엄마를 무서워했어요. 엄마는 항상 강압적이었고 제 결혼을 강요하면서 제가 거부하면 손연지에게 달려갈 거라고 협박했어요.”그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엄마 말에 따라 결혼했는데도 엄마는 손연지를 찾아가는 바람에 손연지가 많이 억울하게 됐어요. 다 제가 잘못한 탓이죠.”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무 말 없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노민우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손연지에게 보상을 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저도 노력해서 손연지에게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사실 전 승훈이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손연지에게 달려갈 수 없어요.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손연지에게 가면, 오히려 우리 둘 다 더 힘들어질 거예요. 그래서 우리 회사를 먼저 정리하고 싶어요.”강하리는 이제야 그의 의도를 이해했다.“하지만 굳이 저한테 부탁할 필요가 있을까요? 노민우 씨도 회사를 독립시킬 수 있잖아요. 아니면, 구승훈이 도와줄 수도 있고요.”노민우는 웃으며 말
강하리는 스스로 최근 구승훈에게 꽤 너그러웠다고 생각했다.그를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솔직히 속으로는 답답함이 끓어올랐다.강하리의 마음속에서 구승훈은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구승훈이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여자의 끊임없는 도발까지 참을 수는 없었다.구승훈의 입가가 씰룩였다. 아마도 오랜만에 강하리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아서인지 그는 오히려 흥미롭게 느껴졌다.그는 강하리를 번쩍 들어 자기 무릎에 앉히며 말했다.“내가 처리할게. 네가 직접 나서는 일은 없을 거야, 됐지?”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히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닥쳐.”구승훈은 강하리를 달래려고 몇 마디 더 하려다가 강하리의 냉정한 말에 곧 입꼬리가 떨어지며 입을 다물었다.차가 저택 앞에 멈출 때까지 강하리의 표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차가 멈추자, 강하리는 화가 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문 앞에 도착하자 그녀는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노민우를 보았다.“담배 꺼요.”노민우는 떨리는 손으로 재빨리 담배를 껐다.그는 일어서서 강하리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고 다가갔지만 강하리는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가며 문을 쾅 닫아 버렸다.노민우는 당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왜, 왜 이래?”구승훈은 노민우를 흘겨보며 쏘아붙였다.“너는 손연지랑 있지 않고 우리 집엔 왜 왔어?”노민우는 코를 긁적이며 답했다.“강하리 씨 만나러 왔어.”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누구 만나려고?”“노민우 씨, 들어오세요.”그때, 강하리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오자 구승훈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나 먼저 들어갈게.”노민우는 웃음을 머금고 구승훈에게 손을 흔들었고 구승훈의 어이없는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서재로 와요.”그는 강하리가 일어서서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쏜살같이 따라 올라갔다.구승훈은 한숨을 쉬며 가정부에게 연정이를 데려오라고 부탁했다.“쉬세요.
방에서 나온 강하리는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하지만 화장실에 도착하기 전, 그녀는 멀리서 구승훈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는 한 손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복도에 서 있었는데 거리가 멀어 그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와 마주 보고 서 있는 사람이 바로 임희주라는 것은 분명했다.강하리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옆으로 비켜섰다. 그때, 그녀 옆에서 누군가가 말했다.“강 대표님, 안 가보세요?”강하리가 고개를 돌리자 미소 띤 얼굴의 임명우가 보였다.“임 대표와 무슨 상관이죠?”임명우는 손에 술잔을 든 채, 그녀의 말에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냥 강 대표님은 눈에 든 모래 한 톨도 못 참는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너그러운 것 같네요.”강하리는 비웃으며 말했다.“임 대표님, 협상하려면 협상만 하세요. 이러시면 제가 방법을 써서 계약을 강제로 해지하는 수가 있어요.”임명우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가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너무 섣불렀네요. 하지만 강 대표님에게 남자를 너무 믿지 말라고 조언해 드리고 싶었어요.”그러고는 잠시 멈추다가 말을 이어갔다.“아, 내일 사업 협상이 있는데, 제가 자료를 이메일로 보내드릴게요. 강 대표님, 내일 뵙겠습니다.”임명우는 그녀에게 술잔을 들어 보이며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강하리는 임명우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이상한 짜증이 솟아올랐다.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이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구승훈 쪽으로 걸어갔다.클럽은 그렇게 조용한 곳이 아니었지만 하이힐이 바닥을 찍는 소리는 여전히 또렷하게 들렸고 구승훈과 임희주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를 보는 순간, 구승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고 임희주는 잠시 멍한 표정을 보이다가 이내 따라 웃었다.“강하리 씨.”강하리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어요?”그녀는 구승훈 옆에 서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조명에 비친 그녀의 눈은 유난히 빛났다.구승훈은 손을 들어 그녀를 끌어안으며
“좋아해, 됐지?”손연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한 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며 곧 잠들 준비를 했다.노민우는 순간적으로 숨이 막힐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 비록 손연지의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그의 마음 한편에는 미묘한 설렘이 피어오르고 있었다.그 말 한마디 속에 어쩌면 자신을 조금이라도 좋아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싹텄다.“그럼 소영준은 아직도 좋아해?”노민우가 조심스레 물었다.“귀찮게 굴지 마.”손연지는 짜증 섞인 어조로 대답했고 노민우는 잠시 말을 멈춘 후 다시 물었다.“그럼 누가 제일 좋아?”“하리.”손연지는 눈을 흐리게 뜬 채로 답했다.더 물어보려 했지만 그 순간 노민우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여사님’이라는 세 글자가 보이자 노민우는 머리가 지끈거렸고 화면을 보기만 할 뿐 전화를 받지 않았다.전화가 더 이상 울리지 않게 되자 노민우는 곧바로 노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형, 엄마 좀 말려줘. 그리고 나 결혼 취소한 거, 형이 할아버지께 말씀드려.”“너 확실한 거야?”노민준은 대답 대신 노민우의 마음을 물었다.노민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묻기 전에 노민준이 덧붙였다.“결혼 취소한 건 내가 할아버지께 말씀드릴 수 있어. 할아버지께서도 여씨 가문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으니까. 하지만 어머니의 반대를 꿋꿋이 이겨내고 손 선생이랑 잘 지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어? 동생아, 이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결심이 확실하지 않다면 함부로 약속하지 마. 너도 승훈이처럼 가족을 등 돌리게 될 수도 있어. 그럴 수 있겠어?”그럴 수 있다고 답하려던 찰나, 노민우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노민준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삼촌 쪽은 내가 막아볼게. 하지만 잘 생각해 봐. 그리고 정말 결혼을 취소할 거라면 여씨 가문에 직접 가서 이유를 설명해.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모든 일을 손 선생이 떠안게 될 거야. 알았지? 난 삼촌 보러 가야겠다.”전화를 끊은 후, 노민우는 한숨과 함께 손연지를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