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다른 게 아니라 부탁할 게 있어요. 우리의 옛정을 생각해서 엄마 내보내 주면 안 돼요? 다 날 위해서 그런 거니까 그 죗값은 내가 받을게요. 엄마 풀어줘요, 네?”송유라는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구승훈은 딱딱하게 한 마디만 뱉었다.“송유라, 옛정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야.”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었고 번호를 차단하기까지 했다.강하리가 구승훈을 보낸 뒤 손연지를 돌아보자 그녀는 씩씩거리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내가 안 돌아왔으면 그 자식이랑 했어?”강하리가 피식 웃었다.“무슨 생각하는 거야.”손연지는 콧방귀를 뀌었다.“그렇게 쉽게 널 주면 안 돼, 알았지? 안 그러면 그 개자식은 소중한 줄 몰라.”개 같은 남자는 소중히 여길 줄 모를 거야.”강하리가 웃으며 말했다.“알았어, 근데 넌 왜 그래? 왜 씩씩거리면서 돌아와?”그 말에 손연지는 속에 열불이 치솟았다.“노민우 대체 뭐 하는 놈이야! 다 큰 자식이 산부인과 번호만 연달아 열두 번이나 끊었어, 오늘 얼굴만 봐도 토할 것 같아.”“...”그제야 지난번 노민우가 손연지에 대해 물었던 것을 떠올렸다.“노민우랑 대체 무슨 원한이 있는 거야?”손연지는 여전히 씩씩거렸다.“전에는 없었어도 오늘부터 원한이 생겼어!”“진정해.”그녀는 노민우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본성은 나쁘지 않아도 어중이떠중이들과 어울린다는 건 뼛속 깊이 그런 근성이 있다는 뜻이었다.손연지는 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알아, 내 일터에 다시 오지 않는 한 신경 안 써.”강하리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고 고민 끝에 그녀는 방으로 돌아가 노민우에게 연락했다.하루 종일 병원에 있다가 이제 막 집으로 돌아온 노민우는 강하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강 부장님? 무슨 일로 전화했어요?”노민우는 말하며 셔츠 깃을 잡아당겼고, 왠지 모르게 입이 마르며 몸에 열기가 느껴졌다.강하리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노민우 씨, 연지 괴롭히지 않으면 안 돼요?”노민우는 순간 멈
다음 날, 병원에 도착한 손연지가 막 차를 주차하고 내리려는데 노민우가 다가와 문을 열었다.당황한 손연지는 다가온 사람을 보고 이가 갈렸다.이 음침한 놈이 그래도 와?“어젯밤 물로 부족해?”노민우는 화가 나서 피를 토하고 싶을 지경이었다.“진짜 너였어? 손연지, 대체 내가 뭘 잘못했어! 어제 내가 그걸 소화하려고 한밤에 동네를 열 바퀴 넘게 뛰어다녔다고, 다들 날 미친놈이라고 생각한 거 알아?”손연지는 잔뜩 비아냥거렸다.“미친놈 모욕하지 마. 미쳐도 다 큰 남자가 산부인과를 예약하지는 않아.”전화를 끊을 만큼 큰 사람이 아니야!”라고 수만 번을 욕했다.“내가 왜 산부인과에 갔는지 모르겠어? 그쪽이 날 볼 때마다 욕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거길 왜 가?”손연지는 콧방귀를 뀌었다. “욕만 하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 그러게 누가 그 망할 년 옹호하래?”송유라를 편들었던 사람은 이유를 막론하고 욕먹을 만했다.노민우는 기가 막혔다.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신이 송유라를 한두 번 옹호한 것은 사실인 것 같았다.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는 송유라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게다가 그는 강하리와 구승훈이 육체적인 관계일 뿐 서로 감정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지금은 안 그러잖아?”“똥이었던 게 이제 와서 똥이 아니라고 하면 냄새가 안 나?”노민우는 순식간에 메스꺼움이 가슴을 타고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이게 대체 무슨 비유지, 내가 똥이라고?“여자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해?”손연지는 그의 하반신을 내려다봤다.“넌 남자가 산부인과에 왜 와? 내가 잘라줄게. 한번 여자가 된 기분을 느껴봐.”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차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노민우는 너무 화가 나서 바로 따라갔다.“이젠 내 형까지 내가 그쪽 능력이 부족하다고 의심하고 있어. 손연지, 당신이 책임져!”“책임지기는 무슨...”손연지가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려던 찰나 표정이 확 변하며 조금 전까지 거칠게 몰아붙이던 사람이 순식간에 수줍은 소녀가 되어 낮게 불렀다.“소 교수님.”소영
손연지는 여전히 그를 무시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곧장 밖으로 나갔다.진료실 문 앞에 다다르자 그녀는 노민우를 안으로 밀었다.“선배, 제 친구가 발기불능인데 직접 오기 부끄러워하네요. 좀 도와주세요.”남자가 대답했다.“문제없지. 어디 봐요, 전혀 안 되는 거예요? 부끄러워하지 말고 솔직하게 대답해 주세요.”그제야 정신을 차린 노민우는 화가 치밀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손연지! 나 잘한다고!”손연지는 노민우를 선배 곁으로 밀어버리고 뒤돌아서서 자리를 떴다....그 후 며칠 동안 강하리는 엄청나게 바빴다.북교 프로젝트를 준비하느라 밥 먹고 잠잘 시간조차 부족할 정도였다.구승훈이 몇 번 데이트 신청을 했지만 그녀는 시간이 없었다.하지만 시간이 있든 없든 구승훈이 알려주고 싶은 일들은 항상 그녀의 귀에 또렷하게 들려왔다.구동근이 가족 파티를 빌미로 구승훈과 문연진을 엮어주려 했다가 구승훈이 그 자리에서 상을 엎으면서 어르신과 손자가 한바탕 언성을 높였고, 문연진은 다음날 B시로 돌아간 일과 구승훈의 상처가 거의 다 나았고 그가 매일 무엇을 먹고 몇 시에 잠자리에 드는지까지 노진우는 하나하나 보고했다.그 말을 전해 듣는 강하리는 머리가 아팠다.“노진우 씨, 그런 쓸데없는 얘기 좀 그만할 수 없어요?”노진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대표님께서는 강하리 씨가 걱정하실까 봐…”강하리는 이를 악물었다.“걱정 안 해요.”노진우는 짧게 대답하며 덧붙였다.“하지만 대표님께서는 많이 걱정하고 계세요. 바쁘시더라도 식사 잘 챙겨 드시랍니다.”펜을 잡은 강하리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개자식이 정말!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낮게 말했다.“고맙다고 전해줘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물건을 챙겨 회의실로 향했다.회의실에 들어서기 직전, 구승훈으로부터 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강하리는 휴대폰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이 시간에 왜 전화했어요?”구승훈이 웃으며 말했다. “보고 싶어
구승재는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형, 왜 바로 팀원을 교체하지 않는 거야? 우리 쪽 사람으로 다 바꾸면 될 텐데. 그러면 입찰서류를 두 개씩 준비할 필요도 없잖아. 지금도 충분히 바쁜데.”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 사람들을 교체하면 증거를 어떻게 확보해? 그리고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죄가 성립이 안 되잖아.”구승재는 입을 벙긋하다 얼마 후 웃음을 터뜨렸다.역시, 난 아직 어리네.구승훈은 사무실에 서서 푹 꺼진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구승현 쪽은 어때?”“할아버지한테 한 소리 들었는지 요즘은 잠잠해. 하지만 얼마 못 갈 것 같아.”구승훈은 담배를 꺼내 들었지만 불을 붙이지는 않고 서늘한 얼굴로 말했다.“그럼 류 서장한테 연락해서 좀 더 독한 미끼를 하나 던져.”구승재의 눈이 번쩍 뜨였다.“그래, 알겠어.”강하리가 다시 회의실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밤 1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그녀는 사람들을 위해 간식을 주문한 뒤 노진우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하지만 회사 정문을 나서는 순간 구승훈이 팔짱을 낀 채 차 옆에 기대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강하리의 발걸음도 잠시 멈칫했고 노진우는 이미 뒤돌아서서 자리를 떠난 뒤였다.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노진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구승훈 쪽으로 걸어갔다.며칠 못 본 사이 구승훈의 얼굴이 훨씬 좋아 보였다.다만 지난 며칠 동안의 냉대 때문인지 그의 얼굴에는 서운함이 묻어났다.강하리는 그에게서 몇 걸음 떨어져 멈춰 서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 시간에 여긴 왜 왔어요? 몸은 좀 괜찮아요?”구승훈은 괜히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더 안 오면 강 대표가 나를 잊어버릴 것 같아서.”강하리가 그를 힐끗 보았다.“노진우 씨 때문에 귀에 굳은 살이 박일 지경이에요.”구승훈이 다가와서 그녀를 안아 들고 차에 태웠다.“배고파?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배 안 고파요, 너무 피곤해요.”구승훈은 애틋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프로젝트 하나에
구승훈은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예전 같았으면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내 여자를 감히 누가 무시해?”하지만 지금은 이런 말도 당당하게 할 수 없었다.자신 때문에 그녀는 참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고 영감탱이에게 쓸모없다고 꾸중까지 들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마음이 불편했다.계획된 그녀의 미래에 그는 없었다. 하지만 결국 피곤함에 지친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미래 계획에 자신이 없어도 그녀의 인생은 자신의 것으로 만들 테니까.검은색 마이바흐가 조용히 거리를 달리다가 아직 영업 중인 디저트 가게 앞에 차를 세웠다.잠시 후 가게 안에서 티라미수 하나를 들고나오자 강하리가 가져가려고 했지만 구승훈은 건네지 않고 포크만 줄 뿐 케이크 상자를 열어주었다.그의 손길을 따라 케이크를 한입 입에 머금자 달콤하고 크리미한 맛이 입안에 퍼지면서 피곤한 기분이 덜해졌다.구승훈은 만족스러운 그녀의 표정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이런 걸 왜 이렇게 좋아해?”“맛있으니까요.”말을 하던 그녀가 순간 멈칫했다.구승훈도 어렸을 땐 달콤한 걸 좋아해 그녀가 막대 사탕을 주면 하루 종일 입에 물고 다녔다.강하리는 시선을 내려 구승훈이 들고 있는 케이크를 바라보았다.“단 거 안 좋아해요?”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녀의 입가를 쓸었다.“전에는 안 좋아했는데, 지금은 갑자기 맛보고 싶네.”강하리가 그에게 포크를 건네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몸을 숙여 그녀를 덮쳤다.남자는 서둘러 케이크를 맛보고 싶은 듯 입술이 닿기 바쁘게 깊이 파고들었다.초콜릿 맛이 입안에 가득 퍼지며 남자는 더욱 거칠게 안을 헤집었고 강하리는 그의 힘에 눌려 움직일 수 없었다.구승훈은 가운데 콘솔 위에 케이크를 올려놓았고 이어 온몸으로 그녀를 짓눌렀다.키스는 입술에서 볼로 미끄러지며 목과 쇄골까지 이어졌다.더운 날씨에 강하리는 얇은 셔츠 하나만 입고 있었는데, 구승훈의 커다란 손이 셔츠 자락을 따라 미끄
... 보름의 협상 끝에 북교 프로젝트가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입찰 전날, 강하리는 정양철을 만나러 갔고 그는 별다른 표정 없이 강하리의 보고를 듣다가 마지막에 한마디 했다.“이번 입찰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우리 계약도 앞당겨 끝나겠군.”강하리가 웃었다.“원래도 곧 계약 만료되는 거 아니었나요?”정양철은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얼굴에는 흐뭇함이 가득했다.“그동안 고생 많았어. 참, 어머니는 어때?”정서원을 언급하자 강하리가 잠시 멈칫했다.“별로 안 좋아요, 아직 중환자실에 계세요.” 정양철은 한숨을 쉬었다.“너무 슬퍼하지 말고 몸 잘 챙겨.”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 회장님.”북교 신축 부지에 대한 입찰이 연성시 시청에서 진행됐다. 강하리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을 데리고 시청으로 향했고 그 옆에서 안예서는 다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부장님, 이렇게 큰 프로젝트 입찰에 참여한 건 처음이에요.”강하리가 웃었다.“앞으로 더 많은 프로젝트가 있을 거야. 이번 일이 끝나면 너한테 작은 프로젝트 하나 맡길 거니까 직접 사람들을 이끌고 해봐.” 그녀는 말하며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는데 부사장이 옆에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강 대표가 완벽하게 준비했으니까 안 비서는 걱정하지 마. 이번엔 우리가 낙찰받을 거니까, 그렇지 강 대표?” 강하리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네.”입찰은 예비 선정, 발표, 그리고 최종 입찰까지 세 차례로 나뉘어 진행됐다. 그 모든 과정 내내 부사장은 얼굴에 긴장한 기색 하나 없이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낙찰자가 대양그룹이라는 최종 발표가 나온 뒤에야 그의 표정이 확 바뀌며 강하리를 돌아보았고 강하리는 싱긋 웃었다.“부사장님, 예지력이 신통하시네요.”부사장의 표정이 몇 번이나 바뀌다가 결국엔 웃으며 말했다.“강 대표가 잘 준비한 덕분이지.”입찰 설명회를 마치고 내려오는데 강하리의 휴대폰이 울렸다. [축하드립니다, 강 대표님.] 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살
구승훈은 그 메시지를 보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정주현은 옆에서 구승훈을 바라보며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같은 자리에 구 대표님도 오시나?”구승훈은 그를 흘끗 쳐다봤다. “여자 친구가 이렇게 잘나가는데 정주현 씨는 내가 빠질 줄 알았나 봐?”정주현은 피식 웃었다.“여자 친구? 본인 상상 속 여자 친구?”구승훈은 그를 슬쩍 보며 말했다.“조만간 그렇게 될 텐데.”정주현의 얼굴에 머금었던 웃음이 옅어졌다.“구 대표님 자신감이 넘치시네.”구승훈은 애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아직 무대 위에 있는 여성을 바라보며 말했다.“강하리에 대해선 내가 늘 한발 빨랐던 거 정주현 씨도 잘 알지 않나?”정주현은 씁쓸한 감정이 치솟았다. 둘이 아직 정식으로 관계를 확정 지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강하리가 이미 그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마음속으로 짜증이 났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과 강하리는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았다.저 영감탱이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계동회가 끝나고 강하리는 구승훈을 따라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정양철의 눈빛이 무척 어두웠고 옆에서 정주현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후회하세요? 후회하는 거면 내가 지금 쫓아가고요. 강하리는 아직 구승훈 마음 안 받아줬거든요.”그러자 정양철은 그를 노려봤다. “괜히 소란 피우지 마!” 구승훈과 강하리는 행사장을 나와 곧장 시청으로 향했다.“사실 첩자가 누군지 이미 알 것 같아요.”구승훈의 눈빛이 번뜩였다.“그래도 증거는 있어야지.” 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시청에 도착하니 저쪽에는 이미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다.구승훈을 보자마자 그 남자는 이번 입찰의 모든 입찰서를 건네주었고 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수고했어요.”그리고는 강하리를 사무실로 데려갔다.입찰서를 살펴보기 전 강하리가 낮게 중얼거렸다.“입찰 전날 밤에 프로젝트팀원들에게 전화를 돌려서 입찰서를 바꾼다고 했어요. 누가 유출했는지 파악하기 쉽도록 각자 금액을 다르
강하리가 두 눈을 깜빡였다.“아직은 비밀이에요.”구승훈은 속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그동안 강하리는 자신의 일에만 집중하며 기회를 준다고 말해놓고도 그에게 할애한 시간은 극도로 적었지만 차마 그녀를 곁에 붙잡아 둘 이유가 없었다.“며칠 정도 가 있는 거야?”“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 정도요.”구승훈은 속이 상했지만 겉으로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그 기간에 외부인은 만날 수 있나?”“잘 모르겠어요.”구승훈은 우울함이 잔뜩 밀려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그럼 통화는 할 수 있겠지.”강하리는 그의 표정을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최대한 받으려고 노력해 볼게요.”구승훈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문득 자신도 예전에 그녀에게 같은 말을 했던 게 떠올라 순간 화를 낼 기운조차 사라졌다.강하리는 손에 든 입찰서를 보며 말했다.“전 사무실로 돌아가서 이번 일 처리해야 하는데, 당신은요?”사실은 나랑 같이 가지 않겠냐고 말하고 싶었다.두 사람이 제대로 함께 시간을 보낸 지 꽤 오래된 건 사실이었으니까.하지만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구승훈의 전화벨이 울렸다.그는 휴대폰을 쳐다보다가 무의식적으로 강하리를 올려다봤다.Y국에서 걸려 온 전화는 두 사람 모두에게 예민한 번호였다.강하리는 시선을 피하며 못 본 척했고 구승훈은 곧바로 전화를 끊더니 그 번호도 차단해 버렸다.그러고 나서야 이렇게 말했다.“이제 걔 전화 안 받을 테니 걱정하지 마.”강하리는 짧게 대꾸할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잠시 후 구승재의 전화가 걸려 왔고 구승훈은 전화를 받고 그저 두 번 대꾸할 뿐이었다.“나도 처리할 일이 좀 있는데 이따 밤에 공항에 데려다줄까?”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은 그녀를 회사까지 데려다준 다음 떠났고 강하리는 한참 동안 그의 차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사무실에는 이미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다.사무실에 들어가기 전, 강하리는 휴대폰 녹음기를 켰다.안으로 들어간 그녀가 입찰
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기만 했다.“내가 진짜 주해찬을 건드렸다면 어떻게 할래?”강하리가 그를 마주 보았다.“살인은 대가를 치러야 해. 구승훈 당신은 나한테 특별할 게 없어.”구승훈의 마음속이 온통 씁쓸함으로 물들었다.그는 쓴웃음을 내뱉었지만 그래도 말을 이어갔다.“아직 몰라. 의사가 그럴 수도 있다고 했어.”하지만 강하리의 마음은 다소 무겁게 가라앉았다.그때 정서원이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도 의사가 그렇게 말했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선배 좀 보고 올게.”구승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결국 막지 않았다.그녀를 보내주지 않으면 그녀가 계속 불안해할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구승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따라 나갔다.중환자실 밖에서 여전히 울고 있는 석미란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강하리의 몸이 굳어졌다.그녀는 손가락에 힘을 주고 저쪽으로 걸어갔다.다만 아직 중환자실 앞으로 가기도 전에 걸음이 뚝 멈췄다.정양철과 정주현이 거기 있을 줄이야.그녀가 정양철을 힐끗 쳐다보자 정양철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강하리는 문득 정서원이 납치되었을 때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는 게 떠오르며 손가락을 말아쥐었다.정서원에게 일이 생겼을 때 정양철이 병원에 나타났다.그녀가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는지 확인하러 온 듯이.구승훈은 강하리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정양철을 힐끗 쳐다보더니 큰 손으로 강하리의 뒤 허리를 살며시 그러잡았다.강하리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거두었다.정주현은 강하리를 보자마자 서둘러 이쪽으로 다가왔다.“강하리 씨, 좀 어때요?”강하리가 고개를 저었다.“난 괜찮아요.”말을 마친 그녀가 중환자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두꺼운 유리 벽 너머로 드디어 주해찬이 보였다.항상 온화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는 현재 침대에 누워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몸에 여러 개의 튜브를 삽입하고 누워 있었다.강하리의 마음이 아팠다.밀려오는 죄책감이 그녀를 익사시킬 것만 같았
강하리의 머릿속이 하얘졌다.“뭐라고요?”석미란은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해찬이가 식물인간이 됐다고, 이제 만족해?”강하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손끝까지 떨리고 있었다.“가볼래요.”그녀는 이불을 걷어 올리고 밖으로 나가려고 일어났지만 구승훈이 그녀를 붙잡았다.“지금 가도 소용없어. 중환자실에 있어서 못 만나.”그때 석미란이 갑자기 강하리를 붙잡았다.“망할 년,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해찬이를 보러 가! 해찬이가 정말로 못 깨어나면 내가 네 목숨을 가져갈 거야!”석미란이 말하며 강하리의 목을 조르려고 달려들자 구승훈이 그녀의 손을 잡고 내동댕이쳤다.“여사님, 말 가려서 하세요. 대체 누가 누구 때문에 힘들다는 겁니까? 지금 전부 하리 탓으로 돌리는데 만약 주해찬 때문에 하리가 피해를 본 거면 저도 하리 복수를 위해 중환자실로 가서 주해찬을 죽여도 됩니까?”석미란은 눈이 빨개진 채 구승훈을 노려보았다.주해찬이 깨어나지 못할 위험에 처해있는데 죽여버리겠다고?“구승훈, 이 살인자 새끼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을 것 같아? 너랑 강하리, 너네 둘 다 살인자야! 내가 죗값 치르게 해줄 테니까 기다려. 망할 네년은 해찬이 목숨값 내놔!”석미란의 울부짖는 소리가 병동 전체에 울려 퍼졌고 준봉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여사님, 방금 경찰에서 그 차가 구 대표님 번호판을 덧씌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대표님은 누명을 쓴 겁니다.”석미란은 여전히 증오에 가득 찬 눈빛으로 구승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구승훈이 진짜 아들을 죽인 범인이라는 듯이.“경찰을 매수하면 그만인 줄 알아? 구승훈, 내가 죗값을 치르게 할 거야!”강하리는 준봉의 말을 듣고 순간 몸이 굳어졌다.구승훈은 출입구를 지키고 있는 준봉을 바라보았다.“여사님 나가시라고 해.”준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석미란을 막기 위해 앞으로 달려갔다.“여사님, 이만 나가 주세요.”석미란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주해찬의 아버지에게 제지당했다.주해찬을 닮은 외모에 겉과 속이 모두 반듯한
주해찬의 표정이 확 바뀌며 핸들을 꺾었지만 그래도 피할 수 없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강하리를 보호했고 강하리의 시선은 다가오는 차에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구승훈의 차다.차 번호판도 똑같았다.구승훈이 B시에 올 때마다 몰던 차였다.순식간에 강하리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곧 눈앞이 핑글 돌았다....강하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구승훈이 보였다.“좀 어때?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강하리는 멍한 표정으로 옆에 앉은 남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구승훈, 당신이야?”구승훈의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고 의심을 받은 그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하리야, 너 정말 나라고 의심하는 거야?”입술을 달싹이며 그를 바라보는 강하리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의심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차는 분명 구승훈의 것이었다.하지만 구승훈이 아니라고 말할 때 오히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서늘한 구승훈의 시선을 피하며 나지막이 물었다.“선배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네가 신경 쓰는 건 주해찬밖에 없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날 구해준 사람이야.”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구승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내가 널 구해준 적은 없어? 하리야, 너 정말 사람 마음 아프게 한다.”강하리는 그의 손에서 손을 빼냈다.지금은 그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주해찬이 그녀의 몸을 감쌌기에 그는 꽤 심하게 다쳤을 거다.처음부터 주해찬에겐 미안한 것투성이였다.오랜 시간 동안 그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면서도 그에게 해줄 대답이 없었다.게다가 구승훈의 차로 교통사고까지 났으니 마음속에는 죄책감이 커져만 갔다.“선배는 어떻게 됐어?”여전히 똑같은 말에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주해찬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목숨은 건졌지만 그가 깨어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지금 강하리의 태도로 볼 때, 주해찬이 자신을 구하려다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지 정말 알 수 없
주해찬의 표정이 잠시 번뜩이다가 미소를 지으며 정양철에게로 향했다.“아저씨, 오랜만이네요.”정양철의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가 이내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해찬아, 여긴 무슨 일이야?”주해찬이 미소를 지었다.“친구 데려다주고 나오는데 여기서 아저씨랑 만났네요.”정양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그럼 가서 일 봐. 난 아직 할 일이 남아서.”“알았어요.”주해찬은 그 말을 하고 돌아서서 문을 나섰다.정양철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전화기를 꽉 쥐었다.한편 주해찬은 안에서 나오기 바쁘게 훅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멍한 표정으로 길가에 서 있었다.방금 정양철이 한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강하리나 구승훈과 무슨 일이 있는 걸까?손을 댔다고 했는데, 무슨 짓을 한 걸까.정주현에게 선을 긋던 강아리의 모습과 연관 짓자 주해찬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그는 다소 창백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강하리가 샤워하러 가려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선배?”하지만 강하리가 전화를 받을 때 주해찬은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적어도 제대로 알아보고 강하리에게 알려줘야지 무턱대고 말하는 건 무책임한 행동이었다.“아니야, 그냥 내일 나랑 같이 팔찌 가지러 가자고.”“선배, 나 혼자 갈 수 있어요.” 강하리가 여전히 거절하려는데 주해찬이 말을 막았다.“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오늘 밤엔 일찍 쉬어.”주해찬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다음 날 이른 아침, 준봉은 구승훈의 전화를 받고 강하리에게 아침을 가져다주었다.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 순간, 강하리 방 앞에 두 사람이 수상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그를 보자마자 뒤돌아 복도 쪽으로 달려갔고 준봉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그들을 쫓아갔다.일직 강하리가 묵고 있는 호텔 아래층에 도착한 주해찬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어젯밤 정양철의 그 말 때문에 거의 밤을 새
준봉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대표님께서 마실 것 가져다드리래요.”말을 마친 준봉은 강하리에게 밀크티 한 잔을 건넸고 강하리는 눈앞에 놓인 밀크티를 보고 화를 내며 다시 한번 문을 닫았다.주해찬은 방에 앉아서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안 가면 조금 있다가 또 올걸.”주해찬은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오늘 밤 모임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죄송해요, 선배.”구승훈이 이러면 주해찬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난처했다.주해찬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문득 어젯밤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던 모습이 떠올라 결국 포기했다.준봉은 강하리의 방에서 나오는 주해찬을 바라보며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았다면 다음에 문을 두드리러 갈 때 또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주해찬이 나오며 준봉을 보고 웃었다.“구 대표님한테 그럴 필요 없다고 전해요. 하리가 원하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고 하리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절대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요.”준봉은 주해찬을 바라보기만 했다.“안녕히 가세요, 주해찬 씨.”주해찬은 강하리를 힐끗 쳐다보며 작별 인사를 속삭인 뒤 곧장 돌아섰다.주해찬이 떠난 뒤에야 준봉은 다시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차는 경찰서를 향해 빠르게 달렸고 통화를 마친 그는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구승재를 바라보았다.“목란정원 쪽 상황은 어때요?”“우리 쪽 사람들이 들어갔는데 안에 연정이가 없었대. 그리고 사람들이 들어갈 때 꼭 큰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순조롭게 들어갔대.”시선을 내려 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이 차갑게 웃었다.“역시.”구승재가 얼굴을 찡그렸다.“역시 뭐?”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빛만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어젯밤에 그녀는 일부러 그를 그곳으로 유인한 거다.연정이 사건은 여초연이 한 짓이다.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뒤틀렸다.하지만 잠시 후 그는
정주현은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강하리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본인이 말하지 않으니 더 물어볼 수도 없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강하리 씨 데려다줬어. 웬일로 아들이 보고 싶어서 그래?”연미숙이 잠시 멈칫했다.“이 자식, 누가 보면 내가 평소에 너한테 관심 없는 줄 알겠다.”정주현은 연미숙 앞에서 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그래, 관심 많은 거 알겠으니까 무슨 일인데 그래?”연미숙은 잠시 침묵했다.“강하리한테 같이 밥 먹자고 해.”차라리 말하지 않으면 좋았을걸. 그 말을 꺼내니 정주현은 더 우울해졌다.“엄마, 강하리 씨 바빠.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친구들이나 만나지 강하리는 왜?”연미숙이 웃었다.“우리 아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여자를 내가 좀 만나면 안 돼?”정주현이 입을 삐죽거렸다.“영감탱이가 엄마처럼 정신 차렸으면 강하리가 며느리 됐을 텐데.”연미숙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루 종일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빨리 돌아와.”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후, 그녀의 눈에는 악의에 찬 눈빛만이 번쩍였다.강하리는 정주현을 배웅하고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주해찬은 그녀의 뒤에 서서 물었다. “일부러 주현 씨랑 거리를 두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정신을 차린 강하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선배, 난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일 봐요.”주해찬은 그녀가 말하지 않으려는 것을 보며 다소 무력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만약 이 순간 그녀의 곁에 있던 사람이 구승훈이었다면 그녀는 바로 말하지 않았을까?아니면 구승훈은 굳이 묻지 않아도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고 있었을까?질투가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분명 그가 구승훈보다 먼저 강하리를 좋아했는데.“하리야, 가능하면 나도 네가 기댈 곳이 되어주고 싶어.”강하리의 표정은 굳어졌고 말투에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다.“선배, 정말 고맙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구승훈이 제일 잘 안다.정말 여초연이 연정이를 데려갔다면 그렇게 쉽게 꼬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테고 초조했던 그는 계속해서 그녀가 먼저 빈틈을 보이길 기다릴 수가 없었다.그래서 소란을 일으킨 뒤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할 생각이었다.그녀의 수단으로 봤을 때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는 걸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오늘 대놓고 이곳으로 왔다는 건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유인한 걸까?그렇다면 연정이에게 일어난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지지 않나?어쨌든 구승훈은 연정이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연정이가 정말 그녀의 손에 있고 막다른 길에 이른 그녀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그 시각 목란정원에서 여초연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쪽의 깊은 밤과 달리 저쪽은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다음 날 주해찬과 함께 B시로 갔다.비행기에서 막 내린 두 사람은 입국 게이트에서 정주현이 신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강하리 씨, 드디어 왔네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주해찬을 흘깃 쳐다보았다.주해찬은 무기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었어. 계속 물어보니까 시간을 알려줄 수밖에.”정주현은 곧바로 불만을 터뜨렸다. “강하리 씨, B시로 오면 알려준다면서 이러는 건 아니죠!”강하리는 힘없이 웃었다.“가요.”그러던 중 정주현은 강하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걸 다시 한번 언급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정주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하리 씨, 그래도 우리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이러면 대양그룹에 불만이 있는 것 같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정 회장님이 절 찾아오라고 시켰어요?”정주현은 부인하지 않았다.“영감탱이한테 불만 있는 건 아니죠? 지난번에 구정우 도와줘서 그래요?”강하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주현은 그
구승훈의 주변에 우중충한 공기가 감돌았고 차가운 시선은 올곧게 주해찬에게 향했다.가까이 다가온 주해찬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구승훈은 조금도 피할 생각 없이 그대로 얻어맞은 뒤 이윽고 주해찬의 손목에 주먹을 내리쳤다.그 손이 조금 전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 구승훈은 그의 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달려들었다.주해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구승훈, 하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아? 병원에서 그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아? 네가 뭔데 계속해서 걔한테 상처를 줘, 네가 뭐라고 걔한테 그런 식으로 강요해!”강하리가 병원에서 지냈던 걸 언급하자 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당연히 그는 그녀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있었다.매일 의사가 진정제를 놓아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심한 우울증이었다.노민준이 그날 했던 말을 그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이러면 언제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위험이 있어. 이젠 살아갈 의욕을 완전히 잃었어.”구승훈의 몸이 경직되었지만 꿋꿋하게 받아쳤다.“주해찬 당신이 뭔데 나랑 하리 사이에 끼어들어?”주해찬은 입가에 무심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아무리 그냥 선배라도 걔가 너한테 괴롭힘당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정말 그냥 선배가 되고 싶은 거야? 주해찬, 네 개수작을 모를 것 같아?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거잖아.”잠시 멈칫하던 주해찬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내가 아무리 이용하는 거라고 해도 억지로 강요하는 너보다 나아. 구승훈, 사람 존중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다시 하리 앞에 나타나. 그전까지 넌 자격 없으니까.”주해찬은 말을 마치고 곧장 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비를 맞으며 서 있던 구승훈은 한참이 지나서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자격이 없다고...맞는 말이긴 한데 그럼 주해찬은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그는 입가를 가볍게 문지르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강하리는 주방에 약을 먹으러 가다가 비속에 서 있는 구승훈을 보게 될 줄은 몰랐
가서 팔찌를 가지고 백아영의 생일을 보낸 후 출국할 생각이었고 그 외 일은 지금 당장 처리할 기분이 아니었다.구승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손연지의 집 밑에 우산을 쓴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주해찬이었다.비 오는 밤, 가로등에 반사된 남자의 모습은 약간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무척 적극적이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렬한 불빛이 주해찬에게 비추자 뒤를 돌아본 그가 구승훈의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강하리를 발견했다.구승훈은 보지 못한 듯 강하리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검은 우산이 머리 위로 드리워지며 주해찬의 낮은 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걱정돼서 보러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난 괜찮아요. 걱정시켜서 미안해요.”그때 주해찬이 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하리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구 대표님.”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가벼운 웃음을 내뱉으며 주해찬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주해찬 씨가 뭐라고 저한테 감사 인사를 하는 거죠?”주해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하리의 선배로서요.”그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집에 가서 쉬어.”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해찬이 우산을 들고 건물 쪽으로 따라나섰다.구승훈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에 서리가 낀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의 실루엣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비를 맞으며 우산 아래서 두 사람의 어깨는 단단히 맞닿은 것 같았다.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야 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했다.“선배, 나 혼자 올라가면 돼요.”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입술이 어딘가 부딪힌 것처럼 살이 갈라져 있었다.갈 때는 괜찮았는데 돌아올 땐 입술이 찢어진 채로 왔다.구승훈에 대한 강하리의 쌀쌀맞은 태도는 다 지켜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요했어?”주해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강하리는 몸이 굳어지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