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깜짝 놀랐다. 구승훈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아직도 화났어?” 강하리는 대답 대신 그를 밀어냈다. “빨리 병원으로 돌아가요, 곧 연지 올 시간이에요.”하지만 구승훈은 떠날 생각이 없었다. “조금만 더 같이 있을게.” 강하리는 그를 힐끗 보고는 부엌으로 들어가 찻잎을 꺼내고 물을 끓였다.구승훈은 방안을 돌아보며 물었다.“어디가 네 방이야?”강하리가 가리키자 구승훈은 가서 문을 열어보고는 뒤에서 다가와 그녀를 껴안았다.“아파트로 옮겨. 네가 오면 내가 게스트룸에 있을게. 여긴 조건이 너무 안 좋아.”강하리는 자신이 돌아가도 그가 게스트룸에 머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도 좋아요. 난 여기서 사는 게 편해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다시 그를 밖으로 밀어냈다.“그만해요.”이미 물이 끓고 있었고 강하리는 그에게 차 한 잔을 따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구승훈은 그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몸을 기울여 그녀에 밀착시켰다. “차보다는 다른 걸 마시고 싶은데.” 당황한 강하리의 머릿속에 그 장면이 스쳐 지나가고 얼굴이 화끈거렸다.“구승훈 씨, 당신...” 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구승훈의 입술이 다가오는데, 바로 그때 집 문이 갑자기 열렸다.깜짝 놀란 강하리가 구승훈을 홱 밀쳤고 손연지가 문 안으로 들어섰을 때 눈에 들어온 건 붉어진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는 강하리와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구승훈의 모습뿐이었다. 그녀는 머릿속이 어지러웠다.“설마, 프러포즈? 이렇게 빨리?” 강하리는 어색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노려보았다.“상처 괜찮아요?”구승훈은 자연스럽게 일어서더니 차갑고 무거운 눈빛으로 손연지를 바라보았다. “손 선생님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요.” 손연지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내가 대체 뭘 망친 걸까.순간 그녀의 표정이 험악해졌다.“내 기억이 맞다면 여긴 우리 집인데요!”강하리는 구승훈을 밖으로 밀어냈다. “빨리 돌아가요.” 손연지도 돌아왔기에 구승훈은 더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
“오빠, 다른 게 아니라 부탁할 게 있어요. 우리의 옛정을 생각해서 엄마 내보내 주면 안 돼요? 다 날 위해서 그런 거니까 그 죗값은 내가 받을게요. 엄마 풀어줘요, 네?”송유라는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구승훈은 딱딱하게 한 마디만 뱉었다.“송유라, 옛정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야.”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었고 번호를 차단하기까지 했다.강하리가 구승훈을 보낸 뒤 손연지를 돌아보자 그녀는 씩씩거리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내가 안 돌아왔으면 그 자식이랑 했어?”강하리가 피식 웃었다.“무슨 생각하는 거야.”손연지는 콧방귀를 뀌었다.“그렇게 쉽게 널 주면 안 돼, 알았지? 안 그러면 그 개자식은 소중한 줄 몰라.”개 같은 남자는 소중히 여길 줄 모를 거야.”강하리가 웃으며 말했다.“알았어, 근데 넌 왜 그래? 왜 씩씩거리면서 돌아와?”그 말에 손연지는 속에 열불이 치솟았다.“노민우 대체 뭐 하는 놈이야! 다 큰 자식이 산부인과 번호만 연달아 열두 번이나 끊었어, 오늘 얼굴만 봐도 토할 것 같아.”“...”그제야 지난번 노민우가 손연지에 대해 물었던 것을 떠올렸다.“노민우랑 대체 무슨 원한이 있는 거야?”손연지는 여전히 씩씩거렸다.“전에는 없었어도 오늘부터 원한이 생겼어!”“진정해.”그녀는 노민우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본성은 나쁘지 않아도 어중이떠중이들과 어울린다는 건 뼛속 깊이 그런 근성이 있다는 뜻이었다.손연지는 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알아, 내 일터에 다시 오지 않는 한 신경 안 써.”강하리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고 고민 끝에 그녀는 방으로 돌아가 노민우에게 연락했다.하루 종일 병원에 있다가 이제 막 집으로 돌아온 노민우는 강하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강 부장님? 무슨 일로 전화했어요?”노민우는 말하며 셔츠 깃을 잡아당겼고, 왠지 모르게 입이 마르며 몸에 열기가 느껴졌다.강하리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노민우 씨, 연지 괴롭히지 않으면 안 돼요?”노민우는 순간 멈
다음 날, 병원에 도착한 손연지가 막 차를 주차하고 내리려는데 노민우가 다가와 문을 열었다.당황한 손연지는 다가온 사람을 보고 이가 갈렸다.이 음침한 놈이 그래도 와?“어젯밤 물로 부족해?”노민우는 화가 나서 피를 토하고 싶을 지경이었다.“진짜 너였어? 손연지, 대체 내가 뭘 잘못했어! 어제 내가 그걸 소화하려고 한밤에 동네를 열 바퀴 넘게 뛰어다녔다고, 다들 날 미친놈이라고 생각한 거 알아?”손연지는 잔뜩 비아냥거렸다.“미친놈 모욕하지 마. 미쳐도 다 큰 남자가 산부인과를 예약하지는 않아.”전화를 끊을 만큼 큰 사람이 아니야!”라고 수만 번을 욕했다.“내가 왜 산부인과에 갔는지 모르겠어? 그쪽이 날 볼 때마다 욕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거길 왜 가?”손연지는 콧방귀를 뀌었다. “욕만 하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 그러게 누가 그 망할 년 옹호하래?”송유라를 편들었던 사람은 이유를 막론하고 욕먹을 만했다.노민우는 기가 막혔다.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신이 송유라를 한두 번 옹호한 것은 사실인 것 같았다.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는 송유라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게다가 그는 강하리와 구승훈이 육체적인 관계일 뿐 서로 감정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지금은 안 그러잖아?”“똥이었던 게 이제 와서 똥이 아니라고 하면 냄새가 안 나?”노민우는 순식간에 메스꺼움이 가슴을 타고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이게 대체 무슨 비유지, 내가 똥이라고?“여자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해?”손연지는 그의 하반신을 내려다봤다.“넌 남자가 산부인과에 왜 와? 내가 잘라줄게. 한번 여자가 된 기분을 느껴봐.”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차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노민우는 너무 화가 나서 바로 따라갔다.“이젠 내 형까지 내가 그쪽 능력이 부족하다고 의심하고 있어. 손연지, 당신이 책임져!”“책임지기는 무슨...”손연지가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려던 찰나 표정이 확 변하며 조금 전까지 거칠게 몰아붙이던 사람이 순식간에 수줍은 소녀가 되어 낮게 불렀다.“소 교수님.”소영
손연지는 여전히 그를 무시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곧장 밖으로 나갔다.진료실 문 앞에 다다르자 그녀는 노민우를 안으로 밀었다.“선배, 제 친구가 발기불능인데 직접 오기 부끄러워하네요. 좀 도와주세요.”남자가 대답했다.“문제없지. 어디 봐요, 전혀 안 되는 거예요? 부끄러워하지 말고 솔직하게 대답해 주세요.”그제야 정신을 차린 노민우는 화가 치밀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손연지! 나 잘한다고!”손연지는 노민우를 선배 곁으로 밀어버리고 뒤돌아서서 자리를 떴다....그 후 며칠 동안 강하리는 엄청나게 바빴다.북교 프로젝트를 준비하느라 밥 먹고 잠잘 시간조차 부족할 정도였다.구승훈이 몇 번 데이트 신청을 했지만 그녀는 시간이 없었다.하지만 시간이 있든 없든 구승훈이 알려주고 싶은 일들은 항상 그녀의 귀에 또렷하게 들려왔다.구동근이 가족 파티를 빌미로 구승훈과 문연진을 엮어주려 했다가 구승훈이 그 자리에서 상을 엎으면서 어르신과 손자가 한바탕 언성을 높였고, 문연진은 다음날 B시로 돌아간 일과 구승훈의 상처가 거의 다 나았고 그가 매일 무엇을 먹고 몇 시에 잠자리에 드는지까지 노진우는 하나하나 보고했다.그 말을 전해 듣는 강하리는 머리가 아팠다.“노진우 씨, 그런 쓸데없는 얘기 좀 그만할 수 없어요?”노진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대표님께서는 강하리 씨가 걱정하실까 봐…”강하리는 이를 악물었다.“걱정 안 해요.”노진우는 짧게 대답하며 덧붙였다.“하지만 대표님께서는 많이 걱정하고 계세요. 바쁘시더라도 식사 잘 챙겨 드시랍니다.”펜을 잡은 강하리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개자식이 정말!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낮게 말했다.“고맙다고 전해줘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물건을 챙겨 회의실로 향했다.회의실에 들어서기 직전, 구승훈으로부터 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강하리는 휴대폰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이 시간에 왜 전화했어요?”구승훈이 웃으며 말했다. “보고 싶어
구승재는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형, 왜 바로 팀원을 교체하지 않는 거야? 우리 쪽 사람으로 다 바꾸면 될 텐데. 그러면 입찰서류를 두 개씩 준비할 필요도 없잖아. 지금도 충분히 바쁜데.”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 사람들을 교체하면 증거를 어떻게 확보해? 그리고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죄가 성립이 안 되잖아.”구승재는 입을 벙긋하다 얼마 후 웃음을 터뜨렸다.역시, 난 아직 어리네.구승훈은 사무실에 서서 푹 꺼진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구승현 쪽은 어때?”“할아버지한테 한 소리 들었는지 요즘은 잠잠해. 하지만 얼마 못 갈 것 같아.”구승훈은 담배를 꺼내 들었지만 불을 붙이지는 않고 서늘한 얼굴로 말했다.“그럼 류 서장한테 연락해서 좀 더 독한 미끼를 하나 던져.”구승재의 눈이 번쩍 뜨였다.“그래, 알겠어.”강하리가 다시 회의실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밤 1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그녀는 사람들을 위해 간식을 주문한 뒤 노진우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하지만 회사 정문을 나서는 순간 구승훈이 팔짱을 낀 채 차 옆에 기대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강하리의 발걸음도 잠시 멈칫했고 노진우는 이미 뒤돌아서서 자리를 떠난 뒤였다.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노진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구승훈 쪽으로 걸어갔다.며칠 못 본 사이 구승훈의 얼굴이 훨씬 좋아 보였다.다만 지난 며칠 동안의 냉대 때문인지 그의 얼굴에는 서운함이 묻어났다.강하리는 그에게서 몇 걸음 떨어져 멈춰 서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 시간에 여긴 왜 왔어요? 몸은 좀 괜찮아요?”구승훈은 괜히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더 안 오면 강 대표가 나를 잊어버릴 것 같아서.”강하리가 그를 힐끗 보았다.“노진우 씨 때문에 귀에 굳은 살이 박일 지경이에요.”구승훈이 다가와서 그녀를 안아 들고 차에 태웠다.“배고파?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배 안 고파요, 너무 피곤해요.”구승훈은 애틋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프로젝트 하나에
구승훈은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예전 같았으면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내 여자를 감히 누가 무시해?”하지만 지금은 이런 말도 당당하게 할 수 없었다.자신 때문에 그녀는 참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고 영감탱이에게 쓸모없다고 꾸중까지 들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마음이 불편했다.계획된 그녀의 미래에 그는 없었다. 하지만 결국 피곤함에 지친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미래 계획에 자신이 없어도 그녀의 인생은 자신의 것으로 만들 테니까.검은색 마이바흐가 조용히 거리를 달리다가 아직 영업 중인 디저트 가게 앞에 차를 세웠다.잠시 후 가게 안에서 티라미수 하나를 들고나오자 강하리가 가져가려고 했지만 구승훈은 건네지 않고 포크만 줄 뿐 케이크 상자를 열어주었다.그의 손길을 따라 케이크를 한입 입에 머금자 달콤하고 크리미한 맛이 입안에 퍼지면서 피곤한 기분이 덜해졌다.구승훈은 만족스러운 그녀의 표정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이런 걸 왜 이렇게 좋아해?”“맛있으니까요.”말을 하던 그녀가 순간 멈칫했다.구승훈도 어렸을 땐 달콤한 걸 좋아해 그녀가 막대 사탕을 주면 하루 종일 입에 물고 다녔다.강하리는 시선을 내려 구승훈이 들고 있는 케이크를 바라보았다.“단 거 안 좋아해요?”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녀의 입가를 쓸었다.“전에는 안 좋아했는데, 지금은 갑자기 맛보고 싶네.”강하리가 그에게 포크를 건네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몸을 숙여 그녀를 덮쳤다.남자는 서둘러 케이크를 맛보고 싶은 듯 입술이 닿기 바쁘게 깊이 파고들었다.초콜릿 맛이 입안에 가득 퍼지며 남자는 더욱 거칠게 안을 헤집었고 강하리는 그의 힘에 눌려 움직일 수 없었다.구승훈은 가운데 콘솔 위에 케이크를 올려놓았고 이어 온몸으로 그녀를 짓눌렀다.키스는 입술에서 볼로 미끄러지며 목과 쇄골까지 이어졌다.더운 날씨에 강하리는 얇은 셔츠 하나만 입고 있었는데, 구승훈의 커다란 손이 셔츠 자락을 따라 미끄
... 보름의 협상 끝에 북교 프로젝트가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입찰 전날, 강하리는 정양철을 만나러 갔고 그는 별다른 표정 없이 강하리의 보고를 듣다가 마지막에 한마디 했다.“이번 입찰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우리 계약도 앞당겨 끝나겠군.”강하리가 웃었다.“원래도 곧 계약 만료되는 거 아니었나요?”정양철은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얼굴에는 흐뭇함이 가득했다.“그동안 고생 많았어. 참, 어머니는 어때?”정서원을 언급하자 강하리가 잠시 멈칫했다.“별로 안 좋아요, 아직 중환자실에 계세요.” 정양철은 한숨을 쉬었다.“너무 슬퍼하지 말고 몸 잘 챙겨.”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 회장님.”북교 신축 부지에 대한 입찰이 연성시 시청에서 진행됐다. 강하리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을 데리고 시청으로 향했고 그 옆에서 안예서는 다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부장님, 이렇게 큰 프로젝트 입찰에 참여한 건 처음이에요.”강하리가 웃었다.“앞으로 더 많은 프로젝트가 있을 거야. 이번 일이 끝나면 너한테 작은 프로젝트 하나 맡길 거니까 직접 사람들을 이끌고 해봐.” 그녀는 말하며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는데 부사장이 옆에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강 대표가 완벽하게 준비했으니까 안 비서는 걱정하지 마. 이번엔 우리가 낙찰받을 거니까, 그렇지 강 대표?” 강하리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네.”입찰은 예비 선정, 발표, 그리고 최종 입찰까지 세 차례로 나뉘어 진행됐다. 그 모든 과정 내내 부사장은 얼굴에 긴장한 기색 하나 없이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낙찰자가 대양그룹이라는 최종 발표가 나온 뒤에야 그의 표정이 확 바뀌며 강하리를 돌아보았고 강하리는 싱긋 웃었다.“부사장님, 예지력이 신통하시네요.”부사장의 표정이 몇 번이나 바뀌다가 결국엔 웃으며 말했다.“강 대표가 잘 준비한 덕분이지.”입찰 설명회를 마치고 내려오는데 강하리의 휴대폰이 울렸다. [축하드립니다, 강 대표님.] 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살
구승훈은 그 메시지를 보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정주현은 옆에서 구승훈을 바라보며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같은 자리에 구 대표님도 오시나?”구승훈은 그를 흘끗 쳐다봤다. “여자 친구가 이렇게 잘나가는데 정주현 씨는 내가 빠질 줄 알았나 봐?”정주현은 피식 웃었다.“여자 친구? 본인 상상 속 여자 친구?”구승훈은 그를 슬쩍 보며 말했다.“조만간 그렇게 될 텐데.”정주현의 얼굴에 머금었던 웃음이 옅어졌다.“구 대표님 자신감이 넘치시네.”구승훈은 애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아직 무대 위에 있는 여성을 바라보며 말했다.“강하리에 대해선 내가 늘 한발 빨랐던 거 정주현 씨도 잘 알지 않나?”정주현은 씁쓸한 감정이 치솟았다. 둘이 아직 정식으로 관계를 확정 지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강하리가 이미 그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마음속으로 짜증이 났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과 강하리는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았다.저 영감탱이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계동회가 끝나고 강하리는 구승훈을 따라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정양철의 눈빛이 무척 어두웠고 옆에서 정주현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후회하세요? 후회하는 거면 내가 지금 쫓아가고요. 강하리는 아직 구승훈 마음 안 받아줬거든요.”그러자 정양철은 그를 노려봤다. “괜히 소란 피우지 마!” 구승훈과 강하리는 행사장을 나와 곧장 시청으로 향했다.“사실 첩자가 누군지 이미 알 것 같아요.”구승훈의 눈빛이 번뜩였다.“그래도 증거는 있어야지.” 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시청에 도착하니 저쪽에는 이미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다.구승훈을 보자마자 그 남자는 이번 입찰의 모든 입찰서를 건네주었고 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수고했어요.”그리고는 강하리를 사무실로 데려갔다.입찰서를 살펴보기 전 강하리가 낮게 중얼거렸다.“입찰 전날 밤에 프로젝트팀원들에게 전화를 돌려서 입찰서를 바꾼다고 했어요. 누가 유출했는지 파악하기 쉽도록 각자 금액을 다르
문을 잠그는 소리가 조용한 회의실에 울려 퍼지며 묘한 긴장감을 자아냈다.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문 앞에 서 있는 임명우를 바라보고는 잠겨진 문손잡이에 시선을 고정했다.“임 대표님, 무슨 뜻이세요?”임명우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강 대표님, 오해하지 마세요. 그냥 오늘 회의 내용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싶어서요.”“그렇다고 문을 잠글 필요까지 있나요?”강하리는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문을 잠그는 행동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그녀는 임명우와의 협력을 계속 거부해 왔는데 임명우의 의도적인 접근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그런 의도적인 접근은 마치 예전의 정양철처럼 대개 특정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는 임명우에게 항상 거부감을 느껴왔다.하지만 지금까지 임명우는 특별히 이상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오늘처럼 문을 잠근 것은 처음이었다.강하리는 임명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임명우는 웃으며 어딘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저는 강 대표님의 신뢰를 받을 자격이 없나요?”강하리는 차가운 눈빛으로 임명우를 바라보았다.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주고받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임 대표님,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어요. 우리 모두의 시간은 소중하니까요. 그렇죠?”임명우는 또 한 번 그녀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강하리의 표정이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것을 보며 그는 어색한 미소를 거두었다.“제가 꼼수를 써서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요? 강 대표님, 왜 저를 그렇게 싫어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싫어하는 데는 이유가 필요 없어요. 임 대표님, 본론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강하리는 말을 마치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하지만 그녀가 문에 도착하기 전에, 임명우가 그녀를 가로막았다.“임명우 씨!”강하리는 임명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대체 무슨 짓이에요?”“강하리 씨, 저와 거래를 하죠. 강하리 씨가 저를 다정하게 대해주면 제가 그 심리 상담사를 구승훈 옆에서 떼어내
강하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노민우 씨는 해야 할 일 해요. 손연지와 얘기 좀 할게요.”노민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연지를 돌아보았다.“어제 진짜 아무것도 안 했어.”손연지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럼 내 몸에 있는 이 흔적들은 내가 스스로 만든 거야?”“그냥 키스만 했어.”“아까는 아무것도 안 했다더니, 이제는 키스만 했다고?”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자 강하리는 재빨리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병원 정원에서.강하리는 손연지의 화난 모습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아직도 웃겨? 너 누구 편이야?”강하리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화내지 마. 노민우는 사실 괜찮은 사람이야.”손연지가 말하려던 순간, 강하리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내 말 좀 들어봐.”강하리는 어제 노민우가 자신에게 했던 이야기를 손연지에게 대략적으로 전했다.손연지는 강하리를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미쳤어?”강하리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번졌다.“미쳤는지는 그 사람이 더 잘 알겠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미쳐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렇지?”강하리는 손연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하지만 노민우 씨가 여씨 가문과 완전히 관계를 끊기 전까지는 더 깊은 관계는 맺지 마.”손연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참 후, 그녀가 강하리를 돌아보며 물었다.“왜 병원에 왔어? 혹시 아픈 거야?”“일이 좀 있어서.”손연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두 사람은 정원에 앉아 있다가 각자의 일을 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강하리는 약병을 약리 연구소에 가져다주고 인성 테크로 향했다.안예서는 이미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강하리를 보자마자 달려왔다.“대표님, 방금 회의 일정이 추가되었어요. 오후에 출장을 가야 할 수도 있다고 하네요.”강하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안예서를 돌아보았다.“언제 통보받았어?”“방금이요.”강하리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안예서는 불안해졌다.안예서는 강하리가 원래 임명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지금 이렇게 온 것도 계약 때
구승훈은 자연스럽게 강하리 앞으로 다가갔다.그녀 손에 들린 작은 병을 빼앗아 들고 우유 컵을 그녀에게 건넸다.“노민준이 준 약이야. 손 찔리겠다.”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시선을 구승훈의 얼굴에 고정한 채 그의 표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하지만 구승훈이 너무 잘 감추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그의 얼굴에서 어떠한 이상한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괜찮다고 하지 않았어?”“응, 괜찮아.”구승훈은 대답하며 그녀의 팔을 끌어당겨 의자에 앉혔다.“노민준이 신경 써서 꾸준히 복용해야 한다고 했어. 걱정하지 마, 괜찮아. 나중에 연성시에 돌아가서 심리 치료도 함께 받으면 금방 나을 거야.”강하리는 구승훈이 다시 쓰레기통에 버린 앰플 병을 내려다보다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같이 야근할까?”“괜찮아. 가서 쉬어.”그러고는 일어나서 프린터 옆에 있는 자료를 가져왔다.구승훈은 떠날 생각 없이 그 자리에 앉아 이메일을 확인했고 강하리도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일을 계속했다.구승훈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임희주의 계획을 노민준에게 이메일로 보냈다.서재의 고요함은 새벽 2시까지 이어졌고 강하리가 일을 계속하고 있자 구승훈은 그녀의 손에서 자료를 빼앗았다.“자.”그러고는 강제로 강하리를 끌어안고 침실로 향했다.두 사람은 밤새도록 아무 말도 없었다. 그 앰플 병에 대한 일은 잊힌 듯했다.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바빴다.구승재는 미국에서 돌아왔고 구승훈은 오늘 회사에 가서 그를 만나야 했다.“회사에 데려다줄까?”구승훈은 강하리의 허리를 잡으며 물었고 강하리는 생각할 틈도 없이 거절했다.“직접 거래처에 갈 거야.”“그럼 내가 거래처까지 데려다줄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거절했다.구승훈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집을 나섰다.강하리는 연정이와 조용히 아침 식사를 했다.연정이
강하리는 침실 문을 흘끗 보고는 구승훈을 무시했다.하지만 곧 밖에서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강하리가 ‘꺼져!’라고 말하려던 순간, 가정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사모님이 술 드셨으니, 숙취 해소에 좋은 차를 끓여 드리라고 하셨습니다.”“구승훈은 지금 옆에 있어요?”가정부는 옆에 서 있는 구승훈을 힐끗 보며 대답했다.“아니요, 대표님은 방금 준봉 씨와 함께 서재로 가셨습니다.”가정부가 말을 마치자 강하리는 바로 문을 열었다.그러자 문 앞에는 숙취 해소차를 들고 있는 구승훈과 그의 뒤에 서서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정부가 있었다.“이제 가서 쉬세요.”구승훈은 가정부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러고는 숙취 해소차를 들고 침실로 들어왔다.강하리가 말할 틈도 없이 그는 숙취 해소차를 한 모금 마시고 바로 강하리에게 입을 맞췄다.강하리는 구승훈에게 숙취 해소차를 넘겨받았지만 삼키기도 전에 구승훈은 다시 키스를 퍼부었다.강하리가 숨이 가쁠 때까지 구승훈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고 숙취 해소차는 누가 더 많이 마셨는지 알 수 없었다.“맛있어?”구승훈은 강하리의 입술을 핥으며 아쉬운 듯 물었다.강하리는 그를 밀어내며 침실 안쪽으로 걸어갔다.“나가서 자.”구승훈은 숙취 해소차를 옆에 내려놓고 강하리의 손을 잡았다.“아직 화났어? 내가 잘못했어. 임희주 씨 문제는 내가 잘 처리할게. 응?”강하리는 그를 무시하고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구승훈은 강하리를 무릎에 앉히고 따뜻한 숨결을 그녀의 목덜미에 뿌리며 부드럽게 입술을 핥았다.“그럼 내가 잘못을 만회할게.”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오늘 밤, 강 대표님을 편안하게 모실게. 어때?”강하리는 임희주의 끈질긴 집착 때문에 짜증이 났을 뿐이지 진짜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지금 이 남자의 뻔뻔한 모습을 보니 화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좀 염치가 있어야지.”“염치가 중요한 게 아니야.”구승훈은 콧방귀를 뀌며 손을 강하리의 잠옷
구승훈은 휴대전화 화면에 뜬 메시지를 보자마자 주저 없이 준봉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재로 와.”준봉은 곧 자료를 들고 서재로 왔다.“말해 봐.”준봉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보고했다.“임희주 씨의 과거는 조작된 것 같습니다. 이전에 조사했던 정보에 따르면 임희주 씨는 남쪽 작은 도시의 보육원 출신이고 여 사모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걸로 보입니다. 며칠 전에 대표님께서 여 사모님 쪽을 조사해 보라고 하셔서 관련된 사람들을 추적해 봤는데 여씨 가문의 오래된 집사가 몇 년 동안 연성시 외곽의 보육원을 후원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보육원을 조사해 보니 실제로 임희주 씨는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입양되었는데 입양한 사람이 그 집사의 고향 친구였답니다.”준봉은 말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구승훈의 표정을 살폈다.임희주의 출신을 보면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사람을 키워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만약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을 해치기 위해 이렇게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마음이 어떨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준봉은 구승훈의 표정을 긴장하며 지켜보았지만 구승훈의 표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었다.다만, 그 깊고 짙은 눈동자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대표님, 괜찮으세요?”구승훈은 눈썹을 살짝 올리며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별일 아니야.”준봉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했다.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대표님은 사모님과 아가씨가 계시잖아요. 두 분 다 잘 지내고 계시니까요.”구승훈은 대답하지 않고 잠시 후 다시 물었다.“아내가 화난 데다가 꼬맹이까지 울려버렸어. 어떻게 달래야 할까?”“네?”준봉은 잠시 억울한 표정을 짓다가 한참 만에 대답했다.“대표님, 저는 아직 솔로예요.”구승훈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나가 봐.”“그럼 임 선생은 어떻게 할까요?”구승훈의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다.“계속 감시해. 조만간 여씨 가문 사모님과 연락할 거야.”준봉은
노민우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얼굴에 가득했던 득의만만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강하리의 화난 모습을 보니 솔직히 겁이 났다.“저기, 승훈이랑 싸웠어요?”“민우 씨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말해봐요, 무슨 일이에요? 손연지는 어디 있어요?”“손연지는 호텔에 있어요.”노민우는 잠시 말을 멈췄다.강하리는 서두르지 않고 노민우를 가만히 지켜보았다.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 노민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우리 회사, 강하리 씨가 인수해 줬으면 좋겠어요.”강하리는 놀라서 노민우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노씨 가문은 의학계의 명문가였고 대대로 의사 집안이었다.이번 세대에는 병원을 노민준에게 물려주었지만 노민우 또한 의료계를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다.그는 명인병원 지분 외에도 의약품과 의료기기 사업을 하는 회사를 직접 설립했고 꾸준히 잘 운영해 왔다.그런데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가 뭘까?“무슨 뜻이에요?”노민우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솔직히 말해서, 전 어릴 때부터 엄마를 무서워했어요. 엄마는 항상 강압적이었고 제 결혼을 강요하면서 제가 거부하면 손연지에게 달려갈 거라고 협박했어요.”그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엄마 말에 따라 결혼했는데도 엄마는 손연지를 찾아가는 바람에 손연지가 많이 억울하게 됐어요. 다 제가 잘못한 탓이죠.”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무 말 없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노민우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손연지에게 보상을 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저도 노력해서 손연지에게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사실 전 승훈이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손연지에게 달려갈 수 없어요.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손연지에게 가면, 오히려 우리 둘 다 더 힘들어질 거예요. 그래서 우리 회사를 먼저 정리하고 싶어요.”강하리는 이제야 그의 의도를 이해했다.“하지만 굳이 저한테 부탁할 필요가 있을까요? 노민우 씨도 회사를 독립시킬 수 있잖아요. 아니면, 구승훈이 도와줄 수도 있고요.”노민우는 웃으며 말
강하리는 스스로 최근 구승훈에게 꽤 너그러웠다고 생각했다.그를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솔직히 속으로는 답답함이 끓어올랐다.강하리의 마음속에서 구승훈은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구승훈이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여자의 끊임없는 도발까지 참을 수는 없었다.구승훈의 입가가 씰룩였다. 아마도 오랜만에 강하리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아서인지 그는 오히려 흥미롭게 느껴졌다.그는 강하리를 번쩍 들어 자기 무릎에 앉히며 말했다.“내가 처리할게. 네가 직접 나서는 일은 없을 거야, 됐지?”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히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닥쳐.”구승훈은 강하리를 달래려고 몇 마디 더 하려다가 강하리의 냉정한 말에 곧 입꼬리가 떨어지며 입을 다물었다.차가 저택 앞에 멈출 때까지 강하리의 표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차가 멈추자, 강하리는 화가 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문 앞에 도착하자 그녀는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노민우를 보았다.“담배 꺼요.”노민우는 떨리는 손으로 재빨리 담배를 껐다.그는 일어서서 강하리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고 다가갔지만 강하리는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가며 문을 쾅 닫아 버렸다.노민우는 당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왜, 왜 이래?”구승훈은 노민우를 흘겨보며 쏘아붙였다.“너는 손연지랑 있지 않고 우리 집엔 왜 왔어?”노민우는 코를 긁적이며 답했다.“강하리 씨 만나러 왔어.”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누구 만나려고?”“노민우 씨, 들어오세요.”그때, 강하리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오자 구승훈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나 먼저 들어갈게.”노민우는 웃음을 머금고 구승훈에게 손을 흔들었고 구승훈의 어이없는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서재로 와요.”그는 강하리가 일어서서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쏜살같이 따라 올라갔다.구승훈은 한숨을 쉬며 가정부에게 연정이를 데려오라고 부탁했다.“쉬세요.
방에서 나온 강하리는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하지만 화장실에 도착하기 전, 그녀는 멀리서 구승훈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는 한 손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복도에 서 있었는데 거리가 멀어 그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와 마주 보고 서 있는 사람이 바로 임희주라는 것은 분명했다.강하리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옆으로 비켜섰다. 그때, 그녀 옆에서 누군가가 말했다.“강 대표님, 안 가보세요?”강하리가 고개를 돌리자 미소 띤 얼굴의 임명우가 보였다.“임 대표와 무슨 상관이죠?”임명우는 손에 술잔을 든 채, 그녀의 말에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냥 강 대표님은 눈에 든 모래 한 톨도 못 참는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너그러운 것 같네요.”강하리는 비웃으며 말했다.“임 대표님, 협상하려면 협상만 하세요. 이러시면 제가 방법을 써서 계약을 강제로 해지하는 수가 있어요.”임명우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가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너무 섣불렀네요. 하지만 강 대표님에게 남자를 너무 믿지 말라고 조언해 드리고 싶었어요.”그러고는 잠시 멈추다가 말을 이어갔다.“아, 내일 사업 협상이 있는데, 제가 자료를 이메일로 보내드릴게요. 강 대표님, 내일 뵙겠습니다.”임명우는 그녀에게 술잔을 들어 보이며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강하리는 임명우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이상한 짜증이 솟아올랐다.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이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구승훈 쪽으로 걸어갔다.클럽은 그렇게 조용한 곳이 아니었지만 하이힐이 바닥을 찍는 소리는 여전히 또렷하게 들렸고 구승훈과 임희주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를 보는 순간, 구승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고 임희주는 잠시 멍한 표정을 보이다가 이내 따라 웃었다.“강하리 씨.”강하리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어요?”그녀는 구승훈 옆에 서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조명에 비친 그녀의 눈은 유난히 빛났다.구승훈은 손을 들어 그녀를 끌어안으며
“좋아해, 됐지?”손연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한 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며 곧 잠들 준비를 했다.노민우는 순간적으로 숨이 막힐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 비록 손연지의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그의 마음 한편에는 미묘한 설렘이 피어오르고 있었다.그 말 한마디 속에 어쩌면 자신을 조금이라도 좋아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싹텄다.“그럼 소영준은 아직도 좋아해?”노민우가 조심스레 물었다.“귀찮게 굴지 마.”손연지는 짜증 섞인 어조로 대답했고 노민우는 잠시 말을 멈춘 후 다시 물었다.“그럼 누가 제일 좋아?”“하리.”손연지는 눈을 흐리게 뜬 채로 답했다.더 물어보려 했지만 그 순간 노민우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여사님’이라는 세 글자가 보이자 노민우는 머리가 지끈거렸고 화면을 보기만 할 뿐 전화를 받지 않았다.전화가 더 이상 울리지 않게 되자 노민우는 곧바로 노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형, 엄마 좀 말려줘. 그리고 나 결혼 취소한 거, 형이 할아버지께 말씀드려.”“너 확실한 거야?”노민준은 대답 대신 노민우의 마음을 물었다.노민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묻기 전에 노민준이 덧붙였다.“결혼 취소한 건 내가 할아버지께 말씀드릴 수 있어. 할아버지께서도 여씨 가문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으니까. 하지만 어머니의 반대를 꿋꿋이 이겨내고 손 선생이랑 잘 지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어? 동생아, 이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결심이 확실하지 않다면 함부로 약속하지 마. 너도 승훈이처럼 가족을 등 돌리게 될 수도 있어. 그럴 수 있겠어?”그럴 수 있다고 답하려던 찰나, 노민우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노민준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삼촌 쪽은 내가 막아볼게. 하지만 잘 생각해 봐. 그리고 정말 결혼을 취소할 거라면 여씨 가문에 직접 가서 이유를 설명해.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모든 일을 손 선생이 떠안게 될 거야. 알았지? 난 삼촌 보러 가야겠다.”전화를 끊은 후, 노민우는 한숨과 함께 손연지를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