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훈은 장진영을 처리한 뒤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중환자실 문 앞에 서 있는 강하리가 의사와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구승훈은 바로 다가가지 않고 옆으로 가서 손을 씻은 뒤 강하리 곁으로 갔다. “어머님 보러 왔어? 상황은 좀 어때?” 강하리의 눈은 아직도 약간 충혈되어 있었다. 정서원의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고 의사는 최대한 에둘러 말을 전했다. 겨우 기운을 되찾았는데 지금 병상에 누워있는 그녀의 얼굴은 거의 투명할 정도로 하얗게 변해 있었다. 강하리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더니 표정을 감추며 물었다. “장진영 씨 쪽은 어떻게 됐어요?”구승훈은 강하리에게 상황을 전했고 그녀는 순간 당황했다.“그럼 우리 엄마를 납치한 사람이 정말 그 여자가 아니라고요?” 구승훈은 눈이 아주 잠깐 번뜩였다.“아직 몰라. 동영상 일도 순간적으로 물어본 거고, 정말 납치를 지시했다면 진작 준비를 했을 거야. 아직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어. 나중에 더 털어놓을 수도 있으니까 지켜보자.”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장진영 씨는 어떻게 했어요?”구승훈의 눈빛이 서늘했다.“좋은 데로 보냈어.”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 “좋은 곳 어디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먹고 자고 즐거움도 있는 곳.”구승훈은 강하리를 병동으로 다시 끌어당기며 말했다. “나 너무 피곤해서 좀 쉬고 싶어.” 말을 마친 남자는 강하리 앞에서 대놓고 옷을 벗으며 병원복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에 누우려 했고 강하리는 깜짝 놀랐다.“그쪽 병실 가서 쉬어요.”하지만 구승훈은 누워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 좀 쉬게 해줘.” 강하리는 그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차마 그를 내쫓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구승훈은 정말 피곤한 상태였다. 피도 많이 흘린 데다 수술을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 신기할 지경이었다. 침대에 누운 그는 정말 잠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강하리는 곁에 서서 그를 깨워야
둘은 오랫동안 함께 지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그녀가 피하려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입맞춤을 했고 강하리는 깜짝 놀라 그를 힘껏 밀어냈다.“구승훈 씨, 아직 양치도 안 했는데 키스를 해요?”구승훈이 웃으며 말했다.“양치 안 한 게 뭐 어때서, 다른 데도 키스했는데.”강하리는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쳐다봤다. “어디에 키스했는데요?”구승훈은 대답 대신 욕망만이 가득한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보기만 했다.이른 아침엔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닌데, 이미 잔뜩 단단해진 상태에서 이런 말을 하자 문득 자신의 어깨에 그녀의 다리를 올려놓았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남자의 목울대가 일렁거리더니 그녀의 귀에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기억나게 해 줘?”강하리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고 몸을 뒤척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내가 왜 침대에 누워 있어요?”구승훈이 웃었다.“내가 정말 널 소파에서 재울까 봐?”강하리는 시선을 돌렸다.“어젯밤 내가 발로 찬 건 아니죠?”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발로 찬 게 한두 번이야? 이미 익숙해졌어.”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곧장 화장실로 들어갔고, 들어가니 얼굴에 열기가 느껴졌다.구승훈이 방금 꺼낸 말 때문에 문득 사실이라 믿고 싶지 않은 장면들이 떠올랐다.호텔, 욕실, 세면대.흐릿한 이미지였지만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미간을 꾹 눌렀다. 설마 그날 밤 구승훈이 자신을...차마 더 생각할 수가 없었다.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조심스럽게 안을 들여다본 구승재는 이상한 장면이 보이지 않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형, 하리 씨는 어딨어?”질문을 던진 그는 구승훈이 대답하기도 전에 알아서 말을 이어갔다.“난 이제 미안해서 하리 씨 못 보겠어. 하리 씨가 이젠 나 안 믿을 것 같아. 형, 형 때문에 난 너무 많은 걸 희생했어.”구승훈은 그를 바라보다가 눈썹을 치켜올렸고 구승재가 뒤를 돌아보니 강하리가 화장실 문간에 서서 한심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
구승현!송동혁은 자신에게 만나자고 한 사람이 구승현일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눈앞에 있는 남자는 20대였지만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볼캡 모자를 쓴 그의 눈은 음침하고 불길한 기운이 가득했다.“자네가 왜 여기 있어?”그의 기억대로라면 구승현은 분명 쫓겨났는데?구승현이 웃었다.“제가 왜 여기 있으면 안 되죠?”송동혁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송유라가 구승현과 손잡고 강하리를 납치한 걸 그는 다 알고 있었다.이제 구승현이 구승훈에게 잡히면 송유라가 그 불똥을 피할 수 없을까 봐 두려웠다.“승훈이한테 들키는 게 두렵지도 않아?”구승훈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구승현의 두 눈에 매서운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구승훈이 뭐라고, 우리 집 영감이 얼마 전에 구씨 가문 권력을 전부 다 빼앗았어요. 구씨 가문이 없으면 걔가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이번에 돌아온 것도 영감탱이가 불렀어요. 구승훈 손에 있던 힘을 뺏고 날 불렀다는 건 무슨 뜻이겠어요?”송동혁은 구승현의 말을 믿지 않았다.눈 달린 사람이라면 구승훈이 구승현보다 몇 배는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구씨 가문 어르신이 장님이 아닌 이상 구승현에게 구씨 가문을 물려주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그래도 구승현이 눈앞에 나타나니 마치 탈출구가 생긴 것 같았다.그동안 그는 절망적인 상황에 내몰리고 있었다.S제약 회사의 자금 조달이 연이어 끊어졌고 그는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그러다 결국 이젠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게다가 송유라는 지금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를 더욱 끌어내리고 있었다.이런 생각에 송동혁은 후회하며 피를 토하고 싶었다.구승훈이 강하리를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줄 알았다면 애초에 강하리를 곁에 둘걸.사생아로 키워도 괜찮았다.애초에 예쁜 외모를 타고난 강하리는 구승훈과의 관계도 기정사실이 되었기에 지금처럼 그 일이 드러날까 조마조마하며 살지 않아도 되었다.하지만 이제 와서 땅을 치며
“뭐?” 송동혁은 또 한 번 놀랐다. “그년이 감히!”구승훈인 줄 알았는데, 강하리였어?그 잡것이 어쩌다 이렇게 몸집이 커졌을까.하지만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왜 나한테 이런 걸 알려주는 거지?”“송동혁 씨, 우리 손 잡죠. 그쪽 금전적인 문제는 내가 도와줄 테니까 당신은 강하리의 북교 프로젝트를 망쳐놔요. 당신 아내는 그쪽 딸이 나서면 될 거예요. 비록 지금 입지가 많이 줄어들긴 했는데 그래도 옛정이 있죠.”...강하리는 퇴근 직전 구승훈의 전화를 받았다.“회의 끝났다며?”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안예서를 바라봤고 안예서는 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부장님 왜 그러세요?”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구승훈은 낮게 웃었다.“뭐 먹고 싶어? 내가 데리러 갈까?”“돌아다니지 말고 얌전히 병원에 있어요.”“나 벌써 회사 밑에 도착했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강하리는 멈칫했다.“그냥 얌전히 치료받을 수는 없어요?”구승훈이 웃으며 말했다.“내 몸은 문제없어. 강 대표가 원하는 건 지금 뭐든 들어줄 수 있지.”강하리는 그의 짓궂은 말을 못 들은 척했다.“그럼 회사 앞에 차 주차하지 마요.”입이 방정맞은 안예서가 있었기에 아직 어떠한 사이도 아닌데 벌써 회사에 소문나기 싫었다.그런데 구승훈이 다소 속상한 듯 살짝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남들이 보는 게 싫어?”“네.”강하리는 그렇게 말하며 바로 전화를 끊었고 구승훈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낮게 웃었다.메시지를 보내려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고 힐끗 확인한 그가 전화를 받았다.저쪽에서 구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형, 할아버지가 둘째 형을 데려왔어. 게다가 할아버지는 형이 계속 하리 씨 만나면 둘째 형한테 구씨 가문을 물려주겠다는 뜻인 것 같아. 지금 할아버지가 너무 꽉 잡고 있어서 우리가 건드리고 싶어도 못 건드려. 할아버지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구승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할아버지가 이런 방법을 쓸 줄이야.그는 구씨 가문 따위 안중에도 없었고 오히
안예서는 유난히 열정적으로 구승훈을 반겼다.전에 에비뉴에 있을 때는 구승훈을 보면 무서웠지만 퇴사한 지금은 무서울 게 없었다.“구 대표님 여기서 누구 기다리세요?”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강하리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네, 누구 기다리고 있어요.”“그럼 일 보세요, 저랑 부장님은 이만 갈게요.”그때 구승훈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강하리가 경고하는 눈빛으로 그를 돌아보았지만 구승훈은 웃기만 했다.“강 대표님, 북교 신도시 개발 프로젝트를 맡을 계획이신가요? 우리도 협력할 수 있어요.”안예서는 순간 당황했다.“구 대표님, 소식 참 빠르시네요. 저희도 오늘 막 파트너를 찾기 위해 미팅했는데.”하지만 구승훈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강하리만 바라보았고 강하리는 그를 흘깃 쳐다볼 뿐 더 말하지 않았다.“얘기 좀 하죠.”그렇게 말한 뒤 안예서를 바라보며 말했다.“먼저 가봐, 예서 씨.”안예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먼저 갈게요, 부장님, 구 대표님, 안녕히 계세요.”안예서가 떠난 뒤에야 강하리는 구승훈을 노려보았고 구승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 덜 걷게 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차에 탔고 구승훈이 다가와 안전벨트 매는 걸 도왔다.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그의 시선이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그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깨달은 강하리는 황급히 그를 밀어냈다.“구승훈 씨, 여기 아직 회사 앞이에요. 내일 여기저기 소문 나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있어요.”“하리야, 사람들이 우리 관계를 아는 게 그렇게 무서워?”강하리는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당신은 손가락질받고 소문 퍼지는 게 어떤 건지 경험해 보지 않았으니까 내가 왜 싫어하는지 이해 못 할 거예요.”그녀와 구승훈이 어떻게 될지 지금은 아무도 모른다.나중에 그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또다시 빌붙으려다가 실패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이 관계에서 그녀는 피동적인 입장이었지만 남들은 언제나 제멋대로 상상하고 판단하니까.구
“그럼 앞으로 자주 올까?” “오빠!” 구승훈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자 멀지 않은 곳에 구승유가 서 있었다. 그리고 구승유 옆에 서 있는 건 다름 아닌 문연진이었다. 구승훈의 눈빛은 어두워졌고 그가 말을 하기도 전에 구승유는 문연진을 끌어당겼다. “오빠, 이런 우연이 있네. 오빠도 여기 왔어?” 구승훈의 얼굴은 차가웠다. “인사 했으면 가.” 구승유가 투덜거렸다.“오빠, 태도가 왜 그래? 연진 언니가 오빠 건강 생각해서 약선 음식 배우려고 특별히 여기까지 온 거야.” 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문연진을 끌어당기며 자리에 앉고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 씨 안녕하세요, 또 만났네요. 제 소개를 하자면 저는 승훈 오빠 여동생 구승유라고 하고, 이쪽은 문연진 씨인데...”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문연진을 가리켰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문연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우리 전에 만난 적 있죠, 강하리 씨?” 구승유는 살짝 놀랐다.“어디서 만났어?”“병원에서.” 문연진은 말을 마치고 강하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강하리 씨, 우리 두 번째 만남이네요.” 강하리가 말하기도 전에 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자신의 품으로 가져왔다.“아무하고 악수하지 마, 나중에 손 씻어야 하잖아.”“오빠,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구승유가 발끈했지만 구승훈은 무덤덤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쫓아낼까?” “오빠 생각해서 그러는 거잖아, 연진 언니는...” 구승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연진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승유야, 그만해. 우리가 지금 남의 식사를 방해하고 있잖아.”그녀는 강하리를 향해 싱긋 웃었다.“두 사람 식사 방해하지 않을게요.”구승훈에게도 이렇게 말했다.“승훈 오빠, 미안해요. 승유가 아직 어려서 그러니까 화내지 마요.”구승유는 여전히 떠나기 싫었지만 구승훈의 살벌한 표정을 보고는 강하리를 향해 분노에 찬 눈빛을 보내며 자리를 떴다. 두 사람이 사라지고 나서야
강하리는 깜짝 놀랐다. 구승훈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아직도 화났어?” 강하리는 대답 대신 그를 밀어냈다. “빨리 병원으로 돌아가요, 곧 연지 올 시간이에요.”하지만 구승훈은 떠날 생각이 없었다. “조금만 더 같이 있을게.” 강하리는 그를 힐끗 보고는 부엌으로 들어가 찻잎을 꺼내고 물을 끓였다.구승훈은 방안을 돌아보며 물었다.“어디가 네 방이야?”강하리가 가리키자 구승훈은 가서 문을 열어보고는 뒤에서 다가와 그녀를 껴안았다.“아파트로 옮겨. 네가 오면 내가 게스트룸에 있을게. 여긴 조건이 너무 안 좋아.”강하리는 자신이 돌아가도 그가 게스트룸에 머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도 좋아요. 난 여기서 사는 게 편해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다시 그를 밖으로 밀어냈다.“그만해요.”이미 물이 끓고 있었고 강하리는 그에게 차 한 잔을 따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구승훈은 그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몸을 기울여 그녀에 밀착시켰다. “차보다는 다른 걸 마시고 싶은데.” 당황한 강하리의 머릿속에 그 장면이 스쳐 지나가고 얼굴이 화끈거렸다.“구승훈 씨, 당신...” 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구승훈의 입술이 다가오는데, 바로 그때 집 문이 갑자기 열렸다.깜짝 놀란 강하리가 구승훈을 홱 밀쳤고 손연지가 문 안으로 들어섰을 때 눈에 들어온 건 붉어진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는 강하리와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구승훈의 모습뿐이었다. 그녀는 머릿속이 어지러웠다.“설마, 프러포즈? 이렇게 빨리?” 강하리는 어색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노려보았다.“상처 괜찮아요?”구승훈은 자연스럽게 일어서더니 차갑고 무거운 눈빛으로 손연지를 바라보았다. “손 선생님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요.” 손연지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내가 대체 뭘 망친 걸까.순간 그녀의 표정이 험악해졌다.“내 기억이 맞다면 여긴 우리 집인데요!”강하리는 구승훈을 밖으로 밀어냈다. “빨리 돌아가요.” 손연지도 돌아왔기에 구승훈은 더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
“오빠, 다른 게 아니라 부탁할 게 있어요. 우리의 옛정을 생각해서 엄마 내보내 주면 안 돼요? 다 날 위해서 그런 거니까 그 죗값은 내가 받을게요. 엄마 풀어줘요, 네?”송유라는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구승훈은 딱딱하게 한 마디만 뱉었다.“송유라, 옛정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야.”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었고 번호를 차단하기까지 했다.강하리가 구승훈을 보낸 뒤 손연지를 돌아보자 그녀는 씩씩거리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내가 안 돌아왔으면 그 자식이랑 했어?”강하리가 피식 웃었다.“무슨 생각하는 거야.”손연지는 콧방귀를 뀌었다.“그렇게 쉽게 널 주면 안 돼, 알았지? 안 그러면 그 개자식은 소중한 줄 몰라.”개 같은 남자는 소중히 여길 줄 모를 거야.”강하리가 웃으며 말했다.“알았어, 근데 넌 왜 그래? 왜 씩씩거리면서 돌아와?”그 말에 손연지는 속에 열불이 치솟았다.“노민우 대체 뭐 하는 놈이야! 다 큰 자식이 산부인과 번호만 연달아 열두 번이나 끊었어, 오늘 얼굴만 봐도 토할 것 같아.”“...”그제야 지난번 노민우가 손연지에 대해 물었던 것을 떠올렸다.“노민우랑 대체 무슨 원한이 있는 거야?”손연지는 여전히 씩씩거렸다.“전에는 없었어도 오늘부터 원한이 생겼어!”“진정해.”그녀는 노민우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본성은 나쁘지 않아도 어중이떠중이들과 어울린다는 건 뼛속 깊이 그런 근성이 있다는 뜻이었다.손연지는 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알아, 내 일터에 다시 오지 않는 한 신경 안 써.”강하리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고 고민 끝에 그녀는 방으로 돌아가 노민우에게 연락했다.하루 종일 병원에 있다가 이제 막 집으로 돌아온 노민우는 강하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강 부장님? 무슨 일로 전화했어요?”노민우는 말하며 셔츠 깃을 잡아당겼고, 왠지 모르게 입이 마르며 몸에 열기가 느껴졌다.강하리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노민우 씨, 연지 괴롭히지 않으면 안 돼요?”노민우는 순간 멈
문을 잠그는 소리가 조용한 회의실에 울려 퍼지며 묘한 긴장감을 자아냈다.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문 앞에 서 있는 임명우를 바라보고는 잠겨진 문손잡이에 시선을 고정했다.“임 대표님, 무슨 뜻이세요?”임명우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강 대표님, 오해하지 마세요. 그냥 오늘 회의 내용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싶어서요.”“그렇다고 문을 잠글 필요까지 있나요?”강하리는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문을 잠그는 행동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그녀는 임명우와의 협력을 계속 거부해 왔는데 임명우의 의도적인 접근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그런 의도적인 접근은 마치 예전의 정양철처럼 대개 특정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는 임명우에게 항상 거부감을 느껴왔다.하지만 지금까지 임명우는 특별히 이상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오늘처럼 문을 잠근 것은 처음이었다.강하리는 임명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임명우는 웃으며 어딘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저는 강 대표님의 신뢰를 받을 자격이 없나요?”강하리는 차가운 눈빛으로 임명우를 바라보았다.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주고받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임 대표님,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어요. 우리 모두의 시간은 소중하니까요. 그렇죠?”임명우는 또 한 번 그녀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강하리의 표정이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것을 보며 그는 어색한 미소를 거두었다.“제가 꼼수를 써서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요? 강 대표님, 왜 저를 그렇게 싫어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싫어하는 데는 이유가 필요 없어요. 임 대표님, 본론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강하리는 말을 마치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하지만 그녀가 문에 도착하기 전에, 임명우가 그녀를 가로막았다.“임명우 씨!”강하리는 임명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대체 무슨 짓이에요?”“강하리 씨, 저와 거래를 하죠. 강하리 씨가 저를 다정하게 대해주면 제가 그 심리 상담사를 구승훈 옆에서 떼어내
강하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노민우 씨는 해야 할 일 해요. 손연지와 얘기 좀 할게요.”노민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연지를 돌아보았다.“어제 진짜 아무것도 안 했어.”손연지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럼 내 몸에 있는 이 흔적들은 내가 스스로 만든 거야?”“그냥 키스만 했어.”“아까는 아무것도 안 했다더니, 이제는 키스만 했다고?”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자 강하리는 재빨리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병원 정원에서.강하리는 손연지의 화난 모습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아직도 웃겨? 너 누구 편이야?”강하리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화내지 마. 노민우는 사실 괜찮은 사람이야.”손연지가 말하려던 순간, 강하리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내 말 좀 들어봐.”강하리는 어제 노민우가 자신에게 했던 이야기를 손연지에게 대략적으로 전했다.손연지는 강하리를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미쳤어?”강하리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번졌다.“미쳤는지는 그 사람이 더 잘 알겠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미쳐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렇지?”강하리는 손연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하지만 노민우 씨가 여씨 가문과 완전히 관계를 끊기 전까지는 더 깊은 관계는 맺지 마.”손연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참 후, 그녀가 강하리를 돌아보며 물었다.“왜 병원에 왔어? 혹시 아픈 거야?”“일이 좀 있어서.”손연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두 사람은 정원에 앉아 있다가 각자의 일을 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강하리는 약병을 약리 연구소에 가져다주고 인성 테크로 향했다.안예서는 이미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강하리를 보자마자 달려왔다.“대표님, 방금 회의 일정이 추가되었어요. 오후에 출장을 가야 할 수도 있다고 하네요.”강하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안예서를 돌아보았다.“언제 통보받았어?”“방금이요.”강하리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안예서는 불안해졌다.안예서는 강하리가 원래 임명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지금 이렇게 온 것도 계약 때
구승훈은 자연스럽게 강하리 앞으로 다가갔다.그녀 손에 들린 작은 병을 빼앗아 들고 우유 컵을 그녀에게 건넸다.“노민준이 준 약이야. 손 찔리겠다.”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시선을 구승훈의 얼굴에 고정한 채 그의 표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하지만 구승훈이 너무 잘 감추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그의 얼굴에서 어떠한 이상한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괜찮다고 하지 않았어?”“응, 괜찮아.”구승훈은 대답하며 그녀의 팔을 끌어당겨 의자에 앉혔다.“노민준이 신경 써서 꾸준히 복용해야 한다고 했어. 걱정하지 마, 괜찮아. 나중에 연성시에 돌아가서 심리 치료도 함께 받으면 금방 나을 거야.”강하리는 구승훈이 다시 쓰레기통에 버린 앰플 병을 내려다보다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같이 야근할까?”“괜찮아. 가서 쉬어.”그러고는 일어나서 프린터 옆에 있는 자료를 가져왔다.구승훈은 떠날 생각 없이 그 자리에 앉아 이메일을 확인했고 강하리도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일을 계속했다.구승훈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임희주의 계획을 노민준에게 이메일로 보냈다.서재의 고요함은 새벽 2시까지 이어졌고 강하리가 일을 계속하고 있자 구승훈은 그녀의 손에서 자료를 빼앗았다.“자.”그러고는 강제로 강하리를 끌어안고 침실로 향했다.두 사람은 밤새도록 아무 말도 없었다. 그 앰플 병에 대한 일은 잊힌 듯했다.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바빴다.구승재는 미국에서 돌아왔고 구승훈은 오늘 회사에 가서 그를 만나야 했다.“회사에 데려다줄까?”구승훈은 강하리의 허리를 잡으며 물었고 강하리는 생각할 틈도 없이 거절했다.“직접 거래처에 갈 거야.”“그럼 내가 거래처까지 데려다줄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거절했다.구승훈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집을 나섰다.강하리는 연정이와 조용히 아침 식사를 했다.연정이
강하리는 침실 문을 흘끗 보고는 구승훈을 무시했다.하지만 곧 밖에서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강하리가 ‘꺼져!’라고 말하려던 순간, 가정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사모님이 술 드셨으니, 숙취 해소에 좋은 차를 끓여 드리라고 하셨습니다.”“구승훈은 지금 옆에 있어요?”가정부는 옆에 서 있는 구승훈을 힐끗 보며 대답했다.“아니요, 대표님은 방금 준봉 씨와 함께 서재로 가셨습니다.”가정부가 말을 마치자 강하리는 바로 문을 열었다.그러자 문 앞에는 숙취 해소차를 들고 있는 구승훈과 그의 뒤에 서서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정부가 있었다.“이제 가서 쉬세요.”구승훈은 가정부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러고는 숙취 해소차를 들고 침실로 들어왔다.강하리가 말할 틈도 없이 그는 숙취 해소차를 한 모금 마시고 바로 강하리에게 입을 맞췄다.강하리는 구승훈에게 숙취 해소차를 넘겨받았지만 삼키기도 전에 구승훈은 다시 키스를 퍼부었다.강하리가 숨이 가쁠 때까지 구승훈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고 숙취 해소차는 누가 더 많이 마셨는지 알 수 없었다.“맛있어?”구승훈은 강하리의 입술을 핥으며 아쉬운 듯 물었다.강하리는 그를 밀어내며 침실 안쪽으로 걸어갔다.“나가서 자.”구승훈은 숙취 해소차를 옆에 내려놓고 강하리의 손을 잡았다.“아직 화났어? 내가 잘못했어. 임희주 씨 문제는 내가 잘 처리할게. 응?”강하리는 그를 무시하고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구승훈은 강하리를 무릎에 앉히고 따뜻한 숨결을 그녀의 목덜미에 뿌리며 부드럽게 입술을 핥았다.“그럼 내가 잘못을 만회할게.”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오늘 밤, 강 대표님을 편안하게 모실게. 어때?”강하리는 임희주의 끈질긴 집착 때문에 짜증이 났을 뿐이지 진짜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지금 이 남자의 뻔뻔한 모습을 보니 화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좀 염치가 있어야지.”“염치가 중요한 게 아니야.”구승훈은 콧방귀를 뀌며 손을 강하리의 잠옷
구승훈은 휴대전화 화면에 뜬 메시지를 보자마자 주저 없이 준봉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재로 와.”준봉은 곧 자료를 들고 서재로 왔다.“말해 봐.”준봉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보고했다.“임희주 씨의 과거는 조작된 것 같습니다. 이전에 조사했던 정보에 따르면 임희주 씨는 남쪽 작은 도시의 보육원 출신이고 여 사모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걸로 보입니다. 며칠 전에 대표님께서 여 사모님 쪽을 조사해 보라고 하셔서 관련된 사람들을 추적해 봤는데 여씨 가문의 오래된 집사가 몇 년 동안 연성시 외곽의 보육원을 후원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보육원을 조사해 보니 실제로 임희주 씨는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입양되었는데 입양한 사람이 그 집사의 고향 친구였답니다.”준봉은 말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구승훈의 표정을 살폈다.임희주의 출신을 보면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사람을 키워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만약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을 해치기 위해 이렇게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마음이 어떨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준봉은 구승훈의 표정을 긴장하며 지켜보았지만 구승훈의 표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었다.다만, 그 깊고 짙은 눈동자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대표님, 괜찮으세요?”구승훈은 눈썹을 살짝 올리며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별일 아니야.”준봉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했다.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대표님은 사모님과 아가씨가 계시잖아요. 두 분 다 잘 지내고 계시니까요.”구승훈은 대답하지 않고 잠시 후 다시 물었다.“아내가 화난 데다가 꼬맹이까지 울려버렸어. 어떻게 달래야 할까?”“네?”준봉은 잠시 억울한 표정을 짓다가 한참 만에 대답했다.“대표님, 저는 아직 솔로예요.”구승훈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나가 봐.”“그럼 임 선생은 어떻게 할까요?”구승훈의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다.“계속 감시해. 조만간 여씨 가문 사모님과 연락할 거야.”준봉은
노민우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얼굴에 가득했던 득의만만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강하리의 화난 모습을 보니 솔직히 겁이 났다.“저기, 승훈이랑 싸웠어요?”“민우 씨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말해봐요, 무슨 일이에요? 손연지는 어디 있어요?”“손연지는 호텔에 있어요.”노민우는 잠시 말을 멈췄다.강하리는 서두르지 않고 노민우를 가만히 지켜보았다.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 노민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우리 회사, 강하리 씨가 인수해 줬으면 좋겠어요.”강하리는 놀라서 노민우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노씨 가문은 의학계의 명문가였고 대대로 의사 집안이었다.이번 세대에는 병원을 노민준에게 물려주었지만 노민우 또한 의료계를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다.그는 명인병원 지분 외에도 의약품과 의료기기 사업을 하는 회사를 직접 설립했고 꾸준히 잘 운영해 왔다.그런데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가 뭘까?“무슨 뜻이에요?”노민우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솔직히 말해서, 전 어릴 때부터 엄마를 무서워했어요. 엄마는 항상 강압적이었고 제 결혼을 강요하면서 제가 거부하면 손연지에게 달려갈 거라고 협박했어요.”그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엄마 말에 따라 결혼했는데도 엄마는 손연지를 찾아가는 바람에 손연지가 많이 억울하게 됐어요. 다 제가 잘못한 탓이죠.”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무 말 없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노민우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손연지에게 보상을 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저도 노력해서 손연지에게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사실 전 승훈이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손연지에게 달려갈 수 없어요.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손연지에게 가면, 오히려 우리 둘 다 더 힘들어질 거예요. 그래서 우리 회사를 먼저 정리하고 싶어요.”강하리는 이제야 그의 의도를 이해했다.“하지만 굳이 저한테 부탁할 필요가 있을까요? 노민우 씨도 회사를 독립시킬 수 있잖아요. 아니면, 구승훈이 도와줄 수도 있고요.”노민우는 웃으며 말
강하리는 스스로 최근 구승훈에게 꽤 너그러웠다고 생각했다.그를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솔직히 속으로는 답답함이 끓어올랐다.강하리의 마음속에서 구승훈은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구승훈이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여자의 끊임없는 도발까지 참을 수는 없었다.구승훈의 입가가 씰룩였다. 아마도 오랜만에 강하리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아서인지 그는 오히려 흥미롭게 느껴졌다.그는 강하리를 번쩍 들어 자기 무릎에 앉히며 말했다.“내가 처리할게. 네가 직접 나서는 일은 없을 거야, 됐지?”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히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닥쳐.”구승훈은 강하리를 달래려고 몇 마디 더 하려다가 강하리의 냉정한 말에 곧 입꼬리가 떨어지며 입을 다물었다.차가 저택 앞에 멈출 때까지 강하리의 표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차가 멈추자, 강하리는 화가 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문 앞에 도착하자 그녀는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노민우를 보았다.“담배 꺼요.”노민우는 떨리는 손으로 재빨리 담배를 껐다.그는 일어서서 강하리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고 다가갔지만 강하리는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가며 문을 쾅 닫아 버렸다.노민우는 당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왜, 왜 이래?”구승훈은 노민우를 흘겨보며 쏘아붙였다.“너는 손연지랑 있지 않고 우리 집엔 왜 왔어?”노민우는 코를 긁적이며 답했다.“강하리 씨 만나러 왔어.”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누구 만나려고?”“노민우 씨, 들어오세요.”그때, 강하리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오자 구승훈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나 먼저 들어갈게.”노민우는 웃음을 머금고 구승훈에게 손을 흔들었고 구승훈의 어이없는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서재로 와요.”그는 강하리가 일어서서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쏜살같이 따라 올라갔다.구승훈은 한숨을 쉬며 가정부에게 연정이를 데려오라고 부탁했다.“쉬세요.
방에서 나온 강하리는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하지만 화장실에 도착하기 전, 그녀는 멀리서 구승훈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는 한 손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복도에 서 있었는데 거리가 멀어 그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와 마주 보고 서 있는 사람이 바로 임희주라는 것은 분명했다.강하리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옆으로 비켜섰다. 그때, 그녀 옆에서 누군가가 말했다.“강 대표님, 안 가보세요?”강하리가 고개를 돌리자 미소 띤 얼굴의 임명우가 보였다.“임 대표와 무슨 상관이죠?”임명우는 손에 술잔을 든 채, 그녀의 말에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냥 강 대표님은 눈에 든 모래 한 톨도 못 참는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너그러운 것 같네요.”강하리는 비웃으며 말했다.“임 대표님, 협상하려면 협상만 하세요. 이러시면 제가 방법을 써서 계약을 강제로 해지하는 수가 있어요.”임명우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가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너무 섣불렀네요. 하지만 강 대표님에게 남자를 너무 믿지 말라고 조언해 드리고 싶었어요.”그러고는 잠시 멈추다가 말을 이어갔다.“아, 내일 사업 협상이 있는데, 제가 자료를 이메일로 보내드릴게요. 강 대표님, 내일 뵙겠습니다.”임명우는 그녀에게 술잔을 들어 보이며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강하리는 임명우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이상한 짜증이 솟아올랐다.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이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구승훈 쪽으로 걸어갔다.클럽은 그렇게 조용한 곳이 아니었지만 하이힐이 바닥을 찍는 소리는 여전히 또렷하게 들렸고 구승훈과 임희주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를 보는 순간, 구승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고 임희주는 잠시 멍한 표정을 보이다가 이내 따라 웃었다.“강하리 씨.”강하리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어요?”그녀는 구승훈 옆에 서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조명에 비친 그녀의 눈은 유난히 빛났다.구승훈은 손을 들어 그녀를 끌어안으며
“좋아해, 됐지?”손연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한 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며 곧 잠들 준비를 했다.노민우는 순간적으로 숨이 막힐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 비록 손연지의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그의 마음 한편에는 미묘한 설렘이 피어오르고 있었다.그 말 한마디 속에 어쩌면 자신을 조금이라도 좋아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싹텄다.“그럼 소영준은 아직도 좋아해?”노민우가 조심스레 물었다.“귀찮게 굴지 마.”손연지는 짜증 섞인 어조로 대답했고 노민우는 잠시 말을 멈춘 후 다시 물었다.“그럼 누가 제일 좋아?”“하리.”손연지는 눈을 흐리게 뜬 채로 답했다.더 물어보려 했지만 그 순간 노민우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여사님’이라는 세 글자가 보이자 노민우는 머리가 지끈거렸고 화면을 보기만 할 뿐 전화를 받지 않았다.전화가 더 이상 울리지 않게 되자 노민우는 곧바로 노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형, 엄마 좀 말려줘. 그리고 나 결혼 취소한 거, 형이 할아버지께 말씀드려.”“너 확실한 거야?”노민준은 대답 대신 노민우의 마음을 물었다.노민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묻기 전에 노민준이 덧붙였다.“결혼 취소한 건 내가 할아버지께 말씀드릴 수 있어. 할아버지께서도 여씨 가문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으니까. 하지만 어머니의 반대를 꿋꿋이 이겨내고 손 선생이랑 잘 지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어? 동생아, 이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결심이 확실하지 않다면 함부로 약속하지 마. 너도 승훈이처럼 가족을 등 돌리게 될 수도 있어. 그럴 수 있겠어?”그럴 수 있다고 답하려던 찰나, 노민우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노민준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삼촌 쪽은 내가 막아볼게. 하지만 잘 생각해 봐. 그리고 정말 결혼을 취소할 거라면 여씨 가문에 직접 가서 이유를 설명해.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모든 일을 손 선생이 떠안게 될 거야. 알았지? 난 삼촌 보러 가야겠다.”전화를 끊은 후, 노민우는 한숨과 함께 손연지를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