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훈은 장진영을 처리한 뒤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중환자실 문 앞에 서 있는 강하리가 의사와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구승훈은 바로 다가가지 않고 옆으로 가서 손을 씻은 뒤 강하리 곁으로 갔다. “어머님 보러 왔어? 상황은 좀 어때?” 강하리의 눈은 아직도 약간 충혈되어 있었다. 정서원의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고 의사는 최대한 에둘러 말을 전했다. 겨우 기운을 되찾았는데 지금 병상에 누워있는 그녀의 얼굴은 거의 투명할 정도로 하얗게 변해 있었다. 강하리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더니 표정을 감추며 물었다. “장진영 씨 쪽은 어떻게 됐어요?”구승훈은 강하리에게 상황을 전했고 그녀는 순간 당황했다.“그럼 우리 엄마를 납치한 사람이 정말 그 여자가 아니라고요?” 구승훈은 눈이 아주 잠깐 번뜩였다.“아직 몰라. 동영상 일도 순간적으로 물어본 거고, 정말 납치를 지시했다면 진작 준비를 했을 거야. 아직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어. 나중에 더 털어놓을 수도 있으니까 지켜보자.”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장진영 씨는 어떻게 했어요?”구승훈의 눈빛이 서늘했다.“좋은 데로 보냈어.”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 “좋은 곳 어디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먹고 자고 즐거움도 있는 곳.”구승훈은 강하리를 병동으로 다시 끌어당기며 말했다. “나 너무 피곤해서 좀 쉬고 싶어.” 말을 마친 남자는 강하리 앞에서 대놓고 옷을 벗으며 병원복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에 누우려 했고 강하리는 깜짝 놀랐다.“그쪽 병실 가서 쉬어요.”하지만 구승훈은 누워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 좀 쉬게 해줘.” 강하리는 그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차마 그를 내쫓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구승훈은 정말 피곤한 상태였다. 피도 많이 흘린 데다 수술을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 신기할 지경이었다. 침대에 누운 그는 정말 잠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강하리는 곁에 서서 그를 깨워야
둘은 오랫동안 함께 지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그녀가 피하려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입맞춤을 했고 강하리는 깜짝 놀라 그를 힘껏 밀어냈다.“구승훈 씨, 아직 양치도 안 했는데 키스를 해요?”구승훈이 웃으며 말했다.“양치 안 한 게 뭐 어때서, 다른 데도 키스했는데.”강하리는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쳐다봤다. “어디에 키스했는데요?”구승훈은 대답 대신 욕망만이 가득한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보기만 했다.이른 아침엔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닌데, 이미 잔뜩 단단해진 상태에서 이런 말을 하자 문득 자신의 어깨에 그녀의 다리를 올려놓았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남자의 목울대가 일렁거리더니 그녀의 귀에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기억나게 해 줘?”강하리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고 몸을 뒤척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내가 왜 침대에 누워 있어요?”구승훈이 웃었다.“내가 정말 널 소파에서 재울까 봐?”강하리는 시선을 돌렸다.“어젯밤 내가 발로 찬 건 아니죠?”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발로 찬 게 한두 번이야? 이미 익숙해졌어.”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곧장 화장실로 들어갔고, 들어가니 얼굴에 열기가 느껴졌다.구승훈이 방금 꺼낸 말 때문에 문득 사실이라 믿고 싶지 않은 장면들이 떠올랐다.호텔, 욕실, 세면대.흐릿한 이미지였지만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미간을 꾹 눌렀다. 설마 그날 밤 구승훈이 자신을...차마 더 생각할 수가 없었다.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조심스럽게 안을 들여다본 구승재는 이상한 장면이 보이지 않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형, 하리 씨는 어딨어?”질문을 던진 그는 구승훈이 대답하기도 전에 알아서 말을 이어갔다.“난 이제 미안해서 하리 씨 못 보겠어. 하리 씨가 이젠 나 안 믿을 것 같아. 형, 형 때문에 난 너무 많은 걸 희생했어.”구승훈은 그를 바라보다가 눈썹을 치켜올렸고 구승재가 뒤를 돌아보니 강하리가 화장실 문간에 서서 한심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
구승현!송동혁은 자신에게 만나자고 한 사람이 구승현일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눈앞에 있는 남자는 20대였지만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볼캡 모자를 쓴 그의 눈은 음침하고 불길한 기운이 가득했다.“자네가 왜 여기 있어?”그의 기억대로라면 구승현은 분명 쫓겨났는데?구승현이 웃었다.“제가 왜 여기 있으면 안 되죠?”송동혁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송유라가 구승현과 손잡고 강하리를 납치한 걸 그는 다 알고 있었다.이제 구승현이 구승훈에게 잡히면 송유라가 그 불똥을 피할 수 없을까 봐 두려웠다.“승훈이한테 들키는 게 두렵지도 않아?”구승훈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구승현의 두 눈에 매서운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구승훈이 뭐라고, 우리 집 영감이 얼마 전에 구씨 가문 권력을 전부 다 빼앗았어요. 구씨 가문이 없으면 걔가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이번에 돌아온 것도 영감탱이가 불렀어요. 구승훈 손에 있던 힘을 뺏고 날 불렀다는 건 무슨 뜻이겠어요?”송동혁은 구승현의 말을 믿지 않았다.눈 달린 사람이라면 구승훈이 구승현보다 몇 배는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구씨 가문 어르신이 장님이 아닌 이상 구승현에게 구씨 가문을 물려주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그래도 구승현이 눈앞에 나타나니 마치 탈출구가 생긴 것 같았다.그동안 그는 절망적인 상황에 내몰리고 있었다.S제약 회사의 자금 조달이 연이어 끊어졌고 그는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그러다 결국 이젠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게다가 송유라는 지금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를 더욱 끌어내리고 있었다.이런 생각에 송동혁은 후회하며 피를 토하고 싶었다.구승훈이 강하리를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줄 알았다면 애초에 강하리를 곁에 둘걸.사생아로 키워도 괜찮았다.애초에 예쁜 외모를 타고난 강하리는 구승훈과의 관계도 기정사실이 되었기에 지금처럼 그 일이 드러날까 조마조마하며 살지 않아도 되었다.하지만 이제 와서 땅을 치며
“뭐?” 송동혁은 또 한 번 놀랐다. “그년이 감히!”구승훈인 줄 알았는데, 강하리였어?그 잡것이 어쩌다 이렇게 몸집이 커졌을까.하지만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왜 나한테 이런 걸 알려주는 거지?”“송동혁 씨, 우리 손 잡죠. 그쪽 금전적인 문제는 내가 도와줄 테니까 당신은 강하리의 북교 프로젝트를 망쳐놔요. 당신 아내는 그쪽 딸이 나서면 될 거예요. 비록 지금 입지가 많이 줄어들긴 했는데 그래도 옛정이 있죠.”...강하리는 퇴근 직전 구승훈의 전화를 받았다.“회의 끝났다며?”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안예서를 바라봤고 안예서는 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부장님 왜 그러세요?”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구승훈은 낮게 웃었다.“뭐 먹고 싶어? 내가 데리러 갈까?”“돌아다니지 말고 얌전히 병원에 있어요.”“나 벌써 회사 밑에 도착했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강하리는 멈칫했다.“그냥 얌전히 치료받을 수는 없어요?”구승훈이 웃으며 말했다.“내 몸은 문제없어. 강 대표가 원하는 건 지금 뭐든 들어줄 수 있지.”강하리는 그의 짓궂은 말을 못 들은 척했다.“그럼 회사 앞에 차 주차하지 마요.”입이 방정맞은 안예서가 있었기에 아직 어떠한 사이도 아닌데 벌써 회사에 소문나기 싫었다.그런데 구승훈이 다소 속상한 듯 살짝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남들이 보는 게 싫어?”“네.”강하리는 그렇게 말하며 바로 전화를 끊었고 구승훈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낮게 웃었다.메시지를 보내려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고 힐끗 확인한 그가 전화를 받았다.저쪽에서 구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형, 할아버지가 둘째 형을 데려왔어. 게다가 할아버지는 형이 계속 하리 씨 만나면 둘째 형한테 구씨 가문을 물려주겠다는 뜻인 것 같아. 지금 할아버지가 너무 꽉 잡고 있어서 우리가 건드리고 싶어도 못 건드려. 할아버지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구승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할아버지가 이런 방법을 쓸 줄이야.그는 구씨 가문 따위 안중에도 없었고 오히
안예서는 유난히 열정적으로 구승훈을 반겼다.전에 에비뉴에 있을 때는 구승훈을 보면 무서웠지만 퇴사한 지금은 무서울 게 없었다.“구 대표님 여기서 누구 기다리세요?”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강하리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네, 누구 기다리고 있어요.”“그럼 일 보세요, 저랑 부장님은 이만 갈게요.”그때 구승훈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강하리가 경고하는 눈빛으로 그를 돌아보았지만 구승훈은 웃기만 했다.“강 대표님, 북교 신도시 개발 프로젝트를 맡을 계획이신가요? 우리도 협력할 수 있어요.”안예서는 순간 당황했다.“구 대표님, 소식 참 빠르시네요. 저희도 오늘 막 파트너를 찾기 위해 미팅했는데.”하지만 구승훈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강하리만 바라보았고 강하리는 그를 흘깃 쳐다볼 뿐 더 말하지 않았다.“얘기 좀 하죠.”그렇게 말한 뒤 안예서를 바라보며 말했다.“먼저 가봐, 예서 씨.”안예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먼저 갈게요, 부장님, 구 대표님, 안녕히 계세요.”안예서가 떠난 뒤에야 강하리는 구승훈을 노려보았고 구승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 덜 걷게 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차에 탔고 구승훈이 다가와 안전벨트 매는 걸 도왔다.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그의 시선이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그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깨달은 강하리는 황급히 그를 밀어냈다.“구승훈 씨, 여기 아직 회사 앞이에요. 내일 여기저기 소문 나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있어요.”“하리야, 사람들이 우리 관계를 아는 게 그렇게 무서워?”강하리는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당신은 손가락질받고 소문 퍼지는 게 어떤 건지 경험해 보지 않았으니까 내가 왜 싫어하는지 이해 못 할 거예요.”그녀와 구승훈이 어떻게 될지 지금은 아무도 모른다.나중에 그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또다시 빌붙으려다가 실패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이 관계에서 그녀는 피동적인 입장이었지만 남들은 언제나 제멋대로 상상하고 판단하니까.구
“그럼 앞으로 자주 올까?” “오빠!” 구승훈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자 멀지 않은 곳에 구승유가 서 있었다. 그리고 구승유 옆에 서 있는 건 다름 아닌 문연진이었다. 구승훈의 눈빛은 어두워졌고 그가 말을 하기도 전에 구승유는 문연진을 끌어당겼다. “오빠, 이런 우연이 있네. 오빠도 여기 왔어?” 구승훈의 얼굴은 차가웠다. “인사 했으면 가.” 구승유가 투덜거렸다.“오빠, 태도가 왜 그래? 연진 언니가 오빠 건강 생각해서 약선 음식 배우려고 특별히 여기까지 온 거야.” 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문연진을 끌어당기며 자리에 앉고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 씨 안녕하세요, 또 만났네요. 제 소개를 하자면 저는 승훈 오빠 여동생 구승유라고 하고, 이쪽은 문연진 씨인데...”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문연진을 가리켰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문연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우리 전에 만난 적 있죠, 강하리 씨?” 구승유는 살짝 놀랐다.“어디서 만났어?”“병원에서.” 문연진은 말을 마치고 강하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강하리 씨, 우리 두 번째 만남이네요.” 강하리가 말하기도 전에 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자신의 품으로 가져왔다.“아무하고 악수하지 마, 나중에 손 씻어야 하잖아.”“오빠,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구승유가 발끈했지만 구승훈은 무덤덤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쫓아낼까?” “오빠 생각해서 그러는 거잖아, 연진 언니는...” 구승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연진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승유야, 그만해. 우리가 지금 남의 식사를 방해하고 있잖아.”그녀는 강하리를 향해 싱긋 웃었다.“두 사람 식사 방해하지 않을게요.”구승훈에게도 이렇게 말했다.“승훈 오빠, 미안해요. 승유가 아직 어려서 그러니까 화내지 마요.”구승유는 여전히 떠나기 싫었지만 구승훈의 살벌한 표정을 보고는 강하리를 향해 분노에 찬 눈빛을 보내며 자리를 떴다. 두 사람이 사라지고 나서야
강하리는 깜짝 놀랐다. 구승훈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아직도 화났어?” 강하리는 대답 대신 그를 밀어냈다. “빨리 병원으로 돌아가요, 곧 연지 올 시간이에요.”하지만 구승훈은 떠날 생각이 없었다. “조금만 더 같이 있을게.” 강하리는 그를 힐끗 보고는 부엌으로 들어가 찻잎을 꺼내고 물을 끓였다.구승훈은 방안을 돌아보며 물었다.“어디가 네 방이야?”강하리가 가리키자 구승훈은 가서 문을 열어보고는 뒤에서 다가와 그녀를 껴안았다.“아파트로 옮겨. 네가 오면 내가 게스트룸에 있을게. 여긴 조건이 너무 안 좋아.”강하리는 자신이 돌아가도 그가 게스트룸에 머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도 좋아요. 난 여기서 사는 게 편해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다시 그를 밖으로 밀어냈다.“그만해요.”이미 물이 끓고 있었고 강하리는 그에게 차 한 잔을 따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구승훈은 그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몸을 기울여 그녀에 밀착시켰다. “차보다는 다른 걸 마시고 싶은데.” 당황한 강하리의 머릿속에 그 장면이 스쳐 지나가고 얼굴이 화끈거렸다.“구승훈 씨, 당신...” 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구승훈의 입술이 다가오는데, 바로 그때 집 문이 갑자기 열렸다.깜짝 놀란 강하리가 구승훈을 홱 밀쳤고 손연지가 문 안으로 들어섰을 때 눈에 들어온 건 붉어진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는 강하리와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구승훈의 모습뿐이었다. 그녀는 머릿속이 어지러웠다.“설마, 프러포즈? 이렇게 빨리?” 강하리는 어색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노려보았다.“상처 괜찮아요?”구승훈은 자연스럽게 일어서더니 차갑고 무거운 눈빛으로 손연지를 바라보았다. “손 선생님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요.” 손연지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내가 대체 뭘 망친 걸까.순간 그녀의 표정이 험악해졌다.“내 기억이 맞다면 여긴 우리 집인데요!”강하리는 구승훈을 밖으로 밀어냈다. “빨리 돌아가요.” 손연지도 돌아왔기에 구승훈은 더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
“오빠, 다른 게 아니라 부탁할 게 있어요. 우리의 옛정을 생각해서 엄마 내보내 주면 안 돼요? 다 날 위해서 그런 거니까 그 죗값은 내가 받을게요. 엄마 풀어줘요, 네?”송유라는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구승훈은 딱딱하게 한 마디만 뱉었다.“송유라, 옛정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야.”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었고 번호를 차단하기까지 했다.강하리가 구승훈을 보낸 뒤 손연지를 돌아보자 그녀는 씩씩거리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내가 안 돌아왔으면 그 자식이랑 했어?”강하리가 피식 웃었다.“무슨 생각하는 거야.”손연지는 콧방귀를 뀌었다.“그렇게 쉽게 널 주면 안 돼, 알았지? 안 그러면 그 개자식은 소중한 줄 몰라.”개 같은 남자는 소중히 여길 줄 모를 거야.”강하리가 웃으며 말했다.“알았어, 근데 넌 왜 그래? 왜 씩씩거리면서 돌아와?”그 말에 손연지는 속에 열불이 치솟았다.“노민우 대체 뭐 하는 놈이야! 다 큰 자식이 산부인과 번호만 연달아 열두 번이나 끊었어, 오늘 얼굴만 봐도 토할 것 같아.”“...”그제야 지난번 노민우가 손연지에 대해 물었던 것을 떠올렸다.“노민우랑 대체 무슨 원한이 있는 거야?”손연지는 여전히 씩씩거렸다.“전에는 없었어도 오늘부터 원한이 생겼어!”“진정해.”그녀는 노민우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본성은 나쁘지 않아도 어중이떠중이들과 어울린다는 건 뼛속 깊이 그런 근성이 있다는 뜻이었다.손연지는 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알아, 내 일터에 다시 오지 않는 한 신경 안 써.”강하리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고 고민 끝에 그녀는 방으로 돌아가 노민우에게 연락했다.하루 종일 병원에 있다가 이제 막 집으로 돌아온 노민우는 강하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강 부장님? 무슨 일로 전화했어요?”노민우는 말하며 셔츠 깃을 잡아당겼고, 왠지 모르게 입이 마르며 몸에 열기가 느껴졌다.강하리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노민우 씨, 연지 괴롭히지 않으면 안 돼요?”노민우는 순간 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