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일 있으면 연락해.”강하리는 대답을 하고 병동을 나섰다.그녀가 막 엘리베이터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안에서 가 나온 사람은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 몇 명과 근엄한 노인이었다.생활한복을 입고 지팡이를 짚은 노인은 바로 구씨 가문 어르신, 구동근이었다.그 옆에는 젊은 여자도 있었는데 스물다섯, 여섯 살로 보이는 그녀는 예쁜 외모에 우월한 분위기를 자랑했다.여인은 강하리를 살며시 훑어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할아버지, 승훈 오빠가 저를 반기지 않으면 어떡해요?”구동근의 눈엔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그러기만 해봐, 내가 그 자식 혼내야지!”여자의 입가에 번진 달콤한 미소가 유난히 교태를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안 돼요, 때리게 둘 수는 없죠.”강하리는 그 순간 이 여자의 정체를 알아챘다. 구씨 가문에서 구승훈에게 찾아준 맞선 상대겠지.입술을 달싹이며 옆에 서 있던 그녀의 마음이 저릿했다.진작 생각했어야 하는데, 구씨 가문에서 구승훈의 결혼을 재촉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다.지난해 그의 생일부터 구동근은 한차례 주선한 적이 있었지만 결국 구승훈에 의해 무산되었다.이번에도 같은 수법인 것 같은데 그녀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내색은 안 해도 마음이 말이 아니었다.구승훈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했지만 마음의 응어리는 풀리지 않았다.그들 사이에는 너무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언제 귀국할지 모르는 송유라와 이젠 집안에서 주선한 맞선 상대에 그녀는 안중에도 없는 구씨 가문 사람들까지.강하리는 가슴 속 답답함을 숨기며 한숨을 내쉬고 병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구동근의 매서운 눈빛이 문득 그녀의 뒷모습에 향했고,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에는 혐오감을 감추려는 노력조차 없었다.…손연지가 아침 식사 2인분을 손에 들고 들어왔다.“어때, 구승훈은 일어났어? 심각하게 다친 거야? 팥죽 주문했는데 네가 갖다줄래?”강하리는 음식을 건네받으며 애써 웃었다.“고마워.”그녀의 안색이 어두워 보이자 손연지가
이어서 구승훈의 목소리가 들렸다.“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저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구승훈, 네가 재주 좀 부린다고 내가 널 못 건드릴 줄 알아?”바로 이어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할아버지, 화내지 마세요. 승훈 오빠도 말만 그렇게 하는 거예요. 오빠, 할아버지 화나게 하지 마요. 어제도 오빠 때문에 고혈압 오셨어요.”듣다 못 한 강하리는 문 앞 창턱에 죽을 놓고 곧장 뒤돌아 떠났다.병실로 돌아왔을 때는 의사 선생님도 교대를 마친 뒤였다.중환자실 밖에서 강하리는 의사가 진찰을 마치고 내부에서 나올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고 의사는 강하리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강하리 씨, 진료실 가서 얘기하시죠.”강하리의 심장이 철렁하며 양옆으로 드리운 손에 힘이 들어갔다.의사를 따라 진료실로 들어가자 상대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이어갔다.“어머니 상태가 좋지 않아요.”강하리의 심장이 순식간에 바닥을 치는 것 같았다.“어떻게, 어떻게 안 좋으신데요?”의사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막 깨어나셨을 때 이미 몸의 여러 장기가 각기 서로 다른 정도로 망가졌으니 평소에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죠. 그런데 전에 재활 기계에서 넘어진 후에 대량의 안정제를 투여받았어요. 그 정도 양이면 어머니 같은 분은 말할 것도 없고 정상인도 견디지 못하죠. 이미 투석을 하고 있지만 장기부전이 계속 악화되고 있어요. 강하리 씨,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이런 식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밖에 없고 기적이 다시 나타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멍하니 듣고 있던 강하리는 얼핏 보기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엄청난 고통 뒤엔 무뎌지기 마련이다.이제 곧 밝은 나날을 맞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충분히 노력했는데 무심한 하늘은 그녀가 잘 살길 바라지 않는 듯싶다.그녀의 손에 모든 걸 다 쥐여주고서 또다시 잔인하고 매정하게 다시 빼앗아 간다.강하리는 자신이 어떻게 진료실에서 나왔는지, 어떻
간단한 한마디가 강하리의 거짓된 평온함을 무너뜨리는 날카로운 무기가 된 듯했다.순식간에 그녀의 모든 강인함이 무너졌다.맨발로 침대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더니 그의 무릎에 고개를 묻고 낮은 소리로 흐느꼈다.구승훈의 눈에도 안타까움이 가득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울게 내버려뒀다.그녀의 울음이 잦아들고 나서야 그는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강하리는 왠지 불편한 마음에 붉어진 눈으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시간 없는 줄 알았는데.”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시간이 없어도 너를 위해서라면 낼 수 있어.”강하리는 한참 입술을 다물고 있다가 물었다.“아까 그 여자 집안에서 결혼 주선해 준 사람인가요?”구승훈은 피식 웃더니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질투해?”강하리는 그의 손을 치웠다.“질투할 게 뭐가 있어요.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닌데.”구승훈이 그녀를 확 끌어당겨 고개를 파묻더니 그녀의 목덜미를 파득 깨물었다.“지금은 아무 사이가 아니라도 나중엔 다를 수도 있지!”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미 송유라 한 명 때문에 충분히 힘들었는데 이젠 정서원마저 그녀 때문에 더 힘들어졌다.송유라보다 더 훌륭한 집안과 구씨 가문 사람들의 반대에 그녀처럼 힘없는 사람이 과연 그들과 싸울 수 있을까?구승훈 단번에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다.다시 물러서려는 그녀를 보며 남자의 얼굴이 말없이 어두워졌다.그는 여자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자신은 기회를 잡기 위해 그렇게 오랫동안 노력했는데 그녀는 이대로 한 순간에 물러나겠다고?어림도 없지.그는 강하리의 허리를 붙잡았고 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대로 안아 들고 휠체어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갔다.다리를 뻗어 병실 문을 발로 차고 돌아선 다음 곧바로 침대에 눕혔다.“구승훈 씨, 미쳤어요?”“강하리, 정말 상관없다면 그냥 날 밀어내.”말을 마친 구승훈은 한껏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녀의 앞섬을 열고 고개를 숙여 입
“누구요?” 강하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구승재는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돌아보았다.“아마 장진영인 것 같아요. 아주머니를 납치한 주범이 장진영 고등학교 동창이고, 얼마 전에 둘이 연락을 주고받았어요.”구승훈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장진영과 송동혁은 어디 있어?”“송동혁은 회사 일로 바빠서 한동안 얌전히 지내면서 여기저기서 투자를 받고 있어. 장진영은 우리가 데려왔는데 계속 울면서 그 사람한테 뇌물을 준 적도 없고 단순히 동창이라서 연락한 것뿐이래. 송유라도 이미 보냈는데 지금 강하리 씨를 건드려도 자기에게 좋을 게 없다는 걸 계속 강조하더라.”구승훈은 차갑고 어두운 눈빛으로 강하리를 돌아보았다.“내가 장진영을 만나야겠어.”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몸 괜찮아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이제야 날 걱정하는 거야?”강하리는 다소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시선을 피했고 구승훈은 웃었다.“걱정 마, 의사한테 붕대 고정해 달라고 하면 상처 안 찢어질 거야.”구승재가 옆에서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강하리 앞에서 형이 이런 모습일 줄이야.구승훈은 붕대를 감으러 갔고 강하리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같이 가요.”멈칫하던 구승훈이 잠시 후 웃으며 말했다.“가서 보고 날 싫어하면 어떡해.”강하리는 당황하더니 그 말의 의미를 바로 알아챘다.“구승훈 씨, 내가 모르는 당신 모습도 있어요?”구승훈의 목울대가 잠시 일렁거리더니 그녀의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난 사람을 심문할 때 침대에서보다 훨씬 더 사나워.”강하리는 이 남자의 뻔뻔함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좀 정상적일 수는 없어요?”구승훈은 웃다가 진지하게 말했다.“하리야, 가지 마, 알았지?”그는 정말 강하리가 가지 않기를 바랐다. 그의 어두운 면을 강하리 앞에서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강하리 역시 그의 뜻을 이해했기에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다만 장진영의 몰락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해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걱정하지 마, 진짜 장진영이라면 절대 쉽게 봐주지
“당신들 이거 불법 감금이야! 날 내보내 줘! 무슨 권리로 날 가둬, 내가 한 것도 아닌데!”방문이 열리자 그녀는 구승훈을 보고 달려들었고 구승훈이 한 발짝 물러서자 장진영은 그대로 바닥에 엎어지며 아예 무릎을 꿇고 울기 시작했다.“구 대표, 정말 내가 한 게 아니야. 누가 누명을 씌웠어, 나 아니야. 유라도 갔는데 내가 강하리 모녀를 건드려서 얻는 게 뭐가 있겠어. 구 대표, 정말 내가 한 게 아니야.”구승훈이 역겨운 표정을 지으며 구승재에게 눈치를 주자 구승재는 다가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장진영을 붙잡더니 가느다란 칼날을 장진영의 목에 대었다.장진영은 온몸이 굳어버렸고 방금 전까지 울부짖으며 소리를 지르던 여자가 순식간에 창백한 얼굴로 변해 입가마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사모님, 우리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요?”장진영의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정말 내가 한 게 아니야. 구 대표, 유라도 갔는데 내가 그럴 이유가 없잖아.”구승재가 옆에서 피식 웃었다.“복수는 이유가 될 수 없나요?”장진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난 복수 안 했어, 진짜 안 했어. 구 대표, 가서 확인해 봐. 난 정말 그 사람 매수한 적 없어!”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았다.“허, 그럼 왜 그 사람한테 연락했죠?”장진영은 흠칫하며 시선을 피했다.“나는 그냥... 그냥 동창이라 연락한 것뿐이야.”장진영을 노려보는 구승훈의 눈빛이 번뜩였다.구승재의 손에 쥔 칼날이 안으로 파고들자 장진영은 비명을 질렀다.“사모님, 한 번만 더 기회를 드릴게요.”장진영의 온몸은 떨리고 있었고 자신도 모르게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정말 내가 안 그랬어...”구승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불쑥 이렇게 물었다. “지난번 인터넷에 올라온 영상은요?”순식간에 장진영의 몸은 심하게 굳어버렸고 조금 전까지 억울하던 표정도 공포로 바뀌었다.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자리에 있던 두 사람은 똑똑히 보았다.“난, 난 몰라, 무슨 영상?”구승재가 구승훈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는
구승훈은 장진영을 처리한 뒤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중환자실 문 앞에 서 있는 강하리가 의사와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구승훈은 바로 다가가지 않고 옆으로 가서 손을 씻은 뒤 강하리 곁으로 갔다. “어머님 보러 왔어? 상황은 좀 어때?” 강하리의 눈은 아직도 약간 충혈되어 있었다. 정서원의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고 의사는 최대한 에둘러 말을 전했다. 겨우 기운을 되찾았는데 지금 병상에 누워있는 그녀의 얼굴은 거의 투명할 정도로 하얗게 변해 있었다. 강하리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더니 표정을 감추며 물었다. “장진영 씨 쪽은 어떻게 됐어요?”구승훈은 강하리에게 상황을 전했고 그녀는 순간 당황했다.“그럼 우리 엄마를 납치한 사람이 정말 그 여자가 아니라고요?” 구승훈은 눈이 아주 잠깐 번뜩였다.“아직 몰라. 동영상 일도 순간적으로 물어본 거고, 정말 납치를 지시했다면 진작 준비를 했을 거야. 아직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어. 나중에 더 털어놓을 수도 있으니까 지켜보자.”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장진영 씨는 어떻게 했어요?”구승훈의 눈빛이 서늘했다.“좋은 데로 보냈어.”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 “좋은 곳 어디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먹고 자고 즐거움도 있는 곳.”구승훈은 강하리를 병동으로 다시 끌어당기며 말했다. “나 너무 피곤해서 좀 쉬고 싶어.” 말을 마친 남자는 강하리 앞에서 대놓고 옷을 벗으며 병원복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에 누우려 했고 강하리는 깜짝 놀랐다.“그쪽 병실 가서 쉬어요.”하지만 구승훈은 누워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 좀 쉬게 해줘.” 강하리는 그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차마 그를 내쫓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구승훈은 정말 피곤한 상태였다. 피도 많이 흘린 데다 수술을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 신기할 지경이었다. 침대에 누운 그는 정말 잠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강하리는 곁에 서서 그를 깨워야
둘은 오랫동안 함께 지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그녀가 피하려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입맞춤을 했고 강하리는 깜짝 놀라 그를 힘껏 밀어냈다.“구승훈 씨, 아직 양치도 안 했는데 키스를 해요?”구승훈이 웃으며 말했다.“양치 안 한 게 뭐 어때서, 다른 데도 키스했는데.”강하리는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쳐다봤다. “어디에 키스했는데요?”구승훈은 대답 대신 욕망만이 가득한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보기만 했다.이른 아침엔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닌데, 이미 잔뜩 단단해진 상태에서 이런 말을 하자 문득 자신의 어깨에 그녀의 다리를 올려놓았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남자의 목울대가 일렁거리더니 그녀의 귀에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기억나게 해 줘?”강하리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고 몸을 뒤척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내가 왜 침대에 누워 있어요?”구승훈이 웃었다.“내가 정말 널 소파에서 재울까 봐?”강하리는 시선을 돌렸다.“어젯밤 내가 발로 찬 건 아니죠?”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발로 찬 게 한두 번이야? 이미 익숙해졌어.”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곧장 화장실로 들어갔고, 들어가니 얼굴에 열기가 느껴졌다.구승훈이 방금 꺼낸 말 때문에 문득 사실이라 믿고 싶지 않은 장면들이 떠올랐다.호텔, 욕실, 세면대.흐릿한 이미지였지만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미간을 꾹 눌렀다. 설마 그날 밤 구승훈이 자신을...차마 더 생각할 수가 없었다.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조심스럽게 안을 들여다본 구승재는 이상한 장면이 보이지 않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형, 하리 씨는 어딨어?”질문을 던진 그는 구승훈이 대답하기도 전에 알아서 말을 이어갔다.“난 이제 미안해서 하리 씨 못 보겠어. 하리 씨가 이젠 나 안 믿을 것 같아. 형, 형 때문에 난 너무 많은 걸 희생했어.”구승훈은 그를 바라보다가 눈썹을 치켜올렸고 구승재가 뒤를 돌아보니 강하리가 화장실 문간에 서서 한심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
구승현!송동혁은 자신에게 만나자고 한 사람이 구승현일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눈앞에 있는 남자는 20대였지만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볼캡 모자를 쓴 그의 눈은 음침하고 불길한 기운이 가득했다.“자네가 왜 여기 있어?”그의 기억대로라면 구승현은 분명 쫓겨났는데?구승현이 웃었다.“제가 왜 여기 있으면 안 되죠?”송동혁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송유라가 구승현과 손잡고 강하리를 납치한 걸 그는 다 알고 있었다.이제 구승현이 구승훈에게 잡히면 송유라가 그 불똥을 피할 수 없을까 봐 두려웠다.“승훈이한테 들키는 게 두렵지도 않아?”구승훈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구승현의 두 눈에 매서운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구승훈이 뭐라고, 우리 집 영감이 얼마 전에 구씨 가문 권력을 전부 다 빼앗았어요. 구씨 가문이 없으면 걔가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이번에 돌아온 것도 영감탱이가 불렀어요. 구승훈 손에 있던 힘을 뺏고 날 불렀다는 건 무슨 뜻이겠어요?”송동혁은 구승현의 말을 믿지 않았다.눈 달린 사람이라면 구승훈이 구승현보다 몇 배는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구씨 가문 어르신이 장님이 아닌 이상 구승현에게 구씨 가문을 물려주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그래도 구승현이 눈앞에 나타나니 마치 탈출구가 생긴 것 같았다.그동안 그는 절망적인 상황에 내몰리고 있었다.S제약 회사의 자금 조달이 연이어 끊어졌고 그는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그러다 결국 이젠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게다가 송유라는 지금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를 더욱 끌어내리고 있었다.이런 생각에 송동혁은 후회하며 피를 토하고 싶었다.구승훈이 강하리를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줄 알았다면 애초에 강하리를 곁에 둘걸.사생아로 키워도 괜찮았다.애초에 예쁜 외모를 타고난 강하리는 구승훈과의 관계도 기정사실이 되었기에 지금처럼 그 일이 드러날까 조마조마하며 살지 않아도 되었다.하지만 이제 와서 땅을 치며
구승훈은 강하리를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도 결국 순순히 입을 다물었고 손연지는 구승훈을 보고 웃었다.구승훈은 굳어진 표정으로 두 사람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다가 모퉁이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강하리를 한 손으로 잡아당긴 뒤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오늘 밤에 보상해 줄 거야?”강하리는 순간 조금 전 당황스러운 장면이 떠올랐고 손연지가 지금 슬픈 상황에서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싶지 않았다.“가만히 있어.”구승훈의 입술이 그녀의 귀에 닿았다.“그러면 손으로만 하는 건?”남자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가로질러 그녀가 승낙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꽉 감싸자 강하리는 결국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이따가 내려가선 얌전히 있어.”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아내 말은 들어야지.”손연지는 식사 내내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식사가 끝날 무렵 강하리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노민우였다.강하리는 손연지를 바라보며 바로 전화를 끊었고 손연지는 못 본 척했지만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하지만 잠시 후 구승훈의 휴대폰도 울렸고 그는 눈썹을 치켜들며 전화를 집어 든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바깥에 도착하고 나서야 구승훈은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노민우가 아닌 노민준의 전화였고 그는 뒤를 돌아보고는 전화를 받았다.“그 주사 효과가 어때?”구승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괜찮아. 지난 이틀 동안 상태가 전보다 훨씬 안정됐어.”거짓말이 아니었다. 구승훈은 노민준이 건넨 주사를 맞고 나서부터 지난 이틀 동안 단 한 번의 이상도 느끼지 못했고 그것이 그가 오늘 유난히 기분이 좋았던 이유였다.노민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포기하지 말라고 했잖아.”짧게 대꾸한 구승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말을 마친 노민준이 잠시 멈칫했다.“참, 내 동생이 할 말이 있대.”곧이어 저쪽에서 노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승훈아, 손연지는 지금 어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네 여자를 왜 나한테 물어봐?”“승훈아, 나도 네가 강하리 씨
강하리는 사실 자신이 꽤 한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거듭되는 상처에도 수없이 용서했다.마치 구승훈이 없으면 모든 게 그대로 멈춰버릴 듯이.구승훈이 사라져도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가지만 구승훈이 없는 세상이 되어버리고 그건 그녀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또 무슨 일이 생기면 난 당해도 싸.”강하리는 손연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손연지는 다가와 강하리를 껴안았다.“구승훈 이 개자식이 전생에 우주라도 구한 거야?”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손연지의 어깨에 기대었다. 의지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위로에 가까웠다.“그러는 넌, 대체 무슨 일인데?”자기 일을 언급하자 손연지는 순식간에 흥미가 사라진 표정이었다.“별건 아니야. 사실... 하리야, 나 임신했었어.”강하리는 깜짝 놀랐다.“뭐? 그래서? 지금은 어떤데? 아기는?”손연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노민우는 다른 여자와 약혼하고 있었어. 노민우에게 말할 생각도 없었고 사실 아이도 남길 생각 없었어. 노씨 가문이나 노민우에겐 관심 없어. 40일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술하려고 했는데 그날 밤 내가 당직일 때 노민우 약혼녀가 병원에 찾아와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난동을 부렸어. 병원에서도 노씨 가문에 밉보일 수 없어서 날 해고했어.”강하리의 표정이 차가워졌다.“그러고 나서?”손연지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그리고 다음 날 아이를 지웠는데 노민우가 어떻게 알았는지 낙태한 걸 알고는 나한테 화를 냈어.”강하리의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다.노민우가 약혼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때 손연지에게 연락했을 때만 해도 그녀는 멀쩡했었다.고작 얼마나 됐다고 노민우 그 개자식이 손연지를 이렇게 힘들게 한 건지!“왜 나한테 말 안 했어?”손연지는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웃었다.“말해도 달라질 게 뭐가 있어. 그래도 노민우를 그냥 두지는 않았어. 자기가 뭐라고 나한테 화를 내? 약혼까지 했는데 내가 아이를 낳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노씨 가문에 찾아가서 업무에
강하리의 눈빛이 번쩍이며 구승훈의 말에 담긴 의미를 순식간에 알아차렸다.그가 오늘 인터넷 속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는 역할을 자처했으니 이젠 그녀가 자신을 데려가야 한다는 말이었다.강하리는 구승훈의 목에 팔을 걸고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속삭였다.“보답이라, 문제없지. 구 대표님이 우선 그 쓸데없는 여자들 먼저 해결하면!”이번 일에 진시연이 연루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석미란이 심준호에게 고소당한 이후 석연란조차 한동안 잠잠했고 그녀가 대외적으로 자신에 대한 악담을 퍼뜨릴지 몰라도 온라인에 증거를 남기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니 누가 이 모든 일을 주도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개자식, 하여간 여자가 너무 많이 꼬인다.강하리는 계속해서 구승훈과 사무실에서 꽁냥거리진 않았다.집에 손연지가 있었기에 가는 길에 백아영에게 전화를 건 강하리는 구승훈을 따라 별장으로 돌아왔다.어두운 별장을 보며 강하리는 손연지가 아직 자는 줄 알았다.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인공지능이 불을 켜자 갑자기 별장 전체가 환하게 밝아졌다.강하리가 가방을 내려놓고 손연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갑자기 구승훈이 뒤에서 안았고 곧이어 그녀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소파에 쓰러뜨렸다.강하리가 말하기도 전에 구승훈은 그녀의 입술을 막았고 남자의 손이 불순하게 그녀의 다리를 어루만졌다.“자기야, 다리 예쁘다.”강하리는 남자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챘다.이 개자식!머릿속엔 그 짓밖에 없는 건지.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그녀는 손연지에 대해 말하는 것도 잊어버렸다.“당신... 읍...구승훈은 거침없이 그녀의 스타킹을 찢어버리고는 그녀의 손을 끌어 벨트로 가져갔다.“도와줘, 자기야.”강하리의 얼굴이 화끈거렸다.“일단 기다려.”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종아리를 잡고 부드럽게 주물렀다.“못 기다려.”강하리는 그를 세게 밀었다.“아니, 내 말은...”“어머!”강하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계단 너머에서 손연지
주해찬은 다소 침울한 표정으로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아니라고 하면 믿어줄래?”주해찬은 정말 강하리에게 계속 사실을 숨길 생각도, 진시연을 도울 생각도 없었다.그냥... 강하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때 나서서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러면 강하리의 마음속 망가진 그의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아서.그런데 구승훈이 이토록 매몰차게 굴 줄은 몰랐다.아버지가 얼마나 깨끗하고 정직한 사람인지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부패한 관리들처럼 부정부패와 뇌물 수수를 일삼지는 않을 것이고 할아버지도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둘 리 없었다.하지만 부패를 철저히 타도하는 지금 같은 시기에 작은 선물을 몇 개 받은 것만으로도 큰 문제가 된다.게다가 구승훈은 그 증거를 노골적으로 인터넷에 올렸고 관련 부서에 실명으로 가차 없이 신고했다.구승훈은 결코 자신을 감추는 사람이 아니었다.그가 원하는 건 주해찬의 타협과 강하리 앞에서 완전히 신뢰를 잃는 것이었다.사실 구승훈이 처음 병원에서 그를 떠봤을 때부터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다만 줄곧 비현실적인 희망을 붙잡고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주해찬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의 완전한 패배라는 걸.“미안해, 하리야. 엄마한테 사과하라고 할게. 그리고... 인터넷에 너에 대한 루머를 유포한 것도 이모가 한 짓이야. 이모한테도 사과하라고 할게. 그리고 하리야, 내 다리...”주해찬은 말하며 심호흡하듯 잠시 멈춘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사실 거의 다 나았어.”강하리는 당황했고 주해찬은 다시 입을 열었다.“미안해. 조금만 더 나랑 같이 있어 주길 바라서, 구승훈이랑 다시 만나서 네가 또 상처받을까 봐 내가...”“선배.” 강하리가 갑자기 주해찬의 말을 가로챘다.“고마워요.”그녀가 고맙다고 말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강하리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예전에 여러 번 날 도와주고 날 이렇게 생각해 주고 지금도 날 위해 나서서 진실을
두 사람 관계에 있어서 누가 봐도 을인 모습이었다.사무실에 있던 몇몇 기자들은 서로 눈치만 봤다.에비뉴와 정안그룹이 강하리 명의로 되어 있다고?그렇다면 강하리 혼자서도 B시 재벌과 맞먹는 것 아닌가.여러 기자가 모두 멍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봤다.구씨 가문의 권력자 구승훈이 자신은 아내 덕분에 먹고 사는 놈이라고 말하다니, 그것도 제법 자랑스러워하는 듯했다.“그러면 강 대표님이 구 대표님과 송유라 씨 사이에 개입했다는 건...”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제가 우리 강 대표님과 언제 만났는지 아세요?”기자는 고개를 저었고 구승훈은 오른손 손가락으로 왼쪽 약지에 낀 반지를 살며시 돌리면서 시선을 내리깔고 웃었다.“아홉살 때 만났어요. 그 여자가... 제 삶의 유일한 구원이었죠.”구승훈은 복잡한 감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자기야, 미안해. 오랜 세월 많이 힘들었지? 오늘 여기서 맹세할게. 나 구승훈은 평생 강하리의 것이란 걸.”강하리는 화면 속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코끝이 시큰거렸다.개자식, 인터뷰만 할 것이지 왜 저런 말을 해서는.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구승훈의 말에 그녀의 마음속에 작게나마 남아있던 불편함이 말끔히 사라졌다는 걸.인터넷에 그 많은 루머들이 떠돌아다녀도 언제나 그녀를 감싸줄 사람이 있었다.구승훈의 인터뷰는 곧 화제성을 끌어모았고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댓글 창에는 축복의 글이 가득했다.강하리는 휴대폰에 달린 축복의 댓글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의 목소리에는 미소가 묻어났다.“강 대표님, 나 보고 싶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오늘 밤 일찍 돌아가서 맛있는 거 해줄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맛있는 음식만 있어?” 강하리는 멈칫했다.“또 뭘 원해?”“다리. 자기야, 한번 해보자.”강하리는 이를 갈며 그냥 전화를 끊었고 구승훈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정양철은 죽었지만 애초에 그가 강하리 어머니에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이대로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시점에 정양철과 관련된 또 다른 단서가 나올 줄이야.“확실해요?”“물론이죠.”구승훈은 전화를 끊고 심준호에게 연락했고 그와 대화를 마친 뒤 밖을 향해 말했다.“시작하지.”잠시 후 비서가 기자 10여 명을 데리고 구승훈의 사무실로 들어왔다.나문빈이 홈페이지를 정상으로 되돌리자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은 모두 SNS로 옮겨갔고 과거 여러 번 검색어에 오르며 욕을 먹었던 흑역사도 전부 밝혀졌다.SNS에서 누군가가 돈으로 사주했는지 갈수록 심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안예서는 점점 더 고조되는 SNS의 화제성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약서를 하나하나 처리하는 강하리를 보며 조금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대표님, 이걸 제대로 밝힐 방법을 찾아야겠어요.”강하리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그럴 필요 없어. 욕하다 지치면 자연스레 그만두겠지.”안예서가 다소 우울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설득하려는 그녀는 이미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안진 그룹 총괄팀장과 약속 잡아줘.”안예서는 다소 무력한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 사무실을 나섰다.그녀가 사무실을 나간 뒤에야 강하리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고 손가락이 SNS 아이콘 위에서 잠시 멈칫하다 클릭했다.하지만 들어가서 보니 그녀를 욕하는 내용은 사라지고 안예서가 말했던 것들도 전부 보이지 않았다.대신 라이브 방송 하나가 떠서 클릭해 본 강하리는 깜짝 놀랐다.구승훈이었다.뒤에 비치는 장소는 그의 사무실 같았다.남자는 검은 셔츠를 입은 채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어 손가락엔 어느새 반지를 끼고 있었다.자세히 보면 그녀가 끼고 있는 반지와 같은 모델이지만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크지 않을 뿐이었다.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에 낀 반지로 시선을 옮겼고 그 시각 왠지 모르게 인터넷에서 자신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다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졌다.무슨
구승훈은 휴대폰 메시지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밤에 보상해 줄래?]손연지가 왔다며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고 답장하려던 찰나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고 안예서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큰일 났어요.”강하리는 잠시 멈칫했다.“뭔데, 천천히 얘기해 봐.”“오늘 아침 일찍 우리 회사 홍보 사이트가 해킹됐는데 사이트에 온통 대표님이 스폰 받았다는 이상한 댓글이 가득해요.”안예서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고 강하리는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알겠어.”전화를 끊고 회사 사이트에 들어가니 그녀의 눈에 온통 적나라한 욕설들이 가득 들어왔다.스폰을 받았다는 사람도 있고 몸을 대주고 높은 자리로 올라갔다는 말도 있었다.심지어 구승훈과 송유라 관계를 그녀가 망쳤다는 사람도 있었다.송유라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녀의 팬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고 지금 JM의 사이트에도 그들이 가득했다.[내연녀는 내연녀지. 뭐라 해도 해명하지 못해.][그냥 내연녀도 아니고 몸 팔아서 JM 파트너 자리를 꿰찼는데 역겹지도 않아?][JM은 유엔 산하의 번역 회사인데 저런 사람이 대표야?][허, 어떻게 그 자리로 올라갔는지 누가 알겠어. 또 유엔에 어느 높으신 분을 모셨겠지.]강하리는 댓글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해버렸다.심호흡하고 안으로 들어가 손연지에게 설명한 뒤 회사로 차를 몰고 가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겠다.차 안에서 핸들을 잡은 강하리는 문득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이번에도 누가 자신을 노린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어제의 사건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나머지는 진태형의 해명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보아하니 상대는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곧장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안예서가 반갑게 맞이했다.“대표님, 괜찮으세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리는 차 안에서 잠든 손연지를 바라보다가 노민우의 전화를 받았고 노민우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안함이 묻어났다.“강하리 씨, 손연지한테 연락이 왔어요?”“나랑 같이 있는데 무슨 일 있어요?”노민우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금은 나랑 얘기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같이 있어 줘요.”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말을 꺼냈다.“노민우 씨, 연지는 잘 우는 사람이 아닌데 내가 공항에 데리러 갔을 때 밤새 운 것 같았어요. 그쪽이 무슨 사정이 있든 연지를 이렇게 울렸으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설명해야 할 거예요.”노민우가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으면 연성으로 찾아갈 기세로 강하리는 유난히 단호하게 말했다.노민우는 다소 억울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답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손연지한테 다 설명할게요.”강하리는 손연지를 데리고 그녀와 구승훈의 저택으로 향했고 비몽사몽 눈을 뜬 손연지는 눈앞에 가득 찬 리시안셔스와 정원 뒤편에 있는 성처럼 생긴 저택 건물을 보았다.“세상에, 하리야. 여기가 너 사는 곳이야?”강하리는 그녀의 모습에 비로소 살짝 안도했다.“그런 셈이지.”손연지는 차 문을 열고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위층과 아래층을 몇 번이나 돌아보더니 갑자기 나와서 강하리를 껴안았다.“자기, 날 먹여 살려줘. 마침 나도 일자리 잃었는데.”강하리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옅어졌다.“일자리를 잃었다니 무슨 말이야?”손연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떴던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우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직업도 없고 일자리도 잃었어. 부모님도 나 때문에 창피당했고.”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렸고 손연지가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었기에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었다.“괜찮아, 내가 복수해 줄게.”손연지는 코끝이 시큰거렸다.“하리야, 역시 너밖에 없어. 개자식들은 하나같이 나쁜 놈들이야!”강하리는 손연지를 껴안고 위로하듯 속삭였다.더 이상 구체적인 질문은 하지 않은 채 객실로 데려가 샤워할 수 있도록 욕조
구승훈은 잠든 강하리의 얼굴을 보며 참지 못하고 다가가 입술에 뽀뽀했다.“자기야, 미안해.”강하리의 속눈썹이 두 번 파르르 떨리더니 굳게 감고 있던 그녀의 눈가가 시큰거렸다.구승훈은 오늘도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강하리를 껴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 줄이야.겨우 반쯤 잠이 들었을 때 문득 강하리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구승훈, 나도 당신을 지켜주고 싶어.”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대로 꿈속으로 빠져들어 갔다.다음 날 아침, 강하리가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손연지였다.슬쩍 확인한 강하리가 서둘러 전화기를 집어 들자 저쪽에서 손연지의 코 막힌 소리가 들려왔다.“하리야, 이틀만 거기로 놀러 가도 돼?”강하리는 당황했다.“당연하지. 언제 오는데? 내가 데리러 갈게.”“나 지금 B시에 있어.”강하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구승훈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자기야, 방금 남은 인생의 행복을 자기 손으로 망칠 뻔한 거 알아?”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빨개졌다.“구승훈, 괜찮아?”구승훈이 그녀의 턱을 잡고 입술을 깨물었다.“안 괜찮아. 강 대표님이 호 불어줘.”농담하는 걸 보니 괜찮나 보다.“그러게 누가 함부로 뻗으래.”구승훈은 웃으며 그녀의 귀로 다가갔다.“오늘 밤 다리로 해볼까?”강하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좀 진지하게 굴 수는 없어?”구승훈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망가졌는지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어?”강하리는 손연지 때문에 그와 더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침대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향했다.“손연지, 너 지금 어디 있어?”“아침부터 내 앞에서 애정행각 벌이는 건 좀 아니지 않니?”농담이었지만 손연지의 기분은 여전히 좋지 않았기에 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손연지가 강하리에게 위치를 보냈고 강하리는 서둘러 샤워를 마친 뒤 문을 나섰다.구승훈이 그녀와 동행하려는데 구승재가 갑자기 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