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일 있으면 연락해.”강하리는 대답을 하고 병동을 나섰다.그녀가 막 엘리베이터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안에서 가 나온 사람은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 몇 명과 근엄한 노인이었다.생활한복을 입고 지팡이를 짚은 노인은 바로 구씨 가문 어르신, 구동근이었다.그 옆에는 젊은 여자도 있었는데 스물다섯, 여섯 살로 보이는 그녀는 예쁜 외모에 우월한 분위기를 자랑했다.여인은 강하리를 살며시 훑어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할아버지, 승훈 오빠가 저를 반기지 않으면 어떡해요?”구동근의 눈엔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그러기만 해봐, 내가 그 자식 혼내야지!”여자의 입가에 번진 달콤한 미소가 유난히 교태를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안 돼요, 때리게 둘 수는 없죠.”강하리는 그 순간 이 여자의 정체를 알아챘다. 구씨 가문에서 구승훈에게 찾아준 맞선 상대겠지.입술을 달싹이며 옆에 서 있던 그녀의 마음이 저릿했다.진작 생각했어야 하는데, 구씨 가문에서 구승훈의 결혼을 재촉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다.지난해 그의 생일부터 구동근은 한차례 주선한 적이 있었지만 결국 구승훈에 의해 무산되었다.이번에도 같은 수법인 것 같은데 그녀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내색은 안 해도 마음이 말이 아니었다.구승훈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했지만 마음의 응어리는 풀리지 않았다.그들 사이에는 너무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언제 귀국할지 모르는 송유라와 이젠 집안에서 주선한 맞선 상대에 그녀는 안중에도 없는 구씨 가문 사람들까지.강하리는 가슴 속 답답함을 숨기며 한숨을 내쉬고 병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구동근의 매서운 눈빛이 문득 그녀의 뒷모습에 향했고,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에는 혐오감을 감추려는 노력조차 없었다.…손연지가 아침 식사 2인분을 손에 들고 들어왔다.“어때, 구승훈은 일어났어? 심각하게 다친 거야? 팥죽 주문했는데 네가 갖다줄래?”강하리는 음식을 건네받으며 애써 웃었다.“고마워.”그녀의 안색이 어두워 보이자 손연지가
이어서 구승훈의 목소리가 들렸다.“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저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구승훈, 네가 재주 좀 부린다고 내가 널 못 건드릴 줄 알아?”바로 이어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할아버지, 화내지 마세요. 승훈 오빠도 말만 그렇게 하는 거예요. 오빠, 할아버지 화나게 하지 마요. 어제도 오빠 때문에 고혈압 오셨어요.”듣다 못 한 강하리는 문 앞 창턱에 죽을 놓고 곧장 뒤돌아 떠났다.병실로 돌아왔을 때는 의사 선생님도 교대를 마친 뒤였다.중환자실 밖에서 강하리는 의사가 진찰을 마치고 내부에서 나올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고 의사는 강하리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강하리 씨, 진료실 가서 얘기하시죠.”강하리의 심장이 철렁하며 양옆으로 드리운 손에 힘이 들어갔다.의사를 따라 진료실로 들어가자 상대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이어갔다.“어머니 상태가 좋지 않아요.”강하리의 심장이 순식간에 바닥을 치는 것 같았다.“어떻게, 어떻게 안 좋으신데요?”의사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막 깨어나셨을 때 이미 몸의 여러 장기가 각기 서로 다른 정도로 망가졌으니 평소에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죠. 그런데 전에 재활 기계에서 넘어진 후에 대량의 안정제를 투여받았어요. 그 정도 양이면 어머니 같은 분은 말할 것도 없고 정상인도 견디지 못하죠. 이미 투석을 하고 있지만 장기부전이 계속 악화되고 있어요. 강하리 씨,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이런 식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밖에 없고 기적이 다시 나타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멍하니 듣고 있던 강하리는 얼핏 보기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엄청난 고통 뒤엔 무뎌지기 마련이다.이제 곧 밝은 나날을 맞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충분히 노력했는데 무심한 하늘은 그녀가 잘 살길 바라지 않는 듯싶다.그녀의 손에 모든 걸 다 쥐여주고서 또다시 잔인하고 매정하게 다시 빼앗아 간다.강하리는 자신이 어떻게 진료실에서 나왔는지, 어떻
간단한 한마디가 강하리의 거짓된 평온함을 무너뜨리는 날카로운 무기가 된 듯했다.순식간에 그녀의 모든 강인함이 무너졌다.맨발로 침대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더니 그의 무릎에 고개를 묻고 낮은 소리로 흐느꼈다.구승훈의 눈에도 안타까움이 가득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울게 내버려뒀다.그녀의 울음이 잦아들고 나서야 그는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강하리는 왠지 불편한 마음에 붉어진 눈으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시간 없는 줄 알았는데.”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시간이 없어도 너를 위해서라면 낼 수 있어.”강하리는 한참 입술을 다물고 있다가 물었다.“아까 그 여자 집안에서 결혼 주선해 준 사람인가요?”구승훈은 피식 웃더니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질투해?”강하리는 그의 손을 치웠다.“질투할 게 뭐가 있어요.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닌데.”구승훈이 그녀를 확 끌어당겨 고개를 파묻더니 그녀의 목덜미를 파득 깨물었다.“지금은 아무 사이가 아니라도 나중엔 다를 수도 있지!”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미 송유라 한 명 때문에 충분히 힘들었는데 이젠 정서원마저 그녀 때문에 더 힘들어졌다.송유라보다 더 훌륭한 집안과 구씨 가문 사람들의 반대에 그녀처럼 힘없는 사람이 과연 그들과 싸울 수 있을까?구승훈 단번에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다.다시 물러서려는 그녀를 보며 남자의 얼굴이 말없이 어두워졌다.그는 여자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자신은 기회를 잡기 위해 그렇게 오랫동안 노력했는데 그녀는 이대로 한 순간에 물러나겠다고?어림도 없지.그는 강하리의 허리를 붙잡았고 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대로 안아 들고 휠체어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갔다.다리를 뻗어 병실 문을 발로 차고 돌아선 다음 곧바로 침대에 눕혔다.“구승훈 씨, 미쳤어요?”“강하리, 정말 상관없다면 그냥 날 밀어내.”말을 마친 구승훈은 한껏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녀의 앞섬을 열고 고개를 숙여 입
“누구요?” 강하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구승재는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돌아보았다.“아마 장진영인 것 같아요. 아주머니를 납치한 주범이 장진영 고등학교 동창이고, 얼마 전에 둘이 연락을 주고받았어요.”구승훈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장진영과 송동혁은 어디 있어?”“송동혁은 회사 일로 바빠서 한동안 얌전히 지내면서 여기저기서 투자를 받고 있어. 장진영은 우리가 데려왔는데 계속 울면서 그 사람한테 뇌물을 준 적도 없고 단순히 동창이라서 연락한 것뿐이래. 송유라도 이미 보냈는데 지금 강하리 씨를 건드려도 자기에게 좋을 게 없다는 걸 계속 강조하더라.”구승훈은 차갑고 어두운 눈빛으로 강하리를 돌아보았다.“내가 장진영을 만나야겠어.”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몸 괜찮아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이제야 날 걱정하는 거야?”강하리는 다소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시선을 피했고 구승훈은 웃었다.“걱정 마, 의사한테 붕대 고정해 달라고 하면 상처 안 찢어질 거야.”구승재가 옆에서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강하리 앞에서 형이 이런 모습일 줄이야.구승훈은 붕대를 감으러 갔고 강하리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같이 가요.”멈칫하던 구승훈이 잠시 후 웃으며 말했다.“가서 보고 날 싫어하면 어떡해.”강하리는 당황하더니 그 말의 의미를 바로 알아챘다.“구승훈 씨, 내가 모르는 당신 모습도 있어요?”구승훈의 목울대가 잠시 일렁거리더니 그녀의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난 사람을 심문할 때 침대에서보다 훨씬 더 사나워.”강하리는 이 남자의 뻔뻔함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좀 정상적일 수는 없어요?”구승훈은 웃다가 진지하게 말했다.“하리야, 가지 마, 알았지?”그는 정말 강하리가 가지 않기를 바랐다. 그의 어두운 면을 강하리 앞에서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강하리 역시 그의 뜻을 이해했기에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다만 장진영의 몰락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해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걱정하지 마, 진짜 장진영이라면 절대 쉽게 봐주지
“당신들 이거 불법 감금이야! 날 내보내 줘! 무슨 권리로 날 가둬, 내가 한 것도 아닌데!”방문이 열리자 그녀는 구승훈을 보고 달려들었고 구승훈이 한 발짝 물러서자 장진영은 그대로 바닥에 엎어지며 아예 무릎을 꿇고 울기 시작했다.“구 대표, 정말 내가 한 게 아니야. 누가 누명을 씌웠어, 나 아니야. 유라도 갔는데 내가 강하리 모녀를 건드려서 얻는 게 뭐가 있겠어. 구 대표, 정말 내가 한 게 아니야.”구승훈이 역겨운 표정을 지으며 구승재에게 눈치를 주자 구승재는 다가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장진영을 붙잡더니 가느다란 칼날을 장진영의 목에 대었다.장진영은 온몸이 굳어버렸고 방금 전까지 울부짖으며 소리를 지르던 여자가 순식간에 창백한 얼굴로 변해 입가마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사모님, 우리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요?”장진영의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정말 내가 한 게 아니야. 구 대표, 유라도 갔는데 내가 그럴 이유가 없잖아.”구승재가 옆에서 피식 웃었다.“복수는 이유가 될 수 없나요?”장진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난 복수 안 했어, 진짜 안 했어. 구 대표, 가서 확인해 봐. 난 정말 그 사람 매수한 적 없어!”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았다.“허, 그럼 왜 그 사람한테 연락했죠?”장진영은 흠칫하며 시선을 피했다.“나는 그냥... 그냥 동창이라 연락한 것뿐이야.”장진영을 노려보는 구승훈의 눈빛이 번뜩였다.구승재의 손에 쥔 칼날이 안으로 파고들자 장진영은 비명을 질렀다.“사모님, 한 번만 더 기회를 드릴게요.”장진영의 온몸은 떨리고 있었고 자신도 모르게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정말 내가 안 그랬어...”구승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불쑥 이렇게 물었다. “지난번 인터넷에 올라온 영상은요?”순식간에 장진영의 몸은 심하게 굳어버렸고 조금 전까지 억울하던 표정도 공포로 바뀌었다.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자리에 있던 두 사람은 똑똑히 보았다.“난, 난 몰라, 무슨 영상?”구승재가 구승훈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는
구승훈은 장진영을 처리한 뒤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중환자실 문 앞에 서 있는 강하리가 의사와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구승훈은 바로 다가가지 않고 옆으로 가서 손을 씻은 뒤 강하리 곁으로 갔다. “어머님 보러 왔어? 상황은 좀 어때?” 강하리의 눈은 아직도 약간 충혈되어 있었다. 정서원의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고 의사는 최대한 에둘러 말을 전했다. 겨우 기운을 되찾았는데 지금 병상에 누워있는 그녀의 얼굴은 거의 투명할 정도로 하얗게 변해 있었다. 강하리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더니 표정을 감추며 물었다. “장진영 씨 쪽은 어떻게 됐어요?”구승훈은 강하리에게 상황을 전했고 그녀는 순간 당황했다.“그럼 우리 엄마를 납치한 사람이 정말 그 여자가 아니라고요?” 구승훈은 눈이 아주 잠깐 번뜩였다.“아직 몰라. 동영상 일도 순간적으로 물어본 거고, 정말 납치를 지시했다면 진작 준비를 했을 거야. 아직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어. 나중에 더 털어놓을 수도 있으니까 지켜보자.”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장진영 씨는 어떻게 했어요?”구승훈의 눈빛이 서늘했다.“좋은 데로 보냈어.”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 “좋은 곳 어디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먹고 자고 즐거움도 있는 곳.”구승훈은 강하리를 병동으로 다시 끌어당기며 말했다. “나 너무 피곤해서 좀 쉬고 싶어.” 말을 마친 남자는 강하리 앞에서 대놓고 옷을 벗으며 병원복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에 누우려 했고 강하리는 깜짝 놀랐다.“그쪽 병실 가서 쉬어요.”하지만 구승훈은 누워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 좀 쉬게 해줘.” 강하리는 그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차마 그를 내쫓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구승훈은 정말 피곤한 상태였다. 피도 많이 흘린 데다 수술을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 신기할 지경이었다. 침대에 누운 그는 정말 잠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강하리는 곁에 서서 그를 깨워야
둘은 오랫동안 함께 지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그녀가 피하려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입맞춤을 했고 강하리는 깜짝 놀라 그를 힘껏 밀어냈다.“구승훈 씨, 아직 양치도 안 했는데 키스를 해요?”구승훈이 웃으며 말했다.“양치 안 한 게 뭐 어때서, 다른 데도 키스했는데.”강하리는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쳐다봤다. “어디에 키스했는데요?”구승훈은 대답 대신 욕망만이 가득한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보기만 했다.이른 아침엔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닌데, 이미 잔뜩 단단해진 상태에서 이런 말을 하자 문득 자신의 어깨에 그녀의 다리를 올려놓았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남자의 목울대가 일렁거리더니 그녀의 귀에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기억나게 해 줘?”강하리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고 몸을 뒤척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내가 왜 침대에 누워 있어요?”구승훈이 웃었다.“내가 정말 널 소파에서 재울까 봐?”강하리는 시선을 돌렸다.“어젯밤 내가 발로 찬 건 아니죠?”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발로 찬 게 한두 번이야? 이미 익숙해졌어.”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곧장 화장실로 들어갔고, 들어가니 얼굴에 열기가 느껴졌다.구승훈이 방금 꺼낸 말 때문에 문득 사실이라 믿고 싶지 않은 장면들이 떠올랐다.호텔, 욕실, 세면대.흐릿한 이미지였지만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미간을 꾹 눌렀다. 설마 그날 밤 구승훈이 자신을...차마 더 생각할 수가 없었다.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조심스럽게 안을 들여다본 구승재는 이상한 장면이 보이지 않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형, 하리 씨는 어딨어?”질문을 던진 그는 구승훈이 대답하기도 전에 알아서 말을 이어갔다.“난 이제 미안해서 하리 씨 못 보겠어. 하리 씨가 이젠 나 안 믿을 것 같아. 형, 형 때문에 난 너무 많은 걸 희생했어.”구승훈은 그를 바라보다가 눈썹을 치켜올렸고 구승재가 뒤를 돌아보니 강하리가 화장실 문간에 서서 한심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
구승현!송동혁은 자신에게 만나자고 한 사람이 구승현일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눈앞에 있는 남자는 20대였지만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볼캡 모자를 쓴 그의 눈은 음침하고 불길한 기운이 가득했다.“자네가 왜 여기 있어?”그의 기억대로라면 구승현은 분명 쫓겨났는데?구승현이 웃었다.“제가 왜 여기 있으면 안 되죠?”송동혁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송유라가 구승현과 손잡고 강하리를 납치한 걸 그는 다 알고 있었다.이제 구승현이 구승훈에게 잡히면 송유라가 그 불똥을 피할 수 없을까 봐 두려웠다.“승훈이한테 들키는 게 두렵지도 않아?”구승훈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구승현의 두 눈에 매서운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구승훈이 뭐라고, 우리 집 영감이 얼마 전에 구씨 가문 권력을 전부 다 빼앗았어요. 구씨 가문이 없으면 걔가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이번에 돌아온 것도 영감탱이가 불렀어요. 구승훈 손에 있던 힘을 뺏고 날 불렀다는 건 무슨 뜻이겠어요?”송동혁은 구승현의 말을 믿지 않았다.눈 달린 사람이라면 구승훈이 구승현보다 몇 배는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구씨 가문 어르신이 장님이 아닌 이상 구승현에게 구씨 가문을 물려주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그래도 구승현이 눈앞에 나타나니 마치 탈출구가 생긴 것 같았다.그동안 그는 절망적인 상황에 내몰리고 있었다.S제약 회사의 자금 조달이 연이어 끊어졌고 그는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그러다 결국 이젠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게다가 송유라는 지금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를 더욱 끌어내리고 있었다.이런 생각에 송동혁은 후회하며 피를 토하고 싶었다.구승훈이 강하리를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줄 알았다면 애초에 강하리를 곁에 둘걸.사생아로 키워도 괜찮았다.애초에 예쁜 외모를 타고난 강하리는 구승훈과의 관계도 기정사실이 되었기에 지금처럼 그 일이 드러날까 조마조마하며 살지 않아도 되었다.하지만 이제 와서 땅을 치며